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캐해석이 있습니다.



여섯시




바람이 불었다. 사막의 바람은 모래로서 형체를 가진다. 누런색으로 먼 지평선에서 선호를 그리며 소용돌이치는 일련의 회오리를 바라보던 호마레는 시계탑의 꼭대기, 사람 둘이 서 있기 빠듯한 좁은 곳으로 올라가는 원형의 계단을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히소카가 있을것이다. 호마레가 둘러준 검은 천조각을 둘러메고 오후의 열기에 녹아가면서도 그 곳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행위를 마치 하루의 중요한 일과인 마냥 반복했다. 호마레가 히소카를 모래무덤에서 주워온 날 부터. 체력을 회복하려는 듯 며칠 동안은 죽은듯이 잠만 자던 히소카는 예전의 기억은 모두 잊어버렸다고 했다. 히소카라는 이름은 호마레가 읽었던 시계탑의 수 많은 책 중 문득 떠오른 인물의 이름이었다. 소년. 그래 너. 라는 호칭으로 상당한 기간을 함께 할 자를 칭하기엔 서먹하지 않은가. 호마레는 문학을 즐기는 자였다. 시계탑은 말만은 거창해도 외벽에 붙은 커다란 시계와 시계를 지탱하는 수백개의 톱니바퀴와 나사가 돌아가는 조정칸이 탑의 전부였다. 시계탑을 책으로 채운 것은 호마레였다. 오아시스가 제법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나 발길을 끊은지 오래였다. 읽은 책을 또 읽으면 재미가 있느냐고 히소카가 묻자, 재미를 찾기 어려운 것이지 재미가 없진 않다고 대답한다. 직접 쓴 책도 여러권이였다. 히소카는 그것을 최초로 읽은 독자가 되었다. 


"미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아, 이런 안타까울때가."

"글이라는건 알겠어."

"말을 아끼게. 히소카군."


세상에 알려지기에 백년은 이르지. 암. 호마레는 히소카의 손에 들려있던 두꺼운 책을 빼앗아 높이 세워진 책장의 손이 닿는 가장 끝에 넣었다. 두꺼운 고급 종이로 쓴 책은 시계탑이 무너져도 모래더미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호마레는 장편 연작시의 세번째 권을 끝내고 네번째 권을 쓰고 있었다. 최근에 가장 집중하고 있는 일이었다. 시계는 아주 느리게 테엽과의 간격을 줄여갔다. 조정은 몇년에 한번이면 충분했다. 호마레는 계단 옆으로 뚫린 바닥으로의 공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는 커다란 톱니바퀴를 내려다보며 눈과 시간의 간격을 셌다. 째.깍. 아직 1초보다 간격은 좁았으므로, 호마레는 만족한 듯 눈을 돌려 꼭대기로 향했다. 불러들이지 않으면 영원히 꼭대기층에 앉아있을테지. 나무로 된 두꺼운 자물쇠를 손으로 열자 제법 매케한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리스."

"기척을 알아챘는가. 바람 소리가 시끄러운데."

"그래도, 알 수 있어."


덮고 있던 천조각을 풀어 입을 드러낸 히소카가 호마레의 동선에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정찰하는 매처럼 날카로운 눈동자는 사막에서 보기 드문 이국의 바다에서 난다는 보석과 같은 색이다. 위험하다고 말해도 끄트머리에 앉아 물장구를 치듯 발을 동동거리는 히소카의 옆에 선 호마레가 시선의 끝을 맞추었다. 공간의 거리는 시간의 거리와 같다고. 우주를 연구하는 책에서 그리 말했다. 모래소용돌이가 회전을 더하면 폭풍이 된다. 비가 만드는 태풍의 눈은 고요하지만, 모래폭풍은 배고픔에 굶주린 맹수처럼 자가복제한 모래언덕을 부수고 집어삼킨다. 얼마나 무의미한 파괴인가. 그리고는 어느날이 되면 모래언덕은 다시금 지나간 모양대로 솟아있다. 아래에 커다란 고래라도 헤엄치는 듯 물결모양이 남아있다. 호마레는 검은 천을 벗은 히소카의 목덜미에 있는 작은 균열에 손가락을 가져간다. 손가락을 누르면 균열은 공간이 되어 나타난다.


"슬슬 다시 감아야할 시간일세. 여기서 다시 감으면 모래가 들어가버린다고?"

"응. 해도 지고."

"지겹지 않은가. 모래, 모래, 모래 뿐인 풍경이."

"글쎄. 아리스도 매일 보는데 지겹지 않은걸."


히소카는 목에 무적처럼 열쇠를 매고 다녔다. 목에 있는 균열과 딱 맞는 한 쌍으로, 모래무덤에서 잠들어 있을때는 손에 쥐고 있었다. 테엽이 모두 돌아가면 거부하기 힘든 수마가 쏟아졌다. 구멍은 목 뒤에 있었기에 혼자 다루기엔 불편했다. 아마 혼자 살지 못하도록 만든게 분명하다고. 히소카의 제작자는 성격이 고약한 녀석이었을 것이다. 히소카의 테엽장치가 팔이나 다리에 있었더라면 히소카는 아마도 훨씬도 전에 호마레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호마레는 그런 쪽에선 자신감이 없는 편이었다. 아무런 대화 없이 한사람이 겨우 통할 만한 너비의 계단을 내려오며 길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는 바닥을 치고 울렸다. 정교한 인형이 유행한 것은 백년도 전의 일이었다. 시계탑도 화려하고 세밀한 세공을 자랑하기 위한 자의식 과잉의 일종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테엽세공품에겐 쥐약인 모래사막에 시계탑을 세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호마레는 바닥층에 다다라 낡은 담요가 깔린 나무 의자에 앉은 히소카의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미세한 테엽소리가 한 층 더 가까이 울렸다. 


"몇 번 정도?"

"하루는 세 번. 일주일은 스무 번."

"세 번으로 하지."


히소카는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육각별 모양의 홈과 열쇠가 삼켜지듯 맞아 들어갔다. 호마레는 천천히 테엽을 감았다. 한 번. 히소카가 여덟시간 동안 호마레를 찾지 않을 것이다. 두 번. 열 여섯시간. 세 번. 꼬박 하루. 테엽은 부드럽게 돌아간다.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스무 번은 충분히 감을 수 있을 것이다. 호마레는 자신의 제멋대로인 은색 인형을 어디까지나 손에 두고 만지고 싶었다. 실제로 히소카가 그걸 허락하는 시간은 오후의 낮잠 시간 뿐이었지만. 


"내가 만일 테엽이 더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그걸 멈추는건 아리스가 해줬으면 해."

"그거야 말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히소카군이 멈추는 일은 없을걸세."


열쇠가 목에서 떨어지자 히소카는 어깨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다시 열쇠를 목에 걸려는 것이었다. 즐거운 시간은 아쉽게 지나간다. 막 테엽을 감은 히소카는 생기가 돌아보였다. 착각일 것이다. 테엽을 스무번이나 감고나면, 어깨에서 날개라도 돋아 날아가버리는거 아닌가? 호마레는 농담처럼 웃으며 마주보는 의자에 다가가 앉았다. 히소카에게 날개가 돋는다면 무척이나 아름다운 은 세공품 처럼 빛날 것이다. 궁금하면 해보지 그래. 히소카는 간단히 대답했다. 겨우 소년의 몸을 벗어난 테엽인형에게 날개라니. 책을 많이 읽어서 상상력이 대단한걸.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은 듯 호마레가 고개를 커다랗게 끄덕였다. 여섯시 정각이 되자 시침이 돌아가는 짧은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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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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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캐해석이 있습니다

*타스쿠와 츠무기가 사신이라는 설정입니다.



花樣年華 (下)



유키시로 아즈마의 행동반경은 단순하다. 하루에 한번 식료품을 사는 듯한 가까운 거리. 저녁 일곱시가 되면 비로드 근처에 있는 가게로 출근. 새벽 다섯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낮동안은 잠을 잔다. 츠무기는 집중해서 읽고 있던 사건자료 종이를 내려두고 눈을 감은 채로 아즈마의 기척을 살폈다. 점이 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츠무기와 만났던 그날의 외출은 아즈마에겐 이른시간의 외출이었던 셈이다. 30년은 족히 된 신원미상의 사건자료는 너무나 허술했다. 읽으나 마나한 기본적인 사실만 적혀있었다. 점점 지겨워지는 자료들에 타스쿠는 신경이 곤두선듯 들고있던 서류종이의 마지막을 넘기더니 마주보고 앉아있던 앉은뱅이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마주보고 앉아있던 츠무기는 아무 반응 없이 서류를 읽었다. 타스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화요일이야."

"응. 알아."

"그자를 내일 만나기로했지."

"응. 맞아."

"그렇게 넘길일이 아니야. 아무 흔적도 찾지 못했잖아. 유키시로 아즈마가 이 결론을 듣고도 제대로 현세를 떠날수 있겠어?"

"최선을 다하기로 했잖아. 아즈마씨도 여부와 상관없이 순순히 따르겠다고."

"아직도 그런 무른소리를 하는거야? 츠무."


츠무기는 짧아진 자신의 호칭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작은 글씨를 읽느라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테이블위에 두었다. 타스쿠는 츠무기를 종종 그런 호칭으로 불렀다. 언제부터인지는, 글쎄. 시간이란 그들과는 상관없는 좌표였다. 기억의 처음부터 타스쿠는 츠무기의 곁에 있었다. 아마도 같은 장소에서 함께 죽은 것이 아닐까 예상해보고는 했지만, 사신의 전생은 극비였다. 파트너로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츠무기는 츠무라는 호칭을 좋아했다. 물론 가끔은 낯간지럽기도 했다. 특히 잠결에 일어난 타스쿠가 무의식적으로 부를때가 그랬다. 타스쿠는 보이는 그대로의 존재였다. 타스쿠의 말에는 하나의 겉치레나 거짓은 담겨있지 않았다. 투명한 얼굴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하는 삶의 방식이고, 츠무기는 절대로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할거라 생각했다. 함께 있으므로 매 순간 깨달아간다. 타스쿠와는 다른 종류라고. 그래서 좋아한다고.


"찾을수 있을거라 생각했다니, 그게 더 무른 소리 아닐까. 타-쨩. 영혼의 성질이 바뀔 정도의 커다란 사고가 일반 사신이 대여할 수 있을만한 자료에 있을리가 없잖아?"

"그런.."

"우리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어. 조건은 그랬지. 오늘 저녁에 아즈마씨에게 전화를 해서 내일 몇시쯤이 좋을지. 예약을 잡아야겠네. 타쨩도- 바에 가는건 오랫만이니까. 그렇지?"


타스쿠는 자신을 바라보며 싱긋 웃고는 다시 동그란 모양의 안경을 끼고 자료를 읽어내려가는 츠무기를 바라보며 오래전부터 느끼던 모종의 서늘함을 다시금 느낀다. 츠키오카 츠무기는 따뜻하지 않다. 짐짓 부드러운 말투와 얼굴을 하고 있어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의 눈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심해가 비춰보였고, 그림자에는 짙은 어둠이 배여있었다. 사신으로서의 성질을 띄고 있으니 그런건 종족 특성일지도 모른다. 감정이 개입하면 복잡해지는 일이다. 감정을 극한까지 줄이면서도 자신이 가꾸는 화단에 가면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츠무기가 바라는건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우고 메마른 땅에 물을 뿌리는 일 같은것. 


"내일 점심에 오후 첫시간 공연을 하나 볼까. 로미오와 줄리엣."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예전에 본 적이 있었나."

"아니. 하지만 고전이고, 유명한 연극이래. 요즘 비극이 계속 끌려."

"어느 극단 주최이지? 아아. 거기."


연극이란 무생물이지만, 만들고 꾸미는 것은 모두 살아있는 것이기에 연극 또한 어느 정도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둘의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같은 연극을 보아도 매번이 다르고, 새로웠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올린 극단은 타스쿠와 츠무기가 좋아하는 극단 중 하나였다. 어느날 부터 망가진 극장을 고쳐 연극을 하기 시작한 작은 극단이었지만, 극단원들이 점점 늘었는지 올해 부터는 정기공연을 정기적으로 올렸다. 제일 처음에 보았던 건 붉은 머리의 앳되어보이는 한 소년이었다. 서툴지만 소년이 하는 연기는 온전한 진심이었다. 응원하는 셈 치고 관객이 없는 연극의 표를 두어개씩 더 사 준 적도 있었다. 배우도 직업인지라, 그저 일의 일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연극을 하는 이도 이 거리엔 적지 않았다. 사무적인 태도의 연극을 보고 있자면 절로 불쾌하고, 권태감에 빠져들었다. 츠무기와 영화를 보는것도 즐겨했지만 더 생동적이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건 연극이었다. 타스쿠는 허리를 펴고 일어나더니 잠시 조깅을 하고 오겠다며 기지개를 폈다. 오는길에 연극표도 사오고. 가벼운 져지를 자신의 방에서 가져왔다. 


"슬슬 지겨울때가 되었지. 다녀와."

"너도 적당히 해. 어짜피 찾지 못할테니까."

"꼭 답이 있어야 문제를 푸는건 아니잖아. 응, 조심히 다녀와."


가볍게 손을 흔들어 타스쿠를 배웅한 츠무기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자신의 휴대폰을 가져와 아즈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약속 시간에 대한 것이었다. 아즈마는 보통 오후 다섯시는 되어야 움직임이 느껴졌다. 문자를 보낸 츠무기는 다시 서류에 눈을 돌리다 울리는 문자 알람을 읽었다.


[지금 전화 가능할까? 일하고 있던 중이라면 미안.]


답장이 금방 와서 의외였다. 츠무기는 메마른 눈을 비비며 선불휴대폰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두어번 울리더니 아즈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츠무기. 갑자기 미안."

"아니에요. 그보다 주무시고 있을줄 알았는데."

"아아,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야? 가다듬었는데. 부끄럽네."


아즈마의 용건은 그러했다. 수요일엔 가게에 중요한 손님이 오시기로해서 전체시간을 비울 수 밖에 없게되었다며, 가능하면 오늘 와주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평범하게 약속을 잡는 듯한 목소리였다. 사신과의 두번째 만남은 죽음으로의 안내였다. 


"지금 타스쿠가 외출중이라. 물어보고 연락드릴게요. 저는 괜찮아요."

"응. 타스쿠도 괜찮다고 했으면 좋겠네. 오늘은 예약이 그리 많지 않아서, 길게 이야기 할 수 있을거야."

"좋아요. 아마 곧 들어올거에요. 가능하다면 오후 8시가 괜찮을까요?"

"물론. 환영이야. 약도를 문자로 보내줄게."


짧은 통화를 끝내며 아즈마는 부디. 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얼마 뒤 아직 해가 지기 전까진 더웠으므로 타스쿠는 땀범벅이 된 채로 현관문에 들어섰다. 10km정도를 뛰었다고. 츠무기로서는 절대 가볍게 하지 못할 말을 던지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타스쿠는 건장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어깨나 팔이나 다리도 돌처럼 단단했다. 가끔씩 팔이나 손을 잡으면 무거웠다. 예전에 같은 침대에서 자다가 타스쿠의 다리에 배가 깔린적이 있었다. 숨이 막혀 죽을뻔 했다. 이미 죽은 몸이지만. 츠무기는 재빨리 몸을 닦고 나온 타스쿠의 벗은 몸을 슬쩍 흘겨보다 시선을 돌렸다. 


"마침 아즈마씨한테 연락이 왔어."

"어떤?"

"내일은 가게에 중요한 손님이 있다나봐. 오늘저녁이 어떠냐고 물어보더라구."

"흠. 일부러 죽을날을 앞당기는건가. 상관없지. 오히려 일찍 끝나니 이쪽에서 환영이야."

"오늘 저녁 여덟시."

"내일 연극 표 사왔어. 오후 1시 40분인데. 좀 늦출걸 그랬나. 피곤하겠어."





***




아즈마가 보내준 약도는 짧은 주소 한줄이었다. 비로드 거리에서 멀지 않은 장소이지만 확실히 달라지는 분위기로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소한 거리 깊숙히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격대가 있는 바이지 싶어 격식을 차리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타스쿠는 그런건 딱 질색이라며 늘 입던 가벼운 티셔츠 차림이었다. 검은색의 깔끔한 와이셔츠를 입은 츠무기는 더욱 왜소해보였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져오자 사람들은 츠무기와 타스쿠를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다 거리 끝까지 닿을듯 얇아졌다. 아즈마가 말한 주소에 다다르자 작은 네온간판에 붉은색의 꽃이 그려져 있었다. 아즈마가 가게 문 앞에 서 있었다.


"바 츠바키. 동백꽃이구나. 멋진 이름이에요."

"무리하게 고집부려서 미안. 응해줘서 고마워. 츠무기, 타스쿠."

"일찍 끝내는 편이 우리쪽에도 좋으니까."


아즈마는 어두운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는 바 안으로 안내했다. 비싸보이고 이름 모를 외국의 술병이 벽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구석에서 홀로 앉은 중년 남자를 제외하고는 손님은 없었다. 신비로운 분위가 감도는 장소였다. 츠무기는 신기한 듯 작게 감탄하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깨선이 드러나는 티셔츠를 입은 아즈마가 유유히 자리를 권하고 얼음이 든 물을 내왔다. 이곳이야말로 그에게 어울리는 장소라고 타스쿠는 생각했다. 옅은 조명아래 아즈마의 머리색이 달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메뉴판이야. 기본적인것만 적혀있어. 혹시 특별히 원하는게있다면, 아마도 있을테니까."

"헤에. 모르는 이름이 가득하네. 타스쿠와 저는 이자카야에서 생맥주나 시판 사케를 마시는게 다여서."

"일본주도 있어. 후후. 천천히 보고, 오늘은 내가 살테니까."

"결론이 궁금하지 않아?"

"아-. 그것말이지. 물론 궁금해. 벌써 본론으로 들어가는거야? 밤은 길어. 천천히, 즐겨보자구."


아즈마는 작은 스카치잔에 식전주로 마시기 좋을 것이라며 옅은 색의 술을 내왔다. 차가운 얼음에 닿아 달큰한 향기가 감돌았다. 어딘가 휘둘리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은지 타스쿠는 얼굴을 살짝 구기고는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적은 양의 술임에도 불구하고 입 안에서 풍부한 꽃과 깊은 밀의 향이 느껴졌다. 유쾌하게 혀를 감돌고 깔끔하게 사라지는 맛이 놀이기구를 탄 듯 즐거운 것이었다. 타스쿠는 잔을 내려놓고 작게 미소지었다. 


"...맛있어. 향기롭고."

"헤에. 다행이야. 풀어진 표정이 보기 좋아. 흐음.. 바텐더로서 가장 보람있는 순간이지."

"맛있어요. 국화향이 느껴져요. 신기하게도."

"츠무기는 꽤 높은 취향을 가지고 있는걸. 국화향을 발견하다니."

"응. 저, 꽃을 가꾸는게 취미라."

"또 시작이군. 나는 스카치 블루. 온더락으로."


아즈마와 츠무기가 끊이지 않고 꽃과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갈 동안 타스쿠는 잔을 받아들고 천천히 얼음이 녹는 것을 바라보며 길게 나열된 술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츠무기는 살고 있는 맨션의 앞 에도, 비로드에서 약간 벗어난 공터에도 화단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정착하게 되면 자신만의 정원을 꾸미는게 꿈이라고 말했다. 아즈마는 자신의 꿈은 가게를 잠시 접고 빙하를 보러 가는 것이라고 했다. 길게 휴가를 내야할테니. 단골이 끊길것이 무서워 엄두도 내지 못하고있다고. 지루한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아즈마가 타스쿠의 꿈은 뭐냐고 물었다. 타스쿠는 고개를 돌린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의무도, 의향도 없었다. 참아주고 있는건 지금이 유키시로 아즈마의 마지막 한 때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타스쿠는 원래 좀 딱딱하다고 츠무기가 대신 사과했고, 아즈마는 타스쿠의 대답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그런데, 사신도 정착할수 있는거야? 아니, 실례였네."

"으음. 어떻게 설명해야할까요. 은퇴? 아무리 영원히 산다고 해서, 영원히 일을 할 순 없으니까요."

"그렇네. 노동착취겠어. 누구에게나 휴식은 필요한 법이지."

"맞아요. 저는 아즈마씨의 일을 마지막으로 잠시 휴가를 갈까 생각중이에요."

"뭐??"


가만히 둘의 대화를 관전하고 있던 타스쿠가 츠무기의 말에 끼어들었다. 


"에. 타스쿠가 먼저 이야기 꺼냈잖아? 잠시 쉬는것도 좋겠다고."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였어."

"타스쿠도 유심히 보고 있었지? 그 극단의 단원모집 벽보."

"극단? 배우를 하려고? 츠무기. 정신차려. 아무리 정체를 숨긴다고 해도, 위화감은 숨길수 없어. 감이 좋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알아챌거라고."

"그걸 숨기는게 연기 겠지. 나는 좋은 경험일거라고 생각해."

"아냐...아냐. 우선 이 건이 끝나고 보자고."

"배우라니. 멋진걸. 나도 연극은 종종 보러가는 편이야. 비로드 근처에 사니까."


아즈마는 대화에 끼어드는게 능숙했다. 타스쿠에게 차가운 얼음물을 한 잔 더 내오고는 술이 든 것이라며 생초콜릿을 내왔다. 그리고는 오후에 전화 했을때 타스쿠는 어디에 있었는지, 그런 류의 대화를 시작했다. 가볍고 편안한 대화와 높은 도수의 향기로운 술. 아즈마가 말하던 그대로였다. 자주 마시던 종류가 아닌지 츠무기는 약간의 술기운을 느꼈다. 이마를 짚으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타스쿠는 그런 츠무기의 목덜미를 주물러주었고, 츠무기는 몸이 풀어지는 듯 으으. 하는 신음을 뱉었다. 슬슬 약속의 결과를 말해줄 때가 되었다고 타스쿠가 말했다.  


"원래 만나기로한 것은 수요일이었지. 나는 수요일에 죽고싶진 않았어."

"어째서?"

"내가 어릴적 그 사건에 대해 기억하는 몇 안되는 사실이거든. 그날이 수요일이었다는것."

"그렇군. 그러나 유감이지만, 우리 선에서 알아낼 수 있는건 그다지 없었어. 네가 죽지 않은것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렇네. 고마워 해야할 일인데, 어째서 늘 궁금했는지 몰라. 츠무기도, 타스쿠도 노력해줘서 고마워."

"천만에요. 좋은 소식을 들려주지 못해 미안해요. 아즈마씨."


한 잔 더 하겠어? 아즈마는 손으로 술이 든 벽을 소개하듯 가리켰다. 츠무기는 붉게 오른 얼굴로 웃으며 손을 저었다. 뿌리 없이 부유하듯 떠오르다 잠기며 어떻게든 살아왔다. 어릴적의 기억은 끔찍한 두통을 불러일으켜 더이상 떠올리는 것을 포기했다. 유키시로 아즈마의 잠곁에는 늘 두통약과 진통제가 함께했다. 햇빛을 보면 두통을 더욱 심해졌다. 바텐더는 그런 아즈마에게 잘 맞는 일이었다. 다른 이의 삶에 눈을 가져가다보면 자신의 공허함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바의 문을 닫고 셔터를 내리면 엄청난 고독이 밀려왔다. 익숙해졌지만,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츠무기와 타스쿠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서로의 고독함을 감해줄 순 없어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게 얼마나 축복인지 둘은 알고 있을까. 가슴 한켠이 찌릿하다. 


"이야기는 끝난건가?"

"그런거야? 더 좋은 술을 소개시켜 주고 싶었는데. 한번으론 족하지 않을거야. 내가 없어도 츠바키는 계속 될테니까. 종종 들러줘."

"괜찮겠어, 츠무기?" 

"응. 심장이 안정되어있어. 이대로라면 괜찮을거야."

"부디 좋은 여행이였길, 좋은 여행이길. 유키시로 아즈마."


즐거운 여행이었어. 타스쿠의 말에 아즈마는 대답했다. 매일 밤 화려한 축제였다. 빛나는 사람들 속에서 반사된 빛으로 자신도 빛나고 있었다. 아즈마의 가슴에 얹어놓았던 츠무기의 손이 점점 가슴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즈마의 모든 기억이 츠무기의 머릿속에 흘러들었다. 엄청난 굉음, 흔들림, 머리가 찢어지는 두통에 츠무기는 신음을 흘렸다. 이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고. 입술을 깨물고 빠르게 진동하여 뜨거운 아즈마의 심장을 손으로 쥐었다. 그러나 곧바로 무언가를 느끼고는 전기에 감전된 듯 전율하며 아즈마에게서 떨어졌다. 


"...심장이 빠지지 않아."

"그럴리가."

"유키시로 아즈마의 수명은 이미 끝났어. 삼십년 전부터. 어째서..? 이게 어떻게..다른 경로로 이어지고 있는데, 자세한건 모르겠어."

"저번에 왔던 사신도 그런 이야길 하더라고."


그 남자는 상냥했지. 본인은 죽어도 아니라고 했지만. 후루이치 사쿄라고 했나. 아즈마의 입에서 이름이 떨어지자 마자 둘은 경악했다. 


"후루이치가 왔었다고? 미카게는 그런 말은 전혀 없었는데. 후루이치가 해결하지 못한 것을 우리가 할 수 있을 리가."

"으응. 그렇네. 너무했어요, 아즈마씨. 나름 열심히 조사했는데."

"사쿄군이 그렇게 유능한 사신이야?"

"사쿄..군? 아..하하. 그렇죠. 격이 다르니까.."


아직도 저린감이 남아있는 손을 탁탁 털어낸 츠무기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감히 사쿄씨를 친한 듯 사쿄군이라고 부르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그는 츠무기가 아는 한 가장 오래된 사신이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사신이었다. 일선에서 손을 뗀지 꽤 된 것으로 알고있었다. 물론 소문으로 들은것이라 정확한 사실은 아니었다. 타스쿠와 츠무기도 그를 직접 본 일은 한 번 뿐이었다. 


"한잔 더 하겠어? 피곤할 때는 북돋아주는 따뜻한 와인이지. 잠시만 기다려, 금방 데워 올테니."


유유히 보라색 커튼 뒤로 아즈마가 사라졌다. 


"이제 어떻게하지? 사쿄씨에게 보고 해야할까. 아니, 이미 알고 있는 것같지만."

"인간에게 놀아나다니. 정말 쉴때가 된 걸지도."

"타스쿠도 찬성하는거야?"


타스쿠는 대답하지 못한 자신의 꿈에 대해 떠올렸다. 츠무기와 함께 잠시라도 다른 삶을 살아보면, 츠무기가 언젠가 기억의 처음처럼 웃는 때가 오지 않을까. 아마 츠쿠기도 기억하고 있지 않을 아주 오래된 어느날처럼. 기울여진 꿈과 술잔을 기울이며 타스쿠는 술기운이 올랐는지 가볍게 웃으며 어깨에 기대는 츠무기의 참지 못할 가벼움을 느꼈다. 손에 잡고 있지 않으면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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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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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 가터벨트 욕구불만 자극적인 

가터벨트를 못썼네요.



※개인적인 캐해석이 있습니다.




심해의 수면욕




호마레는 며칠 동안 방에 틀여박혀 책상에 앉아서 글을 썼다. 마감기한이 가까워져 오는 글이 두개라던가. 세개 라던가. 답지않게 난색을 표하며 저녁연습에도 빠졌다. 하늘이 내린 천재라는 자기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타이틀을 말끝마다 붙이고 다니며 즉흥시를 머릿속에 가득히 넣고다니며 자판기처럼, 동전을 넣지않아도 그날의 시구를 읊고 다니는 그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조금 의외인 일이었다. 먹는것도, 자는 것도 소홀히 한 채 오직 책상에 놓인 원고지와 습작을 적던 이면지에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이즈미가 한번, 츠무기와 아즈마가 한번씩 방에 들러 호마레의 동태를 살피고 갔다. 그와 더불어 히소카의 상태도 살폈다. 평소라면 히소카의 생활 전반을 케어하는 것이 호마레였다. 그런 그가 며칠 째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양 쪽 다 걱정거리였다. 히소카는 호마레의 철야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히소카만의 수면생활에 몰두하고 있었다. 츠무기와 타스쿠가 일부러 데리러오는 아침과 오후 연습에 참가하고 나면 하루는 산책, 하루는 정원에서 낮잠, 하루는 방에 틀여박혀 나오지 않았다. 며칠간 호마레와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는것을 히소카는 얼핏 잠에서 깨 문득 느꼈다. 그것이 중요한 일이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히소카는 시끄러운것에는 죽어도 익숙해 질수 없었다. 평온한 강처럼 조용한 시간에도 머릿속은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으므로.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들과 바깥의 소리가 겹쳐 공명하기 시작하면 가끔은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그걸 피하기 가장 편한 방법은 수면이었다. 저녁 연습을 마치고 곧장 방으로 돌아온 히소카는 여전히 장식물처럼 곧은 자세로 책상에 앉아있는 호마레를 슬쩍 흘겨보고는 자신의 침대로 올라가 잠에 들었다. 꿈은 종종 꾸었다. 옛 기억의 파편인듯한 알 수 없는 몇몇 장면이 지나가기도하고, 마쉬멜로우를 잔뜩 먹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만카이에서의 생활은 즐거웠지만 단순한 편이었다. 그다지 기억에 남을 만큼 선명한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첫 공연을 마쳤을때. 온천여행을 갔을때. 그리고 또...의식이 서서히 맑아졌다. 


"으음..."

"어라. 히소카군. 불을 끄지 않아서 잠에서 깼다는건 아니겠지? 평소엔 불이 켜져있던, 꺼져있던 잘 자니까 말이야."

"별로. 그런것 때문에 일어난건 아니야."


호마레가 창문가에 서있었다. 애용하는 머그컵에는 따뜻한 홍차가 담겨있을터였다. 무거운 머리를 휘휘 저어 꿈의 연기를 흩어낸 히소카가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마치 며칠동안이나 잠을 자다 일어난 듯한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뻑뻑한 손을 몇번 쥐었다 폈다. 천천히 활동을 시작하는 심장의 고동이 빨라짐을 느낀다. 귓가를 쿵쿵. 어떤 생각이 떠오르려다 한꺼번에 통로를 지나가지 못하고 막혀버린다. 히소카는 눈을 반쯤 뜨고 호마레가 선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편한 실크잠옷을 입고있었다. 다소 지쳐보이는 모습으로. 손에는 아직 지우지 않은 잉크자국이 남아있었다. 히소카는 자신의 기분을 설명할 가장 올바른 단어를 찾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떠오른 가장 상위의 질문을 던졌다. 


"나는 살아 있는게 맞을까?"

"호오. 다분히 심도 깊은 질문이군. 히소카군의 입에서 나온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야."

"답은?"

"당연히, 살아있다네. 그렇지 않으면 마시멜로우의 맛도 모를테니."

"...."

"만족한 대답이 아닌가? 흐음. 내 아무리 천재적인 시인이라 하더라도, 며칠동안 밤을 꼬박 새고나면 두뇌회전이 느리기 마련이라네."


며칠간 자신을 잡고 놔주지않던 문장과 사투를 마친 호마레는 자신의 이런 기분을 히소카에게 설명해도 문학적 두뇌라고는 좋게 말해도 마쉬멜로우 봉투에 적힌 캐치프라이즈에서 멈춰있을 그에겐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다. 모두가 문학을 이해하진 않는다. 그것 또한 숙련과 연습이 필요한 일이었다. 언젠가는 온점 하나가 호마레를 잡고 놔주지 않을때도 있었다. 누가 그것을 이해하겠는가. 이해를 원하는 것이 오만이며 객기이다. 호마레는 짐짓 진지한 표정인 히소카에게 슬쩍 미소지었다. 며칠 식펜과 종이의 전쟁터에서 싸우다 온 병사의 기분으로. 완벽히 만족할 만한 것은 찾지 못했다. 발굴이자 발견이자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메일때 호마레는 버릇처럼 잠든 히소카의 얼굴을 바라보곤했다. 분명 그도 무언가와 싸울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욕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어떤 기본적인 욕망보다 상위의 것이면서도 무거운 질량을 가지고 있다. 


"히소카군.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싶네. 촉매."

"촉매? 들어본적 없는 한자야."

"본인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를 격정적으로 변하게 하는 존재라네."

"그게 왜?"

"요즘 히소카군에게 느끼는 나의 감정이 그렇다네."


호마레는 자신의 글에 대부분 만족하는 편이었다. 항상 본인의 최고를 쓰고있다고 자부했다. 연극을 시작함에 따라 예술적인 새로운 자극을 예전보다 많은 곳에서 느꼈다. 나쁘지 않았다. 주변에서 보고 느끼는 모든것들을 머릿속의 언어로 치환하여 글로 표현하는 것이 호마레의 일이었다. 직업이라기 보다는 사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름 난 작가에겐 뮤즈란 것이 있었다. 


"아리스를 격정적으로 변하게 하고있어..? 나?"

"그런 이상한 표정으로 보는건 왜이지? 의미를 착각한건가. 긍정적인 의미라네. 나같은 대 시인의 영감이 된다는건 자랑할만한 일이지."

"흐응...."


히소카는 소리없이 이불을 발로 밀어내고 침대의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고양이처럼 미끄러지듯이. 고체와 액체 사이의 무엇인듯이.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호마레는 세가지 정도의 수사어구를 떠올렸다. 그 중에서 히소카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은 찾지 못한채로. 다가오는 히소카와 시선을 이어온다. 아무래도 히소카는 알지 못하고 있겠지만, 그의 모습은 퍽 몽환적이었다. 호마레의 꿈은 흑백이었다. 히소카를 보고있자면, 꿈에서 본 듯한 데자뷰를 느낀다. 자극의 일종이다. 비현실 적인 감각.


"혼자만 얻는건 치사하잖아."

"그런..의미가 아니다만?"

"나에게도 줘. 촉매."

"마쉬멜로우?"

"그것보다 더 소중한것."


히소카와의 대화는 함축적이다. 이렇다할 설명을 길게 늘여놓는 성격이 아닐뿐더러,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소중한 것? 호마레는 히소카의 말을 번복했다. 히소카에게 마쉬멜로우보다 소중한 것이라. 솔직히 말해서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필요이상으로 몸을 붙여오는 히소카가 귀를 호마레의 가슴위에 가져갔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다른 음으로 들려온다. 텅 빈 귓가를 채우는 심장소리가 빨라지고 있었다. 히소카는 종종, 호마레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삼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경위나 원인은 모를것이다. 다만, 삼켜보고나면 무언가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바람이 있었다. 뱃속의 허기보다, 밀려오는 잠보다 더 깊고 깊은 자신안의 우물을 아리스가와 호마레란 입자로 모두 채워버린다면. 


"어째서 웃는거지? 이유를 알 수 없어..히소카군."

"이유는 없어. 나도 몰라."

"잠에서 덜 깬것이라던지? 아니, 잠깐..갑자기..?"


머리보다 몸이 더 앞선 행동이었다. 호마레의 손에 들려있던 머그컵을 잡아 창문가에 내려놓고 그대로 검지를 따라 핥았다. 호마레가 쓰는 검은 잉크는 쓴맛이 난다. 혀가 찌그러들 정도였다. 단것을 좋아하는 만큼 쓴 맛에 민감했다. 히소카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한번 입에 넣은 손가락은 막대사탕이라도 되는 마냥 입에 넣고 굴렸다. 호마레는 정말 알 수 없다는 미묘한 간지러움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다가, 히소카를 어떻게든 말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남은 손으로 히소카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어째서? 라는 얼굴로 손가락을 뱉은 히소카의 침이 방울져 떨어졌다. 잠버릇치곤 고약하군. 호마레는 가만히 멈춰선 히소카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갔다. 


"이어져 있단걸 느끼고 싶은것일지도. 오늘은 같은 침대에서 자는게 어떨까-.하는데. 히소카군의 생각은?"

"상관없어. 아리스가 시끄럽게 하지만 않으면."

"자는 동안 잠꼬대를 하지 않는 이상은 괜찮지 않은가. 어디..며칠 잠을 못잤더니 슬슬 어지러워지고있군."

"같은 곳에서 잠을 자면 같은 꿈을 꿀까?"

"글쎄, 어떤지. 한번 해보는게 좋겠군."


발을 떼자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피로와 긴장이 서로 줄다리기를 하다 늘어난 고무줄 처럼 두가지를 동시에 발산하고 있었다. 히소카는 이마를 짚은 호마레의 손을 잡고 사다리에 먼저올라 침대 위에 몸을 말고 앉았다. 누워야지. 히소카군. 호마레의 지친 목소리에도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호마레의 이마에 손가락 하나를 지긋이 눌렀다. 먼저 가 있어. 따라 갈테니까. 나지막한 히소카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호마레는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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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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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캐해석이 있습니다.

※초회 공연 캐릭터들의 크로스 오버 입니다.

 

 

heart trigger

 

 

 

쥴리어스가 감쪽같이 사라진 지 두 달이 지났다. 명예와 가문의 번영 대신 우정을 택한다는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현실에 펼쳐졌지만, 쥴리어스를 알고 지내던 이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쥴리어스는 무엇보다 순수하고 맹목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이 믿는 길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캐퓰릿가는 쥴리어스라는 사람 보다는 쥴리어스의 위치와 이름이 든 상자를 잃어버린 것에 더 통탄했다. 가문을 이을 자를 잃어버렸으니, 성 내는 혼란으로 가득했다. 말썽 한번 피우지 않고 올바르게 자란 쥴리어스가 이렇게 한 순간 사라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는 소문이 정설처럼 퍼져나갔다. 그를 어릴때 부터 옆에서 지켜온 티볼트는 쥴리어스가 대견스러우면서도 어째서 자신에게도 말 한마디 없이 가버린건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섭섭함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적인 감상은 그러했지만, 가문에 속한 자로서 쥴리어스를 찾는 것에 매진하는 척이라도 해야만 했다. 가문의 영주는 얼마를 들이든, 무슨 방법을 써서든 쥴리어스의 소재를 알아오라는 엄명을 내렸다. 아무 성과없이 성으로 돌아가면 아마 죽은 목숨이겠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로미오를 보내 주고만 반역자라는 이름을 쓰고서. 티볼트는 며칠을 달려 기묘한 분위기의 슬럼에 도착했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해결 해준다는 마피아가 장악한 도시였다. 외곽은 고철과 커다란 폐건물로 쌓인 장벽이 높게 서있었다. 뜨거운 지열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구역질나는 썩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티볼트는 신발을 더럽힐 각오를 다잡으며 거리로 들어섰다.

 

"끔찍하군.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산다니."
"어엉-? 넌 뭐야? 잘생긴 도련님이 여긴 왠 일로 행차하셨대?"

 

더러운 때가 묻은 얼굴을 한 부랑자가 손에 든 주머니 칼을 대놓고 만지며 티볼트에게 다가왔다. 이런 곳에 오면서 아무 준비를 하지 않고 온 것은 아니였다. 티볼트 또한 허리에 차고 있던 단도에 손을 가져갔다. 고급스러운 장식이 된 단도에 더러운 이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지만. 냄새나는 검은 이빨에서 저열한 농담들이 오갔다. 어디선가 비슷한 패거리들이 구더기처럼 스멀스멀 기어나와 티볼트를 에워싸는 대형으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돈이 필요한건가?"
"하하! 우리가 그렇게 거지처럼 보였나? 이 거리에 들어오면 인사 드려야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같이 가자 이말이지. 네 주머니에서 나올 푼돈은 필요없다구."
"어느 가문인진 몰라도, 네 머리를 참수해서 걸어버린다고 하면 얼마나 나오려나?"
"뭣..?"

 

티볼트 또한 가문의 아래에서 나고 자란 자이기 때문에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은 죽는 것 보다 모욕적이었다. 천하의 캐퓰릿가의 사람이 시정잡배에게 협박당하다니, 티볼트는 더 이상의 모욕은 참을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리 버릇을 들여보려 해도 체질에 맞지 않지만 자신을 이리 욕보인 자라면 기꺼이 더러운 피를 뒤집어쓰는 것도 감수할 수 있었다.

 

"얌전히 보스에게 가자...어억.."
"얌전한 도련님? 사람 잘 못 봤어. 나도 도련님을 잃어버리고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라."
"뭐-. 뭐야. 이 새끼가??!!!"
"끽 소리 못하고 죽고 싶으면 가까이 오지 그래.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나서, 누구라도 죽여야 속이 시원하겠어."

 

정확히 경동맥을 한번 푹 찌르고 나온 단도에 묻은 선혈을 손으로 닦아낸 티볼트가 다시 단도를 손에 단단히 쥐었다. 어렸을 적 겪었던 가문간의 전쟁에 비하면, 이런건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 세상 사람들은 고귀한 척 하며 부와 명예는 더러운 가치에 속한다 여기지만 명예는 무엇보다 고결하고 높은 가치이다. 이름을 더럽힌 기사는 눈 앞에 있는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다. 칼을 쥐는 자들은 더욱이 명예를 중요시 여겨야만 했다. 거친 숨소리 사이에서 날 선 긴장감과 침묵이 이어졌다.

 

"그만하지 그래. 여긴 내 구역이야."
"보...보스???? 여기까진 왜?"
"내가 언제 너희들의 보스였지? 겨우 목숨만 건져줬더니, 다시 죽고싶은건가?"
"아, 아닙니다!! 가자!!"

 

패거리들이 골목 뒤로 우루루 사라지더니 어느새 티볼트와 한 남자만이 남았다. 그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맞춤 정장을 빼입은 자였다. 한 손에는 고급스러워보이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 오른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배어나오는 흉흉한 기운을 감할 요소는 아니었다. 그는 충분히 강하고, 위험해 보였다. 티볼트는 손에 쥔 단도로는 그 남자를 위협할 수 없다는 것을 체감했다. 남자가 한 발짝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당황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남자는 작게 조소했다. 방금 사람을 죽인 사람 치고는 적은 기백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칼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본 적은 있으나, 최근에 죽여본 경험이 없는 듯 하다. 살인 후에 밀려오는 강렬한 아드레날린과 죄악감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뒤집어 쓰고서 비에 젖은 아기고양이 처럼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척 보아도 고귀한 가문의 기사처럼 보이는 자가 어째서 무법지대인 이 곳 까지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좋은 꼴을 보려고 이 곳 까지 스스로 들어온거지? 그것도 혼자서."
"볼일이 있으니까. 돈만 주면 뭐든지 해준다는 마피아가 있다고 해서."
"호오. 우리 패밀리의 명성이 먼 곳까지 닿아있나 보군."
"당신이야? 비용만 지불하면 뭐든지 해주는 마피아."
"그렇다면. 가문의 번견이 더러운 손까지 빌릴 일이란게 어떤 것인지 기대되는데."
"사람을 찾고있어. 비밀리에 해야하는 일이야."

 

사람을 찾는 것은 심부름 회사에나 알아보지 그래. 마피아는 관심 없는 듯 고개를 돌리고 유유히 뒤 돌아 걸어갔다. 지팡이를 쥔 다리가 들썩이며 불안한 걸음이었다. 티볼트는 남자를 따라 넘어질 듯 허겁지겁 뛰어갔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불안하고 흔들거리는 걸음은 어딘가 불안하고 위험한 기운을 안고 있었다. 티볼트는 마피아를 따라 걸으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남자를 찾고 있다고. 마피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패거리가 모여있는 커다란 건물로 향했다. 마피아가 들어서자 왁자지껄했던 건물 안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티볼트는 유유히 방으로 향하는 마피아의 뒤에서 소리쳤다.

 

"여기까지 데려 왔다는 것은 내 의뢰를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요즘 의뢰가 줄어서, 이것 저것 가릴 때가 아니긴 하지. 대신, 지불은 돈 대신 다른 것으로 받겠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물론이지. 나는 네가 갖고싶어. 네가 카포네 패밀리에 들어온다는 조건으로 의뢰를 받아들이지."
"...그런 말도 안되는.."
"어째서 말이 되지않지? 가문을 벗어난 부랑 기사가 마피아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야. 네가 네입으로 쥴리어스 캐플릿을 찾지 못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마피아의 논리는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티볼트는 죽고싶지도, 마피아의 부하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쥴리어스와 검을 나누던 그 날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함께 가문을 세우자던 어릴 적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는 열망만이 가득했다. 양 주먹을 쥐고 분한 듯 마피아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꿈쩍도 없이 여유롭게 고급스러운 장식이 된 의자에 앉아 만년필을 잡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마피아에게 가장 중요한건 돈 아니었나? 비용이라면 얼마든지 지불 할 수 있다만."
"돈보다 중요한게 있다네, 어린 기사여."

 

카포네는 뒷골목에서 나고 생존하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다.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돈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가치였다.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나서 부터는 돈을 모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귀족은 썩어 문들어져 본인의 부와 명예에만 눈이 멀어버리고, 뒷 골목을 장악한 쓰레기들은 서로를 죽이고 죽여 골수를 빨아먹는 것에 치중한 혼란스러운 시대에 저토록 진실된 눈을 가진 이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여러 인간 군상을 경험한 카포네는 실감하고 있었다. 그에겐 귀족과 뒷골목의 시정 잡배는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도..나는. 지금은 너의 밑에 들어갈 수 없어. 쥴리어스와 가문을 바로 세우기로 맹세했어."
"시시한 목표에 기사의 맹세를 하였군. 그럼 너와의 약속은 상충하는 셈이다. 지금 쯤이면 아마 쥴리어스 캐플릿은 영지로 돌아가고 있을 테니."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마피아의 말은 믿지 않아."
"까다롭군. 신중하고. 하지만 그런 고객을 한 두번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카포네가 손가락을 딱, 마주치자 영접실 안으로 들어온 정장을 빼 입은 남자가 티볼트를 흘겨보며 들어오더니 카포네가 앉아있던 커다란 책상 위에 가슴 주머니에서 꺼낸 편지를 올려두었다. 남자는 말쑥한 정장을 입었으나 역시 위험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패밀리에서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자인 듯 했다.

 

"읽어보게나. 댓가를 바라는 이상 의뢰는 완벽하게. 그것이 카포네 패밀리다."

[미안해, 티볼트. 나의 신의높은 친구여.]

익숙한 쥴리어스의 필적이었다. 한 문장의 짧은 글 밑에는 쥴리어스의 풀네임이 필기체로 적혀있었다. 티볼트는 작은 종이를 접어 손에 쥐고 가슴에 손을 모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약속만 남았군. 나의 발에 맹세의 키스를 하고 이 문서에 서명하도록. 3년의 시간을 주겠다. 작은 가문을 세우는 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지."
"3년."

 

티볼트가 복창했다. 덫에 걸린 사냥감이 버둥거리기를 멈추기를 기다리던 사냥꾼은 냉정하게 기회를 엿 보고 있었다. 쥴리어스 캐플릿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생전 영지를 벗어 난 적이 없는 도련님을 찾는 것 보다, 그가 먼저 죽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앞 설 정도였다. 티볼트가 슬럼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카포네는 그를 눈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에 대한 정보는 어느정도 들어 알고 있던 바였다. 캐플릿 가가 비록 작은 귀족 가라 하더라도 오래된 가문이 가진 명예와 부는 무시할 수 없다. 적당히 가지고 놀며 돈이나 뜯어낼 작정으로 말단 부하들을 시켜 일부러 시비에 붙게했다. 마피아의 방식은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티볼트가 망설임 없이 부하의 목을 긋는 것을 바라보던 카포네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귀족의 티를 벗기 힘든 준수한 얼굴로 저토록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우아한 몸짓을 누가 살인이라 생각 하겠는가. 오히려 왈츠에 가까운 몸짓이였다.

 

"너무나 후한 거래지 않은가? 목숨도 살리고, 가문을 일으킬 시간도 주었고."
"...."
"설마하니 도망갈 생각은 관두는게 좋아. 마피아의 약속을 어기고선 곱게 죽진 못할테니까."

 

카포네가 의자에서 일어나 장식된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티볼트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영접실 밖에는 카포네의 부하들이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로서의 명예를 지키는 것 보다 쥴리어스와의 약속이 더 중요하다. 어떻게 해서든 이 곳에서 살아 나가야만 했다. 티볼트는 허리춤에 찬 검집을 풀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무거운 소리를 내는 분신과도 같은 검집을 카포네가 지팡이로 가볍게 바깥으로 밀어냈다.

 

"마음 같아서는 손가락이라도 하나 받고 싶었지만, 검사에게 가혹한 일이지."
"3년간은 날 가만히 내버려둬. 가문을 세우고 나면 시간이 남아도 이곳으로 돌아올테니."
"충직한 기사로군. 마음에 들어."

 

티볼트는 어린 날 쥴리어스에게 했던 맹세의 날 처럼 몸을 숙이고 무릎을 꿇어 마피아의 가죽구두 발에 키스했다. 생각했던것 보다는 적은 모욕감이 밀려왔다. 다만 숨길 수 없는 자괴감이 온 몸을 난도질했다. 쥴리어스를 다시 볼 면목이 서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티볼트는 고개를 숙였으나 카포네가 혀를 차며 지팡이로 그의 턱을 들어올렸다. 잔뜩 살의가 가득한 티볼트의 진한 루비색 눈동자는 그가 가진 어떤 콜렉션 보다 진귀한 것이었다. 3년 뒤가 기다려졌다. 아직은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신실하기만 한 기사가, 얼마나 멋진 사내로 자라서 품에 들어올지. 

 

마피아는 기분 좋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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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캐해석이 있습니다.

※초회 공연 캐릭터의 크로스 오버입니다.

 

wings never broken

 

벤쟈민이 죽었다.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란스키녀석의 귀여운 동생 말이다. 패밀리에서 도망치듯 벗어난 이후에도 루치아노는 종종 보스와 연락을 했다. 편지를 쓰기엔 면이 서지 않아 동전 몇 개를 가지고 공중전화를 걸었다. 짧은 전화. 보스는 어제 만난 것 마냥 네놈들이 없으니 일이 느려졌다며 툴툴 거리면서도, 돈이 떨어지면 돌아오라는 말을 멋쩍게 남긴다. 패밀리로서의 생활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보스에게는 목숨 서너개 어치의 빚이 있었다. 루치아노는 벤쟈민이 좋아하던 사과주스를 묘비에 뿌려주었다. 패밀리를 나온 란스키와 루치아노는 가장 먼저 벤쟈민을 병원에서 퇴원시켰다. 벤쟈민에겐 더 이상 적극적인 치료는 필요가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기 떄문이다. 용감한 벤쟈민은 그렇다면 형과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몇 달치의 약을 타왔지만, 벤쟈민은 약의 반도 채 먹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여행하는 동안의 벤쟈민은 병원에 있을때 보다 훨씬 많이 웃었고 즐거워 했기 떄문에 란스키는 결코 후회는 없다고 했다. 단지 짧은 동생의 삶을 안타깝게 여기며 당분간 혼자 있을 시간을 달라고 했다. 루치아노에겐 처음부터 가족이 없었다. 고아로 태어나 길거리를 헤메이며 빌어먹고 살았으니, 란스키의 기분이 어떤 것일지 어렴풋이 슬픔이라는 감정 중 가장 깊은 것이리라 짐작했다. 며칠정도 함께 살던 집을 비워주기로 마음 먹은 루치아노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거리를 배회했다. 마피아를 그만 둔 이후로는 심부름 센터의 일을 도와주며 돈을 벌었다. 성격이 죽어라고 맞지 않는 것만 빼면 둘은 상성이 좋은 콤비였다. 란스키는 생활력이 좋은 편이라 짜증나긴 해도 곁에 두고 있으면 편했다. 아침이 되어서야 포커게임장을 나온 루치아노는 정처없이 걷다 버릇처럼 벤쟈민이 긴 기간 입원해 있었던 병원으로 향했다.

 

"이 병원은 변한게 없군."

 

루치아노는 벤쟈민이 치료받았던 병원 앞에 있는 공원을 한 바퀴 걸었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벤쟈민과 앉아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킬킬대며 웃었던 벤치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좋은 녀석이였는데. 수전노 란스키의 동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루치아노는 호흡기가 약했던 벤쟈민 때문에 담배를 끊었었다. 담배 한대를 끄트머리까지 모두 태운 루치아노는 병원 옥상에 올라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곳은 추억의 장소라면 장소인데, 벤쟈민과 둘이서 란스키에게 장난을 친다며 옥상으로 불러 깜짝 생일파티를 해주었던 곳이었다. 얼굴에 폭죽을 정통으로 맞고서도 건방지게 무뚝뚝한 얼굴이었던 란스키가 벤쟈민이 서툴게 만든 케이크를 보고선 처음으로 루치아노 앞에서 웃었던 날이다. 옥상의 문은 잠겨있었지만, 전직 마피아의 기술이라면 이 정도 헐거운 자물쇠를 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루치아노는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까치를 더 태웠다. 고작 몇 개월 함께 산 자신이 이렇게 쓸쓸하다면, 혈육인 란스키는 얼마나 괴로울까. 저답지 않게 감성적인 상념이 떠오른다. 진홍색 노을이 내려 앉아가는 하늘에 담배연기가 오르다 공중에서 사라진다.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던 루치아노는 이상한 하얀 물체가 머리꼭대기 한참 위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새라고 하기엔 커다랬고, 어떤 것인지 자세히 보기에는 너무 높았다. 아마 도시에서 보기 힘든 커다란 새일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새인줄 알았던 물체가 이상한 동선을 그리며 서서히 옥상으로 가까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루치아노의 미간은 의심과 당황으로 찌푸려졌다. 아무리 봐도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희미하던 실루엣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저 물체는 날개를 단 사람이었다. 꿈을 꾸는 걸까? 루치아노는 물고있던 담배가 바닥에 떨어지는 줄도 모른 채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기 몸통만한 날개를 단 사람이 루치아노를 바라보며 싱긋 웃더니 서서히 가까워지며 옥상 바닥에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
"뭔가 잘못이라도 한걸까?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거지?"
"아니...저...네 등 뒤에 날개가 달려있는데."
"그렇지. 나는 천사니까."
"....이 담배에 마약에 섞여있었나."
"후후. 당신. 재밌는 사람이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거야?"

 

아냐. 내가 미친 걸 수도. 루치아노는 천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아무리 미친 시절이라지만 갑자기 천사가 눈 앞에 나타날 것 까지는 없는데 말이다. 루치아노의 당황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천사는 커다랗게 펼치고 있던 날개를 수납하듯 접어 어깨에 붙였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루치아노를 가볍게 지나쳐 두 발로 걸어갔다. 루치아노는 무심코 걸어가던 천사의 날개에 손을 가져갔다. 새의 날개깃털 처럼 부드러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물고기의 비늘 처럼 미끈한 재질이었다.

 

"아얏! 뭐 하는 거야. 실례잖아."
"가장 연극이라던지...아니지? 진짜 천사?"
"응. 그렇지만 네 호기심에 대답해 줄 시간은 없어. 얼른 그녀를 만나러...아니, 이젠..."
"그녀? 천사가 누굴 만나러 온거지?"

 

루치아노는 옥상의 문으로 걸어가던 천사의 앞길을 막았다. 신기한 걸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천벌이나 신의 분노를 사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사람으로서 하지말아야 하는 짓을 한 두번 한 것도 아니고. 이런 타이밍에 만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 곳 없는 허망한 분노를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다. 이리 저리 피해 지나가려는 어딘가 어수룩한
 천사의 앞을 왔다갔다 하며 놀리듯 막자 천사는 가만히 멈춰서선 전혀 무섭지 않은 표정으로 루치아노를 노려보았다. 드디어 천벌이 내리는 걸까. 루치아노는 폭죽을 피하려는 아이처럼 눈을 슬쩍 찌푸렸다.

 

"비켜. 너랑 장난 칠 기분 아니야."
"헤에. 천하의 천사님이 뭐가 그리 바쁘셔서. 아니-. 잠깐만 있어 보라니까."
"뭐야. 소원을 들어준다던지 그런건 내 영역이 아니라서 부탁해봤자 소용없어."
"그런건 천년만년 빌어봐야 안들어 준다는거, 이미 알고있어."

 

더러운 무법지대를 굴러다니던 절망스러운 어린 시절에 루치아노는 셀 수 없이 많은 신에게 빌었다. 빌어먹을 인생을 구제해 줄 것이 아니면 그냥 거둬가시라고. 신은 아무런 대답 없이 텅 빈 손과 굶주린 배를 쥐어줄 뿐이었다. 결국 루치아노는 어떻게 해서든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허나 벤쟈민에겐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걸 결정하는건 누구지? 화풀이할 상대가 다르단 것은 알았지만 이미 터져버린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천사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분노와 처연함이 섞인 루치아노의 말에 서서히 기울어져 그대로 천천히 귀를 열었다. 그리고 제 풀에 식어버린 루치아노가 씩씩 대던 숨을 멈추자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똑같이 생각 하고 있는 바야. 내가 사랑하는 이도 아무 죄 없이 신의 곁에 불려가버렸으니까."
"....그게 방금 말하던 그녀?"
"맞아. 네가 말한 삶의 끝은 아무도 알 수 없어. 그것을 만든 신조차 알 수 없지. 동생의 일은 유감이야...나도 말이야. 이제 여기에 올 필요가 없는데도 매일 오게돼. 바보처럼."

 

천사는 루치아노와 똑같은 감정을 담은 눈동자를 하더니 옥상에서 나가는 손잡이를 잡았다가 그만 놓았다. 그녀가 죽었을때 주변의 천사들은 인간이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슬퍼하는 미카엘을 이상하게 여겼다. 인간은 그렇지 않으니, 부러웠다. 처음 만난 인간에게 세세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미 그도 짧게 살다간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그 답례라고 여기며 입을 열었다. 오늘로 이 병원에 오는것도 마지막이라고 굳게 다짐한 차였다.

 

"-. 천사가 인간을 사랑하다니. 그런 일도 있구나."
"이상하지 않아? 이를테면 인간이 파랑새를 사랑하는 일과 같은데."
"글쎄. 살면서 뭘 그렇게 사랑해 본적이 없어. 난 살아남는게 다인 인간이라. 딱히 이상하지도 않고. 파랑새라고 비유하니까 말이지. 예쁘잖아. 그럼 된거 아냐."
"그래? 후후. 그렇게 말하는 존재는 네가 처음이야."
 
어느새 루치아노는 천사와 둘이서 옥상 끄트머리에 앉아 보라빛으로 밤이 내러앉아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치아노는 천사의 흑단색 머리칼 위에 붉은 빛이 떨어져 신비한 색으로 바뀌는 것을 넋을 잃은 채 쳐다보았다. 하얀 날개는 더욱이 아름다웠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마피아로 살아오며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삶의 감각이 무뎌진 루치아노라 하더라도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천사란 모두 그런 존재인가? 이야기 하는 것 만으로도 마음속에 있던 오래된 묵힌 감정들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가 란스키에게 말하면 헛소리 집어치우라며 혀를 찰 것이 분명했다.

 

"담배 한 까치 피워도 되겠지?"
"마음대로. 그렇게 해서 너의 기분이 좋아진다면."
"뭐, 습관 같은 거야. 권유하긴 미안하네. 천사도 담배를 피는 줄 물어보면 어이 없으려나."
"재밌네. 어디, 여긴 날 관찰하는 자도 없을테니. 흠."

 

농담조로 던진 말에 천사는 덥썩 루치아노의 손에 있던 담배곽으로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남은 두개 중 하나를 가져갔다. 또다시 입에 물고있던 담배를 떨어뜨릴 뻔한 루치아노가 서둘러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천사는 아주 맛있게 담배를 삼키더니 길게 뱉어냈다. 구름처럼 하얀 연기가 어둠이 내려 앉은 머리 위를 흘러갔다. 밤이 된 병원은 고요했다.

 

"좋은 것을 피우네. 의외로 입맛이 고상한가봐."
"너무하네. 대놓고 무시하잖아?"
"장난이야. 아아..뭔가 편해졌어. 네 덕이야. 고마워."
"별 말을. 갑자기 무턱대고 소리질러서 미안하네."
"나는 소원을 들어 줄 순 없지만. 방향 정도는 잡아 줄 수 있지. 지금 너와 함께사는 자가 너의 미래를 이끌 열쇠가 될거야. 놓치지 않도록 해."
"하아? 란스키? 그녀석은 안 될 놈이야. 어딘가 고장나 있다고."
"담배 잘 태웠어. 남은 길에 행운이 따르길. 이 미카엘의 말을 따라서 손해볼 건 없을거야."

 

천사는 접고있던 날개를 뒤로 길게 피우더니 만개하듯 크게 펼쳤다. 미카엘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보다 훨씬 웅장한 모습이었다. 루치아노는 무심코 우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몇 번 천천히 날개를 아래 위로 퍼덕이더니 작은 발돋움으로 공중에 살짝 떴다. 밤이 되어 하늘에는 구름 그림자와 솟아나는 볓들이 몇개 빛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거지?"
"비밀이야. 이건 마지막 선물."

 

루치아노의 허리보다 높은 곳에 둥둥 떠있던 미카엘이 손으로 루치아노의 머리칼을 넘겨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작은 빛이 이마에서 별처럼 반짝이다 사라졌다. 마음을 나눈 이에게 작은 축복을 나누어 준 미카엘이 루치아노에게 싱긋 미소지어주었다. 루치아노는 기습당한 이마를 손으로 닦으며 머쓱하게 손을 흔들었다.

 

"고..고마워?"
"천만에."

 

미카엘이 밤 하늘을 날아올라 다시 내려다보고 커다랗게 손을 흔들고는 점점 새하얀 점으로 사라졌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루치아노는 남은 마지막 담배를 태우고는 벤쟈민을 위해 잠시간 기도했다. 별처럼 스러진 소중했던 친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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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KSHAKE 






한동안 아무 일 없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 타스쿠는 매일 아침 조깅을 한시간 하고, 정원에서 가벼운 맨손스트레칭을 한다. 아침이 먹을 시간이 되면 기숙사 방으로 올라가 츠무기를 깨웠다. 아침 정도는 걸러도 괜찮다고 손사래치는 츠무기를 억지로 끌고가다시피 깨워서 식당에 앉혀놓는다. 학교에 가는 단원들은 이미 말끔히 교복을 입은 채로 간단히 토스트만 물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모두가 바쁜 아침나절와중에 식탁 위에서 까지 꾸벅꾸벅 졸고있는 츠무기를 그대로 앉혀놓고 있기는 타스쿠도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어쩌면 어릴때와 변한게 하나도 없을까. 이제 스물 네살이나 되었는데 말이다. 츠무기는 드디어 타스쿠가 손에 쥐어준 토스트를 그대로 떨군채로 고개까지 숙이면서 졸고 있었다. 겨울조가 모두 아침 식탁에 모이는건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다. 아즈마나 히소카 역시 아침잠이 많았기 떄문에 아침을 거르는 일이 많았다. 무염 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입에 문 아즈마가 병든 병아리처럼 졸고 있는 츠무기를 바라보며 웃었다. 


"츠무기, 여전히 아침에 약하구나. 뭐어. 나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건 고역이지만."

"어이, 츠무기. 적당히 하고 일어나. 정말..."

"여기도 일어나야한다네, 히소카군. 토스트 위에 마쉬멜로우 얹어줄테니까."

"졸려...오늘 아르바이트도 없는데..."

"아르바이트가 없으면 이렇게 늘어지는거냐. 그럼, 오늘 같이 어울려줘."

"으응..? 타스쿠가 왠일이야. 볼 일이라도 있어?"

"마침 먹던 프로틴 쉐이크도 떨어졌고. 참고자료로 볼 책도 챙길 겸 서점도 가야해."


타스쿠는 특별히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는 성격도 아니었고, 정기적으로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운동이나 심부름 외에는 쇼핑을 가자고 제안 한 적은 없었다. 츠무기는 끔뻑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감독의 심부름을 셋이서 어울려 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둘 만의 외출은 오랫만이었다. 츠무기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타스쿠가 손에 쥐어 준 토스트를 입에 물었다. 츠무기가 좋아하는 무염버터를 잔뜩 바른 토스트였다. 타스쿠는 이미 아침에 조깅을 하고 샤워를 마친 상태이니, 츠무기는 아마 열시 쯤이면 준비를 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타스쿠에게 말했다. 


"둘이서 외출하는거 오랫만이니까, 여러가지 보고 오자."

"볼일만 보면 돌아와야해. 오후엔 연습이 있으니까."

"..그, 그랬지. 참. 나도, 리더면서 잊어버리다니."

"흠..오늘 오후에 갑자기 일이 생길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렇지 호마레?"

"호오. 흠흠. 그래그래. 이 몸이 갑자기 출판사와 미팅이 잡혔다네."

"이런, 어쩔수 없이 오후 연습은 저녁으로 미뤄야겠네. 그러니 좀 더 길게 놀다 와도 좋아, 타스쿠."

"명색이 배우면서 그렇게 어색한 연기라니.."


 아즈마가 호마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눈을 찡긋였다. 츠무기가 정원에 핀 예쁜 꽃들을 보며 타스쿠에게 기쁜 듯 이리저리 말해도 늘 시큰둥한 얼굴로 그 꽃이 그 꽃 같다고 대답하는 딱딱한 목석같은 태도에 주변에서 보는 이가 더 답답했다. 그러나 츠무기도 이렇다하게 적극적인 성격도 되지 못하는 지라, 둘 사이는 늘 애매하게 마침표 없이 늘어지고 마는 것이다. 


츠무기는 빠르고 말끔하게 샤워를 하고 잘 뿌리지 않는 샤워코롱을 뿌렸다. 너무 의식하는 걸지도 모른다. 어짜피 타스쿠는 츠무기가 무슨 향을 뿌리고 오든 알아채지 못할게 분명하다. 시원하고 상쾌한 향이 목덜미에서 은은하게 느껴졌다. 만족한 듯 살짝 미소지은 츠무기는 늘 입던 줄무늬 티셔츠 대신 하얀 린넨 셔츠를 꺼내 입었다. 발목까지 오는 검은 바지를 입고 1층으로 내려가자 아침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던 타스쿠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다 됐어? 가자."

"짐은 없어? 지갑은?"

"뒷 주머니에 있어. 가까운 상점가니까 걸어가도 되겠지?"

"응. 혹시 모르니까 운동화 신어야겠다. 타스쿠의 템포에 맞추려면 구두는 힘들어."

"그 저질 체력좀 어떻게 안되는거냐. 아무튼. 가자."

"다녀오겠습니다-."


타스쿠와 함께 소파에 앉아있던 아즈마가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다. 현관을 나서던 츠무기가 슬쩍 타스쿠의 팔에 손을 끼웠다. 타스쿠가 슬쩍 쳐다보더니 팔짱을 풀어 다시 츠무기의 손을 잡았다. 두껍고 건조한 타스쿠의 손 안에 츠무기의 손이 들어가 겹쳐졌다. 천천히 늦은 오전의 길을 걸으며 상점가로 걸어갔다.


"팔짱은 왜.."

"그거야 이렇게 하지 않으면 타스쿠의 걸음이 너무 빠르니까. 날씨도 더운데 빨리 걸으면 땀도 나고, 힘들어."

"하아...차라리 손을 잡아. 가방 들어 줄까?"

"아냐, 괜찮아. 어디부터 갈까? 트레이닝 샵?"

"거리 상으로는 그게 제일 가까워. 너도 작은 덤벨 정도는 사서 운동 해 볼래? 지금부터 운동 해도 늦지 않은데.."


타스쿠는 요즘 츠무기의 체력이 진심으로 걱정되고 있었다. 세시간 남짓 연습을 하고나면 곧 죽을 것 처럼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한참은 늘어져 있어야 일어날 수 있었다. 겨울조의 다른 단원들도 체력이

 좋지 않은 편이였지만, 츠무기는 그 중에도 하위권이었다. 여름이 다가오자 야외에서 하는 정원일도 벅차는 지 그늘에서 쉬는 시간이 늘어났다. 20대 남자의 체력보다 훨씬 수준 이하의 것이었다. 극단에 다시 들어오기 전의 생활이 어땠는 지는 몰라도, 하루에 한끼 정도 챙겨먹고 다녔다고 지나가며 말하던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하하. 나는 정원을 돌보는 것으로 충분히 운동하고 있다고 생각해. 점심으로 먹고 싶은 것이라도 있어? 지금 상점가에서 여름 디저트 페어를 하고 있네. 디저트계열은 타스쿠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뭐든 상관없어. 네가 먹고 싶은 것으로 해."

"아무거나라면...치즈 오므라이스 인데도?"

"...그냥 오므라이스도 있겠지."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타이치군이 준 밀크쉐이크 무료 티켓이 있어. 햄버거는 어때?"

"괜찮아. 가끔은 정크푸드도."


츠무기는 타스쿠가 트레이닝 샵에서 프로틴 쉐이크가 든 커다란 통을 금방 고르고 나올때 까지 커다란 덤벨이 무게 순서대로 놓여있는 진열장 앞에 서서 신기한 듯 덤벨을 구경했다. 들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자신감에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8kg짜리 중간에 놓인 덤벨을 들어보려 했으나 덤벨은 상상이상으로 무거웠다. 


"으아. 무거워. 안돼..안돼.."

"뭐하는거야. 그렇게 손목을 꺾어서 들면 큰일나."

"하마터면 땅에 떨어뜨릴뻔 했네. 고마워, 타스쿠."


타스쿠는 가볍게 덤벨을 들어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츠무기가 한숨을 내쉬며 덤벨을 들었던 손목을 주물렀다. 부끄럽게도 무게에 놀랐는지 손이 떨리고 있었다. 타스쿠는 바닥에 떨어진 츠무기의 가방을 주워들고 츠무기의 손목을 잡아 가게 밖으로 나왔다. 딱딱해진 타스쿠의 얼굴을 보며 츠무기는 괜찮다며 손목을 흔들어보았다. 아직 욱신거리지만 그렇게 많이 아픈것도 아니고, 참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왜 갑자기 그런 짓을 하는거야."

"미안, 미안. 조금 지나면 괜찮아 질거야. 가방도 혼자 들 수 있는데..."

"됐어. 점심 먼저 먹자. 앉아서 쉬었다가 서점에 가자."

"좋아. 버거 사진 찍어서 타이치군에게 자랑해야지."

"나나오가 그런 걸로 부러워 할까?"

"후후. 아직 학교에 있을테니까. 어른의 여유- 랄까."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버거 세트와 타이치가 준 밀크쉐이크 쿠폰을 써서 쟁반 한가득 음식을 받아온 타스쿠가 자신의 몫인 제로칼로리 콜라를 먼저 앞에 돌려놓았다. 밀크쉐이크에는 빨대가 하나 밖에 꽂혀있지 않았다. 츠무기가 쟁반에 있던 빨대를 하나 더 가져가 밀크쉐이크에 꽂으려 하자 타스쿠가 자신은 먹지 않는다며 손을 저었다. 


"여기 밀크쉐이크 맛있는데."

"너무 달짝지근할거 같아서. 나는 이거면 돼."

"타스쿠가 햄버거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해주면 다들 놀라할거야."

"그게 왜. 햄버거 정도는 대학생 때도 종종 먹었는데."

"대학생때를 알고 있는건 극단에서 나 밖에 없으니까..갓 튀긴 감자튀김 맛있네."


타스쿠는 빠르게 자신의 앞에 놓인 감자튀김을 여러개 집어먹었다. 우걱우걱 집어먹는 모습이 기다란 감자튀김을 먹는 것이 아니라 팝콘을 집어먹는 것 처럼 단순했다. 츠무기는 감자튀김 하나를 천천히 입술로 오물거리면서 먹으며 타이치에게 라임을 보냈다며 타스쿠에게 휴대폰화면을 보어주었다. 몇분이 지나지 않아서 타이치에게서 우는 모양의 이모티콘이 여러개 전송되어왔다. 


"하하. 이것봐. 타이치군이 부럽다고 라임을 보냈어."

"수업시간 아냐? 이런 이모티콘은 어디서 난거야.."

"귀엽네. 기숙사에 포장해서 들고가고 싶지만, 식으면 맛없겠지."

"잠시만. 입에 묻었어. 츠무기."


입가에 묻은 햄버거 소스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내자 츠무기는 당황한 기색으로 이미 닦인 입가를 티슈로 두어번 더 닦았다. 아무렇지 않게 소스를 닦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핥은 타스쿠가 다시 자신의 햄버거를 커다랗게 입에 물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순간 부끄러운것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멈춰버리고 말았다. 혼자서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부끄러워졌다. 


"말해주었어도 닦았을텐데..."

"손 잡는건 먼저 하면서, 이런건 부끄러운거야? 기준이 이상하잖아."

"정말, 동갑이면서 애 취급하는거 같아서..."

"그렇지 않아. 손이 먼저 움직였을 뿐이야."


다 먹은 햄버거 껍질을 구겨 쟁반 한 구석에 던져놓은 타스쿠가 밀크쉐이크를 입에 물고 있던 츠무기의 입술에 마지막 한 방울이 묻은것을 발견했다. 알고 있는 것인지.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심리에는 머리회전이 빠른 츠무기였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일은 조심스러운지 일종의 방호벽을 드리우고 있었다. 새하얀 밀크쉐이크가 빨대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내리려 서서히 녹고 있었다. 타스쿠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는 몸을 일으켜 츠무기의 턱을 잡고 흐르는 하얀 액체를 핥으며 입술을 맞추었다. 


"!!!!"

"방금 말했는데도, 그렇게 묻히고 있는건 네 잘못이라고 생각해."

"으아..여기 손님 많은데...!!!"

"아무도 우리한테 관심 없어. 먹던거나 마저 먹어."


한 방울 먹었을 뿐인데 밀크쉐이크는 엄청나게 달아서 혀가 얼얼했다. 두 번이나 가까이 한 츠무기의 목덜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시원한 샤워코롱의 향기가 난다는 것을 타스쿠는 그제야 깨달았다. 츠키오카 츠무기란 그런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가까이 있지만 흐트러지지 않는다. 꽃은 매일 보아도 아름답다고 츠무기가 며칠 전 꽃을 사오며 말했다. 무심코 넘긴 말이 머릿속에서 다시 의미를 가지며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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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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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타] 백야

짧은것/A3! 2017. 6. 6. 22:09

※ 개인적인 캐해석이 있습니다.

※ 반리의 얀데레 묘사가 있습니다.

※ 비도덕적인 묘사도 있습니다.

※ 하나하키 AU, 다소 잔인하거나 징그러울수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백야

 

반리는 오늘도 학교를 가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를 갈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 선생들에게 늘 똑같은 변명을 한다. 학교의 목적이 학력이나 인간관계의 확장을 위한 것이라면, 반리에게 그런것은 필요없다. 잔소리 듣기가 귀찮으니, 교복을 입고 기숙사를 나선 반리는 학교 문턱에서 슬쩍 사쿠야와 마스미를 따돌리고 뒤로 걸어갔다. 이미 두사람도 반리의 등교거부를 포기하고 눈감아 주는 일이 많았다. 일본의 꽉막히고 획일화된 교육방식과 맞지 않는 것이라고 두 사람을 간단히 설득했고, 둘은 판단없이 반리의 등교거부를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등교하는 학생들로 시끄러운 두 블록 사이를 여유롭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벗어난 반리는 서서히 걷는 속도를 줄였다. 대신 곰곰히 생각하며 머리의 회전율을 올렸다. 이타루가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은지 하루. 그러니까 21시간 정도 지났다. 회사에서 급하게 철야라고 하는게 아닐까-. 다들 별일 아닌 것 처럼 여긴다. 신작 게임때문에 철야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키였던가. 한참을 걷자 행인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만약을 대비해 백팩에 넣어두었던 커다란 흰색 마스크를 꺼내 썼다. 근방은 폐건물이 많은 곳이라, 철거되다만 앙상한 건물이 드문드문 있었다. 주변의 비행청소년들이라면 다들 이 곳을 한번쯤은 와 본적 있을 것이다. 조심성 없는 발걸음에 먼지와 모래가 푹푹 날렸다. 반리는 여러개의 골목을 꺾어 들어가 1층 크기의 컨테이너박스 앞에 섰다. 6월에 접어들어 햇빛이 제법 따가웠다. 창문 하나 없는 컨테이너는 뜨겁게 익어가고 있었다. 주머니에 든 작은 카드지갑에서 날카로운 열쇠를 꺼내든 반리가 다시 밀려오는 토악질을 욱욱대며 삼키며 문을 열었다. 빌어먹을 꽃잎이 목구멍을 틀어막으려하자 반리는 손가락을 집어넣거나 배를 갈라 몸 속의 씨앗을 꺼내고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씨발...우욱...우웩.."

 

진득한 위액과 타액에 섞인 진분홍빛 꽃잎은 축축하게 젖은 채로 모래바닥에 천천히 낙화한다. 인터넷 괴담으로 떠돌던  하나하키. 꽃을 뱉는 병이란 소설에나 나올 법한 말도 안되는 이야기. 현실이란 원래 비논리로 가득 차있다. 초능력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면 초능력을 쓰게되는 인간이 나타나게 되는 것 처럼, 그럴싸하게 꾸민 하나하키라는 이야기가 점점 퍼지자 정말 그런 증상을 나타내는 사람이 발견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례들이 소문처럼 퍼져나가 인터넷 괴담이 되어버린걸지도 모른다. 사례가 늘어나자 매스컴이 들러붙기 시작했고, 괴담의 끝무렵 사랑이 이루어지면 하나하키가 멈추게 되는가에 대한 것도 실험해보는 이가 늘었다. 반리는 하나하키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부터 천천히 몸에서 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증상이 하나하키란 것도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엔 가벼운 증상이었다. 기침이 늘거나 가래가 많은 정도로 뱉어내면 진득한 가래와 마른 꽃봉오리가 섞여 나왔다. 몇 달 동안 꽃의 부속물을 뱉어내는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반리는 자신의 꽃이 이타루를 향한 마음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이타루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후부터 몸 속에서 꽃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굳이 원인을 찾자면 그것이 아닐까 추론했다. 이타루는 쉬운 상대는 아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그의 사랑을 얻는건 어렵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반리의 오만이었다.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이타루에 대한 마음을 숨길 수 없을 정도에 이르자 반리는 이타루와 밤새 게임을 하다가도 목구멍에 차오르는 꽃잎때문에 몇번이고 화장실을 가야만 했다. 이타루는 반리는 그저 놀기 좋은 게임동료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분명 둘은 가까운 사이였지만, 반리가 원하는 그런 식의 관계는 되지 못한다. 차라리 먼 사이였다면 이렇게 바라지도 않을텐데. 그것이 하나하키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 아닐까. 첫 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춘기처럼 심장이 조이고 두근거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섣불리 고백을 한다해도, 이타루는 반리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선명한 결론이 괴로웠다. 그래서. 라고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는다.

 

"어이. 이타루씨-. 어휴. ..더워."

 

이타루는 잠들어있었다. 아니,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다. 이타루는 반리에게 아무런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리가 종종 패싸움을 하는 부류란것도 알고 있었으면서도, 게임중독자라는 것만 빼면 평범한 회사원의 시각에서 치기어린 비행청소년 정도로 반리를 여기고 있었다. 언젠가 얻은 튼튼한 수갑으로 컨테이너 안에 세워진 철기둥에 이타루의 손을 묶어버린 반리는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 이타루의 휴대폰을 가뿐히 빼앗아 전원을 꺼버렸다. 예상보다 이타루의 반항은 미약한 편이었고, 여러 싸움으로 길들여진 반리의 힘에 이타루는 가볍게 통제를 포기해버렸다. 재미없게, 바로 몸의 힘을 풀고 순순히 따르는 이타루의 모습 조차 너무도 이타루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반리는 이타루의 손을 잡고 한참이나 구역질을 하며 꽃을 뱉어냈다. 위장까지 다 뱉어낼 요량으로 깊게 토악질했다. 추악한 가정의 산물이 젖은 꽃잎의 모양을 하고 이타루의 손 위에 축축하게 떨어진다. 수치스러웠다. 벌겨벗겨져 모든것을 보여주는 기분이었다. 반리는 죽을만큼 더러워진 기분으로 숨을 몰아쉬며 입을 닦았다. 이타루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꽃이지? 코스모스?"
"...알바냐. 제대로 된 모양은 이제야 봤어."
"무슨 상황인지 아직까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반리에게 납치되었고, 반리는 꽃을 토하고. 이거 현실?"
"납치라니. 이야기좀 하자고...우..우욱.."
"진행이 안되는데."

 

그 뒤로도 한참 꽃과 위액을 토하다가 쓰린 배를 잡고 주저앉아버렸다. 이타루는 기둥에 묶인채로 바닥에 앉아 몸부림치는 반리를 몇번 부르다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꼬여버린건지 이타루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도 많았다. 영문을 모르니 오히려 반항할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다. 적당히 설득하면 해결될 것이다. 장소는 좀 으스스하긴 해도, 격투게임의 무대같은 느낌이라 생각하면 무섭지 않았다. 생각 없이 저질러놓고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절실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반리와 말없이 눈을 맞추었다. 말 없이도 어떤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날 좋아해줘. 날 사랑해줘. 날 당신의 생활영역 안에 넣어줘. 나와 특별한 관계가 되어줘. 어린아이가 원하는 인형을 갖기위해 떼 쓰는 것 처럼. 반리는 소리없이 외치고 있었다. 반리가 토해낸 여러 색의 젖은 코스모스 꽃이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버린 반리의 얼굴과 옷에 붙어있었다. 충동적인 사랑이라기엔 한번도 본 적 없는 진심이었다. 어째서-. 라고 물어봤자,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유로 인하여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게임의 선택지라 여겨본다면,  YES와 NO모두 배드엔딩이었다. 혼란 스러운 만큼 머리가 깨질듯이 울리고 있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 했다. 어제 정신을 잃을 적에 얻어맞은 머리가 아직 얼얼 했다.

 

한참의 공백 끝에 이타루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연상이고, 지금 불리한 쪽은 이타루였기 때문에 먼저 나서야만했다. 이대로 반리가 타락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모든 조건을 차치하고 생각해본다면 반리와 섹스한번 쯤 해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일일것이다. 잘생겼고, 몸도 좋았다. 무엇보다 좋은 녀석이었다. 학생이라는게 좀 걸리긴 했다만, 반리 또한 자신을 학생으로 정체화하는 경우는 적었다. 섣불리 손 대지 않는 것은 이타루의 마지막 남은 양심에서였다. 같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연하에게 손을 뻗었다는 본인만의 죄책감을 견디고 싶지 않았다.

 

"반리. 괜찮아? 진정해봐. 네가 말하는 이야기 좀 하자구."
"으윽...아아. 이제 좀 가라앉았어. 기분은 최악이지만."

반리는 몸을 부르르떨고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는 기색이었다. 이타루도 울렁이는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세게 꾹 감았다 떴다. 어긋난 반리와의 관계를 바로 잡아야한다. 지금 두 사람은 엇갈린 칼날 위에 서 있었다.

"이쪽도라고. 응. 그러니까. 반리가 나를 좋아하는 거지?"
"그걸 이제야 알았냐? 덕분에 좆같은 병이나 생겨버려서, 죽겠어."
"그럼...내가 반리를 좋아하면 해결되는 부분?"
"하아?"

 

그걸 그렇게 쉽게 이야기 하는거야? 반리는 오히려 반박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앓아왔던 연정인데 이타루는 너무 가볍게 여기는게 아닌가. 반리는 좀더 진지하게, 깊이 이타루를 여기고 있다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게 뭐가 어때서? 무거운 관계는 딱 질색이었다. 서로가 없다면 죽어버리는건 게임의 배드엔딩으로 충분하다. 반리가 두가지 선택지로 뜬다면, 분명 YES를 선택 한다. 이타루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의 반리를 향해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다.

 

"좋아. 반리라면 섹스해도 좋으니까. 지금 할까?"
"무슨 개같은 소리야?"
"나, 반리가 그렇게 싫짆 않으니까. 섹스 한번 하면 좋아질지도."
"진심이야?"
"레알 진심."

 

미쳤어. 반리는 이타루를 허무하게 응시했다. 이타루를 바라보기만 해도 뱃속의 씨앗들이 들끓었다. 이타루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관계를 갖는 상상을 수십번 반복해왔다. 자신의 것을 삽입하고 이타루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삼켜버리면 이 욕망이 가라앉을수 있을지도 모른다. 코스모스가 잔뜩 뿌려진 폐허에서 반리는 스스로 일어나 그 꽃들을 마음껏 짓밟는 환상을 보았다. 짓이겨진 꽃에서 풋풋한 향이 나는 착각마저 느껴졌다. 이타루가 쏜 형태없는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고, 구멍없는 상처에서는 피대신 꽃봉오리들이 쏟아지는 꿈을 찰나의 어둠속에서 보았다. 이곳에 아름다운 사랑은 없다. 어둠의 끝에서 만난 이타루가 빛이라고 생각했던 것 또한 반리의 착각이었다.

 

"이타루씨. 정말 좋아한다구요."
"아무리봐도 그렇네. 나쁜아이가 되어버리기 전에, 이것 좀 풀어줘?"
"도망가버리면?"
"나 그렇게 신뢰없는 사람이였냐. 먼저 옷이라도 벗기고 키스해도 좋아. 마음대로 망가뜨려봐."
"나야말로 그런 사람 아니니까."

 

반리는 이타루가 묶인 기둥 앞으로 기어갔다. 이타루의 가슴에 타액과 꽃조각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묻고 이타루의 빨라진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마음이 혼자만이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믿으며,  고개를 돌려 바닥에 침을 한번 뱉고는 말라붙은 땀으로 부쩍 수척하지만 여전히 빛나는 이타루의 몸을 파고들었다. 하나가 된 주변에 흥건했던 코스모스가 건조되어 바스락 거리며 산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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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 연성 반이타로 포인세티아.축하. 성스러운 밤의 꽃. 나의 마음이 불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캐해석이 다분합니다

※반리는 모델, 이타루는 아이돌 입니다.



모래로 만든 성 위에 군림하는 황제의 근심은 날이 갈수록 늘어간다. 셋츠 반리의 세계는 이미 짜맞추어진 루미큐빅처럼 모든것이 완벽했다. 장난처럼 뛰어든 모델이라는 일은 멋내기 좋아하는 그에게 재밌는 놀이와도 같았다. 어떤 장르를 갖다대어도 반리가 입는 순간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다시 태어났다. 그것을 반리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모델이라는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아니, 모델일 조차 반리에겐 여유로웠다. 좋아하는 옷을 골라 입으며 분위기에 맞는 표정만 지으면 되는 일이었다. 길거리에서 캐스팅 당해 실제로 모델일을 하면서 에튀튜드며 자세교정을 배웠다. 학교는 등교일수를 계산해 가며 나가고 있었고, 일이 없는 날에도 학교는 종종 쉬었다. 수업을 빠지더라도 공부를 따라잡는것 또한 반리에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반리에게 어려움이란 휴대폰에 서너개 다운받아서 하고 있는 게임의 가챠가 몇백번 이상 실패했을때, 혹은 게임 센터에서 늘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던 게임의 순위가 언젠가 바뀌어 있을때. 뭐 그런 시시한 것들 뿐이었다. 반리는 최근 몇 주 동안 진행중이던 프로젝트를 꽤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게임센터에 대한 것은 잊어버린 채였다. 반리가 마지막으로 게임센터를 들렸을때 항상 1위에 적혀있던 반리의 닉네임인 NEO가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럴리가. 그럴수가? 위장용으로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있던 반리가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고 맨눈으로 게임기의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전에 세워놓은 기록보다 훨씬 높은 스코어가 1등으로 여유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TARUCHI?”


처음보는 닉네임이었다. 나름 골수팬층이 많은 고전 게임이라 반리처럼 높은 스코어를 세우는 플레이어들은 도장을 찍듯 자기만의 닉네임을 쓴다. 방송국 근처의 게임센터는 종종 연예인들이 찾아와 여가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곳이었다. 반리는 잔뜩 약이 올라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털어 게임을 했지만 타루치가 세워놓은 기록보다 몇십만점은 모자랐다. 한 시간 동안 반리는 게임을 했고, 끼고있던 마스크까지 벗어 콘솔 위에 올려두었다. 그만큼 집중해서 했는데도 NEO의 기록을 깰 수 없었다. 2위의 이름에 NEO를 박아버리고는 분한 듯 게임기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뭐가 문제지. 집에 돌아가면 공략사이트를 한번 더 봐야하나. 반리는 벗어놓은 마스크를 코끝까지 밀어올리고는 웅크리고 있던 허리를 폈다.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에 팔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헤에. 꽤 하는데.”
“뭐야?”
“검은 마스크에 검은 선글라스. 연예인? 뭐, 아이돌 쪽은 아닌것같네.”
“뭐냐고 너는?”
“나는 TARUCHI. 잘부탁해. 내 기록을 깨긴 힘들겠어, 그런 플레이론.”


고개를 돌리자 반리처럼 검은 마스크를 끼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서있었다. 반리는 얼굴 보지 않아도 그가 꽤 잘생긴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느낌이나 첫인상. 직감적인 부분은 반리가 특히나 자신하는 것이었다. 입고 있는 헐렁한 파란색의 블루종과 적당한 길이의 검은 바지 만으로도 그 남자가 상당한 패션센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리는 어깨에 올리고 있던 남자의 손을 떼어버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면인 사람에게 도발당하고도 참을 만큼 유유한 성격이 아니었다. 반리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가 쓰고있던 선글라스를 휙 가로챘다.
“어, 너는?”
“무례하잖아. 선글라스를 꼈다는 건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아서인데. 너도 알고있지?.”
“하. 아니까 벗긴건데? 어디서 굴러먹는 새낀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정말로 이 점수를 낸 게 맞다면 지금 당장 증명해보라고. 머리 꼭지 돌아버릴것 같으니까.”
“어디서 굴러먹던 새끼가 아니라 나는 치가사키 이타루. 나 몰라? 이번에 세번째 싱글 냈으니까 잘 부탁해.”


모른다고 받아치려던 반리는 엉겁결에 받아든 앨범의 얼굴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지하철이며 TV에 종종 보이던 반질한 얼굴이었다. 하얀 정장을 입고 알록달록한 꽃다발을 내미는 사진과 그와 똑같은 CD커버를 선전하고 있었다. 사진만 봐서는 감성적인 노래를 하는 가수인가-. 하고 짧게 생각했다. 아이돌인지 뭔지, 내 알바는 아니고. 반리는 우선 받아든 앨범을 등에 매고있던 메신저백에 넣었다. 이타루는 어느새 자리에 앉아 여유로운 모습으로 500엔짜리 동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왜 증명해보아야하지? 치가사키. 이타루. 타루치. 이게 증명인데.”
“닥치고 하기나 하라고. 내가 봐야겠어.”
“너, 셋츠 반리지? 요즘 뜨고 있는 모델. 인스테에서 봤어.”
“그렇다면?”
“내가 타루치란걸 증명하게되면, 내 이번 CD랑 사진 찍어서 인스테에 올려. 나는 작은 프로덕션소속이라, 광고하기가 꽤 힘들거든.”
“응? 지하철에서 봤는데.”
“그건 팬들이 사비로 해준것. 우리 소속사는 광고한번 내보내는것도 기둥이 휘청할 정도로 자금이 부실하거든.”


MANKAI프로덕션. 개인이 운영하는작은 프로덕션이랬던가. 이타루는 아이돌 치고 늦은 나이에 데뷔를 한 편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이타루를 캐스팅한 MANKAI프로덕션은 개성있는 가수들을 키워내는 것이 특징이었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엔 많이 부족했고, 언제나 자금난에 시달렸다. 회사원일 적 모아놓은 자금을 조금씩 끌어다 쓰며 지금의 아이돌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따분했던 회사원 시절이 남긴 유일한 유산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앞에 나서는것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멋지거나 때로는 귀여운 옷을 입고 좋아하는노래를 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점점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이 늘어나는것, 자신의 이름이 적힌 앨범을 만드는것은 회사원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뭐. 그정도야. 인스테 팔로워수 그렇지 많지 않지만..10만 정도였나.”
“에엑. 엄청나잖아. 좋았어. 타루치를 뛰어넘는 타루치 등장이다.”


이타루는 입고있던 블루종을 벗어 무릎에 내려놓고 얇은 티셔츠의 팔을 걷었다. 반리는 무심코, 버릇처럼 적당히 각둑선 손과 이어지는 손목에 눈을 가져갔다. 과연 아이돌. 반리의 손보다는 작아보이지만, 길다랗고 쭉 뻗은 모습이 멋들어졌다 .이타루는 콧노래를 부르며 한쪽 다리를 떨며 여유로운 모습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손의 움직임을 따라 잡을 수 없을정도로 빠른 속도로 플레이를 이어갔다.


“이게 가능한거냐고…?”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러면, 뭐라고 말해줘야하지?”
“대단해...치가사키씨. 아니, 이타루 씨라고 불러도 괜찮겠지?”
“바로 호칭 줄여버리네. 괜찮지만. 반-리.”
“와. 나 저 보스 세번이나 실패했는데. 생명력 보존하는거 쩔어.”
“흐름을 알면 적당히 패스가 가능한 스테이지니까.”


반리는 어느새 이타루가 했던 것 처럼 이타루의 어깨를 잡고 그의 플레이에 이것저것 첨언했다. 모델업계 녀석들은 몸매관리와 식이조절, 옷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리는 그저 재미를 위해 일 하는것 뿐이라는 철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자신을 혹독하게 밀어붙이지 않아도, 적당히 좋은 피사체가 되니까. 동종업계에서 게임으로 말이 통한 상대는 이타루가 처음이었다. 이전에 이타루가 세웠던 기록보다 더 높은 점수를 내고는 짜잔. 하고 손을 마주친 이타루가 다시금 TARUCHI의 이름을 유저명에 넣었다. 그리고 매고있던 크로스백에서 이번에 나올 앨범에 커다랗게 사인을 하고는 반리에게 내밀었다.


“하하. 사인도 타루치였잖아. 좋아. 사진 같이 찍어서 올릴까?”
“아. 나 오늘 메이크업 안했는데. 별로 상관 없지만.”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은 두 사람은 반리의 휴대폰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타루의 앨범을 들고 있는 사진을 인스테에 올리고, 서로 번호를 교환하며 다음에 시간날때 함께 게임을 하자고 기분 좋은 약속을 하고서 헤어졌다. 이타루는 쇼케이스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당분간은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어짜피 좌석이 다 채워지진 않으니 반리도 시간이 된다면 와도 좋다며 티켓과 장소를 알려주었다. 시끄러운 락 계열의 노래를 좋아하는 반리로서는 흐응. 시간이 되면. 하고 미지근한 대답을 하며 받은 티켓을 주머니에 넣었다.


반리가 이타루와 찍은 사진은 생각보다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두 사람 모두 상큼하게 웃는 사진은 잘 올리지 않는 타입이였으므로, 갑자기 알 수 없는 둘의 관계가 어디서 이루어진건지, 물어보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그냥 지나가다 만나서. 라고 반리는 웃어넘겼고, 이타루는 우연히. 라며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반리는 시간이 나면 이타루의 소식을 찾아보았다. 세번째 싱글. 가벼운 팝계열의 노래가 상쾌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와닿진 않았다. 대중들의 반응도 반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돌이 유행인 시대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비슷한 계열의 노래가 수두룩했다. 반리는 이타루에게 받은 구겨진 쇼케이스 티켓을 가방에서 찾았다. 날짜는 내일이었다. 이번 앨범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좀 위험할지도. 라고 이타루는 말했다. 반리가 간다고 해서 큰 반향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이타루와 한번 더 게임은 하고 싶었다. 간만에 게임으로 통한 상대니까 도와줘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반리는 내일 입기로 마음먹은 검은 티셔츠와 같은 계열의 찢어진 청바지를 걸어두고 잠들었다.


*


이타루의 쇼케이스는 작은 소공연장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린 반리는 공연장이 있다고 적혀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줄을 서야한다면 귀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예상 외라고 해야할까.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이 공연장 앞에 서있을 뿐이었다. 반리는 고개를 들어 소극장에 적힌 이름이 이타루의 앨범명이란걸 알아채고는 줄의 끝에 섰다. 일반인과 다른느낌을 풍기는 반리를 슬쩍 쳐다보던 사람들이 반리의 이름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저번에 인스테에 올렸었지-. 둘이 친한가봐. 하는 말들이 반리의 귀에 들렸다.


“오늘 와줘서 모두 고마워. 이번엔 정말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잘 부탁해.”


앨범쟈켓과 똑같은 새하얀 정장풍의 의상을 입고 나온 이타루가 스탠딩마이크를 잡고 섰다. 한껏 단정하게 메이크업한 모습이 영락없는 아이돌의 모습이었다. 반리는 뒤쪽 좌석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대충 듣고, 마치면 대기실에 가서 인사만 하고 집에가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타루가 노래를 시작하자, 반리는 보고있던 휴대폰을 끄고 무대로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무지하게, 엄청나게, 완전하게 멋있었다. 처음 들을때부터 미성이라고 생각했던 이타루의 중저음이 시원한 기타와 건반소리에 맞춰 깔끔하게 울렸다. 여유롭게 웃으며 노래하던 이타루가 객석 끝에 앉아있던 반리를 발견했는지 슬쩍 손가락을 가리키며 윙크하자 객석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관객들로 가득찼다. 간단한 안무와 발동작도 이타루에게 잘 어울렸다. 반리는 무대의 모든것에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노래와 춤, 이타루의 목소리에 완전히 매혹되어 숨을 쉬는 것 조차 잊은 채였다. 노래라 끝나고 잔잔한 반주가 깔리며 이타루가 활짝 웃으며 마이크에 대고 인사했다.


“괜찮았어? 잠시 옷 갈아입고 올게. 다음 곡은 10분 휴식뒤에 할거야.”


이타루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객석에 손을 흔들었다. 활짝 웃는 얼굴은 누가봐도 멋있었다. 반리는 객석에서 일어나 무대뒤로 향했다. 문 앞에서 선 스탭에게 이타루에게 받은 출입증을 내밀고 들어가자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있는 이타루가 보였다.


“이타루씨…!”
“아. 반리. 와줬네. 기뻐..후우. 반 장난으로 준건데.”
“당신, 최고잖아.”
“그래? 고마워. 쇼케이스는 항상 긴장되거든.”
“나 당신한테 반한것 같아. 완전히.”
“그렇게 좋았다니. 감동이네.”
“아니, 그런게 아니라고. 당신에게 반해버렸다고.”
“고..고마워..?”


얼떨결에 대답해버린 이타루의 말이 닫히기도 전에 반리는 열기로 뜨거운 이타루의 손을 가져가 입을 맞추었다. 놀라운 광경에 무대 뒤의 스탭들은 웅성거렸다. 손에 키스받는건 태어나서 처음이였고, 그것도 두번 본 남자에게 당하는 건 너무나 의외였다. 이타루는 이미 뜨거운 얼굴이 한번 더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목덜미에서 땀이 흘러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쇼케이스 때문의 긴장과, 기쁨과, 혼란스러움으로 머리가 엉망으로 꼬여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서있는 이타루의 등을 떠밀며 일단 끝나고 보자며 다시 객석으로 뛰어가버린 반리의 검은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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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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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링 여러가지..

글 백업을 못해서 캡쳐짤밖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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