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캐해석이 다분합니다.

※타스쿠랑 츠무기가 고등학생입니다


전력 주제 여름


 

햇볕이 쏟아지는 길목이 뜨겁게 익어가고 있었다. 주변에 심어져 있는 수국의 색이 은은한 푸른빛에서 선명한 쪽빛으로 바짝 물이 오른다. 바닥이 얇은 샌들을 신고 걷는 발바닥이 뜨거웠다. 타스쿠의 집으로 가는 길은 눈을 감고도 걸어갈 정도로 익숙한 모습이었다. 츠무기는 입고 있던 교복 와이셔츠의 가장 윗 단추를 풀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가는 길에 근처 가게에 들러서 시원한 음료라도 사갈까. 8월에 접어들자 몸을 익혀버릴듯한 무더위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가을에 있을 문화제에서 타스쿠와 함께 올릴 연극의 연습을 위해 며칠 간격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연습하는 중이었다. 올해 여름은 그런 식으로 지나갈 셈이었다. 땀으로 젖어가는 등에 붙은 와이셔츠를 손으로 펄럭이며 부채질했다. 방학이 시작하고 한달동안 타스쿠를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다. 대본 연습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만날 참이었다. 그러나 어제는 타스쿠와 만나지 않았다. 그저께 있었던 작은 말싸움을 벌이고는,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츠무기는 화해의 의미라기에는 보잘것 없지만, 자주 들리는 타스쿠 집 근처의 가게에 들러 시원한 캔커피를 샀다.

 

타스쿠는 올해 여름 네번째 고백을 받았다. 네번째 상대는 바로 옆반에 다니는 동급생 여자아이였다. 타스쿠를 언제부터 눈에 담아두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조용하고 얌전한 모습의 여자아이가 꾹꾹 참고있던 마음을 적은 러브레터를 방학식 첫날 츠무기에게 내밀었다. 어째서 나에게. 라는 질문이 떠오르기도 전에 여자아이는 도저히 타스쿠의 눈을 보고 전해줄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며, 가장 친한 친구인 츠무기에게 맡긴다며 사정했다. 스스로도 부끄러운지 여자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울먹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전하고싶어서. 간절한 목소리에 츠무기는 손자국이 남은 편지를 받아들 수 밖에 없었다. 여자아이에게서 받은 편지를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두고는, 바로 그날 저녁 전해줘야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타스쿠는 그런 방식으로 받은 편지는 단칼에 거절할 것이 분명했다. 이전 세번의 고백에서도 아직 여자친구를 만들 의향이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한 전력이 있는 타스쿠였다. 두명은 그자리에 주저앉아 울어버렸고, 한 명은 타스쿠의 어깨를 밀치며 도망갔다.

 

"인기 있는것도 곤란하네. 좀 상냥하게 말해주지 그랬어."

"거절할거면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게 좋아. 여자친구를 만들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전혀 없는거야?"

"있다와 없다 사이에 다른 말이 필요한거야?"

 

대답할 말이 없어진 츠무기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화를 넘겨버리고 말았다.가방에 넣어둔 편지가 방학이 시작하고 한달동안 묵혀갈 즘, 어떻게 알았는지 여자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미안하지만, 곤란하게만들어서 미안하지만, 하고 미안하다는 말이 잔뜩 적힌 문자였다. 곤란하긴 했다. 두 사람이 어릴때부터 친한 사이란 것은 교내에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츠무기는 결국 가방에 있던 약간 구겨진 편지를 꺼내 타스쿠에게 전해주었다. 옆 반의 그 여자아이. 귀엽고 착하다는 평판이 있다고. 좋은 아이일거라며 말을 덧붙였다. 타스쿠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츠무기의 손에 들린 편지를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로 표정을 구겼다.

 

"이걸 왜 네가 전해주는거야?"

"그게, 그 여자아이가 부끄럽다고..나한테 부탁했어. 어떻게든 전하고싶다고.."

"그럼 본인이 와야지. 비겁하게 다른사람을 시키는건 뭐야. 어찌됐든 거절 할 거지만. 난 받지 않을거야."

"그런...한번 읽어는 봐."

"됐어. 가져가."

 

자신의 러브레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절당한 편지에 츠무기는 기분이 나빠졌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마주보고 앉은 좌식테이블에서 츠무기는 꼿꼿이 타스쿠를 쳐다보았다. 대본에 눈을 두고있던 타스쿠가 볼멘 목소리로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라며 눈을 치켜떴다. 어째서 그런 말이 나온걸까.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타스쿠는 내가 고백해도 그런식으로 거절할거야?"

"뭐?? 갑자기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아..그..그게 아니라...다른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게..."

 

의식하기 시작하자 츠무기는 새빨개진 얼굴로 변명같은 설명을 주절거렸다. 여자아이들의 고백을 거절하는게 사람에 대한 중요도를 평가하는-.. 머릿속에 꼬인 실타래가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타스쿠는 짐짓 당황과 황당이 섞인 얼굴로 츠무기를 바라보았다. 츠무기는 엉켜버린 실타래 끝을 잡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우정 이상의 어떤 것이 둘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고도, 정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타스쿠는 올해 여름 첫번째로 고백했다. 그 상대는 츠무기였다.

 

"나왔어-. 타스쿠. 실례합니다."

"아아. 마침 잘 왔어. 전화라도 해볼 참이었는데."

"타스쿠..어디 가려고?"

"올해 아직 바다를 보지 못했잖아. 머리도 식힐겸."

 

타스쿠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어깨에 작은 백팩을 매고 있었다. 나갈 채비를 마친 모습으로 문가에 서있던 츠무기의 손을 잡고 다시 바깥으로 향했다. 문가에 매여있던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고 츠무기에게 뒤에 앉으라며 안장을 두드렸다. 손에 들고있던 비닐봉투는 받아서 자전거 앞 주머니에 넣었다. 얼떨결에 자전거 뒤에 앉아 타스쿠의 어깨를 잡은 츠무기가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를 떠올렸다. 어렸을때 차를 타고 몇번 놀러가 본적 있는 곳이었다. 작은 백사장이 있는 얕은 바다였다. 타스쿠는 조금 들뜬 얼굴이었다.

 

"바다..라면 거기 말하는거야? 자전거로는 한시간도 더 걸릴거야."

"한시간 정도는 거뜬하다고. 꽉 잡아. 이제 우리 두사람이 타기엔 자전거가 작으니까."

 

중학생때 까지만 하더라도 둘이 타면 딱 맞는 정도의 크기의 자전거였다. 타스쿠는 점점 보기 좋은 몸이 되어갔고, 츠무기도 그에 따를 바는 되지 않지만 키가 조금 컸다. 고등학교에 와서 타스쿠의 자전거에 타는건 오랫만이었다. 타스쿠가 시원하게 발길질을 하자 집 앞을 가뿐히 벗어난 자전거는 유유히 방금 걸어온 골목을 지나쳤다. 어떤 말보다 더 솔직한 타스쿠의 마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쳐지나가는 익숙한 풍경과 서서히 배어나온 땀으로 뜨겁게 젖어가는 타스쿠의 목덜미를 바라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시려왔다. 정수리를 찌를듯 쏟아지는 햇빛에도 어딘가 섬뜩한 냉기가 감돌았다. 타스쿠의 고백을 거절해서일까. 분명 그래서 일것이다. 타스쿠는 그 날의 일은 모두 잊은듯이 행동했다. 여름방학이 시작하는 날, 마악 꺼내입은 반팔 셔츠의 빳빳한 어깨 선이 닳지 않은 때에. 언제나 자신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고 믿은 친구에 향한 감정이 자신과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츠무기는 어렴풋이 알고있었다.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타스쿠는 너무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면서도, 올바르게 자신을 대하는 사람이었다. 츠무기라면 죽어도 꺼내지 못했을 말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수식의 결과를 말하듯 꺼낸것이다. 널, 좋아해. 다른 무엇보다. 짧은 몇 마디의 말이 츠무기의 몸에 화살이 되어 꽂히고, 구멍난 자리를 후벼파기 시작했다. 츠무기는 잡고 있던 타스쿠의 옷자락을 힘껏 움겨쥐었다.

 

“타스쿠, 힘들지 않아? 잠시 쉬었다 갈까.”

“아아. 좋지. 거의 다 온것같아.”

 

커다란 나무 아래 작은 벤치가 있는 길가에 자전거를 세웠다. 관성에 흔들린 몸이 어지러웠다. 츠무기는 멍하니 벤치에 앉아 메고있던 가방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 타스쿠와 쏟아지는 빛살과 녹음이 일렁이는 시야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응답할 수 있을 만큼 눈부신 사람이었다. 서로를 잡아두는 관성에 갇혀버렸다고 생각할때, 늘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타스쿠였다. 시원한 물 한병을 모두 비운 타스쿠가 벤치로 걸어와 보란듯이 벤치 끄트머리에 턱하니 앉았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고등학생이라고해도, 둘을 태운 채 쉬지않고 수십분을 달리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어깨를 매만지며 이리저리 관절을 꺾다가 길게 한숨을 내쉰 타스쿠가 입을 열었다.

 

“옛날에 바다에 갔었던 일, 기억하고 있어?”

“언제? 소학교때의 일인가. 나, 그렇게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네가 인어공주를 읽은 다음날 부터 그렇게 바다에 가고싶다고 조르고 졸라서. 형이랑 갔었잖아. 인어공주를 만나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으면서.”

“뭐..뭐야.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거야. 정말.”

“갑자기 떠올랐을 뿐이야. 내년엔 진학으로 바쁠테니까. 연극부 활동도 지금처럼 활발하게 하진 못할테고.”

 

응. 그렇네. 츠무기는 웅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옅은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나른하게 잠이 쏟아지는 한 낮 이었다. 방학이 끝나면 곧 문화제였다. 고등학교까지는 자연스럽게 같은 학교를 들어갔지만, 이후에도 함께 할 수 있을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어린아이의 그것과는 달랐다. 타스쿠가 진학을 할것인지, 직업을 구할 것인지 조차 물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언젠가는 서로의 길로 떠나게 될것을 두려워 하면서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타스쿠를 잡지도 못했다. 비겁해. 나는. 비겁했다. 비겁하다고 인정 하는 것 조차 괴로웠다.

 

“마지막 추억. 같은 거네?”

“마지막..? 어째서 마지막이 되는거지. 내일도 연습 해야하는데?”

“그거야, 내가 타스쿠의 고백을 거절했으니까.”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 잊어버려. 내가 잠시 착각했어.”

 

어서 가자. 타스쿠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뒷 말을 생각할 새도 없이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고서 발을 움직였다. 저 멀리서 부터 거울을 부셔놓은 듯 반짝이는 먼 바다가 보였다. 내리막길에 다다라 자전거는 빠르게 아래로 향했다. 줄지 않는 속도감에 무서워진 츠무기가 타스쿠의 허리를 양 팔로 껴안았다. 어,어. 하고 살짝 흔들리던 자전거가 급하게 도로를 따라 좌회전 했다. 눈 앞에 탁 트인 바다가 펼쳐졌다. 츠무기는 저도 모르게 와아. 하고 상쾌하게 소리쳤다. 해변가에 자전거를 세워둔 두 사람은 홀린 듯 모래사장에 걸어들어갔다. 모두 유명한 해수욕장에 가버렸는지, 작은 해변가는 동네 꼬마처럼 보이는 몇몇 아이들만이 모래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깊은 모래 탓에 귀찮았는지 타스쿠가 먼저 신발을 벗어 던졌다.

 

“뜨겁지 않아? 모래?”

“참을 만한 정도. 너도 신발 버리기 전에 벗어버려.”

“음. 그래도 온 김에, 발은 담그고 가야지.”

 

바지를 걷어낸 타스쿠를 따라 흰 운동화를 벗고 츠무기도 발목까지 바지를 걷었다. 옅은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와 맞닿은 곳으로 나란히 걸었다. 뒤에는 기다랗고 동그란 발자국이 이어졌다. 바닷물에 젖은 모래에 발가락이 닿자 차갑고 축축하지만,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발가락을 서서히 간지르는 물결이 발등까지 차올랐다. 츠무기는 어느새 부터 타스쿠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한 손에 든 신발 때문에 온전히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시원해. 바다에 오길 잘 한것 같아. 고마워, 타스쿠.”

“응. 열심히 온 보람이 있어. 넓은 바다를 보고있으니까 내 고민은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느껴지는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있잖아.”

 

츠무기는 잡고 있던 타스쿠의 손을 놓고 바다로 걸어갔다. 걷어 놓은 바지가 적실만큼 깊은 곳에 서서 몸을 돌려 타스쿠와 마주보았다. 많은 것이 떠올랐다. 아주 어릴 적 타스쿠와 함께 놀았던 희미한 기억속의 놀이터. 신나게 뛰어가던 골목길. 처음 함께 연극을 하던 날. 대본을 외우며 밤새도록 웃고 떠들던 밤. 아침에 창 밖에서 들려오던 타스쿠의 자전거 벨 소리. 어느 것 하나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것들이었다.

 

“내가 타스쿠를 좋아 할 수 있을때까지 기다려줘. 타스쿠는 내 소중한 사람이니까.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이게 내 대답이야.”

 

멀리서 천천히 밀려오던 파도가 츠무기의 다리를 흔들었다.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 츠무기를 순간 첨벙이며 뛰어간 타스쿠가 팔을 잡았지만, 둘은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서로 엉겨붙은 모양으로 한참이나 바닷물을 맞으며 서로를 껴안았다. 언제 엇갈렸는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언젠가 처럼 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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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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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스츠무]口渴

짧은것/A3! 2017. 5. 23. 23:00

※카페레어 스토리 스포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캐해석이 다분합니다

※연성달성 보상으로 써드린것

 


[타스츠무]口渴


카페는 단정하게 인테리어 되어있었다. 흰색의 벽지와 테이블을 보조하는 색색의 아이템들이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는 정도로 배치되어 심심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배우들이 각각의 역할을 맡아 연기하며 서빙한다는 컨셉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이전에 만카이에서 다녀간 네명이 크게 호평을 얻은 모양이었다. 본인들은 꽤 힘들었겠지만, 츠무기가 카페에서 일을 하는 날 나머지 겨울조들과 장난겸, 응원 겸으로 카페를 찾은 타스쿠는 어깨선이 드러나는 하얀 티셔츠를 입고 기다란 에이프런을 한 모습의 츠무기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끓어오르는 마음을 겨우겨우 삼키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몸에 붙는 소재의 티셔츠를 입은 츠무기의 팔이며 가느다란 허리선은 금방이라도 한 움큼에 들어올 정도였다. 평소에 자신의 마른 몸을 의식하는건지, 선이 드러나지 않는 옷을 선호하는 츠무기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단단히 노린게 분명했다. 감독인 이즈미의 의견인지, 본인의 의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기하는 주제인 남동생의 에티튜드에 걸맞는 옷차림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던 여자 손님들이 츠무기를 바라보며 사랑스럽다는 눈길을 던졌다.

"츠키오카군, 너무 귀엽지않아?"
"응! 정말, 동생 삼고싶어. 아아-. 내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가는 길에 사진이라도 찍어달라고 할까? 인스테에 올리고 싶어!"

자리를 기다리는 동안 아즈마와 호마레가 네명의 리더들을 보며 이런저런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타스쿠는 츠무기의 동선에 눈을 따라갔다. 살갑게 누나-. 형-. 하며 서빙하는 츠무기의 모습은 누가봐도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오래전 부터 츠무기를 보고있자면 위태로워 보였다. 츠무기는 늘상 웃는 얼굴이었지만, 모든 웃음이 진실이 아니란건 확실했다. 타스쿠는 츠무기와 긴 시간 동안 함께했지만 누구보다 그를 잘안다고 자신하기엔 사람의 의중에
대한건 쥐약이었고, 최근 몇년 사이의 공백이 둘 사이의 극간을 벌려놓았으므로 그러질 못했다. 오히려 츠무기는 사람의 심리나 마음을 잡아내는것은 특기였다. 타스쿠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귀신처럼 맞추고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딱딱한 땅에 스며드는 봄비처럼, 다시 만난 츠무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타스쿠에게 알맞게 다가왔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였다.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건 어느쪽일까. 언제부턴가 츠무기의 눈을 바라보면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벅차올랐다. 일부러 눈을 피하는 일이 늘었다.

"읏..응. 기다렸지 형아. 저 쪽 자리에 가면 되니까.."
"츠무기, 힘내고 있구나. 후후. 귀여우니까 안심하도록해."
"감사합니..아니. 고마워!"
"다같이 오길 정말 잘 했군. 츠무기군의 명연기에 내 시흥이 살아나는 데..어디.."
"자리에나 가자구-. 커다란 남자 넷이 길을 막고있으니까."
"난 크지않아. 아리스가 너무 커서 그래."

아즈마가 산만한 나머지 둘과 멍하니 서있는 타스쿠를 억지로 들깨워 츠무기가 안내한 자리로 향했다. 간단한 카페의 메뉴를 시키고선 음료가 나올때 까지 텐마와 사쿠야가 자리에 들러 함께 짧게 잡담을 했다. 히소카는 호마레의 가방에 넣어온 마쉬멜로우를 먹어도 되냐고 아즈마에게 칭얼거렸다. 츠무기가 오면 물어보자고, 호마레와 아즈마는 뜯지않은 마쉬멜로우 봉지를 손에 쥔 히소카를 달랬다. 카페에 오기 전에 이미 한봉지를 비운 상태였으니, 아직 효력이 좀 남아 있을거라며 호마레가 말했다. 마쉬멜로우 한 봉지에, 두시간이라며 정확한 수치를 말하는 호마레를 보며 아즈마는 역시 룸메이트는 다르다며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음료 나왔어요. 시원한 카페오레 두잔이랑, 아메리카노 한잔-. 어라. 히소카군은 단 음료 시키지 않았네?"
"마쉬멜로우 먹어도 돼?"
"으음. 외부음식은 규정상 금지인데...미안해, 히소카군."
"이런이런. 유감일세 히소카군. 대신 아이스 초코를. 그것도 히소카군 입맛에 맞을걸세."
"응. 알겠어 형아."
"츠무기. 호칭이 너무 파괴력 대단하지 않아..?"
"그런가요. 잘 써보던 호칭이 아니라..음.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타스쿠네 형 정도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지, 형?"

츠무기는 장난기어린 얼굴로 타스쿠를 바라보며 웃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타스쿠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다. 지금 당장 츠무기를 안고싶다는 생각 만이 머리에 가득 차 견딜 수 없었다. 천진난만한 미소가 예전에 보았던 그것과 같았다.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금 가슴은 울렁이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스쳤다. 감정의 결론은 츠무기에게 향했다.

"너, 잠시만 따라와봐. 츠무기."
"엣? 으응? 왜..왜?"
"됐으니까. 여기 화장실이 어디지?"

타스쿠가 츠무기의 손을 덥썩 잡고 두리번거리다 화장실이라는 표식이 붙은 끄트머리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손에 잡힌 츠무기가 힘에 이기지 못하고 잰걸음으로 함께 들어가버렸다.

"뭐야, 왜그래. 갑자기?"
"이건 네가 반칙인거야.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드니까."
"앗, 잠시만. 나 지금 일하고 있는데...으앗.."
"츠무기..."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하고 다급하게 어깨를 파고드는 타스쿠의 얼굴을 막던 츠무기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얼굴을 끌어안았다. 함께 있는데도 이렇게나 서로를 갈구하는건 어째서일까. 메워지지 않는 얇고도 깊은 간극 때문일까. 커다란 팔로 숨이 막힐 정도로 자신을 끌어안은 타스쿠가 어딘가 가여웠다. 이어져 있지만 떨어진 머나먼 느낌이 재회의 순간부터 츠무기를 떠나질 않았다. 츠무기는 몸을 숙인 타스쿠의 목덜미를 차가운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자국은 안돼. 금방 빨개져서 티가 나버리니까. 응?"
"노력해보지. 안 될것 같지만."
"정말...나중에 아즈마씨한테 뭐라고 해명할거야. 분명히 이상했다구. 방금."
"그럼 입술에 하지."

어깨에 묻고있던 고개를 들어 커다란 손으로 츠무기의 턱을 잡은 타스쿠가 그대로 입술을 포갰다. 그런 의미가 아닌데-.라는 말이 나오지 못하고 키스의 숨결에 파묻혔다. 삼키고 삼켜도 목이 타들어갔다. 균열이 간 유리잔을 채우는 끊임없는 호수가 필요했다. 슬슬 츠무기의 티셔츠를 파고들어오는 타스쿠의 손길이 느껴졌지만, 새하얗게 지워진 머릿속에서 여전히 꿈 속을 헤메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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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가시나무 숲

※ 악마 천사 AU

개인적인 캐해석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옥이로군. 사쿄는 발밑에 굴러다니는 살덩이와 코를 찌르며 썩어가는 시체 조각들을 대충 발로 치우며 걸었다. 그의 등에는 커다랗고 하얀 날개가 달려있었지만, 날개는 그저 그의 신분이 천사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퇴화기관에 불과하다. 날개가 아무리 커다랗다 하더라도, 날기위해 쓰는 에너지를 계산해보면 차라리 걷는게 훨씬 절약이었다. 치기어린 어린 천사들은 날개가 커다랗게 각성하는 것이 힘의 척도라 여기고, 어디까지 오를수 있는지를 내기하기도 했다. 사쿄는 낭비라는 단어를 죽어도 싫어했다. 전쟁에 참전하기 전 자신이 속해있는 부대를 꼼꼼하게 점검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게 옳다. 어찌도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싶어하는 천사들의 특성과, 교묘하게 인간을 등처먹는것이 본능은 악마들은 존재자체가 상극이었다. 이번 파병은 정말이지 내키지 않았다. 아직 훈련이 덜 된 천사들이 많았고, 이 전쟁에 명분이란건 어디에도 없다. 이제 상부에서는 명분따위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사악한 악마들은 사악한것이 본능이고, 그것을 죽음으로 정화하는것이 우리들의 임무라는 허울 좋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마계는 하늘이 세피아빛이었다. 마왕의 취향이 그렇다던지. 현대의 마왕은 꽤나 선대보다 조용한 자였다. 선대를 빼닮은 붉은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은 똑같았지만, 절대 선봉에 서는 일이 없었다. 선대 마왕은 전쟁에의해 태어난 전쟁의 화신이였다. 그는 적이였지만, 형형한 붉은 눈을 빛내며 전쟁의 최전방에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정의를 세우고 적을 섬멸하는 모습은 존경할 만했다. 부대의 젊은 천사들은 마왕을 쓰러뜨리고 싶어했다. 그것이 얼마나 건방지고 가당찮은 일인지. 일개 천사가 쓰러뜨릴 만큼 마왕이 시시한 존재였다면 유구한 시간동안 천계와 마계가 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먼저 낙오되다니, 이거야 면이 서질않아.."

대열에서 멀어지지 말라고 주의하고 주의했지만 부대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녀석이 기습공격에 당해 멀어지는 것을 본 순간 사쿄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날개를 펴고 날아갔다. 우리 부대는 전원 생존이 목표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대의에 달린 일이며, 무사히 돌아가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 사쿄가 출정하기 전 연단에서 한 말이었다. 땅에 고꾸라진 녀석을 찾아 숲으로 내려갔지만, 이미 숨이 멎어있었다. 사쿄는 눈도 채 감지 않은 시체의 눈을 감기고 영혼을 거둬 천계로 올려보냈다. 천사는 육체를 잃어도 죽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친구나 소중한 이들과는 다시 만나지 못할것이다. 죽지 않아도 이별은 슬픈 것이었다. 녀석의 영혼을 거둔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흉흉한 기운이 맴도는 검은 숲이었다. 자신이 낙오되어도 다른 부대장들이 부대를 이끌어 줄것이다. 숲은 무성한 가시나무가 가득했다. 날개를 펴고 날아갈 만큼의 공간조차 보이지 않았다. 검은 가시나무가 하늘을 가려 숲은 어두웠다. 어쩔수 없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그리 넓은 숲처럼 보이지 않았고, 반 나절 쯤 걸으면 벗어나리라. 사쿄는 보이는 큰 나무마다 가지고 있는 작은 칼로 자국을 남기며 걸어갔다.

예전에 큰 전투가 있었는지, 숲을 걸어가는 종종 시체가 보였다. 이미 백골화된 시체도 있었고, 이제 막 썩어가는 것도 있었다. 사쿄는 못 볼것을 본 듯 눈을 찌푸리며 손으로 코를 막았다. 이따금 마계의 새가 음흉한 목소리로 우는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밤이 오기 전에 숲을 벗어나야 했다. 사쿄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또 시체인가. 저건 정말 죽은지 얼마 안된..음..?"

커다랗고 메말라가는 가시나무 밑에 배에 커다랗게 상처가 난 악마가 누워있었다. 사쿄는 허리춤에 차고있던 은으로 만든 실탄이 든 총을 조용히 손에 쥐었다. 은으로 된 총을 맞은 악마는 재생하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간다. 사쿄는 가능한 단발에 죽이는 것을 선호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은빛머리를 가진 악마가 구멍뚫린 배에서 조각난 장기를 뱉어내고 있었다. 예상되는 상당한 고통에 숨을 헐떡이며 괴로운 얼굴이었다. 주변은 그가 흘린 샛붉은 피로 젖어있었다.

"가엽군. 고통없이 죽여주겠다."
"으음...당신은..?"
"안타깝게도, 나는 너의 적이야."
"아하. 지금 피를 너무 쏟아서 눈 앞이 보이지 않아. 당신, 천사인가 보네."

악마는 고통에 찬 피섞인 기침을 쿨럭였다. 배에 튀어나와 있던 내장이 함께 들썩였다. 사쿄는 그럼에도 징하게 말을 이어가는 모습에 혀를 찼다. 총을 악마의 이마에 가져다대고 철컥. 하고 장전하자 악마는 기침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이곳에 최근 전투가 있었나?"
"아아. 숲으로 도망쳐왔어. 천사군도 그런걸까?"
"이 상황에 입만 살았군. 역시 악마새끼들이란..."
"나는 병사가 아니야. 다만 근처를 지나가다 운이 없었지. 날 죽여도 천사군이 얻는건...없을꺼야. 작은 온정을 베풀어 줄수 있을까?"
"내가 어째서 그래야하지? 널 살린다고 해서 내가 얻는것도 없는건 똑같지. 설마 치유능력을 바란건 아니겠지? 악마에게는 통하지 않아. 영혼도 없이 사라지고 싶은거냐?"

이런저런 설명까지 하긴 귀찮았다. 천사들 중에서도 치유능력을 가지고 있는것은 극소수에 속했다. 그 능력 하나 만으로 천사가 선이니, 신의 사랑을 받는 것이니. 하는 말도 안되는 선입견이 생겨난 것이다. 사쿄가 아는 한 그런 능력을 가진 천사는 현세에 하나 밖에 없었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천계에서 숭상받았다. 천계의 명분이 되어버린것이다.

"후후...나는 인큐버스야. 천사의 정기가 우리에겐 최고의 넥타르지. 천사군에게서 달콤한 꿀의 향기가 나.."
"하아. 내가 정말 싫어하는 부류로군. 난 다른이에게 기생하며 살아가는 것들을 싫어해."
"매정해라. 고고한 천사군이네. 전쟁은 즐거워? 살생하며 얻은 명예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다른 이를 희생하는 것에는 어떠한 대의도 소용없는 것을...크으윽.."

은빛 악마는 구멍난 배를 붙잡았다. 악마들의 생명력은 바퀴벌레보다 끈질겼다.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관통상을 입어 주변을 자신의 피로 낭자하게 물들이고도 살아 있을수 있다니. 과연 상대하기 힘든 적이었다. 사쿄는 몸을 숙여 은빛악마를 바라보았다. 인큐버스는 특히나 다른 이를 홀리는 존재라, 선이며 얼굴이 준수한 편이었다. 황금빛이 감도는 녹안은 풀린 동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촛점의 행방은 간 곳 없었다. 반쯤 찢어진 한쪽 날개가 악마와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다. 끈질기게 숨을 몰아쉬며 생의 실마리를 잡으려는 가녀린 몸짓이 이어졌다. 검은 피를 입에서 쿨럭이며 쏟아낸다. 고여서 썩은 피였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누구일까. 일개 천사에 불과한 자신은 세계의 대의를 위한 모래 한 줌이라 생각했다. 그 동안 사쿄가 돌려보낸 많은 영혼들은 안식을 찾았을지. 얽매여오는 생의 무거움이 파도처럼 사쿄를 덮쳤다. 이것 또한 이 악마가 자신을 홀리는 것일까. 은빛 악마는 마지막 숨을 옅게 뱉어내고 있었다. 사쿄는 몇시간 전 자신의 손으로 묻은 천사를 떠올렸다. 괴로움이 밀려왔다. 자신의 손을 거치는 것을 놓아버리는것은 그만 하고 싶었다.

"그래도..혼자 쓸쓸히 죽는것 보단...천사군이 있는 앞에서.."
"누굴 저승길 동료로 삼으려는거지? 재수없는 소리 집어치워. 정기란건 어떻게 주면 되는거지?"
"아...아아. 신이시여. 자아, 이리 가까이.."
"나는 신이 아니야. 그 분은 아주 멀리, 아주 가까이 계시지....이렇게 하면 되는건가."
"잘..먹겠습니다.."
"....?!!!"

은빛 악마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피가 가득한 손으로 사쿄의 얼굴을 매만지며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살면서 처음 맛보는 혀가 녹아 내릴 정도로 달콤한 타액이 서로의 입에 닿았다. 어미의 젖을 탐하듯 엄청난 기세로 혀를 엮는 아즈마에게로 무언가가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가 멍하고 눈 앞이 하얗게, 그렇지만 몽롱한 기분이 들뜨게 하여 불쾌하지 않았다. 인큐버스의 키스가 어느정도의 위력인지는 책에서 배운 것 뿐이었다. 사쿄는 저항해야겠다는 일말의 여지 없이 악마의 리드에 몸을 맡겼다.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듯 다시금 눈을 뜨자, 악마는 상기된 얼굴로 사쿄의 볼에 한번 더 입을 맞추고 입술에 쪽, 하고 소리가 나게 키스했다. 그의 배에 있던 상처는 완벽하게 재생되어 있었다. 연녹색 눈동자를 구슬처럼 반짝이며 사쿄를 바라보고는, 멋진 천사군이였네. 하고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기분 좋아. 천사군도 좋았지?"
"내 이름은 천사군이 아니라 후루이치 사쿄다. 그리고 방금 그건 내 첫키스였고...이게 무슨. 이런 식이라고 말 한 적은 없잖나."
"어머. 후후. 천사의 첫키스라니. 값을 톡톡히 해야겠는걸. 나는 유키시로 아즈마. 당신이 방금 살린 첫 생명."
"이 숲을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그거나 말해."
"아하. 그렇네. 내 트랩이 잘 먹힌 모양이야."

아즈마는 손에 입을 맞추더니 공중에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신기루 사라지듯, 가시나무 숲이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쿄는 아무것도 없는 공터가 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사쿄는 아즈마를 노려보았다. 방금까지 하늘을 가리고 있던 가시나무숲은 온데간데 없고, 코를 찌르던 시체들도 감쪽같이 사라져있었다. 아즈마는 생글거리는 웃음을 쿡쿡 내뱉었다. 우연히 재수없게도 전투에 휘말리게 되어 상처를 입고 말았지만, 이젠 한계라고 생각해서 마지막 힘을 짜내 천사를 유인하는 환각을 만들었다. 주변은 이미 철수한 뒤라, 확률은 희박했지만. 신께서 사쿄를 내려주신게 아닐까. 딱딱한 상대는 오히려 녹이기 쉬웠다. 황당하다는 표정의 사쿄의 볼에 손가락을 찌르며 아즈마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 꽤 오래 살았으니까..이런 잔 재주 정도는 부릴 수 있지."
"야비한 악마새끼.."
"어머어머. 고고하신 천사님이 이 정도 환각도 구별 못 할 정도라니. 나도 꽤 실력이 좋아졌나봐..후후. 하지만 살려준것은 내 남은 삶을 모두 바쳐도 좋으니까. 천사군도 그렇지?"
"떨어져라. 또 죽고 싶은건가?"

사쿄의 살벌한 언사에도 아랑곳없이 사쿄의 날개를 만지며 천사의 날개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건 처음이라며 깃털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운듯 손을 털어내려 사쿄는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역시 이번 파병은 오지 않는 편이 좋았다. 안좋은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 편이니까. 악마를 살려주었다는 것이 들키면 병사로써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둘 사이의 고삐를 죄고 있는 것은 아즈마 쪽이었다. 사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세피아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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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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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소호마 생채기

아파. 무릎을 타고 느껴지는 생생한 통증에 히소카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잠에서 덜 깬 채로 고양이를 쫓았던 탓일까,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었을 담벼락에서 중심을 잃고 무릎을 맨 바닥에 찍어버리고 말았다. 무릎 뼈와 다리 전체에 찌르르 울리는 감각에 몸을 말고 살짝 부르르 떤 히소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친 오른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무릎 뿐만 아니라 발목까지 타고내려온 통증이 욱신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만카이 기숙사 까지 걸어서 십 오분 남짓 거리였다. 오른 발을 끄는 모양새로 발을 내딛었다 걸음걸이 마다 무릎과 발목이 비명을 지르는 듯 히소카를 옭아매고 있었다. 축축해진 무릎에서는 검은 피가 비쳤다. 기숙사에 아무도 없는 시간이라면 좋을텐데. 감독이나 시끄러운 녀석들에게 들킨다면 소란스러울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히소카는 버릇처럼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기숙사는 조용했다. 휴. 작게 한숨을 내쉰 히소카가 쓰라린 무릎을 이겨내며 계단을 올라 방문앞에 섰다. 방 안에서는 무시하고싶어도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리고 있었다. 히소카는 문을 바로 열려다 말고 잠시 고민했다. 그가 히소카의 다친 모습을 보고 귀가 떨어질 정도로 소리만은 치지 않기를 바라며 히소카는 문을 열었다.

"아리스..있었네."
"어라, 히소카군. 좋은 오후일세. 아니!!! 그 무릎은 어떻게 된 건가? 싸움이라도 한건가?"
"별거아냐. 넘어졌어."
"이런이런...좀 보겠네. 무릎에 피가 나고 있어. 벗어서 상처를 보여주게나."
"괜찮아. 침 바르면 나아."
"천만의 말씀! 히소카군은 이런 곳에서 비상식적이군. 어디, 구급상자가..아니. 우선 의자에 앉아야곘지. 무릎 말고도 아픈 곳이 있는가?"

예상과 한치도 틀리지 않은 행동이었다. 히소카의 피가 묻은 바지를 본 호마레는 손에 들고있던 책을 내려두고 큰일이라도 난 마냥 뛰어와 히소카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에전의 일은 전혀 기억 나지 않지만, 다치는 것이 그다지 생경한 경험은 아니었다. 착실히 몸을 보호하도록 넘어졌고, 몸에는 몇몇 개의 오래된 상처가 남아있었다. 기억이 없는 채로 사는 것은 다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소한 일이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히소카를 의자에 앉힌 호마레는 바지를 걷어올리고 피딱지와 흙으로 엉망이 된 무릎을 보며 깊은 신음을 내쉬었다.

"흉터가 남을지도 모르겠군. 우선 감독군에게 구급상자를 빌려와야겠어. 물수건으로 좀 닦아 낸 뒤에 말이야."
"감독에게는 말하지마. 지금도 충분히 시끄러우니까."
"흐음. 내 치료에 순순히 따른다면 그렇게 하지."
"별로. 반항할 마음은 없으니까.."
"좋은 자세로군. 잠시만 기다리게. 그 다리로 기숙사까지 걸어오다니...히소카군의 의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네."
"하아...다친건 난데 아리스가 더 시끄러워."

오늘 저녁식사시간에 내가 업어다 주겠네. 부축으로 좋은가? 내 품에 안기면 좋은 향기가 난다고 히소카군이 말했지 않은가. 다음부터는 벽같은건 뛰어넘지 말고, 벽은 그러지 말라고 세워놓은 것이라네. 히소카의 묵묵부답에도 호마레는 쉬지않고 말을 뱉어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건 분명 처음 느끼는 감정일 것이라고 히소카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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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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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만남....모쓰냐...

타스쿠가 운전하는 밴이 무거운 소리와 함께 덜컹거렸다. 노을이 보라색으로 사라져가는 저녁이었다. 이런 저런 일로 전부가 모이기는 꽤나 힘든 겨울조의 다섯명은 운전을 하는 타스쿠를 제외하고는 모두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운 교외에서 여름 전통축제가 있다는 소식을 카즈나리가 만카이 기숙사에 퍼뜨렸다. 몇몇이 관심이 있는 듯 웅성거렸지만, 딱히 모여서 갈 사람을 모집하진 않고 지나가는 분위기였다. 요즘 그런걸 보러 가는 사람도 있나. 타스쿠는 영 흥미가 나지 않는 듯 내뱉었다. 주중이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모양이야. 오미를 도와 그릇을 닦고있던 츠무기가 말을 이었다. 어렸을때 두어번 가 본 이후로 한동안 기억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래도 가면 예쁠텐데. 불꽃놀이."
"늘 같은 패턴이겠지. 지역축제는 싸구려 불꽃을 쓰니까."
"불꽃 놀이..."

잠에서 늦게 깨는 바람에 식사에 늦어버린 히소카가 마지막 접시를 내놓으며 둘의 대화에 언뜻 끼여들었다. 오미에게 밥 그릇을 다 비웠다고 검사받은 히소카는 졸린 얼굴이었다. 츠무기는 불꽃놀이가 어떤것인지 설명하며 밤에 폭죽을 틔워서, 하늘에 쏘는 것이라고 말하기엔 불꽃놀이의 아름다움을 전혀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짓을 하며 아래에서 위로-. 파앙. 하고. 꽃이 피는 듯한 모양이라 그런 한자를 쓴다고 말했다. 히소카는 전혀 감흥이 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불꽃 놀이 말인가. 화려한 빛의 축제이지. 검은 하늘에 수놓아지는 형형색색, 찰나의 불꽃.."
"아리스의 설명은 더 모르겠어."
"으음. 그럼, 직접 보러가면 어떨까? 마침 타스쿠도 있고, 다섯이서 가면 즐거울거야."
"운전사 취급이냐.."

그러면 결정이지? 아즈마가 윙크를 하며 어느새 가져온 차키를 손가락에 끼고 흔들었다. 그저 야간 드라이브가 가고싶을 뿐이잖아. 타스쿠가 퉁명스럽게 차키를 받아들었고, 자연스럽게 호마레와 츠무기는 뒤를 따랐다. 히소카 만이 덩그러니 서있다 자신을 이끄는 호마레의 손에 못이기는 듯 터벅터벅 걸었다. 불꽃놀이를 보고싶다는 말을 한 적 없는데. 차에 앉은 히소카는 나지막히 말했다. 그건 불꽃놀이를 보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라며 호마레가 단칼에 대답해버리고는 신나는 듯 힘차게 차 문을 닫았다. 운전자 조수석에 앉은 츠무기가 이런 저런 과거의 축제 이야기를 하며 운전의 지루함을 쫓았다. 인적이 드문 길로 들어서자 먼 곳에서 축제에서 나오는 듯한 노랗고 붉은 상점가의 빛이 어름풋이 나타났다. 아즈마는 잠들어있던 히소카를 깨우고는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켰다.

"저것 봐. 저기서 축제를 하는거야. 후후. 나도 축제에 오는건 정말 오랫만이야. 저녁은 먹었지만 간식거리도 있으니까."
"마쉬멜로우도 있을까?"
"흐음. 솜사탕은 있을지도. 비슷한 종류니까 히소카군이 좋아하지 않을까 싶네만."
"헤에. 그렇겠네요. 사과사탕도 있으려나."
"네가 더 신난거같아, 츠무기."

겨울조가 모두 함께 구경온건 처음이니까. 하고 츠무기는 실풋 웃었다. 좋은 말로도 구심점이 되지 못하는 부족한 리더로서 모두의 마음이 맞아가는 때가 즐거웠다.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워두고 상점가로 들어서자 생각보다 가판대의 종류도 여러가지였고, 구경온 사람도 여럿이었다. 솜사탕을 찾기위해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며 여러 길거리음식을 구경했다. 옛날에 보았던 그대로야. 아즈마가 추억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솜사탕을 파는 가판대를 발견한 타스쿠가 커다란 분홍색 솜사탕을 사고는 히소카의손에 쥐어주었다. 언젠가 처음 마쉬멜로우를 먹었을때 처럼 히소카의 동공이 커졌다.

"단 향기가 나.."
"머리카락에 묻겠어. 조심히 먹어야겠다. 히소카군."
"좋아할 줄 알았다네. 이제 마쉬멜로우 편식에서는 벗어날 때가 되었지."
"마쉬멜로우나, 솜사탕이나..비슷한 종류지만 말이야. 오늘은 축제니까 특별히 용서해 주는걸로."
"곧 불꽃놀이가 시작할 시간이네. 좋은 자리는 이미 얻지 못할것 같지만.."

아즈마가 불꽃놀이가 올라올 강변쪽으로 가자며 앞장섰다. 그가 앞장서는건 드문일이었지만, 밤과 시끄러운 분위기에 달아오른 아즈마의 모습은 경쾌해보였다. 솜사탕에 홀린듯 얼굴을 파묻어버린 히소카를 이끌고 강변으로 걸어갔다. 유카타를 입은 몇몇 연인이 이른 키스를 하고 있었다. 강변에 서서 다섯은 검은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름의 맑은 밤하늘 사이에 후덥지근한 바람이 귓가에 불어왔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것 만으로도 두근거리지. 아즈마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말 없이 츠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 곳에서 작게 폭죽 소리가 나더니 하얗고 작은 빛의 점이 솟아올랐다. 싸구려 사탕에서 보던 형광색 불꽃이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하늘을 놓기 시작했다.

"앗. 시작했어. 히소카군, 히소카군. 솜사탕은 그만 먹고 하늘 좀 봐."
"아아-. 아름다워. 시상이 마구 떠오르는 장면일세."
"보고있어? 히소카. 어때, 예쁘지?"
"...예뻐."

고마워. 히소카의 작은 목소리는 감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귀에 전해지지 않았다. 오늘 만난 새로운 음식, 풍경, 소리가 천천히 마음속 어딘가에 물들어가며 담기고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듯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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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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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쓰리 전력 환상

품이 가벼웠다. 품 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미카엘이 찬란한 빛이 되어 사라지자 비로소 막이 내리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비극은 그때부터였다. 줄곧 바보처럼 지상에 내려가던 미카엘을 쫓아다니는 것에 전력을 바쳤던 라파엘에게 남은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카엘은 천국에서도 중요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방관했다는 죄가 라파엘에게 씌워졌다. 한 마디의 부정도 없이, 라파엘은 단죄를 받아들였다. 날개를 스스로 자르고 등뼈에서 흐르는 뜨거운 피를 받아 몸에 끼얹었다. 더러워진 몸을 받아줄 곳은 천국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천사들의 손가락질 속에 라파엘은 점점 옅어져갔다. 그를 가여히 여기는 자가 라파엘의 더럽혀진 이름을 거두고 지상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나도록 했다. 자기연민에 괴로워하는 라파엘에게 기억을 지울것을 권유했지만 언젠가 지상에서 미카엘이 다시 태어날때, 그 만은 미카엘을 알아보고 싶었다. 바보처럼 놓쳐버린 소중한 친구에 대한 마지막 바람이자 속죄였다.

"타스쿠. 다음 대사 읽어야지. 무슨 생각 해?"
"미안. 아무생각도. 잠시 멍했어. 어디까지 읽었지?"
"요즘 집중 못하는게, 타스쿠 답지 않아. 뭔가 고민이라도 있어?"

타스쿠는 어린 시절 츠무기를 처음 보았을 때 부터 그가 미카엘의 환생이란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커다란 감정이었다. 츠무기는 전생이란게 있었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기에, 타스쿠는 츠무기의 곁을 지키며 언젠가 츠무기가 각성하길 기다렸다. 예전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불러주기를. 자애로운 얼굴로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나타날 때를 꿈꿨다. 그러나 츠무기가 라파엘의 영혼을 가졌다고 해서, 라파엘이 다시 살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타스쿠는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었다. 머리로는 수만번 생각 했지만 그토록 만나고 싶던 미카엘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또다시 괴로웠다. 츠무기와 연락을 끊은 몇년 동안 타스쿠는 그 관계정렬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자는 결론에 다다르고 얼마 되지 않아 만카이 컴퍼니에서 츠무기와 재회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츠무기의 어깨에는 투명한 날개가 달려있었다. 타스쿠는 몇 번이나 눈을 의심했다. 공기중에 비쳐보이는 새하얗고 풍성한 날개는 손에 만져지진 않았지만 분명히 눈에 비춰보였다.

"연극 주제가 천사라니, 신비롭고 좋은것 같아."
"그렇지. 좋은 극본이야."
"뭐야-. 그 김빠진 대답은. 타스쿠 정말 무슨 일 있어?"

문제라면 츠무기의 어깨에 있는 날개가 점점 짙어진다는 것이었다. 다시 츠무기와 재회 했을때에는 반 투명한 재질처럼 보였던 츠무기의 날개는 점점 농도가 짙어졌다. 옷만 지상의 것으로 바뀐 미카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타스쿠는 매일 거울을 보며 자신의 날개가 다시 돋아나지 않았을까 하고 확인 했다. 아무래도 스스로 잘라버린 날개는 다시 자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츠무기가 미카엘로 다시 태어나는 걸까. 그렇게 되면 지금의 츠무기는 어떻게 되는걸까. 타스쿠는 혼란스러웠다. 미카엘도 소중했지만, 츠무기도 마찬가지로 소중했다. 어느쪽을 선택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츠무기를 가만히 사라지게 놔 둔다면, 이전에 그리했듯 똑같은 죄를 지게 되는 것이다.

"츠무기. 너는 천사를 믿어?"
"연극에 빠졌구나, 타스쿠. 그 버릇 아직 고치지 않았네."
"아아. 요즘 피곤해서 그런가."
"최근 강행군이였으니까.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자."

츠무기는 손에 들고있던 대본을 덮고 타스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림자만이 없는 츠무기의 날개가 색을 더하며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미카엘은 희미해진 기억의 심연 속에 버려두고 도망친 자신에게, 이건 또 다른 형벌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타스쿠는 투명한 츠무기의 날개깃털이 유유히 춤추며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쫓았다. 먼 옛날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미카엘의 얼굴이 츠무기의 얼굴과 겹쳐보였다. 언젠가 스스로 뽑아버린 날개가 있었던 양쪽 등뼈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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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회하는 데자뷰

 

 ※개인적 캐해석이 가득합니다

 ※사신이 등장하는 AU



나. 사쿠마 사쿠야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그 사람을 만난다.

다시 봄이 돌아왔다. 작년과 다른 봄이었다. 작년에 신세를 졌던 친척집 주변엔 벚꽂나무가 무성했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만 야위어있던 나무가 언제 그리 굵어졌는지, 팝콘처럼 하이얀 꽃들은 겹겹이 피우는 모습을 한 번 밖에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자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다짐을 염원처럼 매일 되뇌인다. 특히 자기전 침대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늘 끝은 미래에 어떻게 살것이며, 어떤곳에서 어떤일을 할지에 대한 다소 공황된 계획을 세운다. 나는 줄곧 배우라는 직업을 동경 했다. 어릴때 겪은 일련의 사건 덕인데, 아무래도 혈혈단신으로 피가 이어진 줄도 알 수 없을 만큼 다른 친척들 집을 전전하는 신세로서는 동경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끔씩 여윳돈이 생기면 연극을 보러 다녔고, 오디션을 위한 연습도 했다. 하굣길에 있는 길다란 강변에 서서 발성연습을 주로 하고, 대본이 나온 유명한 대본은 여러모로 읽었다. 그렇게 불행한 삶은 아니었다. 그렇게 여겨야만 웃을 수 있었다.

가족이 없다는 것 외에는 그리 특별한 것 없는 나였지만, 나만이 알고있는 이상한 일이 있다. 매년 봄, 4월 쯤이면 똑같은 사람과 마주친다. 아주 어릴때 부터 그랬다. 희미한 어린 날 기억 속에 그 남자만은 선명했다. 옅은 갈색머리에 자줏빛 눈을 가진 멋진 남자였다. 그는 늘 뚱한 눈으로 손에 든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느낀거지만, 가장 최신형 휴대폰이다. 작년엔 간단한 셔츠차림이었고, 재작년엔 얇은 니트를 입고 있었다. 깔끔한 모습이 평범한 회사원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와 나눈 대화는 사소한 것으로 이를테면 학교에서 사이좋게 지내니? 학예회는 즐거웠니?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바보처럼 응, 즐겁다고. 매일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좋아. 하고 대답한 남자는 어느순간 사라져 있었다. 지금도 또래보다는 작은 편이지만, 그와 눈을 마주칠 만큼은 컸다고 생각한다. 봄이 오면, 벚꽃나무 언저리를 돌아다니며 그 남자를 언제쯤이면 마주칠까 기다린다. 그의 이름을 올해는 꼭 물어보자고, 잊어버리지 말자고 몇번이고 다짐했다.

4월 16일. 집에 돌아가는 길에 보이던 커다란 벚꽃나무 아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휴대폰에 몰두한 남자는 남색 쟈켓을 입고 있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하얀 분홍빛의 꽃잎이 어른거리며 떨어져 바닥에 얼룩져 있었다. 뛰어오는 발소리에 남자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며 고개 들었다. 여전히 전혀 변하지 않은 말끔한 얼굴이었다. 마치 어제도 만났듯이. 싱긋 웃으며 살짝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사쿠야는 환하게 웃으며 남자 앞에 다가가 고개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올해도 만났네요."
"오랫만이네. 자아..고등학교 생활은 즐거워?"
"물론이죠. 공부는 점점 어려워지지만,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요."
"좋아. 아, 잠시. 이벤트 떴다."

말 끊어서 미안. 남자는 급하게 휴대폰을 들어 게임화면을 켰다. 사쿠야는 괜찮다고 대답하며 그가 하는 게임 화면을 슬쩍 쳐다보았지만, 게임에 영 관심이 없는 사쿠야는 전혀 모르는 전투게임이었다. 게임효과음이 잠시간의 침묵을 메우자 사쿠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게임 인가요?"
"응. 오늘 마지막날 이거든. 힘내서 달리지 않으면.."
"저, 저...!!"
"응? 왜그래. 뭔가 급해보이네."
"이름!! 이름을 가르쳐주세요, 저희 오래 만났죠. 열번도 넘었는데, 이름도 모르는건 이상해서. 실례가 안된다면.."
"아하. 가르쳐 줄 필요가 없었지. 내 이름은 치가사키 이타루. 정도로."
"이타루 씨군요. 헤헤. 드디어 알았네요. 음...그리고..."

사쿠야는 발을 동동거렸다. 물어보고 싶은것이 너무 많았다. 어째서 매년 자신을 만나러 오는건지, 그것이 언제나 벚꽃나무 아래인 이유가 있는건지. 아무 말 없이 사라지고 아무 말 없이 나타나는건지. 또 말 없이 사라지면 일년을 더 기다려야했다. 내년엔 나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내년이면 성인이 되어버리고, 그러면 그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왠지모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이타루가 눈이라도 감으면 사라질까 두려웠다.

"됐다. 이겼어."
"이타루씨는, 그러니까. 음...저의 수호천사 같은건가요?"
"뭐어? 푸핫. 수호천사?"
"아앗! 웃지말아주세요. 저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해봤다구요. 매년 한번씩 나타나서 안부를 물어보고, 봄에만 나타나는 데.."
"완전 틀렸어. 이젠 말해줘도 되겠지? 나는 사신이야. 수호천사랑은 정 반대라구."
"네..? 사신??"
"수호천사라고 말해놓고 사신은 없을 이유가 있나? 사쿠야는 그러니까..내..."

내 실수이지. 사쿠야는 이타루가 사신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맡은 일이었다. 아직 파트너도 구하지 못한 이타루로서는 가족 전체를 인도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사고사의 인과는 단순하고도 명확하다. 그러나 죽음을 인지하지도 못한 영혼을 제대로 인도하는 절차가 힘들었다. 이타루는 엉망이된 사고현장에 유유히 걸어가 피가 스며들어 진득한 도로 위에 서서 성이 똑같은 여러 이름을 불렀다. 얼른 끝내고 새로 시작한 게임의 이벤트를 해야했다. 이타루가 마지막으로 작은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사쿠마 사쿠야...어...어라?"

소년은 살아있었다. 일가족 몰살이 아니였단 말인가? 이타루는 주머니에 있던 명부를 자세히 읽어보았고, 거기에는 사쿠마 사쿠야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사신에게 이름을 불려버린 이상, 영혼의 성질이 달라진다. 이름표를 붙여버린 듯, 사쿠야의 영혼에는 빨간 표식이 붙어버렸다. 어느 사신에게나 눈에 띌 만큼 명확했다. 구급대원들이 급하게 사쿠야를 데려가버려 이름표를 가리는 작업조차 하지 못했다. 다시 사쿠야를 병원에서 찾아냈지만, 사쿠야는 날 잡아 가라는 듯 붉은 이름표를 떡하니 붙이고 있었다. 반리를 파트너로 삼은지도 얼마 되지않은 때였고. 사쿠야의 상태를 고백하고 반리에게 보여주자 바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일 났네...지금 와서 저걸 어떻게 가려. 게다가 이타루씨랑 접촉해서 무지하게 눈에 잘띄는 체질이 되어버렸다고."
"그치? 망했네. 상부에 보고하면 귀찮아지겠지. 반리?"
"헤. 귀찮은건 딱 질색이야. 나까지 뒤집어 씌우지 말라고."

파트너인 반리는 좀 귀찮은걸 싫어하는 녀석이긴 해도 한번 맡은 일처리는 제대로 하는 성격이었다. 기본적으로 타고난 사실로서의 기질이 좋기도 했다. 일이 없을 때는 함께 게임을 하기도 하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죽은 잘 맞았다. 이타루는 반리의 충고를 들어 매년 사쿠야에게 붙어있는 이름표를 지우는 일을 계속했다. 어릴땐 아무것도 모르는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더니, 드디어 올해는 이름을 물어본 것이다. 사쿠야는 이름처럼 만개한 벚꽃과 어울렸다.

"이타루씨?"
"하아. 언제까지 이렇게 임시방편으로 살 순 없지. 나랑 같이 잠시 커피라도 마시러 갈까?"
"앗. 좋아요! 물어보고 싶은게 잔뜩이고...올해는 금방 사라지지 않으시네요. 기뻐요."
"가까우니 걸을까? 반리한테 문자 넣어야겠다."

이타루는 반리가 자주가는 카페로 향했다. 와이파이가 잘 되는 곳이라 이벤트 마지막날인 오늘은 하루종일 그곳에 죽치고 있을것이다. 사쿠야는 신난듯이 이타루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옆을 걸었다. 매년 볼때마다 생각했지만, 가족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혼자 자란 아이라기엔 사쿠야는 너무나도 밝고 예쁘게 자랐다. 사쿠야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계절이 바뀔때면 사쿠야를 찾아갔다. 마치 계절별 이벤트처럼 반복했다. 사쿠야는 봄에 보는 게 가장 어울렸다. 벚꽃나무 아래에서 보는 짙은 벚꽃색의 머리와 눈과 사쿠야의 미소는 절경이었다.


***


여전히 손님이 없는 카페였다. 사신들이 자주 드나들어 안좋은 기운이라도 남아있는지 커피에 한한 높은 취향을 가진 반리가 인정한 가게인데도 손님이 많은 적을 본 적이 없다. 휴대폰이 충전되는 구석자리에 앉아 코를 박고 게임에 몰두한 반리를 발견했다. 사쿠야는 친구분인가요? 하고 명랑하게 물어보았다. 사신이란걸 밝혔는데도 놀라거나 무서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역시 너무 어릴때 건드려버렸나. 이타루는 슬쩍 고개를 까딱이며 맞은편자리에 앉았다.

"반-리. 내가 누굴 데려왔는지 봐."
"일찍왔네, 이타루씨..아앙? 뭐야. 사쿠야잖아."
"어라? 어라? 절 알고 계시나요?"
"정말..무슨 생각으로 데려온거야. 이름표 지우러 간 것 아니였어?"
"아아. 이제 그만하려고. 이제 사쿠야도 설명을 이해해 줄 거고."
"맞아요. 궁금한 것 투성이에요. 아, 저기. 저는 사쿠마 사쿠야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뭐어, 이미 아는 사이라구. 어서 앉아. 나는 셋츠 반리. 이타루씨의 파트너님이야."

반리는 휴대폰을 본 채로 사쿠야에게 앉으라며 옆자리의 의자를 툭툭 쳤다. 사쿠야는 가벼운 몸짓으로 자리에 앉았고, 이타루가 가져온 딸기 스무디를 받아들고 감사하다고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타루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어디부터 말해야할진 모르겠네. 일단 들어봐."

이타루는 가감없이 사쿠야의 가족이 죽은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사쿠야의 영혼에 낙인이 찍혀버렸고, 매년 갔던건 그걸 지우기 위함이였다는 간단한 이유였다고. 종종 모습을 드러낸건 제대로 지워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사신의 낙인은 생각보다 큰 힘이 있어서 잡다한 화는 막아주지만, 커다란 화가 찾아왔을때 까딱하면 죽을 때가 아니더라도 불려갈수 있었다. 이미 한번 이름을 불렸기때문에, 착각하기 쉽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방법이 있었지만."

게임을 하며 이타루의 말을 듣고있던 반리가 끼어들었다.

"뭔가요?"
"인연 자체를 끊어버리는거지. 근데 이건 본인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라. 이제 내 설명을 알아들었으니, 진행해도 되겠지?"
"인연을 끊으면 어떻게 되나요?"
"별거 없어. 사신과 접촉한 인연이라고 해봤자.. 기억도 길지 않을거고."
"그럼 이타루씨를 잊어버리게 되나요?"
"그렇지. 똑똑해."

이야기가 잘 이어지고 있었다. 이타루는 이번에야말로 사쿠야와의 악연아닌 악연을 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쿠야는 어두운 세계를 보기엔 밝고, 아름다웠다. 사신의 낙인을 달고 있는 사람이 최후에 어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이타루는 잘 알고 있었다. 사쿠야에게 그런 지옥을 보여 줄 순 없었다.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잊어버리는게 사쿠야를 위한 길이었다.

"그럼 싫어요."
"....진짜야? 내 설명을 제대로 이해 못했어?"
"전 매년 이타루씨를 기다렸단말이에요. 제 봄에는 항상 이타루씨가 있었어요. 왠지 절 지켜주는 수호천사 같아서..."
"나는 수호천사같은게 아냐. 그건 사쿠야의 착각."
"착각이라도 좋아요. 저와 계속 만나주세요. 네? 저, 이타루씨에게 어울리는 멋진 남자가 될게요!"

이타루씨를 좋아하고 있어요. 사쿠야는 준비했던 대사를 말했다. 내년에 이타루를 만나면 꼭 하겠다고 다짐한 말이었다. 몇 개월동안 고민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 몇 번 마주친 것만으로도 사랑이란게 생길 수 있을까.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이타루를 좋아하는게 분명했다. 언제쯤 그와 만날수 있길 바라며 벚꽃나무 아래만을 찾아다녔다. 이타루와 만나고 싶어서. 만나서 이름을 물어보고 싶어서.

"배우가 되고 싶은거 아니였어? 연습 자주하던데-."
"에? 그렇긴 하죠. 언젠가는..반리씨도 절 보고계셨나요?"
"물론. 저번에 하던 대본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였지?"
"하아. 올해도 똑같네. 사쿠야. 내년엔 더 현명한 결정을 하길 바래. 반리, 부탁해."
"하이-. 좀더 대화 나누고싶었는데. 내년에 보자-."

반리가 사쿠야의 의뭉스러운 눈을 바라보고 찡긋 윙크했다. 박수소리와 함께 사쿠야는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잠들었다. 매년 이런식이었다. 이타루와 반리는 사쿠야가 열네살이 되자 동의하에 인연을 끊기위해 매년 찾아가 설득했다. 결과는 늘 거절이였다. 둘은 사쿠야를 아끼고 있었지만, 그들과의 만남이 사쿠야에게 좋은 영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번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사신은 사신이었다. 사쿠야는 배우가 되고싶다고 했다. 그 꿈이 이루어 질때까지 불행해지지 않도록.

-

벚꽃나무 아래 서있었다. 다시 그 남자는 사라진 뒤였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리에는 벚꽃잎이 밟아 으깨진 발자국만이 남아있었다. 올해는 꼭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는데. 사쿠야는 왠지 멍한 머리로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왠지 그가 나무위에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심 벚꽃의 요정이나 산신령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었기 때문이다.

"앗. 진짜 망했다."
".....!! 이타루씨!!!!"
"망했어요-. 내가 그래서 위험하다고 했잖아. 게임 오버라고. 기척 숨겼는데도 바로 아는걸보면."
"인정. 내 패배. 하지만 이래서는 사쿠야가 위험해. 츠무기한테 이름표좀 떼달라고 부탁할까?"
"아. 확실히. 츠무기씨라면 이런쪽 특기고. 문자해봐?"
"카페로 유인해서 부탁해보는걸로."

이타루와 반리가 사쿠야를 두고 대책회의를 벌이는 동안 사쿠야는 두사람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며 스물스물 살아나는 옛날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14살의 봄, 이타루를 만나고 처음 사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쿠야는 딱히 죽어도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이타루에게 엄청나게 혼나고는, 서점에 끌려가 대본책을 선물받았다. 15살의 봄, 이타루와 벚꽃이 흐드러지는 길을 걸었다. 봄이 아니더라도 이타루와 만났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혼자 집에 걸어가던 겨울의 어느날. 코트를 입은 모습으로 머플러를 선물받았다. 16살의 봄. 이타루에게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타루는 그럴리 없다고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나 여름에 만난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할 정도로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였다. 사쿠야는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것이 사랑이라고 할수있을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지속되는 존재는 이타루 밖에 없었다. 이타루는 이상한 의존이라고 받아쳤지만, 이미 어떤 마음이든 이타루에게 전하고싶어서 견딜수 없었다. 사쿠야는 드디어 이룬것이다. 이상한 데자뷰는 이어지고 이어졌다.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되듯, 끊어진 인연의 실을 다시 묶었다. 사쿠야는 활짝 웃으며 이타루를 안았다.

"으..으악!! 왜이래, 사쿠야!!"
"이타루씨 너무너무 좋아요! 이제 절대 헤어지지 않을거에요!!"
"휘유. 행복한 사랑 하시길-."
"허리에 매달리지마..나는 스킨쉽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타루씨 정말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면 반칙이야."

반리가 쿡쿡 웃으며 츠무기에게 문자를 보냈다. 완전 웃긴 일이 있으니까, 단골카페에 오면 이야기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쿠야의 심장이 연분홍빛으로 밝게 빛나며 쿵쾅거렸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 할 사신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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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樣年華


※개인적 캐해석이 가득합니다.

※타스쿠와 츠무기가 사신이라는 설정입니다.

 

 

 

따스함이 지나쳐 따가운 햇볕이 눈에 쏟아졌다. 며칠 동안 끊이지 않고 내리던 비는 도시를 씻어내고 먼지 쌓인 거리를 말끔히 청소했다. 비 오는 날에 일하는 걸 싫어한다. 일이라는 게 즐거운 일도 아니고, 오히려 비가 오는 우중충한 날씨와 어울리는 일이었다. 영화 속에서도 누군가의 장례식엔 항상 비가 오곤 했다. 비가 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단순한 츠무기의 기호였다. 모락모락 말라가는 거리를 걸어 가벼운 연갈색 코트를 입은 츠무기는 약속한 카페로 향했다. 비가 오는것을 좋아하지 않는 건 파트너인 타스쿠도 마찬가지였다. 타스쿠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타스쿠의 취미인 축구나 조깅, 기타 여러 가지 운동들은 비가 오면 할 수 없는 종류가 많았다. 책이나 잡지를 보며 둘의 거처에서 엉겨 누워있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지, 츠무기는 비가 사흘째 내리던 날 타스쿠의 얼굴에서 좀이 쑤셔 견딜 수 없다는 역력한 표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커다란 창이 있는 거실에 앉아있는 타스쿠의 앞에 놓인 좌식 테이블에는 여러 장의 서류가 놓여있었다. 짐짓 모르는 척, 방에서 나온 츠무기가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뭐해, 타스쿠? 다음 대상자에 대한 공부?"

"며칠 내로는 접촉해야해. 너도 읽어보았지? 이미 생사의 길에 한번 섰던 인간이라 쉽진 않을 거야."

"감이 좋으려나...아무래도 그렇겠지. 걱정 마, 우리 둘은 누가 봐도 사신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외모와 오오라는 다른 문제야. 내일은 비가 그친대."

"그럼 오늘 저녁은 연극이라도 보러갈까? 마지막 휴일이니까."

 

언제 부터인지 기억하는게 무의미할 정도로 까마득한 시간 동안 타스쿠와 츠무기는 함께 사신으로서의 일을 하고 있었다. 긴 세월을 견디며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돌고 도는 윤회의 고리 사이에서, 고리에 끼어들 수 없는 외부인이자 방관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연극은 삶의 귀퉁이를 떼어 만드는 찰나의 예술.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때 밖에 볼 수 없는 생생한 순간을 볼 때면, 지나오면서 만났던 여러 인물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둘은 커다란 우산을 나눠쓰고 비로드거리에 나가 쇼핑하듯 연극 포스터를 한 번씩 훑어보고는, 가장 마음에 드는 비극을 선택해서 보았다. 완성되고 정제된 슬픔을 느낄 때면 상반되게 기쁨이 느껴졌다. 감정을 가진 존재로서의 기쁨이 아닐까. 타스쿠의 짧은 감상에 감탄하며 츠무기는 사람이 가득한 비오는 거리를 걸었다. 자신을 숨기고 새로운 인물의 삶에 빠져 연기하는 건 재미있을 거야. 츠무기가 부러운 듯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잠시 쉴래? 아리스가와처럼."

"휴가 가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 끝나면 생각해보자. 타스쿠도 좋다면."

"연기 말이야? 한 번쯤은 나쁘지 않을지도."

 

타스쿠가 보기 드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연극이 굉장히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연극을 보러 가기 쉽다는 이유로 일부러 비로드 근처에 집을 구할 정도로 타스쿠 또한 연극을 좋아했다. 연극을 주제로 한 상가와 거리를 조성한 이곳은 심심치 않게 길거리에서 간단한 연극을 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간이 천막을 쳐놓고 연기하는 아마추어 배우들이 있었다. 빗속에서 헤어지는 연기를 하는 두 사람의 연기를 지켜보다 다시 발길을 재촉한 츠무기가 문득 일이야기를 꺼냈다. 커다란 검은 우산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에 섞여 츠무기의 목소리는 곁에 붙어선 타스쿠에게도 겨우 이어졌다.

 

"유키시로 아즈마. 한번 길을 벗어난 적이 있어 영혼의 정확한 나이는 미상..특이한 케이스네. 확실히 히소카군이 맡기엔 어렵겠어."

".. 둘이 일할 마음이 있긴 한건지 궁금하지만..이번 처럼 일을 떠넘긴 적은 없었지."

"그거야 호마레씨가 최근 30년동안 없었으니까...혼자서 일하는 건 위험해. 오히려 히소카군이 여유로운 성격이라 다행이지."

"아리스가와가 이상한 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길게 잠적할 줄이야.."

 

히소카를 보지 못한지도 몇 달 째였다. 분명히 도시 어딘가를 돌아다니며 잠에 빠져있을 것이라고 츠무기는 생각했다. 사신은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살아가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었다. 생명 활동이란 걸 하지 않으니까. 화석처럼 굳어가는 혀를 움직이기위해 무언가를 마시는 것을 즐겼다. 츠무기는 커피였고, 타스쿠는 술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둘은 꺼진 방의 불을 켜고 음료수와 맥주캔만이 들어있는 냉장고에서 가벼운 도수의 맥주캔을 꺼내 연극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마셨다.

 

 

 

***

 

 

카페에는 얼음이 든 빈 잔을 든 타스쿠가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인사한 츠무기가 맞은편으로 걸어가며 시선에 이어지는 테이블에 앉아있는 옅은 은발의 남자를 슬쩍 바라보았다. 유키시로 아즈마였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작은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색의 머리색 때문인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한 시간 동안 타스쿠와 츠무기는 일상적인 대화를 하며 아즈마를 관찰했다. 업무용 전화를 두 통한 것 외에는 줄곧 미묘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이상의 정보를 알아 낼 수 없었다. 츠무기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서 자연스럽게 아즈마의 테이블에 멈춰섰다.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네요."

"..흐음? 그렇네. 흐음. 처음보는 얼굴인데. 날 알고있어? 직업상 사람에 대한 기억력은 좋은 편이지만. 종종 잊어버리기도 한답니다."

"아뇨, 우린 초면이에요. 당신은 유키시로 아즈마씨죠?"

"초면인데 어째서 내 이름을? 혹시 내 소문이 그렇게 널리 퍼진걸까."

"소문..? 그런 건 아니지만. 잠시 할 말이 있는데 합석해도 될까요?"

"물론이야. 이야기하는 건 좋아하니까."

 

유키시로 아즈마는 능숙하게 츠무기의 얼굴을 살피더니 맞은편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츠무기는 몸속까지 꿰뚫리는 시선을 느꼈다. 감이 좋은 사람 중에서도 더 민감한 정도의 감각을 가진 사람일지도. 사신이란 걸 밝히는 것이 금기는 아니었지만, 이후 작업이 귀찮아지는 경우가 많았다. 기억과 시간을 비틀고 그사이를 일상적이고 필요 없는 기억으로 메꾸는 것이었는데, 그런 섬세한 작업은 영 손에 맞지 않는다고 타스쿠는 불평했다. 츠무기는 권유받은 자리에 앉으며 아즈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여전히 연령을 알 수 없었다. 사신의 눈에는 읽혀진 사람의 출생년도와 사망예정일이 보였다. 어째서일까. 츠무기와 접촉한 것만으로도 그의 수명은 일주일 내외로 한정 되어야 할텐데. 여전히 그의 수명은 측정불가로 보였다.

 

"할 말이 뭐야? 너처럼 좋은 인상의 남자에게 들을 말이라면, 기대되는걸."

"좋은 이야기는 아니에요. 당신은 일주일 내로 가능한 모든 사인을 고려한 것중에 가장 인과에 들어맞는 이유로 죽게 됩니다."

"후후후. 깜짝 이벤트인가? 이벤트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 취직난에 고생중?"

"믿지 못해도, 사실이에요."

"그렇지. 세상엔 믿지 못할 사실이 많지만...거짓말 하는 눈 처럼 보이진 않아. 연기력이 출중한걸."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아즈마는 츠무기의 이름을 묻는 듯 손을 내밀었다. 츠무기는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츠키오카 츠무기. 하고 짧게 대답했다. 아즈마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로 좋은 이름이네. 하고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전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닌걸. 츠무기는 이마를 긁적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줄곧 지켜보고 있던 타스쿠는 혀를 차며 테이블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힘을 실어주려는 듯, 츠무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화살처럼 아즈마의 금색 눈을 바라보았다. 깊어보여도 속은 텅 빈 눈동자였다.

 

 

"뭘하고 있는 거야. 어이, 이 녀석의 말은 진짜니까."

"아하, 남자친구와 같은 일을 하는 거구나?"

"남자친구..? 아니, 아니.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휘말리지마, 츠무기. 말장난은 그만하지. 말로 알아들을 정도로 죽음에 태연한 인간은 없어."

"헤에. 듬직한 남자친구네."

 

 

사신은 직접 사인을 만들지 않는다. 인과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면, 높은 곳에 놓여 있던 공이 저절로 굴러내려 오듯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사신의 손에 죽음이 떨어진다. 츠무기와 타스쿠가 조심스러운 것은 굳이 공포감을 심어주어 삶의 마지막 일주일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목숨을 빼앗아가는 위치에 선 존재가 예의를 차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죄악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자기 위로에 불과했다. 하지만 좋아서 사신이 된 것은 아니었기에, 이 정도 자기합리화는 괜찮다고 믿었다. 타스쿠가 노골적인 불쾌함을 표시하자 아즈마는 손을 모아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네. 미안. 둘 사이가 좋아 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아뇨. 형제라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지만..."

"누가 자신의 형제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보는 눈이 없는 사람 들만 만났나보네. , 또 실례해버렸네. 츠무기의 친구는 뭐라고 부르면 될까?"

"나는 타카토 타스쿠. 본론을 다시 말하자면, 통보해주러 온 것뿐이야. 믿든 믿지 않든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심사숙고해서 남은 시간을 보내도록."

 

타스쿠는 츠무기에게 자리에서 벗어나자는 손짓을 했다.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츠무기가 허둥대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즈마가 다급하게 츠무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츠무기의 손을 잡은 아즈마의 손을 타스쿠가 쳐냈다. 찰나에 벌어진 일에 날선 긴장감이 흘렀다.

 

", 아파.."

"당신, 츠무기한테 뭐 하는 거야."

"미안해요. 아즈마씨. 타스쿠, 심했어. 손 정도는 내가 뗄 수 있어."

 

묵직한 타격감에 얼얼한 손을 잡은 아즈마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츠무기가 타스쿠의 어개를 밀며 어서 사과드려. 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사과한 타스쿠가 눈을 치켜떴다. 남자친구의 과보호가 너무하네. 그런 농담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꾹 참은 채로 그들을 불러세운 이유를 말했다. 죽음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지만, 사신이나 그런 종류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다. 살면서 그런 존재를 여러 번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만나게 되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던지, 그런 서비스는 없는 거야?"

"종종 그런 걸 해주는 녀석도 있지. 선택사항도, 직업정신도 아니야. 서비스나 취미정도."

"있지. 나는 어렸을 때 가족 전체가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는데, 그때 타스쿠와 츠무기같은 부류를 본 적이 있어. 나는 살아남았지만...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죽어버렸어. 나는 언제 따라갈 수 있을까-. 하고 많이 바랐는데. 이젠 따라간다고 말하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싶어."

"동정에 호소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 별로 그런 건 아냐. 단지 궁금했어. 그때 내가 어째서 죽지 않았는지. 죽기 전에 알고 싶어."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꽤 굉장한 염원이 느껴지는데. 제대로 떠날 수 있으려면.."

"...기밀정보야. 너도 알잖아."

"그렇지만...곧 영혼으로 돌아갈 텐데. 이렇게 상처가 가득한 채로..."

 

츠무기가 말 꼬리를 흐렸다. 아즈마의 심장은 여기저기가 조각나고 상처투성이였다. 오래된 상처가 썩어 검게 변한 부분도 있었다. 육체의 삶이 끝나 영혼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제대로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깔끔한 일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둘이었다.

 

"이미 망가진 심장은 다시 고칠 수 없어. 사실을 말해 준다고 해서 영혼 끝까지 자리 잡은 원한이 사라진다는 확신도 없고."

"두 사람이 노력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쁠 거야. 남은 일주일 동안 잘 부탁해. , 여기 내 명함. 심심하면 놀러와. 맛있는 술, 편안한 말동무, 즐거운 자리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아즈마가 내민 검은 명함에는 빛나는 은색 각인으로 그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없었다. 선불휴대폰으로 보이는 번호가 뒷면에 있었다. 신기한 듯 앞뒤를 돌려보던 츠무기가 호기심이 동한다는 듯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스쿠도 술은 좋아하니까. 한번 들릴게요."

"그래? 일주일 내로 와야 늦지 않겠지. 이번 주 수요일은 어때. 한가한 날이고, 마침 주문했던 고급 술이 들어오는 날이야."

"헤에. 좋아요. 비싼 술은 별로 마셔보지 못했지만. 타스쿠. ? 생활비 아끼느라 통 마시지 못했으니까."

"그때까지 알아보지. 알아내지 못할 확률이 높지만, 그렇더라도 깔끔하게 포기해."

"좋아.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아즈마는 잘 부탁해. 하고 악수를 청했다. 타스쿠와 츠무기 양 쪽 모두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고만 있자 아즈마는 민망한 듯 살짝 웃고는 손을 거두었다. 분명 둘은 흔히 볼 수 있는 인상이었지만 어딘가 거리의 풍경과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편한 인상이었지만 경계심을 놓지 않는 츠무기와 결코 농담 따위는 하지 않을 모습의 타스쿠. 언뜻 보기엔 완전히 다른 성향인 두 사람의 관계는 깊고 오래되고 끈끈한 유대가 느껴졌다. 사고로 한 순간에 모든 가족을 잃은 아즈마는 자신과 이어진 끈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게를 보는 눈이 좋았다. 정말로 연인인줄 알았는데. 아즈마는 속으로 말을 삼키며 짧은 인사를 남기고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 너무 무례했을까? 왠지 악수는 꺼려지게 돼. 기억을 무심코 읽어버리게 되니까."

"굳이 알 필요 없는 걸 알고 싶지 않아. 빈말로라도 유키시로의 일생은 평탄해 보이지 않고.“

 

퇴근길에 들어선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나도 이제 슬슬 일하러 가야하고. 하던 아즈마의 말이 떠올랐다. 알아봐주겠다고 내뱉은 이상, 몇 년 치 사건사고 자료를 열람 해야 할 것이다. 일가족이 몰살하는 일로 한정한다 하여도, 괴롭고 슬픈일이 많을 것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정말 쉬는게 좋을지도. 츠무기는 집 근처 담벼락에 붙은 배우 오디션 모집 광고를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 선 자신과, 타스쿠를 상상해보았다. 둘이서 어떤 연기를 하면 좋을까. 격정적이고 폭풍처럼 쏟아지는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포장된 음식을 받아온 타스쿠가 아무 말 없이 츠무기를 바라보았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를 바라며, 지금이 아닌 다른 꿈을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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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히소카가 사신이라는 설정입니다.  AU주의

※주제에 한참 벗어난 글이라서 죄송합니다. 주제는 다정한 사신이 죽여주는 이야기.



last Teatime



인적이 드문 새벽 2, 어느 고층빌딩의 옥상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두 시간째 앉아서 손에 든 작고 검은 책을 찬찬히 읽는 중이었다.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책은 두껍고 검은 표지에 속지는 낡고 누렇게 바랜 종이였다. 하늘 가운데 솟은 반보다 커다란 달이 남자의 인영을 비추었다. 그는 눈부신 달빛이 성가신 듯 올려다보고 얼굴을 찡그리더니 손가락으로 어떤 이름이 쓰여 있는 줄을 가리키고 주머니에서 꺼낸 볼펜으로 원을 그렸다. 한동안 도시의 빈 건물을 찾아다니며 잠을 잤다. 낮에는 그늘을 찾아다녔고, 밤에는 어디든 좋았다. 잠을 잔다는 건 죽음을 체험하는 행위이다. 타인에게 죽음을 선물하는 자이지만, 정작 죽음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그는 탐닉하듯 잠을 청했다. 이번 달에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잠만 자기엔, 곧 있을 회의에서 들을 잔소리가 귀찮았다. 사신은 2명이 1조로 움직이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다. 생과 사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일은 위험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힘든 경우도 있었다. 소리 없이 사라진 몇몇 인물들을 기억할 만큼 히소카는 다른 이에게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모범적인 페어라면, 계절별로 열리는 회의에서 종종 만나는 타스쿠와 츠무기가 그러했다. 둘은 백년이 가까운 기간 동안 함께 다니며 꾸준히 사람들을 죽음으로 인도했다. 히소카는 아무래도 혼자가 좋아서. 그보다 조용한 것이 좋았기 때문에 실적 따윈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홀로 다녔다.

 

"아리스가와 호마레. 시인. XX. 사인은...만나서 정할래."

 

히소카는 꽤 오래 앉아있어 저린 다리를 툭툭 발돋움 하고는 검고 긴 코트의 자락을 털었다. 검게 치장하였다 해도 백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 때문에 눈에 띄었다. 그것이 히소카가 낮에 활동하지 않는 이유였다. 어째서 이런 머리인 건진, 본인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신은 필요에 의해 발생한 존재. 인과의 의지. 재료는 죽은 영혼들의 남은 찌꺼기들이라고 했다. 언제부터 존재한 것인지 의식하기 전 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사라지리라. 히소카는 건물 입구에서 나와 아리스가와 호마레의 흔적이 남은 거리로 향했다. 뭔가 단것을 먹고 싶다고 생각한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이것 인가? 자네가 찾는 것이."

".“

 

아리스가와 호마레와 만난 곳은 고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카페였다. 히소카는 카페를 찾은 손님인 척 위장하고 그에게 말을 걸어볼 계획이었지만, 히소카가 원하는 마쉬멜로우가 잔뜩 든 코코아는 그 카페에 없는 메뉴였다. 가만히 카운터에 서서 당황한 채로 멀뚱히 서있는 히소카에게 아리스가와 호마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마침 오전 열한시의 카페에는 둘밖에 없었으므로, 상냥한 카페의 여주인이 그럼 이건 어때요? 하고 단맛이 나는 다른 메뉴를 권했으나 히소카가 알 지 못하는 이름을 가진 음료였다.

 

"마쉬멜로.."

"자네, 뭔가 곤란한 것 같군. 자아. 이 나에게 설명해보지 않겠는가? 아침의 친절은 저녁의 행운으로 이어진다고 한다네."

"....코코아."

"코코아가 마시고 싶은 건가. 아쉽게도 이 카페엔 없는 메뉴라네. 하지만, 카페 로즈 최고의 단골손님이자 최대 매상을 맡고 있는 나, 아리스가와 호마레가 부탁한다면 친절한 마스터께서는 만들어주시겠지. 이 작은 소년에게 최고로 맛있는 코코아를 선사해주지 않겠나?"

"정말, 호마레씨에겐 못 당하겠네요. 대신, 다음 번 시집도 카페에 몇 권 기증 해주시기에요."

"물론, 특별히 가장 먼저 사인 판을 증정하지."

 

호마레는 과도하게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카페의 여주인에게 감사한다는 표시로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보기 좋게 단단한 몸에 맞춤 셔츠와 얇은 소재의 체크무늬 니트 조끼를 입고 손목에는 루비색 커프스가 달려있었다. 돈을 잘 버는 족속인가 보군. 히소카는 생각했다. 어느 시대엔 시인이란 빈곤의 대명사였다. 현재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는 일주일 뒤에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었다. 히소카는 자신에게 작은 친절의 눈웃음을 하고 자리로 돌아간 호마레를 관찰했다. 그의 테이블에는 두꺼운 책이 두 권, 수첩, 만년필이 있었다. 책을 읽다가 만년필로 무언가를 적고, 다시 지웠다가 쓰기를 반복했다. 그의 표정은 생생했고, 실로 그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이 다양했다. 관찰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을 만큼 노골적으로 바라보자, 호마레는 다시 히소카가 앉은 창가 자리로 웃으며 다가왔다.

 

"자네, 아까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는 듯하다만. 무슨 볼일이라도? 감사의 인사인가?"

"당신. 일주일 뒤에 죽는다면 어떤 사인이 좋아?"

"흐음? 재미있는 질문이군. 하지만 허황된 상상은 하지 않는 편이라네."

"사실이야.“

 

히소카는 의자에서 일어나 호마레에게 다가갔다.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눈으로 호마레의 자적색 눈동자를 바라보고 그의 심장으로 손을 뻗었다. 호마레의 심장은 적당한 모양으로 망가지지 않은 형태였다. 마쉬멜로처럼 부드러운 심장이 구겨지지 않도록, 히소카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쥐었다. 죽음의 공포가 그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거나, 또는 히소카의 손을 잡고 자신의 죄를 울며 고해성사했다. 그러나 죽음은 벌이 아닌 생의 결론이다. 아리스가와 호마레는 과연 어떤 반응일까. 잠시간의 침묵 뒤에 그는 숨을 들이쉬며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었다.

 

"아아. 단명 하는 천재 시인이라. 너무 지루한 설정이야. 그래서 소년은 악마인가?"

"굳이 말하자면 사신."

"사신은 마쉬멜로가 잔뜩 든 코코아를 좋아하는군. 그건 클리셰적이지 않아."

"사신이 아니라 히소카."

"이름을 알려줘서 고맙군. 나의 이름은-.

"아리스. 아리스가와 호마레. 원하는 사인이 있다면 들어줄게."

"영광으로 알겠네."

 

호마레는 아까 카페 여주인에게 했듯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그만의 감사를 표현하는 방식인 듯했다. 히소카는 필요한 정보를 전했으니. 오늘은 이만 가보겠다는 뜻을 전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뜻밖에도 호마레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챘다.

 

"뭐야."

"어디 갈 곳이라도 있는 건가? 히소카군은."

"....갈 곳은 없지만."

"우리집에 갈텐가? 보아하니 일주일 간은 주위에 있어야 하지 않은가? 내가 도망이라도 간다면.."

"그럴 수 없어. 어딜 가든 알 수 있거든. 당신의 심장을 잡고 있으니까."

"내 마지막 호의로 맛있는 코코아를 대접하지."

"나쁘지 않네."

 

호마레의 간절한 눈빛에 마침내 히소카가 긍정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호마레는 무척이나 기쁜듯 히소카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히소카는 당장에 그 손을 털어냈다. 친한 척 하지 마. 냉정하게 말했음에도 호마레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그의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타고서, 그는 곧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답지 않게 택시기사와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 오늘 날씨와, 내일 날씨도 맑겠다는 의미 없는 대화였다. 히소카는 빠르게 지나가는 거리의 행인을 관찰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는 군중의 모양은 활기차 보였다. 막이 내리면 커튼콜은 없다. 박수쳐주는 이도 없는 연극을 이들은 최선으로 행하고 있다.

 

호마레의 집은 혼자 사는 것 치고는 과분하게 넓은 공간이었다. 이로써 그가 금전적으로는 여유로운 편이라는 히소카의 추리는 맞는 셈이었다. 깔끔하게 청소된 집에는 몇 개의 엔틱가구와 두꺼운 책이 가득히 꽂힌 커다란 책장이 있는 거실이 있었다. 신발을 신은 채로 현관에서 가만히 선 히소카에게 호마레는 꺼리지 말고 들어오게. 방안을 소개하듯 손짓했다.

 

"손님용 침구가 있다네. 한 번도 써 본 적은 없지만. 죽기 전에 써보고 싶었지. 최고급 오리털로 만든 것을 샀거든."

"그래서.."

"나는 시인, 탐구자, 개척자. 그런 사람이라네. 천재 시인 아리스가와 호마레의 유작을 위한 시흥을 위해, 오늘 밤은 따뜻한 코코아와 홍차로 티타임을 가지도록 하지."

"....."

 

 

 

 

 

 

***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4인용 식탁에 화려한 티팟과 찻잔이 놓여있었다. 자신의 검정색 코트를 서재에 있는 옷걸이에 걸어두고 나온 히소카는 간편한 검은 티셔츠만 입은 상태로 식탁 앞에 서서 멀뚱히 호마레를 바라보았다. 손님이 올지도 몰랐으면서, 티팟과 똑같은 무늬의 화려한 장미가 그려진 접시 위에는 유명제과점에서 사 온 과자와 고급 초콜릿이 가득했다. 마녀의 집에 초대받은 어린 아이처럼, 홀린듯이 히소카는 코코아가 담긴 머그잔을 내미는 호마레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사신에게 베푸는 호의치고는 정도가 심한 것이다. 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호마레는 히소카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왜 그러지? 오늘분의 코코아는 이미 다 마신 건가?"

"당신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이런 식으로 써도 아깝지 않겠어?"

"인생에 있어서 차 한잔을 먹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직 모르나 보군. 마치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듯 한 느낌이 든다네. 리프레쉬, 리프레쉬."

"말장난은 좋아하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나는 잘 모르지만. 사실은 아까 히소카군이 내 심장을 잡았을 때, 차갑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다네."

"살아있으면 누구나 심장은 따뜻해."

"그렇지 않을 수 있지. 사신이 있는 것처럼, 심장이 차가운 사람도 있다네.“

 

호마레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자를 내놓은 건 지루한 이야기에 요깃거리었다는 것을 히소카는 밤이 늦어서야 깨달았다. 심장이 없는 남자.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강철로 된 로봇처럼 벽을 보며 살아온 일생동안 외로움은 아리스가와 호마레의 가장 커다란 적이자 친구였으며 그림자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연민을 연기하며 동정을 사지 않도록 고고함을 유지했다. 절벽에 핀 꽃처럼. 놀랍게도 이것은 호마레의 직접적인 묘사어구였다. 히소카는 질린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호마레의 독백은 일인극처럼 높낮이 있는 목소리와 과장된 몸짓으로 이어졌다. 유작으로 사랑을 말하고 싶다네. 호마레는 피날레를 장식하듯 눈을 감고 말했다. 히소카는 과자가 든 접시를 모두 비웠으니, 이제 졸리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이다 졸린 투로 비비자 호마레는 그제서야 일상적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끝까지 들어줘서 고맙군. 히소카군은 상냥한 사신이라. 기쁘다네."

"마음대로 생각해."

"사인에 대한 것은 히소카군에게 맡기겠네. 다만 흔적이 남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 내가 남길 것은 시로 충분하니."

"고통에 대한 것은."

"히소카군이 그런 종류를 즐길 것처럼 보이지 않아. 자네는 나에게 어울리는 사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상한 사람이네.."

"나에 대한 보편적인 평가이지. 예술가들은 늘 그런 편견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픈 족속들이야.“

 

히소카는 대화가 오가고 있으나, 서로의 말은 서로에게 닿지 않고 있음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호마레의 끊이지 않는 이야기에 휘말려 피로감이 밀려왔다. 다른 이와 이렇게 대화를 길게 해본 지가 얼마이던가. 히소카는 거실 한가운데 놓인 호마레가 깔아놓은 푹신해 보이는 침낭을 발가락으로 꾹 눌러보며 부드러움을 짐작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호마레는 실크로 된 잠옷으로 바꿔 입은 모습이었다.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 또다시 새로운 표정으로 히소카를 응시했다. 짐짓 무시하려던 히소카가 결국엔 뭐야. 하고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신도 잠을 자야 한다고. 에너지를 회복해야 해.

 

"굳이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한가?"

"최장 일주일."

"그럼 지금 당장이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인가?"

"...지금 죽고 싶다는 말이야?"

"히소카군이 피로하다면, 내일 아침도 나쁘지 않지. 부디 자비롭고 다정하게 부탁한다네.“

 

히소카의 눈이 날카롭게 흔들렸다. 그래. 아리스가와 호마레는 자신과 게임을 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부정한다면, 그가 그동안 지켜온 미학은 깨지는 셈이 된다. 찰나와 순간의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장미밭에서의 맹세는 아리스가와 호마레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힘이었다. 세상 어떤 꽃도 영원히 피어있을 순 없으며, 차마 꺾이지 않아 잘려나가는게 마지막까지 모습을 유지할 테니. 호마레는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으나 히소카는 소리 없이 호마레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있었다. 마지막 말은 하게 두는 타입이었다. 이윽고 호마레의 말이 잦아들자, 히소카는 호마레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하고 이후의 절차에 관해 이야기했다.

 

즐거운 여행이 되길.”

 

히소카는 아침에 그리했던 것 처럼 호마레의 심장을 잡았고, 그대로 손을 뻗어 빼냈다. 아리스가와 호마레는 벽에 머리를 부딪칠 모양으로 힘없이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의 허리를 잡아챈 것은 검은 레이스정장을 입은 아리스가와 호마레였다. 히소카는 졸린다는 투로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아리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군. 놀라워."

"......"

"굳이 나를 찾아낼 필요가 있었나? 혼자인게 히소카군에겐 더 편했을텐데."

"....."

"정기회의에서 츠무기군들에게 내가 어딨냐는 잔소리를 듣고싶지 않았군. 히소카군다워."

"즐거웠어?"

"물론. 재밌는 연극이였다네. 자아. 이만 시인 아리스가와 호마레의 막을 내리도록 하지."

 

호마레는 바닥에 누워있는 방금까지 아리스가와 호마레였던 육체의 눈을 감겼다. 히소카의 검은 코트와 비슷하지만, 훨씬 화려한 금장식이 달린 소매와 목장식이 있는 점은 달랐다. 코트의 뒷자락에는 풍성한 주름레이스가 달려 있었고, 가슴주머니에는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붉은 루비로 된 커프스가 반짝였다. 커프스는 호마레의 눈 색과 비슷한 것이었다. 히소카는 먼저 걸어나가다 뒤를 돌아 검은 고딕정장의 호마레를 바라보았다. 어느쪽이든 시끄러운건 마찬가지네. 기다려달라며 소리치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온 호마레는 지겹다는 얼굴의 히소카를 보고도 활짝 웃었다. 둘은 비슷한 속도로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거리를 걸었다.

 

"아리스가 탄 코코아가 먹고싶었어."

"사실은 그거로군. 그렇지?"

"..."

 

호마레는 싱긋 미소지으며 히소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검은 레이스가 달린 소매와 얇은 체인이 달린 검은 레이스장갑이 닿여 사각였다. 아아. 멋진 밤이군. 오늘도. 호마레는 새까만 하늘을 바라보고 탄식했다. 이토록 무구 하고 아름다운 밤에 친애하는 파트너와 보내게 되다니. 시흥이 저절로 솟아나는군. 어디, 들어볼텐가. 말을 건네자, 히소카는 고개를 저어 거절 의사를 나타냈지만 호마레는 큼큼. 거리며 목소리를 틔웠다. 죽음을 인도할 사람에게 장송시를 강제로 들려주는 것은 그의 고약한 취미중 제일 가는 것이었다. 새까만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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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

 

3월

 

 


3월의 교실에는 어딘가 어색하지만 들뜬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운동장 주위에 심어진 벚꽃과 화단의 꽃들은 고르게 연두색 새싹을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겨우내 조용하던 운동장에는 밝은 표정의 학생들이 저들끼리 모여 운동을 하기도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며, 같은 시간 속에서 다른 기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 몇년째 하고있지만, 처음처럼 새 학기는 긴장되는 일이었다. 복도를 걸으며 손에 든 국어교과서와 참고서 몇권을 가슴팍에 안았다. 방학동안 새로 가르칠 책을 몇 번이고 읽었다. 종종 집에 놀러오던 타스쿠는 연극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맥주캔을 비우기도하고, 실내에서 하는 체력단련을 하며 겨울을 지냈다. 체육교과에 대한 공부는. 츠무기는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체육은 이론이 아니라 실기가 중요하지. 스쿼트자세를 오십다섯번째. 여섯번째. 숫자를 세어가며 백을 향해갔다. 겨울의 회상을 하다 문득 앞을 바라보니 간편한 져지를 입은 타스쿠가 츠무기가 걸어가던 복도 앞에 서있었다. 츠무기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타스쿠에게로 걸어갔다.

"안녕, 타스...가 아니라 타카토 선생님-."
"아직 새학기니까 용서해주지. 츠키오카 선생."
"하하...다음시간은 수업이야? 몇 학년의 수업?"
"아니. 점심시간까지 수업은 없어. 보건수업과 상의할 것이 있어서 보건실에 가는 길이야."
"헤에. 그렇구나. 나는 1학년 수업이야. 첫수업이라..기대되네."
"또 이상한 말에 휩쓸리지 말고. 너도 이제 어엿한 선생님이야. 새삼스럽지만."
"응. 걱정 고마워. 아, 종이 울리겠어. 오후도 힘내, 타카토 선생님."

츠무기는 커다랗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가 들어간 교실은 1학년 B반. 타스쿠는 며칠전 자신의 첫 수업에서 들은 짖굳은 질문을 떠올리다 다시 고개를 저으며 보건실로 향했다. 질문이 있냐는 물음에 첫키스는 언제였냐는 치기어린 질문이 었는데. 그 정도는 츠무기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겠지. 중등 입시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처음 들어온 학생들은 열기도, 호기심도 왕성한 나이다. 츠무기는 유연하게 생긴 외모때문에 얕잡아 보이는 일이 많았다. 곤란에 빠질때 마다 주변에서 치가사키나, 타스쿠가 나서서 츠무기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몇 달이 지나고 나면 학생들도 서로의 일에 집중할뿐, 선생님이 어떻다거나 하는 것은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타스쿠는 보건실 문을 두드리며, 아즈마선생과 셋이서 점심을 먹는다면, 츠무기는 도시락을 싸왔을 테니 뒤 뜰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실내화가 타박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표표한 웃음을 입에 머금은 아즈마가 문을 열었다.

"어라. 후후. 타카토선생님이네. 보건실엔 무슨일로?"
"보건수업과 체육수업의 연계때문에 상의할 것이 있어서.."
"들어와요. 지금 보건실엔 아무도 없으니. 차라도 한잔?"
"감사합니다. 녹차로."

곧 뜨거운 녹차가 담긴 머그컵을 받아든 타스쿠가 커다란 보건실의 창문을 내다보았다. 1층에 있어 운동장이 훤히 볼수 있는 구조였다. 체육교사인 타스쿠의 수업이 없으니, 수업이 시작한 운동장은 조용했다. 아즈마는 드립커피가 든 자신의 머그컵을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새학기가 시끄러우니 좋아. 보건실은 조용한것이 낫지만. 그렇지?"
"뭐. 상비적인 곳이니까요. 응급상황에대한 기본적인 대처를 실기시험으로 해보려 해서."
"좋은 생각이야. 츠키오카선생님은 어딘가 위태한 느낌이라서, 언제 다쳐도 이상하지 않을지도? 라거나."
"그 문장으로 놀리는건 이제 그만 둬줬으면 하는데요."
"아하하. 아니아니. 나도 츠키오카선생을 보면...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으니까. 지켜주고 싶은 성역처럼 말이야."
"성역...입니까."
"어라, 이미 주인이 있는 성역이니까. 멀리서 보는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러니, 무서운 표정은 그만두고 웃어주세요-."
"하아...이래서는.."

타스쿠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눈을 비볐다. 츠무기가 학교에서 컨디션이 나빠질때마다 데리고 간 곳은 보건실이었고, 눈치가 귀신처럼 빠른 아즈마는 둘의 관계를 단번에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가능하면 두 사람이 어릴때 부터 친구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 학교란 없는 소문도 만들어 내는 곳이니 사생활은 숨기는 편이 안전하다. 타스쿠는 가능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츠무기가 그러질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즈마가 말한 위태로워 보인다는 감정은 타스쿠가 지난 몇 년간 츠무기를 볼 때 마다 은연중에 품고 있던 것이다.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아두지 않으면 꺾이거나, 어디선가 등에서 날개가 돋아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붕뜬 존재감이 츠무기에게는 있었다.

"오늘 츠키오카 선생이 1학년 B반의 첫 수업에 들어가서."
"흐음? 또 첫 섹스라던지. 첫 키스라던지? 성희롱 당할까봐 걱정이야?"
"그녀석은 선생인데도..."
"후후후. 타카토선생님의 첫 섹스는 언제였나요-. 란 말을 들어도."
"갑자기 무슨.."
"아니, 궁금해졌어. 알고 지낸건 오래였지. 서로의 첫 키스에 대해 알고 있어?"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건지 모르겠네요."

타스쿠는 아즈마와 눈을 마주치고 불쾌하다는 듯이 흘겨보았다. 위협적인 표정이었지만 그 표정에 익숙한 아즈마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으르렁대는 모습이 날카로운 늑대처럼 보이기도 하고, 주인을 독점하려는 커다란 개 처럼 보이기도 했다.

"좋은 대처네. 츠키오카선생에게 가르쳐줘도, 더 귀엽게 보일 뿐이고. 그래서, 첫 키스는 언제? 내 생각엔, 첫 키스는 서로가 아니었더라도, 첫 섹스는 서로였다는 설을 지지하고 있어."
"하아...선생까지 왜이러는건지."
"나의 추리가 틀렸을까. 후후."
"점심을 함께 하려면, 뒤 뜰에서 만나도록하죠. 이만 가보겠습니다."

머그컵을 물에 씻어 건조대 위에 올려두고 타스쿠는 보건실을 나갔다. 새학기 마다 벌어지는 타스쿠의 고군분투를 보는게 쏠쏠한 재미란 말이지. 아즈마는 둘을 위해 준비해둔 콘돔 상자가 아직 남아있다는 장난을 생각해 두었고, 새빨개질 츠무기의 얼굴을 생각하며 혼자서 쿡쿡 웃었다.


***



"와. 오늘은 유키시로선생님도 점심 함께 하시는건가요? 좋네요."
"타카토 선생님이 일부러 불러주셨으니까. 혼자 먹는건 쓸쓸하기도 하고."
"빵으로 괜찮으세요? 일부러 식당에 가지 않으시고...제 도시락이라도 드실래요?"
"어떤 반찬이야? 츠키오카 선생님 혼자 살고있으니..직접 싼 도시락이겠네."
"앗. 아아.. 남에게 드리기엔 좀 부족한 도시락이죠. 계란말이 밖에 없어서."

매점에서 빵과 커피를 사온 아즈마는 먼저 앉아있는 둘의 옆에 앉았다. 봄의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뒤뜰은 츠무기가 취미라기엔 과한 수준으로 가꾸어놓은 화단이 있었고, 시간이 날 때 마다 찾는 곳이었다. 언제봐도 아름답네. 아즈마는 츠무기를 향해 미소지으며 흔들리는 꽃을 바라보았다. 요즘에 화단을 가꾸는 단정한 외모의 청년이란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설정이고. 옆에는 백마탄 왕자님-이라고 말하면 굉장히 화를 낼 왕자님-도 있다. 아즈마는 둘의 사소한 대화를 들으며 손으로 빵을 뜯어서 입에 물었다. 남자의 도시락이라 치기엔 츠무기의 도시락은 작은 편이었다. 반찬은 어설픈 계란말이와 장아찌가 다였다. 타스쿠는 매점에서 사온 도시락에 빵까지 쌓아두고 있었다.

"오늘 수업은 어땠어? 첫 수업, 좋은 느낌?"
"으응. 그렇죠. 몇 번을 해도 긴장되고. 그래도 올해의 신입생들은 모두 좋은 아이들이란 느낌. 즐거운 한 해가 될것같아서.."
"그 말은 매년 듣는것 같네. 후후."
"그런가요. 하지만 정말이라..."
"오늘 마치고는 뭘 할 예정이야? 멋진 곳을 알아뒀는데."
"저번에 아즈마선생님이 추천해주신곳. 정말 분위기 좋았지, 타스쿠..."
"음. 하지만 학기 초라 자중하는 편이 낫지않아. 츠키오카선생님?"
"아아. 그런가....그래도.."
"과보호 남자친구는 힘드네..그렇지. 츠키오카 선생님의 첫키스는 언제였나요? 첫섹스는?"
"에엣? 가..갑자기..그건.."
"유키시로 선생.."

타스쿠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즈마를 노려보았다. 잡아먹히겠는걸. 재밌다는 듯 쿡쿡 웃은 아즈마가 츠무기가 젓가락으로 들고 있던 계란말이 반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앗. 하고 츠무기는 빈 젓가락을 바라보다 첫키스..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학기 초만 되면 한번쯤은 학생들에게 들어보는 질문이다. 지어내도 괜찮을테지만, 학교의 소문이 여러가지로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언제나 똑같은 시간을 이야기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의 여름방학, 자전거를 타고 떠났던 바닷가에서 첫 키스는 시원한 바람과 짭잘한 입술의 맛과 열기가 강렬하게 화상처럼 남아있었다. 긴장해서 차갑게 식어버린 손으로 서로의 따스한 볼을 어루만지던 온도차까지도. 귀가 빨갛게 변하는 츠무기를 바라보던 타스쿠가 미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굉장히 많이 듣는 질문이라...이젠 아무렇지 않아요. 첫키스는 고등학생때였죠. 섹스는...으음.."
"자. 계란말이의 답례인 초코렛. 더 이상 곤란하게 하면, 타카토 선생님에게 살해당할지도. 후후.."
"그..런가요. 다 큰 어른들끼린데요. 대답해드려도 상관없지만..기억이 나질 않아서."
"발정난 남고생같은 질문은 이제 그만하고, 밥이나 먹지."
"발정이라니, 타카토선생님 입에서 그런 말도 나오고. 귀여워라."

귀여우니까 선물. 아즈마는 주머니에서 작은 초코렛을 하나 더 꺼내 타스쿠의 손에 쥐어주었다. 코웃음을 친 타스쿠가 초코렛을 츠무기에게 가볍게 던지고는 빵봉지를 뜯었다. 식사를 마치고 도시락가방을 넣은 츠무기는 뒤 뜰 중앙에 핀 벚꽃을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만개하지 않은, 하얀 꽃망울들이 눈처럼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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