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다음날

짧은것/X KAITO 2014. 9. 28. 13:54

고백 다음날

 

카이토는 웃음을 숨길수가 없었다.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날이다. 가볍게 울리는 마스터의 알람소리에 카이토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에 잠에 취해 깊은 숨을 내쉬는 마스터의 가슴에 귀를 대자 규칙적으로 달칵이는 소리가 조용히 가슴 속을 울렸다. 눈을 감고 고요한 음악을 감상했다. 가만히 있어도 음악을 만들 수 있다니 살아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것이다. 카이토는 잠든 얼굴에 살짝 입을 가져가려다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에 간단하게 우유를 마시다가 넘겨본 창가 밖에 넘실대는 햇살이 들어온다. 창가의 침대에서 잠에서 덜 깬 얼굴로 햇살을 받는 마스터는 건조하게 눈을 비볐다. 머리가 잠버릇에 한껏 들떠 먼지털이 같아요. 시시덕대며 농담을 건네자 멋쩍게 뒷머리를 부비적댔다. 웃으며 커피가 든 잔을 내려놓자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요. 피곤하세요?"

"그런 건 아닌데.."

 

찌뿌듯한 어깨로 기지개를 켰다. 입 주변에 우유자국을 남긴 채로 카이토는 바라보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쳐다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환하게 웃는 모습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에서 하트가 곧 쏟아질 듯 울렁였다. 그는 어제를 회상하다 테이블에 주먹을 몇 번 내리쳤다. 옆으로 돌아앉아 커피를 마시는데도, 카이토의 눈빛에 얼굴이 따가웠다.

 

“마스터 있잖아요-”

“왜 그래.”

“그럼 오늘부터 우리는..사귀는 거 맞죠?”

“....아아. 그래.”

 

저지르고 말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숨겨온 지 5개월이 채 넘기기 전의 새벽이었다. 함께 살고, 심지어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는데도 카이토와 나는 아무런 관계라고 지정할 것이 없다. 단지 보컬로이드와 사용자라는 형식적인 관계. 선을 넘기에는 불안하고, 불완전한. 아마도 카이토의 프로그램에 지정 되어있을 기본적인 ‘마스터의 노래가 좋아요.’ 라는 의미 없는 문장만이 선을 건너도 좋다는 희미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마음이란 것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서 평범한 카이토의 손 짓 하나에도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고 마는 것이다. 내 노래가 좋다면 나는 어때. 단순한 호감 이상의 더 많은 것을 표현 해 줄 수 있겠냐고, 안드로이드와는 불가능한 기대와 꿈을 그려본다.

 

어제는.

조교를 하다 넘겨본 카이토가 진지하게 눈을 굴리는 게 마음에 박힌 탓이었다. 겨우겨우 막아놓았던 감정의 브레이크가 고작 내가 만든 짧은 멜로디를 속삭이는 소리에 망가져 넘치기 시작했다. 곧 그것은 입을 타고 나오려 움찍거린다. 입이 간지러웠다. 목을 타고 넘어오는 사랑한다는 소리가 마지막 입술을 넘지 못하고 맴돌았다. 지금이라면 소리 내 말해도 헤드폰속의 노래에 집중하고 있는 카이토라면 듣지 못하겠지. 한 번쯤 말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귀의 스피커로 송출되는 음악소리를 일부러 높였다. 카이토의 헤드셋 밖으로 먼 곳에서 들리는 듯 한 익숙한 배경음악이 흘렀다. 안심한 내가 직접 입을 뗀 것은 결심을 하고도 한참이나 망설인 뒤였다.

 

“나 너를 좋아해.”

“저도요. 우리 사귈래요?”

“응..어??? 어..어..???”

 

가장 먼저 몸을 덮치는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표정변화 없는 카이토와 달리 빨갛게 차올라 뜨거운 열이 목덜미에서부터 얼굴로 타고 올라간다. 헤드셋을 가리키는 카이토는 미안하다는 얼굴이었다.

 

“간주중인데요..”

“....그렇구나...먼저 자러 가볼게.”

 

망가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자 내 손을 잡은 것은 카이토였다. 유연해보이지만 속은 굳건한 저 얼굴에 약하다. 한 없이 물렁하게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저 녀석도 남자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이전에 스쳐갔던 좋아하는 남자에게로의 몇 번의 고백과는 다른 이질감에 잡은 손을 빼지 않았다. 그 고백들은 큰 반향 없이 단칼에 거절당하거나, 사이가 멀어지거나 하고 밍밍한 결과로 끝이었다. 항상 마음이 앞서는 탓에 고백이랍시고 엉망진창인 말을 저질러 놓고 뒷수습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좀처럼 보기 드문 진지한 표정의 카이토가 단단하게 두 번째 손가락에서부터 손을 쥐었을 때, 당황한 기색을 만면에 드러내고 말았다. 쿵쾅거리는 가슴이 귀에까지 쓸데없이 두근거림을 전달했다.

 

“저랑 사귀어 주실래요? 의 대답은요. 마스터.”

“그게 무슨 의민지는 알아?”

“좋아하는 사람..아니지. 대상이랑 사랑하는 관계를 가지는 것.”

“그럴 수 있겠어?”

“마스터가 이 손을 놓지 않는 이상은 오늘부터 영원히.”

 

겹친 손은 카이토의 조용한 가슴에 얹었다가, 두근거리는 내 가슴에 닿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로맨틱한 순간이라 자신할 수 있다. 간주가 끝나 다시 노래는 흘러나왔지만 카이토는 조용히 내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새벽이 지나간다.

 

-

 

 

“어제 기억 안 나는 거 아니죠?”

“너무 생생해서 문제야.”

 

여전히 눈을 마주 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은 커피를 모두 마시면 카이토를 바라보기로 마음먹어 놓고서는 마지막 모금을 삼킨 뒤에 나는 여전히 먼 시야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따가운 햇살이 정리하지 않은 침대 위 구겨진 이불에 내리 쬐고 있었다.

 

"마스터ㅡ, 마스터."

"왜 그래 자꾸."

"그럼 우리도 이제 데이트도 하고 손도 잡고...키..키.."

 

마지막 말을 맺지 못하고 카이토는 얼버무렸다.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입술을 깨물다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마스터를 응시했다. 어제의 일은 사실 거짓말이었고, 장난이었다는 말이 나올까봐 조심스러웠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울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거짓말이라고 떠올리는 순간 눈이 시리게 아파왔다.

 

“키..뭐..키스? 하고 싶어?”

“그, 그런 게 아니라! 사귀면 그런걸 한다고 정보 창에 쓰여있길래...아침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고...그런데 마스터는 제 얼굴도 보지 않잖아요.”

 

나는 길게 한숨을 쉰 후에 고개를 저었다. 사귀면 데이트를 하고, 손을 잡은 뒤엔 안아주고, 그 다음과 다음엔. 갑자기 엄청난 숙제가 쏟아진 것 같았다. 이리와. 손을 내밀자 품 안으로 들어온 카이토는 눈을 빛내며 장난처럼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곧 눈에서 별조각이 깜빡이면 쏟아질 것처럼 생생하게 움직였다.가슴팍에 붙어있던 카이토를 떼서 어깨를 잡자 응? 하고 의아한 듯 고개를 까닥였다.

 

“우리 어제 마트 갔지? 그거 사실은 데이트였어.”

“에엣. 정말요?!”

“응, 몰랐지? 그리고 손잡고 집에 왔잖아. 그런 거야.”

“오오...”

 

 고개를 숙여 입술이 닿자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다가 어설프게 다시 감았다. 속눈썹이 파드랗게 떨렸다. 입가에 남은 우유 향이 달큰하게 느껴졌다. 이제 카이토는 우유를 마실 때 마다 키스를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카이토의 노래를 들으면 맑은 얼굴이나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떠올리고, 이렇게나 서로를 원하고 바라는 게 당연한 것처럼. 이제야 발그레지는 얼굴로 카이토는 내 목덜미를 안았다. 아침에 닿으려다 만 입술이 혼자만 뜨거운 볼에 줄곧 쪽쪽거리는 소리를 내며 체온을 앗아간다. 그러다가 모자란다는 듯 차가운 손을 양 볼에 가져다 대고 한참이나 입을 맞추었다. 노곤하게 잠이 올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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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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