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당신과


외전?



똑, 똑. 가볍게 주먹을 쥐고 현관문을 두드린다. 카이토는 소리 없이 15초를 셈했다. 그럼에도 문 뒤는 조용했다. 눈 앞엔 종 모양의 현관 벨이 어째서 자신을 누르지 않냐고 의문스럽게 바라본다. 카이토는 들리지 않는 조소를 무시하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것만이 방법인 양으로. 마스터는 부쩍 모든 자극에 민감해졌다.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세상이 무너진듯 깜짝 놀라는건 마스터의 여러가지 귀여운 순간중 하나이며, 토끼처럼 동그라지는 눈을 보며 심장이 있을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야아, 놀랐잖아. 하고 길게 내쉬는 숨은 마치 휘파람 소리처럼 은은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때면 카이토는 미안해요.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며 눈을 접어 웃었다. 가끔씩 보는건 기뻤을지도 모른다. 마스터에게서 익숙함이 사라지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있던 마스터에게 담요를 가져다주는 손길에도 휘득허니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카이토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 놀람이 어디에서 기원한것인지 더듬어본다. 내가 가진 사람보다 조금 낮은 체온. 정적인 관절 움직임. 기꺼이 이 집에 존재하는것 까지. 마스터의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서 카이토는 작은 물음을 들었다. 너는 누구야? 그것보다 더 깊은 물음은 어두운 동굴을 통과하다 어둠에 잡아먹힌다. 아마 마스터 조차 들어가보지 않은 장소일 것이다.


"똑, 똑. 들여보내주세요."


목을 가다듬고 입으로 문을 두드린다. 다시. 문 뒤는 조용했다. 세 번의 체념 뒤에 카이토는 빠르게 주머니에서 파란 고양이 인형이 달린 열쇠를 꺼내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 경첩이 열리는 소리에 저항이 느껴진다. 며칠 뒤의 할 일에 문에 기름칠 하기를 추가한다. 3일뒤에 이 사항은 카이토의 움직임이 멈추지 않는 이상은 반드시 떠오를 것이다. 스니커즈를 벗고 조용히 거실로 걸어가자 1인용 탁자와 의자, 그리고 탁자에 엎드려 잠든 마스터는 고른 호흡을 느리게 쉬고 있었다. 카이토는 언젠가의 마스터 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무언가를 쓰던 중이었는지, 엎드린 팔의 아래에 노란색의 종이가 몇 장 놓여 있었다. 사이를 들여다보자, 나. 타니무라 카요. 29살. 생일. 기억안남. 고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 기억해야만 하는것들. 카이토와 올해 겨울은 호수로 여행. 별자리 외우기. 따뜻한 목도리 사기. 약은 하루에 세번. 점심약은 두 개만. 툭툭 끊어지는 문장들이 적혀있었다. 마스터는 가사를 썼다. 자신이 느낀 것을 글로 녹여내는 재주였다. 마스터의 가사에는 조합이 잘 된 홍차처럼 첫맛은 가벼우며, 삼키는것은 부드럽게. 끝은 약간의 달콤함과 외로움이 혀를 감싸고 흐른다. 삶의 깊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카이토에게도 마치 언젠가 경험했던 일처럼 입맛을 돋구어주는 멋진 글을 쓰곤 했다. 거실 벽에 붙은 행거에는 다양한 재질의 머플러가 깔끔하게 세탁되어 걸려 있었다. 이것 저것을 둘러주며, 매어주는 방법도 여러가지 였다. 멋을 부리는 일은 카이토의 흥미와는 달랐지만, 완성 되었다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활짝 웃는 마스터의 얼굴을 보는 것을 사랑했다. 방 안의 공기가 식어 있었다. 담요를 덮어줄까. 고민하다 장식장에 놓인 CD플레이어를 켰다. 곧 시작되는 음악은 숭어라는 이름이었다. 꼼꼼히 들어보면, 음율은 제법 커다란 숭어가 헤엄치듯 유연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스터가 다시 태어난다면 물고기가 되지 않을까 공상한 적이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지 않는 짧은 길이였지만 커다란 은색 물고기의 꼬리처럼 부드럽고 빛 아래에서 반짝였다. 카이토도 그런 생각을 해? 턱을 괴고 카이토의 상상을 듣던 카요는 쿡쿡 웃으며 비웃는건 아녔어. 하고 금방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난 종교 조차 없는데. 카이토가 실망한 목소리를 알아채고 바로 따라붙어 대답했다. 저도 종교는 없어요. 당연한 말이었죠. 


"다시 태어나면, 카이토도 나랑 같았으면 좋겠어."

"제가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나도 마찬가지거든. 왜, 요즘엔 애완용 펫 안드로이드가 죽으면 장례도 치워준다잖아. 성불하렴. 하고."

"성불. 신에게로 돌아가는 건가요. 믿지 않는 신에게."

"남아있는 사람들이 마음 편하자고 하는거야. 죽음 뒤엔 아무것도 없어."


저는, 카이토는 말을 멈추었다. 마스터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움츠러든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죽음 뒤엔 아무것도 없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칼날이 되어 몸 이곳 저곳을 베어내듯,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약을 먹은 이후부터 모든것에 둔감해졌다. 손끝의 감각. 인식. 생각도 무뎌지고 그것들의 결과로 뇌의 변화가 조금이나마 느려질것이라고. 하나코는 설명했다. 아직 공상이 남아있을 즈음이었다. 카요는 운전사의 손길을 무시하고 영원히 앞으로만 달려가는 기차를 떠올렸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거운 만큼 소중한 기억같은건 전부 던져 버리고 어딘지도 모르는 끝으로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열차에서 당황한 채, 마지막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는걸 깨달은 채로 멍하니 어느 속도만을 느끼게 된 운전사의 무력감을 느꼈다. 


"카이토, 내가 먼저 죽게되면. 네가 남아서 내가 다시 태어날때까지 기다려 줘. 돌아왔을때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할까봐 무서워."

"그렇지 않아요. 하나코씨도 있고. 빵집의 사카이씨도 있어요. 악기점의 모리사와씨도."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쉽게 잊어버리지. 나..하나코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그럼 하나코씨를 만나요. 연구소 근처에 좋아하시던 카페에요. 커다란 피아노가 놓여진 곳."


말보다 행동하는게 더 빨랐다. 손가락으로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하던 카이토는 금방 카요의 휴대전화에서 가까운 단축번호를 찾아 눌렀다. 귀여운 분홍색 하트가 붙은 하나코쨩. 이라는 이름이 깜빡이더니 화상화면으로 바뀌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짧은 커트머리가 부스스한 하나코가 커다랗게 손을 뻗어 흔들고 있었다. 목덜미엔 반짝이는 큐빅이 장식된 안경줄 끄트머리에 동그란 안경이 함께 달그락 거렸다. 하나코가 가진 소리는 높고 지저귀는 종달새처럼 기쁨을 담아냈다.


"야호, 카요쨩, 카이토. 안녕? 마침 쉬는시간이야!"

"와아. 다행이에요. 갑자기 전화해서 죄송해요. 마스터가 하나코씨 목소리를 듣고싶어 하셔서."

"헤에. 별일이네. 오늘 기분은 어때, 카요쨩?"

"별로야. 하나코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서."

"카요쨩. 괜찮다고 했잖아-. 우린 보고싶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마치고 집에 갈께!"


하나코가 활짝 이를 보이며 웃었다. 카요는 건조한 모래가 사그러드는 손 안에서 반짝이는 조각 하나를 남겼다. 교복을 입은 하나코의 똑같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머리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자신이 가진 어떤 웃음보다 높은 소리는 휴대전화의 화면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같았다. 카요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귀여운 외모의 아이가 하나코.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카요는 말을 씹어 넘기듯 꼭꼭 씹어 음미했다. 카이토의 표정을 고르지 못하는 얼굴을 볼때마다, 자신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망가져 더 이상 원래의 모습으론 돌아갈 수 없다는걸 확신한다. 매일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타니무라 카요라는 사람은 해체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유령처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탁해서 만들어지고 있을 뿐. 모두가 기억하는 타니무라 카요로서 살아가는 나날들.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망설이는 눈빛들 속에서 멀어지는 현실감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전만큼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모든것을 버리고 나는 어디에 가고 있을까. 도착지가 어둠이 드문드문 빛나는 겨울의 호수였으면 좋을텐데. 




***




카이토가 행거에서 두꺼운 머플러를 골라주었다. 밝은 베이지색은 갈색 코트와 어울렸다. 머플러의 끝을 목 뒤로 다듬어 매어주고는 머리카락을 밖으로 빼내었다. 완성이에요. 산뜻하게 손을 뗀 카이토가 머플러 옆에 걸려 있던 짙은색의 코트를 꺼내 입었다. 습관처럼 손가락을 뻗어 머플러가 걸린 쪽으로 향했다. 고개를 조금 기울여 고민하던 티를 내더니, 오늘은 춥지 않으니 머플러는 하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하고 고민을 매듭지어 말했다. 머플러를 매지 않은 카이토는 어색했다. 카요는 망설임 없이 울이 많이 들어간 소재의 회색 머플러를 가져갔다.


"줘. 내가 해줄게."

"...마스터."

"아직 이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고. 나 너무 무시하는거 아냐?"


실없는 웃음을 지어내는 카이토를 바라보고, 카요는 곧 행거로 눈을 돌렸다. 사사로운 호기를 부렸다. 머릿속의 엉킨 실타래는 풀어보려고 손을 대면 더욱 엉킨다. 안정적인 절망에 카요는 어설프게 웃었다. 이 병에 걸린 이후로 자신의 생은 모든게 결정된 모양이다. 병에 걸린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을 따라 죽음으로의 항해는 순조로웠다. 


"미안. 사실 기억 나지 않아. 하지만 오늘은 군청색이 어울리는걸."

"이정도 길이라면..손 놓지 말아요."


카이토가 허전한 목에 머플러를 걸쳐 놓은채 멈춰선 카요의 손을 겹쳐 잡았다. 이렇게, 한번 빙글 둘러서. 전 추위를 잘 타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목이 허전한건 왠지 싫어요. 마스터가 아침먹는걸 싫어하는것 처럼. 그리고 두 끝이 중앙에 돌아오면, 원을 만들어서 하나를 다른 하나의 사이에 넣어요. 이제 한쪽을 뒤로 넘기면 완성이에요. 


"마음에 드세요? 전 이 모양이 좋아요."

"응. 멋지다. 익숙한 모양..기억나지 않지만."

"마스터가 가르쳐 준건 제가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길게 늘여뜨리면 거추장스럽잖아. 하고 말씀하셨잖아요."


처음 만들어진 카이토는 몸의 일부처럼 머플러를 떼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머플러는 목에 고작 한번 둘러져 남은 길이는 키만큼 길었다. 실용성이라고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애착쿠션이라기엔 절박함의 정도는 탯줄을 자르려는 모양이라 바닥에 끌려 끝이 더러워진 머플러를 세탁기에 넣을 수 없었다. 자고 있는 틈을 타 머플러에 슬쩍 손을 가져가면 그곳에도 꼬리처럼 감각이 있는 모양인지 금방 도끼눈으로 카요를 바라보았다. 그 만큼의 믿음이었다. 이후에야 알았지만, 누구도 카이토의 머플러를 세탁해줄 만큼 카이토에게 애정을 가지지 않는다는것. 노래를 대신 불러주는 기능에는 그런건 포함되지 않았다. 카요는 당연하게 여겼다. 더 많은것을 카이토에게 받았다고 확신한다. 혼자만의 공간을 채워주는 조금 낮은 온기. 생을 살며 잃어버린줄도 몰랐던 결핍을 채워준 마지막 조각을.


한쪽으로 늘어뜨린 머플러가 마음에 드는지 카이토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팔을 둥글게 접어 그 사이에 익숙하게 카요의 팔이 들어오게 했다. 감기는 모양은 원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만큼 기만이 느껴졌다. 둘은 같은 디자인의 색만 다른 신발을 신고 걸었다. 하나코가 알게된다면 언젠가처럼 하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따스한 빛줄기를 가져다 줄 것이다. 하나가 된 발소리로 걸었다. 카이토는 몇번이고 걸었을 이 거리를, 미지의 세계에 여행을 온 듯 생경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카요에게 이것 저것을 안내했다. 마스터가 좋아하는 크로와상을 파는 가게. 건포도가 든 스콘도 추천메뉴에요. 카요는 건포도가 든 스콘을 크게 한입 넣고 우물거리는 자신을 생각했다. 카이토가 옆에서 따뜻한 티백 홍차를 건네주는 있을 법한 풍경이 그려졌다. 있었을지도 모르지. 어딘가엔. 터진 풍선처럼 하염없이 쪼그라드는 세계는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지 못하는 망국의 폐허였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너만이, 언젠가 찾아올 영광을 기다리듯. 과거의 영광을 기리며 떠나지 못하는 푸른 기사처럼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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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마지막 파트까지 수록하여 재록본으로 만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마의 끝에서

 

 

비가 매섭게도 내렸다. 츠바키의 간판에 기다란 비에 부딪혀 톡,,, 하고 춤추듯 균열하는 물방울을 아즈마는 유리컵을 극세사 천으로 닦으며 바라보았다. 비에도 정서가 담겨있다. 사람들의 기운을 타고 흐르는 기운처럼. 어떤 비는 회상을 부르고, 어떤 비는 그치고 난 뒤의 맑은 날을 그리운다. 어떤 비는 우울하기만 하다. 커튼을 치듯 쉴새 없이 쏟아지는 비는 단절된 관계. 가랑비가 오는 날엔 손님이 적당히 많았다. 평소엔 늘 틀어놓는 가사 없는 연주곡을 그런 날엔 꺼두었다. 빗소리가 더 음악 소리 같은걸요. 아즈마는 손님에게 웃으며 말하곤 했다. 오늘은 혼자서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주류 정리나 컵을 닦아야겠다고 아즈마는 생각했다. 운이 좋으면 비를 피해 한두 사람 정도는 와줄지도 모른다. 그런 날의 인연이야말로 기억에 남는다.

 

없는 재료나 사러 다녀올까. 내일도 비가 온다고 했으니, 조금만 사야겠네. 레몬, 월계수 잎. 오렌지 주스.”

 

바의 주방에 들어가 커다란 냉장고를 열어 보던 아즈마는 손가락으로 남은 주스 병의 개수를 세거나 레몬 절임 병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했다. 혼자 운영하는 곳이기에 바빠질 때를 대비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직원을 둘까도 고려한 적이 있었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온전히 내 것이라는 느낌이 좋기도 했다. 츠바키의 공간 전체는 그가 생각한 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직접 고른 진보라색의 벨벳 커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 모은 코스터, 술의 배열까지 아즈마가 계획한 대로 진열되어 있었다. 가게의 열쇠를 챙겨 든 아즈마는 커다란 우산을 들고 바를 나섰다. 골목 가에 있어 츠바키 입구는 작았다.

 

츠바키의 입구 앞에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제법 좋은 재질의 정장차림인데, 비에 젖어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잔뜩 짜증이 섞인 얼굴로 장대비를 받아내고 있었다. 아즈마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남자에게 기울였다. 남자에게서는 차가운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이런 이런, 손님이 있었네. 망설이는 중?”

손님? 난 그런 게 아냐.”

그럼 내 가게 앞에서 뭘 하던 중이야? 그것도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우산도 쓰지 않고...금방 감기 걸려버릴 거야.”

하아. 난 감기 같은 건 걸리지 않아. 누굴 좀 쫓다가 놓쳤을 뿐. 비 소리에 섞여서 녀석의 냄새와 소리가 가려졌어.”

아무튼, 외톨이란 소리지? 들어와요. 수건이라도 내 줄 테니까.”

 

아즈마는 남자의 손을 잡아 가게로 이끌었다. 멋진 차림을 하고서 비에 젖은 남자라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다. 금발의 머리카락과 쓰고 있던 안경알이며 소매 끝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문 앞에 선 남자에게 아즈마는 두꺼운 수건을 내밀었다.

 

고맙군. 안경 정도는 닦고 싶었던 참이었어.”

천만에요, 필요하다면 여벌 옷 정도도 내 줄 수 있어. 나와 체구가 비슷해 보이니, 괜찮을 거야.”

잠시 비만 피하고 갈 거니까. 여긴-. 술을 파는 곳인가.”

, bar 츠바키. 오늘은 개점휴업인가 했는데. 와인이라도 따뜻하게 데워줄 테니까, 천천히 놀다 가요.”

 

아즈마는 입구 앞에 선 남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내는 모습이 단정하다. 고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금발, 제법 날카로운 눈매. 의지가 가득 담긴 입술. 아즈마는 와인을 밀크팟에 데우며 남자가 관심 있어 할 만한 주제를 머릿속으로 골랐다. 바텐더 일은 아즈마에게 딱 맞는 직업이었다. 향긋한 술을 마시는 것도, 손님에게 어울리는 술을 추천해주는 것도, 그런 손님의 만족한 얼굴과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오늘의 손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아즈마는 따뜻하게 데운 잔을 싱긋 웃으며 코르크 코스터 위에 올려놓았다. 손님이 된 남자는 물기를 닦아 말간 얼굴로 아즈마를 맞았다. 날카롭지만 섬세하게 생긴 얼굴이 아즈마의 취향에 딱 맞았다. 남자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아즈마는 싱긋 웃었다.

 

자아, 따뜻한 와인. 남은 오렌지와 꿀을 넣었으니, 감기 예방에도 좋을지도?”

감기는 걸리지 않아.”

후후, 불사신이라도 되는가 봐.”

비슷하지. 친절을 받았으니 답례를 해야겠군. 그래. 너는-.”

남자는 아즈마에게 가까이 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귓속말이라도 하려는 걸까. 아즈마는 남자에게 감도는 신비한 기운과 흥미로움에 눈을 접어 웃으며 다가갔다. 진지한 표정의 남자는 손을 뻗어 아즈마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아주 조금, 가슴 속으로 손이 들어가고 있었다. 평소 어떠한 일에도 동요하지 않기로 정평이 난 아즈마 였지만 눈을 커다랗게 뜨며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는 아즈마를 무시하고서 남자는 천천히 가슴 속에 스며들어간 손으로 그 안에 든 물건을 만지고 있었다. 아즈마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남자는 아즈마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에, 두꺼운 벽과 사슬에 묶어놓은 보물상자에 아무런 제제 없이 다가왔다. 남자의 표정이 흠, 하고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듯 움직였다.

 

. 한 번 죽었다 다시 살아가고 있군. 다른 사람의 목숨을 이어받아서.”

무슨...”

흐음. 관대한 사신을 만났군. 행운이야. 나라면 예외 없이 거두었을 거다.”

사신..?”

모르고 있었나? 기억까지 지우다니. 관대함이 지나치군. 그렇다면 내가 해줄 만한 일은...”

당신, 그게 정말이야?”

당신? 불쾌한 호칭은 사양이다. 후루이치 사쿄. 오래된 이름이지만 그걸로 부르도록.”

나는 언제 죽을 수 있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가족 전부가 죽어버렸어. 나만 살아남았어. 나는..”

아까 불사신이라고 했지. 그건 오히려 네가 더 가까워. 유키시로 아즈마. 너는 사신이 접근할 방법으로는 죽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오래된 인과가 네 심장에 얽혀있어. 한 번에 해결할 만큼 인재가 없거든. 이번 세대는.”

 

아즈마의 가슴에서 손을 빼낸 사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제대로 된 일을 하는 페어가 없었다. 그나마 봐 줄만 한 게 츠무기와 타스쿠였다. 물론 그 둘을 페어로 만드는 걸 가장 반대한 것이 사쿄였다. 생전에 연이 있던 영혼끼리 페어를 해서 파멸하는 과정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합이 맞는 만큼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의심하다 보면 자멸하게 된다. 특히 머리가 좋은 녀석들일수록. 운명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인간의 가장 어리석으며 위험한 속성이다. 사쿄는 혀를 차며 뜨거운 와인이 담긴 잔을 들어 감사의 의미로 흔들었다. 더운 김이 나는 레드와인에서는 달콤한 과일 향이 물씬 풍겼다. 술을 즐기지 않았지만, 이 한잔에 호의가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즈마의 심장은 여러 가지 색과 조각이 얼기설기 엮어있는 엉성한 모양이었다. 절개선이 가득해 처리하기 쉽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신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반푼이다. 사신이 취하는 건 물리적인 형태의 심장이 아니다. 영혼의 구심점이 되는 장소가 심장과 비슷한 곳에 있어 그렇게 부를 뿐이다. 잘못 건드렸다간 육체에 위치한 심장까지 망가뜨릴 위험이 다분했다. 사신의 규칙에 위반되는 일이다. 아무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목숨을 거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불사신이란 불가능하다. 아즈마는 모종의 사정 때문에 비슷한 형태가 된 것이다. 사쿄도 처음 보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다행인 건, 네 자신이 가진 수명은 곧 끝나게 될 거다. 가장 구심점인 심장 조각이 없어지면, 운명이 뒤틀리게 되지. 내가 그걸 바로잡아 주지. 그게 내 보답이다.”

고작 와인 한잔에, 그런 걸 해주겠다는 말이야?”

. 근 백 년 간 먹은 와인 중의 최고였다. 맛을 섬세하게 가리는 능력은 없지만 말이지.”

헤에. 고마워라. 바텐더에게 최고의 칭찬이네. 사쿄씨.”

사쿄...., 그걸로 됐어. 다만, 인과를 정리하려면 나도 꽤 힘을 써야 해서. 아마 당분간은 힘들 거다. 대신 잔챙이들이 나타나면 처리해주지. 이 근방은..그렇지. 츠무기와 타스쿠군. 둘은 똑똑하니 괜찮을 거다.”

츠무기, 타스쿠. 그 사람들도 사신이야?”

그래. 그들은 상성이 좋은 페어야. 걱정했던 만큼은 아니라 안심이지.”

그럼 사쿄씨는 상관? 대장?”

딱히 그런 상하관계는 없어. 필요에 의한 일을 하는 거니까. 오래 일을 하고 있으니, 이런저런 역할을 하는 거다.”

멋있구나. 일하는 남자-. 란 느낌. 후후. 그보다 누굴 쫓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 일은 괜찮은 거야?”

난 추적이나 탐지는 잘 하지 못해. 번거롭지만 다른 사신에게 맡길 생각이다. 흔적을 남겨놓았으니 내가 할 일은 다 한 셈이야.”

 

사쿄는 살짝 내려온 안경을 올렸다. 생리작용은 없는 몸이지만 무생물에게도 풍화작용은 예외가 아니다. 인상을 찌푸리고 초점을 맞춰야 아즈마의 얼굴이 시선에 들어왔다. 선이 가는 남자. 어깨에 얌전히 꼬리처럼 올라간 은빛의 머리카락이 그의 매력 포인트 인 듯 했다. 검은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은 손목은 뼈대가 동그랗게 도드라졌다. 선이 가늘지만, 남성적인 인상은 명확했다. 잔뜩 눈을 구긴 사쿄가 시력이 좋지 않다고 웅얼거렸다. 순간 바뀐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귀엽다고 아즈마는 생각했다.

 

안경을 썼는데도 교정이 되지 않아?”

사람이랑 완벽하게 똑같은 구조는 아니야. 이건 어쩔 수 없는 퇴화다. 이 몸을 너무 오래 쓴 거야.”

사신도 수명이 있어?”

인과를 조정하는 존재에게 수명이란 개념은 의미 없어.”

사신도 사랑을 할 수 있어?”

감성적이군. 나도 감정은 있어. 사랑처럼 깊고 심화한 감정은 잘 모르겠군.”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를 해서 기쁘니까, 한 잔 더 하지 않겠어? 우유가 들어간 것으로 괜찮으려나.”

오늘은 이만 늦었어. 다음에 찾아오지. 내게 용건이 생긴다면, 감각과 의지가 날 부를 거야. 아무래도 비는 오늘 내로는 그치지 않을 모양이군.”

우산, 빌려줄게. 다음엔 그걸 가져다주는 거로.”

 

아즈마가 서랍장에 있던 접이식 우산을 내밀었다. 사양하지 않지. 사쿄는 우산을 받아들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문 앞까지 따라 나간 아즈마가 아쉽다는 눈치를 내보였지만 사쿄는 무심하게도 츠바키의 문을 열었다. 벽에 가려져 있던 비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우산을 펴들고 빗속으로 들어간 사쿄가 마침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다음에 보지. 비가 그치면 우산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아아, 비가 그치길 바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인걸. 츠바키는 언제나 손님을 환영하고 있어. 언제든지.”

난 손님이 아니야.”

 

검은 인영이 빗속으로 점점 사라져갔다. 아즈마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참 츠바키의 문 앞에 기대섰다. 다시금 참기 힘든 외로움이 밀려왔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이어받은 삶이었다. 처음부터 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즈마는 수요일을 싫어했다. 찢지고 잘려나간 기억 중 유일하게 선명한 정보였다. 아즈마의 모든 것을 가져간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아즈마는 몸서리치며 찬장에 넣어두었던 약통에서 두통약 몇 알을 꺼내 얼음물과 먹었다. 그날의 손님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비가 그치지 않았다. 츠바키에는 며칠간 손님이 드물었다. 아무래도 이렇게나 장대비가 오는 날에는 다들 집에 빨리 들어가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즈마는 비슷한 악몽을 오랜 기간 꾸고 있었다. 잊을 만 하면 잊지 말라는 듯 머릿속의 심해에서 떠오른다. 눈이 타버릴 듯한 강렬하고 뜨거운 빛, 열기,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비명. 붉은 빛. 유년기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리저리 손을 잡혀 다니다 보니 그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었다. 가슴 속에 기억의 파편을 담아놓은 상자를 만들고는 커다란 벽으로 닫아놓았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엔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여행을 다니며 마음에 드는 가게에서 일을 해주며 돈을 벌기도 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질 들었다. 바텐더를 해보면 좋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어느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에게 등 너머로 배운 칵테일을 만들어주었더니, 그가 감탄하며 추천했기 때문이다. 아즈마는 다음 행선지를 캐나다에서 빙하나 유빙을 보는 것으로 생각해 두었지만, 웬일인지 일본으로 돌아와 남은 돈을 전부 츠바키를 사는데 써버렸다. 자는 용도 외에 쓰지 않는 살풍경한 오피스텔보다 츠바키가 훨씬 아즈마의 이었다. 아즈마는 빗속에서 사라졌던 사쿄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쓸쓸함을 달랬다.

 

“....”

. 손님이네. 어서 오세요. 어라, 어린 손님이네.”

난 어리지 않아.”

이 분위기... 일단 문은 닫아주실래요? 비가 많이 와서. 앞에 놓인 깔개에 발을 잘 털고 들어와요.”

.”

 

밝아진 빗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 우산을 든 소년이 츠바키의 문 앞에 서있었다. 검은 코트, 검은 바지. 검은 워커. 비에 젖은 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어딘가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을 느낀 아즈마는 소년이 얼마 전 만났던 사쿄와 비슷한 종류가 아닐까 생각했다. 소년의 생기 없는 연두색 눈동자를 마주친 아즈마는 의심을 확신했다. 느린 몸동작으로 발을 러그에 구른 소년은 우산을 세워놓은 우산꽂이에 넣어두고 코트를 벗었다. 어두운 츠바키의 조명에 소년의 모습은 완연히 녹아들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소년을 쳐다보던 아즈마는 퍼뜩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환기했다.

 

오늘 첫 손님이네. 어서 앉아요. 수건 하나 내 드릴게요.”

주문. 핫초코. 마시멜로를 잔뜩 넣어서.”

아하하. 귀여운 주문이네. 아마 예전에 썼던 게 있을 테니, 가능할 거에요.”

 

소년에게 자리를 권한 아즈마는 주방으로 들어가 우유를 데웠다. 비를 피하러 들어온 고양이 같은 손님. 이 또한 즐거운 만남이 될 것이다. 아즈마는 여러 가질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자아. 마시멜로가 너무 많아서 컵이 넘치겠네. 후후. 남은걸 전부 써버려야지-.하고. 신나버렸어.”

고마워. 유키시로 아즈마.”

? 내 이름이 그렇게 알기 쉬운 거였어? 당신도 사쿄씨와 비슷한..”

역시 사쿄를 알고 있어. , 턱에 상처가 난 남자와 만난 적 있어?”

턱에..상처? 흐음. 그게 왜 궁금한 걸까.”

대답해. 사신을 알고 있으니 말이 쉬워지겠지. 심장을 뽑기 전에.”

심장을 뽑으면 나는 죽는 거야? 아쉽게도, 난 죽음이 무섭지 않아.”

겪지 않아보았으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니. 오만방자한 인간.”

 

소년은 입가에 묻은 핫초코를 혀로 낼름 핥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와 아즈마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사쿄가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었다. 두 번 다시 느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머리 전체를 가득 차고 있었다.

 

허억..!”

 

언제든지 죽어도 좋다고 늘 생각했던 아즈마 였지만, 처음으로 이대로 죽는 건 아쉽다고 생각했다. 우산을 돌려받지 못했다. 비가 그치는 날에 만나기로 했는데. 사실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다. 왠지 그럴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혼자서 품었다. 다시 한 번 그에게 따뜻한 와인을 대접하고 싶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라면-.

 

그만둬라. 미카게. 네가 어떻게 해 볼 자가 아니다.”

사쿄.”

 

바 테이블 위에서 검은 연기가 응집하더니 검은 에나멜 구두를 신은 남자의 형상이 나타났다. 아즈마의 심장을 잡은 소년의 팔 위에 양 발을 붙이고 서있었다. 무게나 질량도 사신에겐 해당 없는 법칙이었다. 미카게라 불린 소년은 불쾌한 듯 눈을 치켜뜨더니 아즈마의 가슴에서 손을 빼고 종전의 조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쿄씨..”

. 후시미의 흔적을 쫓으라 했더니, 왜 무고한 사람의 심장에 손을 대는 거지. 소멸하고 싶은 건가? 아리스가와가 없으니 자제하지 못하는군.”

이 자는 후시미와 접촉한 적이 있어. 미세하지만.”

, 후시미군?”

후시미를 아는가. 유키시로?”

 

아즈마는 아직도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시미군은 건실하고, 밝은 청년으로 츠바키에 몇 달 전까지 종종 찾아오던 단골이었다. 사진을 공부한다던 학생이었는데, 사람이 많은 술집보다는 츠바키의 차분한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즈마가 세계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을 함께 감상하며 자신도 언젠가 세계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던,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턱에 난 상처는 그의 밝은 인상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아즈마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쿄와 히소카가 아즈마를 살면서 사신을 최소 세 명 만나고도 살아있는 인간을 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아. 진정하려면 한 잔 마셔야겠어요. 사쿄씨는 따뜻한 와인으로? 그쪽은..”

너는 지금까지 도대체 몇 명의 사신과 접촉한 건지...이 쪽은 미카게 히소카. 내가 후시미의 추적을 부탁했지. 흔적이 여기서 끊겼나 보군. 내 표식을 떼어냈나. 후시미도 똑똑한 녀석이니까. . 똑똑한 녀석이라 더 곤란해졌어.”

후시미군이 뭔가 잘못이라도 한 건가요?”

후시미는 자기가 수거해야할 영혼을 가지고 도피하고 있어. 육체를 벗어난 영혼은 오래 견디지 못한다. 사신 실격이야.”

나는 핫초코. 마시멜로가 잔뜩 든 걸로.”

마시멜로는 아까 다 써버렸어. 미안해요.”

 

아즈마는 아쉬운 대로 찬장에 있던 비스킷을 부수어 단맛을 첨가한 핫초코를 만들었다. 사쿄의 와인에는 자몽 청과 레몬그라스, 카모마일을 넣고 뭉근하게 끓였다. 비가 소리를 잡아먹어 조용한 가게 안에서 사쿄와 히소카의 작은 말소리가 문득문득 들려왔다. 후시미군도 사신이었던 모양이다. 사쿄나 히소카는 제법 사신이라면 그렇다는 티가 느껴졌지만, 후시미군에게선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건장한 체격에 대학생이 입고 다닐법한 후드티셔츠 차림이나 간편한 셔츠차림으로 매고 다니는 백팩에는 사진 작법서와 소중하게 여긴다는 카메라를 넣고 다녔다. 요즘 보이지 않는다 생각했더니, 곤란한 일에 휘말리기도 한 걸까. 나쁜 일을 할 인물로 보이진 않았다.

 

츠바키 특선, 이라고 해봐야 내 마음 가는 대로 레시피. 그래도 맛있을 거야.

매 번 고맙군. 오늘은 급하게 오느라 우산을 가져오지 못했어. 다음번에 들르도록 하지.”

그거 반가운 말이네. 몇 번이고 찾아와도 좋아. 내가 죽은 뒤에도 츠바키는 이어줄 사람을 찾아뒀으니까.”

하아? 누가 네가 죽는다고 했지? 내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건가.”

. 제대로 이해했어. 난 내가 가진 걸로도 충분해. 사쿄씨라면 날 죽여줄 수 있는 거지? 당신이라면 내 마지막을 맡겨보고 싶어.”

사쿄. 유키시로의 심장이..”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당장 버리는게 좋아. 네 진짜 수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삶의 의지가 없으면, 어이. 유키시로.”

 

너무나, 너무나도 외로운 삶이었다. 가족을 잡아먹고 살아난 아이라는 손찌검보다 괴로운 건 혼자 지새야만 하는 밤이었다.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잠들고 싶었다. 죽을 자리를 찾아 세계를 돌아다녔다. 세계는 빛나고, 아름답고, 추악하고, 슬픔이 가득하다. 모두가 빼곡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아즈마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여전히 밤에는 두통과 악몽만이 아즈마와 함께였다. 심장이 무너지고 있다. 얼기설기 억지로 그를 붙잡고 있던 미련은 낡은 밧줄처럼 삭아 끊어진다. 삶의 의지가 붕괴하고 있었다.

 

유키시로!! 젠장, 기껏 준비해뒀더니.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냐!!”

나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거야. 이게 내 연극의 끝이야.”

삶은 연기가 아니야. 나 참. 내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네가 만들어주는 술이 마음에 들었다. 너의 심장을 고치는 건 내 기만일지도 모르지만, 너보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내가 보장하지. 비는 언젠가 그친다. 내가 우산을 돌려주러 올 때까지 살아보란 말이야!!”

 

시간이 부족했다. 조각나는 심장을 하나로 붙일 만큼 힘이 남아있는지 가늠하지 못한 채로 사쿄는 아즈마의 가슴 깊숙한 곳에 손을 가져갔다. 온기가 식어든다. 아즈마의 삶이 손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눈물을 보여줄 사람조차 곁에 없어 웃어버린다. 잡아줄 손 하나를 기다리며 회색 황무지 위에 서있는 아즈마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안녕, 너무 늦었네요. 바람에 실려 오는 목소리가 내리기 시작한 비와 함께 떨어진다. 비를 맞으며 뛰어가는 사쿄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있었다.

 

핫초코도 맛있었어. , 먹고 싶어. 조정하면 되는 거지? 가이드는 사쿄가 해줘.”

살아. 살면 달라져. 사신을 만나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인생이 달라진다. 내가 두 번째 삶을 너에게 주겠다. 더는 외롭지 않은 여행을. 유키시로 아즈마.”

 

아즈마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황무지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풍경이다. 언젠가 땅 아래에 상자를 묻은 곳이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만난건 고작 두 번째였지만, 오래된 그리움이 느껴졌다.

 

우산이 없나 보군. 씌워주지.”

후후. 어쩔 수 없는 남자네.”

 

긴 잠의 끝에 눈을 뜨자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빗소리가 잦아들어 이슬이 떨어지는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에 고개를 묻고 잠들었던 아즈마는 찌뿌듯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눈 앞에는 말라붙은 코코아자국과 빈 머그컵 두 개가 있었다. 높고 동그란 의자 옆에는 검은 우산이 기대어져 있었다. 비가 그치면 따가운 여름 햇살이 기승을 부릴 것이다. 긴 비가 그쳤구나. 아즈마는 혼잣말을 하며 내려두었던 블라인드를 천천히 말아 올렸다. 눈부시게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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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과 생크림케이크 




츠무기 생일 축하해요 



부스럭 대는 건조한 이불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새벽이었다. 타스쿠는 느리게 양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적적히 가라앉은 방엔 츠무기의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아침 조깅을 다녀와서 츠무기를 깨워야지. 타스쿠는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운다. 배우라는 직업은 겉보기엔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비정규적인 일을 하는 프리랜서나 다름 없다. 죽을만큼 노력해도 무대의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라 죽어가는 잡초처럼 누렇게 뜬 얼굴을 가진 이들을 타스쿠는 잔뜩 보았다. 하루의 일과를 잘 세우지 않으면 무심코 느슨해지기 마련이었다. 조깅. 발성 연습. 츠무기를 깨우기. 아침 식사. 회의. 큰 줄기를 세우는 사이에 작은 가지 하나가 솟아났다. 선인장에 물을 주어야 한다. 단순하게 쓰는 물건들이 놓여져 있을 뿐인 타스쿠의 책상 위에 얼마 전 작은 선인장 화분 하나가 놓였다. 손가락 두 마디 만한 선인장은 하얀 화분에 담겨 츠무기의 손에 들려있었다. 방에 두는 식물은 전부 츠무기가 가져와 기르고 있었으므로, 타스쿠는 대수롭지 않게 쳐다보았지만 곧 그 화분은 타스쿠에게로 안겨졌다.


 선물이야. 츠무기는 거절할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한 손에 들어올만큼 화분은 작았다. 식물을 기르는 취미는 너의 것 아니냐고. 타스쿠는 항의했지만 선물이란 이름과 츠무기의 환한 웃음에 지워지고 말았다. 물은 한달에 한 번. 까먹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매달 10일에 주자고 정해 놓았지만 15일이 되도록 까먹기 일수였다. 큰 관심이 필요하지 않아 기르기 쉽다고 츠무기는 말했지만, 오히려 적당한 관심을 주는게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지난 달 이맘때 쯤 물을 주었으니, 생각난 김에 이번달은 오늘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선인장은 여전히 똑같아 보이는 길이와 모양으로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꽃이 피기도 한다지만, 기적처럼 잘 벌어지지 않는 일이라고 한다. 꽃이란게 츠무기의 손에서 마구 피어나는 일종의 마법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 쯤일 것이다.


다녀올게. 잠든 츠무기에게 들리지 않을 인사를 하고선 타스쿠는 방을 나섰다. 곧 츠무기의 생일이었다. 나서서 축하해주는 성격이 되지 못한다. 필요한 선물을 고르는 것에도 서툴렀다. 츠무기의 생일은 늘 한 해의 끝에 맞닿아 있었기 떄문에 연말의 어수선하고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 정작 제대로 챙겨지는 느낌이 들지 않은 적이 많았다. 왠지 모르게 석연찮은 기분으로 지나가는 생일은 어릴 적의 일이었다. 나이를 먹고서는 더욱 생일은 퇴색되고 의미를 잃어간다. 함께 살지 않았더라면 간단히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 통화로 때웠을지도 모른다. 작은 선물 정도는 챙겨주었을지도. 극단 기숙사의 모두는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누군가는 특기를 발휘해 선물을 줄것이고, 누군가는 아침 일찍 츠무기에게 달려가 생일 인사를 건넬것이다. 츠무기가 축하를 잔뜩 받는 것은 기쁜 일이나, 타스쿠는 왠지 그 모든 처음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아있다면 이상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상한 독점욕이다. 


"다음 주, 츠무기의 생일이지?"

"오호. 그러고 보니 그렇다네. 츠무기에게 어울릴만한 시를 선물해야겠군."

"츠무기. 생일...."

"생일 케이크 정도는 함께 준비하는게 좋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타스쿠?"

"케이크. 좋지."


츠무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즈마가 먼저 생일에 대한 주제를 꺼냈다. 얼마 전 축하를 받았던 히소카는 아직 여운이 남아있는 듯 보기 드물게 마쉬멜로우를 선물로 주고싶다는 말을 했다. 기특하게도. 아즈마가 눈을 접어 웃었다. 오미가 어떻게든 케이크를 구워 줄 테지만, 최근 크리스마스 파티 준비로 지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돈을 모아서 선물을 사는것 보다는 케이크가 낫지 않을까. 아즈마의 정리는 깔끔하고 논리적이었다. 같은 일을 하는 동업자의 생일을 어떻게 챙겨야 하는지 거리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호마레가 수긍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타스쿠에게로 향했다.


"츠무기는 어떤 케이크를 좋아해. 타스쿠?"

"글쎄. 그 녀석이 음식을 그렇게나 좋아한다고 한 걸 본 적이 없어서."

"소꿉친구면서. 케이크 취향 정도는.."

"뭘 사줘도 항상 좋아했으니까. 모르겠어."

"헤에..다른 의미로 취향이라는 거구나."


무슨 의민지 모르겠군. 타스쿠는 고개를 돌리고 모두가 모여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크는 타스쿠가 사오는 걸로-. 아즈마가 뒤통수에 대고 손을 모아 말했다. 어차피 사오는 건 자신의 몫이라 생각했다. 타스쿠는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흔들었다. 별 것 아닌 일이었다. 비로드 거리에도 베이커리는 많았고, 크리스마스에 연말 이벤트까지 합쳐진 상가는 붉고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했다. 어디든 골라서 적당한 케이크를 골라오면 되는 것이었다. 츠무기에게. 생일 축하해. 라는 멘트를 초코렛으로 적은 장식이 올라간 케이크를.


마지막 글자를 제외 하면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타스쿠는 조깅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일부러 상점가를 지나갔다. 막 개점 준비를 하는 가게들이 많았다. 다들 크리스마스용 산타장식이나 통나무 모양을 한 초코케이크같은 것을 광고하고 있었다. 전부 특별한 것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것도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화려한 것은 츠무기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특별하면서도 독특하지 않은 유일한 것을 찾아다니고 있다. 넓은 잎과 꽃이 가득한 정원에 어울리지 않던 선인장이 타스쿠의 책상 위에서는 유일한 초록으로 빛나고 있다.


-


츠무기에게 선인장을 선물 받고 한 달 뒤. 문득 츠무기가 선인장에게 물을 주었냐고 물어왔다.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고. 타스쿠는 꽤나 당황한 얼굴로 물을 떠와야겠다고 대답했다. 


"어떤 물을 줄거야, 타스쿠? 주방에서 나오는 물, 냉장고에 사둔 미네랄워터?"

"츠무기. 장난치는거지?"

"물 온도는 어떻게 생각해? 물을 얼만큼 줄거야?"

"장난 치지 마."

"아하하. 더 이상 말하면 정말 화내겠네. 물은 흙을 적당히 적실 정도로만 주는게 좋을거야."

"그냥 네가 키우는게 어때? 난 이런덴 전혀 흥미가 없어."

"내가 보고 싶은걸. 식물을 기르는 타스쿠의 모습. 요즘 인기래. 식물 기르는 남자가."

"누가 그런 이상한 정보를 가르쳐 준거야. 오히려 너 잖아."

"난 별로 인기 없는거, 타스쿠가 더 잘 알면서."


츠무기의 눈은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기르는 식물들이 가진 초록이 깃든 눈동자는 깊은 숲처럼 바라보고 있자면 끝 없이 펼쳐진 것만 같다. 츠무기의 감독 하에 타스쿠는 선인장에게 겨우 한 모금도 안 될 정도의 적은 물을 주었다. 지나가며 가끔은 햇빛을 보라고 해가 들고 있는 창 아래에 당겨두었다.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걸 까먹었다고 떠올릴 때면 다시 선인장은 본래의 책상에 돌아와 있었다. 아마도 츠무기겠지. 츠무기는 그런 녀석이다. 어딘가 모르게 위태한 모습으로 휘청거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옆에서 호흡을 맞추어주고 있다. 상호보완이라기엔 이상한 관계였다. 이 관계의 이름을 타스쿠는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오래 된 친구. 츠키오카 츠무기. 


-


타스쿠는 결국 평범한 생크림 케이크를 사기로 했다. 겉 보기엔 새하얀 케이크 속에는 철을 맞기 시작한 생딸기와 딸기크림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케이크를 자르면 탄성이 나올지도 모르지. 생일 축하해. 츠무기에게. 글자가 적힌 초코장식을 케이크 위에 올리자 제법 생일 케이크라는 표시가 두드러졌다. 가장 먼저 생일 인사를 건네자. 그걸로 충분한 아침이 될 수 있도록.




츠무기 생일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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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소카 생 축 해 욧 



달과 생크림케이크



 

계절이 그렇게 흘러들었다. 가로수의 색이, 거리에 행인들이 입은 외투의 색이 겨울을 맞아 짙은 빛으로 바뀌었다. 따스함이 느껴지던 바람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연말을 맞이한 상점가는 작은 전구가 달린 장식물을 가로등 사이에 달아놓았다. 저녁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끝낸 히소카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무심코 한참 동안 서서 점멸하는 색색의 전구를 바라보았다. 깜빡이는 대로 눈을 깜빡였다. 여름에 함께 보았던 불꽃놀이의 반짝거림, 얼마 전 높게 뻗은 밤에 올려다본 별자리와는 다른 반짝임이지만 나름대로 거리를 빛내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배고픔을 느낀 히소카는 주머니에서 먹다남은 마시멜로 봉지를 꺼냈다. 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저녁시간에 늦을지도 모른다. 배가 고프다는 감각보다 커다란 공허함이 밀려온다. 혀 아래에서 녹아들어가는 마시멜로의 가벼운 달콤한 맛에 잠시나마 위로를 느낀다. 아침에 호마레가 매어준 머플러를 목에 한 번 더 둘렀다.

 

며칠 전, 츠무기를 정원에서 만났다. 낮잠을 길게 잔 탓인지. 믿을 수 없게도 졸리지 않았다. 보석같은 시간이 찾아오자 히소카는 오늘의 달이 무슨 모양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계절이 바뀌는 것 보다 더 빠르게 달의 모양도 바뀐다. 보일 듯 말 듯 어둠에 걸린 초승달과 차오르기 시작하는 상현달을 생각하며 정원으로 내려가자 야외 테이블에 츠무기가 앉아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대본책이 놓여있었다. 바람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밤의 정원을 즐겨보려고. 히소카에게 저녁인사를 하고선 싱긋 웃어보였다. 테이블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손에 들고 나온 마시멜로를 꺼냈다. 츠무기라면 하나 정도는 줄 수 있었다. 마시멜로를 츠무기에게 내밀자 그는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와아. 자랑해야지. 고마워, 히소카군."

"아리스한텐 말하지마. 귀찮아질 것 같아.."

". 정말? 호마레씨한테도 준 적 없는 마시멜로를 나에게 주다니..기뻐. 타스쿠에게 알려주면 깜짝 놀랄 거야."

 

미간을 찡그리며 허탈한 얼굴로 츠무기의 자랑 아닌 자랑을 듣고 있는 타스쿠의 얼굴이 떠올랐다. 타스쿠에겐 마쉬멜로를 줘도 기뻐하지 않을 테니. 주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츠무기는 손에 놓인 마쉬멜로를 손가락으로 작게 떼어 입에 넣더니 자극적인 단맛에 짜릿하게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히소카는 어둠이 내린 정원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여름엔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 자리를 깔아두고 낮잠을 자던 곳이다. 하늘에는 커다랗고 둥그런 만월이 떠있었다. 기운이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졸리지 않은 걸까. 하얀 상아색의 달은 손가락으로 쿡. 찍어 입에 넣으면 잘 빚어진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맛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마시멜로 처럼 달콤하진 않지만, 진하게 느껴지는 우유의 고소하고 깊은 단 맛도 히소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생크림 케이크 같아."

"그렇네. 하얗고 동그랗고. 예쁘지. 생크림 케이크. 왠지 딸기가 올라가지 않으면 아쉬워."

"마쉬멜로를 올리면 더 맛있을 거야."

"장식으로는 좋으려나. 전부 하얀 느낌으로...오미군에게 부탁해볼까. 히소카군의 생일케이크."

"생일.."

 

기숙사에는 많은 생일이 있다. 모두의 축하와 선물을 받고, 준비한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끄며 다음해의 소원을 빌었다. 생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히소카는 모른다.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날이 과거의 페이지를 잃어버린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제를 모르기에 내일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부터 호마레는 생일 선물로 무엇이 받고 싶은지, 이를테면 시대 최고의 시인이 쓴 축하 시를 예로 들며 히소카를 괴롭혔다. 마시멜로와 따뜻한 배게를 베고 잠을 자는 것 외엔 바라는 게 없었다. 그런 시시한 대답을 하자 호마레는 김빠진 풍선처럼 사그라들며 조용해졌다. 아즈마와 대화를 나누었다. 생일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한다는게 대단하다며 아즈마는 히소카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조금 더 살아 보았지만, 매년 생일은 다른 느낌이었다. 한 해를 무사히 보냈다는 기쁨과 내년도 마냥 온전히 지낼 수 있을지 두려움이 섞여있었다.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니라 멋진 조언은 하지 못한다.

 

"히소카가 원하는 대로 맞으면 된다고 생각해."

"그게 뭔지 모르겠는걸."

"그래. 마음속에 있을 텐데. 직접 겪어야 아는 것도 있으니까. 같이 생일을 기다려보자."

"."

"분명 즐거운 날이 될 거야."

 

아즈마가 눈을 접어 웃어주었다. 좋은 꿈을 꾸라는 인사를 하고 아즈마의 방을 나왔다. 조용한 한 밤중의 기숙사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꿈이 가득한 이 장소에 있기 때문에, 텅 빈 백지가 계절로 채워져 가는 것처럼 생일은 첫 글자를 쓴다. 달처럼 하얗고 동그란 생크림 케이크. 장식처럼 올라간 마시멜로와 선의가 묻어나는 축하인사가 가득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밤이 지나면 빛나는 나날이 다가올 것이다.

 

 

히소카 생일 축하해...저렴한 생축전 미안......이모가 많이 아낀단다...겨울조 안에서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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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개인적인 캐해석이 있습니다.

※연성교환 주제 : 아이스크림


주제를 제대로 못살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blue midnight 




blue midnight 


목덜미와 뒷머리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츠무기는 무의식적으로 술잔을 잡았던 차가운 손으로 뒷목을 안마하듯 주물렀다. 소리없이 아즈마는 하얗고 작은 술잔을 한모금씩 비우고 있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호마레는 예술과 일상, 최근 히소카가 관심에 두고 있는 마쉬멜로우 종류까지 쉴새없이 대화주제를 바꿔가며 이어간다. 아즈마가 제안한 오늘의 술자리는 호마레가 없는 기숙사에서 잠을 자고 싶다고 단칼에 거절한 히소카를 제외하고 겨울조 모두가 참석했다. 자리의 주최는 아즈마였지만, 그는 술자리에서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다 해답이 필요한 고민사항에 대해서만 짧고 무게감있는 말을 던지며 엷은 웃음을 띈다. 초승달이 휘어지듯 고양이같은 눈매를 접어 웃은 호마레가 흥이 가득 담긴 술잔을 다시금 치켜들었다. 몇 번째 건배사가 반복된다. 츠무기는 슬그머니 밀려오는 피로감에 잔을 드는 타이밍을 잠깐 놓쳤지만, 괜찮냐는 타스쿠의 말에 배시시 웃어보이며 잔이 비었다며 종처럼 흔들며 장난스레 대답했다. 호마레의 길어지는 건배사에 타스쿠는 이러다 팔이 떨어지겠다고. 불만 섞인 목소리를 터뜨렸다. 그러나 아랑곳없이 이어지는 시 낭독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오늘처럼 멋진날에는 이 천재시인 아리스가와 호마레의 시 한편이-."

"자아. 이미 세 편이나 들었다구? 잔을 오래 들고 있는것도 예의가 아니야. 건배."

"잔을 오래 들고 있는게 예의가 아닌가요, 아즈마씨?"

"그럴까나. 내가 방금 지어낸거지만. 후후."

"하하. 그럴듯한 임기응변이잖아. 하지만 동감이야. 건배사는 한 번으로 충분해."


타스쿠는 술 잔의 아래부분으로 츠무기의 술잔을 맑은 소리가 나게 건드리고는 목울대를 꿈쩍이며 맥주를 들이켰다. 타스쿠는 비교적 높은 도수의 일본주는 마시지 않았다. 대학시절엔 종종 마셨는지. 츠무기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역시 맥주를 더 좋아했었다. 시원스레 넘어가며 줄어드는 맥주잔과 타스쿠의 단단해보이는 턱과 목으로 시선을 옮긴다. 건배만 한 채로 내려놓은 잔을 멀끔히 바라보던 츠무기가 어깨를 날개가 커다란 새처럼 파드득 떨더니 이내 사케잔을 한번에 비웠다. 평소보다 빠른 템포였다. 어째서인지, 오늘은 술이 잘 들어가요. 멍한 얼굴로 츠무기가 입을 열었다. 금새 술이 오른 호마레는 졸리는지 술잔을 앞에 두고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기숙사에서 가까운 거리였으니 연락하면 누구라도 데리러 와 줄것이라고 내심 안심하는 모양이었다. 수요일의 가게는 조용했고, 자정이 가까워가는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테이블은 몇 개 없었다. 츠무기는 대학 졸업이후로 좀처럼 술을 많이 마실 기회가 없었다. 타스쿠의 말에 의하면 언젠가 술에 취해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으레 잊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들이다. 오히려 약한 부분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장난 오르골처럼 끊어지던 호마레의 말이 잦아들더니 고른 숨소리만 배경음처럼 남았다. 호마레의 고꾸라진 얼굴 앞에 손가락을 흔들어보던 아즈마가 키득거렸다.


"후후. 호마레가 완전히 취했나봐. 잠들었어."

"조용해 지는게 술버릇이라 의외이면서도..다행이지. 오늘은 미카게도 없으니 짐이 줄었어. 아리스가와 하나 정도는 데려갈 수 있을거야."

"그렇네. 기숙사와도 가깝고...츠무기는 괜찮아?"

"응. 아니, 네. 네에. 괜찮아요. 조금 빨리 마셔서 어지럽지만...그 정도는 걸을 수 있어요."

"좋아. 잠시 앉아서 쉬다가 돌아갈까. 계산은 내가 해둘게."


아즈마가 테이블 끝에 놓여있던 영수증을 들고 일어났다. 타스쿠가 돈을 보태겠다며 함께 따라나섰다. 저번에도 모두가 기분 좋게 취해있을 무렵 아즈마가 홀로 계산을 하고 돌아왔다. 타스쿠와 츠무기가 다음날 돈을 보태겠다며 얼마를 건넸지만 다음에도 함께 마셔달라는 뇌물이라며 아즈마는 손을 빠져나갔다. 호마레는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두사람이 떠나 텅 빈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의식하지 않던 술기운이 한번에 밀려온다. 물을 벌컥들이키고는 다시 손으로 목덜미를 주물렀다. 멍하니 들뜬 기분이 머릿속에 깔려있던 상념이나 잡다한 고민을 모두 삼켜버린다. 좋은 사람들과의 좋은 시간. 아즈마가 언젠가 말했던 문구이다. 과연 그렇다고 츠무기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호마레씨. 호마레씨. 저 잠시 바깥에서 찬 공기 쐬고 올게요. 타스쿠와 아즈마씨가 곧 올거에요."

"....으음..."

"...깊게 잠드셨네. 기숙사에 돌아가려면 정신차려야지. 후우."


손으로 뺨을 톡톡 때리며 츠무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걸음을 보이는건 부끄러웠다. 츠무기도 곧잘 마시는걸. 하고 아즈마가 말해주었고, 타스쿠는 언제부터 술이 늘었냐고 웃으며 물었다. 딱히 술이 늘거나 한건 아니었다. 가게 밖으로 나온 츠무기는 신고 온 단화의 뒷꿈치를 구겨넣고는 부러 깊게 숨을 쉬며 팔짱을 끼고 주변을 걸었다. 숨결에서 달큰한 술냄새가 났다. 머리가 멍하고 붕 떠있었다. 뭔가 단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시원한 밤 공기에 이마와 얼굴에 맴돌던 술기운이 점점 환기되고 있었다. 편의점은 직선거리에 간판이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츠무기는 눈을 감고 천천히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어갔다. 타박이는 신발 소리와 먼 곳에서 자동차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몇 발자국 뒤에 눈을 뜬 츠무기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스크림이 있는 냉동고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타스쿠였다. 걸음을 빨리하자 타스쿠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타스쿠? 가게에 있던게 아니었어?"

"...넌 누구야? 어째서 내 이름을 알지?"

"하하...장난치지마. 타스쿠. 방금까지 함께 있었잖아."

"난 방금 집에서 나왔어. 너 같은 사람은 몰라."

"에..?"


츠무기는 우뚝 서서 눈을 깜빡였다. 눈 앞에 있는건 분명히 타스쿠였다. 의심할 여지 조차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경한 얼굴이었다. 자세히 훑어보니 타스쿠의 티셔츠는 오늘 타스쿠가 입고 있던 티셔츠의 프린팅과 달랐다. 당황스러움이 술기운을 씻어버리고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츠무기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자신을 모른다는 타스쿠의 표정이 이렇게도 무서운것일까. 마른 침을 삼키고 타스쿠의 팔을 잡았다. 피부의 감촉이며 언뜻 풍기는 비누 향기까지 타스쿠였다. 츠무기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짤막한 단어를 더듬거렸다.


"네 이름..타카토 타스쿠..?"

"맞아. 하지만 넌 초면인데. 보아하니 술을 마셨군. 주정부리지 말고 이거 놔."

"그럴..리가. 꿈을 꾸는게...어라..어째서.."

"어어...어이, 왜, 왜 울고 그래. 이런.. 사람을 착각한것 같은데..우선 나와. 편의점 직원이 우릴 이상한 시선으로 보고있어."


어째서 눈물이 나는건지, 츠무기도 알 수 없었다. 술기운일 것이다. 팔을 놓으라는 말에도 츠무기는 옷 소매를 놓을 수 없었다. 가슴 속 무언가가 끊어진 듯 답답하고 숨이 먹먹했다. 타스쿠이지만 타스쿠가 아니라는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꼴사납게 굵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츠무기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간단한 차림으로 나온지라 닦을것이 없다며 타스쿠는 손으로 츠무기의 눈가를 닦았다.


"당황스럽네. 일행은? 휴대전화라도 빌려줄까?"

"있어. 휴대전화는 나도 가지고 있어. 정말 이상하네, 이상하네...타스쿠인데. 그렇지?"

"네 이름은 뭔데?"

"이상해. 타스쿠에게 이런 말을 다시 하게 되다니. 나. 츠키오카 츠무기. 너와 어릴 적부터 친구야. 같은 학교를 다니고, 연극부도 같이 하고. 지금도 함께 연기하고 있잖아. 장난치는거 아니지? 그거야 타스쿠는 이런 장난 치지 않을테니까."

"연기라...재밌겠네. 한번도 해 본적 없어. 딱딱한 성격이라."


타스쿠는 아무리봐도 거짓말 하는것 처럼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어떻게 된걸까. 눈으로 보고있어도 머리로 이해하게 힘들었다. 츠무기는 편의점에서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꿈을 꾸고 있다기엔 지면을 디딘감각도, 팔과 얼굴에 닿는 저녁바람도 현실적이었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얼굴을 감싼채로 고개를 파묻었다. 이렇게 까지 자신을 잃은건 처음이었다. 눈높이를 맞추려 쪼그려앉은 타스쿠가 위로하듯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릴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여러가지 기억이 한번에 샘솟았다. 타스쿠 앞에서 울었던 모든 기억이 섞이고 있다. 유년시절의 대부분이 그랬다. 언젠가 헤어질 때를 기억하고 있다. 타스쿠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뒤 돌아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렇게 놓은 손을 이제야 다시 잡았는데, 어째서 또 놓쳐버린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죄책감이 이어졌다.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츠키오카라고 했나. 진정해. 술 때문에 그렇겠지. 나도 가끔 술을 마시면 전 날의 기억이 엉망이되거나, 잊어버리거나 해."

"그런걸까. 타스쿠는 어떤 일을 해? 연기를 하지 않는 타스쿠는 무엇을 하고 있지?"

"나? 평범한 회사원인데. 지금은 담배를 사러왔어. 아이스크림 먹을래? 술이 좀 깰거야."


타스쿠가 내민 아이스크림 바를 받아 들었다. 일상적인 행동을 하니 불안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자기 몫의 아이스크림을 베어 문 타스쿠가 울음을 그친 츠무기를 보더니 안심하라는 듯 활짝 미소지었다. 꽃이 피듯 멋진 미소였다. 그러나 츠무기는 눈 앞에 있는 타스쿠가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타스쿠는 그런 식으로 웃지 않았다. 머리카락과 눈가를 만지는 손은 따뜻했다. 그 손은 타스쿠의 따뜻함과는 달랐다. 츠무기는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게로 걸어오며 보았던 초승달과는 다른 만월이 걸려있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일어나고 있는 일. 이 극단에 들어온 뒤로 몇 번 겪은 적이 있었다. 


"고마워. 으으. 이 나이에 울다니. 창피해."

"괜찮아. 술에 취하면 다들 그렇지. 연기를 한다면 배우야?"

"음. 그런셈이야. 새로운 극단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았어."

"네가 말하는 그 타스쿠도 배우인거야?"

"...응. 타스쿠는 나와 다르게 연기를 계속 했어. 멋진 배우야.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가게 돼."

"신기한걸. 넌 좋은 사람인것 같아.. 그 타스쿠가 부럽네."

"맞아. 그래서 난 타스쿠를 좋아해."

"그렇군. 부러운 녀석이네. 그 타스쿠."

"부러운거구나."

"네 눈빛이 무척 따뜻하게 바뀌었어. 그런 눈빛을 하게 만드는 녀석이라니 부러운거지. 난 좀처럼 연애를 능숙하게 하질 못해. 오래 가질 않아."

"에엣. 나랑 타스쿠는 그런 관계가 아냐. 친구야. 오래된 친구."


문득 의문이 들었다. 오래된 친구라고 하기엔 타스쿠에게 완벽한 설명을 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친구보다 더 신뢰하는 사람,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츠무기의 빈 부분을 채워 주는 사람. 머릿속에 떠올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이 있었다. 깊은 공간에는 타스쿠와 보냈던 시간, 타스쿠 없이 보냈던 시간. 타스쿠와 보낼 시간이 담겨 있다. 넓은 바다처럼 깊어서 영영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었다. 돌아가야한다고 츠무기는 마음먹었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전부 입에 넣었다. 알싸하고 시원한 바닐라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생각해보니, 눈을 감고 여기까지 걸어왔더니 이렇게 됐어. 반대로 해보면 뭔가 될지도 몰라."

"흠. 됐으면 좋겠네."

"고마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어. 타스쿠......응..?!"

"아니. 뭔가. 키스하고 싶은 기분이라. 네 말이 맞다면 다시 볼 일도 없을거고."


입술을 뗀 타스쿠는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 타스쿠가 손을 먼저 내밀어주었다. 이 손을 잡으면 연극 무대에 서는 기분이다. 끝나지 않는 커튼콜이 울리는 둘만의 무대였다. 눈을 감아도 어둡지 않았다. 츠무기는 눈을 감고 왔던 길을 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잡았던 손을 떨어뜨리고 츠무기는 계속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자리에 서서 타스쿠는 끝 없는 어둠을 응시했다. 한 치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곧 터벅이던 발자국 소리가 사라졌다.


'안녕. 츠무기.'



-



"츠무기, 츠무기!"

"어라. 어라. 타스쿠?"

"왜 혼자 나간거야? 괜찮아? 정말이지...아즈마씨에게 연락해야겠어..다행이야. 갑자기 가게에서 없어져서 깜짝 놀랐잖아."

"어떻게 된거지..분명 걷고 있었는데.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왔어. 

"츠무기..너란 녀석은.."


츠무기는 자신을 끌어안은 타스쿠의 품속에서 손에 남은 아이스크림 막대와 타스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계산과 아즈마와 서로 계산하겠다며 실랑이를 하고 돌아오니 츠무기가 없었다. 주변에 있으리라 짐작했지만 전화도 받질 않고, 가게 주변을 돌아다녀도 츠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기숙사로 먼저 돌아갔을리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아즈마와 갈라져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어린애도 아니잖아. 머릿속으로 되뇌이며 안심하려 해봐도 츠무기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위태로운 감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타스쿠는 멀리까지 뛰어갔지만 츠무기를 찾을 수 없었다. 기숙사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오미의 연락을 받자 불안감은 터질듯이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즈마와 다시 술집에서 만나기로 연락을 나누고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 벽에 기대 자고있는 츠무기를 발견한 타스쿠는 눈을 의심했다. 분명 10분 전엔 아무것도 없었다. 잔뜩 화를 내려고 마음먹었지만 편하게 잠든 츠무기의 얼굴을 보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품에 안아서 돌아왔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었다. 아즈마가 멀리서 손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츠무기가 귀에 입을 가져갔다.


"타스쿠. 타스쿠. 어서. 내 얼굴 봐. 아즈마씨가 가까이 오기 전에."

"뭐?"


타스쿠는 모르겠지만. 방금 타스쿠와 키스했거든. 츠무기는 타스쿠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조금 전에 받은 입술의 온기를 다시 타스쿠에게 전했다. 입술의 감촉은 미묘하게 다르고, 남은 술의 맛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오로지 이어진 밝은 빛을 상상한다. 그 밝은 빛은 무대 위의 조명. 박수 소리 없는 앵콜이 계속 되고 있다. 











Posted by michu615
,

※소부님의 설정을 차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폭력, 살인에 대한 미화묘사가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개인적인 캐해석이 다분합니다.



1편 조금 이전의 이야기




lost and found


  


미카게는 정확히 일주일 뒤에 돌아왔다. 큰 다툼이 있었다. 어깨와 옆구리와 복부에 칼에 베이고 총알이 스쳐 벌어진 상처를 뚝뚝 흘리며 돌아온 츠무기가 말했다. 타스쿠는 침착한 척 했다. 츠무기가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둘 중 한 명 정도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중요 급소를 노린것이 확실해보였다. 츠무기가 몸을 비틀어 동선을 피하고, 빠르게

 도망치는 장면이 머리에 그려졌다. 몇 년 간 함께 업계를 굴러왔던 츠무기의 행동 패턴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기술보다 본능이 시키는 몸동작이다. 그렇다 해도 상처는 깊었다. 가게에 있던 소독약을 전부 쓰고도 깨끗한 천에는 피가 계속 배어나왔다. 악력이 굉장한 놈이였군. 타스쿠가 츠무기의 등을 살피며 새빨갛게 부어오른 날개죽지에 쿨링젤을 듬뿍 발랐다. 차가운지 츠무기는 온 몸을 부르르떨었다. 츠무기는 붉은 피가 퍼져있는 옆구리의 상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미카게씨가 공격한거야."

"뭐? 그렇게 힘이 셌었다니. 그런 편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타스쿠는 타스쿠. 어째서-나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지않는구나."

"이미 벌어진 결과에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어? 미카게 히소카는 적이다. 그걸로 끝이야."

"적..인걸까. 좀 이상했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미카게 히소카와는 알고 지낸 지는 3년 남짓 되었지만 업계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비밀이 많은 청부살인업자라는것 말고는 아는게 없었다. 그렇지. 그는 독특한 식탐을 가지고 있었다. 단 음식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가끔씩 가게에 놀러오곤 했던 히소카에게 츠무기는 녹인 마쉬멜로우와 초콜릿을 녹인 코코아를 만들어 주었다. 이 두 사실 외에 타스쿠가 아는 것은 없었다. 사람에게 정을 붙인다던가. 그런 감상적인 활동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살인청부의 일은 배운게 그것 뿐이라 하는 것이었다. 일 할때 사적인 감정을 넣지 않는다. 그러나 미카게의 정체는 누구라도 호기심을 한번 가져볼만한 것이다. 물론 타스쿠는 가지지 않았다. 결론은-. 친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다. 신분을 숨기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지는 이 업계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찾는건 어리석은 짓이다. 


"평소와 달랐어. 뭔가..이유가 있었을거야."

"너 답지 않아. 츠무기. 어떤 이유가 있더라해도 널 죽이려했어."

"그게 그렇지. 난 미카게씨가 죽일만큼의 가치가 없을텐데. 필사적으로 공격했다는게.."

"평소답군."

"에엑. 평소의 날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웃으니까 상처가 울린다며 츠무기는 두꺼운 수건을 가져와 옆구리에 대고 눌렀다. 츠무기는 강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믿음의 문제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츠무기는 홀연듯 자취를 감쳤고, 몇 년 뒤 청부살인자가 되었다며 자랑스럽게 나타났다. 우연히도, 타스쿠도 그 직업에 흥미가 있던 차였다. 곧 손을 맞춰보았고, 예전부터 그랬듯 더할나위 없이 깔끔하게 들어맞았다. 츠무기는 유키시로 란 자에게서 건수를 받아왔다. 그에게서 기술을 배웠다고 했다. 근육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몸이었지만, 그렇다고 군더더기가 붙어 움직임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그게 츠무기로서의 최선이다. 동작이 큰 공격은 흔적만 크게 남아 비효율적이다. 


"몸에서 열이나. 며칠 일을 쉬어야겠어."

"침대에 누워. 날이 밝으면 병원에 가자. 유키시로에게 연락을 해두지."

"아냐. 내가 할께. 아까 유키시로씨의 부하도 있었어. 그들은 죽었어."

"그들..?"

"내가 센 숫자는 열한명. 모두 미카게씨 혼자서 죽였어."


츠무기는 조금 전의 참상이 떠올랐는지 다시 불안한 눈빛으로 타스쿠를 바라보았다. 타스쿠는 의자에 걸려있던 담요를 가져와 츠무기의 어깨에 덮었다. 츠무기는 대부분 모든 일에서 침착했다. 잘 웃는 편이지만, 그것 조차 조용한 웃음이었다.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것은 타스쿠도 보기 드물었다. 유키시로를 만난다며 나갔던 츠무기가 어째서 미카게에게 휘말린 것인지. 당장이라도 유키시로에게 뛰어가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타스쿠까지 다쳐서 돌아오면 츠무기를 진정시킬 사람이 없어지게된다. 타스쿠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츠무기와 같이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츠무기는 유키시로에게 무언가를 결핍당했다. 그것만 찾으면, 다시 밝은 곳으로 함께 돌아갈것이다.


"최고의 청부살인자란 말이 아깝지 않네."

"무서웠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미카게는 원래 그런 느낌이였잖아? 주변에서 폭탄이 터져도 꿈쩍도 하지않을거야."

"달랐어. 완전히 달랐어. 아무튼..한동안은 미카게씨를 보지 못하겠어. 아쉽네. 마쉬멜로우, 잔뜩 사뒀는데."



***


미카게는 정확히 일주일 뒤에 돌아왔다. 아직 츠무기의 어깨와 옆구리에 난 상처가 낫지 않았다. 츠무기는 당분간 일을 쉬겠다고 유키시로에게 말하고는 뜻밖의 휴가에 기쁜듯 취미로 키우는 가게 뒤 화단에서 종일 시간을 보냈다. 무리한 활동은 하지 않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정원 가꾸기란게 보기엔 가벼운 시간때우기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작물에 맞는 땅을 조성하고, 작물이 잘 자라도록 주변 환경을 바꾸고, 관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를 먼저 제거하는 노동적인 요소가 많은 취미이다. 반나절만 잡초를 뽑고 있어도 타스쿠는 진절머리가나고 머리가 빙빙돌았다. 타스쿠는 아직 더워지기전인 오전 나절동안 조깅을 하겠다며 가게를 나섰다. 적당한 속도로 10km쯤 뛰고 올 생각이었다. 적당히 빨라진 심장박동은 머리회전도 빠르게 한다. 넓은 챙에 끈이 달린 밀짚모자를 쓴 츠무기가 시원한 차를 준비해놓고 있겠다며 얼마동안 걸어가며 배웅했다. 아직 어깨를 들기 힘들어보였다. 미카게를 다시 만나게된다면 최소한 한 대정도는 후려갈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두어시간쯤 뛰고 가게로 땀에 젖은 채로 돌아왔더니, 미카게가 테이블에 앉아 코코아를 먹고있었다. 타스쿠는 영문을 잃은 채로 문 앞에 우두커니 섰다. 츠무기가 말했던 '완전히 다른' 미카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멍한 눈빛으로 커다란 검정색 후드 티셔츠를 입은 미카게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가리가 커다란 짐승처럼 여유로운 모습이었던 미카게는 얼마 전 다치고 돌아온 츠무기의 눈빛보다 더욱 불안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물에서 건져진 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도 할 줄 아는 구나. 타스쿠는 분노와 놀람이 뒤섞여 알 수 없는 얼굴을 하다가, 잠시 뒤 분노로 감정을 확정지었다.


"타스쿠. 왔어?"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 할 수 없어. 츠무기, 죽을 뻔 했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 어째서 코코아같은걸 만들어 주고 있는거지?"

"나도 믿지 못해. 하지만 한번 들어볼 가치는 있을것 같아. 유키시로씨의 비서가 미카게씨를 데리고왔어. 다쳤데. 해리성 기억상실 이라는 병으로. 지금의 미카게씨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가능한 걸까...싶지만..유키시로씨도 우리와 마찬가진가봐. 유키시로씨의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데리고 있을 수 없다는 모양이야.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뭐야. 우리보고 저 말도 안되는 괴물을 맡으라고? 정신차려. 츠무기. 아직 어깨도 들지 못하면서, 잊었어?"

"내가 뭔가 잘못한거야?"


나긋한 미카게의 목소리를 듣자 타스쿠는 이성을 잃고 미카게의 멱살을 잡았다. 굳게 쥔 주먹을 얼굴 앞까지 가져갔지만 미카게는 눈도 끔뻑이지 않고 타스쿠를 바라보았다. 풀색 눈동자에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치면서 삶에 대한 의지도 함께 잃어버린건가? 지금 당장 죽여주지. 타스쿠가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던 군용나이프를 꺼내 눈 앞에 들이밀었다. 순간 타스쿠가 본 것은 안심하는 눈빛이었다. 


"지금 죽여주는거야..?"

"하아? 미치겠군. 어이, 미카게. 정말 죽고싶은거냐? 연기해봤자 소용없어!!"

"그만해, 타스쿠. 나도 이미 몇 번이나 해봤어. 목에 칼을 가져가도 가만히 있었어. 예전의 미카게씨라면 절대 그렇지 않았겠지..."

"그게 뭘 증명한다는거야. 뇌라도 꺼내서 살펴보기라도 한거야? 당장 내보내. 기억을 잃었다니 농담도 적당히 하라고."

"- 거기까지. 나도 타카토군의 말에는 십분 동감이야. 하지만 그게 정말 '미카게 히소카' 라면 절대 이대로 보내 줄 순 없지."


츠무기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에서 유키시로의 목소리가 스피커 폰으로 울렸다. 숨기려하고 있지만 노기가 잔뜩 흐르는 목소리였다. 부하를 열 한명인가 죽였다고 했었나. 그래뵈도 가장 측근의 사람은 아끼는 족속이었다. 


"지금 나로서는 보는것 만으로도 머리를 부셔버리고싶어서 도저히 참을수가 없어. 츠무기가 당분간 일을 쉬어야하니...이건 내 사적인 부탁이야. 미카게 히소카는 이미 죽었어. 이 사실 만으로도 거리가

 시끄러워지고 있어. 우리쪽도 전력을 많이 잃었어. 거리를 안정시키는 것에 집중하려고. 가능하면 기억을 찾는 쪽으로, 불가능 하다면 예전의 미카게 히소카처럼 뛰어난 살인자로 만들어내. 계좌로 필요한 돈은 송금해놓지."


부탁한다. 유키시로는 짧게 한숨을 쉬듯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타스쿠는 츠무기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들어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그가 선불휴대폰을 이미 가지고 있을 리는 없었다. 업무용으로 쓰는 휴대폰에서 문자음이 울렸다. 휴대폰에는 유키시로가 말한 필요한 돈이란게 송금되어 있었다. 타스쿠는 미간을 구기며 손으로 관자놀이를 쓰다듬었다. 또 유키시로의 함정에 빠졌군. 자조가 담긴 웃음을 쿡쿡대며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일련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있던 히소카는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 말하는 듯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이라는 단어에는 힘이 붙어있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거짓말을 하는게 아니야. 거짓말이 아니야. 나는 거짓말 하지 않아."

"알겠어요. 미카게..히소카군. 히소카군이라고 부를게요. 나는 츠키오카 츠무기. 예전의 당신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저 남자는 타카토 타스쿠. 마찬가지로."

"...."

"이거. 맛있었어. 고마워."

"다행이네요. 취향이나 기호정도는 몸이 기억하고 있나봐."

"병원에 데려가는게 빠르지 않아?"


츠무기는 미카게의 상황을 설명한다. 사망처리가 되어 신분증명을 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으며, 위조 신분증명을 만드는것 쯤은 유키시로에게 손만 까딱하면 가능한 일이지만 머리를 깨부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어떤 부탁을 하겠는가. 처음부터 미카게의 신원증명서를 만들어 준 사람이 유키시로였다. 누구도 미카게가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떻게 자라서, 어떤 이유로 청부살인업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타스쿠는 알고 싶지 않은 쪽에 속했다. 어떤 괴로운 일이 있었다고 해도 살인자가 되는 이유로는 인정할 수 없었다. 츠무기는 금방이라도 미카게의 목을 조를 듯이 핏줄이 툭툭 올라온 타스쿠의 손을 손가락으로 더듬고는 잡았다. 긴 하루였어. 방에 올라가서 같이 빌려놓은 영화를 보자. 자물쇠가 풀리듯 타스쿠는 미카게의 멱살을 놓았다.


"히소카군에게는 남는 다락방을 쓰게 하면 되겠어."

"마음대로 해."




***




타스쿠는 히소카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놓지않고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했다.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느 순간 티가 나는 때가 올 것이다. 잠깐의 틈만 보여도 지체없이 가슴 주머니에 넣어다니는 소형 권총으로 머리를 쏴버릴것이다. 유키시로에겐 사고라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아마 유키시로도 처리문제로 골을 썩히고 있을 것이다. 이미 죽었다고 선포한 남자가 멀쩡히-모든 기억을 잃은채로-돌아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미카게 히소카였다. 이름을 들은것 만으로도 자살하는 타겟이 있을 정도로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살인청부업자. 그에대한 소문은 부풀려진 것도 몇 가지 있었다. 이를테면 미군에서 훈련을 받은 소년병이였다던지. 분쟁지역에서 버려진 난민이였다가 테러집단에서 자랐다던지. 그의 이국적인 외모가 불러오는 이물감이 업계에선 재미있는 이야기거리였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타스쿠는 그렇진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분쟁지역에서 저렇게 특이한 외모가 살아남을 리가 없다. 예전에 구경거리가 되어 참수된 머리가 마을입구에 걸려있었을 것이다. 타스쿠는 그 곳에서 말 도 안되는 일을

 수 없이 보았다. 마찬가지의 지옥이지만 종류가 다르다. 츠무기에겐 말하지 않았다. 츠무기가 말하지 않는 똑같은 시간동안 겪은 일이다. 공백의 시간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츠무기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돌리곤 했다. 말을 돌리는 패턴이 지겨워 타스쿠는 더는 그 기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기로 했다.


"타스쿠, 좋은 아침. 커피 괜찮아?"

"또 커피포트를 왼손으로 들고있잖아. 무리하지 말라니까."

"이제 괜찮아. 이것봐. 만세-.도 할 수 있어. 가벼운 일 부터 다시 시작해보려고 해. 시체처리는 어떨까. 히소카군에게도 견학시켜주려고."

"그게 무슨 좋은일이라고 견학이야. 의뢰는 몇시야?"

"오후 세시. 20분안에 처리."

"넉넉하군. 미카게는 어디있어?"

"아직 자고 있을텐데. 준비하려면 깨워야겠어."

"내가 가지."


타스쿠는 받아든 커피를 한번 홀짝이고는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츠무기가 무엇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뒤돌아서 2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원래의 미카게가 잠이 많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미카게는 비정상적으로 잠을 길게 자고, 잠에 이기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기억상실도 뇌손상의 일종이니 관련이 있으리라 추측해도 비정상처럼 보이는건 어쩔 수 없었다. 밥을 먹다가도 테이블에 코를 박고 잠에 빠지곤 했다. 미카게가 쓰는 창고겸 다락방 앞에 선 타스쿠는 방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다 문을 세게 두드렸다.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이. 미카게. 그만 일어나. 문 열어."

"문 열라고. 내말 안들려? 젠장. 어린애도 아니고...문 연다."


타스쿠는 두어번 더 문을 크게 두드린 후에 문을 열었다. 방에는 상자 몇 개와 바닥에 깔린 이불이 전부였다. 미카게는 이불 속에서 죽은듯 자고있었다. 큰 소리를 내면서 들어왔는데도 미동조차 없었다. 타스쿠가 혀를 차며 발로 이불을 걷어내자 츠무기가 입던 낡은 잠옷을 입은 미카게가 몸을 뒤척였다. 츠무기가 중학생까지 입던 하늘색의 잠옷이었다. 미카게는 츠무기보다 작은 체구인지라 옷은 형편없이 헐렁했다. 꼴사납군. 타스쿠는 몸을 숙여 미카게의 목덜미를 잡아들었다. 일어나. 언제까지 먹고 자기만 할거냐고. 밥먹은 값은 해야지. 나는 널 인정못해. 그런식으로 도피하는 패배자는-. 


"...좋은 아침. 타스쿠..우.."

"어이..던져버리기 전에 제대로 눈뜨지 못해?"

"졸려.."

"한심하게. 오후에 일이 있어. 언제까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셈이야?"


아무것도. 타스쿠의 마지막 말을 되풀이하던 히소카가 몸을 일으켜 섰다. 왠일로 순순히 따라오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자기 몫의 마쉬멜로우가 잔뜩 든 코코아를 집어들었다. 츠무기가 시체처리를 하러 갈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이가 막 죽인 시체를 흔적이 남지 않도록 포장해서 가게로 가져오는 간단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높은 곳에서 총을 쏘는 방법은 안전하지만 시간이 많이 들고,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사람이 죽어버리기에 눈에 띌 가능성이 있다. 처리반이 주변에 상주하고 있다가 빠르게 처리하는게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중요하다. 히소카는 알아 듣고 있다는 듯 고래를 끄덕였다. 


"괜찮겠어? 아직 총을 사용하기엔 무리지 않을까. 차라리 내가 하는것이."

"아냐. 오래 쓰지 않으면 감각이 무뎌지니까. 이쯤이 제격이라고 생각해. 한 발로 안 될 수도 있으니, 세 발 정도 예상해줘."

"츠무기가 죽이는 거야?"

"응. 어떤 타겟이냐에 따라 접근 방식을 다르게 해야해요. 타스쿠는 저격보다는 접근전에 강하고. 저는 그 반대고. 그래서 우리가 팀을 만든거죠."

"그럼 나는?"

"히소카군? 음...히소카군은..뭐든지 잘했던걸로 기억해요."


츠무기는 무겁게 보이는 검은 서류가방을 꺼내 비밀번호를 능숙하게 돌려 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에는 분리된 장총이 들어있었다. 건조한 천으로 부품을 꺼내 하나씩 닦으며 히소카에게 부품의 이름과 조립방법을 말했다. 예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니 조금이라도 기억나는게 없냐고 묻자 히소카는 고개를 저었다. 히소카라는 이름 외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츠무기는 다시 위화감을 느꼈다. 총을 조립하고 지지대를 꺼내 연결해보고, 보안경과 정밀렌즈를 함께 챙겼다. 타스쿠는 커다란 모포자루와 비옷을 챙겨 밴에 옮겨넣었다.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뒤 뜰에 심어놓은 모종에서 싹이 나왔더라고. 히소카군도 함께 물을 줬어. 호응을 유도하는 츠무기의 말에 타스쿠는 무덤덤하게 그랬겠지. 하고 짧게 대답하며 걸어갔다. 


"히소카군에게 무기를 주는 게 좋을까? 총은 무리겠지."

"말도 안돼는 소리. 내 옆에 가만히 있을건데 무기가 왜 필요해. 뭐, 죽으면 거기서 그만일테지."

"타스쿠도 참. 뭐, 위험하지 않으니까. 괜찮을거야. 히소카군."


츠무기는 히소카에게 등에 맞는 백팩과 타스쿠 몰래 들고 있으라며 주머니칼과 비상약품이 든 패키지를 넣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바로 유키시로씨에게 넘기고, 외식을 하자. 츠무기의 말에 뒷좌석에 앉은 히소카가 가슴에 안고있던 백팩을 꼭 끌어안았다. 츠무기 몰래 마쉬멜로우를 한 봉지 넣어두었다. 차가 출발하고 곧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다. 요람처럼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차의 진동에 전혀 기억나지 않는 태초의 안심이 떠오른다. 눈을 몇 번 가물거리더니 히소카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타스쿠가 그럴 줄 알았다고 뒷 좌석을 비춰보더니 꺼내는 볼 멘 소리와 웃으며 받아 넘기는 츠무기의 소리가 자장가 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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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개인적인 캐해석이 있습니다.

※연성교환. 주제 문장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인력의 저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기숙사 방문을 연 호마레는 고요한 방의 낌새에 흠. 작은 콧소리를 내고는 눈을 좌우로 돌렸다. 마쉬멜로우 이외의 음식을 히소카에게 먹이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이 필요하다. 츠무기는 어린 아이를 달래듯 타이르는 방식을 사용했고, 호마레는 뒤에 있을 보상인 마쉬멜로우를 언급하는 방식을 썼다. 타스쿠와 아즈마도 종종 둘의 잔소리에 말을 보탠다. 그래도 20대의 성인 남성이 먹는 양이라기엔 너무 적은 양을 먹었다. 오미가 히소카의 영양실조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말을 한 적디 있었다. 생각보다 마쉬멜로우의 열량은 많은 편이라고, 대신 변명하듯 호마레는 말했다. 확신할 근거는 없지만. 히소카라면 그렇게 해도 살 수 있을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막 생기기 시작한 겨울조의 씨앗 앞에 소나기처럼 나타난 히소카였다. 금새라도 사라 질 것 처럼 희미한 존재감을 가졌던 그가 점점 뿌리를 내린다. 연기라는 장르를 알지도 못했을 히소카가 처음 보여준 연기는,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을 불러와 머리에 입력한 듯한 모습이었다. 연기이긴 하였으나, 연기 같지 않은 종류였다. 오히려 초혼이나 빙의가 더 알맞았다. 호마레는 그 순간. 스산함을 느꼈다. 살아 있는 진짜 사람이 맞는 것일까. 하고 우스운 의문이 떠올랐다. 초현실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맹신하는 편이 아니지만, 만카이 극단에 들어와 겪은 일련의 일들로 부정할 수도 없었다. 평범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처럼, 천재인 호마레로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란게 있을 것이다. 히소카는 살면서 겪어온 부조리의 정 반대편에 서있었다. 오히려 동류라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일찍 저녁을 먹은 히소카는 먼저 방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어째서 방에 없는 것일까.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갑자기 마음이 동해 밤 산책을 났을 지도. 호마레는 눈을 감고 마음속의 돋보기를 꺼냈다. 사람이란 살면서 한번 쯤은 신기한 일을 겪는 법이다. 남을 보는 눈이라고 하면 장님이나 다름 없던 호마레의 마음에 동하듯이 나타난 돋보기는 이제 손에 잡히지 않지만, 상상하며 헤아려본다. 히소카군이라면 만족스럽지 않은 저녁을 먹은 뒤에 어디로 향하겠는가. 그래. 반짝였다. 호마레는 손가락으로 소리를 내며 종종걸음으로 중앙정원으로 향했다. 츠무기가 봄부터 정성들여 가꿔놓은 정원은 초여름을 지나 저마다의 녹색을 뽐내고 있었다. 히소카는 짧게 깎인 잔디가 드리운 땅에 서있었다. 사그락거리는 잔디 밟는 소리가 호마레의 존재를 알렸다. 


"맞췄다네. 히소카군?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로 비친 달이 아름다웠으니, 자네가 정원에 나와있을거라 생각했다네."

"..정답. 축하해."

"같이 달구경이라도 하고 돌아감세. 이런 곳에 앉아있지말고, 저어기. 츠무기가 아끼는 야외 테이블에서. 홍차를 마실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홍차보다는 마쉬멜로우."


호마레는 대답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은지 눈을 접어 쿡쿡 웃었다. 평소처럼 어긋나는 대화의 모양새가 재미있다. 호마레가 내민 손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사교댄스에 응답하듯 가볍게 손을 겹친 히소카는 왠지 모르게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날렵하고 기민한 몸을 가진 그였다-. 호마레는 이상하게 이질적인 높이감에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히소카의 발이 지면에서 미묘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히소카는 공중에 물장구치듯 걷고 있었다. 세간에서 기인이라는 평을 받으며 살아온 호마레로서도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오래된 SF소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자전거를 타고 달 그림자가 되는 소년과 외계인의 이야기. 하나의 발걸음 소리만 들리는 정적을 깨고 호마레가 입을 열었다.


"..히소카군? 어쩐지..뭔가...커진 기분이 드네만. 착각이 아니라..발이 떠 있는.."

"아..응. 그렇네."

"이럴때까지 침착한겐가. 너란 아이는."

"놀라고있어. 나, 천사가 된걸까."

"이거야 원. 이곳에 와서는 신기한 일 투성이군."

"맞아."


만월이 가득 찬 밤이었다. 달의 인력에 이끌린 것일지도 모른다. 평면에 쓰여진 대본이 연극으로 인해 현실이 되듯, 머릿속으로 떠올린 장면이 펼쳐진다. 느린속도로 조금씩, 벌어지고 있던 균열은 침착하고 착실히 히소카 안에서 쌓인 비현실의 지층이 되고. 마침내 땅에서 멀어진다. 히소카는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조용한 멀어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다른사람보다 훨씬 자는 시간이 많은 것도, 평범한 식사는 모래를 씹는 맛이라는 것도. 평범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히소카로서는 당연하다. 누구도 다른 이를 완벽하게 이해하는것은 불가능하다. 호마레는 그것으로 오랜기간 괴로웠다고 한다. 어째서. 히소카라면 그런 고민은 십분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호마레는 표정변화가 많았다. 높은 소리로 웃다가도 금새 가라앉아 날카로운 눈매가 되기도 했다. 연기를 하지 않아도 연극을 하고 있는것 처럼. 관찰하고 있는건 흥미로운 일이다. 호마레는 발과 떨어진 공간을 바라보며 이내 비애에 빠진 얼굴을 한다. 


"히소카군. 이 곳에서 사라지고 싶은겐가."

"글쎄. 어떨까."

"애매한 대답은 괴롭다네."

"괴로워? 내가 사라지면..아리스는 괴로워지는구나."


히소카는 다시 땅에 발을 딛었다. 호마레는 이것을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겼다. 히소카와 함께 지내며 설명하기 가장 힘든 것은 히소카 자체라는걸 깨달았기에 잠깐 놀란 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뜀박질 한 정도로 낮은 높이로 떠 있던 히소카는 점점 더 지면과 멀어졌다. 기숙사의 방 밖을 나갈때엔 손을 잡아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겪고 있는 본인도 원인을 모르는 현상을 보여주면 시끄럽고 혼란스러워 질것이라고 히소카는 말했다. 며칠 전 히소카는 보기 드물게 책을 읽고 있었다. 아무래도 달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츠무기에게 부탁해 빌린 책을 읽으며 달의 중력은 지구의 반의 반보다 작기 때문에. 달의 이끌림 보다 지구의 이끌림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되새겨 속삭인다. 저녁식사 시간. 최근, 사이가 더 좋아졌다는 말을 아즈마에게서 들었다. 손을 잡고 다니는것이 보인 탓이다. 억지로 잡아당기고 있다-라고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어두운 표정이었다. 호마레는 적당히 식사를 마치고 기숙사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온 호마레를 불안하게 일그러진 눈으로 그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다급하게 불렀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방의 천장에 히소카가 붙어있었다. 히소카도 동요한 눈치였다. 침대에서 자고 있길래 깨워서 저녁 식사에 데리고 오지 않았더니 이런 결과다. 아리스. 이름을 부르는 히소카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흔들리고 있다.


"나는 점점 더 멀어질거야."

"말하지 않아도 보고 있다네."

"붙잡아 줘. 아리스가 괴로워 하는건 보고 싶지 않아."

"누구를 위해서-. 말해주게. 말하지 않으면 나는 알 수 없다네."

"아리스라면 할 수 있어. 아직 이 장소와. 아리스와 함께 있고 싶어."

"이리오게나. 히소카군."


호마레는 모서리 앞에 서서 양 팔을 벌렸다. 히소카의 몸이 천장에서 자석 떨어지듯 가볍게 천장에서 톡, 솟아 오르더니 갑자기 무게를 얻어 빠르게 품으로 떨어졌다. 몸을 받아내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며칠 전보다 무거워졌다. 그것 만큼의 현실감이었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랑을 하고 싶다고 바라고 있었다. 손을 내밀면 잡고, 얼굴을 만지면 눈물이 고이는 사랑을 기리며 몇 개의 감정을 땅에 묻었는가. 이미 평범한 사랑이 아니었다. 무덤을 파헤치고 식어버린 감정을 삼키려다 새로이 태어나는 감정을 놓치고 만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확실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인력은 쌍방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책의 뒷장에 써 있었다. 거리감을 유지하게 위해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싸움을 반복하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푹 안겨있던 호마레가 손으로 팔을 밀어 숨구멍을 틔어냈다.  


"무겁다네. 히소카군. 그리고 놔 주게나."

"놓지 않을거야."

"호오. 히소카군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평범한 사랑이란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사랑인게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아무것도 없던 진공은 두개의 질량으로 가득 차오른다. 달이 차올랐다 기울어지며 만드는 인력의 차가 파도치며 밀려온다. 한동안 히소카는 호마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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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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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달성 보상!

 

※개인적인 캐해석이 다분합니다.

 

어떤 기억상자

 

창 밖으로 타스쿠가 보인다. 3층의 교실에서 내려다보는 운동장에서 한 무리가 모여 축구를 하고 있다. 왁자지껄한 웃음이 섞인 고함소리가 교정을 휘어감는다. 그 사이에 타스쿠가 있었다. 한참을 타스쿠의 동선에 눈을 따라간다. 체육복을 입고 주위의 친구들에게 손을 휘두르며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멀리 있어도 몰아쉬는 타스쿠의 숨소리를 떠올리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흙과 땀으로 엉망인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고는 숨을 돌리려는 듯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간 서있다가 창문을 향해 커다랗게 손을 흔들었다. 어라. 이쪽을 보는걸까. 턱을 괴고 있던 츠무기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점심시간과 오후 수업시간 중의 짧은 휴식시간. 교실에는 츠무기 외엔 창문을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양 팔을 들어 휘휘 젓던 타스쿠가 이번에는 입가에 손을 모아 소리쳤다. 어느샌가 타스쿠 주위로 몇몇이 모여들었다. 함께 손을 흔들어주는가하면 손가락으로 츠무기가 앉은 창가를 가리키며 펄쩍뛰는 녀석도 있었다.

 

"어이-. 츠무기."

 

그런 입모양이었다. 3층이라 들리지 않지만, 분명 그렇게 말 했을 것이다. 익숙한 목소리는 머릿속에 저장되어서, 듣지 않아도 머릿속에 울려퍼진다. 츠무기는 작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빌렸던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러 가야만했고, 가는 길에 운동장에 들러볼 수도 있었다. 서랍 안에는 며칠 전 받은 진로희망안내서가 그대로 들어있다. 형식적인 종이라고 해도 망설이고 있다. 지루한 논쟁이라 하더라도 진로와 꿈이 같은 선상에 있는지 아직 츠무기는 판단할 수 없었다. 이 중요한 문제야말로, 어린시절부터 친구였던 타스쿠와 상담을 해보는게 좋을테지만. 츠무기는 타스쿠의 진로용지에 어떤것이 적혀있을지 짐작하고있다. 둘이 함께 바라보는 객석의 풍경과 대본속의 세계를 동경하게되면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막이 펼쳐진다. 연극속에서 둘은 연인이 되기도 하고, 적이되기도 했다. 츠무기는 연극부활동의 참고도서로 빌렸던 소설책을 들고 있었다. 1층으로 내려와 도서관으로 바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운동장으로 향했다. 운동장계단에 모여있는 무리로 다가가자 같은 반의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타스쿠는 차가운 타월을 목에 감고 있었다.

 

"방금 들었어? 츠키오카-. 하고 크게 외쳤는데."
"하하, 무리야. 3층이였다고."
"일부러 내려온거야, 츠무기?"
"응. 도서관에 책도 반납해야하고. 그보다 타스쿠가 불렀잖아?"
"아아. 보이길래 무심코. 도서관..같이 갈까."

 

타월로 얼굴을 닦아낸 타스쿠가 축구공을 손에 들고는 나머지 손으로는 츠무기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책은 이번 연극대본의 원작이였고, 츠무기가 빌린것을 타스쿠도 함께 읽으며 연구했다. 문학은 츠무기의 특기였다. 이 문장에서의 주인공의 기분이나 마음은? 처럼 터무니없는 질문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설명하고 표현할 수 있었다. 섬세한 감정이나 대사를 만들어내는것도 특기다. 대게 섬세한것은 예민하지만. 츠무기는 특유의 분위기로 날카롭지 않게 누그러뜨리곤했다. 타월로 닦아냈다고 해도 아직 운동으로 뜨거워진 몸으로 츠무기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부딪혀오는 몸에 츠무기는 케헥. 하고 같잖은 감탄사를 뱉었다. 손을 잡아도 키차이가 나지않던 어린날과는 다르다. 손을 잡지않고, 서로를 타쨩과 츠무라고 부르지않는다. 다만 작지만 같은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무거워. 타스쿠는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성장기니까. 츠무기 넌 좀 무거워질 필요가 있고."
"으윽. 이렇게 누르면 자라던 키도 멈춰버리겠어."
"작년부터 전혀 크지 않았잖아. 그보다, 츠무기. 진로용지 써냈어?"
"음...아직이랄까. 아직 정하지 못했어."
"정하지..못했어. 인가."

 

츠무기는 이 순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손을 놓아버리는 순간. 어깨에서 떨어지는 타스쿠의 무거움이 무겁다. 얼마만큼 연극을 좋아하는가. 그걸 얼마나 삶으로 이어가느냐. 매진할것이냐. 모든것이 동등할 순 없다. 도서관까지 걸어가는 짧은 거리동안 긴 침묵이 계속되었다. 타스쿠의 굳게다문 입술과 살짝 구겨진 이마가 그의 언짢음을 여지없이 보여주고있다.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 놓여진 길은 하나였다. 이제와서 길은 열려있으니 자유롭게 선택하라는건 억지스럽다. 오히려 길에서 내쳐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진학할거란 생각은 가지고있지만. 어떤것일지 망설이고 있어."
"거기에 연기라는 선택지는 있는건가."
"그렇지. 물론, 다른걸 공부하더라도 연기는 계속 하고싶고...배우라도 다들 다른 직업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고."
"뭐, 그거야 그렇지."
"잠시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께."

 

나는 아니야. 라는 말이 귓가에 울린다. 숨겨진 말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츠무기는 어색하게 웃어보이고는 타스쿠의 손에 들린 책을 받아내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츠무기는 이번에 준비하는 연극을 위해 공책을 두권이나 썼다. 그렇게나 연기와 연극을 좋아하는데도 다른 선택이 가능한 것일까. 츠무기를 잘 알고 있기에 화가 났다. 무엇이 츠무기를 망설이게 하는건지, 그런건 말해주지 않는다. 물어도 분명 말해주지 않겠지. 어렸을때는 곧 잘 고민을 말하면서 울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츠무기는 타스쿠앞에서 울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나오는 츠무기의 얼굴은 예전에 보았던 우는 얼굴과 닮아있었다. 웃는 표정으로. 츠무기는 역시 섬세한 감정표현에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금새 평소의 대화주제로 돌아간다. 부활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심부름으로 들릴 가게가 있다고 츠무기가 말하고, 타스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로에 대한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다. 츠무기는 두 가지 안을 썼다. 대학 진학. 공무원으로의 취업. 학과는 끝내 적지 않았다. 그게 타스쿠에대한 최소한의 의리였다.

 

 

-

 

 

 

"라는 일이 있었지. 타스쿠, 기억나? 진학희망안내서 내는 날 말이야."
"뭐. 대충은."
"꽤 고민이였지-. 혹시 함께 연기를 못하게될까봐.."
"어이, 셋츠. 진로같은건 본인이 선택하는거야. 가타부타할 생각은 없어."
"에에. 그래서 그렇게 삐져있었어? 며칠동안 화난 얼굴이였잖아, 타스쿠."
"내가 언제."
"언제라니..잊지않았으면서. 그러니까, 결론은...하고싶은것이나, 해야만 하는것이나. 어떤것을 선택해도 어떻게든 길은 찾아 돌아오게 되어있으니까. 지금의 반리군의 선택에 맡기면 되는거 아닐까?"

 

"하아? 그거 너무 책임감 없는 대답 아니냐고, 츠무기씨."

 

커피를 다 마시고도 끝나지않은 츠무기의 말에 지겹다는 듯 빨대를 씹어대던 반리가 드디어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셋츠 반리의 이름만 적힌 진로용지를 저주라도 걸린 종이인것 처럼 손가락으로 끄트머리만 잡고 구기듯 접었다. 적당히 적어서 내려는 것을 하필이면 이 연극바보콤비에게 들켜버리고 만것이다. 둘러대려했지만 이미 두 사람은 과거회상에 돌입해버렸다. 츠무기는 타스쿠의 옆구리를 지르며 끝까지 뭘 적었는지 말해주지 않을것이냐며 툴툴거렸다. 물론 타스쿠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예전일을 말해서 뭐하느냐고 딱 잘라 말했다. 보면 볼수록 어울리는듯 어울리지 않는 콤비라고 반리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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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소부님의 설정을 차용했습니다.

※살인, 폭력, 기타 비도덕적인 소재 다량 있습니다.




fresh flesh 





유키시로 아즈마가 가게에 찾아왔다. 평소라면 두어명. 무서워보이는 인상을 한 남자들을 악세사리처럼 달고있었지만 오늘은 혼자였다. 히소카는 조용한 인기척에 엎드려 졸고있던 매대에서 고개를 들어 잠결에 희미한 시야로 새하얀 인영을 확실히했다. 그의 존재는 가게에 있어 필요불가결하다-.고 츠무기가 일전에 말했던 것을 히소카는 기억하고 있었다. 히소카는 오전 9시쯤 츠무기와 타스쿠가 함께 가게를 나섰고, 아마도 손님을 만나기 위함일 것이라고 천천히 말했다. 아리스는-아즈마는 히소카가 부르는 아리스라는 호칭에 대해 흥미로운 듯 제법  밝게 웃었다-출판사와의 미팅. 그리고는 다시 말 없이 아즈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용무가 있을만한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없으니 떠나달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긴 눈빛이었다. 


아즈마는 가게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손님이다. 하얀 괴물. 아즈마가 어느 세계에서는 그런

 호칭으로 불린다. 그의 눈 밖에 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오싹한 도시전설과 함께. 그 도시전설을 실행하는 것이 가게이다. 손님을 대하듯 차나 자리를 권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이는 히소카 대신 아즈마가 앉아도 되겠지? 하고 가게에 하나 놓인 먼지쌓인 테이블과 조잡한 철로 된 간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에게는 위험한 기운이 느껴진다. 발톱을 숨기고 있는 매처럼. 목을 조여오는 뜨거운 더위에 보란듯 격식을 차린 정장을 입고도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뱀의 껍질을 쓴 사람같다고 히소카는 생각했다. 구식 선풍기가 히소카가 앉아있는 고기진열용 유리장 앞에 놓여있었다. 해체작업을 하는 냉동고가 시원했기때문에, 더위를 느끼면 히소카는 냉동고에 들어가 입김을 불어내다 나오곤 했다. 냉동고는 언제나 겨울이다. 


"후후. 오늘은 미카게군을 찾아온거라. 다른 사람이 없는 시간을 일부러 택한걸."

"...나에게 무슨 용건이 있어? 난 그저...아리스가 저번에 가르쳐준 단어였는데. bucher. 도살자."

"그럴까나. 미카게군은 자신의 가능성을 너무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어. 물론, 지금의 용건은 도살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미 죽은 이후엔 어떻게 되도 상관없지 않았어? 당신은."

"눈에 띄지 않는다면 말이지. 나는...결벽증이라고할까. 그런게 좀 있거든. 맞아. 좀 어려운 단어였네. 더러운걸 보지 못한다는..뜻이야."

"시체는 더럽지 않아. 잘 세척하는걸."

"미카게군의 처리실력을 의심하는건 아니야. 다른 이도 아닌 내가 어떻게 그럴수 있겠어. 이건 표면적인 차원이 아니라.."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츠무기와 말하는 게 어때?"


기억을 잃게되면 지능도 떨어지는건 아닐까 아즈마는 잠시 생각한다. 처음엔 미카게가 기억을 잃었다니. 말도 안되는 변명이라고 분노했다. 사람의 기억이란게 물건도 아니고, 어떻게 한 순간 사라질 수 있겠어. 업계에서 벗어나려면 파격적인 원인이 필요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진흙이 묻은 몸을 씻지 못하고 사라진다. 아즈마는 결벽증이 있었다. 미카게는 업계를 떠날 이유가 없었다. 아즈마가 아는 미카게 히소카라는 남자는 살육을 위해 태어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살인자였다.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것 조차 이전의 그가 듣는다면 실례가 되지 않을까 망설여진다. 아즈마는 한때 미카게를 두려워했다. 공포에 군림하는 아즈마에게 공포란 감정을 느끼는 기재자체가 없는 미카게는 다루기 힘든 미지의 존재였다. 지금의 얼빠진 모습을 보고있자면 일말의 동정심마저 느껴진다. 미카게는 츠무기와 연결시켜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느적거리며 안으로 연결된 방으로 들어갔다. 기억을 잃었어도 여전히 제멋대로인 점은 똑같았다. 기저에 있는 기질같은 것이겠지. 


"다음에 다시 올게. 츠키오카군..만이라면 괜찮으려나. 늘 타카토군과 함께지. 타카토군은 좀 곤란한데.."

"지금 츠무기가 온대."

"앗. 안에 들어간건 전화를 위해서.. 나도 참...미카게군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렸어."

"수상한 사람이 오면 언제든지 전화해. 츠무기가 말했으니까."

"수상...나 그런 이미지였어? 유감인데. 미카게군과는 깊은 유대가..뭐. 말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아즈마는 입맛을 다시더니 포기한 듯 자리에 다시 앉아 턱을 괴고 앉아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츠무기가 숨을 몰아쉬며 가게로 들어선 것은 채 이십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동안 히소카도, 아즈마도 아무 대화없이 가만히 가게 밖 백색소음을 들었다. 가게의 간판은 정육점의 것이었지만 가게에 고기를 사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빨간 조명이 달린 고기용 진열장을 놓아두었지만 먼지만 뽀얗게 쌓여있었다. 히소카는 진열장에 자신의 작품이나 다름 없는 해체육들을 놓아두면 어떨까-. 하고 상상해본다. 괴로운 얼굴로 죽은 머리도 예술적이라고 아리스는 말했다. 예술은 그로테스크, 드라마틱, 비극, 고통, 그런 여러 단어로 치환된다. 이것 또한 아리스의 문구이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문장을 만드는게 히소카에겐 어려웠다. 기억이 사라진 탓이겠지. 아마도. 먼 곳에서 탁탁 거리는 뜀박질 소리가 들리더니 가게의 입구 위에 달린 작은 종을 울리며 츠무기가 뛰어들어왔다. 새빨개진 얼굴로 어두운 시트지가 발린 가게의 문을 잡고 숨을 헐떡였다. 


"유키시로씨?? 연락도 없이...하악...허억...어쩐..일.."

"츠무기, 체력이 여전히 약하구나. 언젠가 발목을 잡게 될거라고 말했을텐데."

"헉...허억...그..그게아니라.. 미카게군이.."

"수상한 사람. 오면 연락하라고.."

"물론 그렇지만, 그건 처음보는 사람이나..유키시로씨는 미카게군도 종종 봤잖아요?"

"말릴수 있다면 말렸을텐데. 미카게군의 기척은 나도 알아차리기 어려웠어. 연락없이 찾아와서 미안해. 다음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아즈마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입구로 걸어갔다. 입구에 서 있던 츠무기가 문고리를 잡고 자신을 막아서는 듯한 자세를 취해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츠무기로서는 아즈마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는 본인이 더 잘 알고있는 바였다. 이 세계는 약육강식. 필요에 의한 관계가 끝나면 완벽한 아군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용건이 있어서 오셨던거 아닌가요? 가게로 직접 찾아왔다는건.."

"근처를 지나가다 문득 들렸어. 용건. 미묘한 문제가 생겨서. 한 가지만 확실히 하지. 시체를 다시 되판다던지, 보관한다던지. 그런 짓을 하고 있는건 아니지?"

"물론이죠. 특히 유키시로씨의 주문 건은 다짐육으로 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됐어. 타카토군이 오면 시끄러워질테니, 난 여기서 이만."


아즈마는 눈을 내리깔더니 겨우 숨을 고른 참인 츠무기의 어깨를 살짝 만지더니 딸랑이는 가게 종을 울리며 밖으로 나갔다. 무거운 공기가 일순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츠무기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히소카에게로 다가갔다. 아무일도 없었지. 마침 계약건이 거의 끝나서, 나머지는 타스쿠에게 맡기고 뛰어왔다며 히소카가 묻지도 않은 사이의 일까지 조곤조곤 말했다.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손에 숨겨 쥐고있던 군용칼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휴대폰을 꺼내 타스쿠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키시로씨였어. 응응. 별일이긴 하지. 아무 일 없이 돌아갔어. 나머지는 돌아와서. 재고확인? 그렇네. 해봐야겠어."

"재고확인?"

"만일을 대비해서. 내가 할테니까, 미카게군은 쉬어도 좋아요. 음, 불러줘서 다행이네. 고마워요."

"천만에." 


츠무기는 냉동고의 비밀번호를 능숙하게 치고 문을 열었다. 멀리 앉은 히소카에게까지 냉기가 전해져왔다. 냉기에 시체의 축축한 냄새가 섞여있다. 싱싱한 사체가 들어오면 장기를 꺼내 세척한 뒤 한달 이상의 숙성이 기본이다. 사체가 가진 이름이 세상의 관심에서 잊혀질 때에 딱딱하게 얼은 사체덩어리를 꺼내 냉동육 자르는 기계에 넣어 조각낸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분쇄기계를 바라보고 있자면 이상한 만족감이 느껴진다. 츠무기는 작은 수첩을 꺼내 재고와 물건을 맞추고 있었다. 가게의 의뢰와 작업은 모두 츠무기의 손을 거친다. 


"다리..스물다섯개...좋아. 숫자는 모두 맞아요. 다만..손가락은 항상 수량부족이네요. 미카게군?"

"...."

"듣고 있어요, 미카게군? 손가락정도는 지문을 없애면 괜찮으니까, 봐주고는 있지만...유키시로씨가 말한 건이 확실해지기 전 까진 주의할 필요가 있겠어요. 타스쿠와 호마레씨가 돌아오면 상의 해봐야겠어요."


혼잣말에 가까운 대화였다. 히소카는 진열장 뒤의 차가운 대리석 매대에 엎드려있었다. 혼자서 가게를 본다는 자각은 있는지, 가게의 다른 이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위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진 않았다. 히소카는 해체한 사체의 손가락 한 두개를 챙기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손가락을 모아 어디에 쓰는지, 어디에 모으는지 가게의 누구도 모른다. 호마레씨라면 알고 있을 거라 츠무기는 짐작했다. 물어본 적은 없다. 두 사람의 기묘한 유대감에 대해선 츠무기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난 시기는 가장 최근이지만, 호마레는 히소카를 만난 순간 소위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감을 느꼈다고 한다. 가게로 들어온 원인이 되어준건 고마운 일이다. 호마레는 자칭 천재 시인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천재적인 것은 살인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살인 또한 호마레에겐 영감을 부르는 의식의 일환에 불과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이해를 필요로하는 영역은 아니지만, 호마레의 이유에 대해선 평생 이해하지 못할것이다. 


냉동고의 문을 이중으로 잠그고 나온 츠무기가 손을 비비며 차가워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새로운 의뢰는 계약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다음주에는 이전번의 사체를 처리해야했다. 여름은 사체가 빨리 부패하기때문에 특히 신경쓰는 점이 많았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마쉬멜로우봉지를 꺼내왔다. 봉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기민하게 고개를 돌린 히소카가 벌떡 일어나 츠무기에게 다가갔다. 봉지를 뜯어 적당히 단단하고 차가운 마쉬멜로우를 하나 입에 넣고는 나머지 봉지는 히소카에게 내밀었다. 하나만 먹어도 혀가 오그라드는 단맛인데도, 히소카는 이미 세개를 한꺼번에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무표정하게 기계적으로 씹어삼키는 행위를 계속하는 히소카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짙은 잔디색의 홍채가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미카게군."

"웅."

"전 정말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나도. 츠무기를 소중하게 생각해."

"카피한 말이 아니겠죠?"

"아마도."


그렇다면 좋겠네요. 츠무기는 단맛을 견디지 못하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들이켰다. 아즈마가 가게에 직접 혼자서, 히소카만 있을 시간을 골라 왔다는 사실은 분명 단순한 변덕이나 우연이 아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가게를 잠시 쉬어야할지도 모른다. 아즈마의 눈 밖에 들어서 좋을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든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야했다. 츠무기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타스쿠는 한시간 남짓. 호마레는 두시간 남짓이면 가게로 돌아올 것이다. 이 불안감은 애매한 오후의 시간 탓인지. 가만히 앉아있자니 과거의 쓸모없는 잔상이 떠오른다. 과거는 괴로운 일 투성이니 기억을 한번 쯤은 잃어도 좋을 일이다. 분명 히소카의 사건도 그런 바램이 통한것은 아닐까. 누구보다 괴로워 했으니. 지금의 히소카는 예전보다 행복해 보이는건 아니지만, 불행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구원이란건 존재한다고. 츠무기는 긍정적인 성격이 장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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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개인적인 캐해석이 있습니다.

※ 이타루가 의사입니다. 거의 1차소설에 가깝습니다.



tibia Fracture




웅성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잦아들었다. 모래 바닥에 가래 침을 칵 뱉어버리더니 무리는 떠났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겁쟁이 자식들이. 싸우는 이유라고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다. 그냥 이유가 없다는게 더욱 그럴듯한 이유이다. 이 나이대의 남자들은 대부분이 화가 난 상태이다. 서로 비슷한 진흙바닥을 뒹구면서도 조금이라도 잘난 녀석을 보면 밟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이다. 어릴적 개미집을 부수고 개미를 발로 밟아 죽이던 아이가 크면 꼭 그런식이다. 서열이 서열을 만들고, 학교는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에 갇혀 평화로운 굴레를 쓰고 움직인다. 반리는 어느쪽에도 속하는 것을 거부했다. 딱히 비행을 저지르려고 마음 먹은 것은 아니지만 학교는 종종 빠진다. 빠지고 게임센터에 가는 것을 비행이라고 한다면, 뭐. 인정해야 겠지만. 오늘의 싸움은 우연히 게임센터에서 예전에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던 녀석들과 마주쳤다는게 이유였다. 혼자 있는 모습이 승산이 있어 보였는지,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부딪혀오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들개 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멱살을 잡는다. 생각보다 본능이 앞서야하는 때. 솔직히 싸움이 한창 없으려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때도 있다. 구제불능이다. 머릿속은 자기혐오와 그것을 보상하려는 자기위로로 엉망이었다. 반리는 질끈 감고있던 눈을 떴다. 이명이 남아있어 어지러웠고 구토감이 밀려왔다. 주먹질 당한 얼굴과 야구방망이로 맞은 왼쪽 발목이 특히 아파왔다. 


"아. 비행청소년 발견."

"뭐야, 넌?"


고개를 돌리자 눈 앞에는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연분홍색의 티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밝은 갈색빛의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손에 들고 있던 게임센터 포인트 카드를 뒷 주머니에 넣은 남자는 벽에 기대고 앉은 반리를 멀뚱거리며 쳐다보며 빨갛게 퉁퉁 부어오른 왼 발목과 정강이에 거침없이 손을 가져갔다.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오자 반리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남자는 눈을 찡그리며 시끄러움에 대한 불쾌함만 표시할 뿐 발목에서 손을 떼진 않았다. 죽여버린다. 반리는 으르렁거렸다.


"으아아악!!! 만지지말라니까!!!"

"간만의 비번인데...이런. 너 다리뼈 부러진것 같네. 정확히는 비골..쪽인가."

"하아?"

"난 직업정신이 투철하니까. 구급차를 불러주지."

"잠깐!!"


또 싸웠다는 것을 가족에게 들키면 잔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닐것이다. 벌써부터 귀가 따가워진다. 반리는 재빨리 남자의 팔을 잡고 자신의 사정을 호소했다. 징계횟수도 아슬아슬했고, 이제야말로 조용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한지 얼마 안된 때였다. 넘어졌다는 걸로 속이고 넘어갈 작정이었다.


"보호자가 없어. 구급차는 부르지 않아도 돼. 나 혼자 갈 수있으니까."

"다리뼈가 아작난것 같은데 걸을 수 있다고? 너 철인 17호야?"

"놀리는거냐."

"내가 아는 병원으로 가지. 응급치료정도는 내가 보호자가 되어줄테니."

"켁. 쓸데 없이 친절하네."

"감사-."


구급차를 부르는건 죽어도 싫다며 부득부득 우겨 결국 반리는 부축을 받아 택시를 탔다. 가장 가까운 병원에 가는 줄로만 알았지만 남자가 말한 병원은 반리가 근처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남자는 반리를 뒷자석을 전부 쓰도록 다리를 펴서 앉혀놓고는 자신은 앞자리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반리도 꽤나 열심히 하는 게임이라 게임의 타격음만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집중력이 떨어지자 통증과 열감에 온 신경이 쏠려 발목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어오르고 있었다. 싸움에 휘말려 얼굴이나 팔을 베이거나 멍이 들거나 코피가 난 적은 있어도 본격적인 부상은 올해 들어 처음이었다. 운이 없었다. 시덥잖은 쓰레기를 상대로 무리했다. 병원 응급실에 들어서자 휠체어를 끌고 들어온 간호사들에 의해 억지로 옮겨지던 반리에게 유유히 손을 흔든 뒤 이타루는 응급실에 놓여져있던 간이 의자에 등을 숙이고 앉았다. 


"어라..치가사키 선생님? 오늘 비번아니세요?"

"맞아맞아. 얘 좀 봐줘. 비골 골절이야. 하여간 이 동네 학생들. 질이 나쁘다니까. 기본 검사만."

"치가사키..선생님?"

"징그럽게 너까지 치가사키 선생님이라니...이타루? 뭐 그정도로. 나 이 병원 의사거든. 뭐야. 그 대놓고 경멸하는 얼굴은."


택시 안에서부터 휴대폰 게임만 줄곧 해대더니, 이제 와서 의사라고? 반리의 어이없는 코웃음에 이타루는 정형외과 전문의. 치가사키 이타루. 하고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보여주었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 소중한 비번을 희생하여 이름도 모르는-. 음. 셋츠 반리. 진료 차트를 띄운 모니터를 슬쩍 넘겨다 보았다. 옆에 앉아있던 간호사가 영상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주었다. 다행히 심한 골절처럼 보이진 않으니, 응급 조치니 깁스정도면 되려나. 휴대폰 게임을 하면서 웅얼거렸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게임센터에 갔다가 발견했어."

"그런건 지나치는 부류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실례잖아. 잠깐. 특대떴다."


휠체어를 타고 다시 응급실에 나타난 반리는 얼굴에는 거즈를 덕지덕지 붙이고 한쪽 교복 바지는 찢어 두껍게 압박붕대를 두른 채로 휠체어를 끌고 나타났다. 불만 섞인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휴지에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가능하면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 애썼지만, 치료사처럼 보이는 가운을 입은 남자가 다리를 씻어내고 소독약을 들이 붓자 엄청난 통증이 느껴지자 빽빽 소리를 질렀다. 반리를 보더니 자신의 남동생이 생각난다며 헛소리를 해대던 치료사가 쿡쿡 웃으며 얇은 플라스틱 부목을 덧대고 붕대를 탄탄하게 감았다. 어찌나 악을 썼던지 목에 피냄새가 올라왔다. 이타루는 흐음. 하며 탐탁잖은 소리를 내며 발로 붕대를 톡 건드렸다.


"아. 좀. 건드리지마. 울려서 아프다고."

"지금은 너무 부어있어서 통깁스는 무리였나보네."

"깁스하면 불편하니까. 내가 거절했어."

"그렇군. 조만간 수술대 위에 올라가고 싶은 모양이야."

"의사가 그런말 해도 되는거야?"

"의사도 직업인걸? 집까지 가려면 목발이 필요할거야. 빌려줄테니, 반납하라고."


이타루는 기대듯 들고 있던 목발 두개를 반리에게 던졌다. 반리는 슬쩍 이타루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좋은 녀석이네. 너."

"딱봐도 연상처럼 보이면 너라기보단 이타루씨나 이타루님으로 부르지 않겠어?"

"이타루님..?"


그럼그럼. 이타루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턱을 손으로 만졌다. 반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이타루의 얼굴을 뜯어볼 수 있었다. 의사라면 20대는 한참 되었을텐데 어두운 색이라고는 없는 멀건 얼굴과 올라간듯 내려간 장난기를 머금은 눈매가 특이한 인상이었다. 눈색만 톡 튀어 붉은 빛인게 게임에서 나오는 왕자 캐릭터처럼 생긴 녀석이다. 이타루가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밀며 응급실의 직원들에게 내일 올게-. 하고 인사를 건넸다. 


"혼자 갈 수 있어."

"투정이 심하네. 넌 지금 잘못 디디기만 해도 뼈가 어긋날거야. 뭐에 맞았어? 각목?"

"...야구배트."

"어휴. 요즘 불량학생들은 과격한데? 야쿠자놀이라니. 음.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몸을 막 쓰다보면 일찍 게임오버될걸."

"누군 하고 싶어서 한 줄 알아? 시비를 걸어오니까. 겁쟁이처럼 도망치고 싶지 않아. 쉽게 쉽게 사는게 인생 목표지만..그러면 가끔은 재미없어."

"..건방진 고등학생인줄 알았는데. 제법 생각은 있잖아. 나도 재미 없는건 딱 질색이거든."


천천히 병원 밖에 꾸며진 길가를 따라 휠체어를 밀며 이타루는 자신도 과거에 반리와 같은 눈동자를 한 때가 있다고 말했다. 필요이상의 자신감과 그에 따르는 권태감을 게임으로 이겨냈다며 몇 년 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째서 이런 필요이상의 말이 술술 나온것인지 이타루로서도 의외였다. 첫눈에 보자마자 느껴버린 동류에 대한 혼자만의 친밀감 때문일까. 반리는 이타루의 쓸모없는 이야기를 한귀로 흘려들으며 흐응. 으응. 하는 힘 없는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를 들어 이타루의 움직이는 입술과 얼굴을 감상했다. 뭔 얘길 지껄이는지는 몰라도 반리는 이타루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억양이라고 생각했다. 팔을 뻗어 티셔츠의 목덜미를 잡아 이타루의 얼굴을 끌어내려 손으로 턱을 잡았다. 예상보다는 말랑한 감촉이었다. 옅은 땀냄새가 나는 볼에 일부러 소리나게 뽀뽀했다.


"자..잠깐..?"

"고맙다는 뜻. 다음부터는 건방진 고등학생은 함부로 줍지 말라고. 반해버리니까."

"뭐, 뭣?!"

"푸핫. 얼굴 좀 봐. 이타루씨. 답례라니까? 휠체어가 더 빠르겠네. 잠시 빌린다-."


재밌어지겠어. 반리는 빠르게 휠체어를 밀어 박차를 가했다. 생전 처음 보는 고등학생에게 볼키스를 뺏긴 이타루가 너, 너. 하고 당황한 얼굴로 손으로 볼을 문지르며 빠르게 쫓아갔다. 반리가 쿡쿡거리고 웃으며 몸을 들썩이자 붕대를 감아놓은 발목이 시큰거렸다. 이타루는 반리의 집에 찾아가 게임을 할 만큼 친한 사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처음 기억만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화제가 나올때 마다 싫은 티를 강력하게 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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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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