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day princess 上
늦은 밤이 되어서야 카이토는 종이가방을 든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녹음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 저녁 늦어서야 스튜디오에서 출발 할 수 있었다. 자정이 다가온 집은 어둡고 조용했다. 차례로 미쿠, 메이코, 린과 렌의 이름이 적힌 문패를 단 방들을 지난 카이토는 발꿈치를 들고 살짝살짝 걸어 카이토의 이름이 적힌 방으로 들어갔다. 코트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메시지가 왔다는 녹색 알림이 반짝였다. 구미려나. 종이가방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서 몸도 던져 눕자 피로가 몰려왔다. 며칠 동안 아침부터 저녁 내내 녹음만 했으니까, 보컬로이드의 몸도 피로가 쌓일 수밖에. 마침내 내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구미와 첫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한 날.
[선배님! 내일 아홉시에 집 앞으로 갈게요.]
[아직 안 마치셨어요? 피곤하실 텐데 약속을 미룰까요?]
[전화해도 될까요? 선배님 목소리 듣고 싶어요.]
“마지막 메시지가 한 시간 전에…….차에서 자고 있었지 참.”
녹음할 때는 휴대폰을 볼 시간이 없었다. 당차고 멋진 고백을 듣고, 여러 기사가 구미와 카이토를 언급했지만 연애는 물론이고 여자와 여자가 사귄다는 건 아직 낯간지러웠다. 여자의 몸이지만 여자의 마음은 필요 없다고 생각 했으니까. 카이토는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넘기다가 손끝으로 화면을 두드렸다.
“앗. 카이토 선배님! 집에 들어오셨어요?”
“응, 방금. 구미는 아직 안 자고 있었네. 혹시 깨운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구미는 귀여운 새처럼 작게 조잘거렸다. 잠옷 입고 침대에서 선배님 노래 듣고 있었어요. 신곡 녹음은 잘 하셨어요? 분명 좋을 거예요. 꺄아- 듣고 싶어라. 밝은 목소리를 들으면 어깨에 쌓인 피로가 사라진다. 분홍색, 연두색의 푹신한 이불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통화하고 있을 것이다. 항상 거짓말 하는 게 익숙해질 순 있어도 편해질 수는 없었다. 카이토보단 키도 체구도 작았지만 구미와 이야기 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카이토는 하루 종일 어깨에 매달려 있던 긴장을 풀고 높은 소리로 웃었다.
“아하하, 사실은 계속 마음에 안 드셨는지 다섯 번 넘게 다시 불렀어. 메시지 답 못해서 미안.”
“아니에요. 오늘은 저도 바빴어요. 피곤하시겠다. 내일은 괜찮으세요?”
“구미랑 만나려고 열심히 한걸. 그런데 정말로….”
며칠 전 대기실에서 만난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은 구미가 양손을 모으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선배님이 치마를 입고 나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카이토는 치마를 입지 않은지가 몇 년은 되었고, 치마를 입고 나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젠가 집에서 벌칙게임으로 레이스가 치렁치렁 달린 드레스를 입었었는데, 그런 건 짧은 머리 모습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벌칙이라지만 잠시나마 기대했던 만큼 실망하고선, 다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입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빛나는 눈동자로 글썽이며 부탁하면 다짐이 약해졌다.
“나 외출용 치마는 없고, 그리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야.”
“아니에요, 제가 남자처럼 바지 입고 이게 컨셉이라고 말 할 거예요! 옷은 메이코 선배님거 빌리고요.”
“메이코는 옷을 너무 짧게 입어서 내가 입기엔….”
“벌써 부탁 드려 놓은걸요? 의상실 옷 중에 가장 예쁜 걸로 가져다 달라구요.”
메이코는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카이토는 깔끔하게 정리된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옷을 발견하고 손을 가져갔다. 보드라운 재질의 검정색 원피스와 어깨에 함께 할 수 있는 망토가 한 세트로 된 예쁜 옷이었다. 망토에는 귀엽게 흰색 털로 만들어진 방울까지. 이런 건 정말 여자애들이나 입는 거였다. 미쿠나 린이나, 혹은 구미처럼 귀여운 여자애들. 방울을 손에 들고 만지작거렸다. 머릿속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생각들이 가슴을 박차고 나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메이코 선배님이 사진 보여주셨는데 카이토 선배님이랑 정말 잘 어울려요. 입고 내일 맛있는 파르페 먹으러 가요! 네? 데리러 갈게요오. 헤헷.”
“그래, 이제 늦었는데 자. 내일 보자. 잘 자.”
휴대폰에서 입술소리가 흘러오다 끊어졌다. 수화기 밖에서 휴대폰에 대고 구미가 뽀뽀를 한 모양이었다. 정말 귀여웠다. 카이토는 흐뭇하게 웃다가 손에 든 옷을 보면 한숨이 나왔다. 전신거울에 잠시 대어 봐도 치마는 무릎 위에 올라왔다. 펄럭이는 자락도 신경 쓰였고. 하지만 구미가 저렇게 기대하고 있는데, 그리고 첫 데이트라면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어떡하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르는 목소리는 메이코였다.
“어이- 카이토. 들어가도 돼?”
“으앗, 잠시만, 옷…. 아니지. 잠시만!”
“뭐라는 거야. 들어간다?”
방문을 벌컥 열자 카이토는 허둥지둥 옷을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끈으로 된 민소매와 짧은 반바지를 입은 메이코는 책상 옆의 의자에 다리를 꼰 채로 앉아선 그럼 그렇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메이코…. 이 옷은….”
“봤어? 예쁘지. 의상실에서 빌려왔어. 내 건 짧은 것들 밖에 없으니까. 죽어도 안 입는다고 할 거 같아서. 스타일도 다르고.”
“으아….왜 빌려 온 거야...구미가 부탁했어? 이걸 입고 어떻게 밖을 나가. 다들 날 변태로 볼 거야.”
“넌 여자잖아. 여자가 여자 옷 입는 게 뭐가 어때서?”
“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 요즘 한창 와…왕자 이미지로 밀고 있는데에….”
“헤에. 네가 왕자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잠자는 아이스의 공주님 카이토라면 몰라.”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카이토의 목소리는 다시 낮아져 간결했다. 푸른 바다처럼 넘실거리던 긴 머리를 단칼에 잘라 버렸을 때처럼. 연구실의 누구나 칭찬하던 아름다운 빛의 머리카락이었다. 카이토가 남자로 보도된 건 사소한 실수였지만. 카이토는 자신이 남자나 여자라는 사실 보다는 음악과 노래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비밀 하나만 생기면 모두가 다시 행복할 수 있는 거라고. 줄곧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까딱거리던 다리를 멈춘 메이코가 표정을 멈추고 바라보자 그제야 카이토는 난감하게 말을 수습했다.
“화, 화났어? 옷은 정말 예뻐…. 신경 써줘서 고마워. 나랑 안 어울릴 뿐이야.”
“이젠 카이토 왕자님인 게 좋은 거야? 구미를 좋아하는 것도 왕자님이 되려고, 그래서 사귀자고 했어?”
“구미는…. 내가 왕자님이 아니어도 좋다고 했어. 공주처럼 지켜준다고….”
“그러면 공주님이 되어야 하잖아. 카이토 공주님.”
스타킹 가져다주러 왔어. 아직 춥다고 하기에. 메이코는 방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서 고개 숙인 카이토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헝클였다. 밀밭처럼 손가락사이를 지나가는 머리카락들. 자신을 좋아해주는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메이코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밤이면 집에 돌아와 혼자 방에서 우는 카이토를 지켜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시작은 우연이라 하더라도, 이제야 겨우 생긴 카이토만의 왕자님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 셈이었다. 가여운 푸른 공주님에게도.
“울지 마. 여자애가 예쁘고 싶은 건 당연한 거니까.”
“우응….”
문이 닫히자 카이토는 이불 속에 들어갔다. 눈물의 이유가 미안함이 아닌 건 오랜만이었다.
***
오래전에, 그러니까 실험체 몇 번째의 팔찌를 달고 음정조정을 하고 있을 때에 커다란 티셔츠 같은 실험체용 원피스를 입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몸에 맞춘 듯 선이 흔들리는 원피스를 입고 방을 나서자 아침의 거실은 술렁였다. 커피를 마시던 메이코만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잠시 끄덕였다. 미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뛰어와 팔에 매달렸다.
“오빠! 이 옷은 뭐야? 왜 이렇게 입은 거야? 오늘 쉰다며, 미쿠랑 놀자아-”
“린이랑, 린이랑도 놀자!”
“오빠는 오늘 구미랑 선약이 있어서, 미안.”
구미와 사귄다는 믿을 수 없는 기사를 본 미쿠는 녹음실에서 한바탕, 집에서 한바탕씩 난리법석을 벌였다. 오빠는 미쿠의 오빠고, 만인의 오빠라며 만들었던 카이토 인형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집에 돌아온 카이토에게 눈물범벅이 되어서 거짓말이라고 말하라며 안겨서 또 한 번 울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서는 다시는 오빠랑 안 놀거라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며칠 동안 카이토만 보면 울먹이던 미쿠를 앉혀놓고 구미를 좋아하는 것과 미쿠를 좋아하는 건 다른 카테고리라고 한참을 설명했다. 미쿠를 가장 좋아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고, 세 번이나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쪼르르 품에 안겨왔다.
“에에? 데이트를 그러고 간다고. 원피스…입고?”
“으응. 그…그게. 구미가….”
“오늘 구미랑 옷 바꿔 입기 데이트 한다잖아. 요즘 유행인데. 카이토,늦지 않았어? 얼른 가봐.”
“응! 고마워. 메이코. 나 다녀올게.”
평소라면 폴짝 뛰어와 양 볼에 뽀뽀했을 미쿠였지만, 사랑하는 멋진 오빠가 여자 옷을 입고 데이트를 간다는 건 미쿠가 받아들이기엔 충격적이었는지 현관을 나설 때 까지 미쿠의 인사는 들리지 않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이토는 기다란 부츠를 신고서 발끝을 몇 번 바닥에 두드리며 앞 코를 가다듬었다. 미쿠가 조금 더 오빠를 이해하게 되면, 언젠간 말 해줄게. 언제나 느끼는 작은 양심의 가책을 뒤로하고 문을 닫자 익숙한 모습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카이토 선배님!”
복도 앞에 구미가 서 있었다. 귀여운 남자아이들이 입을 법한 반바지로 된 약식 정장을 입고서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바라보던 하늘에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공주와 왕자님이 만나는 전형적이지만 아름다운 장면처럼 천천히 풍경에서 부터 밝아져 눈앞으로 다가왔다. 선배님-하는 밝은 목소리. 구미랑 함께라면, 어색한 여자 옷이라도 예쁘게 보인다면 얼마든지 입을 수 있었다.
“집 앞에 있었어? 말을 하지. 미안, 늦어서.”
“아니에요. 제가 마음이 들떠서 일찍 나와 버린걸요. 예쁜 선배님을 빨리 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정말 예뻐요! 공주님 같아요.”
“구미도 예쁜데…. 옷 귀엽다.”
“그래요? 어제 오빠랑 열심히 골랐어요. 헤헷. 오늘 할 일이 많아요. 파르페도 먹고, 같이 옷도 사고, 사진도 찍고, 노래방도 갈 거예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던 구미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내민 손을 올리자 마주 잡더니 깍지를 쥐고 흔들었다. 거울에 비춘 듯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밝고 가벼운 여자아이의 따뜻한 손. 카이토는 잡은 손에 입술을 가져가 예의 왕자님처럼 미소를 지었다.
“가시지요, 공주님.”
“네에. 공주님!”
내딛는 걸음이 가벼웠다. 궁금하다는 신곡을 불러주면 구미는 좋아할까?방금처럼 활짝 웃어주면 좋을 텐데. 구미에 대해서 많이 알고 싶다고 속삭이자 리본이 달린 모자가 흔들릴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거리로 접어들자 주말의 청량한 햇살이 얼굴에 쏟아졌다.
'짧은것 > X KAITO'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존대 연성 (0) | 2015.04.08 |
---|---|
One day princess 下 (0) | 2015.03.01 |
kinship (0) | 2015.03.01 |
Noname switch (0) | 2015.03.01 |
언제나, 언제라도 (0) | 2015.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