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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06.12 혈계전선 AU
  3. 2015.04.08 반존대 연성
  4. 2015.03.01 One day princess 下
  5. 2015.03.01 One day princess上
  6. 2015.03.01 kinship
  7. 2015.03.01 Noname switch
  8. 2015.03.01 언제나, 언제라도
  9. 2015.03.01 겨울바다
  10. 2015.03.01 부끄러움은 당신 몫

다시, 당신과


외전?



똑, 똑. 가볍게 주먹을 쥐고 현관문을 두드린다. 카이토는 소리 없이 15초를 셈했다. 그럼에도 문 뒤는 조용했다. 눈 앞엔 종 모양의 현관 벨이 어째서 자신을 누르지 않냐고 의문스럽게 바라본다. 카이토는 들리지 않는 조소를 무시하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것만이 방법인 양으로. 마스터는 부쩍 모든 자극에 민감해졌다.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세상이 무너진듯 깜짝 놀라는건 마스터의 여러가지 귀여운 순간중 하나이며, 토끼처럼 동그라지는 눈을 보며 심장이 있을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야아, 놀랐잖아. 하고 길게 내쉬는 숨은 마치 휘파람 소리처럼 은은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때면 카이토는 미안해요.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며 눈을 접어 웃었다. 가끔씩 보는건 기뻤을지도 모른다. 마스터에게서 익숙함이 사라지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있던 마스터에게 담요를 가져다주는 손길에도 휘득허니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카이토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 놀람이 어디에서 기원한것인지 더듬어본다. 내가 가진 사람보다 조금 낮은 체온. 정적인 관절 움직임. 기꺼이 이 집에 존재하는것 까지. 마스터의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서 카이토는 작은 물음을 들었다. 너는 누구야? 그것보다 더 깊은 물음은 어두운 동굴을 통과하다 어둠에 잡아먹힌다. 아마 마스터 조차 들어가보지 않은 장소일 것이다.


"똑, 똑. 들여보내주세요."


목을 가다듬고 입으로 문을 두드린다. 다시. 문 뒤는 조용했다. 세 번의 체념 뒤에 카이토는 빠르게 주머니에서 파란 고양이 인형이 달린 열쇠를 꺼내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 경첩이 열리는 소리에 저항이 느껴진다. 며칠 뒤의 할 일에 문에 기름칠 하기를 추가한다. 3일뒤에 이 사항은 카이토의 움직임이 멈추지 않는 이상은 반드시 떠오를 것이다. 스니커즈를 벗고 조용히 거실로 걸어가자 1인용 탁자와 의자, 그리고 탁자에 엎드려 잠든 마스터는 고른 호흡을 느리게 쉬고 있었다. 카이토는 언젠가의 마스터 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무언가를 쓰던 중이었는지, 엎드린 팔의 아래에 노란색의 종이가 몇 장 놓여 있었다. 사이를 들여다보자, 나. 타니무라 카요. 29살. 생일. 기억안남. 고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 기억해야만 하는것들. 카이토와 올해 겨울은 호수로 여행. 별자리 외우기. 따뜻한 목도리 사기. 약은 하루에 세번. 점심약은 두 개만. 툭툭 끊어지는 문장들이 적혀있었다. 마스터는 가사를 썼다. 자신이 느낀 것을 글로 녹여내는 재주였다. 마스터의 가사에는 조합이 잘 된 홍차처럼 첫맛은 가벼우며, 삼키는것은 부드럽게. 끝은 약간의 달콤함과 외로움이 혀를 감싸고 흐른다. 삶의 깊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카이토에게도 마치 언젠가 경험했던 일처럼 입맛을 돋구어주는 멋진 글을 쓰곤 했다. 거실 벽에 붙은 행거에는 다양한 재질의 머플러가 깔끔하게 세탁되어 걸려 있었다. 이것 저것을 둘러주며, 매어주는 방법도 여러가지 였다. 멋을 부리는 일은 카이토의 흥미와는 달랐지만, 완성 되었다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활짝 웃는 마스터의 얼굴을 보는 것을 사랑했다. 방 안의 공기가 식어 있었다. 담요를 덮어줄까. 고민하다 장식장에 놓인 CD플레이어를 켰다. 곧 시작되는 음악은 숭어라는 이름이었다. 꼼꼼히 들어보면, 음율은 제법 커다란 숭어가 헤엄치듯 유연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스터가 다시 태어난다면 물고기가 되지 않을까 공상한 적이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지 않는 짧은 길이였지만 커다란 은색 물고기의 꼬리처럼 부드럽고 빛 아래에서 반짝였다. 카이토도 그런 생각을 해? 턱을 괴고 카이토의 상상을 듣던 카요는 쿡쿡 웃으며 비웃는건 아녔어. 하고 금방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난 종교 조차 없는데. 카이토가 실망한 목소리를 알아채고 바로 따라붙어 대답했다. 저도 종교는 없어요. 당연한 말이었죠. 


"다시 태어나면, 카이토도 나랑 같았으면 좋겠어."

"제가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나도 마찬가지거든. 왜, 요즘엔 애완용 펫 안드로이드가 죽으면 장례도 치워준다잖아. 성불하렴. 하고."

"성불. 신에게로 돌아가는 건가요. 믿지 않는 신에게."

"남아있는 사람들이 마음 편하자고 하는거야. 죽음 뒤엔 아무것도 없어."


저는, 카이토는 말을 멈추었다. 마스터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움츠러든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죽음 뒤엔 아무것도 없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칼날이 되어 몸 이곳 저곳을 베어내듯,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약을 먹은 이후부터 모든것에 둔감해졌다. 손끝의 감각. 인식. 생각도 무뎌지고 그것들의 결과로 뇌의 변화가 조금이나마 느려질것이라고. 하나코는 설명했다. 아직 공상이 남아있을 즈음이었다. 카요는 운전사의 손길을 무시하고 영원히 앞으로만 달려가는 기차를 떠올렸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거운 만큼 소중한 기억같은건 전부 던져 버리고 어딘지도 모르는 끝으로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열차에서 당황한 채, 마지막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는걸 깨달은 채로 멍하니 어느 속도만을 느끼게 된 운전사의 무력감을 느꼈다. 


"카이토, 내가 먼저 죽게되면. 네가 남아서 내가 다시 태어날때까지 기다려 줘. 돌아왔을때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할까봐 무서워."

"그렇지 않아요. 하나코씨도 있고. 빵집의 사카이씨도 있어요. 악기점의 모리사와씨도."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쉽게 잊어버리지. 나..하나코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그럼 하나코씨를 만나요. 연구소 근처에 좋아하시던 카페에요. 커다란 피아노가 놓여진 곳."


말보다 행동하는게 더 빨랐다. 손가락으로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하던 카이토는 금방 카요의 휴대전화에서 가까운 단축번호를 찾아 눌렀다. 귀여운 분홍색 하트가 붙은 하나코쨩. 이라는 이름이 깜빡이더니 화상화면으로 바뀌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짧은 커트머리가 부스스한 하나코가 커다랗게 손을 뻗어 흔들고 있었다. 목덜미엔 반짝이는 큐빅이 장식된 안경줄 끄트머리에 동그란 안경이 함께 달그락 거렸다. 하나코가 가진 소리는 높고 지저귀는 종달새처럼 기쁨을 담아냈다.


"야호, 카요쨩, 카이토. 안녕? 마침 쉬는시간이야!"

"와아. 다행이에요. 갑자기 전화해서 죄송해요. 마스터가 하나코씨 목소리를 듣고싶어 하셔서."

"헤에. 별일이네. 오늘 기분은 어때, 카요쨩?"

"별로야. 하나코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서."

"카요쨩. 괜찮다고 했잖아-. 우린 보고싶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마치고 집에 갈께!"


하나코가 활짝 이를 보이며 웃었다. 카요는 건조한 모래가 사그러드는 손 안에서 반짝이는 조각 하나를 남겼다. 교복을 입은 하나코의 똑같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머리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자신이 가진 어떤 웃음보다 높은 소리는 휴대전화의 화면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같았다. 카요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귀여운 외모의 아이가 하나코.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카요는 말을 씹어 넘기듯 꼭꼭 씹어 음미했다. 카이토의 표정을 고르지 못하는 얼굴을 볼때마다, 자신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망가져 더 이상 원래의 모습으론 돌아갈 수 없다는걸 확신한다. 매일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타니무라 카요라는 사람은 해체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유령처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탁해서 만들어지고 있을 뿐. 모두가 기억하는 타니무라 카요로서 살아가는 나날들.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망설이는 눈빛들 속에서 멀어지는 현실감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전만큼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모든것을 버리고 나는 어디에 가고 있을까. 도착지가 어둠이 드문드문 빛나는 겨울의 호수였으면 좋을텐데. 




***




카이토가 행거에서 두꺼운 머플러를 골라주었다. 밝은 베이지색은 갈색 코트와 어울렸다. 머플러의 끝을 목 뒤로 다듬어 매어주고는 머리카락을 밖으로 빼내었다. 완성이에요. 산뜻하게 손을 뗀 카이토가 머플러 옆에 걸려 있던 짙은색의 코트를 꺼내 입었다. 습관처럼 손가락을 뻗어 머플러가 걸린 쪽으로 향했다. 고개를 조금 기울여 고민하던 티를 내더니, 오늘은 춥지 않으니 머플러는 하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하고 고민을 매듭지어 말했다. 머플러를 매지 않은 카이토는 어색했다. 카요는 망설임 없이 울이 많이 들어간 소재의 회색 머플러를 가져갔다.


"줘. 내가 해줄게."

"...마스터."

"아직 이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고. 나 너무 무시하는거 아냐?"


실없는 웃음을 지어내는 카이토를 바라보고, 카요는 곧 행거로 눈을 돌렸다. 사사로운 호기를 부렸다. 머릿속의 엉킨 실타래는 풀어보려고 손을 대면 더욱 엉킨다. 안정적인 절망에 카요는 어설프게 웃었다. 이 병에 걸린 이후로 자신의 생은 모든게 결정된 모양이다. 병에 걸린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을 따라 죽음으로의 항해는 순조로웠다. 


"미안. 사실 기억 나지 않아. 하지만 오늘은 군청색이 어울리는걸."

"이정도 길이라면..손 놓지 말아요."


카이토가 허전한 목에 머플러를 걸쳐 놓은채 멈춰선 카요의 손을 겹쳐 잡았다. 이렇게, 한번 빙글 둘러서. 전 추위를 잘 타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목이 허전한건 왠지 싫어요. 마스터가 아침먹는걸 싫어하는것 처럼. 그리고 두 끝이 중앙에 돌아오면, 원을 만들어서 하나를 다른 하나의 사이에 넣어요. 이제 한쪽을 뒤로 넘기면 완성이에요. 


"마음에 드세요? 전 이 모양이 좋아요."

"응. 멋지다. 익숙한 모양..기억나지 않지만."

"마스터가 가르쳐 준건 제가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길게 늘여뜨리면 거추장스럽잖아. 하고 말씀하셨잖아요."


처음 만들어진 카이토는 몸의 일부처럼 머플러를 떼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머플러는 목에 고작 한번 둘러져 남은 길이는 키만큼 길었다. 실용성이라고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애착쿠션이라기엔 절박함의 정도는 탯줄을 자르려는 모양이라 바닥에 끌려 끝이 더러워진 머플러를 세탁기에 넣을 수 없었다. 자고 있는 틈을 타 머플러에 슬쩍 손을 가져가면 그곳에도 꼬리처럼 감각이 있는 모양인지 금방 도끼눈으로 카요를 바라보았다. 그 만큼의 믿음이었다. 이후에야 알았지만, 누구도 카이토의 머플러를 세탁해줄 만큼 카이토에게 애정을 가지지 않는다는것. 노래를 대신 불러주는 기능에는 그런건 포함되지 않았다. 카요는 당연하게 여겼다. 더 많은것을 카이토에게 받았다고 확신한다. 혼자만의 공간을 채워주는 조금 낮은 온기. 생을 살며 잃어버린줄도 몰랐던 결핍을 채워준 마지막 조각을.


한쪽으로 늘어뜨린 머플러가 마음에 드는지 카이토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팔을 둥글게 접어 그 사이에 익숙하게 카요의 팔이 들어오게 했다. 감기는 모양은 원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만큼 기만이 느껴졌다. 둘은 같은 디자인의 색만 다른 신발을 신고 걸었다. 하나코가 알게된다면 언젠가처럼 하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따스한 빛줄기를 가져다 줄 것이다. 하나가 된 발소리로 걸었다. 카이토는 몇번이고 걸었을 이 거리를, 미지의 세계에 여행을 온 듯 생경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카요에게 이것 저것을 안내했다. 마스터가 좋아하는 크로와상을 파는 가게. 건포도가 든 스콘도 추천메뉴에요. 카요는 건포도가 든 스콘을 크게 한입 넣고 우물거리는 자신을 생각했다. 카이토가 옆에서 따뜻한 티백 홍차를 건네주는 있을 법한 풍경이 그려졌다. 있었을지도 모르지. 어딘가엔. 터진 풍선처럼 하염없이 쪼그라드는 세계는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지 못하는 망국의 폐허였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너만이, 언젠가 찾아올 영광을 기다리듯. 과거의 영광을 기리며 떠나지 못하는 푸른 기사처럼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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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전선 AU

짧은것/X KAITO 2015. 6. 12. 23:37
그 아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미쿠의 병실에서 나온 카이토는 곰곰이 생각했다. 미쿠의 오빠라 그런지 미쿠와 비슷한 분위기라 그런걸까? 병원 정문의 계단에 앉은 카이토는 스쿠터의 열쇠를 만지작대며 시간을 죽였다. 라이브라로 돌아가려고 예상했던 시간보다 일찍 미쿠의 병실에서 나와 버렸기 때문이었다. 둘은 분위기는 달랐지만 초록빛의 머리칼이나 눈 색, 귀여운 선이 닮아있었다. 오빠라지만 동생이라고 말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어리숙한 느낌이었다.

“우리 오빠, 미쿠오! 카이토, 인사해!”
“으아아……. 안녕. 난 카이토라고 해.”
“헤에. 안녕하세요, 카이토 형이라고 불러도, 될까?”

커다란 안경을 낀 미쿠오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로 허둥거리며 빙빙 도는 이야기만 했다. 카이토는 둘의 대화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미쿠오는 그런 적이 없다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평범한 분위기라서 그런걸까나……. 눈에 띄는 인상도 아니고.”
“착각했나봐, 미안.”
“아냐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셋이서 앉아있던 병실의 1분이 끔찍하게 길었다. 카이토는 어제, 그제의 행적을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다. 눈 색이 초록색이었던가? 착각인가? 저 또래의 남자아이란 다들 비슷하니까. 최근에 생긴 사건들 때문에 눈의 감각도 예민해진데다 카이토가 그 소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공간과 이질적인 느낌. HL의 어둡고 칙칙한 풍경에서 신의 의안은 다소 따분하게 ‘눈’의 역할을 했지만, 언젠가 보았던 그 소년의 느낌은 달랐다. 그리고 카이토는 미쿠오를 보며 순간 그 때를 떠올린 것이다. 신의 의안이 공명하며 활개를 치는 감각을. 

“굳이 말하자면 블러드 브리드...아냐. 무슨 말도 안되는.”
“형, 아직 안 갔네요. 여기서 뭐해요?”
“에에엑?! 미, 미..미쿠오군. 아하하..”
“왜 이렇게 놀래요? 미쿠가 잠들었길래, 나도 가려고요.”
“..그, 그럼. 태워줄까? 어디까지 가?”

미쿠오는 싱긋 웃으며 지하철 역이라면 어디든지 괜찮다고 대답했다. 카이토는 의심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블러드 브리드를 본 후유증이리라. 며칠 동안 카이토는 라이브라의 일원의 기운에도 누군가 눈을 칼로 쑤시는 듯이 타들어가는 감각에 시달렸다. 혈계의 감각은 시각을 넘어선 것이었다. 손에 든 열쇠를 넣어 시동을 걸고 스쿠터에 있던 헬멧을 씌워주자 미쿠오는 스쿠터를 타는 것이 처음이라며, 카이토의 옷을 붙잡았다. 병원에서 가까운 역은 십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였다. 등에 달라붙는 미쿠오의 몸은 미쿠만큼 작고 가벼웠다. 라이브라의 누구라도 한 주먹이면 날아갈 만큼이라고 생각하니 HL의 엉망진창인 도로 위에서 카이토는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자, 도착. 여기까지 태워주면 되는거야?”
“오오. 고마워, 형. 덕분에 빨리 왔어.”
“가는 길인데 뭐. 그럼 다음에 보자.”

형, 뭐 하나 물어 봐도 돼?

다시 스쿠터의 시동을 거는 카이토에게 미쿠오가 다가왔다. 한 번이지만 죽어도 잊을 수 없는 강력한 힘. 미쿠오의 초록색 눈동자에서 언 듯 새빨간 붉은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손을 뻗는 작은 소년의 손아귀에서 세계가 움직이는 듯한 기세가 무겁게 고동쳤다. 살기 아닌 기운에 얼어버린 카이토의 턱을 잡고 눈꺼풀을 벌리자 조용히 신의 의안이 한 겹 두겹 펼쳐졌다. 빛나는 파란색 원형의 궤도가 돌아가며 주변의 시야를 갉아먹고 있었다. 신의 선물이라 수식하기엔 잔인하고 과분하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예쁜 눈이네, 형.”

갖고 싶을 만큼. 붉은 눈동자는 신의 선물을 가진 신에게 버려진 자를 찬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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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존대를 하는 마스카이 



날씨가 좋아요. 커튼을 걷자 봄녘이 다가와 유리창에 물결로 떨어진다. 카이토는 기분 좋게 부쩍 따스해진 거실의 창문을 열어 아침 공기를 맞았다.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가 내쉬고선 방의 한 쪽에 놓인 청소기를 손에 잡았다. 아침에 먼저 일어나면 창문을 열고 아침청소, 그 뒤엔 아침 준비, 주중엔 도시락까지. 오늘은 주말이었으니 두 가지만 하면 가장 큰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터-”

우선 주방에서 부르기. 하지만 이 참에 일어나는 일은 드물었다. 알람시계처럼 지정된 일곱 시가 되면 자동으로 눈을 뜨게 되는 카이토로서는 잠을 자도 잠이 온다는 마스터의 말이 와 닿지 않았다. 아침 준비를 끝내고 커피를 내릴 때 마지막으로 마스터를 나직이 부르던 카이토는 앞치마를 벗어 식탁 의자 위에 걸어놓고 방으로 향했다.

“마스터, 들어갈게요.”

대답이 없어도 카이토는 문을 열어 익숙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침대에 이불과 베개로 뒤얽혀 기다란 팔이나 발이 빠끔히 나와 있었다. 어젯밤에 던져 놓은게 분명한 옷가지를 챙겨들고 카이토는 이불을 살짝 들어올렸다. 무거운 눈꺼풀이 굳게 닫힌 마스터는 잠에 취해 미동조차 없었다. 

“마스터, 부탁하신 아홉시에요. 일어나세요.”
“어엉….”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잠꼬대인지 우물거리던 마스터가 다시 깊은 숨을 들이쉬자 카이토는 침댓가에 앉아 본격적으로 이불을 흔들기 시작했다. 하루쯤은 일찍 일어 날 법도 한데. 아니면 차라리 깨우지 말라고 지정을 해두시면 될 텐데. 

“마스터-마스터. 아홉시 십오 분이에요. 이제 십육 분…”
“어어….”
“일어나세요. 아침 식어요. 네? 아니면, 알람 설정을 미루시겠어요?”
“일어났어어….”

거짓말. 일어났다는 의미로 팔을 들어 휘적거리더니 다시 이불더미로 풀썩 떨어뜨려 숨만 색색거렸다. 지정된 시간에 깨우지 못하는 건 사소하지만 은근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할 일 리스트에서 마스터 깨우지를 아직도 지우지 못한 카이토는 이불을 들어 젖혀 몸을 웅크리고 있던 모양 그대로의 어깨를 흔들다가 귀에 대고 커다랗게 외치기 시작했다.

“마스터!!! 곧 이십분이에요!! 알람설정 그냥 미루세요!”
“시끄러…….”
“정말 맨날 이러 실거에요? 그러니까 일찍 주무시라고 했잖아요!! 일어나보세요!”
“시…끄러워….”
“아악!! 미실행 목록에 계속 뜨잖아요!!! 일어나 봐요!!!”

이십분이 넘어가자 시스템에서는 미실행 목록에 대한 알람이 나타났다. 하고 있어. 있다고. 시스템이 알 리가 없었다. 여전히 늘어진 몸으로 더듬더듬 이불을 찾아 꼼지락대는 마스터가 괘씸했다. 누구 덕에 지정된 일도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안드로이드가 되어 가고 있는데. 한참 동안 어깨를 흔들던 카이토는 잡고 있던 어깨를 던져버렸다. 눈앞에서 미실행 창이 붉은 색으로 깜빡였다. 다른 일에도 굼뜬 마스터였지만 아침에 약한 건 도를 지나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내일은 9시에 꼭 일어나고 말겠다고 부질없는 알람을 지정했다. 시야를 막는 알람으로 고생하는 건 정작 카이토였다. 

“아. 정말, 말 좀 들으라고 몇 번을 말해요. 일어나!!! 일어나라고!!! 일어나서 내가 차려놓은 커피랑 토스트나 먹으라고!!”
“뭐…뭐야….”
“알람을 끄던지, 일어나든지. 하나를 고르란 말이에요! 나도 알람 계속 울리면 머리 아프다구요. 너만 편하면 답니까?”
“응…너…. 너??”
“그래요. 지금 알람에 맞춰 못 일어난 지가 연속 한달은 넘었어요. 마스터 너는 내 말이 같잖습니까? 내가 알람 시간을 늘리자고 몇 번을 이야기해요?”

생각보다 효과는 굉장했다. 까치집이 된 머리로 눈을 커다랗게 뜬 마스터가 충격 받은 얼굴로 끔뻑였다. 헐렁한 후드티 소매로 입을 닦더니 벌떡 앉아서 믿기 어렵다는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손가락만 바들거렸다. 카이토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싱긋 웃었다.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너 지금 나한테 반 말 한 거야?”
“반말이라뇨. 요-라고 했잖아요.”
“너…너라니. 나한테 너라고 했잖아….”
“너는 너죠. 마스터. 오옷. 알람 꺼졌다. 아침 드시러 나오세요.”

후련하게 실행 창을 내린 카이토가 가볍게 종종거리며 걸어 나갔다. 커피는 차갑게 식은 지 오래 된 뒤였다. 싱크대에 차가운 커피를 버리고 서랍을 열어 커피봉투를 다시 꺼내 컵에 담았다. 고소하면서도 쓴 향기가 머그컵에서 퍼졌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토스트를 다시 데우자 마스터는 비척대며 다가와 등 뒤에 눌어붙었다.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로 칭얼거리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알람 미루자…. 그러니까 너라고 하지 마….”
“네에. 알겠어요. 이제 다 했어요. 의자에 앉으세요.”

반쯤 뜬 눈으로 아침을 먹고 나면 나른하다고 낮잠을 자러 들어갈게 분명했지만, 열시 이전에 아침을 차릴 수 있다는 건 큰 수확이었다. 카이토는 자랑스럽게 우유가 든 컵을 홀짝였다. 우유보다 새하얀 낮잠을 자고 나면, 비로소 마스터의 하루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오늘은 낮잠 같이 잘까요?”
“그럴래? 그럼 이거 마시고…. 커피를 마셔도 졸리네.”

마스터 방에 있는 커튼을 걷으면 오전의 햇살이 침대로 곧장 떨어져 눈을 감아도 밝은 빛이 보였다. 거기에 마스터의 고른 숨소리가 가득하면 카이토는 평화롭게 오전을 구름처럼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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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day princess 下


자주 들리는 디저트 가게에 들어서자 인사를 하던 종업원은 카이토를 발견하고 놀란 티를 냈다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들리는 단골 남자 손님이 여장을 하고 여자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나타난다면 누구나 당황할 것이다곧 그녀는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여 활짝 웃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메뉴가 결정되면 불러주세요카이토씨는 오늘 컨셉이 뭐에요?”

하하컨셉이랄까.”

공주님이요전 왕자에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들은 종업원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주변을 둘러보자 기분 탓인지 가게 안의 모두가 쳐다보는 것처럼 등이 따가웠다구미는 콧노래를 부르며 메뉴판을 살피고 있었다.

 

선배님뭐가 맛있어요실은 파르페 먹어본 적이 없어요.”

그렇구나여기서 제일 인기 있는 건 딸기생크림이 올라간 바닐라 초코 아이스크림 파르페야딸기를 갈아서 만든 생크림이 상큼하고 맛있어.”

딸기바닐라초코헤에.”

나는 망고바나나파르페에 아이스크림 추가 세 개아니네 개.”

 

기다란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두드리던 카이토는 진지해 보였다귀여워카이토 선배는 늘 모두에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지만 구미는 카이토가 진심으로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한건 녹음 뒤에 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뿐이었다저런 타입이 속을 알긴 더 어렵다고 지나가는 혼잣말로 가쿠포 오빠가 말 한 적이 있었다어제 저녁에도 부산스럽게 옷을 고르는 구미를 불러내 여자 친구로서 예의나 의무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하더니 카이토가 생각 하는 것처럼 단순한 보컬로이드는 아닐 것이라고 했다.

 

그럼 이제부터 알아 가면 되는 거잖아구미는 그게 좋아.”

네가 그렇다면 다행이고옷은 세 번째에 든 게 가장 낫구나.”

 

단순해 보이는데아이스크림 개수 정하는 데에 이렇게 진지한 얼굴이라니.

 

선배님아직도 못 골랐어요?”

.원랜 두 개정도 추가하는데.”

세 개 해요전 선배님이 추천해 주신 것 먹을게요딸기바닐라생크림?”

알겠습니다곧 가져다 드릴게요.”

 

메뉴를 접은 종업원이 테이블을 나서자 카이토는 임무를 완료했다는 듯 작게 한숨 쉰다.그녀는 주말에도 하는구나난 주말엔 잘 나오지 않아서 몰랐어아는 사람을 만난 게 의외란 투였다구미는 카이토의 그녀’ 라는 생소한 호칭이 흥미로웠다곧 카이토는 그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가까운 대학을 다니고자주 오는 단골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는 성실하고 상냥한-

 

미안쓸데없는 말이 길었네.”

아니에요주말엔 잘 안 나오세요동생들이나 메이코 선배님이랑미쿠 선배님은 쇼핑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미쿠는 쉬는 날이면 거의 쇼핑몰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곤 해.”

 

머리끈 하나 사는데 삼십분이 걸려머리끈은 미구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이기도 하고.미쿠의 방엔 머리끈만 두 상자가 있다고 카이토는 말했다매일 아침 침대 속으로 들어와 오빠오늘은 어떤 게 좋아하고 물어본다고떠올리면 따뜻한 가정이었다둘 뿐인 구미의 집과는 다른 분위기.

 

고민이 많은 건 선배님 집 특성인가 봐요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하고 오신 빨간색에 노란 줄무늬가 들어간 기다란 리본예뻤어요.”

그래그 리본 내가 골라준 거야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지미쿠 머리색이랑 달라서 눈에 선명하고.”

그렇구나미쿠 선배님은 좋으시겠어요멋진 언니가 둘이나 있으니까.”

미쿠는 모르겠지만.”

 

카이토가 설명했던 그녀가 파르페를 들고 나타났다구미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가슴에 붙은 이름표를 읽었다그녀의 이름은 아미였다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장난감처럼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작은 설탕과자가 뿌려진 파르페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차갑지만 달콤한 향기가 솔솔 올라온다카이토는 숟가락을 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종업원은 작은 접시를 하나 더 내려놓았다.

 

무슨 일 인진 몰라도 신경 쓰고 오셔서서비스로 과자도 드릴게요.”

우와감사합니다잘 먹을게요.”

데이트에요아미씨.”

헤에그렇구나별일이네요둘이서 온 것도 처음이지만데이트라니.”

 

그녀는 뉴스에 밝지 않은 편이야종업원이 돌아가자 카이토가 속삭였다혼자서 파르페를 먹으러 오는 남자 보컬로이드라사실은 여자지만그것에 대해서 묻자 카이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스케줄이 끝나면 저녁 늦게인데보통 다섯 개는 먹는걸 보여주면 다른 아이들은 잔소리를 한다고예상보다 시답잖은 이유였다파르페 다섯 개를 늘여놓고 딸기 한입생크림 한입씩 번갈아 가면서 먹을 카이토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다섯 개요그렇게 많이 드세요?”

맛있으니까구미도 내가 그렇게 많이 먹으면 화낼 거야?”

아뇨신기해서요그리고 맛있네요딸기생크림이 정말 맛있어요!”

헤헤다행이다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오고 싶었어녹기 전에 어서 먹어.”

 

카이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컵을 비워냈다겹겹이 쌓인 아이스크림을 커다랗게 삼키고는 생크림을 바른 초코과자를 오독오독 깨물어 먹고가장 아래에 있던 셔벗까지모두 해치우고선 컵에 남은 아이스크림을 긁어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구미의 것은 반이 넘게 남아있었다천천히 먹으라고 말하는 입가에 생크림이 묻어있었다.

 

더 드실래요제거 한 입 드릴까요?”

아니야괜찮아며칠 전에도 먹었어.”

아앙-해보세요.”

 

구미는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니었다처음 비밀을 들킨 때나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할 때도 거침없이 감시 카메라는 어디 있냐고 대기실을 샅샅이 뒤지는 것부터아니그 전부터 동생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혼자서도 곧잘 서있는 해바라기처럼무대 위에서는 훨씬 빛났다.

 

선배님녹아요빨리요!”

으응고마워.”

또 웃으시네요좋아라하나 더 드실래요?”

아냐이거 다음엔 뭐 하러 가기로 했지쇼핑이었던가구미는 쇼핑하는 거 좋아해?여자애들은 다들 그런 편이지.”

 

선배님은 싫어하세요숟가락을 입에 넣은 채로 구미가 묻자 눈을 굴리던 카이토는 모르겠다는 대답을 했다.

 

 

 

***

 

 

쇼핑몰을 내려오는 손이 무거웠다구미는 한 손 가득 쇼핑백을 들면서도 카이토를 잡은 손은 신나게 흔들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어느새 쇼핑몰 옆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모든 층을 걸어 다니며 여러 가게를 구경했다옷 가게에서 어울릴 만한 흰 원피스를 가져다 대자 카이토는 손사래를 치다가 마지못해 대어 보는 게 고작이었다난처하게 옷을 가져다 놓자 구미도 더 이상 권할 의지를 잃었던 것이다하지만 구미의 옷을 골라줄 때는 적극적이었다세 네 벌을 잔뜩 안고 와 피팅룸에 있는 구미에게 다음엔 이것이거하고 건네주면서 코디마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덕분에 어울리는 옷을 잔뜩 찾아내선 이 달의 용돈을 다 써버렸다고 장난으로 투덜거렸다.

 

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게 많았어요.”

다행이네오늘 집까지 나와 줬으니까이번엔 내가 집에 데려다 줄게.”

괜찮다고 사양하고 싶지만부탁드려요짐이 많아서.”

천만에전철 타러 갈까?”

 

옷을 고르며 카이토와 나눈 대화들은 이외인 것이 많았다가장 놀란 건 원래는 긴 머리였다는 것메이코 선배님이 머리가 짧으니까 함께 여자로 개발된 카이토도 비슷한 머리일거라 생각했다머리를 자르고 나타나자 메이코가 정말 아쉬워했다고비밀을 몰랐더라면 언제까지도 알지 못했을 이야기들을 해주었다신기한 일이었다이렇게나 몰랐던 게 많았다니.

 

정말 예뻤겠다사진 없어요보고 싶어요!”

그런 게 있으면 큰일 나지구미한텐 어처구니없이 들켰지만극비라구사실은.”

헤에왠지 기뻐요카이토 선배님과 비밀을 공유하게 되다니.”

맞아그게 구미여서 기쁜 거지.”

 

전철이 오는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전철역 안에서 카이토의 뒷말은 묻혀 사라졌다돌아오는 풍경 사이로 묻혔다가 전철 문이 열리자 쇼핑백을 든 손을 내밀었다.

 

오빠가 전철역으로 데리러 온데요.”

그래친절한 오빠네.”

맞아요어제도 조심하라고 잔뜩 이야기 해줬어요.”

하하그러네가쿠포씨는 내가 남자인 줄 알 테니까남자는 주의해야지이 옷보면 놀라겠다.”

 

그에게도 미안하지작은 혼잣말을 들은 구미는 전철 창밖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쓸쓸한 얼굴.

 

미안할거 없어요충분히 잘 지내고 있잖아요?”

글쎄유일한 또래의 남자라고 생각할 텐데렌은 아직 어리고..그런데도 가쿠포의 말에 잘 공감하질 않으니까그렇다고 해서 여자애들의 말에 더 공감하는 것도 아니야난 언제나 애매한 위치일 수밖에 없어내가 선택한 것이지만.”

애매하지 않아요나랑 있을 땐 여자인 카이토 선배님 인거구아닐 때는 카이토선배님이면 돼요.”

 

9년을 고민했던 것에 대해서 구미는 단번에 대답해버린다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에 그렇구나짧은 대답을 남긴 카이토가 가방에서 리본이 달린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이것 까먹었다선물이야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머리핀에엣언제 샀어요계속 같이 있었는데!”

옷 갈아입는 동안이나그리고 아까 미쿠 머리끈 이야기 할 때 표정 말이야사진 찍어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서재밌었어.”

으아앙그랬어요부끄러워요.”

 

머리핀은 작은 연두색 리본에 토끼와 당근이 달린 형태였다쇼핑백을 잔뜩 든 손으로 낑낑대자 카이토는 손에 가져다가 머리에 달아주곤 거울을 내밀었다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카이토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좋아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지구미 머리색이랑 잘 어울려.”

정말 마음에 들어요감사합니다.”

다음 역에 내려야 하네가기 전에 생각나서 다행이다.”

같이 안 내려주셔도 돼요오빠가 역 안에 있겠다고 했어요계속 타고 가세요.”

집에 들어가서 연락해.”

 

쇼핑백을 넘겨받은 구미가 전철을 걸어 나가자 부풀었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라앉았다전철 창밖으로 뛰어가는 구미와 마중 나온 듯 편안한 차림의 가쿠포의 모습이 보이자 카이토는 창을 피해 의자 자리로 걸어갔다카이토를 알아본 몇 사람이 술렁대기 시작했다내일 정도 일까머플러를 하고 왔었더라면 얼굴을 가릴 수 있을 텐데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처럼 카이토는 도망가고 싶었다먼 곳으로가능하면 구미와 가까운 곳으로눈을 감으면 다시 마법이 펼쳐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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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day princess 


구미카이(女)

늦은 밤이 되어서야 카이토는 종이가방을 든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녹음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 저녁 늦어서야 스튜디오에서 출발 할 수 있었다자정이 다가온 집은 어둡고 조용했다차례로 미쿠메이코린과 렌의 이름이 적힌 문패를 단 방들을 지난 카이토는 발꿈치를 들고 살짝살짝 걸어 카이토의 이름이 적힌 방으로 들어갔다코트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메시지가 왔다는 녹색 알림이 반짝였다구미려나종이가방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서 몸도 던져 눕자 피로가 몰려왔다며칠 동안 아침부터 저녁 내내 녹음만 했으니까보컬로이드의 몸도 피로가 쌓일 수밖에마침내 내일이 다가오고 있었다구미와 첫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한 날.

 

[선배님내일 아홉시에 집 앞으로 갈게요.]

[아직 안 마치셨어요피곤하실 텐데 약속을 미룰까요?]

[전화해도 될까요선배님 목소리 듣고 싶어요.]

 

마지막 메시지가 한 시간 전에…….차에서 자고 있었지 참.”

 

녹음할 때는 휴대폰을 볼 시간이 없었다당차고 멋진 고백을 듣고여러 기사가 구미와 카이토를 언급했지만 연애는 물론이고 여자와 여자가 사귄다는 건 아직 낯간지러웠다여자의 몸이지만 여자의 마음은 필요 없다고 생각 했으니까카이토는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넘기다가 손끝으로 화면을 두드렸다.

 

카이토 선배님집에 들어오셨어요?”

방금구미는 아직 안 자고 있었네혹시 깨운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구미는 귀여운 새처럼 작게 조잘거렸다잠옷 입고 침대에서 선배님 노래 듣고 있었어요신곡 녹음은 잘 하셨어요분명 좋을 거예요꺄아듣고 싶어라밝은 목소리를 들으면 어깨에 쌓인 피로가 사라진다분홍색연두색의 푹신한 이불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통화하고 있을 것이다항상 거짓말 하는 게 익숙해질 순 있어도 편해질 수는 없었다카이토보단 키도 체구도 작았지만 구미와 이야기 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카이토는 하루 종일 어깨에 매달려 있던 긴장을 풀고 높은 소리로 웃었다.

 

아하하사실은 계속 마음에 안 드셨는지 다섯 번 넘게 다시 불렀어메시지 답 못해서 미안.”

아니에요오늘은 저도 바빴어요피곤하시겠다내일은 괜찮으세요?”

구미랑 만나려고 열심히 한걸그런데 정말로.”

 

며칠 전 대기실에서 만난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은 구미가 양손을 모으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배님이 치마를 입고 나와 주셨으면 좋겠어요카이토는 치마를 입지 않은지가 몇 년은 되었고치마를 입고 나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언젠가 집에서 벌칙게임으로 레이스가 치렁치렁 달린 드레스를 입었었는데그런 건 짧은 머리 모습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벌칙이라지만 잠시나마 기대했던 만큼 실망하고선다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입지 않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이렇게 빛나는 눈동자로 글썽이며 부탁하면 다짐이 약해졌다.

 

나 외출용 치마는 없고그리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야.”

아니에요제가 남자처럼 바지 입고 이게 컨셉이라고 말 할 거예요옷은 메이코 선배님거 빌리고요.”

메이코는 옷을 너무 짧게 입어서 내가 입기엔.”

벌써 부탁 드려 놓은걸요의상실 옷 중에 가장 예쁜 걸로 가져다 달라구요.”

 

메이코는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카이토는 깔끔하게 정리된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옷을 발견하고 손을 가져갔다보드라운 재질의 검정색 원피스와 어깨에 함께 할 수 있는 망토가 한 세트로 된 예쁜 옷이었다망토에는 귀엽게 흰색 털로 만들어진 방울까지이런 건 정말 여자애들이나 입는 거였다미쿠나 린이나혹은 구미처럼 귀여운 여자애들방울을 손에 들고 만지작거렸다머릿속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생각들이 가슴을 박차고 나왔다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메이코 선배님이 사진 보여주셨는데 카이토 선배님이랑 정말 잘 어울려요입고 내일 맛있는 파르페 먹으러 가요데리러 갈게요오헤헷.”

그래이제 늦었는데 자내일 보자잘 자.”

 

휴대폰에서 입술소리가 흘러오다 끊어졌다수화기 밖에서 휴대폰에 대고 구미가 뽀뽀를 한 모양이었다정말 귀여웠다카이토는 흐뭇하게 웃다가 손에 든 옷을 보면 한숨이 나왔다전신거울에 잠시 대어 봐도 치마는 무릎 위에 올라왔다펄럭이는 자락도 신경 쓰였고하지만 구미가 저렇게 기대하고 있는데그리고 첫 데이트라면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어떡하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부르는 목소리는 메이코였다.

 

어이카이토들어가도 돼?”

으앗잠시만아니지잠시만!”

뭐라는 거야들어간다?”

 

방문을 벌컥 열자 카이토는 허둥지둥 옷을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끈으로 된 민소매와 짧은 반바지를 입은 메이코는 책상 옆의 의자에 다리를 꼰 채로 앉아선 그럼 그렇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메이코이 옷은.”

봤어예쁘지의상실에서 빌려왔어내 건 짧은 것들 밖에 없으니까죽어도 안 입는다고 할 거 같아서스타일도 다르고.”

으아.왜 빌려 온 거야...구미가 부탁했어이걸 입고 어떻게 밖을 나가다들 날 변태로 볼 거야.”

넌 여자잖아여자가 여자 옷 입는 게 뭐가 어때서?”

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요즘 한창 와왕자 이미지로 밀고 있는데에.”

헤에네가 왕자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잠자는 아이스의 공주님 카이토라면 몰라.”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카이토의 목소리는 다시 낮아져 간결했다푸른 바다처럼 넘실거리던 긴 머리를 단칼에 잘라 버렸을 때처럼연구실의 누구나 칭찬하던 아름다운 빛의 머리카락이었다카이토가 남자로 보도된 건 사소한 실수였지만카이토는 자신이 남자나 여자라는 사실 보다는 음악과 노래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비밀 하나만 생기면 모두가 다시 행복할 수 있는 거라고줄곧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까딱거리던 다리를 멈춘 메이코가 표정을 멈추고 바라보자 그제야 카이토는 난감하게 말을 수습했다.

 

화났어옷은 정말 예뻐신경 써줘서 고마워나랑 안 어울릴 뿐이야.”

이젠 카이토 왕자님인 게 좋은 거야구미를 좋아하는 것도 왕자님이 되려고그래서 사귀자고 했어?”

구미는내가 왕자님이 아니어도 좋다고 했어공주처럼 지켜준다고.”

그러면 공주님이 되어야 하잖아카이토 공주님.”

 

스타킹 가져다주러 왔어아직 춥다고 하기에메이코는 방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서 고개 숙인 카이토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헝클였다밀밭처럼 손가락사이를 지나가는 머리카락들자신을 좋아해주는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메이코는 상상하기 힘들었다밤이면 집에 돌아와 혼자 방에서 우는 카이토를 지켜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시작은 우연이라 하더라도이제야 겨우 생긴 카이토만의 왕자님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 셈이었다가여운 푸른 공주님에게도.

 

울지 마여자애가 예쁘고 싶은 건 당연한 거니까.”

우응.”

 

문이 닫히자 카이토는 이불 속에 들어갔다눈물의 이유가 미안함이 아닌 건 오랜만이었다.

 

 

 

***

 

 

 

오래전에그러니까 실험체 몇 번째의 팔찌를 달고 음정조정을 하고 있을 때에 커다란 티셔츠 같은 실험체용 원피스를 입은 이후로 처음이었다몸에 맞춘 듯 선이 흔들리는 원피스를 입고 방을 나서자 아침의 거실은 술렁였다커피를 마시던 메이코만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잠시 끄덕였다미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뛰어와 팔에 매달렸다.

 

오빠이 옷은 뭐야왜 이렇게 입은 거야오늘 쉰다며미쿠랑 놀자아-”

린이랑린이랑도 놀자!”

오빠는 오늘 구미랑 선약이 있어서미안.”

 

구미와 사귄다는 믿을 수 없는 기사를 본 미쿠는 녹음실에서 한바탕집에서 한바탕씩 난리법석을 벌였다오빠는 미쿠의 오빠고만인의 오빠라며 만들었던 카이토 인형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집에 돌아온 카이토에게 눈물범벅이 되어서 거짓말이라고 말하라며 안겨서 또 한 번 울었다거짓말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서는 다시는 오빠랑 안 놀거라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며칠 동안 카이토만 보면 울먹이던 미쿠를 앉혀놓고 구미를 좋아하는 것과 미쿠를 좋아하는 건 다른 카테고리라고 한참을 설명했다미쿠를 가장 좋아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고세 번이나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쪼르르 품에 안겨왔다.

 

에에데이트를 그러고 간다고원피스입고?”

으응그게구미가.”

오늘 구미랑 옷 바꿔 입기 데이트 한다잖아요즘 유행인데카이토,늦지 않았어얼른 가봐.”

고마워메이코나 다녀올게.”

 

평소라면 폴짝 뛰어와 양 볼에 뽀뽀했을 미쿠였지만사랑하는 멋진 오빠가 여자 옷을 입고 데이트를 간다는 건 미쿠가 받아들이기엔 충격적이었는지 현관을 나설 때 까지 미쿠의 인사는 들리지 않았다당연한 반응이었다카이토는 기다란 부츠를 신고서 발끝을 몇 번 바닥에 두드리며 앞 코를 가다듬었다미쿠가 조금 더 오빠를 이해하게 되면언젠간 말 해줄게언제나 느끼는 작은 양심의 가책을 뒤로하고 문을 닫자 익숙한 모습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카이토 선배님!”

 

복도 앞에 구미가 서 있었다귀여운 남자아이들이 입을 법한 반바지로 된 약식 정장을 입고서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문 열리는 소리에 바라보던 하늘에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공주와 왕자님이 만나는 전형적이지만 아름다운 장면처럼 천천히 풍경에서 부터 밝아져 눈앞으로 다가왔다선배님-하는 밝은 목소리구미랑 함께라면어색한 여자 옷이라도 예쁘게 보인다면 얼마든지 입을 수 있었다.

 

집 앞에 있었어말을 하지미안늦어서.”

아니에요제가 마음이 들떠서 일찍 나와 버린걸요예쁜 선배님을 빨리 보고 싶어서요그리고 정말 예뻐요공주님 같아요.”

구미도 예쁜데옷 귀엽다.”

그래요어제 오빠랑 열심히 골랐어요헤헷오늘 할 일이 많아요파르페도 먹고같이 옷도 사고사진도 찍고노래방도 갈 거예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던 구미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얼떨결에 내민 손을 올리자 마주 잡더니 깍지를 쥐고 흔들었다거울에 비춘 듯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밝고 가벼운 여자아이의 따뜻한 손카이토는 잡은 손에 입술을 가져가 예의 왕자님처럼 미소를 지었다.

 

가시지요공주님.”

네에공주님!”

 

내딛는 걸음이 가벼웠다궁금하다는 신곡을 불러주면 구미는 좋아할까?방금처럼 활짝 웃어주면 좋을 텐데구미에 대해서 많이 알고 싶다고 속삭이자 리본이 달린 모자가 흔들릴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곧 거리로 접어들자 주말의 청량한 햇살이 얼굴에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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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ship

짧은것/X KAITO 2015. 3. 1. 20:51

kinship


카이카이

나와 그 아이는 - 선배와 나는

 

 

" 같은 건가요? "

 

 

나는 솔직히 그날 내 눈을 의심할수 밖에 없었다. 보컬로이드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한 가정에 같은 기종은 들일 수 없다] 는 불문율을 정말 마스터가 깨버린 줄로만 알았다. 무심히 다녀오셨어요. 하고 보지도 않은 채 인사한 후 돌아본 뒤에는 거울이라도 세워진 듯 똑같은 모습의 보컬로이드가

선배님 안녕하세요. 하고 아무렇게 않게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너 설마!!"

"처음 뵙겠습니다. 시리얼넘버 K-V3-1030입니다."

 

 

튀어나올듯한 눈으로 그 아이와 마스터를 옮겨가며 쳐다보았다. 이런 망할.

정말로 신형을 사버리고 말았구나. 같은 기종이 아니라 말이지. 영악한 인간같 으니라고.

 

그래도 그 아이는 나쁘지 않았다. 날 보자마자 희뜩 달라지는 눈빛으로 선배님, 선배님. 하고 꼭꼭 붙이는 높임말도, 만나자마자 시리얼넘버부터 읊어대는 군기는 어디서 배웠어. 다음부터는 절대 어디 가서 시리얼넘버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그건 사람으로 치면 주민등록번호 같은 거야, 하고 이르자 그렇군요. 하고 실긋 웃는 게 오히려 나와 마스터만의 살갑지 않은 가정에 덜렁 떨어진 입양아의 느낌이였다. 물론 키도 얼굴도 비슷하지만 난 이미 8년을 기동된 기종이라 때가 탄 느낌이라 뜯어놓고 보면 그렇게 같지도 않은 편이였다.

 

튜닝을 몇 번이고 해서 지금 노래 실력인 나와 달리 영어기능까지 되는 그 아이는 마스터의 노래에 넓은 가능성을 제공했다. 셈이 났느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을 리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가 미워졌다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졌는걸, 둘이서 아이스크림에 대한 심오한 대화를 나눌때라던지.

 

 

"이번의 망고맛샤베트는 성공적이네요. 선배님, 역시 함량이 높은 망고쥬스를 섞는게 핵심이에요. 게다가 얼음 정도도 적당하고요."

 

 

사각거리면서 말하는 그 아이는 아직 유연한 말솜씨를 가지지는 못했다. 아직은 조금 딱딱한 느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배님이 가르쳐 줄게 많아 보이지? 하고 허허 거리던 마스터의 말이 아니더라도 난 충분히 그 아이에게 내가 아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했다. 누가 뭐래도 같은 마더보드를 만든 회사 아니겠는가. 이런 게 온정이지 다아.

 

 

"누가 만들었는데. 당연하지…. 마스터는 달다고 한입 먹고 버렸지만 말이야"

 

줄곧 8년동안 버려와서 무덤덤하긴 한다만 이번에도 정말 한 숟갈만 넘겨줬는데 그것마저 으엑, 달어 하고 싱크대로 직행하는 무심함이라니. 이렇게 맛있는 것을. 하고 궁시렁대는 내 앞에 마주 보고 앉은 그 아이는 멍하니 표준 얼굴로 기계적으로 먹다가도 내가 보고있다는 걸 깨달으면 싱긋하고 표정을 바꾼다. 아직은 멀티태스킹이 힘든건지 아니면 원래 정색을 잘하는건지 속세에 찌든 나로썬 모르겠다. 난 표정변화가 하도많아서 말이야.

 

 

"맛을 모르시네요. 마스터는 인간의 혀를 가지고 있는 게 아깝습니다."

 

 

그 아이는 흥미롭다. 인간도 만약 자기의 어린 시절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면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기본 베이스가 똑같은 아이가 성장해나가는걸 보고 있노라면 이게 부모의 마음인지 싶은데, 사람의 진득한 모성애만큼 애착이 생기는건 아니지만. 그리고 얘는 보기보다 많이 활발하지 않아서 내가 원하는 만큼만의 행동을 보여주는 게 좀 아쉽기도 하다.

나는 너 정도 때 온 집안을 뒤지고 다녔는데 말이야. 하고 웃어도 그러면 마스터가 곤란하셨겠네요. 하고 갸우뚱 거리는 게 끝인 재미없는 녀석.

 

 

"인간의 미각은 우리보다 훨씬 예민하니까 마스터한테 이건 엄청나게 달 거야 아마."

 

 

나 역시도 사각사각거린다. 샤베트는 식감이 정말 마음에 든다. 아이도 마음에 들어줘서 다행이다. 처음 시도해보는 건데, 앞으로 더 많이 먹을 아이스크림이 남았으니까 행복해진다.

 

 

"그렇군요. 그걸 간과했습니다."

 

역시, 재미없는 답변.

 

 

 

 

 

 

***

 

 

 

 

"식후엔 노래 감상이 최고지, 노래나 들을까? 뭐 듣고 싶은 거 있어? "

 

음악을 공부하는 집답게 CD가 많다. 거실 한쪽 벽 전체를 CD장으로 만들어 내가 부른 곡을 넣은 자체제작 CD부터 시작해서 클래식, 콘서트 영상까지 두루두루 갖추었다. 아직 나도 못들은 노래들이 많을 정도로 월급을 CD에 긁어모은다. 국내에서 못 구하는걸 해외배송하느라 세금폭탄을 맞았다며 한숨을 쉬며 명작을 모르는 국내의 수입사를 욕할정도의 수집가로서 마스터본인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전 아직 고를 정도의 식견은 아니라서. 선배가 골라주세요."

 

 

뭐든지 즐겁게 듣겠습니다. 하고 또 예의 웃음을 짓는다. 정말 즐거운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다. 얘보다 일찍 나온 게 다행이지 이런 선배가 있었으면 난 기도 못 펴고 쭈그리고 다녔을지도. 으으 소름끼쳐.

기계라고 그렇게 딱딱하게 할 필요는 없는데, 여러 번 그 아이의 어깨에 실린 힘을 풀어보려고 노력했다만 어느 거리감은 줄여지진 않는다. V3가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은 마스터와는 직결된 문제라 나도 애를 많이 써주었는데 나한테 대하는 것보다 마스터에겐 훨씬 최고 예우를 다 하는 터라 마스터는 속이 터져나갈 뿐이다.

그냥 듣던거나 들을까하다 오늘은 고집을 피워 보기로 했다.

 

흐음, 배시시 웃으며 "나는 니가 고른거 듣고싶은데?" 하고 그 아이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아니, 저, 하고 당황해 하는 건 처음이라 신났다. 새로운 표정이다.

 

 

 

"그냥 아무거나 골라도 돼,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싱글싱글하면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여기 있는 건 다 좋은 음악들이야. 하고 혼자 신나서 간질댔다. 어깨에 올린 손을 주물주물하는건 마스터 안마해주던 내 버릇.

 

한참을 시선 둘 곳 없이 이리저리 하다 곤란한듯 으음, 하고 고민하던 그아이는 뜻밖의 말을 했다.

 

 

"저, 저. 선배님. 죄송하지만 어깨에 손 좀 떼주시면 안될까요…."

 

 

아, 미안. 나는 손을 거두었다. 스킨쉽이 아직 불쾌한가. 그래도 이건 좀 기분 나쁜데. 마스터랑은 쓰담 쓰담하고 손도 잡잖아. 나라서 싫은걸 수도.

 

 

"불쾌해?"

"그럴 리가!! 전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히뜩 놀라서 이적까지 유지하던 평정심을 버리고 벌게진 얼굴로 휙휙 고개를 휘저으며 내 어깨를 푹 잡았다. 으응? 하고 영문모를 내 앞의 그 아이 얼굴이 더 영문모를 얼굴이다. 왜 그래, 오류 났어? 하고 잡은 어깨 때문에 들 수 없는 팔을 들어보려 했다. 힘이 왜이렇게 센거야. 엊맞춰져 떨릴지언정 꼼짝도 하지 않는다.

 

 

"선배가 만지면 좋아서 부끄럽습니다. 제가 먼저 손대게 해주세요."

 

 

이런 말을 눈 똑바로 보고 할 수 있는 패기를 가졌으면서 뭐가 부끄럽단거야.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에 힘이 들어가서 잡힌 어깨가 아파. 우선 진정시키기로 했다. 저기 아가, 이손 놔줘 응? 하고 최대한 상냥하게, 애 달래듯.

의식하지 못했던 듯 놀라는 소리와 손을 떼고 입으론 어물쩍하더니 다시 내 손을 퍽하고 잡는다. 정말 힘이 세다. 손을 잡는데 퍽 하는 소리가 나다니. V3는 여전히 빙글빙글 폭주상태.

 

 

"아뇨, 정말 진짜. 어, 그러니까 처음 볼 때부터 선배님이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제가 아직 미숙해서 표현도 못하고. 저는, 선배는- "

 

"숨넘어가겠네. 진정해 일단, 좀 당황스럽네. 우린 일단 마스터에게 애정이 향하게 되어있는 건 너도 알지? 너는 나랑 같은 라인이라 동질감이랑 애정을 헷갈리는 게 아닐까? 본래 같은 기종은 그런 이유로도 잘 붙여놓지 않는 편이고."

 

 

이게 정답이다. 동질감과 애정은 확실히 구별하기가 어려운 감정이라고 배웠다. 어린 이 아이가 헷갈릴 만도 당연하지. 나도 사실 처음 느낀 동질감에 며칠 고민했었는데, V3는 몇 달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이리저리 쑤셔댔으니 얼마나 속으로 애태웠을까.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런 감정을 헷갈릴 정도로 인터페이스가 조잡하진 않습니다."

 

파란 눈이 진짜다. 그 아이는 몇 달 사이에 애정을 깨달은 걸까? 그걸 굳이 마스터가 아닌 나에게 주고 싶은 이유는-

 

 

"그럼 헷갈린 나는 뭐가되지?"

 

 

 

동질감 때문이겠죠. V3는 처음으로 아이처럼 환히 웃었다. 듣고 싶었던 CD대신 알게 된 감정의 대화는 흘러간다. 인터페이스가 조잡한 나는 동질감과 애정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

 

 

 

 

 

"아가"

 

 

CD장을 마주하고 멍하니 선 그 아이는 내 애정의 상대.

여전히 어깨 만지는 건 별로 좋아하질 않는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선배 "

 

 

아이는 여전히 나를 선배라고 부른다. 애정과 존경을 담은 호칭이므로 절대 바꿀 수 없다는 게 아이의 단호한 생각이었다. 이쪽도 마찬가지라고. 하다못해 형으로 바꿀 순 없냐고 물어도 고집불통이다. 그래서 나도 아가, 아가 하는 것이다. 내가 그리 주관이 있는 인터페이스가 아니고 고집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마스터와 살고 있는지라 아이의 투정이나 고집정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정도로 맞던걸 느끼게 해줄 뿐.

 

 

"그래서 듣고 싶은 CD는 뭐라고?"

 

"미쿠 선배 콘서트CD…."

 

 

수줍게 가리킨 손끝에는 우리의 아이돌 미쿠가 윙크를 하고 있는 DVD가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꽂혀있다.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주워 담을 때 쓸려온 게 분명해 보인다. 나도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난 의외로 조용조용한 노래만 들어서 말이야. 재밌겠다. 하고 부끄러웠을 선택을 동조해준다.

 

 

 

"근데 너 이런 게 취향이냐? 의외네"

 

 

DVD를 재생시켜놓고 아이 무릎에 폭 누워 킥킥댔다. 왠지 모르게 이 기종은 튼튼하다. 목소리는 나보다 여리하게 만들어놓고선. 무슨 생각인지 몰라. 그렇지 않아도 오래되어 힘이라곤 노래 부를 정도인 나는 체력적으로 휙휙 휘둘려 다니기만 한다.

 

 

 

"멋있잖아요, 아이돌. 반짝반짝 빛나고"

 

 

아이의 눈이 파란색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역시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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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ame switch

짧은것/X KAITO 2015. 3. 1. 20:49

Noname switch


마스카이카이

 

 

 

V3군에 대해서 말인데조금 물어봐도 될까어느 날 저녁 마스터가 V1 혼자만 불러내 꺼내는 목소리는 신중했다고개를 끄덕이자 마스터는 손가락으로 베란다를 가리켰다. V3몰래 혼자 와소리 없는 입 모양은 그렇게 말했다중요한 일이겠지카이토는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살짝 들여다본 V3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작업실에서 악보 정리를 하고 있었다아래 선반에서 악보를 꺼내 알파벳순으로번호순으로살랑거리는 투명하고 빛나는 머플러가 헤엄치는 물고기의 유연한 꼬리처럼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콧노래를 불러가며 정리에 빠진 틈을 타 조용히 베란다 문을 열었다마스터는 담배 몇 개비를 피워 놓고선 어두운 시가지에 나타난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꽤 심각한 표정카이토는 옆에 다가서 난간에 팔을 기댔다.

 

마스터부르셨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어떤 것을요? V3군에 대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겨울이 지나가는 밤은 아직 바람이 차게 불었다반바지를 입은 마스터는 한쪽 발로 다리를 벅벅 긁어대더니 고민하는 듯 머리를 헝클었다. V3군이 뭔가 잘못이라도 한 걸까하지만 V3는 V1에게도 꼬박꼬박 선배님선배하면서 잘 따랐고 마스터가 가르쳐 주는 거라면 몇 번이고 연습해서 다음 날엔 자기 것으로 만들어 올만큼 열심이었다문제라면 아직 사람에 익숙해지지 않은 것 정도카이토는 기시감을 느낄 때면 V3에게 알려주고선 주의시켰다사람과 비슷해지는 것이 노래에도 중요한 일이었다어디까지나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사람의 것이었으므로.

 

“V3옷 말이야너희 그 이상한 디폴트 옷.”

이상한?! 얼마나 예쁜데요파란색과 흰색코트는 최고의 조합이에요!”

네 미적 감각이 어떻게 된 건 이제 알았어그런데 말이야내가 아무리 설명서를 뒤지고 찾아봐도 적혀 있질 않아서혹시 같은 기종이면 알까 싶어서 물어보려고.”

설명서가 그렇게 두꺼운 데 없는 내용이 있어요조교에 관한 것인가요기능?”

아니신경을 끄려고 해도 궁금해서 못 참겠어. V3군 가슴에 달린 스위치는 뭐야?”

.”

 

그렇게 물으셔도고작 코트에 달려 있을 뿐인 스위치에 중요한 기능이 있을까요? V1은 맥빠진 목소리였다저녁 시간 테이블 아래로 발짓을 해 비밀 작전처럼 눈짓으로 불러낸 것치곤 장난스럽지 않은가마스터가 뱉어낸 담배 연기가 얼굴을 향한 바람에 실려 온다.연기를 직격으로 맞으면 반사적으로 기침이 났다연기를 피하려 고개를 저어대자 마스터는 베란다의 난간에 담배를 짓눌러 꺼버렸다실망한 얼굴도 그제서야 마주쳤을 것이다.

 

장난이 아니라니까. V3군은 디폴트 옷을 벗으려고 들지도 않잖아불편할 텐데.”

실용성 면이라면 그리 봬도 전혀 문제없는 디자인이고특히 V3군은 코트가 넓은 편이라 괜찮을 텐데요불편한 건 마스터의 시선 아닌가요.”

야아매정하게 말하지 마너희들 스위치는 전부다 목 뒤에 있잖아가슴에 있는 건 아무래도 이상해지금은 OFF상태로 되어있지.”

 

가끔 이상한 것에 꽂힌다니까그럭저럭 말을 받아주고 나올 생각이었다분명 관련 없는 곳에 만들어진 스위치긴 해도 설명서에 적혀있지 않다면 의미가 없다주어진 기능을 착실히 쓰는 것이 약속이다개발팀도 장난 정돈 칠 수 있겠지그러고 보니 V1의 디폴트 옷은 그런 이야기도 자주 들은 편이었다옷에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디폴트 옷은 깨끗하게 다림질해서 입으면 선이 괜찮고색도 멋있었다하지만 여자 사용자들의 반발이 대단했다고 하더라그걸 감안해서 나온 게 V3였고, V1눈엔 V3의 옷은 충분히 세련되고 멋졌다머플러도 시원하게 기다랗고바람에 펄럭이는 코트자락이 마음에 들었다.

 

선배마스터두 분 저만 빼놓고 무슨 이야기 하세요?”

! V3아니그냥담배 피우다가이야악보 정리 벌써 다 한 거야고마워.”

아니에요선배가 불렀던 노래 이것저것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다행이네뭔가 불러 보고 싶었던 것 있었어함께 연습 하면 좋을지도.”

 

어두운 곳에서는 V3의 목덜미나 머플러가 더욱 돋보였다은은하게 빛나니까본체의 전력을 끌어오는 간단한 원리였다가슴의 스위치도 기능이 있다면 대충 그런 종류마스터는 눈짓으로 저거 봐보라고하며 가슴을 쿡쿡 가리켰다스위치는 OFF 상태에서도 아랑곳없이확실히 빛나고 있었다.

 

들어가요슬슬 추워요.”

먼저 들어가 카이토들난 담배 한 대만 더 하고 들어갈게.”

십분 더 있다가 들어오세요냄새나니까.”

어휴잔소리문 열었으면 들어가담배 연기 방 안에 들어가기 전에.”

 

 

 

 

***

 

 

 

 

 

 

잠자리에 들기 전 V3는 코트를 벗어 손으로 탁탁 털고선 침대 옆 옷걸이에 걸었다전력원에서 떨어지면 머플러며 코트의 빛은 사라진다안에 입은 민소매 티셔츠에 세트로 받은 잠옷을 입었다. V모양으로 파인 잠옷 안에 목의 부분만 드러난 이상한 모양이었지만, V3는 디폴트 옷을 벗는 것만큼 민소매를 벗는 걸 싫어했다이유나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싫다면 굳이 벗지 않아도 자는 데엔 문제없었다카이토는 슬쩍 눈을 돌려 벽에 걸린 디폴트 옷을 바라보다 마지막 단추를 잠그던 V3에게 말을 건넸다.

 

“V3군은 있잖아아직도 민소매 벗는 거 싫어우리 끼린 데도?”

선배뭐랄까맨살은 아직잠옷 안에 입어도요이건 달라붙는 소재라서.”

목 부분만 잠옷 위로 올라오는 건 괜찮아?”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그렇다면 벗겠습니다.”

그런 말 이상하니까 그만둬사실대로 말하면마스터가 궁금해해서.”

 

마스터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베개를 껴안고 편하게 앉아있던 V3는 벌떡 일어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냈다말리기도 전에 헐렁한 잠옷은 어깨 위에서 떨어지고 말끔한 민소매만 남았다이게 문제라니까키워드 하나에 반응하는 매크로.

 

마스터는어떤 것을궁금해하시나요제 맨살이팔도 있는데요그러고 보니 마스터에겐 이것만 입은 모습은 잘 보여드리지 못했어요.”

아냐봤어너 처음 온 날에그걸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어마스터가 궁금해 하는건 가슴.”

네에제 가슴이요?”

위치상으로는마스터가 좀 이상한 면이 있지이어디가!”

 

이미 V3의 인식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은 듯했다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벗었던 잠옷을 걸친 채로 V3는 침대를 나와 빠르게 뛰쳐나갔다마스터가 궁금해 하는 게 가슴이라니줄곧 스킨쉽으로 볼을 만지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언제 하셔도 좋았다혼란스러웠지만마스터가. V3는 숨을 고르고 닫힌 문 앞을 바라보다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마스터주무세요?”

아니왜 그래들어와.”

감사합니다잠시 침대에 들어가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지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쭈뼛쭈뼛 옆자리를 파고든 V3는 걸치고 있던 잠옷을 꼼지락대며 벗었다.안에 입던 민소매 티셔츠를 벗고 있었다끼고 있던 안경을 벗고 눈을 비벼도 그랬다카이토가 또 장난쳤구나그는 속으로 V3를 보내놓고 방에서 웃으며 뒹굴고 있을 카이토를 떠올렸다실망에 대한 보복이란 거지읽고 있던 책을 옆으로 내려놓았다어느새 V3는 벗었던 잠옷을 가슴에 쥐고 있었다.

 

마스터.”

“V3카이토가 뭐라고 했어왜 갑자기 옷을 벗어.”

제 가슴이 보고 싶으셨나요아무것도 없는 가슴이지만원하신다면.”

아하……그거구만완전히 나를 변태로 만들었네.”

 

쇄골을 따라 각인된 고유번호가 독서 등에 비쳐 반짝였다처음으로 맨살을 인식이 있는 상태에서 드러낸 V3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그로서는 처음에 배송돼 오고 난 뒤에 세척한다고 꺼내봤으니처음은 아닌 셈이었다남자라기엔 허여멀건 하고 근육 없이 얕은 굴곡만 그려진 판판한 가슴엔 연분홍색 유두가 어린 티를 물씬 드러냈다하긴 여자한테도 팔리는 제품이 시커먼 유두면 꺼림칙 하다고 반품당할지도남자 입장에서는 분홍색인 쪽이 더 소름 돋았다저 선명한 입술 같은 색이라니울먹이는 물색 눈동자와 합쳐지니 그는 강간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그는 V3가 손에 들고 있던 잠옷을 빼앗아 얼른 어깨에 걸쳐주었다.

 

이상한 사람 만들지 말고옷 입어.”

에엣?! 선배가마스터가 제 가슴을 궁금해하신다고.”

남자 가슴이 궁금할게 뭐가 있어거울 보면 되는데내가 궁금했던 건 네 옷의 가슴에 달린 스위치라고뜬금없는 스위치.”

으아아아그것 말씀이시군요..제가 착각했네요이런일단 옷.”

그리고 말이야잠옷 입을 때는 민소매는 입지 마이상하니까.”

 

주섬주섬 옷을 다시 입은 V3는 민망한지 달아오른 볼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이마에 올렸던 안경을 내리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카이토한테 괜히 말했네이런 장난이나 치게 하고.”

아뇨선배가 말씀하시는 중에 제가 먼저 방을 나와버렸어요놀랐지만 마스터가 원하신다고 하니까 저절로 몸이 움직여져서.”

너희들의 이 맹목적인 충성심가끔은 무섭다.”

헤헤스위치 말이죠스위치는.”

오오그래나 사실 상자 열 때부터 궁금했어.”

죄송하지만저도 몰라요확실한 건 옷이나 저와 연결된 스위치는 아니에요제가 간섭해서 조작할 수 없는걸요.”

 

장식일까요눌려본 적은 없는데태어날 때부터 몸에 원래 지니고 있던 흉터보다 궁금하지 않다는 얼굴이었다손가락이 다섯 개인 것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듯이오히려 V3는 설명서에 적혀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궁금하지 않아옷에 그런 스위치가 있는데연결되지도 않은너로서는 설명서에도 없는 스위친데이상한 거면 어쩌려고.”

중요한가요호기심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적용 되는 관념이런또 떠올리는 데로 말해버렸다선배가 주의시켰는데 말이죠마스터가 곤란하신다고이런이것도.”

미안혼란스럽게 했나봐오늘은 그만 자고 내일 같이 눌려보자.”

 

옆에서 자도 되나요어느새 벗어놓은 티셔츠를 접어 배게 아래에 넣은 V3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웃는 얼굴이었지만기시감이 느껴졌다한 번도 몸에 떡하니 존재하던 것에 궁금해 본 적 없다는 건 무언가에 대한 깊은 믿음일까혹은 무지라던가석연찮게 독서 등을 끄고 안경을 벗어 머리맡에 두자 어두운 방문이 얇은 빛을 새어 냈다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파란색 그림자가 비쳤다. V3와 똑같은 하늘색 잠옷을 입은 카이토였다방을 나선 지 한참인데 돌아오지 않길래요문가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풀이 죽어있었다.

 

카이토? V3군은 오늘 나랑 자려구그리고 넌 인마.”

설명하려고 했는데튀어 나갔다구요별일 없었던 것 같네요안녕히 주무세요마스터. V3군도.”

좋은 꿈 꾸세요선배마스터.”

 

선배는 꿈을 꾸진 않지만. V3가 낮게 속삭였다그는 무시하고 몸을 뒤척였다곧 옆에서 들리던 숨소리가 사라진다카이토는 일부러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당연하면서도 당황스러운 사실이었다그는 카이토에게 다른 잠자리를 만들어주었다오늘처럼 종종 옆구리를 파고들어 오지만인형과 같이 잔다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다음날 우리가 알게 된 것은 V3의 옷에 달린 스위치에는 아무런 기능이 없다는 것이었다.이리저리 누르고 눌러봐도 간지럽다는 V3의 소리 높은 웃음소리만 달라졌다제일 의심이었던 머플러를 뚫어지라 살펴도 스위치와는 다른 패턴으로 반짝였다이게 뭐야맥 빠지게 ON으로 바뀌어 있던 스위치를 꾹 누르자 V3가 다시 가슴을 껴안고 꺄르륵 웃었다.

 

마스터어이제 그만해요에헤헤간지러워요.”

어이없네아무 기능도 없는 걸 왜 만들어 놓은 거야너희 회사 이상하다.”

의외네요실용성의 미학이 안드로이드의 기본 인줄 알았는데.”

네가 할 소린 아니고보컬로이드 중에 제일 실용성 제로에 이상한 옷 껴입은 카이토V1."

"제 옷을 모욕하지 마시죠초기모델은 그게 최선이었어요방향성을 잡지 않은 시기였다구요.“

 

어떤 방향성그는 되물으려다 알아차린다귀를 가져가면 쏘삭이는 웃음 사이로 공기가 움직이며 숨소리가 이어지는 V3와 언제나 고요한 V1의 가슴 사이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쌓이고 쌓여 인형과 인간의 경계선이 되어간다바라본 카이토는 다시 소리 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그것은 지금까지와 다른 기시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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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언제라도.


마스카이

 

 

모니터 속의 카이토는 행복해 보였다카이토의 노래는 곧 잘 올라오지 않는 노래사이트에서는 오랜만의 카이토의 태그를 단 노래들이 쏟아졌다오늘을 기다렸다는 것처럼이 아이도 오랜만에 노래를 불렀구나카이토는 모니터 속을 들여다보았다가까이 다가가면 모니터 속의 아이와 똑같은 얼굴이 도드라지게 비춰 보였다카이토는 몇 번 들어 익숙해진 후렴구를 조그맣게 따라부르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착각이었다소리는 먼 곳에서 달그락거렸다방의 문을 따라 나가면 나오는 자그마한 주방카이토는 거짓말 조금 더 보태서 노래하는 작업실이자 컴퓨터가 놓인약간의 방음 시설이 되어있는 이 방에서보다 주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마스터와 차를 마시거나어느 날은 호기롭게 혼자서 맥주를 마시는 마스터의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했다간단한 아침거리나차나 커피는 만들 정도는 기본적인 안드로이드의 기능이었지만마스터는 카이토의 음식을 퍽 좋아했다남이 해준 음식은 뭐든지 맛있는 법이죠언제나 고마워요카이토는 고맙다는 말의 울림을 들으면 어깨와 볼이 간지러웠다가장 큰 상을 받은 것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언제나 껴안고 싶은 커다란 인형의 울림이었다. ‘고마워는 마스터와 닮아있다.

 

오늘은 내가 요리할게라는 말을 들었을 때카이토는 오늘치의 인형을 빼앗겨 실망했다하지만 마스터에겐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랑스러운 연인이 있었고곧 연인들이 초콜릿을 교환하는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카이토는 알고 있었다요리를 해주고 싶어요잘하지 못하지만 말이에요사랑스러운 노력가의 말은 언젠가 카이토가 처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의 마음과 같았다누구라도 그의 말을 듣는다면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그래서 하찮은 아쉬움을 숨기고 카이토는 쪼르르 방에 들어와 앉은 것이다.부엌에서는 마스터가 달그락거리다가이것저것 실수를 하다가 그릇을 엎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깨진 않으셨을까노래를 들어도 엉덩이가 달싹거렸다나가서 초콜릿 하나 제대로 녹일 줄 모르는 마스터를 나무라며 토끼가 그려진 자신의 앞치마를 두르며 마스터는 앉아 계세요제가 해드릴게요하고 의기양양하게 으쓱이고 싶었다레시피를 검색하는 건 눈 깜빡임처럼 쉬운 일이었고기계처럼 따라 하는 것은 자신 있었다그러면 마스터는 고맙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겠지초콜릿보다 훨씬 달콤한 칭찬을 귀에다가 속삭여 주면그러나 곧 입술을 깨물고 듣던 노래를 마저 재생했다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끼어들어선 안 돼.

 

마스터가 단정히 옷을 갖춰 입고 밖을 나가는 날이 늘어갈 때마다카이토가 마스터와 연습하던 음악은 멈춰서 똑같은 음정을 계속했다생일 전엔 꼭 완성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카이토는 파일을 열기가 두려웠다여전히 몇 주 전의 날짜를 가리키는 파일에서 떨어질 무관심의 장맛비를 맨몸으로우산도 없이 맞기 싫었다다른 카이토가 부른 노래를 들으니 더욱 시무룩해졌다끊이지 않고 노래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다언제나 첫 번째가 될 수 없는 건 당연할 텐데도마스터는 늘 첫 번째로 여겨 주었으니까내 노래가 가장 멋지고 아름답다고 말해 주었다카이토는 계속 선물을 주고 싶었다고맙다는 감사를 계속 듣고마스터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저기카이토잠시 와주세요.”

네에-. 무슨 일이세요?”

 

카이토는 반사적으로 방을 종종 뛰어나갔다기다렸던 바였다기운차게 뛰어가자 마스터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토끼가 그려진 앞치마를 하고서 곤란한 상황이었다손에 든 냄비에서 검은 연기와 탄 냄새가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다작은 주방은 엉망진창으로 타서 굳어버린 초콜릿이 바닥이며 싱크대며 달라붙어 굳어있었다생각보다 더 처참한 상황에 카이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초콜릿을 밟지 않으려 발꿈치를 들고 가스레인지가 놓인 쪽으로 걸어갔다마스터는 부딪히지 않으려 몸을 세로로 돌리다가 머리 위에 달린 찬장에 정수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우와작은 한숨이자 감탄을 내뱉고 셔츠의 팔을 걷자 마스터는 까맣게 탄 냄비를 들고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죄송합니다.”

아니에요나와서 도와드렸어야 했는데죄송해요주방을 치우고 다시 초콜릿을 만드시겠어요?”

아니요나한텐 요리가 안 맞는 걸지도다시 해도 똑같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일단 주방을 치워 드릴게요.”

 

아이처럼 투정부릴 때가 아니었다마스터는 사용하라고 만들어진 보컬로이드를 사용할 때에도 부탁합니다감사합니다하고 고개를 숙여대는 예의바른 사람이었고카이토는 이 정도의 상황이 되기 전에 와서 도와주는 것이 진정 사용자를 생각하는 안드로이드라고 판단했다나는 바보야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마스터의 손에서 냄비를 가져다가 싱크대에 넣고 뜨거운 물을 틀었다마스터에게서는 메케하게 달콤한 검은 빛의 향기가 났다카이토는 뜨거운 물에 적신 행주를 쥐여주고 싱크대를 닦아주세요하고 내밀었다주방의 모든 그릇을 다 꺼내쓰신 참인지 싱크대는 엉망이 된 그릇과 냄비가 가득 쌓여있었다카이토는 뜨거운 물을 틀어 그릇을 하나씩 닦기 시작했다.

 

이상하네요레시피 대로했는데.”

악보대로 노래한다고 해서 반드시 멋진 노래가 나오진 않는 것처럼요리 또한.”

카이토는 항상 노래 이야기네요그런 점이 성실하고 귀여워요주말에 힘쓰게 해서 죄송합니다청소 끝나면 환기도 할 겸 산책하러 나갈까요?”

청소가 다 끝나면요.”

 

설거지 하던 카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뜨거운 물에 녹여도 꽉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타버린 초콜릿을 수세미로 꽉꽉 문지르며 어서어서 마스터의 손을 잡고 산책가고 싶었다연인에게 줄 초콜릿은 잊어버리고온전히 서로만의 대화를 할 수 있을 테니까거리에 사람이 없다면 작은 노래를 불러드리고 칭찬을 받을지도 몰랐다카이토는 달콤한 향이 가득한 주방에서 그것보다 더 달콤한 상상을 한다생일 축하해요약속했던 노래와 아이스크림을 사 왔어요커다란 아이스크림을 한 아름 품에 받아들고 마음껏 노래의 날개를 펼친다소리의 날개는 한순간의 공기를 타고 사라지지만그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웠다날개를 달아준 마스터는 아래에서 손을 흔들었다날개가 사라지면 마스터에게 안기고쏟아지는 따뜻한 칭찬들.

 

수고하셨습니다저는 몸을 씻고 올 테니 카이토는 산책 나갈 준비를 해주세요.”

알겠습니다수건을 준비해드릴게요.”

 

말려놓은 수건은 거실에 있었다초콜릿 범벅이 된 앞치마를 받아들고 수건을 가져오자 마스터는 수고했다며 손을 내밀다 문득손을 코에 가져갔다탄 냄새는 물에 지워지고 어렴풋한 초콜릿의 단내만 느껴졌다카이토는 손이 커다란 초콜릿이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잡았다.

 

손에서 초콜릿 향이 나네요맡아봐요.”

헤에그렇네요마스터랑 어울려요.”

전 남잔데그런가요오히려 카이토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일단은.”

후후장난이에요창문은 씻고 나서 열어주시겠어요씻고 오겠습니다.”

 

욕실의 문이 닫히자 카이토는 방으로 들어가 코트와 머플러를 꺼내입었다마스터도오늘은 추운 편이니 머플러를 해야겠지마스터 몫의 옷을 꺼내놓자 줄곧 켜져 있던 컴퓨터가 떠올랐다멈춘 노래페이지를 끄고 모니터의 버튼을 눌렀다모니터 속의 네가 부럽진 않아나도 멋진 마스터가 있으니까혼자 생각하고서 미소 지었다마스터를 기다리는 것은 선물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그동안 불러왔던 몇 개의 노래를 차례대로 부르자 곧 따뜻한 김이 피어나는 마스터가 수건을 털어냈다외출준비를 모두 마친 카이토와 대비되어 보였다.

 

노래 부르고 있었어요옛날 거네예전보다 잘 부르네요.”

헤헷감사합니다얼른 준비해주세요머리를 말려 드릴까요?”

알겠어요곧 준비하고 나올게요기다리세요노래는 계속 불러주면 준비하는데 기운이 날지도.”

어떤 것을 불러드릴까요다음 트랙은-.”

카이토가 부르는 노래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까마음에 드는 거로 불러주세요.”

 

카이토는 날개가 돋는 듯 어깨가 간지러웠다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는 동안 작년의 어느 날을 생각하고노래를 불렀던 계절을 생각했다창문을 열어도 따뜻했던 봄창문을 열면 후덥지근했던 여름여름엔 마스터의 휴가가 있어서 카이토는 잔뜩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마스터와 산책을 하면 시원했던 가을두꺼운 머플러를 맬 수 있는 겨울몇 번의 겨울을 함께 하는지 카이토는 노래를 부르면 셀 수 있었다노래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마스터는 손을 내밀었다산책할까요?

 

노래의 답례라면겨울이라 아이스크림은 별로인가요?”

아뇨마스터가 사주시는 거라면 언제든지그리고 저는마스터에게 노래를 불러 드릴 수 있는 걸로 이미 받았다고생각해요.”

그런가요카이토는 상냥하네요항상 감사합니다.”

저도요매일노래부르게 해주셔서노래를 조좋아해주셔서..”

 

첫 번째가 아니라고 판단 했던 건 언제부터였을까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숫자는 의미 없는 것이다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머리카락을 간질이는 손이 따뜻했다.

 

아이스크림이 별로 인 것 같아서 초콜릿을 주려고 했는데 말이죠보기 좋게 실패하고 청소까지 맡겼으니오늘은 두 개나 세 개를 사도 괜찮아요.”

?그건마스터의발렌타인 데이니까.”

발렌타인데이아하그건 여자가 주는 날이에요발상은 따온 게 맞지만노래도 완성 못한 데다가대신이라고 말하긴 뭐하지만피아노 반주로 바꿔본 건 있어요산책 다녀와서 불러볼래요?”

 

나는 정말 바보처럼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읏마스터어.”

생일 축하해요올해도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이것 참또 울려버렸네.”

아니에요안 울어요올해도 잘 부탁드려요올해도 노래 많이 불러드릴게요!”

 

물기 젖은 눈을 닦자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손을 잡고 산책을 다녀오면더 멋진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언제나언제라도나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당신에게 선물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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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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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다

짧은것/X KAITO 2015. 3. 1. 20:46

[마스카이] 겨울바다


온종일 카이토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몇 시간 전에 봤던 앉은 자세 그대로였다. TV가 있는 거실을 오가며 슬쩍 흘겨봐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로 재미없어 보이는 느릿한 내레이션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사람이 저런 프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을지 의심이 갈 정도로 조용한 화면에서는 태평양쯤 되어 보이는 넓은 바다가 줄곧 비춰졌다늦은 오후가 돼서야 TV앞의 붙박이가 된 카이토를 불러일으켰다바다색과 비슷한 눈이 몇 시간 만에 깜빡였다.

 

“TV속에 들어가겠다뭐가 그리 재밌어.”

바다래요.”

 

손가락 끝의 화면에서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맑은 이국의 바다가 넘실거렸다이상적인 바다라고 할 수 있는 하얗게 부셔지는 파도그는 저도 모르게 한참을 바라보았다바다에 간지 얼마나 되었더라손을 꼽기에도 마지막 바다의 기억은 희미했다.

 

정말 저런 모양일까요진짜 저렇게 넓고파란데 물이..”

바다 본 적 없겠다.”

네에..실제로는.”

 

그는 자신이 입은 옷을 살폈다대충 입은 후드겨울이지만 집 안이라 입은 반바지만 갈아입으면 얼추 나갈 만했다이제는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카이토의 어깨를 두드렸다곧 눈이 두어번 깜빡였다.

 

그만 보고 일어나바다에 가자.”

지금요?”

그럼 내일은 월요일인데 어떻게 가옷 입어.밖에 춥더라.”

 

냉기가 어린 차 안에서 카이토는 무계획이에요여기서 가장 가까운 바다는 2시간 거리라고 검색 된다구요하며 궁시렁 대다가도 그럼 돌아갈까하는 떠보는 말에 입을 조용히 다물었다카이토가 검색 했다는 그 바다는 간 적 없는 곳이었다바다는 늘 그렇듯 똑같겠지 뭐겨울바다는 풍경이 좋다는 말이 있어도 바닷바람에 시달려 좋은 풍경이 눈에나 들어올까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창밖으로 서서히 해안가로 바뀌는 경치에 눈을 떼지 못하는 카이토를 보면 상념은 사라졌다.

 

소나무가 한참 지나면 넓은 바다가 펼쳐진다겨울바다는 서슬 퍼런 쪽빛으로 먼 바다에서부터 눈에 담기려 노력한다햇빛이 간간히 반사되어 어느 먼 곳에서 바다 빛이 반짝였다.

 

우와...정말 이곳은 넓네요끝이 안보여요.”

그렇지...춥다.”

 

모래사장을 밟는 카이토는 처음 느낀 새로운 감각에 즐거운 듯 뒤따라오는 발자국을 슬쩍 돌아보며 소리 내 웃었다한겨울은 겨울인지라 후드를 써도 얼굴에 따가운 바람이 불었다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이미 바닷바람에 차가워진 후라 소용이 없다카이토는 느릿한 걸음을 참지 못하고 바다로 뛰어갔다목에 두른 머플러가 바람에 휘몰아 흔들린다.

 

바다다!!!”

 

소리를 쳐도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그렇네하고 대답한 그의 대답은 바람소리에 묻혀 사라졌다파도가 밀려오는 한계선에 멈춰 선 카이토의 발 주변에 하얀 파도가 밀려와 검은 모래로 스며들었다한 두 발짝 앞뒤로 움직이며 발장난을 쳤다.

 

생각했던 그대로야?”

제가 봤던 바다는 열대의 바다에요색도모래의 크기도 달라요.”

뭐야그러냐.”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뒤적거렸다기껏 데려왔더니 듣는 소리는 저모양이고 하얀 김이 나오는 입은 얼어붙을 지경이었다휴일의 마지막 치고는 조금 맥이 빠진다황망한 바다를 보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켰다조용하던 카이토가 팔에 엉겨붙었다.

 

너무 넓어서 무서워요마스터와 함께 오지 않았더라면...”

 

바닷바람에 카이토의 말들은 파도소리와 함께 부셔졌다담배를 태울 동안 카이토는 눈을 감은 채 바다의 소리만을 감상했다거대한 존재가 조용히 움트는 소리에 왠지 모를 전율이 차가운 발끝에 서려왔다감각이 떨어져 주머니에 넣은 마스터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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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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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심하다ㅋㅋㅋㅋㅋㅋㅋ왜이렇게 썼어


카이토 여장모듈 합작 카가미네 린 기본버전

 

<부끄러움은 당신 몫>

 

그것은 아주 작고사소한 실수였다마우스의 버튼 하나의 몇 cm. 모니터로 보자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었다업데이트는 정기적으로 하는 거라 신경 쓸 것 없이 드문드문 흘겨보며 확인 버튼을 눌렀다귀찮지만 업데이트해주지 않으면 입으로 알람처럼 기계음 울려대면 시끄러웠다자기 전에 usb에 연결해두고 일어나면 완료될 정도로 업데이트양은 많았지만항상 달라진 것은 없었다뭐가 업데이트 된 거냐고 물어도 카이토는 글쎄요하고 고개를 갸웃일 정도로 미묘한 몇몇 개의 변화들.

 

그럼 내일 봐-. 업데이트 예상시간 3시간이네길다.”

안녕히 주무세요다 하면 새벽이겠다들어가면 깨시니까쇼파에서 잘게요.”

알겠어컴퓨터 끄고 자.”

 

홀가분하게 바이바이-하고 손을 흔들고는 항상 둘이 자던 침대에 오랜만에 혼자 잠이 들었다허전한 옆자리에 카이토가 베고 자던 베개를 눕혀놓고 안자 카이토와는 다르게 차갑고 푹신하지도 않았다오랜만에 혼자여서 그런지침대가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이상하다고 느낀 건 새벽에 조용히 열린 문 때문이었다깨우기 싫은지 먼저 쇼파에서 자겠다고 말해놓고서이불까지 들썩이며 몸을 파고드는 바람에 나는 얼결에 선잠에서 깨고 말았다의아함과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로 카이토를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뭐야쇼파에서 자겠다며.”

여자를 쇼파에서 재우시다니마스터 너무해요오.”

으응여자?”

 

잠도 깨웠으면서 장난까지 치는 거야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카이토는 새침대기 여자애가 잠들 법한 새우잠 모양으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옆으로 누워서 팔베개를 해주거나 했던 어제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다나는 데면데면 넘겼던 업데이트 옵션을 떠올렸다.

 

잠시만업데이트 옵션에 기본정보 넣는 거 말이야성별기본설정.”

여자에요마스터새벽이에요어서 자요오.”

에엑징그러워카이토는 남자기종이잖아왜 여자 성별에 체크가 되는 건데.”

 

내일 업데이트 다시 하면 되겠지비몽사몽으로 이불에 들어가자 카이토는 숨을 색색 조용하게 쉬며 이미 잠들어 있었다손을 모은 모양까지 귀엽다고 하기엔 남자의 손이고웃기네잠시 피식거린 뒤에 다시 눈을 감았다.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한번 한 업데이트는 취소한 다음에 다시 해야만 하는데취소는 서비스 센터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오류를 몇 번이고 먹고서야 나는 서비스 센터가 열지 않는 주말 동안 자기를 여자라고 철석같이 믿는 카이토와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걸 어떡하지정말 방법이 없는 거야정말 설정 하나 잘못 눌렀다고 여자가 되는 거냐고뭐가 이래?”

실수한 건 마스터잖아요몰라 몰라이런 못생긴 옷 입기 싫어요.”

 

좋아하던 트레이닝복이잖아태클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카이토는 옷장이 있는 침실로 사뿐사뿐 달려갔다움직임 하나하나가 어제와는 달랐다서둘러 따라 들어가자 카이토는 옷장의 옷을 뒤적이고 있었다내가 여자라고 해서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다니진 않는 탓에 시커먼 외투와 커다란 후드티 같은것들만 가득하자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카이토는 입술을 삐죽이며 옷걸이를 휙휙 넘겼다.

 

계속 봐도 예쁜 옷은 없어알잖아맨날 보던 거면서.”

그거 어딨어요할로윈때 입었던린쨩옷.”

그걸 입겠다고미친 거야오류 났어?”

 

그렇지오류 났지 참당황스러웠다이게 다 마스터 옷들이 안 예뻐서 그렇잖아요멀쩡한 얼굴로 정색하고 옷장 깊숙이까지 손을 넣은 카이토는 옷장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몸까지 들어가 작은 상자를 찾아냈다그건 거의 벌칙의상이나 다름없는 짧은 천 조각으로 만들어진 카가미네 린 전용의 기본 의상인데할로윈파티랍시고 기분에 샀다가 정작 방 안에서 한 번 입어보고는 좌절에 좌절을 맛본하늘이 주신 몸매가 되면 다시 입어보자며 상자에 고이 넣어 둔 것이었다.

 

찢어져분명히 찢어질 거야너 그거 못 입어작을 거야.”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마스터는 여자분이 치마 한 장 없을 수가 있어요.”

이게 정말입든 말든 맘대로 해내가 사진 찍어서 평생 놀려줄 거니까!”

뭘 하든 마스터보다는 이쁠걸요와아린쨩 머리띠도 있네에이쁘다.”

 

카이토는 커다란 리본이 달린 머리띠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머리에 쓰고서 옷장 옆에 놓인 거울로 다가갔다눈을 어디다가 둬야 하는 거지리본의 끝을 가다듬은 카이토는 한결 맘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토끼처럼 귀여운 리본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휘척인다.말리기엔 여자에 이입한 표정이 소녀들의 티파티에 초대된 깜찍한 레이스가 가득한 드레스를 입은 주인공처럼 생기발랄했다남은 건 짧은 세일러 민소매와 평소에 입는 팬티 정도 길이의 자기 손바닥만 한 반바지였다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머플러부터 휘적휘적 벗어 던지고서 맨살을 드러낸 채로 세일러의 리본을 어깨에 주섬주섬 메고버클에 손을 가져가자 상황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바지 벗을거냐는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올려다보는 눈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해티셔츠도 안 맞는데 바지는 어떻게 입을 거야옷 내놔찢어진다고!”

아아앙싫어 싫어이거 입을거에요오!”

말투 봐징그러워 정말-!!! 네 옷이나 입으라고바보 카이토!!”

입을 거야입을 거야입을 거에욧!! 놓으세요!”

 

이걸 그냥머리끝까지 화가 솟아서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으려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옷을 돌려주었다대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켰다아니지동영상이 더 낫겠다월요일이면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얼마나 부끄러워 할지두고두고 놀려 먹을 거야.

 

알겠어입어봐이쁘게 사진 찍어줄게.”

와아정말요조금만 기다려주세요머리도 다듬어야 하는 데에.”

후후천천히 해화장품 쓸래립스틱이나아니다내가 화장해줄게.”

 

신 난다볼품없는 맨몸으로 만세하고서 카이토는 발그레한 얼굴로 볼을 만지작거렸다화장대에서 제일 새빨간 립스틱이랑 아이라이너를 챙기자 졸졸 따라와선 평소에 궁금했다며 연분홍색 블러셔까지 챙겨 들었다기다란 화장대 거울에 앉혀놓고서카메라를 앞으로 돌렸다자기 얼굴이 보이자 카이토는 생긋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카메라 들고 있어머리 빗겨줄게여기봐봐.”

헤헤헤예쁘게 해주세요.”

 

새어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머리띠를 다시 씌워주고 반짝반짝한 아이쉐도우는 눈두덩에 펴 발라주고볼에는 연분홍색살짝 눈을 감은 데다 아이라인을 얇게 그리고 입술까지 바르니까 허여멀건한 얼굴에 낙서한 것처럼 울긋불긋하다앵두처럼 샛빨간 입술을 바르니 촌스러움은 정점을 다다랐다너무 웃겨정말 뭐 하는 거야웃겨 죽으려는 나와 반대로 카이토는 셀프촬영중인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미소 지었다.

 

와 정말…….”

감사합니다이쁘다아이제 옷 입어야지.”

 

기어코 입어보겠다고 아슬아슬하게 넣은 소매는 한쪽만 넣고 실패팬티는 딱 달라붙어 벗은 거나 다름없었다언제봐도 볼품없이 마른 몸으로 앙상한 다리를 뻗어 광택 나는 반바지를 주워 넣었다바지는 무릎을 채 넘지 못하고 멈췄다억지로 잡아당기며 낑낑대던 카이토는 시무룩하게 아래를 바라봤다들어갈 턱이 없지.

 

에엣작다.”

내가 뭐랬어크흑카이토사진 한 장만 찍자여기 봐같이 브이하자.”

브이-!!”

 

그랬단 말이야그저께사진첩을 넘기며 마지막엔 차마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눈을 뜨지 못하는 카이토를 보자 웃겨서 숨이 넘어 갈 듯 웃음이 나왔다해맑게 동영상에서 브이-하면서 싱글싱글 웃는 모습을 여러 장 캡쳐하자 카이토는 폰을 뺏으려 이리저리 발악했다서비스센터에 데려갈 때마저 없는 치마나 원피스를 입겠다고 난리를 치는 통에 겨우겨우 달래고 달래서 평범한 옷을 입혀 갔단 것도 믿지 않았다.

 

카이토 린쨩-”

으아악!! 그만해요!! 지워요 지워!”

린린 하게 해줄게~”

오류가지고 그러기에요마스터가 실수해놓고으윽.”

 

많이도 찍어뒀네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화면을 이리저리 넘기다가 흥에 취해서 린의 머리띠에 맞춘 토끼 모양 손동작을 하고 찍기도 하고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서 볼에다 뽀뽀하면서 찍은 것도 있었다업데이트가 지워지면서 메모리까지 함께 지워지는 바람에 기억은 나지 않지만이렇게 친절하게 찍어두시고미쳤구나 싶다옷장엔 늘어난 린의 옷이 불쌍하게 구겨져 있었다마스터는 한동안 내가 린 옷을 걸치고-이건 입은 게 아니라 걸친 것에 불과하다-곱게 화장하고 찍은 사진을 배경화면에 해두고 잠금화면을 풀 때마다 피식거렸다어디다가 올리지만 말아 달라는 부탁에 음흉한 웃음을 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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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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