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ship

짧은것/X KAITO 2015. 3. 1. 20:51

kinship


카이카이

나와 그 아이는 - 선배와 나는

 

 

" 같은 건가요? "

 

 

나는 솔직히 그날 내 눈을 의심할수 밖에 없었다. 보컬로이드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한 가정에 같은 기종은 들일 수 없다] 는 불문율을 정말 마스터가 깨버린 줄로만 알았다. 무심히 다녀오셨어요. 하고 보지도 않은 채 인사한 후 돌아본 뒤에는 거울이라도 세워진 듯 똑같은 모습의 보컬로이드가

선배님 안녕하세요. 하고 아무렇게 않게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너 설마!!"

"처음 뵙겠습니다. 시리얼넘버 K-V3-1030입니다."

 

 

튀어나올듯한 눈으로 그 아이와 마스터를 옮겨가며 쳐다보았다. 이런 망할.

정말로 신형을 사버리고 말았구나. 같은 기종이 아니라 말이지. 영악한 인간같 으니라고.

 

그래도 그 아이는 나쁘지 않았다. 날 보자마자 희뜩 달라지는 눈빛으로 선배님, 선배님. 하고 꼭꼭 붙이는 높임말도, 만나자마자 시리얼넘버부터 읊어대는 군기는 어디서 배웠어. 다음부터는 절대 어디 가서 시리얼넘버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그건 사람으로 치면 주민등록번호 같은 거야, 하고 이르자 그렇군요. 하고 실긋 웃는 게 오히려 나와 마스터만의 살갑지 않은 가정에 덜렁 떨어진 입양아의 느낌이였다. 물론 키도 얼굴도 비슷하지만 난 이미 8년을 기동된 기종이라 때가 탄 느낌이라 뜯어놓고 보면 그렇게 같지도 않은 편이였다.

 

튜닝을 몇 번이고 해서 지금 노래 실력인 나와 달리 영어기능까지 되는 그 아이는 마스터의 노래에 넓은 가능성을 제공했다. 셈이 났느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을 리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가 미워졌다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졌는걸, 둘이서 아이스크림에 대한 심오한 대화를 나눌때라던지.

 

 

"이번의 망고맛샤베트는 성공적이네요. 선배님, 역시 함량이 높은 망고쥬스를 섞는게 핵심이에요. 게다가 얼음 정도도 적당하고요."

 

 

사각거리면서 말하는 그 아이는 아직 유연한 말솜씨를 가지지는 못했다. 아직은 조금 딱딱한 느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배님이 가르쳐 줄게 많아 보이지? 하고 허허 거리던 마스터의 말이 아니더라도 난 충분히 그 아이에게 내가 아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했다. 누가 뭐래도 같은 마더보드를 만든 회사 아니겠는가. 이런 게 온정이지 다아.

 

 

"누가 만들었는데. 당연하지…. 마스터는 달다고 한입 먹고 버렸지만 말이야"

 

줄곧 8년동안 버려와서 무덤덤하긴 한다만 이번에도 정말 한 숟갈만 넘겨줬는데 그것마저 으엑, 달어 하고 싱크대로 직행하는 무심함이라니. 이렇게 맛있는 것을. 하고 궁시렁대는 내 앞에 마주 보고 앉은 그 아이는 멍하니 표준 얼굴로 기계적으로 먹다가도 내가 보고있다는 걸 깨달으면 싱긋하고 표정을 바꾼다. 아직은 멀티태스킹이 힘든건지 아니면 원래 정색을 잘하는건지 속세에 찌든 나로썬 모르겠다. 난 표정변화가 하도많아서 말이야.

 

 

"맛을 모르시네요. 마스터는 인간의 혀를 가지고 있는 게 아깝습니다."

 

 

그 아이는 흥미롭다. 인간도 만약 자기의 어린 시절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면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기본 베이스가 똑같은 아이가 성장해나가는걸 보고 있노라면 이게 부모의 마음인지 싶은데, 사람의 진득한 모성애만큼 애착이 생기는건 아니지만. 그리고 얘는 보기보다 많이 활발하지 않아서 내가 원하는 만큼만의 행동을 보여주는 게 좀 아쉽기도 하다.

나는 너 정도 때 온 집안을 뒤지고 다녔는데 말이야. 하고 웃어도 그러면 마스터가 곤란하셨겠네요. 하고 갸우뚱 거리는 게 끝인 재미없는 녀석.

 

 

"인간의 미각은 우리보다 훨씬 예민하니까 마스터한테 이건 엄청나게 달 거야 아마."

 

 

나 역시도 사각사각거린다. 샤베트는 식감이 정말 마음에 든다. 아이도 마음에 들어줘서 다행이다. 처음 시도해보는 건데, 앞으로 더 많이 먹을 아이스크림이 남았으니까 행복해진다.

 

 

"그렇군요. 그걸 간과했습니다."

 

역시, 재미없는 답변.

 

 

 

 

 

 

***

 

 

 

 

"식후엔 노래 감상이 최고지, 노래나 들을까? 뭐 듣고 싶은 거 있어? "

 

음악을 공부하는 집답게 CD가 많다. 거실 한쪽 벽 전체를 CD장으로 만들어 내가 부른 곡을 넣은 자체제작 CD부터 시작해서 클래식, 콘서트 영상까지 두루두루 갖추었다. 아직 나도 못들은 노래들이 많을 정도로 월급을 CD에 긁어모은다. 국내에서 못 구하는걸 해외배송하느라 세금폭탄을 맞았다며 한숨을 쉬며 명작을 모르는 국내의 수입사를 욕할정도의 수집가로서 마스터본인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전 아직 고를 정도의 식견은 아니라서. 선배가 골라주세요."

 

 

뭐든지 즐겁게 듣겠습니다. 하고 또 예의 웃음을 짓는다. 정말 즐거운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다. 얘보다 일찍 나온 게 다행이지 이런 선배가 있었으면 난 기도 못 펴고 쭈그리고 다녔을지도. 으으 소름끼쳐.

기계라고 그렇게 딱딱하게 할 필요는 없는데, 여러 번 그 아이의 어깨에 실린 힘을 풀어보려고 노력했다만 어느 거리감은 줄여지진 않는다. V3가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은 마스터와는 직결된 문제라 나도 애를 많이 써주었는데 나한테 대하는 것보다 마스터에겐 훨씬 최고 예우를 다 하는 터라 마스터는 속이 터져나갈 뿐이다.

그냥 듣던거나 들을까하다 오늘은 고집을 피워 보기로 했다.

 

흐음, 배시시 웃으며 "나는 니가 고른거 듣고싶은데?" 하고 그 아이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아니, 저, 하고 당황해 하는 건 처음이라 신났다. 새로운 표정이다.

 

 

 

"그냥 아무거나 골라도 돼,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싱글싱글하면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여기 있는 건 다 좋은 음악들이야. 하고 혼자 신나서 간질댔다. 어깨에 올린 손을 주물주물하는건 마스터 안마해주던 내 버릇.

 

한참을 시선 둘 곳 없이 이리저리 하다 곤란한듯 으음, 하고 고민하던 그아이는 뜻밖의 말을 했다.

 

 

"저, 저. 선배님. 죄송하지만 어깨에 손 좀 떼주시면 안될까요…."

 

 

아, 미안. 나는 손을 거두었다. 스킨쉽이 아직 불쾌한가. 그래도 이건 좀 기분 나쁜데. 마스터랑은 쓰담 쓰담하고 손도 잡잖아. 나라서 싫은걸 수도.

 

 

"불쾌해?"

"그럴 리가!! 전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히뜩 놀라서 이적까지 유지하던 평정심을 버리고 벌게진 얼굴로 휙휙 고개를 휘저으며 내 어깨를 푹 잡았다. 으응? 하고 영문모를 내 앞의 그 아이 얼굴이 더 영문모를 얼굴이다. 왜 그래, 오류 났어? 하고 잡은 어깨 때문에 들 수 없는 팔을 들어보려 했다. 힘이 왜이렇게 센거야. 엊맞춰져 떨릴지언정 꼼짝도 하지 않는다.

 

 

"선배가 만지면 좋아서 부끄럽습니다. 제가 먼저 손대게 해주세요."

 

 

이런 말을 눈 똑바로 보고 할 수 있는 패기를 가졌으면서 뭐가 부끄럽단거야.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에 힘이 들어가서 잡힌 어깨가 아파. 우선 진정시키기로 했다. 저기 아가, 이손 놔줘 응? 하고 최대한 상냥하게, 애 달래듯.

의식하지 못했던 듯 놀라는 소리와 손을 떼고 입으론 어물쩍하더니 다시 내 손을 퍽하고 잡는다. 정말 힘이 세다. 손을 잡는데 퍽 하는 소리가 나다니. V3는 여전히 빙글빙글 폭주상태.

 

 

"아뇨, 정말 진짜. 어, 그러니까 처음 볼 때부터 선배님이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제가 아직 미숙해서 표현도 못하고. 저는, 선배는- "

 

"숨넘어가겠네. 진정해 일단, 좀 당황스럽네. 우린 일단 마스터에게 애정이 향하게 되어있는 건 너도 알지? 너는 나랑 같은 라인이라 동질감이랑 애정을 헷갈리는 게 아닐까? 본래 같은 기종은 그런 이유로도 잘 붙여놓지 않는 편이고."

 

 

이게 정답이다. 동질감과 애정은 확실히 구별하기가 어려운 감정이라고 배웠다. 어린 이 아이가 헷갈릴 만도 당연하지. 나도 사실 처음 느낀 동질감에 며칠 고민했었는데, V3는 몇 달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이리저리 쑤셔댔으니 얼마나 속으로 애태웠을까.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런 감정을 헷갈릴 정도로 인터페이스가 조잡하진 않습니다."

 

파란 눈이 진짜다. 그 아이는 몇 달 사이에 애정을 깨달은 걸까? 그걸 굳이 마스터가 아닌 나에게 주고 싶은 이유는-

 

 

"그럼 헷갈린 나는 뭐가되지?"

 

 

 

동질감 때문이겠죠. V3는 처음으로 아이처럼 환히 웃었다. 듣고 싶었던 CD대신 알게 된 감정의 대화는 흘러간다. 인터페이스가 조잡한 나는 동질감과 애정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

 

 

 

 

 

"아가"

 

 

CD장을 마주하고 멍하니 선 그 아이는 내 애정의 상대.

여전히 어깨 만지는 건 별로 좋아하질 않는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선배 "

 

 

아이는 여전히 나를 선배라고 부른다. 애정과 존경을 담은 호칭이므로 절대 바꿀 수 없다는 게 아이의 단호한 생각이었다. 이쪽도 마찬가지라고. 하다못해 형으로 바꿀 순 없냐고 물어도 고집불통이다. 그래서 나도 아가, 아가 하는 것이다. 내가 그리 주관이 있는 인터페이스가 아니고 고집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마스터와 살고 있는지라 아이의 투정이나 고집정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정도로 맞던걸 느끼게 해줄 뿐.

 

 

"그래서 듣고 싶은 CD는 뭐라고?"

 

"미쿠 선배 콘서트CD…."

 

 

수줍게 가리킨 손끝에는 우리의 아이돌 미쿠가 윙크를 하고 있는 DVD가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꽂혀있다.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주워 담을 때 쓸려온 게 분명해 보인다. 나도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난 의외로 조용조용한 노래만 들어서 말이야. 재밌겠다. 하고 부끄러웠을 선택을 동조해준다.

 

 

 

"근데 너 이런 게 취향이냐? 의외네"

 

 

DVD를 재생시켜놓고 아이 무릎에 폭 누워 킥킥댔다. 왠지 모르게 이 기종은 튼튼하다. 목소리는 나보다 여리하게 만들어놓고선. 무슨 생각인지 몰라. 그렇지 않아도 오래되어 힘이라곤 노래 부를 정도인 나는 체력적으로 휙휙 휘둘려 다니기만 한다.

 

 

 

"멋있잖아요, 아이돌. 반짝반짝 빛나고"

 

 

아이의 눈이 파란색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역시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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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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