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音嚥鬼

짧은것/X KAITO 2015. 3. 1. 20:41

크로스 오버 배포전에서 배포한 거

충사 X KAITO


音嚥鬼

 

 

 

산 자락 사이에 있던 마을이 조용하다는 소문이 돈 것은 초하루가 얼마 지나지 않은 추운 겨울께였다. 마을이 시끄러울 때도 있나 그럼. 식당의 수더분한 자가 우스갯 소리를 했다. 그 마을은 원체 인적도 드물고, 교류도 적은데다 사람들이 괴팍하기가 짝이 없어. 먹던 음식을 튀기며 소리를 놓이던 그는 숟가락을 나무식탁에 집어던지며 예적에 말이야. 내가 짐지고 장사하러 다닐 때. 하며 아무도 듣고싶지 않아 하는 그의 소싯적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구나가 그렇듯 하루 들른 마을에서의 처녀와의 수줍은 하룻밤은 빠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지루하고 틀에 박힌 듯 흘러가자 사람들은 귀를 닫고 자신의 일행에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술잔을 기울였다. 남자의 말은 식당의 기본 반찬처럼 씹혀갔다.

 

 

 

“그 이야기,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나 흥미가 좀 있는데.”

 

 

사람들에게 들려지기를 반 쯤 포기했던 남자는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식당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남자가 어느순간 옆자리에 의자를 당겨 앉고는 바닥에 커다란 나무상자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상자에서는 요상한 냄새가 풍겼다.

 

 

 

“어떤 이야기? 내가 강 옆마을 처녀와..”

“아니. 조용해졌다는 산기슭 사이의 마을 이야기.”

 

 

은발이면서도 색이 죽은 잿빛 은발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술 두어잔을 더 시켜선 이야기 값이라며 잔을 내밀었다. 먼지가 가득한 식당에서 이야기하느라 칼칼했던 목을 씻어내고선 남자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이 있어서 간 참이었지. 그 마을에 내 옛적 지인이 살거든. 마을이 원래 조용하긴 했어. 사람들도 서로 평생을 살아도 서먹하게 지내는 이상한 곳이거든. 도깨비가 나온다는 소문도 있고.”

“도깨비? 어떤 종류인지 아는가?”

“도깨비가뭐 다 귀한 종류지...그건 잘 모르겠고. 그래서 마을에 갔는데, 개짖는 소리 하나도 없더란 말이야. 역병이 쓸고간 무덤가처럼.”

 

 

호오. 은발의 남자는 호기심 어린 청록빛 눈을 마주쳤다. 이시기에 그 지방에 나타날 귀한 존재라면, 하고 남자의 말을 되풀이 했다. 남은 술을 털어넣은 남자는 소름끼친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

 

 

“그래서 모르는 사이에 역병이라도 돈 줄 알고 얼른 도망가려했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야. 사람은 모두 살고있었어.”

 

 

다 벙어리가 되어버렸더라고.

 

 

 

숨죽인 남자의 말에 그나마 귀를 기울이던 식당의 사람들은 모두 선을 놓아버렸다. 허풍쟁이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었다.

 

 

 

“호오. 벙어리라면 어떤? 아예 우는 소리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것도 귀하다면 귀하지. 목에 뭔가가 틀어 박힌 것처럼 욱욱대는 소리는 하더만, 간간히 의미없는 말은 하더란 말이야.”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며 미연에 말을 붙였지만 이야기를 듣던 남자는 서둘러 동전 몇 개를 던져주고 자리를 나섰다. 좋은 이야기 고맙다고 어깨를 툭툭치자 남겨진 남자는 어안이 벙벙해 술 몇잔을 더 시켜 마셨다. 마을 사람 전부다 목에 복숭아 씨라도 낀건가. 참. 하고 헛생각을 하더니 그 지방에 나타난다는 도깨비의 짓이 분명하다고 이제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당분간 그 마을에 가지마! 저주가 든게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아도 그 마을에 행하는 이는 없어.

뒷자리에서 누군가가 혼잣말을 했다.

 

 

 

 

*

 

 

 

산기슭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할 것도 없는 울창한 쪽빛 청색의 허릿께의 풀물이 소매에 들었다. 코에 가져가자 알싸하게 진한 풀향이 풍겼다. 반나절을 꼬박 올랐는데도 마을은 영 저 멀리에서 보였다. 이마에 땀이 젖어들었다.

 

 

 

“허리 좀 펼까.”

 

풀가를 발로 대충 밟아 쭈그려 앉아서 초를 하나 피웠다. 술에 취한 남자의 말 하나만 믿고 찾아 가보는 거라 큰 기대는 없었다. 큰 일을 해치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의뢰없이 소일거리나 하려다 호기심이 동한 것이다. 예상이 맞다면 녀석은 기록 속에서나 보던 희귀한 귀였다. 깅코는 나무서랍을 뒤져 낡은 종이두루마기를 꺼냈다. 초서체로 적힌 글 옆에는 기괴한 충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연기를 두루마기가 흐려지게 내뱉으며 긴 두루마기의 한 귀퉁이로 향했다.

 

 

 

[音嚥]

 

 

 

사람의 말을 배워 말을 취하는 존재. 본디 귀의 영역이 아니었으나 그 형상이 인간의 것을 본따 귀라 일컫는다. 말을 빼앗긴 자는 돌려받지 않는 이상 평생 빼앗긴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서쪽 지방의 산기슭에 나타난 적이 있다.

 

 

 

그림은 없었다. 기록한 자 또한 모습을 보지 못했을 터.

 

인간의 형상을 한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종류였다. 깅코는 두루마기를 돌려 넣고 다시 길을 나섰다. 산 속을 들어 갈수록 새 소리가 고요히 머언 발치에서 들려갔다. 마을은 짙은 산안개 속에 있었다. 산이 깊어갈수록 충은 늘어간다. 땀에 젖은 겉옷을 어깨에 둘러매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은 흔한 이정표나 돌무덤따위 없이 산기슭 사이의 평평한 땅에 생긴 자연적인 부락이었다. 약초나 작은 화전 따위를 해서 겨우 먹고 살고, 생선은 평생 입에 대 본적 없는 자들의 폐쇄적인 땅.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을의 입구에는 들짐승의 뼛가지가 걸려있었다. 산적을 피하기 위한 알량한 방법이었다. 해가 중천에 오를 쯤에야 흐르는 땀을 손으로 대충 훔치며 마을 어귀로 들어갔다. 마을은 남자의 말처럼 무덤가 만큼 조용했다.

 

 

 

“개 짖는 소리 조차 없군..”

 

 

외부인을 느낀 발걸음이 땅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깅코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어. 사람이 있네. 저기..”

 

 

눈 앞에는 들어봐야 열 다섯 정도 되어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산에서 나는 열매로 염색한 투박한 옷을 입은 소녀는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칭얼거리는 소리는 없었다.

 

 

 

“이상한 사람 아니야. 나는 깅코라고 해. 충사라는 일을 하고있는데...너무 경계하지말라고 해도 별 수 없겠지. 외부인을 본건 처음인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넓은 소매를 만지작 거리는 눈이 젖어있었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입에 문 연초를 만져 끄고 소녀에게로 눈높이를 낮췄다. 소녀는 소리없이 입을 벙긋이기만 했다.

 

 

 

“혹시 말을 할 줄 몰라? 아무 말이나 해 봐.”

“서방님..”

“어..아. 할 수 있는 게 그 말이라 이거지. 그렇군..”

 

 

정말 볼 수 있을지도. 열댓살 짜리 소녀는 서방님이라는 말을 빼앗길 리는 없을 것이다. 어른들은 외부인의 출입에 문을 걸어 집 안으로 들어가버린지 오래였다. 마을엔 인기척 이랄게 사라지고 없었다. 쉬운 단서인 소녀를 좀 더 일러보기로 했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어디선가 남은 과자 부스러기를 건넷다. 잔뜩 힘 주어 편 손은 흙투성이였다.

 

 

 

“도깨비를 본 적 있어?”

 

 

흠칫. 입을 오물거리던 소녀는 어깨를 흔들었다. 그것은 대답보다 큰 의미를 가졌다. 기록에 있는게 존재하긴 한가 보군. 어느쪽이라고 물으면 산 속이겠지. 깅코는 소녀의 머리를 헤집어 쓰다듬고는 마을 끝 산자락으로 향했다.

 

 

 

“네 말 찾아다 주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

 

 

마을 뒤 한적한 숲으로 나온 깅코는 눈을 감았다. 본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반푼짜리 눈은 감을 때 더 깊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숲 안쪽에서 가느다란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최대한 조용한 발걸음으로 풀을 헤쳤다. 수풀 속에 새파란 인기척이 있었다. 사람이 아니었다. 머리의 한쪽에 상아색 뿔이 선명하게 솟아있었다. 기록 안된 사항 치고는 꽤 중요한 것이었다. 충의 색과 비슷한 샛파란 머리칼과 똑같은 색의 눈을 가졌다.

 

 

 

“너구나. 요녀석.”

“다른, 사람.”

“말을 제법 하네. 얼마나 많이 먹은 거야.”

 

 

응, 이 욕심쟁이야. 깅코는 도깨비의 옆자리에 주저앉아 연초를 꺼내 물었다. 도깨비의 손에는 녹색 풀이 잔뜩 묻어있었다. 가지런한 바닥에 나무열매 몇 개가 모여있었다. 식사시간 이었던 모양이다.

 

 

“너한텐 좀 독할거다. 그런데 여긴 충의 기운이 많아서 이걸 켜지 않을 수가 없어.”

“당신. 누구?”

“나는 충사. 너희같은 것들을 기록하고 다니는 사람이야. 넌 음연. 소리먹는 귀신이지?”

“나는..”

 

 

손가락을 흙에 몇 번 휘젓더니 도깨비는 카이토라는 이름을 써내려 갔다.

 

 

 

“이름이 있어? 카이토?”

 

 

순간 파란눈은 붉은 안광을 내고 도깨비는 깅코의 입에서 투명의 무언가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는 시늉을 했다. 곧 그것은 삼켜졌다. 깅코는 다시 카이토라는 말을 입에 떼어보았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도깨비는 기쁜 듯 헤실거렸다.

 

 

“고마워. 이름. 카이토..카이토..”

“앗. 젠장. 이런 식이야? 이런...이건 벌이다.”

 

 

깅코는 들이켰던 연초를 가득 카이토의 얼굴에 뱉었다. 곧 표정이 일그러져 카이토는 소매로 코와 입을 막고 콜록거렸다.

 

 

 

“하지마. 아파.”

“예의없는 녀석..남의 말을 함부로 빼앗아 가놓고.”

 

뾰족한 귀와 머리에 달린 하나의 뿔을 빼고는 영락없는 사람의 꼴이었다. 옷과 신발까지 주워 신은 꼴이 사람의 마을에 꽤 오래 머문 듯 했다. 깅코는 내려놓은 서랍 속 두루마기를 꺼내 기록을 시작했다.

 

 

“이름은 스스로 지은거야? 넌 원래 이렇게 욕심 많은 귀가 아니잖아.”

“응...미안.

“마을 사람들이 싹 다 벙어리가 된거 알아? 왜 그랬어. 필요한 말이라도 있었어? 마을 사람들이 널 좋아하진 않았을텐데.”

“싫어. 괴물. 꺼져.”

 

 

카이토는 입고있던 헐렁한 유카타의 자락을 들어보였다. 다리에 새파랗다 못해 시꺼매진 멍이 다리에 얼룩져 있었다. 머리를 맞은 적도 있는 듯 소매로 머리도 만지작 거렸다.

 

 

 

“원해. 나는 원해..”

“그렇지. 이렇게 사람 사는 마을 까지 나와서 말을 잡아 먹을 땐 이유가 있었겠지. 덕분에 나는 요깃거리했어. 이 세대에 볼 수 있을 줄이야.”

 

 

인간에게 희귀하고 말고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카이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떠올려보면 무서운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선한 성품탓에 평생 입 한마디 못떼보고 자연에 스러지는 적이 많다는 설명이 있었다. 확실 하진 않지만 한 세대에 하나의 개체만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노래는 어디서 받아온거야. 신기한 녀석이네.. 이번대는.”

“원했어. 원해..”

“뭘 원하는데? 마을 사람들 건 돌려줘. 중복되게 가져오는 건 반칙이지.”

“음....”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바라고 원하는 말은 오랜 시간 동안 들을 수 없었다. 카이토는 아주 깊은 숲에서 생겨났다. 태어났다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눈을 뜨자 숨을 쉬고 있었을 뿐이다. 숲에는 동물의 인적이 드물었다. 단어의 형태를 가지지 않은 것은 가질수 없었다. 카이토는 사람을 찾아 오랫동안 깊은 숲을 걷고 걸어 나왔다.

 

처음 가진 단어는 약초를 캐던 소녀의 노래였다. 노래를 빼앗긴 소녀는 다가온 카이토를 보자 뒷걸음질을 쳤다. 소녀가 부르던 노래는 산과 밤의 신에 대한 기도였다. 그것의 가락은 아름다웠지만 남은 자리에는 풀로 엮은 바구니 뿐이었다. 카이토는 바구니를 손에 들고 마을로 향했다.

 

 

“놀래켰어.”

“어...무슨말인진 모르겠지만. 그래.”

“맞았어.”

“그 얘긴 했어. 그래서 내 말을 들어보겠냐고.”

 

 

말을 알아 듣긴 하는건가? 깅코는 슬슬 무슨 말을 꺼내도 결국 돌고 돌아 맞았어. 로 돌아오는 카이토와의 대화가 지친 참이었다. 혹 알아듣지 못하나 싶어 손에 들고 긁던 나뭇가지를 빼앗았다. 파란 동공 속에 깊은 다른 세계의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짧지만 뾰족한 손가락을 뻗자 나뭇가지가 지나간 손에는 작은 생채기가 남았다.

 

 

“뭐야..”

“내 말 들어봐. 네 말만 하지 말고. 여기 숲 앞의 마을 알지. 네가 말이란 말은 모조리 뺏어온 곳 말이야.”

“싫어.”

“왜? 맞아서? 그럼 마을쪽으로 안 가면 되잖아. 여기까지 나온 이유가 뭔데?”

 

 

카이토는 바닥을 긁던 손을 멈췄다. 그러고는 알수 없는 미소를 흘렸다. 눈이 휘어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네가 원하는 말이 뭔지 알 수 있으면 좋을텐데. 답답하네. 어떤 상황에서 누가 그 말을 하는거나..이렇게 까지는 어려운가.”

“내 아가. 소중한 아가..그리고...으음..나는 몰라. 몰라...”

 

 

연초를 옆으로 길게 뱉어냈다. 그 희귀하다는 귀의 눈물이 흙바닥에 허투루 떨어졌다. 혹여나 한을 품을 다른 물질로 변할성 싶어 떨어지는 모양을 바라보았지만 메마른 땅에 스며든 투명한 액체일 뿐이었다. 투명한 구슬같은 것이 볼을 타고 굴러갔다. 정말 특이한 녀석.

 

 

 

“알고 싶어. 원해. 나는...소중한...”

“소중한 것...뭐지. 그런걸 알아? 피안의 영역일텐데. 써봐. 쓸줄은 몰라? 그러고 보니 글은 또 어디서 배웠어?”

“이거, 이거. 줘.”

 

 

 

 

비뚤게 적은 글자가 곧 떨어진 눈물에 지워졌다. 것 참. 남은 연초를 다 태우고도 깅코는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서선 뒷머리만 벅벅 긁어댔다. 충은 바라는 것이 없다. 태어나서 자연계의 일부로 살아가다 다음 세대와 바뀌는 자연과 함께 사라진다. 서로가 간섭 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법칙. 사랑을 말하는 충을 본 일은 없었다. 기록하던 세필을 멈추고 뚜껑을 닫았다.

 

 

 

“나도 잘 모르는데. 그런데 나한테 필요 없긴 하다.”

“줘. 줘!”

“그럼 그 마을 사람들 건 돌려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한테 괜히 해코지 당하지 말고.”

“응. 내놔.”

“잘 먹어. 딱 한번만 말할거니까.”

 

응응! 땅 긁던 나뭇가지를 꼭 쥐고

 

“이 말을 해본지가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네.”

사랑해.

 

 

 

의미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입에 떼는 순간 털이 쭈뼛 타올라 소름돋았다. 팔짱을 껴 오소소 오른 팔을 쓰다듬었다. 구슬처럼 파란 안구가 붉은 빛으로 변하더니 눈에 보이지 않는 실타래를 기다란 손가락으로 휘휘 잡아올려 샘물 마시듯 삼켰다. 언어의 산물. 소리가 형체를 띠어서 언어를 탐하게 된 것이 음연이다. 깅코는 그렇게 기록할 참이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야. 말이나 돌려줘.”

“아쉬워. 노래..”

“노래 정도는 하나 남겨둬도 되고. 잘하던데.”

 

 

그래? 카이토는 눈을 반짝였다. 사랑해! 한번 더 외치고는 즐거운 듯 가느다란 소년의 목소리로 소녀에게서 삼킨 노래를 뽑아낸다. 곱고 아름다운 말이 쏟아졌다. 충의 노래는 아름답다. 어떤 샘물보다 맑고 유리보다 투명하며, 무지로 이어진 긴 시간을 담고 있었다. 들을 자격이 있던가. 노래가 잦아들자 손을 올려 숨을 깊게 뱉어냈다. 투명한 실자락들이 공중에 날아올랐다. 이것 또한 장관인걸. 셔츠 앞주머니에 있던 연초를 더 꺼내 물었다가 아차. 하고 다시 상자에 밀어넣었다.

 

 

 

한참을 손에서 가지고 놀더니 손을 뻗자 눈에 보이지 않는 선들은 마을 쪽으로 날아가는 시늉을 했다. 얼른 제자리를 찾아가라는 듯 입을 모아 불고서 아쉬운 듯 선이 날아간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말은 이름과 단어 하나, 노래 하나. 노래를 준 소녀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검은색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손을 잡아보고 노래하며 숲을 함께 거닐고 싶었을 뿐이다. 이 숲의 가장 깊은 곳 까지.

 

 

 

“-. 참. 네가 가져갔지. -. -.. 정말 안나오네. 신기한데.”

“....”

 

 

오래 잠겼던 몸을 일으키자 다리가 찌뿌듯했다. 가볼까. 대충 손을 흔들고 자리를 벗어나자 카이토는 아무말 없이 자박자박 두걸음쯤 뒤에서 따라왔다. 뭐야. 나 마을 갈껀데. 말을 걸어도 묵묵히 웃을 따름이었다. 손에는 먹다 남은 나무열매를 쥐고서 야금야금 주워먹으며 태평하게 제법 주위 구경도 하고. 깅코는 서랍을 뒤져 가을께에 쓰던 모자를 집어 씌워주었다. 뿔을 다시 보여줘 봤자 좋을 건 없겠지. 어짜피 눈색이든 머리색까진 숨길수 없겠지만. 한참을 걸어나오자 마을이 어른하게 나타났다. 깅코는 다시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언제 주워들었는지 나뭇가지를 흔들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여기부터 이제 마을이야. 들어갈 거야?”

 

 

카이토는 오묘하게 웃었다. 잎이 하나 달린 나뭇가지로 은발의 머리를 쿡쿡 찔러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소리없이 입을 움직였다. 속삭이는 소리 조차 나지 않았다. 숲에는 바람 부는 소리와 마을의 개짖는 소리만 멀리서 들려왔다.

 

 

“에이, 장난 치지 말고. 난 마을에 확인만 하고 갈거야. 모자는 너 가져.”

“-!”

 

 

들고있던 나뭇가지로 카이토는 땅에 글씨를 썼다. 글은 다시 배워야 겠는걸. 글을 막 배운 세 살짜리 아이처럼 고-마-워. 라고 적고선 옷깃을 잡아끌었다. 깅코는 카이토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피안과 자연을 구별 할 수 없을 정도로. 동물쓰다듬듯 머리를 쓰다듬자 영 옷깃을 부시럭거렸다. 깅코는 연초를 피울까 싶어 만지작거리던 손을 빼 주머니로 가져갔다.

 

 

 

 

불을 붙이고 돌아보자 주위는 조용했다. 초를 다 태울 때 까지 자리에 서서 카이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하늘 여기저기에 연기를 내뱉었다. 마을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숲의 바람을 타고 흘러온다. 소문은 공기보다 가볍게 사라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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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고백 다음날

짧은것/X KAITO 2014. 9. 28. 13:54

고백 다음날

 

카이토는 웃음을 숨길수가 없었다.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날이다. 가볍게 울리는 마스터의 알람소리에 카이토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에 잠에 취해 깊은 숨을 내쉬는 마스터의 가슴에 귀를 대자 규칙적으로 달칵이는 소리가 조용히 가슴 속을 울렸다. 눈을 감고 고요한 음악을 감상했다. 가만히 있어도 음악을 만들 수 있다니 살아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것이다. 카이토는 잠든 얼굴에 살짝 입을 가져가려다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에 간단하게 우유를 마시다가 넘겨본 창가 밖에 넘실대는 햇살이 들어온다. 창가의 침대에서 잠에서 덜 깬 얼굴로 햇살을 받는 마스터는 건조하게 눈을 비볐다. 머리가 잠버릇에 한껏 들떠 먼지털이 같아요. 시시덕대며 농담을 건네자 멋쩍게 뒷머리를 부비적댔다. 웃으며 커피가 든 잔을 내려놓자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요. 피곤하세요?"

"그런 건 아닌데.."

 

찌뿌듯한 어깨로 기지개를 켰다. 입 주변에 우유자국을 남긴 채로 카이토는 바라보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쳐다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환하게 웃는 모습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에서 하트가 곧 쏟아질 듯 울렁였다. 그는 어제를 회상하다 테이블에 주먹을 몇 번 내리쳤다. 옆으로 돌아앉아 커피를 마시는데도, 카이토의 눈빛에 얼굴이 따가웠다.

 

“마스터 있잖아요-”

“왜 그래.”

“그럼 오늘부터 우리는..사귀는 거 맞죠?”

“....아아. 그래.”

 

저지르고 말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숨겨온 지 5개월이 채 넘기기 전의 새벽이었다. 함께 살고, 심지어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는데도 카이토와 나는 아무런 관계라고 지정할 것이 없다. 단지 보컬로이드와 사용자라는 형식적인 관계. 선을 넘기에는 불안하고, 불완전한. 아마도 카이토의 프로그램에 지정 되어있을 기본적인 ‘마스터의 노래가 좋아요.’ 라는 의미 없는 문장만이 선을 건너도 좋다는 희미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마음이란 것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서 평범한 카이토의 손 짓 하나에도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고 마는 것이다. 내 노래가 좋다면 나는 어때. 단순한 호감 이상의 더 많은 것을 표현 해 줄 수 있겠냐고, 안드로이드와는 불가능한 기대와 꿈을 그려본다.

 

어제는.

조교를 하다 넘겨본 카이토가 진지하게 눈을 굴리는 게 마음에 박힌 탓이었다. 겨우겨우 막아놓았던 감정의 브레이크가 고작 내가 만든 짧은 멜로디를 속삭이는 소리에 망가져 넘치기 시작했다. 곧 그것은 입을 타고 나오려 움찍거린다. 입이 간지러웠다. 목을 타고 넘어오는 사랑한다는 소리가 마지막 입술을 넘지 못하고 맴돌았다. 지금이라면 소리 내 말해도 헤드폰속의 노래에 집중하고 있는 카이토라면 듣지 못하겠지. 한 번쯤 말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귀의 스피커로 송출되는 음악소리를 일부러 높였다. 카이토의 헤드셋 밖으로 먼 곳에서 들리는 듯 한 익숙한 배경음악이 흘렀다. 안심한 내가 직접 입을 뗀 것은 결심을 하고도 한참이나 망설인 뒤였다.

 

“나 너를 좋아해.”

“저도요. 우리 사귈래요?”

“응..어??? 어..어..???”

 

가장 먼저 몸을 덮치는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표정변화 없는 카이토와 달리 빨갛게 차올라 뜨거운 열이 목덜미에서부터 얼굴로 타고 올라간다. 헤드셋을 가리키는 카이토는 미안하다는 얼굴이었다.

 

“간주중인데요..”

“....그렇구나...먼저 자러 가볼게.”

 

망가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자 내 손을 잡은 것은 카이토였다. 유연해보이지만 속은 굳건한 저 얼굴에 약하다. 한 없이 물렁하게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저 녀석도 남자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이전에 스쳐갔던 좋아하는 남자에게로의 몇 번의 고백과는 다른 이질감에 잡은 손을 빼지 않았다. 그 고백들은 큰 반향 없이 단칼에 거절당하거나, 사이가 멀어지거나 하고 밍밍한 결과로 끝이었다. 항상 마음이 앞서는 탓에 고백이랍시고 엉망진창인 말을 저질러 놓고 뒷수습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좀처럼 보기 드문 진지한 표정의 카이토가 단단하게 두 번째 손가락에서부터 손을 쥐었을 때, 당황한 기색을 만면에 드러내고 말았다. 쿵쾅거리는 가슴이 귀에까지 쓸데없이 두근거림을 전달했다.

 

“저랑 사귀어 주실래요? 의 대답은요. 마스터.”

“그게 무슨 의민지는 알아?”

“좋아하는 사람..아니지. 대상이랑 사랑하는 관계를 가지는 것.”

“그럴 수 있겠어?”

“마스터가 이 손을 놓지 않는 이상은 오늘부터 영원히.”

 

겹친 손은 카이토의 조용한 가슴에 얹었다가, 두근거리는 내 가슴에 닿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로맨틱한 순간이라 자신할 수 있다. 간주가 끝나 다시 노래는 흘러나왔지만 카이토는 조용히 내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새벽이 지나간다.

 

-

 

 

“어제 기억 안 나는 거 아니죠?”

“너무 생생해서 문제야.”

 

여전히 눈을 마주 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은 커피를 모두 마시면 카이토를 바라보기로 마음먹어 놓고서는 마지막 모금을 삼킨 뒤에 나는 여전히 먼 시야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따가운 햇살이 정리하지 않은 침대 위 구겨진 이불에 내리 쬐고 있었다.

 

"마스터ㅡ, 마스터."

"왜 그래 자꾸."

"그럼 우리도 이제 데이트도 하고 손도 잡고...키..키.."

 

마지막 말을 맺지 못하고 카이토는 얼버무렸다.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입술을 깨물다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마스터를 응시했다. 어제의 일은 사실 거짓말이었고, 장난이었다는 말이 나올까봐 조심스러웠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울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거짓말이라고 떠올리는 순간 눈이 시리게 아파왔다.

 

“키..뭐..키스? 하고 싶어?”

“그, 그런 게 아니라! 사귀면 그런걸 한다고 정보 창에 쓰여있길래...아침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고...그런데 마스터는 제 얼굴도 보지 않잖아요.”

 

나는 길게 한숨을 쉰 후에 고개를 저었다. 사귀면 데이트를 하고, 손을 잡은 뒤엔 안아주고, 그 다음과 다음엔. 갑자기 엄청난 숙제가 쏟아진 것 같았다. 이리와. 손을 내밀자 품 안으로 들어온 카이토는 눈을 빛내며 장난처럼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곧 눈에서 별조각이 깜빡이면 쏟아질 것처럼 생생하게 움직였다.가슴팍에 붙어있던 카이토를 떼서 어깨를 잡자 응? 하고 의아한 듯 고개를 까닥였다.

 

“우리 어제 마트 갔지? 그거 사실은 데이트였어.”

“에엣. 정말요?!”

“응, 몰랐지? 그리고 손잡고 집에 왔잖아. 그런 거야.”

“오오...”

 

 고개를 숙여 입술이 닿자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다가 어설프게 다시 감았다. 속눈썹이 파드랗게 떨렸다. 입가에 남은 우유 향이 달큰하게 느껴졌다. 이제 카이토는 우유를 마실 때 마다 키스를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카이토의 노래를 들으면 맑은 얼굴이나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떠올리고, 이렇게나 서로를 원하고 바라는 게 당연한 것처럼. 이제야 발그레지는 얼굴로 카이토는 내 목덜미를 안았다. 아침에 닿으려다 만 입술이 혼자만 뜨거운 볼에 줄곧 쪽쪽거리는 소리를 내며 체온을 앗아간다. 그러다가 모자란다는 듯 차가운 손을 양 볼에 가져다 대고 한참이나 입을 맞추었다. 노곤하게 잠이 올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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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짧은것/X KAITO 2014. 9. 21. 18:00

1.

그런건 궁금해해본적 없었는데, 곡이란 어떻게 나오는걸까

심심할즈음되면 여기 새곡-! 하고 선뜻내미는걸 보면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뽑듯 음표를 뽑아오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하나하나 쏟아지는 검고 흰 기호속에서 만들어지는 하모니를 나는 벗삼아 기대어 호흡하는것이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생각없이 게임이나 하고있는 마스터의 머리에서 이만큼 멋진것이 나온단게 믿기지 않은것도 있다. 그렇게 매일 매달려하는 게임조차 져서 분해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꺼버리고 자는일이 흔할정도로 마스터는 머리가 좋지않고, 단순하다. 
곡쓸땐 저렇게 집중 안한단말이지, 그냥 연필들고 앉아가지고선 선이나 몇개긋고, 아! 하고 사각사각거리다가 아아..하고 그걸 다 지워버리는가하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한다. 그럴땐 건드려선 안된다. 

조용히, 그러나 바로 옆에서 마스터의 신비한 머릿속세계가 쏟아져나오길 기다려야 할뿐이다.

나는 그런 기다림이 좋다.

2.

[ 동질성과 사랑을 착각하지말것 ]
모든 V3를 구매하게되는 소유주의 V1은 센터에서 QI교육을 받는것이 회사방침으로 정해진것은 가벼운 하나의 사건때문이였다. 
사건의 소유주는 당일의 아침을 잊을수 없었다. 침대에서 곤히 자고있어야할 카이토가 아직 개봉도 하지않은 택배박스 옆에서 자고있을무렵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어야 했다. 

" 너 여기서 뭐해? 이건 아직 인증을 안받아서 개봉을 못해 "
" 제 동생이 왔어요, 마스터 "

동생? 그런관곈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게 화근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어디서부터 잘못된것인지 알수 없었다. 회사측은 UI오류라며 길고긴 사과문과 환불을 약속했지만 더이상 무언가를 들일 생각이 들지않았다. 키우던 애완견이 죽으면 다른 애완견 들이기가 힘들다지. 애완견은 아니였지만.

UI오류란건 결국 받아들일수 없는 감정의 충돌이라고 보컬로이드소유주 게시판에서 읽은적이 있다. 그 눈물과 그 많은 소리는 충돌의 에너지였다.

' 죄송해요, 마스터 '

아, 난 어느쪽도 좋았는데. 합창된 두개의 목소리는 마지막 문장을 남기고 사라지고 말았다.

3. 

" 흰색이 좋아요 "
" 에엥, 파란색이 아니라? "

뭐야, 그럼 마스터는 검은머리니까 검은색이 좋은것도 아니면서. 
나도 파란색이고싶어서 된게 아니라구요.
게다가 이젠 손톱까지 채색되서 나와버렸어요. 이상해. 하고 손톱을 만지작거리다가 긁어본다. 

" 그러게, 괜히 업그레이드 해달라고 했나봐. 예전조율도 좋았는데 "
" 정말입니까 ? " 
의외라는듯 안긴고개를 불쑥들어 눈을 마주치는 파란눈을 부담스러워 고개로 눌러내리고 딱딱거리며 말했다.
" 아니 "

외장업그레이드까지 해줄줄이야 누가알았냐고. 피치나 맞춰주겠지하고 생각없이 보냈더니 피부세척해준건 고마운데 도색까지 해줄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 며칠을 웃었는지 모르겠다. 깔맞춤에 목숨이라도건듯 새파란색이라니.

히잉, 하고 손마디를 접어 보이지 않게하는 게 귀여워서 한동안은 놔두기로 했다. 사실 도색 취소할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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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elier noir +

짧은것/X KAITO 2014. 8. 25. 19:30

Atelier noir +



누군가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 타인화 하는 것이며 자신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 또한 화자의 감정에 동하면서, 동하지 않으면서, 그 컨셉의 느낌을 창조하고 이끌어주는 것-


“...말로는...거의 프로네.”

노력하고 있어요.”


그럼 제발 눈 좀 깜빡이지 말아줘, 내가 새내기 대학생처럼 반 쯤 눈감은 사진이나 찍기를 바라는거야, 하고 그는 올라오는 짜증을 숨기지 않는다. 카이토만큼 생각하는 것이 표정이나 행동으로 잘 나타나는 모델은 없을 것이다. 노래 부를때의 행복한 얼굴, 나를 부를 때의 따스함, 사랑스러운 눈길. 자연스럽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그 표정 하나하나는 모두 자신의 것보다 생동감이 넘친다. 그리고 지금의 어색함, 부끄러움, 공감의 부재. 이해의 부족. 당연히 글로서 나타날 것이 아니므로 글로 이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벌써 네통째의 필름을 간 그는 빈 필름 통을 벽에 던져버렸다. 새로운 사진이 나와야할 마감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정말 멋진 작품을 생각했는데. 카이토가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그는 이제 던져진 필름통 소리에 놀라 가슴을 부여잡은 카이토의 겁에 질린 눈을 바라본다. 아마 저 파란 눈에서는 곧 눈물이 떨어질 듯이 아슬아슬한 물기들이 어려있다.


죄송해요..그치만, 정말 모르겠어요..”

, 아니야.”


. 죽어있는 편이 더 나았을까요.

카이토는 이번 사진을 위해 한 달 전부터 옷 치수를 재고,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함께 들었던 노래들을 기억하려 애쓴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집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것은 하나의 형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상상해봐. 하고 마스터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상상이란 게, 가능할 리가. 비슷한 느낌의 연산은 가능해도 그 정보들에서 무엇을 창조하는 것은 사람만의 기능이라고 말씀 드렸지만 아마 내가 그것을 이해 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스터도 그것을 왜 못하는지를 이해 못하는게 분명하다. 사진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최대한의 신중을 기했다. 절대로 그것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나도 의도한대로 노래가 불러지지 않으면 나 자신이 싫어지고 목소리가 미워져 말 한마디 하기 싫어질 때가 있다. 나는 마스터의 목소리와 같은 존재니까.


사진으로만 표현 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 세계는 아주 조용하고, 또 동적이고, 정적이며. 색채가 가득하기도 하고, 혹은 빛의 양으로만 표현되기도 하는. 아름답고도 고요한 폭풍의 풍경들. 마스터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소리 없는 회오리, 바람, 무언가의 흔적들이 마구 쏟아지는 장마가 떠올랐다. 나름 마구 정보들을 조합해서 최고의 연상을 해냈다고 생각했지만, 그 얘기를 들은 마스터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조금 실망한 목소리로 그래에. 하고 말끝을 흐렸다. 예술은 인간이 하는 모든 정신 활동 중에 가장 고차원의 것이라고 해요. 저는 모르겠지만.


너도 예술을 하..하잖아. , 그런식..의 말은..무책임하지.”

저 따위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마스터는 눈을 찌푸렸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모델은 누가 봐도 티가 난다. 생기 잃은 눈빛보다 더욱 보기 싫은 눈이다. 작품을 작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상서로운 감정들이 여실히 드러나는 카메라 속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백만 원 짜리 물건이라 던지지 못하는게 한이다. 카이토는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훨씬 익숙했고, 정작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시스템에 들어있지가 않은 것인지 답지 않게 무슨 짓을 해도 자존감이란 것이 올라가질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카이토를 사랑해도, 그 과분한 사랑이 자신의 아름다움 인줄을 모르고 그저 나를 신격화하기에 급한 모습은 과거의 찌질 했던 자신을 떠올리게한다. 고통스러운 평행선이었다.


미안, ..화내버렸네. 오늘은 그..그만하자. 이리와.”


풀어줄게. 나의 감정들에서. 억지로 맡겨버린 여러 역할들과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동작들에서.

그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가오는 카이토를 보며 다른 여러 장면을 생각했다. 저 자연스러운 모습자체 그대로를 담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그건 사진작가라면 누구나 가져볼 꿈의 모습이다. 자신이 생각한 그대로를, 바로 화면으로.

며칠째 혼을 빠지게 흔들어 놓은 카이토는 말없이 묶인 손목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주었지만 이미 팔뚝은 시뻘건 줄과 어제의 멍이 겹쳐 보랏빛이 감돌았다. 매듭을 푸는 내내 아픔을 참지 못한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손목을 잡자 카이토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아파요, 만지지 마세요. 아파요.”

..아프지. 미안해..,울지마.”


약 가져올게. 하고 마스터는 허둥지둥 서랍을 뒤지러 나갔다. 부어오른 손목이 욱신거렸다. 처음엔 살살 묶었다가 움직일 때마다 풀어지자 조금씩 조여 본 것이 결국 지금이다. 손목 밑 감각이 모두 통증으로 느껴진다. 아마 내일도 손을 묶을 수밖에 없겠지. 사실적인 통증보다는 마스터에게 공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들 힘도 없어 늘어뜨린 손에 마스터는 어제와 같이 소독을 한다. 알콜이 바늘같이 부어오른 곳을 찔렀다. 참아보려 했지만 불에 댄 듯 타오르는 감각에 나는 눈을 찌푸리고 움찔거렸다.


!! ..살살..”

..어떡하지..너무 너무..부었는데..”


묶는 소재를 바꿔볼까. 아니면 살색테이프를 감고 묶어볼까. 살살 묶어도 되는 구도로 할까. 뒷모습, 옆모습. 마스터는 속사포처럼 대안을 읊었다. 이럴 때 만은 말을 더듬지 않았다. 아마 머릿속에 있는 정보가 그대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팔목은 혈관들이 터져 붉게 멍이 들었다. 나는 그다지 내구성이 좋은 편이 아니다. 아마 이 외부적 상처들이 회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며칠 동안의 상처가 합쳐져 손은 죽은 보랏빛을 뗬다. 욱신거리는 괜한 죄책감에 손을 뒤로 가져갔다. 약상자를 들고 고개를 숙인 마스터가 결론을 내렸다.


이대론 안 되겠어.”

이건 포기야.”


그 말은 나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이 들렸다. 이 정도로 오래 준비하고 열심히 해오신걸 고작 나 때문에 포기한다는 게, 떨어지는 믿음의 소리가. 사용자의 요구에 맞춰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가.


그러지 마세요, 죄송해요. 제가 잘할게요. 하나도 안 아파요, 거짓말이었어요.”

저는 이게 아니면 살 이유가 없단 말이에요.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그는 그제야 카이토가 사람이 아니란 것을 조금은 이해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지독스럽게도 아플 손으로 무릎을 꿇고 비는 모습에서 더럽혀진 동정녀가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이라는 이름하에 얼마나 큰 굴레를 씌우고 있었는지도. 그가 사랑하는 환상을 깨트리지 않도록 카이토는 무단히도 연상했던 것이다. 보여주지도 않는 그의 머릿속을.

그는 카이토의 손을 잡았다. 손은 열기로 뜨끈했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니가 이렇게 아프면서 까지..해주길 원하지 않아.”


모델을 소중히 하라.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줄 매개체를 자신으로 여기지 말 것. 모델은 렌즈의 역할일 뿐 거울이 되어주지 못한다.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되 매혹당하지 말 것. 여러 가지 말이 생각났지만 어느 것도 카이토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카이토의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안다. 카이토는 절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동적으로 카이토는 그의 손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눈을 감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어서라고 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단어들이다.


....그게 아니어도, ..나는..더 좋은 사진을..만들 수 있어.”

알아요. 마스터는 최고에요.”

그런..그런 게 아니라, 좋은 피사체가 있으니까.”


나는 카이토를 울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의 열 두 번째로 카이토를 또 울려버렸다. 미안한 말이지만 우는 모습에서 더 많은 것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카이토는 언제나 나의 좋은 모델이 되어준다. 본인은 알지 못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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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것/X KAITO 2014. 8. 22. 22:58

420자 : 너만을 위한 거짓말 


말을 걸지 않으면,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다. 동공이 죽어있었다. 억지로 떼어낸 메모리가 카이토를 침식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카이토의 어깨를 두드렸다. 소리만으로는 소리의 근원을 쫓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카이토.”

, 마스터. 이런..제가 또 멈췄었나 봐요. 죄송해요.”

아냐. 가만히 있길래.”

혹시..오늘 시간이 되시면-”

 

고개를 저었다. 서비스센터에 가게 되면 불법으로 거래한 게 들통 나게 될 것이고, 벌금이나 사소한 건 그렇다 쳐도 이젠 생각만으로도 역겨운 그녀석의 얼굴을 어떻게든 마주치게 되어있다. 그 녀석과 다시는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뜯어고치는데 들인 시간과 공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테니까. 카이토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군데군데 잘라먹은 코드가 또 얽혀들어 가는지 눈을 찌푸렸다.

 

있잖아요. 마스터.”

? 또 머리아파?”

절 서비스센터에 데려가지 않는 건 제가 가봤자 수리할 수 없을 것 같아서죠?”

 

고마워요. 폐기될까 봐 걱정해주셔서.

 

눈을 찌푸리며 웃는 카이토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과부하로 뜨끈한 이마에 차디찬 손으로 이기적인 거짓말을 덮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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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것/X KAITO 2014. 8. 21. 19:15

가만히 눈을 감으면, 보일 듯 말 듯한 어느 얼굴이 점멸한다. 마스터의 얼굴은 아닌 누군가의 모습이 뽑힌 메모리 사이에 추적추적 차가운 비가 되어 내리 앉는다. 떠올려보려 애를 써도 마구잡이로 낙서된 엉망진창인 검은색의 사람.

아마도 나는 그 사람과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머리가 시큰거렸다. 수면모드로 들어가려 의식을 내려놓으면 아래에 숨어있던 폭풍이 떠오른다. 허리를 감싼 마스터를 깨우지 않으려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크게 고장 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흔하진 않지만, 전체 초기화.

종종 지끈거리는 머리와 흔들리는 기억은 때문이리라, 마스터는 설명했다.

평소에도 사람으로 말하자면 건망증처럼 어떤 것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고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는 것도. 카이토라면 가지고 있을 기본적인 성격도 사라진 나는 종종 수리 센터에 가자고 권했지만 마스터는 그러자고 해놓고선, 그 약속을 매 번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기억하지 않아도 좋아. 지워진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도 카이토를 잃지 않았으니 다행이야."

 

이상적인 마스터,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자랑스럽게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마스터는 좋은 주인이다. 목이 망가져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이런 나를, 사람이 아닌 것에 의미 없는 애정을 아까울 정도로 쏟아낸다. 음표 하나 몰랐다는 마스터가 하나 하나 공부해서 가르쳐 주는 과제곡마다 나는 마스터가 기뻐할 만큼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한 곡을 부르고 나면 한참 기침을 해야 하는 약한 몸으로 느릿하지만, 그걸로 나는 행복했다.

 

"으음….또 깬 거야? 메모리가 엉켰어?"

"깨셨어요? 죄송해요….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기쁘면서도 그것은 이따금 아팠다. 어째서 아픈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의문은 눈물로 바뀌어 얼굴을 타고 흐른다. 마스터는 커다란 손으로 내 볼을 부비다 눈을 덮었다. 눈가에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흔들리는 머릿속을 잡으려는 듯 가득 껴안고 등을 다독여 주어서, 나는 생각나지 않는 그에 대한 기억을 포기하기로 한다. 지워졌다면, 그것은 기억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소멸이다.

 

"괜찮아. 나쁜 기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어."

"그러고 싶은데, 계속 떠올라요. 오류 인가 봐요."

"자꾸 우리 카이토 괴롭히네, 혼내줘야겠어."

 

장난스레 건네는 말에 걱정이 묻어있었다. 마스터 품에서 울며 잠이 들면 그는 이마와 물기 어린 눈에 입을 맞추고, 나는 힘겹게 그를 안았다. 밤이 되면 침식하는 지워진, 과거의 알 수 없는 메모리조각은 유리조각처럼 투명하지만, 끝이 날카롭다. 텅 빈 머릿속을 굴러서 지끈거린다.

 

 

*

 

 

이거, 별것 아냐.

내 친구였지만 그 녀석은 별로 좋은 녀석이 아니었다. 화가 나면 주먹부터 나가는 부류의 사람이라 깊이 사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우연히 녀석의 집에 들렀을 때 시답잖게 어질러진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방구석 모퉁이가 카이토와 첫 만남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몸을 떠는 안드로이드는 낡고 피가 묻어 검붉은 빛을 띠는 등줄기가 위태로워 보였다. 내 눈길이 멈춘 것을 알아도 그 녀석은 무시하라는 듯 '그것'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마치 어지러운 방 일부라는 듯. 녀석과 이야기하는 중간 나는 방의 모퉁이를 쳐다보았다.

 

"신경 쓰이냐?"

"야, 저게 뭐야. 꺼놓던지…."

"저거 보컬로이드인데. 모르냐? 노래하는 거라는데…. 손대기 싫어."

 

끄려면 만져야 하는데, 이젠 그것도 싫어졌다는 말이다. 모퉁이에서 자그마하게 흔들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든 얼굴에는 지독하게 맞아 터진 빨갛고 파란 멍이 가득했다. 그가 평소에 노래에 관심이 있다던가, 그런 고상한 취미 들은 적이 없으니까 어디서 대충 얻어 온 것을 화풀이용으로 쓰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를테면 말하는 샌드백, 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에게 화를 주체못하고 손찌검을 하다 헤어진 녀석인데 오죽할까 싶었다.

 

"너 때문에 신경 쓰인다잖아. 닥치든지 꺼지든지."

"-..다리가. 망가져서…."

"말 대답하냐? 그럼 닥치라고."

"네, 마스터."

 

그러더니 녀석은 질 낮은 목소리로 저것. 다리 내가 발로 한번 차니까 한 번에 부서지더라. 되게 약해. 하고 농담으로 때리는 맛이 나름 괜찮다고 킬킬거렸다. 불쌍하네. 영혼 없는 내 대답에 그는 그래 봐야 고물이라고 받아쳤다. 아프게 쿨럭이는 숨소리나 텅 비어 보이는 회색 눈은 줄곧 마스터라 칭하는 그를 향해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카이토를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었다. 며칠 뒤 다시 찾아간 그 녀석의 방에는 숨만 겨우 붙어있는 카이토가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술 마시고 들어왔는데, 눈에 보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피부가 드러난 손이나 얼굴에 온갖 종류의 상처로 성한 곳이 없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에 깨진 술병 조각이 박혀 아직도 이마에서는 짙은 색의 피가 말라붙어 전날의 끔찍한 폭력을 떠올리게 했다.

 

“정말 저렇게 놔둘 거야?”

“니가 뭔 상관이야. 내가 동물 학대를 한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것도 아닌데.”

 

쳇. 기분 나쁘다는 듯 혀를 찬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목에 감긴 더러운 머플러를 잡아 올렸다. 목이 졸린 카이토는 이미 기능을 하지 않는 다리로 땅을 딛다 넘어졌다. 그 와중에도 카이토는 앵무새처럼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하고 닿지 않을 말을 다급하게 외쳤는데, 쉰 목소리가 빌어먹게 처절해서 그 녀석의 화를 돋우기엔 충분했다. 미련하리만큼 일방적인 각인된 애정이 부질없게 둘을 이어주고 있었다.

 

나는 그게 왜 탐이 났는지 모르겠다.

 

“너 이거 마음에 들어서 그래? 줄까? 근데 이거 남자야.”

“힉..안돼..마스터, 버리지..마세요. 제가 잘할게요. 죄송해요….”

“넌 좀 닥쳐..진짜 확 갖다 고물상에 팔아넘기기 전에….하긴, 고물상 가도 얼마 못 받겠다.”

“너 이거 얼마 주면 팔거야?”

“싫어, 싫어요. 팔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절 사가지마세요..”

“시끄럽네...손댄 김에 꺼야겠다.”

 

마주친 눈은 짙은 원망을 담고 있었다.

당신이 너무 싫어요.

내가 카이토에게 들었던 첫 마디.

줄어든 통장의 숫자로 진득한 애정을 가득 구매한 날.

 

 

*

 

 

마스터는 관계 후에 입버릇처럼 나를 사랑 하냐고 물었다. 안드로이드에게 마스터를 사랑하느냐 묻는 말은 답이 정해진 의미 없는 질문이다. 나는 그렇다고, 노래만큼 당신을 사랑한다고 언제나 대답했다. 그러면 마스터는 조금 쓸쓸한 얼굴을 했다. 노래만큼이라는 수식어가 부족한 것이었을까. 노래보다 소중한 것이 생길 거라고는 고장나 뒤죽박죽인 머릿속에서는 답이 도출되지 않는다. 낮이면 홀로 앉은 이 방에서 오랫동안 마스터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 떠오르는 건 찢어진 페이지의 검은 얼굴. 그리고-

 

날 사랑하느냐 묻는 당신.

깊은 연산은 파고들수록 알 수 없는 방정식만이 나타날 뿐이다. 원형의 그래프를 그리다가, 회전하는 관계는 스산히 부셔진다. 무한으로 증식하는 조각난 메모리들 사이에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려다 번번이 찢어지고 만다.

 

[카이토, 뭐 하고 있어?]

 

메신저의 알람이 울렸다. 회사에 있을 마스터의 점심시간. 곧 전화 수신 아이콘이 떠올랐다.

 

“여보세요? 카이토. 뭐해? 메시지 못 봤어?”

“봤어요. 답장 보내려고 했는데….점심은 드셨어요?”

“응. 먹고- 식후땡 하러 나왔지. 아이스크림 하나 먹지 그랬어. 또 가만히 앉아있었어?”

“헤헤….아뇨, 바깥 구경도 하고. 악보도 읽었어요.”

“보고 싶다. 일찍 들어갈게….끊어야겠다. 뽀뽀-”

 

수화기 너머로 쪽. 하고 입술 붙이는 소리가 넘겨졌다. 마지못해 차가운 수화기에 입을 맞추고, 닿은 곳을 소매로 닦았다. 마스터에게 말 한 것을 지키려면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어야 했다. 냉동실의 문을 열어 한 칸을 가득 채운 아이스크림 중에서 하나를 골라 먹었다. 하루에 하나를 먹는다 해도, 냉장고가 비려면 모자랐다. 마스터는 내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고 말했는데, 기억이 지워진 나는 그렇지 않았다. 맛있었냐고 묻는 흐뭇한 미소가 보기 좋았을 뿐이다.

 

“사랑해. 보고 싶어.”

 

정말로?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의 답은 망가진 기억과 함께 삭제 된 게 아닐까.

집에 돌아온 마스터는 버릇처럼 이마와 눈에 입을 맞추고, 나를 품는다. 마치 놀이공원에 놀러 온 아이처럼, 잠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스터를 안고 살이 닿으면 시원한 향기에 취해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도 따뜻해서, 고장 난 눈물이 쏟아지려는 따가운 눈을 마스터의 가슴에 부볐다. 어깨에 고개를 파묻자 귀에 달콤한 주문을 속삭였다.

 

“지금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야.”

 

명령에 복종한다. 그것이 나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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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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