420자 키워드 보지마


카이토는 저녁동안 줄곧 거울을 보고 있었다.
공장에서 찍어낸 기성품의 얼굴은 여느 각도로 돌려봐도 모니터 화면속의 카이토와 똑같은 모습이다. 형광등 불에 빛 바랜 머리색은 모니터에서 찬란히 빛나는 새파란 색이 아니라는 것 만이 사용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기본적인 표정으로 웃었다가. 무표정을 지었다가. 찡그려본다. 기분이 좋지 않지만 웃는것이나, 기분이 좋아서 웃는것이나 지정된 것 이외의 근육은 움직이지 않는다. 눈 안의 마스터는 베란다 문을 연채로 담배를 세 대째 뿜어댄다. 뻑뻑 피어들어오는 담배연기에 카이토는 콜록대며 손에 든 거울로 얼굴을 가렸다. 

"아우, 담배는 좀 문 닫고 피세요."
"싫은데-."

일부러 바람에 후, 하고 연기를 실어보내고는 마스터는 킥킥웃었다. 거울은 봐서 뭐해. 
나른한 눈빛으로, 저것도 카이토에게는 구현하기 불가능한 표정이었다. 눈을 반쯤 감은채로 눈썹을 내리고 살짝 웃은 미소. 흉내를 내보려다 이내 그저 7번의 웃음을 짓는다.

"부럽네요."
"담배피는게?"

그것도, 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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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카이 키워드 [필요 없어]


눈을 뜨자 집은 조용했다. 잠들기 전 새벽까지 마스터는 두근거림에 알림없는 휴대폰을 놓지 못하고 앨범을 돌려보았다. 이쁘지. 정말 이쁘지? 수백번은 물었을 질문에 나는 응, 6월의 신부님은 아름답네요. 하고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마스터가 사랑하는 그녀는 아름답지는 않지만, 아름다웠다. 사진속의 마스터와 그녀는 둘로 완벽한 하나가 되어 내가 끼어들 장소 같은건 없다. 마스터는 얄팍하게 잠시나마 눈을 붙이기 전까지 정말 결혼식에 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겁이 나 먼저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기로 한다. 


"제가 가서 뭘하나요. 제가 필요하지 않는 곳인데."

어깨동무하는 손을 떼내려다, 이것도 마지막 일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예감에 어깨를 누르는 무게를 내버려 둔다. 머릿속에서 바라지 않는 장면이 줄곧 떠올라, 눈을 감고 귀를 막은채 영원히 반복되는 듣지않은 마스터의 말 속에 새벽이 흘러가지 않기를 하잘없이 바라며 밝은 아침엔 '나의 것' 이라고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나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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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카이유정>> 너무 상냥해 

문득 유정은 카이토가 남자의 성격을 기반으로 만든 안드로이드 인 것을 생각하면, 과도하게 상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 모든 카이토들은 자신의 오피스텔의 저것 처럼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모양으로 마스터들에게 헌신하는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마찬가지로 저도 다른 카이토를 본 적이 없어서요. 유정이 내일 입을 셔츠를 다리던 카이토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그렇게 상냥한 편인가요. 퉁명스럽게 뱉었지만 내심 숨어있는 칭찬을 눈치 챈 카이토는 슬슬 웃으며 남은 다림질을 했다. 

“저라도 상냥하지 않으면 힘들겠죠.”
“마냥 칭찬은 아닌데.”

그렇게 헌신적으로 해주다 보면 자신이 없어지기 마련이야. 무릎 꿇은 발가락을 꼼지락대는 것을 쳐다보던 유정은 받은 셔츠를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뜨끈한 스팀에서 은은한 유연제의 향이 난다. 생각해보니 이미 카이토에게 자신이란건 없는거나 마찬가지 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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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카이>>

키워드 : 날 사랑하게 만들거야

 

드라마를 보던 중이었다. 한 번 놓치면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다고 중간에 포기하기 십상이었는데, 어떻게든 시간을 맞추어 보게 되었던 것의 하일라이트 장면이었다. 주인공 커플이 오글거리는 대사를 하며 키스신을 하는것을 함께보고 있자니 등 뒤가 서늘하다. 소름돋네요. 막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팔꿈치로 어깨를 툭, 쳤다. 

"...날 사랑하게 만들거야..."
"네에???"
"응?"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며 드라마에 집중하느라 그는 카이토가 옆에서 눈이 튀어나올듯이 쳐다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왜, 무슨말 했어? 여전히 눈은 TV에서 헤어나올줄을 몰랐다. 그렇지만 옆에서 아, 저. 그, 그게 아니라. 하며 벌게진 얼굴을 숙이고 있는 카이토를 보자 그는 어떤 추측을 했다.

"너한테 한 얘긴 줄 알았어?"
"지금 둘 밖에 없는데, 그럼..그걸.."

“드라마에 집중해, 나 말고.”
눈을 떼지 않은채로 볼을 가져가자 카이토는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입을 맞추었다. 화면을 가리고서 그들처럼 키스하고픈 충동을 참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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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브카이 키워드 < 아무데도 가지마>

 

그의 손에 이끌려 어딘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방방일까 조차 의심스러운 곳에 들어온 지 삼 일째가 지나가고 있었다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자그마한 창문이 비정상적으로 나있었다그의 집에 가자고 한걸 보면 이 곳은 그 남자의 집일 텐데어쩐지 아무런 가구도 없는 방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삼일 동안 카이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죄를 반복했다늘 했던 것처럼 벽에 머리를 부듸치자 한 참 뒤에 돌아온 희미한 시선 속의 그는 고개를 저으며 피가 말라붙은 이마를 소독하고따끔거려 움찔거리는 카이토를 보고 살짝 웃었다빳빳한 붕대를 감자 머리가 욱신거렸다그의 손은 벌레가 기어가듯 혐오스러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미약하게 발버둥치며 우는 것 뿐이란 것을 카이토는 인정하기로 했다.

 

계속 침이 흐르네...진짜 다 망가진 거 아닌가?”

아우우.....”

 

머릿속에서는 온갖 저주의 말이 떠오르는데입을 열자 나오는 건 어린아이 같은 옹알이가 전부였다하고 싶은 말이 중첩되고 중첩되어 머릿속이 거멓게 흐려졌다가그가 얼굴이라도 만질라 싶으면 새하얗게 갠다눈동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해서 그는 카이토가 망가진 모니터를 송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턱받이라도 해줘야 하나...여기봐좀 닦자.”

...”

 

입에 가져간 손가락을 물자 그는 반사적으로 목 뒤를 찰싹 때렸다손가락에는 잇자국이 선명했다침이 흥건하게 더럽혀진 손가락으로 카이토의 입 안을 헤집자 발버둥은 더욱 심해졌다바지를 입지 않은 아래쪽에서 물이 새어나왔다목구멍을 건드리자 카이토는 켁켁거리며 기침을 했다옷을 갈아입지 못해서 엉망진창에얼굴은 닦지 못한 눈물과 긁고 부듸쳐서 붉고 파란 멍이 피부색보다 더 많이 보일 지경이었다혀를 내밀자 질척이는 바닥에 침이 뚝뚝 떨어졌다티셔츠에 손을 닦자 카이토는 여전한 경계태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이 눈빛을 카이토의 마스터라는 자가 보았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아마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가만히 있어이거 진짜 처음부터 다시 교육해야겠네..못된 강아지는 벌을 받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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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마스카이 키워드 <바보같은 정직함>

 

어디 뒀어싱긋 웃으며 카이토를 바라보았다그러니까내가 어제 먹으려고 사놓은 아이스크림 어디다 뒀냐구똑같은 질문을 어투만 바꿔서 물어 본지가 삼십분이다장난스레 물었던 처음과 달리 웃는 눈에서는 먹지 못한 아이스크림에서 나올 법 한 서슬퍼런 냉기가 피어올랐다.

 

맨날 너 먹이느라 한 번도 못먹어 본 내 아이스크림..어디 갔냐고.”

 

답은 이미 눈앞에 안절부절 못하는 카이토로 결정 나 있었다둘만이 사는 집에 도둑이 들어와 아이스크림만 먹고 갈 리도 없을 테니 말이다먹고싶어서 먹었다는 한 마디면 용서 해 주려고 했는데 우물쭈물 하며 카이토는 줄곧 고개숙인 채였다잘못 한 건 아는지 쇼파에서 조용히 내려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마스터는 이를 으득이며 볼을 잡아당겼다얼마 전까지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고 있었을 말랑한 볼이 손에 가득 잡혔다.

 

너 나 답답해서 죽는 거 볼 거야먹었잖아!! 인정하라고!!!”

아악!!! !!! 죄송해여!!”

귀찮게 하네정말먹었으면 먹었다고 하라고죽고 싶어?”

아여...나주세여..제송해여..”

 

아휴한숨을 쉬고 손을 떼자 카이토는 얼얼한지 볼에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채찍을 주었으니 이젠 당근을 줄 차례였다.

 

그래왜 솔직하게 말 안했어내가 먹었다고 널 때리겠니어쩌겠니..”

..그치만마스터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봐..”

 

카이토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그럼 먹질 말든지하는 허탈한 문장이 떠올랐지만 풀 죽은 강아지처럼 축 처진 눈을 하는 카이토에게 나는 안기라는 투로 팔을 벌렸다.불이 켜진 듯 밝아진 표정으로 품에 커다랗게 안겨서는 어깨에 고개를 부볐다.

 

..마스터 너무좋아요다시는 안 뺏어먹을게요.”

먹어도 되는데말을 하라고거짓말을 못한다고 말을 안 하면 어떡하니.”

 

바보야살짝 머리를 쥐어박자 카이토는 눈을 바라보고 바보같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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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아]

 

마스터가 회사 연수를 떠난 지 사흘째나는 방안에서 장판에 달라붙어 죽어가고 있었다.마스터가 없는 텅 빈 집을 지키는 건 힘든 일이다어딜 가도 마스터와 함께 했던 자리라서나는 일주일도 안 된 생생한 메모리를 돌려보며 혼자서 울적하게 창문을 바라보다 무심코 콧잔등에 떨어지는 물기를 닦아낸다햇빛이 밝은 화창한 날이라 마스터와 함께 산책을 가면 좋았을 텐데혼자서는 노래를 불러도 허공에 혼잣말 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하나도 신나지 않아서 노랫말은 점점 잦아들었다.

 

마스터가 보고 싶어 죽어버릴 것 같아..”

 

이런 감정은 차라리 사라져 버리면 좋을 텐데정의하기 힘든 그리움과 텅 빈 자리에는 잦아든 노랫말의 무덤에 나는 기도한다마스터도 나와 같은 무덤 아래 당신만의 감정을 묻어두고 있다고떨어져 있지만 같은 곳에서 기도 하고 있다면 지금은 울고 있지만눈물의 무덤은 아깝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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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만의 하루

짧은것 2014. 9. 9. 17:07

둘만의 하루

 

노크를 하려다 말고 카이토는 침을 삼켰다. Luka. 귀여운 글씨체로 달린 문패를 보다 한숨을 쉬었다. 루카. 루카씨? 루카양. 해야 할 이야기를 몇 번이고 머릿속에 정리 해봐도 마땅한게 없었다. 같은 집에 산 지 일 년이 넘도록 카이토는 직접적으로 루카에게 말을 건 일이 없다. 항상 은연중에 마스터의 중간 다리를 건너서 마스터와 셋이 있을 때만 맞장구를 쳐주는 정도였다. 여자아이니까 특별대우랍시고 방을 만들어준 마스터는 여성스러운 분위기의 루카를 좋아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예뻤으니까.

 

. 저기. 루카.”

 

문을 두드리자 포니테일로 분홍빛 머리를 올려 묶은 루카가 문을 빠끔히 내밀었다.

카이토가 찾아오다니. 흔치 않은 일에 루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이토를 쳐다보았다. 평상복으로 입은 간단한 티셔츠도 여성스러운 몸매를 부각시켰다. 눈을 굴리며 우물쭈물하는 카이토 대신 루카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으아아...오라버니라고 하지 마. ..그냥 오빠라든지. 말 놓아도 되고. 어짜피 설정나이고. 우리는 크지도 않으니까...!”

제 마음이에요. 그보다 무슨 일이세요?”

! . 그게.....그러니까아.”

아유..답답해라. 오래 걸리세요? 제 방에 들어오기 그러시면 잠시 거실에 나가서 이야기 할까요?”

으응, 고마워.”

 

루카는 잠시 방에 들어가 의자에 걸려있던 가디건을 입고 종종거리며 거실로 걸어갔다. 평소엔 마스터, 마스터. 하면서 마스터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카이토가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았는지 궁금했다. 쇼파에 앉아서도 한참을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카이토는 미안하지만, 역시 조금 모자라 보인다. 처음 성격 설계가 저렇진 않았을 텐데.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뛰어가다 아무 장애물도 없는 바닥에서 넘어지는 건 아무리봐도 문제가 있어보였다. 마스터는 바보같다며 낄낄거렸지만, 루카는 바보커플-마스터와 카이토-의 행각을 볼때마다 뱃속에서 무언가가 막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만 다섯 번째...그만 하고 말씀해 주세요. 그러니까 라고 한 번만 더하면 그냥 방에 들어갈래요.”

으앗. 미안해! 그게.., 그거. 알아? 일주일 뒤가 마스터 생일이야.”

알아요. 저는 재작년에 마스터 생일 선물로 집에 온 것이니까요.”

헤헤. 그렇지...그래서, 선물을 사주고 싶은데. ..같이...”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모기소리처럼 작아졌다. 답답해. 루카는 카이토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노래를 부르다가 음이 탈만 일어나면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악보를 든 손을 벌벌떠는 심약한 남자. 그런데 마스터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건 여자아이를 대하는 친절함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것이어서 딱히 부러울 것은 없었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루카는 마스터와 카이토를 바보커플이라고 혼자서 지칭했다.

 

같이 갈수 있느냐고요? 좋아요. 저도 마스터께 생일선물을 사드리고 싶어요.”

, 고마워! 그럼. 그럼...시간은 루카가 편..편한대로..내가 맛있는 파르페 사줄게. 그리고-”

내일 11시에 출발하죠. 파르페는 안 사주셔도 돼요. 저는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럼.”

 

팔짱을 끼고 자리를 나서자 카이토는 주인 잃은 강아지같은 눈빛을 루카에게 쫓아갔다. 하지만 뒤돌아 바라보자 금방 꼬리를 감추고 제 방이자 마스터와 함께 쓰는 작업실로 쪼르르 들어가 버렸다. 루카는 잠에 들기전 마음속으로 내일 화 내지 않기. 목표를 설정하고 눈을 감았다. 카이토와 단 둘이 있게 된건 처음이었다. 마스터를 통하지 않고 말을 해본 것도. 빤히 바라보자 벌게진 얼굴을 숙이던 숫기없는 모습.

 

예상대로 바보 같아.’

 

내일 어떤 옷을 입을까 하는 생각으로 몇 개를 떠올린 후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

 


 

*



 

루카는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았다. 1030. 하필이면 머리가 제대로 손질되지 않아서 한참을 빗질하다보니 입을 옷을 고를 시간이 부족했다. 너무 화려한 걸입으면 괜히 멋부렸다고 생각 할까? 아마 카이토는 마스터가 사준 티셔츠중 아무 것을 골라 입고 나갈텐데. 혼자서 너무 차려입으면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다고 수수한걸 입으면 그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옷장을 뒤지고 뒤져도 마땅한 것이 없다. 한참을 입고 벗기를 반복하다가 하얀 블라우스와 분홍 꽃무늬 스커트를 골랐다. 말아 내린 머리에 흰색레이스가 달린 머리띠를 끼고, 잘 하지 않는 코랄색 립스틱을 바르자 마음에 들게 화사했다. 자그마한 핸드백을 챙겨 문을 열자 코 앞에 카이토가 불쑥 나타났다.

 

..놀랬잖아요. 문 앞에서 뭐하시는 거예요?”

..그게.. 기다리고 있었어. 헤헤..”

 

예상대로 마스터가 사준 셔츠중 하나. 심부름 갈 때도 입는 무릎까지 오는 베이지색 반바지. 마스터가 버리다시피 한 검은 크로스백. 그리고 몸에서 떼지 않는 낡은 하늘색 머플러. 성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저 머플러라도 어떻게 하고 싶었다. 저런 차림을 한 남자하고 나갈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분명 준비하는데 이십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세 시간 동안 준비했는데.

 

정말 이러고 나가시게요?”

! 뭔가 무.문제가 있으려나..”

하아..머플러 꼭 해야 해요? 반팔 셔츠에 머플러는 촌스러워요.”

에엣...그치만. 없으면 허전하고..”

이유가 그것뿐이면 벗어요. 못 봐주겠으니까. 옷도..그냥 제가 주는 것 입어요.”

 

방에 끌려간 카이토는 옷은 고분고분하게 벗었지만, 머플러로 한참을 실랑이를 해야 했다. ‘목에 무언가가 감겨 있어야 한다.’는 카이토의 눈물어린 부탁으로 루카는 마스터의 옷장을 뒤져 체크무늬의 그나마 패션의 어느 부분이라도 잡고 있는 머플러를 찾아 가디건을 입은 카이토의 목에 감아주었다. 마스터의 몇 안 되는 미용용품에서 왁스를 찾아 머리를 만져주고, 색이 없는 립글로즈를 내밀었다. 집에서 입던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대신 갖춰 입으니 꽤 봐줄만 했다. 확인받으려는 듯 고개를 든 카이토에게 루카는 만족감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어요. 앞으로는 이러고 좀 다녀요...옷이 없는 것도 아니네요. 볼 때마다 후줄근해서..”

고마워. ..어색하다. 이제 나가도 되는 거지?”

 

머리를 긁적이려던 카이토는 루카의 머리에 손대면 안돼요!’ 하는 엄포에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려놓았다. 쇼핑몰에 가는 전철 안에서 생각이 있어요. 없어요. 머리에 뭘 발랐는데 왜 손을 가져가요. 하는 잔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전철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루카랑 단 둘이 나왔다. 머릿속에서 신나게 팡파레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외출복 차림의 루카는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와 단 둘이서 쇼핑이라니. 오늘은 무조건 행운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늘어뜨린 머리에서 달큰한 향이 풍겼다.

 

듣고 있어요? 이제 내려야해요.”

..다왔네.”

 

 


*



 

한참을 돌아다니다 고른 가게는 결국 서점이었다. 다른 건 사줘봤자 마스터 방에서 장식품으로 썩을 것 같다는 게 루카의 결론이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마스터가 가장 좋아할 물건이 책이라는 연산은 그다지 힘든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서점에 들어서자 카이토는 아이처럼 고개를 휙휙 돌리며 신기하다는 듯 감탄사를 뱉었다. 계속 그런 식이었다. 혼자서도 곧 잘 돌아다니는 루카와는 달리 마스터 없이는 집 앞 슈퍼까지가 카이토의 동선이었다. 그런데 마스터는 일이 바쁘고, 휴일이면 책을 읽거나 노래를 만들기에 바빴으니 아마 카이토는 커다란 쇼핑몰이 처음일 것이다. 커다란 쇼 윈도우에 진열된 옷을 보면서 함께 걷고 있는 자신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헤에-하며 눈굴리기에 바빴다. 조금 부끄러워 루카는 일부러 한 발짝 뒤에서 걸었다.

 

우와..책이 정말 많아!”

서점이니까요.”

마스터가 보면 정말 좋아하실 것 같아...어떤 책을 사드리지? 루카는 생각 한 것 있어?”

없어요. 그런데..좀 목소리 줄여주시면 안될까요? 서점에선 조용히 해야 해요.”

..실수. 미안해.”

여기 좀 넓어요. 길 잃지 않을 수 있겠어요? 같이 다닐까요?”

헤에..어린애 취급. 하지만 같이 다니고 싶어.”


카이토는 손을 내밀었다. ? 하고 고개를 갸웃이자 루카는 멀뚱히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동안의 정적 사이에 카이토는 음이탈이 생겼을 때 나오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만면에 드러났다.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길을 잃으면..손을 잡고 있으면...마스터도 그렇게 했고. 어제, 어제 저녁에.루카는 여자아이니까..마스터가..”

마스터가 손을 잘 잡고 다니라고 했어요?”

으응.방금 생각났지만.”

됐어요. 제가 카이도 잘 보고 다닐 수 있으니까. 가요.”

 

마스터가 시켜서 손을 잡고 다니라는 건 또 뭐야. 카이토는 조금 풀이 죽어서 소설이 진열된 코너로 걸어갔다. 멀쩡한 모습이 아까울 정도로 찌질해서 한숨이 날 정도다. 손을 내미는 모습에 잠시나마 두근거린 나도 바보 같았다. 카이토와 있으면, 그랬다.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도록 마음을 진정시키고 숨을 골라도 언제나 카이토는 먼저 저 앞에 뛰어나가 힘든 기색없이 루카를 바라보고서 난처한 듯 웃었다.

 

소설 읽어 본 적 있어?”

 

책장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으로 책등을 훑던 카이토가 말했다. 소설의 제목은 모두 감성적인 어떤 단어들의 조합. 루카는 고개를 저었다. 마스터의 책장에는 세 칸을 모두 차지하는 소설책이 있었지만 사실은. 마스터의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우리가 책을 읽을 이유는 없잖아요? 그냥 전송시키면 되는 건데. 그리고 소설은 모두 거짓말인거고.”

그렇지.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어.”

했어, 라면 지금은 아니에요?”

-! 이거 2. 마스터가 1권을 읽고 엄청 마음에 들어 하셨던 것!”

 

[꿈꾸는 책들의 도시]

 

엄청...나게 비현실적인 제목이네요. 책이 꿈을 꾸다니.”

그치만 마스터는 정말 좋다고 그랬어. 다섯 번이나 읽으셨고..나는 이걸로 할래. 루카는 아직 이야?”

다섯 번이나 읽었다는 것도, 그 책이 집에 있었다는 것도 루카는 알지 못했다. 꽤 두꺼운 책을 팔에 낀 카이토는 즐겁게 다른 책장으로 걸어가는 구두 소리를 쫓아갔다. 서점에는 엄청나게 많은 책이 있었다. 루카는 말없이 한참을 책장을 올려다보다, 음악작법책을 하나 집어들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마스터와 가까운 책이었다. 음악과 자신과 마스터를 생각하자 파란색의 선과는 다른 분홍색의 영역이 나타났다. 아주 가깝진 않아도, 그것은 독보적인 음계를 가지고 있었다.

 

책을 포장하고, 둘은 만족한 표정으로 서점을 나섰다. 카이토는 신상품 아이스크림을 커다란 통으로 받았을 때나 볼 수 있었던 시원한 표정으로 루카의 것 까지 책이 든 봉투를 가슴에 품었다. 팔짝거리며 걸어가니 쇼핑몰 밖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둥그런 복도를 스치고 있었다. 따스한 오후의 햇볕에 루카는 반쯤 눈을 감은채 걸었다. 한참을 앞서가던 카이토가 순간 옆에 툭, 팔을 건드리자 파란색 눈이 별처럼 쏟아지다 웃음으로 휘어졌다.

 

고마워! 오늘 덕분에 먼 곳도 나와 보고. 루카 덕이야. 옷도 멋지게 코디해줘서 고마워.”

저도 선물 사는 김에 인걸요. 이제 돌아가요.”

.... 저기...아직 해가지지 않았고. ..”

뭔가 더 하고 싶은 게 남았어요?”

 

남아 있다면 파르페일 것이라 생각했다. 단 것에는 취미가 없는 마스터가 카페에 데려가면, 십 분 줄 테니까 빨리 먹으라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맛을 즐길새도 없이 숟가락으로 퍼먹고는 물렁하게 환희하는 것 말고. 언젠가 그러면 맛이 느껴지냐고 물었지만 카이토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마스터도, 루카도 기다리는 거 싫어.하고 입가에 남은 하얀 자국을 혀로 핥았다.

 

파르페 먹으러 갈래요?”

정말? 그래도 될까? 내가 사줄게. 분명 루카가 좋아할 만한 것도 있을 거야.”

알았어요. 아이..뛰어가지 마세요!”

 

알았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뛰어가려는 카이토의 팔을 덥석 잡았다. . 팔을 잡힌 카이토는 당황한 듯 발을 멈추었다.

 

..?”

왜 계속 뛰어가세요. 카이토가 뛰어가면 저는 혼자 걸어가야 하잖아요.”

..그럼 같이 뛰어갈래?”

전 구두를 신어서 뛰면 발이 아파요. 오늘은 하루 종일 걸어서 피곤하고..그러니까, 천천히 걸어가요.”

 

이런 것 까지 일일이 말해줘야 하다니, 정말로 바보 같아.

 

팔짱 끼는 거 허락해줄게요. 제 걸음에 맞춰주세요.”

....고마워. 그럼 실례..실례하겠습니다.”

 

나른하게 잠이 밀려왔다. 카이토의 가디건은 부드럽고 포근했다. 좋아하는 이불의 감촉. 눈을 깜빡이자 세피아 빛이 감도는 속눈썹이 하늘거렸다. 카이토는 자신에게 심장이 있었다면, 곧 터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루카의 부드러운 손에 닿은 팔이 떨리지 않도록 굳게 힘을 넣었다. 바닥을 바라보아도, 새하얀 다리 끝에 연분홍빛 구두가 루카를 연상시켰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을까. 바람이 불어 기다란 머리를 흩날리자 아이스크림보다 달콤한 향기가 스쳤다. 여자아이는 예쁘게 걷는구나. 감상을 이야기 하면 루카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갈 것 같아 카이토는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파르페 집이 멀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파르페. 맛있어요?”

? . 엄청. 정말. 진짜 맛있어. 루카도 좋아하게 될 거야.”

그렇진 않겠지만.”


 

*



 

파르페를 고르는 카이토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 평소 때와 달리, 진지하게 점원에게 이것 저것을 주문하더니 자리에 앉아 있던 루카에게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쟁반에는 예쁜 모양의 과자가 올려진 파르페 두 개가 있었다.

 

이건 치즈케이크가 올려져 있어서, 여자아이들도 좋아하는 거래. 딸기아이스크림이 있어서 너무 느끼하지도 않고...맛있을 거야. 숟가락은 여기.”

, 감사합니다.”

나는 역시 정통이 좋아..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최고야. .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카이토는 순식간에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져갔다. 씹지도 않고 삼키며 손짓으로 어서 먹어보라고 숟가락을 들려주었다. 표정이 다양하게 바뀌었다. 눈을 감고 입을 우물거리다가, 몸을 부르르 떨다 숟가락을 쥐고 천국이라도 만난 듯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되지 않아 기다란 파르페 컵은 텅 비어 녹은 아이스크림 자국만 남았다. 루카의 파르페는 거의 줄지 않은 채였다.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이 아쉬웠다.

 

역시..맛없어? 으우..미안해.”

제 취향은 아니네요. 그래도 딸기는 맛있었어요.”

에에..그건 그냥 딸기인건데. 그럼 루카는 어떤 게 좋아? ..다음에. , 다음이 있다면 말이야. 나는 오늘 좋..좋았고. 그런데 나만 들떠서..”

 

표정은 다시 시무룩하게 바뀌었다. 루카는 마스터가 왜 카이토를 자주 놀려먹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익숙해지면 분명 즐거울거야.

 

오늘은 100점 만점에 45점이에요. 다음엔 제가 좋아하는 액세서리 가게를 가도록 해요. 그리고!”

응응!”

마스터한텐 나랑 같이 나간다고 하지 말아요. 비밀. 옷도 카이토가 스스로 챙겨 입고, 머리도 스스로 하고.”

..?”

그러라면 그렇게 해요. 이 파르페 줄 테니까.”

 

카이토는 이미 녹아 스푼에 커다랗게 퍼지는 아이스크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을 바라보던 루카는 처음으로 카이토를 바라보며 웃었다. 카이토는 머릿속의 즐거운 기억. 폴더에 오늘을 가득 담았다. 멋진 하루였어. 다음에는 마스터도 함께, 라고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둘 만의 하루도 충분히 즐거웠다. 마스터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가, 루카의 화사한 웃음에 지워졌다. 

 

 

 

 

 

 

 

 

 

 

 

 

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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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elier noir +

짧은것/X KAITO 2014. 8. 25. 19:30

Atelier noir +



누군가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 타인화 하는 것이며 자신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 또한 화자의 감정에 동하면서, 동하지 않으면서, 그 컨셉의 느낌을 창조하고 이끌어주는 것-


“...말로는...거의 프로네.”

노력하고 있어요.”


그럼 제발 눈 좀 깜빡이지 말아줘, 내가 새내기 대학생처럼 반 쯤 눈감은 사진이나 찍기를 바라는거야, 하고 그는 올라오는 짜증을 숨기지 않는다. 카이토만큼 생각하는 것이 표정이나 행동으로 잘 나타나는 모델은 없을 것이다. 노래 부를때의 행복한 얼굴, 나를 부를 때의 따스함, 사랑스러운 눈길. 자연스럽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그 표정 하나하나는 모두 자신의 것보다 생동감이 넘친다. 그리고 지금의 어색함, 부끄러움, 공감의 부재. 이해의 부족. 당연히 글로서 나타날 것이 아니므로 글로 이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벌써 네통째의 필름을 간 그는 빈 필름 통을 벽에 던져버렸다. 새로운 사진이 나와야할 마감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정말 멋진 작품을 생각했는데. 카이토가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그는 이제 던져진 필름통 소리에 놀라 가슴을 부여잡은 카이토의 겁에 질린 눈을 바라본다. 아마 저 파란 눈에서는 곧 눈물이 떨어질 듯이 아슬아슬한 물기들이 어려있다.


죄송해요..그치만, 정말 모르겠어요..”

, 아니야.”


. 죽어있는 편이 더 나았을까요.

카이토는 이번 사진을 위해 한 달 전부터 옷 치수를 재고,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함께 들었던 노래들을 기억하려 애쓴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집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것은 하나의 형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상상해봐. 하고 마스터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상상이란 게, 가능할 리가. 비슷한 느낌의 연산은 가능해도 그 정보들에서 무엇을 창조하는 것은 사람만의 기능이라고 말씀 드렸지만 아마 내가 그것을 이해 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스터도 그것을 왜 못하는지를 이해 못하는게 분명하다. 사진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최대한의 신중을 기했다. 절대로 그것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나도 의도한대로 노래가 불러지지 않으면 나 자신이 싫어지고 목소리가 미워져 말 한마디 하기 싫어질 때가 있다. 나는 마스터의 목소리와 같은 존재니까.


사진으로만 표현 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 세계는 아주 조용하고, 또 동적이고, 정적이며. 색채가 가득하기도 하고, 혹은 빛의 양으로만 표현되기도 하는. 아름답고도 고요한 폭풍의 풍경들. 마스터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소리 없는 회오리, 바람, 무언가의 흔적들이 마구 쏟아지는 장마가 떠올랐다. 나름 마구 정보들을 조합해서 최고의 연상을 해냈다고 생각했지만, 그 얘기를 들은 마스터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조금 실망한 목소리로 그래에. 하고 말끝을 흐렸다. 예술은 인간이 하는 모든 정신 활동 중에 가장 고차원의 것이라고 해요. 저는 모르겠지만.


너도 예술을 하..하잖아. , 그런식..의 말은..무책임하지.”

저 따위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마스터는 눈을 찌푸렸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모델은 누가 봐도 티가 난다. 생기 잃은 눈빛보다 더욱 보기 싫은 눈이다. 작품을 작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상서로운 감정들이 여실히 드러나는 카메라 속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백만 원 짜리 물건이라 던지지 못하는게 한이다. 카이토는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훨씬 익숙했고, 정작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시스템에 들어있지가 않은 것인지 답지 않게 무슨 짓을 해도 자존감이란 것이 올라가질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카이토를 사랑해도, 그 과분한 사랑이 자신의 아름다움 인줄을 모르고 그저 나를 신격화하기에 급한 모습은 과거의 찌질 했던 자신을 떠올리게한다. 고통스러운 평행선이었다.


미안, ..화내버렸네. 오늘은 그..그만하자. 이리와.”


풀어줄게. 나의 감정들에서. 억지로 맡겨버린 여러 역할들과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동작들에서.

그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가오는 카이토를 보며 다른 여러 장면을 생각했다. 저 자연스러운 모습자체 그대로를 담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그건 사진작가라면 누구나 가져볼 꿈의 모습이다. 자신이 생각한 그대로를, 바로 화면으로.

며칠째 혼을 빠지게 흔들어 놓은 카이토는 말없이 묶인 손목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주었지만 이미 팔뚝은 시뻘건 줄과 어제의 멍이 겹쳐 보랏빛이 감돌았다. 매듭을 푸는 내내 아픔을 참지 못한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손목을 잡자 카이토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아파요, 만지지 마세요. 아파요.”

..아프지. 미안해..,울지마.”


약 가져올게. 하고 마스터는 허둥지둥 서랍을 뒤지러 나갔다. 부어오른 손목이 욱신거렸다. 처음엔 살살 묶었다가 움직일 때마다 풀어지자 조금씩 조여 본 것이 결국 지금이다. 손목 밑 감각이 모두 통증으로 느껴진다. 아마 내일도 손을 묶을 수밖에 없겠지. 사실적인 통증보다는 마스터에게 공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들 힘도 없어 늘어뜨린 손에 마스터는 어제와 같이 소독을 한다. 알콜이 바늘같이 부어오른 곳을 찔렀다. 참아보려 했지만 불에 댄 듯 타오르는 감각에 나는 눈을 찌푸리고 움찔거렸다.


!! ..살살..”

..어떡하지..너무 너무..부었는데..”


묶는 소재를 바꿔볼까. 아니면 살색테이프를 감고 묶어볼까. 살살 묶어도 되는 구도로 할까. 뒷모습, 옆모습. 마스터는 속사포처럼 대안을 읊었다. 이럴 때 만은 말을 더듬지 않았다. 아마 머릿속에 있는 정보가 그대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팔목은 혈관들이 터져 붉게 멍이 들었다. 나는 그다지 내구성이 좋은 편이 아니다. 아마 이 외부적 상처들이 회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며칠 동안의 상처가 합쳐져 손은 죽은 보랏빛을 뗬다. 욱신거리는 괜한 죄책감에 손을 뒤로 가져갔다. 약상자를 들고 고개를 숙인 마스터가 결론을 내렸다.


이대론 안 되겠어.”

이건 포기야.”


그 말은 나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이 들렸다. 이 정도로 오래 준비하고 열심히 해오신걸 고작 나 때문에 포기한다는 게, 떨어지는 믿음의 소리가. 사용자의 요구에 맞춰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가.


그러지 마세요, 죄송해요. 제가 잘할게요. 하나도 안 아파요, 거짓말이었어요.”

저는 이게 아니면 살 이유가 없단 말이에요.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그는 그제야 카이토가 사람이 아니란 것을 조금은 이해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지독스럽게도 아플 손으로 무릎을 꿇고 비는 모습에서 더럽혀진 동정녀가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이라는 이름하에 얼마나 큰 굴레를 씌우고 있었는지도. 그가 사랑하는 환상을 깨트리지 않도록 카이토는 무단히도 연상했던 것이다. 보여주지도 않는 그의 머릿속을.

그는 카이토의 손을 잡았다. 손은 열기로 뜨끈했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니가 이렇게 아프면서 까지..해주길 원하지 않아.”


모델을 소중히 하라.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줄 매개체를 자신으로 여기지 말 것. 모델은 렌즈의 역할일 뿐 거울이 되어주지 못한다.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되 매혹당하지 말 것. 여러 가지 말이 생각났지만 어느 것도 카이토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카이토의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안다. 카이토는 절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동적으로 카이토는 그의 손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눈을 감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어서라고 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단어들이다.


....그게 아니어도, ..나는..더 좋은 사진을..만들 수 있어.”

알아요. 마스터는 최고에요.”

그런..그런 게 아니라, 좋은 피사체가 있으니까.”


나는 카이토를 울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의 열 두 번째로 카이토를 또 울려버렸다. 미안한 말이지만 우는 모습에서 더 많은 것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카이토는 언제나 나의 좋은 모델이 되어준다. 본인은 알지 못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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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것/X KAITO 2014. 8. 22. 22:58

420자 : 너만을 위한 거짓말 


말을 걸지 않으면,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다. 동공이 죽어있었다. 억지로 떼어낸 메모리가 카이토를 침식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카이토의 어깨를 두드렸다. 소리만으로는 소리의 근원을 쫓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카이토.”

, 마스터. 이런..제가 또 멈췄었나 봐요. 죄송해요.”

아냐. 가만히 있길래.”

혹시..오늘 시간이 되시면-”

 

고개를 저었다. 서비스센터에 가게 되면 불법으로 거래한 게 들통 나게 될 것이고, 벌금이나 사소한 건 그렇다 쳐도 이젠 생각만으로도 역겨운 그녀석의 얼굴을 어떻게든 마주치게 되어있다. 그 녀석과 다시는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뜯어고치는데 들인 시간과 공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테니까. 카이토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군데군데 잘라먹은 코드가 또 얽혀들어 가는지 눈을 찌푸렸다.

 

있잖아요. 마스터.”

? 또 머리아파?”

절 서비스센터에 데려가지 않는 건 제가 가봤자 수리할 수 없을 것 같아서죠?”

 

고마워요. 폐기될까 봐 걱정해주셔서.

 

눈을 찌푸리며 웃는 카이토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과부하로 뜨끈한 이마에 차디찬 손으로 이기적인 거짓말을 덮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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