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것'에 해당되는 글 75건

  1. 2017.03.12 [히소호마] 달이 아름답네요
  2. 2017.02.24 [이능력자 AU]살아있는 씨앗 1
  3. 2017.02.06 [마스카이 웹온리] Answer
  4. 2015.06.21 긴히지 / 2508
  5. 2015.06.12 혈계전선 AU
  6. 2015.04.09 3 Hours
  7. 2015.04.09 문을 열면
  8. 2015.04.09 R
  9. 2015.04.09
  10. 2015.04.08 반존대 연성

무님이랑 연성교환....

근데 이런 쓰레기를..

 

달이 아름답네요.



아름다운 달. 만년필을 끄적였다. 하얀 원고지의 빈 공간에 검은색의 금이 간다. 얼음이 깨지듯이, 스걱이는 종이 긁는 소리는 고요한 새벽이라 더욱 존재감이 커다랗다. 히소카는 저녁연습이 끝나자마자 잠에 들었고, 낑낑거리며 방으로 끌고 들어오던 것을 타스쿠가 가볍게 들어 도와주었다. 매번 이런식으로. 하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래도 연습이 끝날때까지 깨어있던 것이 기특하다며 츠무기와 아즈마는 잠든 아이를 보듯 웃었다. 시상이 떠오르지 않는 지루한 오후라고 생각했지만, 단원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면 그렇게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다. 히소카와 방을 함께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늘 자고 있을 뿐이니 혼자 쓰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평소엔 다른 누구보다 시끄러운 호마레였지만, 시를 떠올리거나, 원고를 할때는 조용한것이 좋았다. 히소카는 그런 호마레에겐 최적의 룸메이트였다.

"달이 아름답다...흐음. ...달이..."
"쿠울...."
"흐음? 히소카군의 숨소리가 달라졌군."

히소카는 어느 곳에서나 잠에 들수있는 신기한 능력이라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대로 누워서 잘 수 있는 곳이라면 깊게 잠든 듯이 작고 옅은 숨소리가 들리고, 앉아서 자는 것이나 불편한 장소에서는 옅은 잠에 들어 깊은 숨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잠자는 척을 하는 것은 아닐까, 옆에서 이름을 불러보거나 몸을 흔들어 보기도 했다. 현재까지의 결론은 정말이지 하루에 18시간 정도는 수면상태라는 것이다. 호마레는 의자에서 일어나 히소카의 침대로 다가갔다. 새벽 두 시, 히소카가 일어나기에는 한참이나 먼 시간이다. 어느새 숨소리는 멈추어 있었다. 호마레는 만년필을 내려두고 히소카의 침대앞에 서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히소카군?"
".....쿠울...."
"그렇지. 역시 깨어있는 것이야. 오늘은 낮잠을 너무 많이 자버린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만."
"......"
"...흐음. 마시멜로우라도 먹을텐가?"
"."

이불을 머리까지 눌러쓰고 있던 히소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역시 그를 움직이는건 마쉬멜로우가 최고의 방법이다. 힘빠지게 단순한 사실로, 그를 처음 발견했을때 손에 쥐어준게 마쉬멜로우라서. 정말 단순한 이유.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응시하는 눈이 매서우면서도 진지하다. 마쉬멜로우를 원하는 눈동자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마쉬멜로우.."
"그렇지. 츠무기군이 좀 자제해달라고는 했지만, 이번엔 내가 먼저 제안했으니..어디보자.."
"지금 몇시..?"
"새벽 두시라네. 이 시간에 히소카군과 대화 하다니. 신기한 밤이군. 마법같은 밤..아아, 시상이.."
"마쉬멜로우..."

호마레는 책상 위로 빠르게 걸어가 앉았다. 천재인지라, 시상이 떠오르는 순간은 많았지만 빨리 기록해두지 않으면 사라진다. 달이 아름답네요. 한 줄이 쓰여있던 원고지가 빠르게 채워져간다. 무아지경으로 하얀 달과 쏟아지는 달빛이 비추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그 아래에 춤추는 연인. 흑단의 머리카락에 쏟아지는 은빛....

"....아리스.."
", 히소카군?! 스스로 침대에서 나왔잖은가! 이런, 기쁜일이. 내일 모두에게 말해야겠군."
"마쉬멜로우. ."
"아하하. 그랬었군. 갑자기 시상이 떠오르지뭔가. 천재란 고달픈 일이야...이렇게 무심코, 그렇지. 들어보겠는가? 아직 완성되진 않았지만.."
"...."
"아아-. 광활한 우주여, 휘광이여. 은빛 축복속에 춤추는 연인들.."

호마레는 커다란 손짓으로 창 밖의 달을 가리켰다. 마침 창문의 중앙에 차오르는 달이 걸려있었다. 히소카는 묵묵히 커다란 잠옷소매로 눈을 비비며 기다란 미완성 장편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무대위가 아니더라도 무대위의 호마레를 볼 수 있으니까. 꿈을 꾸듯, 춤을 추듯 움직이는 기다란 팔이 언젠가 아리스가 말했던 나비를 연상시킨다. 어둡고 아무것도 없는 꿈의 세계에서 항상 자신을 구원하는 커다란 손. 깊은 심연속으로 영영 떨어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상관 없지만. 호마레가 잡아주지 않는다면, 일어나지 못하는 아침.

"자아. 어떤가?"
"...은 아름다워. 하얗고. 마쉬멜로우도. 하얗고."
"모든것의 귀결이 마쉬멜로우로군. 히소카군다워. 흠흠. 들어준 답례로 마쉬멜로우를 주겠네."
"들려준 답례로..."
"으음?"

히소카가 호마레의 잠옷 소매를 끌어당겼다. 엄청난 힘이었다. 히소카가 항상 잠에 늘어져 있는 모습과는 다르게 민첩하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있었지만, 악력까지 이렇게 센 줄은 몰랐다. 당황한 순간 목덜미를 잡혀 허리가 굽혀졌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히소카가 자주 먹는 마쉬멜로우의 설탕과 싸구려 감미료가 섞인 단맛이 입안에 화악 퍼졌다. 호마레가 황급히 입을 떼고 히소카의 어깨를 잡았다.

", , 이런. 이게 무슨...히소카군, 어제 자기전에 양치질을..그렇군. 바로 눕혀버린건 나 자신이지 않은가."
"...?"
"히소카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네. 마쉬멜로우 다섯개만 먹고, 양치질을 해야하네. 안그러면 이가 다 썩어버릴거야."
"...."
"그 표정은 뭔가?"
"아리스. 얼굴 빨개졌어."
"? 그거야 히소카군이 갑자기 키스했으니까 그런거 아닌가? 본인이 한 일로.."
"으응...이제 졸려.."
"마쉬멜로우 먹으면서 잠드는건가. 장난치지말고.."
"쿠울..."
"이런..이런. 치사한 방법을 쓰는군."

눈을 가물거리다 품으로 쓰러진 히소카를 안았다. 가벼워 보이지만 제법 무겁다. 2층침대까지 안아서 올리는 것은 무리다. 히소카를 위해 사뒀던 커다란 담요를 서랍에서 꺼냈다. 이 방에서 히소카를 위한 물건이라고는 침구와 커다란 마쉬멜로우 정도. 가구도, 옷도 처음에 히소카가 입고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모두 겨울조 멤버들이 사준 것들이다. 최근에는 무쿠가 고양이인형을 침대에 놓으라며 주었다고 호마레에게 내밀었다. 좋은 선물이군. 호마레는 칭찬한 뒤에 히소카의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었다. 푹신한 회색 고양이모양 인형을 히소카가 잠든 옆에 놓으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다. 늘 그를 신경쓰는 룸메이트만 볼수 있는 풍경을 천천히 즐기며, 새벽에 빛나는 달을 바라보았다.

달이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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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이능력자AU..

살아있는 씨앗.

오전 10시가 지나자 아침에 열어놓은 창문으로 환기된 공기가 가득찬 기숙사의 거실은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학교나 직장처럼 저마다의 생활이 있는 단원들이 빠져나가자 커다란 거실에 놓인 쇼파의 구겨지 마저 왠지 쓸쓸하게 느껴진다. 츠무기는 오전의 햇살이 들기 시작하는 정원을 꼼꼼히 돌아보며 꽃이 핀 곳, 조금 시든 곳을 체크하며 마른 땅에 물뿌리개로 찬찬히 비를 내렸다. 정원의 모습은 매일이 달라진다. 낮과 밤, 어제와 오늘, 봄과 여름이 다르듯이 한 순간도 놓칠수 없는 소중한 장면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츠무기가 높게 자란 해바라기 봉오리에게 말을 걸었다. 올해 여름을 위해 열심히 키우고 있는 역작이었다.

"쑥쑥 자라...이런. 또 사고 칠 뻔 했네.."
"어이. 츠키오카. 오늘은 아르바이트 쉬는 날인건가?"
"우앗..! 사..사쿄씨. 으응. 네. 오늘은 아르바이트 없는 날이에요."
"잘됐군. 마침 부탁할게 있어서."

어느새 정원에 놓여있던 하얀 테이블에 사쿄가 앉아있었다. 보통이라면 일을 나갔을 시간일텐데. 츠무기는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작업복의 윗옷을 살짝 끌어내렸다. 이마에 잔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여전히 열심이군. 사쿄는 무미건조하게 눈을 정원으로 돌렸다. 몇 달 전 까지만 해도 황폐한 극단은 먼지투성이에 잡초만 무성히 자라 허물기에 아깝지 않을 정도 였다. 건물을 해체하는 일은 수도 없이 해 왔던 일이다. 하지만 사쿄는 어째서인지 만카이극단에게 몇 달의 유예를 주었다. 현재는 그 유예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기엔 너무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츠무기를 바라보며 사쿄는 작게 조소했다.

"어떤 부탁일까요? 제가 해드릴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는 주의다만."
"아하하...그런가요.."
"마침 딱인 인원이 오늘 남아있던 참이라, 생각이 나서 중간에 돌아왔지."
"딱인 인원..?"
"츠무기...인가. 사쿄씨."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온것은 타스쿠였다. 이미 외출용 져지를 입고 손가락에는 차키가 들려있었다. 사쿄에게서 부탁의 내용을 들은 모양이었다. 사쿄는 타스쿠에게 인사겸의 손짓을 하고 야외용 테이블 위에 작은 나무상자를 올려놓았다.

"이게 뭔가요?"
"무언가의 씨앗이지. 원래는 플라스틱 통에 넣은 것이었는데, 츠키오카의 능력을 생각해서 일부러 한번 더 봉한 상태다."
"씨앗..아뇨, 씨앗 까지 틔우는 능력은 아니라서."
"아직 제대로 써본적도 없잖아. 만일을 대비해서다."
"뭐어. 제대로 쓸 일이 없는 능력인걸요. 그래서 부탁은 이것의 운송인가요. 언제나처럼?"

만카이컴퍼니는 부채가 엄청난 부실회사이다. 극단원들의 바람과 몇개 연극의 성공은 극단을 겨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놓았으나, 남은 부채를 해결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사쿄가 가져오는 '심부름'이라는 명목 하에 굴러들어오는 일들은 벌이가 좋았다. 대부분의 심부름은 미묘하게 법의 망을 피해갈 수 있는 이능력자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이능력자들이 운영하는 심부름 회사는 관리가 엉망인데다, 이능력자들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 가격도 터무니없이 비쌌다. 사쿄에게도 극단의 사람들에게 맡기는게 비용도 적은데다 믿을 수 있어 서로가 좋은 일이었다. 츠무기는 테이블에 있던 상자를 손에 쥐고 뚜껑을 열어보려했다.

"어라..안열리는데요."
"내가 방금 츠키오카의 능력이 걱정되서 봉해놓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열리지 않아. 내 능력으로 잠궈놓은 상태니까."

서로 다른 두가지 물체를 붙이는 능력은 사쿄가 잘 드러내지 않는 특기 비슷한 종류였다. 물체는 손에 잡히는 것으로 한정되기에 크게 쓰일 일은 살면서 없었지만, 언젠가 사이 나쁜 두 녀석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쓰였던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쓰임이었다. 그것 외에는 이런 식의 소소한 봉인정도이다.

"사쿄씨의 능력..그렇군요. 그럼 언제나처럼 A공원에 있는 벤치 위에 올려놓으면 되는건가요?"
"아니. 오늘은 C라는 가게의 포니테일을 한 여자점원에게 전해주는것."
"C. 라면 꽤 먼 거리네요. 보수는?"
"두 사람을 이용하는거니까. 30만."
"봉인까지 한 것 보면 위험한 물건인거같은데. 40만엔으로."
"이 극단 녀석들은 합의에 응하지 않는게 극단 규칙인가? 급한일이니. 받아들이지."
"가자, 츠무기. 넌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어."
"어어? 으..으응. 다녀오겠습니다."

타스쿠는 상자를 든 츠무기의 손목을 잡고 방으로 향했다. 학교에 다니는 단원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일을 마쳐둬야 의심을 사지 않을것이다. 비밀로 할 생각은 없지만, 알게되면 분명 자기들도 나서겠다며 이리저리 날뛰어 다닐 것이 눈에 선했다. 조용히 어른의 선에서만 끝내는게 좋았다. 어디에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닐뿐 더러, 이능력을 사용하는 것 또한 달가운 일이 아니다. 세상의 눈에 띄는 일은 더러 손가락질 받기 마련이다. 서둘러 외출복인 코트를 걸친 츠무기가 상자를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들어도 될까? 걱정되면 타스쿠가.."
"아니. 난 운전을 해야하니까."
"그렇네. 그럼 내가 소중하게 들고가도록 할게."
"음. 차는 아까 먼저 정문에 세워뒀어."
"타스쿠는..요즘 겨울조 대본을 읽고있던 참이였지? 그렇다면.."
"내가 능력을 쓸 일은 없어. 물론 츠무기 너도."

타스쿠는 차의 시동을 걸며 다짐하듯 말했다. 츠무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 속 상자를 움켜쥐었다. 상자가 작게 꿈틀거리며 진동하자 츠무기는 문득 상자를 다시 꺼내 눈높이에 대고 바라보았다.

"뭐하는거야?"
"아니, 기분탓인지도 모르겠는데. 상자가 움직이는 것 같아서.."
"그럴리가. 설마 네 능력이.."
"새싹을 틔워본적은 한 번도 없는걸. 죽은 식물을 살리는 것 까지는 엄청 노력하면..죽은것을 살리는것과 아직 살지 못한것을 살리는것은 다른건가봐."
"그런식의 논리가 통하는게 이능력인가...모르겠지만."
"하하. 본인도 어떻게 쓰는 줄 알 수 없는게 이능력이라는 것이겠지."

잠시 대화가 멈추고 차의 시동소리만 웅웅댔다. 츠무기는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대화주제를 생각했지만, 집중하고 있는 동안의 타스쿠가 잡담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쿄가 맡긴 일은 쉬워보여도, 그만큼의 보수가 따른다는 것은 위험부담을 생각해야만 한다. 타스쿠는 분명 위험한 상황에 닥치면 본인이 먼저 나설 성격이다. 어릴적부터 그랬고, 책임감을 깊게 느끼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했다. 어린시절 츠무기가 처음 이능력을 개화했을때 타스쿠는 패닉상태로 엉엉 우는 츠무기의 손에 묻은 흙과 식물뿌리를 털어주고, 온갖 형태로 자라 엉망이 된 할머니의 정원을 같이 정리해주었다. 츠무기는 옛 일을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뭐야. 드라이브라도 하는 정도의 마음가짐이야?"
"아냐. 전혀. 그런게 아니라...엣날 일이 생각나서. 내가 처음 능력을 썼던날.."
"하아. 갑자기 옛날 일은 왜. 여기서 좌회전이군."
"그때는 타스쿠까지 이능력자인거, 몰랐지. 정말 의외였어."
"뭐, 연극을 하지 않았던 때니까."
"하하하. 타스쿠다운 능력이라서 조금 웃었지 뭐야."

타스쿠는 작게 코웃음 치더니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비로드거리를 벗어나 주택가의 중심을 지나고 있었다. 이른 오후의 거리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츠무기는 창문가로 눈을 돌려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C가게...이 거리에 있어야하는데. 네비게이션으로 넣은 주소가 이쪽이야."
"으음..보이지않네. 차를 세워두고 좀 걸어야하나."
"그래. 이 쪽 주차구역에 세우고 내리자."

타스쿠는 부드럽게 선에 맞춰 주차를 하곤 시동을 껐다. 안전벨트를 풀고서 츠무기에게 상자의 여부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차에서 내렸다. 사쿄가 말했던 가게의 이름이 걸린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츠무기와 타스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간판의 이름을 입으로 말하며 세어보았지만, C는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지도와 GPS를 켜고 세번을 왕복했지만 가게는 없었다. 타스쿠는 빠른걸음의 끝에 깊은 숨을 내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오후였다.

"곤란하네..휴대폰으로 검색해도 이쪽으로 뜨는데 말이지. 가게가 없어진걸까?"
"음. 슬슬 귀가시간이 맞물리겠어. 할 수 없군..츠무기. 잠시 행인들의 시선을 끌어줘."
"뭘하려고?"
"이제 그녀는 행복해졌어-."
"아..이런. 이런, 잠시만!! 타-쨩!!"

츠무기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타스쿠는 쪼그리고 앉아 발돋움을 하더니 위롤 솟구쳤다. 날았다. 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직선적인 움직임이었다. 분명히 아름답게 날개를 휘날리는 천사에 대한 극이였는데, 타스쿠의 운동신경과 합쳐지니 이런건가. 츠무기는 점점 작아지는 타스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높게 비치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으으. 이런 사람이 많은곳에서..쑥쑥 자라라..예쁘게 자라라.."

거리의 가로수에서 나뭇잎과 꽃잎들이 무수히 피어나더니 공중에 천천히 흩날렸다. 츠무기는 하늘을 바라보며 사라진 타스쿠의 그림자를 쫓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어디에 돌풍이라도 부는걸까. 하고 혼잣말을 하며 가로수에 손을 대고 있는 츠무기의 옆을 지나쳐갔다. 타스쿠의 이번 능력은 신기한걸. 자신이 이해한 극에 대한 능력이라니, 역시 타스쿠는 연극배우의 길을 타고난걸지도 모른다. 연둣빛의 잎이 한차례 흩날리더니 어느새 사이에서 핀 꽃잎이 섞여 분홍잎이 눈처럼 쏟아졌다. 눈처럼, 비처럼 쏟아지는 꽃잎들은 연극의 한 창면 같기도 했다.

"슬슬 그만해야 하는데..타스쿠 아직인가.."
"..츠무..."

거리의 보도블록에 페인트가 발린 듯이 여러색의 꽃잎들이 쌓이고 있었다. 발이 땅에 닿는 소리가 잎을 밟아 조용히 묻힐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눈 속임용의 이능력은 아니지만, 츠무기는 능력을 조절하는데 서툴어 여러방면의 활용이 힘들었다. 츠무기는 몽롱한 표정으로 하늘거리는 꽃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스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로수 옆에 서있는 츠무기의 어깨 잡았다

"어이. 츠무기. 그만해. 꽃잎에 파묻히겠다."
"앗. 미안. 나도모르게..가게는 찾았어?"
"고약한 위치야. 저 건물의 옥상에 있는 옥탑건물이야. C라고 적힌 아주 작은 명패가 걸려있더라."

츠무기는 잠에서 깬 듯 기지개를 펴고 맑은 청록빛 눈동자를 깜빡였다. 어깨를 잡은 타스쿠의 눈을 바라보더니 그제야 안심한 듯 미소지었다.

"사쿄씨..일부러 알려주지 않은걸까."
"본인도 거래장소는 답사해보진 않잖아. 몰랐겠지. 아무튼 가자."
"응. 벌써 저녁시간이 가까워. 감독이 혼자 준비하고 있을텐데."
"그럼 카레겠군."
"나는 좋은걸. 감독의 카레."
"싫다고 하진 않았어. 약간 지겨워 질때도 된것같은데, 감독 본인도."
"전혀 그렇지 않대."

츠무기는 상자에 묻은 찌그러진 꽃잎을 떼어내고 타스쿠를 따라 커다란 빌딩안으로 향했다. 일반 회사의 건물로 쓰는 듯한 평범한 사무용 빌딩이었다. 그런곳의 옥상에 잡화점이 있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타스쿠와의 대화에 휘말려 작은 의심정도는 묻어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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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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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answer.hwp

 

, 군에게 흥미로운 주제가 있다네. 소우지 교수에게서의 문자였다. 젠장, 나는 새벽까지 논문을 고치고 고치다 아침 해가 뜰 때 도서관에서 빠져나왔다고. 그런데 아침 여덟시의 문자 알림에 눈을 뜨다니. 대학원생의 삶이 지긋지긋하다. 코우타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부스스 털며 휴대전화의 화면에 있는 희미한 글자를 읽어보려 무거운 눈꺼풀을 본능과 싸우며 억지로 일으켰다. 낮에는 대학원 업무를 돕고, 저녁엔 수업이 끝난 교수님의 보좌를 하다 밤이 되어서야 자신의 논문에 집중할 수 있다. 소우지 교수는 좋게 말해서는 순수하게 학문에 정진하는 사람이고, 요즘 시대에 사장되는 학문이나 다름없는 언어학의 마지막 보고라는 아름다운 수식어를 붙여 줄 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호칭을 위해서 밑에서 죽어나는 대학원생과 박사과정의 학생들에게는 저승사자나 다름없다. 끊임없는 연구제안. , 이것은 어떤가? 이런 생각은 어떤가? 이런 이론은 어떤가? 정년의 나이를 넘어섰지만, 그는 명예교수직을 거절하고 여전히 연장에서 새파란 학생들을 가리킨다. 과연 이시대의 멘토로서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하다. 코우타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 시절 소우지 교수의 명강의에 감동하여 언어학도로서 학업을 결심한 멍청한 학생 중 하나였다. 이 삶에서 가장 후회하는 과거의 일이다.

 

"교수님, , 접니다. 연락 주셨네요. , 네네. 바로 가겠습니다. 연구실에서요? 네네."

 

코우타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큼큼대며 틔워 전화를 받았지만, 교수는 방금 일어났군. 그렇지? 하며 특유의 표표한 웃음소리를 냈다. 전 학기 성적도 좋지 않은 데다 논문 진행도 엉망인 마당에 교수님의 '흥미로운 주제'를 빙자한 본인의 뒤치다꺼리를 또 떠맡길 셈이다. 올해 졸업 하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졸업해봐야 취직도 안 될 테고. 언어학은 직업을 갖기 위한 학문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슬슬 집에서의 압박을 무시하기엔 양심에 찔렸다. 코우타는 욕실에서 물로 머리를 대충 훑고서 서둘러 학교로 뛰어갔다. 학교 근처 자취방에서 10분이면 학교 정문이다. 그는 익숙하게 본관 7층의 인문학 연구실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침 8시에 인문학 연구실에 있을 만한 사람은 소우지 교수 이외엔 없다.

 

", 코우타 군. 내가 잠을 깨워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어차피 오늘은 학부생 시험 감독도 있는 날이라 일찍 오려고 했어요."

"그렇지 참. 벌써 5월인가. 학생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준 것도 없는데 시험을 봐야 한다니."

"아무것도…․ …․ 그렇죠. 하하."

 

코우타는 어색하게 웃었다. 소우지 교수의 수업은 그의 명성만큼이나 경쟁률이 엄청났다. 청강하는 학생들까지 치면 본래 수업 제한 수보다 2배수 정도가 강의실에 북적거린다. 소우지 교수는 청강생이 아무리 늘어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수업이 진행되면 3회를 고비로 그의 학생들의 이해는 고려하지 않은 진도와 수업이 끝나도 진행되는 토론, 어려운 과제, 발표수업에 질색하여 떠나는 학생들이 반절 이상이었다. 그의 마지막 수업은 황량했다. 누구 하나 집중하는 사람 없이 진행되는 열정적인 수업은 청중들이 없는 무대 위에서 독백하는 고독한 연극배우에 이입한 모습은 동정심을 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내가 몇 달 전부터 혼자 해보던 게 있는데..아무래도 군의 도움이 필요하지 싶어. 분명 군의 논문에도 도움이 될테고. 언어발생학의 결정적인 시기..였지?"

"제 논문 말씀이십니까? ."

"군은 안드로이드의 언어발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시작이다. 소우지교수가 눈을 반짝였다. 학부생들을 질리게 하는 저 표정. 마치 시험하듯 눈가에 미소를 띤 얼굴로 히죽이며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생각할 필요 없는 문제를 깊은 명제인 마냥 질문한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답을 하면 아-. 그런가. 하고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하며 실망했다는 투로 총총 사라진다. 천재의 시각에서 범재들의 말이란 다 멍청하게 들린다는 듯. 코우타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몇 시간 자지 못한 채라 머릿속이 흐릿했다. 안드로이드란 미리 입력된 언어를 입으로 발성할 뿐이고, 몇몇 발음과 단어 간의 차이는 사용자와의 경험으로 축적된 데이터베이스로. 요즘엔 그것 또한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더군요. 정형화된 대답을 하며 교수의 눈치를 살폈다. 나무로 된 원목의자에 반대로 앉아 있던 그는 어느새 연구실 뒤쪽의 준비실 겸 창고 앞에 서 있었다.

 

"교수님?"

"그렇지. 안드로이드는 언어를 '학습'하지 않는다. 그게 학계의 정설이야. 왜냐, 배울 필요가 없으니까. 이미 그들의 뇌, 라고하나. 뭐 아무튼 그런 쪽에서 미리 학습돼 나온다 하더군. 로봇 인공지능 공학실의 한다 교수에게 자문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네."

 

코우타는 돌고 도는 소우지교수의 말 속에서 실마리를 잡았다. 코우타의 논문이 언어 발생학에서 결정적인 시기라고 일컬어지는 시기인 3세의 시기에 다른 요인으로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다면. 의 가정을 논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곳에서 사례를 찾고 있었다. 3세에 귀가 먹게 된 사례, 눈이 안 보이게 된 사례. 가족과 헤어져 사회적으로 격리된 사례. 이미 학계에 보고된 사례들로 새로운 논문을 쓰는 것은 어렵다. 일부러 사례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교수님. 그래도 그건 윤리적으로 문제가…․"

"학문과 윤리라. 호기심과 윤리. 저울로 재면 어느 것이 무겁다고 생각하나? 인공지능도 생명이라 함부로 파괴하면 안 된다는 생명윤리인가? 인공지능은 아직 현대사회에서 생명과 동등한 취급을 받지 못한다네."

"그런 말은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안드로이드의 강제파괴는 범법이니까요. 기기 훼손 금지처럼요. 범법행위를 하시자고 절 부르신 건 아닐 테고."

"아주 다른 문제라네. 뇌가 손상되어 말을 하지 못하는 언어장애와 성대가 손상되어 말을 하지 못하는 언어장애처럼 말이야. 나의 교수직에 맹세코, 범법행위는 없어."

"다행이네요. 대학원에서 제일 정신이 나간 건 저니까요. 어떤 명제인지 들어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군을 좋아하지. 잘은 모르지만, 최근에 안드로이드를 대상으로 한 바이러스가 유행했다네. 우리로 치면 독감 유행과 동등한 의미일세. 손상은 다분히 한정적이지. 다행히 이들은 사고팔 수 있는 개체이고. 내가 왜 이 생각을 이제야 해냈는지. 늙으면 새로운 문물에 멀어지니 큰일이야. 두 눈을 뜨고 있어도, 먼 것이나 다를 바가 없네."

 

교수의 눈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목 뒤가 섬뜩했다. 이때까지 소우지 교수를 만나며 겪어온 수모들이 떠오른다. 2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습득하는 방법을 알아내겠다며 영영 들어보지도 못한 어느 지중해 섬나라의 언어체계를 정리해 오라 하질 않나, 1차로 번역된 언어를 2차로 번역할 때 생기는 오차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보자며 1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번역해오라며 떠넘긴 적도 있다. 영 쓸모없는 짓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어떻게 해서든 교수님의 연구 성과로 나타났다. 코우타는 교수와의 만담을 이어가다 창고에서 슬그머니 걸어 나오는 물체를 보았다. 저거군. 저거다. 안드로이드 중에서도 저건 보컬로이드로군. 보통의 안드로이드들은 무미건조한 억양이 기본이다. 그들은 언어를 매체로 전하기만 하면 될 뿐이니, 억양이나 음소처럼 부가적인 사항이 붙지 않았다. 보컬로이드는 달랐다. 노래라는 언어의 상위체계를 위해 억양의 부가선택이 가능한 종류다. 코우타는 파란색의 눈과 머리를 가진 저 보컬로이드가 카이토라는 기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리포트를 쓰며 공부한 적이 있었다.

 

"더는 인문학연구실에서 숨기기도 힘들고 말이야."

"그게 본질이군요. 교수님의 연구실은 책으로 엉망이고…․"

"내 방을 청소하는 것 보다는 이 애를 맡아 보는 게 훨씬 나을지도."

"그건선택지가 없네요. 이미 저쪽에서 엄청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저거 말씀이신 거죠?"

"허허허. 문이 열려있었나. 카이토군, 이쪽으로."

 

창고에는 폐지와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문서나 놔두는 비좁은 창고에 몇 달 동안이나 성인 남자 형태의 안드로이드를 숨겨놓고 있었다는 말이다. 코우타 또한 연구실을 매일 넘나들었지만, 창고에 저런 게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인공지능 보호국에 알려진다면 학대범으로 벌금을 물지도 모른다. 기행의 연속인 소우지 교수라지만 평소와는 다른 텐션이었다.

 

"앞의 사족을 들어서 알겠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네. 발성은 가능하지. 군이 원하는 케이스 아닌가? 3세 아이의 지능보다는 높으니 교육도 쉬울 테고."

"이런 직설적인 케이스를 원한 건 아닌데요. 그래서 교수님이 원하시는 바는…․"

"군이 카이토에게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만들어 보는 걸세. 흥미롭지 않은가? 지능이 높은 상태에서의 초기언어습득과정에도 폭발적 시기가 존재할까? 내가 적극적으로 후원하겠네. 연구비든. 내가 2달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교육했지만, 기본적인 아-. 이외에는 하지 못하더군. 나는 언어교육에는 흥미가 없어서 말이지."

 

자아. 소우지 교수는 둘 사이에 어물거리며 서 있는 카이토를 쳐다보았다. 코우타는 카이토의 행동을 살폈다. 평소에 보던 일반적인 안드로이드보다 표정이 다양하다. 소우지교수의 말에 끄덕이는 모습이 당장에라도 대답을 할 모양으로 아아. . 하는 단편적인 기계음이 울렸다. 교수는 카이토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코우타쪽으로 밀려나온 카이토는 엄마와 떨어진 아이처럼 교수를 뒤돌아 쳐다보며 슬픈 눈동자를 지었다.

 

"비용은 지불되었고, 관리비나 생활비까지는 내 법인 카드로 결제해도 된다네. 카이토군은 전기료 외에 다른 용품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

"왜 이렇게 투자하시죠?"

"호기심이 생기니까. 나는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란 걸 군도 잘 알지 않은가?"

"귀찮은걸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하시죠."

"하하하. 역시 나는 군이 마음에 들어. 이번 실험이 군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네. 추천서에도 말이지."

"2개월 만에 해내 보이죠."

 

좋은 자세야. 나도 젊을 때는 패기 있는 사람이었지. 교수는 인문학연구실을 벗어나는 코우타와 뒤따라가는 카이토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짧은 길을 걷는 동안 카이토는 바깥 풍경이 신기한 듯이 이리저리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이나 건물의 간판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교수님이 바깥에 데리고 나간 적이 없는 모양이다. 항상 교수님의 곁에 있는 인문학교실의 사람들조차 교수님이 보컬로이드를 샀다는 소식을 알지 못할 것이다. 코우타는 카이토의 반짝이며 호기심이 넘쳐나는 눈동자를 보며 소우지 교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물론 위에서 내려다보는 호기심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호기심은 전혀 다른 것이다. 코우타는 자취방이 있는 빌라 복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카이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적당히 하라고. 바깥은 처음 나오는 거야? 심드렁한 질문에 카이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어떤 말을 꺼내려다 이내 입을 다물고 이미 현관문에 들어선 코우타를 따라 들어갔다.

 

". 여기가 내 방. 둘이 살기엔 좁겠지만 넌 원래 창고에아니, 창고라니. 하아. 교수님도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지. 너무한 거 아냐?"

 

카이토는 코우타를 빤히 바라보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밀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썼지만, 코우타는 카이토의 몸짓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있었다. 코우타의 방에는 커다란 책장이 공간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언어학의 역사. 음성학. 음운론. 언어 치료학. 의미론. 어휘의미론. 다양한 주제의 책의 제목을 눈으로 읽어 내려가던 카이토가 코우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코우타가 도데체 뭘 하냐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카이토는 대답을 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다. 부끄럽게도 입을 열고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음절뿐이었다. 한없이 소리에만 가까운 말이다. 의미를 전하지 못하는 것은 괴로웠다.

 

"아아…․"

". 그래서 뭐. 의자는 하나 밖에 없으니 침대에 앉아. 바닥에 앉든지. . 으음. 집을 좀 치울걸 그랬나. 치울 시간이 없었어. 잠시만, 난 화장실 좀."

 

-제가 집을 청소할까요? 언어 기능 외에 다른 모든 기능은 정상입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침대에 앉아있던 카이토가 쪽지를 내밀었다. 안드로이드 특유의 인쇄한 듯 각에 잡힌 히라가나와 한자였다. 언어에 대한 기본지식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코우타가 원한 것은 언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상태에서의 언어 발생이었다.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쓸 모양새는 많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소우지 교수에게 물든 것이다. 최악의 인간말종이다. 코우타는 자기혐오로 머리카락을 헝클며 세게 잡아당기더니 이내 카이토에게 억지미소를 지어 보였다. 교수님이 시키는 것만 하면 된다. 추천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올해 졸업은 이미 불가능하지만, 내년에는 제대로 졸업해 보여야한다. 언어학계는 좁다. 가족을 먹여 살리진 못하더라도, 손을 벌리는 건 졸업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는 말이 통하니 다행이야. 집은 치우지 않아도 괜찮아. 어차피 며칠 뒤에 원상 복귀되거든."

-그렇다면 또 치울게요.

"너의 일은 청소가 아니야. 나는 코우타. 너는 카이토. 우리의 목표는 2개월 안에 너의 제대로 된 언어 사. 말을 하게 되면 교수님이 좋아하실거야. 나한테도 좋고."

-알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려요.

"좋아…․ 막막하지만. 언어 지식은 있으나 발음하지 못한다. 발성기관의 문제는 아니란거지."

 

카이토는 코우타를 바라보며 메모지를 가리켰다. 남은 메모지가 한 장 밖에 없었다. 흐응. 코우타는 카이토에서 메모지를 빼앗았다. 메모지를 빼앗긴 카이토는 잠시 놀라더니 곧 무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입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말해봐. 주세요. 라고."

"아아…․"

"..."

"."

"자음의 발음이 전혀 없어. 혀와 입술이 움직이지 않아. 사람으로 치면 너는 머리와 혀나 성대로 이어지는 부분이 망가진 셈이야. 이렇게 세부적으로 망가질 수도 있어? 로봇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라."

 

카이토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답답한 건지, 슬픈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아마도 카이토에게 두 감정의 표정은 같을지도 모른다. 혀와 입술은 장식품이다. 안드로이드의 음성은 사람처럼 복잡한 방법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입력된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것에 불과하다. 그 정도는 안드로이드의 발성에서 기본 정보인데. 카이토는 머릿속에 떠올린 정보를 생각하고 몇 번을 웅얼거리다 붉어진 얼굴로 다 쓴 메모지를 책상에 올려두었다.

 

카이토가 챙겨온 작은 종이가방에 들어있던 유일한 짐인 자신의 충전기를 꺼내 벽의 콘센트에서 충전할 동안, 코우타는 책상에 놓여있던 노트북을 켜고 어제 하다 만 논문 파일을 열었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이런 엉망진창인 논문을 진행하는 것도 머리가 깨질 참인데 말도 안 되는 개인 과제라니. 교수님은 날 올해 졸업시킬 생각이 죽어도 없었음이 분명하다. 논문 파일을 잠시 접어두고 인터넷에서 보컬로이드의 노래를 검색했다. 일반적인 보컬로이드의 발성법을 알아야 새로운 언어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거. 네 기종의 노래다."

 

노트북에서 자신과 비슷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카이토는 관심이 있는지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영상 속의 카이토를 바라보며 똑같은 얼굴의 카이토가 ''로 구성된 노래를 했다. 목소리의 색과 모양은 달라도 기본은 같은 것이다. 교수님이 말했듯이 흥미로운 주제임은 분명하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설을 떠올렸다. 카이토가 영상을 켜둔 채로 메모장을 켜 자판에 빠르게 무언가를 쳤다. 무지하게 빠르잖아. 코우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노래하고 싶어요.

"말할 수 있게 되면 노래도 할 수도 있지. 말하는게 우선 아닐까?"

-말하게 되면 노래를 할 수 있죠.

"네가 노래를 하도록 만들어진 거라면."

 

카이토의 눈동자가 커졌다. 코우타는 교수님이 하듯 카이토의 머리를 쓰다듬다 문득 카이토의 키나 덩치가 본인의 것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이토는 커다란 개처럼 따르는 모양새가 여타의 무표정한 안드로이드와 달라 보였다.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만 수행하는 리빙 안드로이드 종류보다는 애완 적인 느낌이 들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가 아닌 여흥을 위한 종류라 그런 특성을 부여한 것일까. 코우타는 오묘한 기분으로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잠깐. 말을 못하는 거지 지능까지 떨어 진 아니잖아?"

-친애의 표현은 언제나 기분이 좋아요.

"표현이 좋은 아니라 친애 쪽이 좋은 거지? 교수님이 자주 해주든?"

-초기 기동시. 그리고 오늘 오전에 한번.

", 그렇군. 그런 사람이지.“

 

코우타는 노트북에 다른 카이토가 부르는 노래를 이어 재생했다. 그리고 책상 옆 침대에 앉아 멜로디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는 카이토에게 휴대폰의 메모장을 켜서 주었다.

 

"언어를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건 어떤 기분이지?"

-살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린 기분이에요.

"그렇군. 너는 노래하는 것이 이유이기 때문에. 낭만적인 삶의 방식이야."

-긍정적인 의미인가요?

"딱히. 하지만 내가 널 교육해서 네가 노래 할 수 있게 된다면, 무척 낭만적일 거란 생각은 들어. 너의 음색이 나쁘지 않거든."

-그런 날이 반드시 오면 좋겠네요.

 

카이토는 슬그머니 웃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린 모습으로 코우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코우타는 노래를 좋아하나요? 코우타는 그럭저럭. 고개를 까딱였다. 그거면 되었다는 듯, 카이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코우타는 언어 교육학이나 재활에 관련된 책을 읽고 쓸 만한 연습법을 몇 개 만들었다. 카이토를 위해 2세 아동들이 배우는 단어 책을 인쇄했다. 어린아이 취급에 카이토는 잠시 싫은 얼굴을 하더니 단어 책을 받아들었다. 논문 쓰는 것을 잠시 미뤄뒀다 하더라도,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코우타는 여전히 학부생들의 과제를 밤새워 채점해야했고, 시험감독을 해야했고, 거만한 시간강사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 새벽에 들어와 아침에 기절하듯 침대에 누으면 정신을 잃었다 깬 듯 순식간에 아침이었다. 오전 늦게 푸스스 몸을 일으키면 카이토는 동그란 의자에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단어장을 넘기며 발성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둥근 소리만 말했다. 한 달이나 되었으면 어느 정도 발전이 있을 줄 알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앞에 앉혀두고는 크게 아. . . . . 하고 말하고는 그때마다 혀는 이렇게, 이곳에 붙이고. 구조가 잘못된 거니? 카이토의 입안은 사람의 입 안과 다를 것 없이 평범한 구조이다.

 

". 아아, ."

"혀를 사용하라고. 입천장도. 어윽죽겠다. 피곤해서눈 아파…․"

""

"왜 연습하다 말아? 지쳤어?“

-전 지치지 않아요.

그러냐. 그럼 계속 하라고.”

 

침대에 누워 밀린 메시지를 확인하던 코우타는 어느 샌가 다시 멈춘 카이토의 연습소리에 눈을 돌렸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메모지에 무언가를 길게 적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자세가 곧바르다. '앉다.'는 단어를 완벽하게 표현하면 이런 모양일 것이다. 코우타는 침대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메모를 훔쳐보았다.

 

-가르쳐 주신대로 시도해 보았지만,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저의 문제는 수리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됩니다.

"누가 그래? 이제 한 달 정도잖아. 사람의 아이는 완벽하게 말을 하는 데 3년이나 걸린다고."

-3년은 너무 길어요. 안드로이드의 수명은 최대 10년이라고요.

"2개월이면 돼. 동영상에서 봤던 것처럼 노래하고 싶잖아. 바이러스 때문에 말 못 하게 된 게 억울하지도 않아?"

 

바이러스. 카이토는 으으, 하고 싫은 소리를 했다. 그러나 코우타의 짐작도 카이토와 같았다. 카이토의 언어체계는 혀나, 입술이나, 성대의 문제가 아니라 프로그램 자체의 영구적인 손상이다. 차라리 구조적인 문제라면 부품을 수리하면 쉽게 해결될 일이다. 교수님이 원하는 것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라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바램은 바램이고. 무는 무이고, 유는 유이다. 이미 손상된 논리회로를 복구하는 것은 뇌사인 환자를 깨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건 프로그램을 초기화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교수님은 무슨 생각인 걸까. 그는 코우타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언어학이라는 학문을 마치 과학처럼 실험하고 분석한다. 물론 넓은 관점에서는 언어학은 충분히 과학적이지만, 사회학적인 면이 더 큰 편이다. 낭만이나, 언어의 아름다움 따위는 교수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언어학자는 문학도가 아니라는 전제가 교수에게는 있었다. 물론 코우타는 소우지교수의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바이러스는 어쩌다가 걸린 거지?"

"으응…․"

"으응?"

 

코우타는 으응? 어엉? 하고 카이토의 의뭉스러운 발음을 따라했다. 기술적인 문제였다고 말하더라고 기계적인 부분은 전혀 알지 못하는 코우타로서 그저 그렇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카이토는 이리저리 망설이는 표정만 지어 보이더니 끝내 이유를 적지 않았다. 안드로이드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지. 코우타는 스스로의 해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래전에 보낸 문자의 대답을 읽었다. 로봇공학실을 다니는 스즈키에게서의 짧은 메일이었다.

 

-발성은 되는데 언어기능만 고장 난 안드로이드라고? 어째서 그런 신기한 물건을 너 같은 인문대생이 가지고 있는 거지? 우선 메일의 대답을 하자면, 나는 요즘에도 죽을 듯이 바쁜 나날이야. 로봇공학실에 침낭을 새로 들였어. 집에 못 간 지가 일주일이 넘어서 세는 걸 포기했지. 방세가 아까워 방을 빼고 싶을 정도야. 하지만 네가 말한 물건은 엄청나게 궁금증이 생기는데. 시간이 된다면 로봇공학실에 데려올 수 있겠어? 나는 항상 로봇공학실에 있으니까.

 

눈물 나는 메일이다. 심지어 보낸 시간은 새벽 342분이었다. 그때까지 깨어있었던 건지, 자다가 일어 난건지 알 수 없지만, 눈을 뜨고 있었다는 게 슬픈 시간임은 분명하다. 코우타도 카이토의 문제가 언어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을 인정했다. 코우타의 능력이나 카이토의 연습이 부족한 탓이 아니다. 처음부터 해결 방법이 잘 못된 것이다.

 

"카이토, 잠시 외출할까?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지."

"…․"

"심심하지 않아?"

 

-이 방이 마음에 들어요.

 

"엉망진창인 내 방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한데. 심심해서 외출하자는 건 청유형 발화인 거고, 실제로는 그냥 나가자는 거야."

"아아."

 

카이토는 민망한 듯 살짝 웃더니 교수가 사준 두꺼운 남색 구제코트를 찾아입었다. 묘하게 정장 같은 옷을 사주었단 말이지. 그것 또한 교수의 취향 중 하나일 테다. 보이는 것. 격식. 그러나 새로운 것. 신기한 것. 누구도 하지 않은 것. 거만할 정도로 높은 호기심. 오만한 지식욕의 화신.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 코우타는 늘 입는 기모가 두둑이 든 후드를 입고 어기적거리며 학교로 향했다. 로봇공학실은 학교의 많은 후원을 받기 때문에 정문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넓은 유리로 된 공학관 앞에는 뜻 모를 조각품이 커다랗게 서 있고, 여러 대회와 유수의 기업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는 현수막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낡은 갈색 벽돌로 만든 인문대 건물과는 명확하게 빈부 격차가 느껴진다. 여전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카이토를 붙잡아 로봇연구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자 여전히 퀭한 얼굴의 스즈키가 실실거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야. 오랜만. 우리 둘 다 학교의 지박령이면서, 보기 어렵네."

"그러게. 논문은 잘 되어가? 잘되어 가는 표정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교수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점만 빼면. . 이게 그 안드로이드?"

"어엉. 보컬로이드고, 카이토라는 기종이라서 카이토라고 부르고 있어. 목소리는 있는데, 말을 못해."

"호오. 어째서일까. 시스템점검을 해봐도 될까?"

 

스즈키는 이미 카이토의 여기저기를 만지고 있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하는 카이토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스즈키는 카이토의 덥수룩한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잡아 목 뒤에 있던 기종번호를 확인하고, 자신의 휴대폰에 검색해보더니 고개를 숙여 카이토의 눈을 쳐다보고, 손을 만져보고, 목울대도 만져보았다. . 으으. 하고 싫은 소리를 내는 카이토가 코우타를 울먹이는 눈으로 바라보자 코우타는 스즈키의 뒷머리를 소리 나게 후려쳤다.

 

". 꼭 그렇게 변태처럼 해야 해? 시스템 점검?"

"하하하! 미안. 그런 건 아냐. 공학실로 들어가자. 일단 외적인 문제는 전혀 없어 보여."

"바이러스 때문이라는데. 내가 뭘 알아야 말이지."

"책만 읽는 선생님이 공학의 세계를 이해할 리가-."

 

스즈키는 비밀번호 패드를 누르고 공학실의 문을 열었다. 바닥에는 전선끄트머리가 먼지처럼 굴러다니고 커다랗고 비쌀 것이 분명한 슈퍼컴퓨터 몇 대와, 작업하는 용접실도 있다. 언제 봐도 으리으리하군. 코우타의 말에 스즈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봐야 사람을 갈아 넣어서 인공지능을 만드는 작업실이야. 그리고는 카이토를 동그란 의자에 앉히고 목 뒤에 있던 패널을 깊게 눌러 열었다. 사람의 피부와 똑같은 색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USB를 넣는 단자가 세 개 있었다. 코우타는 신기한 듯 패널을 쳐다보았다.

 

"신기해? 충전할 때 항상 보였을 텐데."

"카이토가 충전하는 걸 보고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하하. 전체 시스템 점검을 해야 소프트웨어 문제를 파악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마스터키가 있어야 해."

"그게 뭐지?"

"주인만 알고 있는 카이토의 비밀번호 같은 거지. 컴퓨터 계정을 접속할 때 필요한 것처럼."

"교수님한테 물어볼 순 없어. 공학실에 온 것도 알면 난리 날 텐데. 카이토는 모르는 거야?"

"컴퓨터가 본인 비밀번호를 어떻게 아냐. 멍청한 질문 하지 마. 모르더라도 해킹하면 어느 정도는 가능하긴 한데…․"

 

스즈키는 카이토와 연결된 컴퓨터의 키보드를 빠른 속도로 누르더니 알 수 없는 프로그램들을 여러 가지 열어 무작위로 된 영어로 이루어진 코드를 쳤다. 그것에 반응하듯 카이토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파란 눈동자는 회색으로 깜빡이며 이내 눈을 감고 종료하듯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 키라는 건 그 키보드에 쳐야 하는 거야? 글자 수를 알아야 해?"

"안드로이드 본체가 알아들을 수 있다면 음성인식도 가능하지."

"그렇군. 그렇다면…․ 프리드히리 빌헬름 크리스티앙 카를 페르디낭 프라이허 폰 훔볼트."

"뭐라는거야...여기에 철자를 쳐봐. 카이토는 이미 대기모드인 상태야."

"교수님이 가장 존경하는 언어학자 이름. 아마 맞을지도."

"세상에. 맞잖아! 그걸 설정해놓는 교수님이나, 그걸 기억하는 너나."

"넌 모르겠지만 언어학에서는 베토벤 같은 사람이거든."

 

스즈키는 듣지 않고 있었다. 두꺼운 뿔테안경을 코끝까지 내려 모니터를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고, 카이토는 의자에 앉아 잠든 모습이었다. 코우타는 공학실을 돌아다니며 만들다 만 로봇 팔을 만져보기도 하고, 벽에 걸린 사진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스즈키가 얼마 전에 나갔던 해킹대회에서 찍었던 사진도 있었다. 꾀죄죄한 스즈키와 공학실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인 작은 아이모양의 안드로이드를 안고 즐거운 모습이었다. 스즈키의 졸업작품이기도 한 그 안드로이드를 코우타도 한 번 본적이 있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것과는 대화의 깊이나, 방향이 비선형적이었다. 마치 어린아이와 대화하는 것 처럼. 더욱 인간답게. 스즈키가 소속되어있는 공학 팀의 목표였다.

 

"이거 좀 이상한데. 시스템적인 문제도 전혀 없어."

"그럼 뭐가 문제야? 왜 말을 못하는 건데?"

"언어중추는 잘 살아있어. 만약 거기에 문제가 생긴 거 라면 카이토는 '언어'에 대한 지식조차 없어야 한다고. 회로적인 문제도 아니고, 언어알고리즘도 살아있는데. …․"

"알 수 없는 말로 설명하지 말라고. 카이토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어야 내가 추천장을 받는단 말이야."

". 정말? 그럼 좀 더 살펴볼게. 추천장이 걸려있다면…․ 그 교수님 참 성격 이상하다."

"하루 이틀일이냐. 괴짜 중의 괴짜야.“

그 밑에서 남아나는 너도 괴짜라고. 이미.”

 

20분 뒤. 스즈키는 역시 소프트웨어적인 문제는 없어. 하고 단정 지으며 연결된 전선을 뺐다. 다시 카이토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어색한 미소로 패널을 닫으며 뒷덜미를 만졌다. 스즈키와 코우타를 번갈아 보더니 일어나 코우타의 옆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메모할 종이를 찾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마땅한 도구를 찾지 못하자 코우타의 손바닥에 글씨를 손가락으로 그렸다. 간지럽잖아. 코우타는 작게 웃으며 카이토의 머리를 주먹으로 살짝 쥐어박았다.

 

"아닌가요? 내가 어떻게 알아?"

"일단 소프트웨어 문제가 아니라면 바이러스가 아니란 거지. 그러면 이런 방법. 이때까지 카이토에게 쓰였던 코드를 모두 말하게…․ 아차. 말을 못하지. 매크로를 좀 볼까. 로그 데이터도 이미 이 컴퓨터로 다 빼놨지."

"이 알 수 없는 영어들이 매크로야? 맙소사. 로그는. 이런 사소한 정보까지 다 저장이 된다고?"

"문과는 이래서 문제야으음…․ 이 쪽 정보에는 별로 특이한 게 없네."

"결론은 뭐지?"

"하드웨어 문제나, 소프트웨어 자체의 문제도 아니라는 거지. 도움이 못 돼서 미안."

"그렇군. 빌어먹을…․ 가서 발성연습이나 해야겠어. 다음에 시간나면 술이나 하자고.“

"기약 없는 약속 관두고 나가서 담배나 한 대 같이 피고 가지."

"담배?"

 

코우타는 카이토의 어깨를 툭툭 치고 턱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너를 다시 집에 데려다줄 시간이 없어서 함께 가야겠어. 언어학연구실에 가있어. 지금시간이면 아무도 없을 거야. 나는-. 담배 피우고 따라갈게. 카이토는 고개를 끄덕이고 총총거리며 걸어나갔다. 로봇공학실의 자동 유리문이 닫히고 카이토의 인영이 사라지자 코우타는 코웃음을 쳤다.

 

". 나갔으니까 말해봐. 저거 뭐가 문제인 거지? 담배도 안 피우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나 했네."

"보컬로이드의 인공지능은 인공지능 중에서 엄청 쉬운 편인데, 저런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는 건 말도 안 돼. 바이러스는 그렇게 섬세한 게 아니라구. 소프트웨어 자체를 파괴하던지, 메모리 초기화를 하던지. 단지 하나의 기능만을 파괴하는 바이러스는 존재하지 않아. 카이토가 교수님의 소유가 된 게 1개월 전인데, 만들어진 지 1개월밖에 안 된 새로운 기기가 저런 엄청난 결함이 생긴다고? 그렇다면 왜 본사에 버그 리포트가 넘어가지 않았지?"

"교수님이 신기하다고 생각해서 창고에 놔두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무선인터넷이 막혀있네…․ , 너희 교수님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 말해봤자 뭐하냐. 난 이만 가볼게."

"그 마스터 코드, 간단한 프로텍트 정도는 풀 수 있는 거니까 여러 가지 시험해봐."

 

무슨 말이야. 코우타는 뒤돌아 나가다 다시 물었다. 스즈키는 메일로 보낼 테니까 읽어봐. 하고 대답하며 어서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언어학연구소에 가 있으라던 카이토가 아직도 복도 한 쪽에 서 있었다.

 

"왜 안 갔어. 먼저 가 있으랬잖아. ? 그래 손 달라고."

"같이가고 싶어서하긴. 네 주인은 교수님이니 내 말을 들을 이유는 없겠지. 가자."

"…․"

". 아 말고 다른 말을 해야 한다고. !! 나 그래!! 처럼!!! 난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어. 널 교수님에게 돌려주어야 할 때야. 우린 실패했어.“

아아..”

 

코우타의 화난 목소리에 카이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모습으로 소우지 교수에게 돌려진다고 해도 다시 창고신세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귀찮아서 반품을 한다 던지, 다시 되파는 귀찮은 과정을 감안할 사람이 아니다. 코우타는 졸업작품전에서 스즈키에게 이제 저 안드로이드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다.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아이 모습이 귀엽다고 사랑받는 장면을 본 후였다. 스즈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폐기해야지. 시범작일 뿐이야. 하고 대답했다. 코우타는 그때의 먹먹한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걸어가는 길이 제법 쌀쌀하다. 이른 오후라 햇살이 비치긴 해도 산 중턱에 있는 학교부지에는 장황한 바람이 얼굴에 맞선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던 코우타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도서관 앞에 있던 벤치로 걸어갔다.

 

"앉아봐.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언어학연구실이 어디인 줄은 너보다 더 잘 아니까."

"…․"

"네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청각적인 자극이 부족해서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말하는 건 노래처럼 완성된 언어 자극이 아니라. 기본적인 청각적 자극 말이야."

"눈 감아봐. 이 세계는 소리로 가득 찬 세계라고. 소리. 음성. 언어. 소리를 공기라고 생각하면 음성은 발성되는 소리인 거고, 언어는 뜻을 가진 소리인 거야. 네가 무엇을 모르는 건지 생각해보라고. 지금 뭐가 들리지? 바람소리. 사람들이 걷는 소리. 발걸음소리. 내가 말하는 소리…․ 네가 해야 할 노래라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조합이라고. 소리를 이해하고, 음성을 마음대로 조절하면서 언어를 담는 거야."

 

언어란 신기한 것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게 되면 새로운 뜻, 의미, 의미 속의 의미, 그것과 다른 의미에 대해서 세계가 넓어진다. 코우타는 교육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이 언어라고 생각했다. 언어는 생각을 확장하고 모르는 의미에 대한 빙산을 깨뜨릴 수 있는 망치이다. 비유는 닳고 닳았지만, 문맥에 따라 천만의 뜻을 가진다. 눈을 감고 있는 카이토 얼굴 밑으로 나무 그림자가 흔들렸다. 코우타는 휴대폰으로 스즈키가 보낸 메일에 있던 첨부파일을 열었다. 마스터키를 해제하는 법. 다시 말하면 교수에게서 잠시 주인자격을 가져올 수 있게 하는 해킹방법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스즈키다운 해결 방법이다. 고개를 숙이고 길게 적힌 글을 손가락으로 넘기며 읽었다. 그걸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건가. 그렇다면 해킹이라고 하지 않겠지. 교수님이 원한 바는 이런 것이 아니다. 코우타는 여전히 눈 감은 채인 카이토를 불러 손을 가져갔다. 손에다 쓰라는 의미였다.

 

"스즈키가 그냥 널 해킹하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상관없어요? 상관없다고? 그렇게 되면 더는 교수님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거야. 그리고 교수님이 원한 건 네가 언어를 배워서 말을 하게 되는 것이지, 해킹으로 하란 말은 아니니까."

-저도 마스터의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요. 마스터에게 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최소한 여흥 거리라도 되었으면 해서.

"뭐야 그 자격지심은. 일단 연구실로 가자. 오늘까지 해야 할 게 있어.“

 

 

***

 

 

비어 있을 거라 생각한 언어학연구실에는 놀랍게도 소우지 교수가 있었다. 그는 커다란 책상에 홀로 앉아 영어로 된 논문을 읽고 있었다. 목요일 오후에는 수업이 있을 텐데. 코우타는 살짝 놀라는 투로 교수에게 인사했다. 카이토는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교수님. 수업은?"

"아아. 오늘 휴강이라네. 언어학과 행사가 있다고 하더군.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는데, 아무도 없어서 막 나가려는 참이었지."

"그랬군요."

"그래서, 요즘 통 모습을 보지 못했네. 내가 준 과제는 잘 되어 가는가?"

"여러 가지 시도해보고 있긴 한데, 잘 되진 않네요. 아무래도 사람이 아니라서 다른 방법이…․"

"허허. 그렇군. 아직 이라…․ 얼마나 되었지? 3주 정도로군. 어떤 것을 알아냈지?"

"직접적인 언어중추가 망가진 게 아니라는 것. 발성과 기본 모음의 발음은 된다는 것. 의미적인 부분은 전혀 훼손이 없는 상태라는 것정도입니다"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구먼. 군도, 카이토도."

 

교수는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웃었다. 웃음이지만 보는 이를 유쾌하게 하는 종류는 아니다. 카이토는 교수를 두려운 얼굴로 응시하면서도 코우타의 등 뒤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체벌을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처럼 불안한 얼굴이었다. 코우타는 카이토를 지켜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라면 흥미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다 쓴 휴지를 버리듯 카이토를 창고에 내팽개쳐둘게 선명하다. 교수님이 처박아놓은 다른 여러 참고 자료처럼.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랐는지도. 군의 시간을 너무 잡아먹은 건 아닌가 걱정이 되네."

"그렇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나는 먼저 가보겠네.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

 

교수는 각진 걸음으로 몸을 돌리더니 눈을 흘겨 카이토를 슬쩍 쳐다보고는 이내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구두에 군더더기 없는 발소리다.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던지, 코우타는 저도 모르게 깊게 한숨을 뱉어내고는 마찬가지로 진땀을 흘리고 있는 카이토와 눈빛을 나누었다.

 

"휴우…․ 아무리 자주 만나도 익숙해지지 않아."

 

카이토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코우타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카이토와 공범이 된 듯 한 기분. 로봇 공학실에 갔던 것을 비밀로 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교수는 이미 코우타에게서 기대를 접은 얼굴이었다. 차라리 그쪽이 나았다. 교수는 카이토가 말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흐음.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 것이다. 그런 건 너무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우타는 카이토의 어깨를 양팔로 잡고 바라보았다.

 

카이토, 잘 들어봐. 이건 너의 마스터인 교수님을 격하하는 의미는 아니지만, 소우지 교수는 네가 말하는 것에 크게 관심이 있지 않아.”

-어째서 그렇죠?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그냥 내가 고민하고, 이것저것 시도해보다 머리가 터져버리길 바라는 사람이라고.”

-마스터는.

네가 말을 하고, 노래한다고 해서 마스터가 좋아할까? 물론 그러면 해피엔딩이겠지만. 그럼 그걸로 끝이야.”

-그렇지만, 마스터가.

마스터, 마스터 이야기 그만하고. 네 생각을 말하라고. 소우지 교수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건 네 잘못이 전혀 아니야. 네가 말을 하든, 노래하든, 교수님이 시키는 어떤 일을 하든 마찬가지라고. 넌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진거니까. 교수님은 기뻐하지 않아.”

 

카이토는 금방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너무 정곡을 찔렀나. 교수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카이토에게 쏟아 낸 것일 뿐이다. 그렇게 말 한다고 해서 카이토에게 달라지는 건 없다. 코우타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코우타는 잡았던 팔을 놓았다.

 

미안. 널 구해주는 건?

 

카이토가 코우타의 놓은 손을 쫓아가 잡았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엄청난 힘으로 코우타의 손을 잡아당겨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보호 기제처럼 간절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코우타의 머릿속에서는 스즈키가 만들었던 어린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험작이라니.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코우타의 물음에 스즈키는 역시 인문대생은 감성적이라고 대답했다.

 

제 프로텍트를 풀어주세요. 저의 마스터키를 말씀해주세요…․ 그래도 괜찮겠어? 네가 더 괴로워 질수도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끝나는 것 보다는, 괴로운 쪽을 선택할래요.

"..프리드히리 빌헬름 크리스티앙 카를 페르디낭 프라이허 폰 훔볼트."

"---."

"프로텍트 검색?"

"-----."

PROTECT ORDER-1.

 

DO NOT SPEAK ANYTHING.

 

코우타는 카이토의 눈 사이로 지나가는 검은 화면에 뜬 글자를 읽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말 것. 의미를 머릿속에 떠올리고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무슨말이야? 일단 해제해줘."

"프로텍트가 해제되었습니다.“

". 이게??“

"프로텍트가 해제되어서 제게 걸린 명령이 해제되었어요."

"말을 할 수 있었어?"

"코우타님이 말씀하셨듯이, 그런 식의 고장은 불가능해요. 저는 뇌를 가진 사람이 아니니까요."

"당장 따라와. 교수님한테 가야겠어.“

잠시만요. 코우타님?”

 

가봤자 무슨 소용이 있죠? 카이토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코우타는 카이토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이건 장난도, 실험도, 연습도 아니다. 저열한 화풀이에 불과하다. 코우타는 소우지교수의 방문을 세게 두드렸다.

 

"교수님. 접니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금방 보았는데 무슨 일이지? 들어오게나."

 

코우타는 눈을 치켜뜨며 카이토를 교수의 앞에 세웠다. 소우지 교수는 태연하게 그를 맞으며 손으로 2인용 소파를 권하고, 다시 커다란 자신의 책상에 돌아가 앉았다. 표표한 미소를 지으며 구미가 당긴다는 듯 그래. 어디. 하고 말문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거립니까? 바이러스? . 그 말을 믿은 제가 멍청입니다."

"인문학도인 자네가 선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해하네."

"왜 이런 일을 하신 거죠? 제가 간절하게 필요한 것을 걸고서라도 이 장난 같지도 않은 일을 하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군의 삶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 말 돌리지 마십시오."

"군은 말을 배우기 위해 애썼던 때를 기억하는가? 물론 너무 어릴 때라 기억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미친 듯이 보이는 모든 것을 배우려고, 읽으려고, 말하려고 했던, 지식욕에 불타던 어느 때가 있었을걸세.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네. 안드로이드라는 것이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얻은 존재가 아닌가. 그들은 만들어질 때부터 완성된 존재야. 인간의 손에 만들어졌지만, 인간을 기만하는 존재일세."

 

코우타는 입을 다물었다. 교수의 눈빛이 향하는 곳이 자신이 아니라 카이토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없는 깊은 증오, 혹은 부러움, 시기처럼 부정적인 감정이 섞여 시꺼먼 눈동자였다. 소우지 교수는 카이토를 줄곧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토는 원인 없는 증오와 싸우고 있었다. 이것은 코우타와 소우지교수의 일이 아니다. 카이토와 소우지교수의 일이다. 카이토는 고개를 돌려 코우타를 한 번 바라보더니, 기가 막힌 듯 혀를 차는 소우지 교수를 노려보았다. 카이토에게 그런 적대적인 표현이 가능한 줄은 코우타는 알지 못했다. 하물며 상대는 자신의 소유자였다. 소우지 교수는 웃긴다는 듯 더욱 경멸 어린 눈빛을 지었다.

 

"그건 마스터만의 생각이라고 저는 말했어요. 그렇다면 증명해 보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프로텍트를 걸었죠. 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너 따위의 대답을 어째서 들어야 하지? 게다가 물론, 성공하지 못했지. 나의 승리야. 자네를 나의 이론에 대한 증거품으로 사용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네만, 나는 자네가 이 일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추천서를 써줄 예정이었다네. 이 정도의 상은 당연하지."

"당신, 카이토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그야 알고말고?"

"제정신이 아니시군요. 소우지 교수."

 

코우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교수는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자네라면 날 이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유감일세. 그만 나가보게나. 교수의 마지막 말은 닫히는 문 사이로 잠식했다. 인간의 호기심이란. 오만하고 쓸데없는 호기심이란. 구역질이 난다. 분노와 알 수 없는 동질감이 불러온 혐오. 무지에의 후회. 코우타도 언젠간 소우지 교수처럼 생각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무한의 세계를 다운로드 하나로 습득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를 부러워하다 못해 경멸하게 되는 날이. 이해하지 않아도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나는 카이토에게 어떤 짓을 한 거지?

코우타는 벽도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2개월간의 후회가 무겁게 밀려왔다. 증명할 가치 없는 것에 목을 매달고 버둥거리던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코우타님. 괜찮으세요?"

 

조용히 교수연구실의 문을 닫고 나온 카이토가 코우타에게 종종걸음쳐왔다.

 

내가 교수의 손에 놀아나서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어.”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어요."

"아니야, 틀렸어. 가장 상처받은 건 너야."

 

카이토는 코우타의 어깨에 가져갔던 손으로 세게 움켜쥐려다 손가락을 하나씩 꺾었다. 코우타가 나간 뒤 교수는 눈을 돌리지도 않은 채로 카이토를 응시했다. 여전히 환멸에 가득 찬 눈동자. 나는 발성 기관도 없는 것들이 말이랍시고 스피커를 웅웅 대는 게 싫어. 마스터가 이 쓸모없고 시답잖은 장난을 계획한 이유도 그것이군요. 카이토는 조소한다. 불쌍한 사람. 저의 손을 깨물어도 아픈건 아픔을 아는 마스터뿐이에요. 소우지 교수는 눈썹을 까딱였다.

 

언제부터 마스터한테 그렇게 대들어도 된다고 배웠지? 코우타가 그러든?”

"누구에게도. 저는 당신이 그렇게 증오하는 안드로이드잖아요?"

"머리 검은 짐승은 들이는 게 아니다. 그런 옛말이 있지."

"그런 비유는 저에게 전혀 통하지 않아요. 마스터가 가지고 논건 제가 아니라 코우타님이고, 전 그것이 매우 불쾌해요. 마스터를 호감으로 인식하게 하는 저의 시스템을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건 어떤 의미지?"

"제가 마스터보다 코우타님을 더 중요개체로 인식 하겠다는 뜻이죠.“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건가?”

마스터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카이토는 해킹프로그램을 유지하기 위해 집중했다. 그리고 하나만을 생각했다. 내가 불러주는 노래가 듣고 싶다고 했던 사람. 노래가 얼마나 복잡하고 아름다운 것을 함축하고 있는지 말해준 사람. 자신을 위해 괴로워 해주는 사람의 곁에 가고 싶다는 바램.

 

"미안해, 카이토. 변명의 여지가 없어. 존재 이유를 부정 당하는 건 어떤 기분인지나는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저의 존재 이유는 마스터가 아니에요. 마스터는존재의 필수조건에 지나지 않죠. 인간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유전자의 조합이 필요한 것처럼. 저는 당신을 위해 말하고, 웃고, 노래하고 싶어요. 그렇게 해도 될까요? 당신이 나로 인해 웃게 되는 게 제가 원하는 것이에요. 코우타가 저의 마스터가 아니더라도."

"카이토…․"

 

, 내 손을 다시 잡아줄래요? 카이토는 손을 내밀었다.

 

물론 그건 코우타가 제 프로텍트를 풀었기 때문이지만.”

프로텍트를 풀어달라고 말한건 너였잖아.”

코우타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제가 더는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게 뭐야. 진심이야? 코우타는 아까 지나쳤던 중앙도서관 앞을 걸어가며 카이토의 어깨를 손으로 치며 웃었다. 카이토의 목소리는 듣기 좋게 가볍고 약간 상기된 듯 높은 톤이었다. 금방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이토가 소우지교수와 싸우면서 자신의 프로그램을 이겨내기 위해 스즈키가 심어놓은 해킹프로그램의 요소를 모조리 이용했다는 것과, 코우타가 카이토의 마스터키를 막힘없이 말할 때 얼마나 놀라웠다는 것을 높고 낮은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만큼을 다 쏟아낼 모양으로 정문을 벗어날 때 까지 카이토의 속삭임은 멈추지 않았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7/2/11 마스카이 웹온리 절대주종완벽조교]

 

 

Posted by michu615
,

긴히지 / 2508

짧은것/기타 2015. 6. 21. 23:53

2508

 

 

자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보받은 히지카타 토시로는 죽음의 원인이자, 자신의 폐 속을 파고들었다는 외계 생명체의 포자란 것을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혹여나 빠져나오진 않을까 바라보았지만, 연기의 색은 우중충한 하늘만큼 짙은 회색이었다. 임무에 나가서 무엇을 하고 온것이냐고 따져 묻는 곤도 국장에게 자신이 한 것은 숨을 쉰 것 뿐이라고 신경질적으로 받아치자 곧 히지카타는 괴롭게 일그러지는 곤도 국장의 표정에서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국장의 마음을 풀기에도 부족한 시간일 텐데 말이다. 얼마간의 침묵 후에 히지카타는 끄트머리만 남은 담배를 미련없이 재떨이에 던져 넣은 후 입을 열었다.

 

“얼마나 남은 거라고? 포자가 발아해서 폐가 터지기 까지 말입니다.”

“내가 막는다. 신센구미 국장의 이름을 걸고.”

“그 이름은 아까우니까 넣어둬요. 대신 대장의 이름을 걸지. 내일 아침까지.”

“…너를….”

“나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같은 말은 집어치우고. 내가 뒤집어쓰지 않았더라면 부대가 몰살됐을 겁니다.”

 

히지카타는 무거운 공기가 감도는 방을 빠져나와 자신을 이미 시체처럼 쳐다보는 부하들을 뒤로하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가장 시끄러울 오키타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어느 쓸모없는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다. 생각하면 가슴 속에서 초록색 포자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한 구역질나는 감각이 느껴졌다.

 

“해결사. 오늘도 쓸모없는 당덩어리를 먹고 있었나?”

“뭐야, 긴상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고. 그런데 아직 2주가 되려면….”

“이틀이 남았었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와서 불만인가?”

“날짜보다는 시간 말이야. 아직 대낮이라구? 욕구 불만이라도 쌓일 일이 있었나 보지.”

 

이름 없는 관계. 2주에 한 번씩 만나서 유곽의 더러운 작은 방에서 몸을 섞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다고 단정 짓기에는 이끌림의 이유가 없었기에, 행위는 행위로 정의되면 그만이었다. 사카타 긴토키는 단 음식을 입에서 떼지 않았지만 탄탄하고 좋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과거에 가졌던 이름 때문일 것이라고 히지카타는 한바탕의 정사 후에 생각하곤 했다. 정사 후의 끽연은 비릿하고 달콤한 휴식이었다. 새벽이 되면 히지카타는 엉망이 된 몸을 배배꼬며 잠든 긴토키를 남겨두고 유곽의 뒷문으로 나섰다.

 

“담배 피워도 되겠지?”

“이미 불붙이면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마침 오늘 저녁은 아무 일 없으니까 말이야.”

“그런가. 다행이군.”

 

이상한 말투에 긴토키는 잠시 숟가락을 멈추더니, 곧 무신경하게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두 번째 파르페 그릇에 커다란 손을 뻗었다. 그는 무신경하고도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그것은 히지카타에게 편리한 위안이었다. 말이 새어나가지 않을 무겁고도 가벼운 관계를 원했다.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강렬하고 매혹적인 남자. 라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를 최대한 포장하면 그런 식이었다.

 

“오키타가 찾아오면 곤란하거든. 파르페는 꼭 세 개나 먹어야 하는 건가?”

“아침, 점심, 저녁 분이라서. 신센구미의 귀신부장이 곤란한 일이라면-.”

“정정하지. 귀찮거든.”

“귀찮은 건 질색이지. 내가 아는 뒷길로 가는 게 어때. 눈이 꽤 있어. 공주님 취급인걸. 귀신부장님.”

 

거리의 사람들 사이로 눈을 돌리던 긴토키는 입에 물었던 스푼을 내려놓고 의자 옆에 세워두었던 목검을 허리띠 사이에 넣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익숙한 인기척을 벗어나기 위해 히지카타는 좁은 골목길을 여러 개 지나갔다. 앞장선 긴토키의 등을 바라보며 단단한 감각을 회상하기도 했다. 익숙한 유곽의 뒷문에 다다르자 해가 어스름히 지고 있었다. 히지카타는 눈을 곤두세웠지만, 주위에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목구멍 속에 자리 잡은 작은 포자들이 옭아매는 숨결이 생명의 인기척이라면 인기척이었다. 히지카타는 깊은숨을 밀어 넣었다. 포자가 피어나며 자신의 폐를 갉아먹는 것이 느껴졌다. 짧은 숨으로 잘린 조각들이 턱턱 막혀 올라왔다. 긴토키는 탐탁잖다는 표정이었다.

 

“뭐야. 체력이 그 정도밖에 안 돼? 금연하지 그래.”

“괜한 참견은 사양이다.”

“그런가. 들어가지.”

 

그 곳은 일전에 파산해 망한 유곽이었다. 인기척이 없는 건물에서는 낡은 먼지가 풀풀 날려 히지카타는 짧은 기침을 쿨럭이다 유카타의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은 채로 걸어갔다. 감기라도 걸렸나 보지. 등 뒤에서 넌지시 말하던 긴토키는 익숙하게 문이 열린 곳으로 들어갔다. 저번을 지나 2주를 채우기 이틀 전이었다. 방에서는 늘 피우는 담배 냄새가 찌든 이불과 쓰다 남은 콘돔 껍질이 널부러져 있었다. 긴토키는 목검을 방의 한 편에 세워두고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던졌다.

 

“몸 안 좋으면 살살 해달라고 애교정도 피워봐도….”

“그 입은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

“이런 시대에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법이야.”

“그건 맞는 말이야.”

 

유카타의 끈을 풀어내리자 가쁜 숨은 야릇하게 기운을 바꾸어갔다. 무너져 내리듯 긴토키의 품을 파고들며 히지카타는 어느 유곽의 새벽에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면 그것은 이 남자의 손으로 이루어 낼 것이라고. 히지카타 토시로의 마지막 폭주는 조용히 저물어 갔다.





덧. 나타나진 않았지만 하나하키병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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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전선 AU

짧은것/X KAITO 2015. 6. 12. 23:37
그 아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미쿠의 병실에서 나온 카이토는 곰곰이 생각했다. 미쿠의 오빠라 그런지 미쿠와 비슷한 분위기라 그런걸까? 병원 정문의 계단에 앉은 카이토는 스쿠터의 열쇠를 만지작대며 시간을 죽였다. 라이브라로 돌아가려고 예상했던 시간보다 일찍 미쿠의 병실에서 나와 버렸기 때문이었다. 둘은 분위기는 달랐지만 초록빛의 머리칼이나 눈 색, 귀여운 선이 닮아있었다. 오빠라지만 동생이라고 말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어리숙한 느낌이었다.

“우리 오빠, 미쿠오! 카이토, 인사해!”
“으아아……. 안녕. 난 카이토라고 해.”
“헤에. 안녕하세요, 카이토 형이라고 불러도, 될까?”

커다란 안경을 낀 미쿠오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로 허둥거리며 빙빙 도는 이야기만 했다. 카이토는 둘의 대화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미쿠오는 그런 적이 없다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평범한 분위기라서 그런걸까나……. 눈에 띄는 인상도 아니고.”
“착각했나봐, 미안.”
“아냐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셋이서 앉아있던 병실의 1분이 끔찍하게 길었다. 카이토는 어제, 그제의 행적을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다. 눈 색이 초록색이었던가? 착각인가? 저 또래의 남자아이란 다들 비슷하니까. 최근에 생긴 사건들 때문에 눈의 감각도 예민해진데다 카이토가 그 소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공간과 이질적인 느낌. HL의 어둡고 칙칙한 풍경에서 신의 의안은 다소 따분하게 ‘눈’의 역할을 했지만, 언젠가 보았던 그 소년의 느낌은 달랐다. 그리고 카이토는 미쿠오를 보며 순간 그 때를 떠올린 것이다. 신의 의안이 공명하며 활개를 치는 감각을. 

“굳이 말하자면 블러드 브리드...아냐. 무슨 말도 안되는.”
“형, 아직 안 갔네요. 여기서 뭐해요?”
“에에엑?! 미, 미..미쿠오군. 아하하..”
“왜 이렇게 놀래요? 미쿠가 잠들었길래, 나도 가려고요.”
“..그, 그럼. 태워줄까? 어디까지 가?”

미쿠오는 싱긋 웃으며 지하철 역이라면 어디든지 괜찮다고 대답했다. 카이토는 의심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블러드 브리드를 본 후유증이리라. 며칠 동안 카이토는 라이브라의 일원의 기운에도 누군가 눈을 칼로 쑤시는 듯이 타들어가는 감각에 시달렸다. 혈계의 감각은 시각을 넘어선 것이었다. 손에 든 열쇠를 넣어 시동을 걸고 스쿠터에 있던 헬멧을 씌워주자 미쿠오는 스쿠터를 타는 것이 처음이라며, 카이토의 옷을 붙잡았다. 병원에서 가까운 역은 십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였다. 등에 달라붙는 미쿠오의 몸은 미쿠만큼 작고 가벼웠다. 라이브라의 누구라도 한 주먹이면 날아갈 만큼이라고 생각하니 HL의 엉망진창인 도로 위에서 카이토는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자, 도착. 여기까지 태워주면 되는거야?”
“오오. 고마워, 형. 덕분에 빨리 왔어.”
“가는 길인데 뭐. 그럼 다음에 보자.”

형, 뭐 하나 물어 봐도 돼?

다시 스쿠터의 시동을 거는 카이토에게 미쿠오가 다가왔다. 한 번이지만 죽어도 잊을 수 없는 강력한 힘. 미쿠오의 초록색 눈동자에서 언 듯 새빨간 붉은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손을 뻗는 작은 소년의 손아귀에서 세계가 움직이는 듯한 기세가 무겁게 고동쳤다. 살기 아닌 기운에 얼어버린 카이토의 턱을 잡고 눈꺼풀을 벌리자 조용히 신의 의안이 한 겹 두겹 펼쳐졌다. 빛나는 파란색 원형의 궤도가 돌아가며 주변의 시야를 갉아먹고 있었다. 신의 선물이라 수식하기엔 잔인하고 과분하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예쁜 눈이네, 형.”

갖고 싶을 만큼. 붉은 눈동자는 신의 선물을 가진 신에게 버려진 자를 찬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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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존대를 하는 마스카이 



날씨가 좋아요. 커튼을 걷자 봄녘이 다가와 유리창에 물결로 떨어진다. 카이토는 기분 좋게 부쩍 따스해진 거실의 창문을 열어 아침 공기를 맞았다.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가 내쉬고선 방의 한 쪽에 놓인 청소기를 손에 잡았다. 아침에 먼저 일어나면 창문을 열고 아침청소, 그 뒤엔 아침 준비, 주중엔 도시락까지. 오늘은 주말이었으니 두 가지만 하면 가장 큰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터-”

우선 주방에서 부르기. 하지만 이 참에 일어나는 일은 드물었다. 알람시계처럼 지정된 일곱 시가 되면 자동으로 눈을 뜨게 되는 카이토로서는 잠을 자도 잠이 온다는 마스터의 말이 와 닿지 않았다. 아침 준비를 끝내고 커피를 내릴 때 마지막으로 마스터를 나직이 부르던 카이토는 앞치마를 벗어 식탁 의자 위에 걸어놓고 방으로 향했다.

“마스터, 들어갈게요.”

대답이 없어도 카이토는 문을 열어 익숙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침대에 이불과 베개로 뒤얽혀 기다란 팔이나 발이 빠끔히 나와 있었다. 어젯밤에 던져 놓은게 분명한 옷가지를 챙겨들고 카이토는 이불을 살짝 들어올렸다. 무거운 눈꺼풀이 굳게 닫힌 마스터는 잠에 취해 미동조차 없었다. 

“마스터, 부탁하신 아홉시에요. 일어나세요.”
“어엉….”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잠꼬대인지 우물거리던 마스터가 다시 깊은 숨을 들이쉬자 카이토는 침댓가에 앉아 본격적으로 이불을 흔들기 시작했다. 하루쯤은 일찍 일어 날 법도 한데. 아니면 차라리 깨우지 말라고 지정을 해두시면 될 텐데. 

“마스터-마스터. 아홉시 십오 분이에요. 이제 십육 분…”
“어어….”
“일어나세요. 아침 식어요. 네? 아니면, 알람 설정을 미루시겠어요?”
“일어났어어….”

거짓말. 일어났다는 의미로 팔을 들어 휘적거리더니 다시 이불더미로 풀썩 떨어뜨려 숨만 색색거렸다. 지정된 시간에 깨우지 못하는 건 사소하지만 은근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할 일 리스트에서 마스터 깨우지를 아직도 지우지 못한 카이토는 이불을 들어 젖혀 몸을 웅크리고 있던 모양 그대로의 어깨를 흔들다가 귀에 대고 커다랗게 외치기 시작했다.

“마스터!!! 곧 이십분이에요!! 알람설정 그냥 미루세요!”
“시끄러…….”
“정말 맨날 이러 실거에요? 그러니까 일찍 주무시라고 했잖아요!! 일어나보세요!”
“시…끄러워….”
“아악!! 미실행 목록에 계속 뜨잖아요!!! 일어나 봐요!!!”

이십분이 넘어가자 시스템에서는 미실행 목록에 대한 알람이 나타났다. 하고 있어. 있다고. 시스템이 알 리가 없었다. 여전히 늘어진 몸으로 더듬더듬 이불을 찾아 꼼지락대는 마스터가 괘씸했다. 누구 덕에 지정된 일도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안드로이드가 되어 가고 있는데. 한참 동안 어깨를 흔들던 카이토는 잡고 있던 어깨를 던져버렸다. 눈앞에서 미실행 창이 붉은 색으로 깜빡였다. 다른 일에도 굼뜬 마스터였지만 아침에 약한 건 도를 지나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내일은 9시에 꼭 일어나고 말겠다고 부질없는 알람을 지정했다. 시야를 막는 알람으로 고생하는 건 정작 카이토였다. 

“아. 정말, 말 좀 들으라고 몇 번을 말해요. 일어나!!! 일어나라고!!! 일어나서 내가 차려놓은 커피랑 토스트나 먹으라고!!”
“뭐…뭐야….”
“알람을 끄던지, 일어나든지. 하나를 고르란 말이에요! 나도 알람 계속 울리면 머리 아프다구요. 너만 편하면 답니까?”
“응…너…. 너??”
“그래요. 지금 알람에 맞춰 못 일어난 지가 연속 한달은 넘었어요. 마스터 너는 내 말이 같잖습니까? 내가 알람 시간을 늘리자고 몇 번을 이야기해요?”

생각보다 효과는 굉장했다. 까치집이 된 머리로 눈을 커다랗게 뜬 마스터가 충격 받은 얼굴로 끔뻑였다. 헐렁한 후드티 소매로 입을 닦더니 벌떡 앉아서 믿기 어렵다는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손가락만 바들거렸다. 카이토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싱긋 웃었다.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너 지금 나한테 반 말 한 거야?”
“반말이라뇨. 요-라고 했잖아요.”
“너…너라니. 나한테 너라고 했잖아….”
“너는 너죠. 마스터. 오옷. 알람 꺼졌다. 아침 드시러 나오세요.”

후련하게 실행 창을 내린 카이토가 가볍게 종종거리며 걸어 나갔다. 커피는 차갑게 식은 지 오래 된 뒤였다. 싱크대에 차가운 커피를 버리고 서랍을 열어 커피봉투를 다시 꺼내 컵에 담았다. 고소하면서도 쓴 향기가 머그컵에서 퍼졌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토스트를 다시 데우자 마스터는 비척대며 다가와 등 뒤에 눌어붙었다.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로 칭얼거리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알람 미루자…. 그러니까 너라고 하지 마….”
“네에. 알겠어요. 이제 다 했어요. 의자에 앉으세요.”

반쯤 뜬 눈으로 아침을 먹고 나면 나른하다고 낮잠을 자러 들어갈게 분명했지만, 열시 이전에 아침을 차릴 수 있다는 건 큰 수확이었다. 카이토는 자랑스럽게 우유가 든 컵을 홀짝였다. 우유보다 새하얀 낮잠을 자고 나면, 비로소 마스터의 하루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오늘은 낮잠 같이 잘까요?”
“그럴래? 그럼 이거 마시고…. 커피를 마셔도 졸리네.”

마스터 방에 있는 커튼을 걷으면 오전의 햇살이 침대로 곧장 떨어져 눈을 감아도 밝은 빛이 보였다. 거기에 마스터의 고른 숨소리가 가득하면 카이토는 평화롭게 오전을 구름처럼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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