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3월

 

 


3월의 교실에는 어딘가 어색하지만 들뜬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운동장 주위에 심어진 벚꽃과 화단의 꽃들은 고르게 연두색 새싹을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겨우내 조용하던 운동장에는 밝은 표정의 학생들이 저들끼리 모여 운동을 하기도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며, 같은 시간 속에서 다른 기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 몇년째 하고있지만, 처음처럼 새 학기는 긴장되는 일이었다. 복도를 걸으며 손에 든 국어교과서와 참고서 몇권을 가슴팍에 안았다. 방학동안 새로 가르칠 책을 몇 번이고 읽었다. 종종 집에 놀러오던 타스쿠는 연극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맥주캔을 비우기도하고, 실내에서 하는 체력단련을 하며 겨울을 지냈다. 체육교과에 대한 공부는. 츠무기는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체육은 이론이 아니라 실기가 중요하지. 스쿼트자세를 오십다섯번째. 여섯번째. 숫자를 세어가며 백을 향해갔다. 겨울의 회상을 하다 문득 앞을 바라보니 간편한 져지를 입은 타스쿠가 츠무기가 걸어가던 복도 앞에 서있었다. 츠무기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타스쿠에게로 걸어갔다.

"안녕, 타스...가 아니라 타카토 선생님-."
"아직 새학기니까 용서해주지. 츠키오카 선생."
"하하...다음시간은 수업이야? 몇 학년의 수업?"
"아니. 점심시간까지 수업은 없어. 보건수업과 상의할 것이 있어서 보건실에 가는 길이야."
"헤에. 그렇구나. 나는 1학년 수업이야. 첫수업이라..기대되네."
"또 이상한 말에 휩쓸리지 말고. 너도 이제 어엿한 선생님이야. 새삼스럽지만."
"응. 걱정 고마워. 아, 종이 울리겠어. 오후도 힘내, 타카토 선생님."

츠무기는 커다랗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가 들어간 교실은 1학년 B반. 타스쿠는 며칠전 자신의 첫 수업에서 들은 짖굳은 질문을 떠올리다 다시 고개를 저으며 보건실로 향했다. 질문이 있냐는 물음에 첫키스는 언제였냐는 치기어린 질문이 었는데. 그 정도는 츠무기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겠지. 중등 입시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처음 들어온 학생들은 열기도, 호기심도 왕성한 나이다. 츠무기는 유연하게 생긴 외모때문에 얕잡아 보이는 일이 많았다. 곤란에 빠질때 마다 주변에서 치가사키나, 타스쿠가 나서서 츠무기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몇 달이 지나고 나면 학생들도 서로의 일에 집중할뿐, 선생님이 어떻다거나 하는 것은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타스쿠는 보건실 문을 두드리며, 아즈마선생과 셋이서 점심을 먹는다면, 츠무기는 도시락을 싸왔을 테니 뒤 뜰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실내화가 타박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표표한 웃음을 입에 머금은 아즈마가 문을 열었다.

"어라. 후후. 타카토선생님이네. 보건실엔 무슨일로?"
"보건수업과 체육수업의 연계때문에 상의할 것이 있어서.."
"들어와요. 지금 보건실엔 아무도 없으니. 차라도 한잔?"
"감사합니다. 녹차로."

곧 뜨거운 녹차가 담긴 머그컵을 받아든 타스쿠가 커다란 보건실의 창문을 내다보았다. 1층에 있어 운동장이 훤히 볼수 있는 구조였다. 체육교사인 타스쿠의 수업이 없으니, 수업이 시작한 운동장은 조용했다. 아즈마는 드립커피가 든 자신의 머그컵을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새학기가 시끄러우니 좋아. 보건실은 조용한것이 낫지만. 그렇지?"
"뭐. 상비적인 곳이니까요. 응급상황에대한 기본적인 대처를 실기시험으로 해보려 해서."
"좋은 생각이야. 츠키오카선생님은 어딘가 위태한 느낌이라서, 언제 다쳐도 이상하지 않을지도? 라거나."
"그 문장으로 놀리는건 이제 그만 둬줬으면 하는데요."
"아하하. 아니아니. 나도 츠키오카선생을 보면...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으니까. 지켜주고 싶은 성역처럼 말이야."
"성역...입니까."
"어라, 이미 주인이 있는 성역이니까. 멀리서 보는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러니, 무서운 표정은 그만두고 웃어주세요-."
"하아...이래서는.."

타스쿠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눈을 비볐다. 츠무기가 학교에서 컨디션이 나빠질때마다 데리고 간 곳은 보건실이었고, 눈치가 귀신처럼 빠른 아즈마는 둘의 관계를 단번에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가능하면 두 사람이 어릴때 부터 친구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 학교란 없는 소문도 만들어 내는 곳이니 사생활은 숨기는 편이 안전하다. 타스쿠는 가능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츠무기가 그러질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즈마가 말한 위태로워 보인다는 감정은 타스쿠가 지난 몇 년간 츠무기를 볼 때 마다 은연중에 품고 있던 것이다.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아두지 않으면 꺾이거나, 어디선가 등에서 날개가 돋아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붕뜬 존재감이 츠무기에게는 있었다.

"오늘 츠키오카 선생이 1학년 B반의 첫 수업에 들어가서."
"흐음? 또 첫 섹스라던지. 첫 키스라던지? 성희롱 당할까봐 걱정이야?"
"그녀석은 선생인데도..."
"후후후. 타카토선생님의 첫 섹스는 언제였나요-. 란 말을 들어도."
"갑자기 무슨.."
"아니, 궁금해졌어. 알고 지낸건 오래였지. 서로의 첫 키스에 대해 알고 있어?"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건지 모르겠네요."

타스쿠는 아즈마와 눈을 마주치고 불쾌하다는 듯이 흘겨보았다. 위협적인 표정이었지만 그 표정에 익숙한 아즈마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으르렁대는 모습이 날카로운 늑대처럼 보이기도 하고, 주인을 독점하려는 커다란 개 처럼 보이기도 했다.

"좋은 대처네. 츠키오카선생에게 가르쳐줘도, 더 귀엽게 보일 뿐이고. 그래서, 첫 키스는 언제? 내 생각엔, 첫 키스는 서로가 아니었더라도, 첫 섹스는 서로였다는 설을 지지하고 있어."
"하아...선생까지 왜이러는건지."
"나의 추리가 틀렸을까. 후후."
"점심을 함께 하려면, 뒤 뜰에서 만나도록하죠. 이만 가보겠습니다."

머그컵을 물에 씻어 건조대 위에 올려두고 타스쿠는 보건실을 나갔다. 새학기 마다 벌어지는 타스쿠의 고군분투를 보는게 쏠쏠한 재미란 말이지. 아즈마는 둘을 위해 준비해둔 콘돔 상자가 아직 남아있다는 장난을 생각해 두었고, 새빨개질 츠무기의 얼굴을 생각하며 혼자서 쿡쿡 웃었다.


***



"와. 오늘은 유키시로선생님도 점심 함께 하시는건가요? 좋네요."
"타카토 선생님이 일부러 불러주셨으니까. 혼자 먹는건 쓸쓸하기도 하고."
"빵으로 괜찮으세요? 일부러 식당에 가지 않으시고...제 도시락이라도 드실래요?"
"어떤 반찬이야? 츠키오카 선생님 혼자 살고있으니..직접 싼 도시락이겠네."
"앗. 아아.. 남에게 드리기엔 좀 부족한 도시락이죠. 계란말이 밖에 없어서."

매점에서 빵과 커피를 사온 아즈마는 먼저 앉아있는 둘의 옆에 앉았다. 봄의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뒤뜰은 츠무기가 취미라기엔 과한 수준으로 가꾸어놓은 화단이 있었고, 시간이 날 때 마다 찾는 곳이었다. 언제봐도 아름답네. 아즈마는 츠무기를 향해 미소지으며 흔들리는 꽃을 바라보았다. 요즘에 화단을 가꾸는 단정한 외모의 청년이란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설정이고. 옆에는 백마탄 왕자님-이라고 말하면 굉장히 화를 낼 왕자님-도 있다. 아즈마는 둘의 사소한 대화를 들으며 손으로 빵을 뜯어서 입에 물었다. 남자의 도시락이라 치기엔 츠무기의 도시락은 작은 편이었다. 반찬은 어설픈 계란말이와 장아찌가 다였다. 타스쿠는 매점에서 사온 도시락에 빵까지 쌓아두고 있었다.

"오늘 수업은 어땠어? 첫 수업, 좋은 느낌?"
"으응. 그렇죠. 몇 번을 해도 긴장되고. 그래도 올해의 신입생들은 모두 좋은 아이들이란 느낌. 즐거운 한 해가 될것같아서.."
"그 말은 매년 듣는것 같네. 후후."
"그런가요. 하지만 정말이라..."
"오늘 마치고는 뭘 할 예정이야? 멋진 곳을 알아뒀는데."
"저번에 아즈마선생님이 추천해주신곳. 정말 분위기 좋았지, 타스쿠..."
"음. 하지만 학기 초라 자중하는 편이 낫지않아. 츠키오카선생님?"
"아아. 그런가....그래도.."
"과보호 남자친구는 힘드네..그렇지. 츠키오카 선생님의 첫키스는 언제였나요? 첫섹스는?"
"에엣? 가..갑자기..그건.."
"유키시로 선생.."

타스쿠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즈마를 노려보았다. 잡아먹히겠는걸. 재밌다는 듯 쿡쿡 웃은 아즈마가 츠무기가 젓가락으로 들고 있던 계란말이 반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앗. 하고 츠무기는 빈 젓가락을 바라보다 첫키스..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학기 초만 되면 한번쯤은 학생들에게 들어보는 질문이다. 지어내도 괜찮을테지만, 학교의 소문이 여러가지로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언제나 똑같은 시간을 이야기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의 여름방학, 자전거를 타고 떠났던 바닷가에서 첫 키스는 시원한 바람과 짭잘한 입술의 맛과 열기가 강렬하게 화상처럼 남아있었다. 긴장해서 차갑게 식어버린 손으로 서로의 따스한 볼을 어루만지던 온도차까지도. 귀가 빨갛게 변하는 츠무기를 바라보던 타스쿠가 미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굉장히 많이 듣는 질문이라...이젠 아무렇지 않아요. 첫키스는 고등학생때였죠. 섹스는...으음.."
"자. 계란말이의 답례인 초코렛. 더 이상 곤란하게 하면, 타카토 선생님에게 살해당할지도. 후후.."
"그..런가요. 다 큰 어른들끼린데요. 대답해드려도 상관없지만..기억이 나질 않아서."
"발정난 남고생같은 질문은 이제 그만하고, 밥이나 먹지."
"발정이라니, 타카토선생님 입에서 그런 말도 나오고. 귀여워라."

귀여우니까 선물. 아즈마는 주머니에서 작은 초코렛을 하나 더 꺼내 타스쿠의 손에 쥐어주었다. 코웃음을 친 타스쿠가 초코렛을 츠무기에게 가볍게 던지고는 빵봉지를 뜯었다. 식사를 마치고 도시락가방을 넣은 츠무기는 뒤 뜰 중앙에 핀 벚꽃을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만개하지 않은, 하얀 꽃망울들이 눈처럼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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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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