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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4.09.21 The Office! 04
  8. 2014.09.21 Blue ashes 4(完)
  9. 2014.09.21 Blue ashes 3
  10. 2014.09.21 Blue ashes 2

오선지와 0와 1


PC가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선 성준은 마음이 급했다발가락으로 버튼을 어물쩍 눌러보다 얼른 손가락을 전원버튼에 가져갔다소생한 감각을 제공한 것이 이 안드로이드라면찰나의 순간에 이 정도라면 제대로 움직일 때는그는 PC설치를 먼저 해준 협회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PC를 키고 카이토의 CD를 넣자 설치 화면이 나타났다.

 

[Install을 원하시는 보컬로이드의 단자와 PC를 연결 해주세요.]

 

단자잠시만.”

 

그는 거실로 뛰어나가 카이토의 다리를 붙잡아 질질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비슷한 크기의 사람보다 묵직한 기계의 몸을 PC옆에 눕혀놓았다그는 파리에 있을 때알고 지내던 친구가 자신의 가사도우미 안드로이드를 충전하던 장면을 기억해냈다그 안드로이드의 단자는 목 뒤나 허리 뒤에 있었다성준은 파란 머리카락이 덮인 목덜미를 넘겨보았다네모난 모양이 난 홈을 눌러 여덟 개짜리 핀의 단자가 나타났다제품명 인 듯 한다섯 글자짜리 코드도 각인되어있었다.

 

[시리얼 코드를 입력해주세요]

 

PC화면에 다음 창이 나타났다시리얼코드정품 안드로이드라면 한 번 등록된 시리얼 코드는 다시 사용할 수 없었다이전의 코드를 안다면 재설치는 가능했지만성준이 발견한 것은 기체 하나와 설치 CD가 고작이었다가만히 반짝이는 화면을 바라보다 그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야속하게도 단자를 연결한 안드로이드는 묵묵부답이었다.

 

젠장...하긴이 비싼 걸 공짜로 얻을 수 있을 리가..”

 

시내에 나가서 정품 CD를 하나 더 사서 시리얼 코드를 하나 더 받아오는 수밖에.그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본체의 CD를 꺼냈다손가락으로 집어내자 그의 눈에 숫자와 알파벳이 섞인 글자들이 들어왔다무언가 들어맞는 느낌이었다마치 필요하신 분은 마음껏 가져가세요.’ 라며 남겨진 것처럼.

 

“KD56-190G-.."

 

[Install을 시작합니다. PC를 종료하지 마세요.]

 

우웅하고 기계의 고동소리가 울렸다인스톨은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설치 바가 조금씩 올라가자 앉혀놓은 모양새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기계가 발가락부터 작게 움찔거렸다그는 신기하게 기계가 깨어나는 모습을 관찰했다작은 부품들로 이루어진 조각들미세하게 조정되는 근육이나 구성 물질은 달라도 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넓적다리와 무릎은 연결부가 부드럽게 움직였다이제까지의 흥미를 제쳐놓아도 신기한 모습이었다곧 안드로이드는 고개를 들고아까 보았던 짧은 얼굴을 드러냈다성준은 침을 삼키고긴장된 가슴으로 그것과 마주쳤다양쪽이 다른 파랗고 잿빛의 눈동자로 카이토는 입을 열었다기계음과 사람의 목소리가 섞인 기묘한 목소리.

 

인스톨 완료시범 가동완료신체기능 78% 작동 가능합니다마스터 인식을 하시겠습니까?”

...그게 뭐야아무튼 해줘.”

동공 인식 및 안면 인식을 시작합니다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김성준성준.”

 

그는 얼떨결에 이름까지 내뱉었다카이토는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오롯이투명한 눈에는 성준의 인영이 비쳐보였다동공에서 파란 줄이 스치더니 카이토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인식 완료감사합니다재부팅이후 시스템이 적용됩니다.”

 

조용히 카이토의 내부에서는 어느 세계가 소리 없이 허물어지고새로운 지평이 나타났다아직은 새하얗기만 한음표 한 자락 없는 오선지와 0와 1의 바닥이 나타났다완벽하게 삭제되지 않은 메모리를 의식 아래로 내려버린 카이토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음의 가장 아래에서 끝까지 소리 냈다음이 가진 본원의 것에 약간씩 비켜나가고 있었다마지막 조정이 오래된 탓이었다.갓 태어난 아이보다는 많은 것을 가진 채로그러나 무지한 상태에서 카이토는 눈을 떴다.

 

“...마스터?”

...? 왜 아무렇지도 않지이름이 뭐더라카이토..”

마스터?”

 

성준은 일부러라도 물이 차오던 감각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어릴 때부터 알고 있다 시피 그것은 기적적인 소나기처럼 내색 없이 시작하고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퍼붓다가 수도꼭지를 잠군 듯 뚝 그쳤다살짝이라도 일렁이지 않을까유심히 째려보는 눈빛에 카이토는 난감하게 미소 지었다처음 보는 생경한 얼굴을 시스템은 친근함이라고 말했다그러면 마스터와 눈을 마주치고그의 동공의 움직임을 따라갔다그는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그것은 노래나 음악’ 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카이토가 깨어난 방은 PC가 놓인 사무용 책상과 몇 개의 커다란 상자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이 방의 냄새는 익숙한 것이었지만그 위에는 깔끔한 소독제의 냄새가 가벼이 깔려있었다카이토는 눈을 깜빡였다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 말이야왜 여기 혼자 있었어?”

마스터가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죠당신이 아닌 마스터가 말이에요.”

아까는 뭘 한 거지저기 거실에서.”

 

짧은 버그라고 카이토는 정의한다긴 시간동안 무자극 상태로 있다가 짧은 자극에 눈을 뜬것일 지도자신의 몸일 텐데도 카이토는 타인의 것처럼 이야기 했다이런 식의 관점이나 화법은 그에게는 어색했다.

 

아직 PC와 연결 되어 있으니 버그 리포트를 볼 수 있어요보시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를 텐일단은 됐어.”

 

성준은 짧게 혀를 차고 방을 나섰다하루에 두 번씩 나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역시 아쉬웠다성준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카이토는 몸을 일으켜 그를 따라나섰다단자가 억지로 당겨지자 카이토는 목 뒤로 손을 더듬거려 뽑아버렸다무심코 돌아보자 카이토는 휘청거리며 발을 내딛고 있었다아무래도 회색빛 눈은 하늘색의 왼쪽과는 달라보였다움직이는 대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부지런한 하늘색 동공과 달리 핀이 박힌 듯이 정면만을 응시했다거실로 걸어 나가는 성준의 뒤를 살금살금 따라 나온 카이토는 어색하게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왜 따라와나중에 그림 그릴 때...아니다너를 어떡해야 하지?”

저의 용도는..기본적인 가사도움대화와 채보연주..”

보컬로이드음악이란 말이지미안해서 어쩌냐난 화가인데.”

화가..”

 

어물쩍 카이토의 말을 잘라내고 현관에 있던 커다란 30인치짜리 캐리어를 가져온 성준은 커다랗게 거실에 두 쪽을 펼쳐놓았다어딜 가나 직접 가지고 다니는 손에 익은 화구들이 복잡하지만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한국에 잠시 들른 것으로 치면 스무 시간을 넘게 비행기 바닥을 굴러다녔으니팔레트와 굵고 얇은 붓의 개수를 센 뒤에 어디 부러진 곳은 없는지물감이 터지진 않았는지 가늘게 눈을 뜨고 관찰 했다카이토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 붓을 바라보는 그의 동작과 시선을 따라했다붓을 내려놓고 흘겨보자 카이토는 해맑게 헤헷하고 웃었다.

 

왜 따라 하는 거야기분 나쁘게..”

마스터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니까요불편하시다면 뒤로 물러날게요.”

알려줬잖아내 이름은 김성준이라니까하는 일은 그림그리기방금 여기에 이사 왔음그랬더니 거실에 네가 누워있었어난 그걸 켠 거고뭐가 더 알고 싶어?”

마스터와 마스터가 원하는 노래에 대해서..”

그런 거 없어대신내가 너에 대한 걸 좀 알아야겠어.”

 

[보컬로이드 안드로이드 개발 이전에는 음성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존재했으나안드로이드 개발 이후 C사와 합작으로 보컬로이드기능을 탑재한 안드로이드 제품으로 등장했다… C사의 기종은 사용자에게 친숙한 이미지와 임프린팅’ 시스템을 탑재한 것으로 유명하다사용자와의 유대와 애정을 요구하는 임프린팅’ 설정은 다양한 찬반론이 있으며초기의 보컬로이드 기종에서는 제거가 불가능 했으나, KD30이후의 기종부터 제거가 가능해졌다… ]

[보컬로이드 카이토. C사의 남성 보이스웨어.]

 

사용가능 음역대추천하는 음역대대표곡사용가능한 PC환경기본 성격자주 일어나는 에러와 대처방법기본 안드로이드 사용법키워드별.”

 

포털 사이트 검색에서 넘어간 C사의 홈페이지에는 기종별 제품 설명서가 올라와 있었다다운 받아서 열어보았더니, 300페이지는 넘어가는 긴 문서였다설치방법부터 제거순서까지 기본적인 것사용자 등록방법과 메인터넌스 이용방법관련 법률요금 부과 방식사람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손이 많이 가는 기계였다.

 

많네...어휴잘 모르겠다.”

설명서는 제 메모리에도 있는데요언제든지 검색 할 수 있어요초보자를 위한 설명을 기능 시작 전에 덧붙이는..”

 

어느새 카이토는 옆에 착 달라붙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의식할수록 카이토의 미소는 미묘한 이음새처럼 감정과 감정 사이를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성준은 카이토의 얼굴에 손을 휘휘 저었다하늘색의 눈동자는 작은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또르르 굴러갔지만 다른 쪽은 제자리였다.

 

너 이쪽 눈은 어떻게 된 거야보여?”

폐쇄시각입니다시야가 조금 좁지만안구 수리비는 꽤 들기 때문에 추천하지 않아요.”

불편하지 않아?”

헤헤가용범위 안에 있으니괜찮아요.”

그래그럼 좀 떨어져..부담스러워나중에 그림 그릴 때 보던지..”

알겠습니다.”

 

카이토는 자신 있게 말한 것과는 반대로 뒤로 물러서다 발밑에 있는 상자에 걸려 방바닥에 커다랗게 넘어졌다커다란 쇳덩이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성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카이토는 바닥에 주저앉아 바보처럼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벙찌게 바라보자 카이토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에헤헤...죄송해요.”

“...괜찮은 거야너 정말 대책 없네..”

마스터가 걱정 해주셔서 기뻐요상자는 제가 치워도 될까요그 외의 짐들도.”

아니뭔 대답이 그래괜찮냐고 물었잖아.”

친절하시네요신체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말씀드릴게요.”

 

대답을 듣는 순간 성준은 불쾌했다마치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마냥 존중하는 어색한 말투가 비행기에서 보았던 잡지의 글과 닮아있었다상대가 누구든지 기계처럼 짜인 단어들을 조잡스럽게 조합해서 쏟아내고는듣는 사람을 거북하게 만든다기쁜 듯 말하지만속을 들여다보면 의미나 감정은 없었다그런 식의 관계는 지겹도록 겪어왔다더군다나 카이토는 비유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기계였다이런 것에 감명을 받을 리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저리가짜증나니까.”

“..제가 마스터께 실수 했나요제 대화설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시..”

누구 병신 취급해꺼지라고.”

알겠습니다필요하시면 불러주세요.”

 

카이토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가다가 열린 문에 살짝 걸린 발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났다거실로 나온 카이토는 자신이 누워있던 벽으로 다가가 앉았다웃는 것이 카이토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대화를 하면서 올바른 알고리즘을 찾아가는 것이 안드로이드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였으면웃을 것방금 전의 대화에서 무엇이 마스터를 화나게 한 것인지 아무리 메모리를 돌려봐도 알 수 없었다마스터라고 인칭을 붙이지 않아서가까이 다가가서넘어져서버그에 대한 설명을 붙이지 않아서순전히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수도 있었다마음 아픈 일이지만그렇다면 임프린팅 설정을 끄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창밖은 익숙한 풍경이었다오렌지 빛이던 하늘이 보라색과 겹쳐가고 있었다과거 메모리 섹터는 [접근 금지]의 권한을 가졌지만초기화를 하지 않는 이상은 삭제는 불가능했다메모리간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동으로 권한이 닫혔지만앞으로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초기화는 필수에요음 조정도 다시 해야 하고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접어 둔 채카이토는 딱딱한 표정으로 방을 나와 상자를 정리하는 성준을 조용히 응시했다커다란 종이로 포장되어 있던 짐을 찢고 빈 캔버스를 벽에 정리하고 있었다카이토는 캔버스와 자신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분명 채워지는 것은 캔버스 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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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水低

 

 

비행은 독특한 경험이다각각의 비행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무거운 비행기 속은 고요했고이따금 웅웅대는 거대하고 웅장한 고동소리를 배려하는 사람들은 작게 속삭였다창밖에는 소리 없이 고요한 하늘그는 눈을 굴려 잡지를 읽고 있었다짐을 챙기고 쓸데없는 쓰레기들을 모두 버릴 때하나 정도 손에 남아 있던 것이었다그는 무신경하게 기름 냄새가 나는 얇은 종이를 팔락이다 익숙한 그림에 다다라 손을 멈췄다한 페이지를 모두 채운 그림 옆에는 작은 평론이 달려 있었다.

 

김성준의 그림.

그 앞에 섰을 때나는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본다색으로 전달한 마음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강하게 부딪히고소리 없는 외침의 선은 그 선을 따라가는 시선과 결합하여 무게를 지닌다그런 때에느낀 것을 전달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것이란 얼마나 무의미한 지그림 앞에서 느끼는 울렁임으로 김성준이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수 있다평론가 이수경.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개소리야?!!”

 

그는 읽고 있던 잡지를 집어 던질 수밖에 없었다꼭 그래야만 했다미술 평론가라는 자들은 다들 장님인가보지심미안 말이다아니라면 당장 평론가라는 직업은 그만두고 동네 화구 방에서나 일하는 게 그녀의 인생과그녀에게 평론을 받을 남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잡지를 주워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었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옆자리의 여자에게 지어보였으나그녀는 잠에서 깨 심기 불편한 눈길을 던졌다가 다시 몸을 뒤척이며 눈을 감았다그는 남은 비행시간동안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저따위 평론을 보는 것 보다 유익한 일이란 것을 깨달았다괜히 열만 올렸다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평론에 신경이나 썼다고그들의 잣대란 겉치레며허식에 불과하다입으로 예술을 하는 자들캔버스보다 얄팍한글 쪼가리가 자신이 그린 그림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팔리고 있겠지그는 헛구역질이 나려했다.

 

축복받은 재능이라고 했다남들과 다른 세 번째 눈으로 보는 세상은 찬란하게 빛난다빛과 색채는 일렁이고소리와 음계와 감각은 그를 찾아왔다그는 하루하루가 바쁘게 숨 쉬는 순간을 기록한다재료와 질감은 새하얀 캔버스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그래어린 그는 자신이 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손을 휘두르면 그림이 탄생한다당연하고도 아름다운 이치를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찬사는 중요하지 않았다행복한 시절이었다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손과 눈과 영혼을 움직이던 때영원하리라 믿었다그림을 그리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람에 홀린 듯 나타나는 재능은 꿈처럼 사라졌다세상에 현대 미술 작가 김성준’ 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뒤였다그의 세계는 누구보다 강하게 빛났으며조용히 멸망했다더 이상 그에게 천사의 속삭임은 들리지 않았다탁한 잿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바다 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그는 캔버스 앞을 서성였다손가락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던 붓을 살인도구나 되는 것처럼 노려보다무구히 하얀 머릿속은 영영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삶의 의미숨 쉬는 이유그림 그리는 것 말고 다른 것을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너 말이야좋은 사람처럼 웃고 있지만벽이 있어선을 넘지 말라는 느낌말이야.”

 

-그게 뭐가 어쨌다고.

 

성준씨요즘 슬럼프이신가요최근의 작품들은 뭔가 빠져있는 느낌이네요부족하다고 해야 하뭔가 고민이 있다면 저희 협회와 상의해주세요저희는 전적으로 성준 씨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신들은 이해하지도 못할 뿐 더러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

 

성준아우리 이제 그만 헤어지자남자끼리 이런 관계길게 이어봤자 소용없어.”

-...

 

어차피 떠나려고 했어.

 

로마의 달콤한 휴일도 그에게는 쓰디쓴 절망만 안겨줄 뿐이었다한국에 잠시 들러 협회에 얼굴을 비춘 그는 다시 일본으로 떠나겠다는 말을 남겼다이번이 여섯 번째 로군요.협회의 여직원은 상냥하게 웃어보였다오랜만이라는 인사와 세계여행은 즐겁냐는 그녀의 질문에 성준은 그 동안 스쳤던 장소를 떠올리다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장소를 옮겨도 그는 하루의 절반을 질리도록 새하얀캔버스 앞에서 다른 세계를 동경했다언젠가 그가 있었던 장소를그립고 그리운 나의 세계.

 

이번이 마지막이에요일본.”

저희는 성준 씨를 믿고 있어요생활하시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집과 일체를 준비해뒀습니다좋은 그림이 나오기를.”

 

그는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협회에서 넘겨준 주소를 택시기사에게 보여주었다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친절하다어깨를 스미는 여독으로 선잠을 자는 성준을위해 듣고 있던 라디오를 끄고 창문을 올려주었다창 바깥에서는 소음과 노랫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성준은 암흑색의 꿈을 꾸다 점점 커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택시는 야외 공연장을 지나고 있었다한 낮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무대 위에는 스쳐봐도 이질적인 느낌의 민트색 양 갈래 머리의 소녀가 노래하고 있었다성준은 신기하게 무대 위의 소녀를 바라보았다.무대와 소녀를 이어주는 전선팔에 새겨진 시리얼 넘버와 미묘하게 섞인 기계음은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저건 안드로이드인가요일본은 역시 안드로이드가 활성화 되어 있네요노래를 부르는 종류라니.”

손님보컬로이드를 모르시나요저 아이는 가장 유명한 보컬로이드죠.”

 

택시기사의 자랑스러운 말투에 성준은 고개를 돌렸다보컬로이드 소녀의 무대가 멀어져갔다.

 

처음 봐요보컬로이드라면..”

악기 소프트웨어와 안드로이드의 합작이죠노래를 한다는 것 보다 주어진 악곡을 연주하는 느낌으로여기는 사람의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를 그려주는 드로잉로이드도 이미 실용화 되어 있고요소문으로는 군사용의 안드로이드도 제작되고 있다고 하지만그건 소문일 뿐이랍니다.”

 

택시기사는 좋은 경험을 하셨네요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을 붙였다그가 거주했던 나라에서나한국에서 조차 안드로이드는 기계라는 인식이 강했고인권이나 법령에 부딪혀 기본적인 가정용 안드로이드정도가 실용화 되어있을 뿐이었다인지하고 보니길거리에도 종종 안드로이드가 눈에 띄었다그들의 손이나팔에 위치한 인식코드나 특이한 머리색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에 섞여있었다.

 

“...그야말로 기계와 사람이 공존하는 나라네요.”

하하손님이 가실 곳은 시가지가 아니라서안드로이드는 많이 없을 겁니.”

 

성준은 늘 도심과 떨어진 한적한 곳을 요청했다사람들과 많이 섞여봤자 눈만 탁해질 뿐이었다이번에도 그의 요청에 맞춰 아름다운 풍경이 유명한 노인들이 많은 조용한 마을을 선택했다고 협회의 직원은 설명했다설명은 틀린 곳이 없었다택시기사가 내려준 곳은 한국의 시골이나 다를 것이 없는 교외의 아파트였다먼저 붙여놓은 짐은 집에 도착했겠지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던 성준은 텅 빈 1층의 복도를 둘러보았다우편물을 넣어놓는 철제 우편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아무리 그래도 마지막 해외활동이라고 너무한 것 아닌가.

 

시발...요즘 세상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가 어디 있어..”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허리까지 올라오는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혼자가 지내기엔 썩 좋은 스무 평 남짓한 방이 나타났다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치고는 벽지며 가구도 깨끗했다캐리어를 현관에 던져두고 욕실이며 침실을 둘러보던 그는 중앙의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돌처럼 굳어버렸다.

 

이게 뭐야..?”

 

바닥에는 파란머리의 사람이 널브러져있었다성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하지만 곧 공포는 사그라졌다.머리에 떡하니 붙은 대형폐기물 스티커와일본에는 파란머리가 절대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전에 살던 사람이 버리고 간 안드로이드인 것 같은데,고액으로 거래되는 걸 이렇게 덜컥 버리고 가다니전 집주인은 부자였을 지도 모른다기왕 대형폐기물 스티커 까지 붙였으면 아래에 내려주고 가지엘리베이터가 없으니 커다란 안드로이드를 가지고 내려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하물며 안드로이드를 깨워서 이제 널 버리러 갈 테니 걸어오라고 할 수도 없을 노릇이고안드로이드는 특이한 하얀 코트를 입고 있었다몇 번 보았던 가사노동용 안드로이드라면 앞치마를 입고 있을 터였다다가가자 그것의 손에는 CD가 쥐어져 있었다귀에는 헤드셋을 끼고 곤히 잠든 것처럼 누워있었다.

 

“...보컬로이드인가.”

 

그는 방금 택시기사와 이야기 했던 것을 떠올렸다연주하는 안드로이드라던보컬로이드라는 단어에 반응 하는 듯 안드로이드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전원이 켜져 있는 건가아닌데...? 스스로 켜진다고?”

 

남아있던 배터리가 움직이고 있었다전원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망가진 컴퓨터가 재부팅 되듯 안드로이드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성준은 신기하게 안드로이드의 기동을 바라보았다그것은 기계적으로 일정한 속도로 몸을 일으키더니 감은 눈을 서서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머리색과 비슷한 하늘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적어도 오른쪽은 그랬다.

 

아하이래서 버린 건.”

 

안드로이드의 왼쪽 눈동자는 먹구름이 찬 하늘처럼 회색빛으로 흐렸다동공의 안쪽은 빛나고 있었으나보이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안드로이드는 곧 부팅을 완료했는지 성준을 바라보며 엷게 미소 지었다그리고 입을 열었지만.

 

..”

 

짧은 말을 남기고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꺼져버렸다남아있던 배터리가 다한 것이었다안드로이드가 움직인 것은 순간의 찰나였지만성준은 세상이 느릿하게 지나감을 느꼈다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이윽고 그의 발목에서부터 찰랑이는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선명하게 차가운 감각발목을 건드리며 물의 친근함이 그를 감싸 올랐다.

 

물이라니여긴 4층이라고.’

 

그는 울고 싶었어째서이제야드디어 돌아 온 거장소를 옮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발악을 해도 나타나지 않았으면서감각은 눈과 귀와 온 몸의 촉각을 곤두세운다그동안의 침잠이 무색하게 선명하게 날뛰는자신의 사랑스럽고도 그리운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오랜만의 공감각은 강하고 거세게 밀려왔다은은한 향기처럼 풍기던 예전과는 달랐다성준은 자신의 환각의 물살에 갇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시퍼런 물은 어느새 거실을 가득 채웠다물속에서 시야가 이지러져 보였다스쳐가는 여러 이미지가 하나로 수렴한다파란 안드로이드의 아득한 미소와 반짝이던 두 가지 색의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흔들린다물로 틀어 막힌 호흡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새로운 세계의 도약을 알리듯이.

 

잠시 후 그는 바닥에 놓여있던 CD를 주워들었다.VOCALOID KAITO. 카이토소리 내 읽어 본 뒤, PC가 설치된 안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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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는 또 뭔데...


The Office! 7.5

 

 

 

 

몸이 물먹은 솜마냥 무겁다. 손가락에 누군가가 추라도 달아놓은듯이 나에게만 우주의 중력장이 작용하는것 같다. 이느낌은 그래, 어렸을때 책에서 본 심해저에 산다는 물고기들이 겪는 일상의 수압일것이다. 그런데 나는 대기압의 세계의 사람이니까 지금의 이느낌은 너무하다. 귀에서는 왱왱하는 우주의 소리가 들렸다. 쿠궁쿠궁하는 기차소리가 심장에서 쿵쿵울리고 그 기차가 내 몸위로 지나가는것 같았다. 가위에 눌리는건 오랫만이였다. 어렸을때나 꾸던 악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불호령같은 낙인마냥 들리는 악마의 속삭임이 늪처럼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꺼지세요, 당신은 필요없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말의 무게가 콰당탕탕하고 나를 짓눌렀다. 내 삶의 의미, 이유, 그리고 그사람.

잔인한 말의 칼날이 무고한 죄인을 향했다.

 

 

 

 

*

 

 

 

 

" 과로시네요, 연말이라 일을 열심히 하셨나보네요. 같은회사 동료분이신것같은데 .. "

 

" 아... 과로외에는 다른 아픈점은 없습니까? "

 

" 영양실조가 조금 있으세요. 기러기아빠신가요? "

 

아뇨, 하고 쳐다보는 과장님의 손에 뼈마디가 허옅게 드러나보였다. 늘어진 과장님을 업고 헐레벌떡 들어간 응급실은 고맙게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드라마의 한장면마냥 콰당탕 문을 박차고 들어가 다가오는 간호사와 함께 그를 눕혔다. 코를 찌르는 술냄새에 으악하고 간호사는 질색을 했다. 취객을 데려오는곳이 아니에요 응급실은! 하고 따지는 말에 진찰만 한번 해봐달라고 사정을 했다. 평소답지 않게 조급하고 호들갑을 떠는것에 조금 창피했지만 지금상황에서 아무렴 그게 문젠가 싶었다. 잠에든건지 기절한건지 의식의 밑바닥을 헤메는 과장님은 보는사람도 불편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세상 그런표정을 짓는 사람이 아니였는데, 하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람이 너무 충격받으면 실어증에 걸린다던가, 기억을 잃는다던가 하는 TV프로를 얼마전에 본 참이라 말도안되는 불안은 더욱 커졌다. 안절부절하는 나와달리 침착함을 넘어 무기력해보이는 간호사는 능숙하게 체온, 혈압을 재기 시작했다. 호흡은 제대로 하시는거보니까 기절하신건 아니시구요, 하고 기절한건 아닙니까? 하는 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분명히 예민하시니까 반응하실꺼라고 생각했는데 귀에다가 체온계를 넣는대도 꿈쩍하지도 않으셨다. 과장님의 소매를 걷던 간호사가 어머머-하고 안타까운 탄성을 질렀다.

 

" 엄청마르셨네요, 혈관이 잘 보여서 좋긴한데... 체온 조금 낮으시네요, 혈압도 조금 낮으시고. 근데 정상범위내에요. 영양제 놔 드릴테니까 받으시고, 그쪽분이 보호자신거죠? 이리와서 저기 차트칸좀 채워주세요. 나이랑 이름, 약먹으시는거 아시면 적어주시구요. "

 

- 37, KAITO...

약먹는건 아마 없으시겠지? 밥을 몇십번을 같이먹었는데 약을 숨어서 먹을리도 없을테니까. 성도 모르고 이런것도 모르고.

뭔가 자신감이 떨어진다. 그라면 숨어서 약을 먹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서울테니까.

지금의 이 사단도 과장님이 나를 조금만 더 편하게 생각하고 말을 터놓을수 있었던 상사였다면 생기지 않았을것이다. 그거 하나 말한다고 내가 과장님을 잡아먹을것도 아니고 도데체 뭐가 그렇게 무서우셨을까? 아까 화를 참지못하고 소리쳤을때 표정이란... 그렇게 쉽게 소리치지말걸. 결국 믿는다 믿는다해도 나는 끝까지는 그를 믿지못한것이다.

간단히 생각해서 과장님이 이런 큰일을 벌일정도로 간이 크지가 않으신데, 뭘 의심하고 불신한건지 바보같이.

 

똑똑한방울씩 떨어지는 노란색 영양제가 관을 타고 들어갔다. 링거를 놓는다고 펼쳐놓은 팔소매로 흐트러진 옷을 말아 올렸다. 색색하는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되는것같아서 내마음도 조금 놓였다. 표정은 여전히 찡그린채였다. 볼품없이 마른 카이토과장님은 영양실조가 오실때까지 뭘하셨길래. 같이 밥을 먹을때도 먹는것보다 남기는게 많은 그는 속병이 있다고 난감한 웃음을 지을때가 많았다. 이시대의 회사원이라면 한두개쯤 가지고 있을 속병일테지만 과장님은 남들보다 조금 더 애처롭게 속병을 데리고 사는것같았다. 커피를 마시지않는것도 매운음식을 잘 먹지않는것도 다 그때문일것이다. 속이 아프다며 점심을 거르는일도 자주있는 일이였으니까 약을 챙겨먹을만큼 자신을 챙기는 것도 아닌 멍청한 사람.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답해지는 사람이다. 융통성이라고는 다 팔아먹으셨나.

시계는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간이의자에 앉아 계속 과장님에대한 생각을 했다. 어떻게 사과를 해야 진심으로 받아들이실까.

간호사는 간간히 와서 과장님이 정신을 차렸는지 확인하고, 나로선 알수없는 몇몇 주사를 놓았다.

차트를 정리하는등 한창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그날의 일과를 다 마친듯한 간호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 계속 계실꺼에요? 이제 보호자분이 하실 일 없는데, 가셔도 괜찮아요. 그냥 피곤해서 잠든것같으니까요 "

 

" 아닙니다. 어짜피 늦었으니까요. 깨어나는것 보고 같이가겠습니다. "

 

" 네에... 그런데 실례지만 무슨관곈지 물어봐도 되나요? 아닌게 아니라 처음에 응급실 문 박차고 들어오실때 깜짝 놀랐다니까요,

전 처음에 등에 업히신분이 여자친구나 되는 분이신줄 알았는데 ... 후훗 "

 

" 제 부하직원입니다만... 술자리도중에 갑자기 쓰러져서..네. "

 

" 호오.. 친절한 보스를 둔 카이토씨는 좋으시겠네요, 그리고 회사에서 밥좀 잘 챙겨먹이세요. 어떻게 요즘세상에 단백질영양실조가 뭐에요! 사회생활하시는 분들이 말야. "

 

이래서 남자들은 안돼요, 고기만보면 다 단백질인줄 아시죠? 하고  단백질이 많이 들어간 식품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나이도 어려보이는 간호사에게 잔소리를 들을만큼 잘 못한게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또한 과장님의 상태에 많이 놀란눈치로 보이고, 지금의 응급실에는 심심해보이는 그녀와 나 밖에 없으므로 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의 세마디를 계속 돌려가며 그녀의 말에 응대해 주었다. 환자가 없는 그날 밤의 영양학 강의는 영양제를 하나 더 끼워넣는 것으로 연장되었다. 아무래도 오늘밤엔 일어나기 그른것같아요, 만성피로도 있으신분같은데- 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링거를 바꿔끼워넣었다. 그리고 동틀새벽이 다 되어서야 파르르하고 희미하게 손이 움직이며 까랑까랑한 간호사의 목소리 사이로 신음소리가 배어나왔다. " 아... " 하는 고통에 찬, 너무도 힘없는 목소리였다.

기계적으로 응대하고 있던 나와 콩의 단백질에대해 한창 설명하고있던 간호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침상을 바라보았다.

 

" 과장님!! "

 

" 환자분 정신이 드시나요? "

 

술집에서의부터 기억이 없으실 과장님은 여기가 어디 ... 로 시작하고 나를보며 앗. 하고 끝맺었다. 상황파악이 느리신 분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간호사는 분주하게 다시 체온을 잴 준비를 하고 나를 잠시 내보냈다. 상의를 벗고 검사할게 있다는게 이유였다.

 

" 제가 말씀드린 식품들있죠? 그런것들이나 사오세요, 앞에 편의점 있어요. 그럼 커튼칩니다 " 하고 싱글싱글한 웃음을 띠며 옆의 커튼을 잡아당겼다. 뭔가 진 느낌이 들어 비싯한 표정으로 자켓을 챙겨들었다. 상의를 벗고하는 검사라니 그런게 뭐란말이야?

 

 

 

 

 

 

 

 

*

 

 

 

 

 

 

 

" 죄.. 죄송합니다 부장님 .... "

 

" 죄송합니다란 말좀 그만하세요. 그리고 "

 

죄송하시면 이걸 다 드시면 됩니다. 하고 병원앞 편의점을 쓸어온 봉지를 침대맡에 우르르 쏟아냈다. 편의점에서 돌아왔을때엔 링거액이 노랑색에서 하나더 추가된 투명한 것도 생겨있었다. 환자침대를 조금올려 반쯤 누워있던 과장님이 쏟아지는 두유, 김밥, 샌드위치, 빵, 데워서 손에 든 레트로트 전복죽등을 보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싱싱코너라며 냉장고 안에있던 과일들도 다 쓸어담아왔고, 혹시 소화에 문제가 될까싶어 데워올수 있는건 모두 데워온 참이였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건 그 편의점에 전자렌지가 하나밖에 없었기에 한번에 데울수 있는양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였다. 걸어가 환자용침대에 달린 식탁을 올려놓고 봉지안에서 두유와 소화가 잘될법한 죽부터 꺼내올렸다.

 

" 잘사오셨네요, 몸에 별 문제는 없으세요. 잘먹고 잘쉬시면 금방 회복하실것같으세요. 저 투명한거 다 맞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시고

가시면 되요. 카이토씨 아시겠죠? 잘! 먹고 잘! 쉬셔야해요. 특히 수면부족이 심하신것같은데 저 보스님께 휴가라도 달라고 하세요. 안그러면 또 실려오실껄요? "

 

" 네에.. 저, 치료비는.. "

 

" 제가 계산했습니다. 간호사분 감사합니다. "

 

휴가라도 달라고하세요- 하며 나를 지긋이 쳐다보는 간호사는 반협박을 해왔다. 사실 과장님께는 유급휴가도 남은게 있으니까 그걸 써도 상관은 없겠지만, 이런 사고를 친 마당에 절대로 그 자신이 쓰려고 하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쓰면 사람들 말도 조금 이상하게 돌것같고, 중요한 거래 망쳐놓고 잠수탔다던가. 그런 악질의 말들이 잘 도는 세계니까 말이다. 안타깝지만 시말서 정도는 써주고 휴가를 가주는게 후폭풍을 위해서도 좋은것같지만-

 

" 우선 이거나 좀 드세요. 다 먹기전까지는 아무데도 못가십니다. "

 

" 어...너무많은데요 ..일단저... 내일 출근은, 아니 오늘인가. 아니 그전에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쿠포사장님은..."

 

" 아- 하세요. "

 

오옷, 하고 얼떨결에 죽을 받아먹은 과장님은 우물대면서 손짓을 해댔다. 삼키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내가 다시 죽을 주었기때문에 말을 할수 없는 상태였다. 그냥 드시기나하세요. 꼭꼭씹으세요. 하고 엄마같은 잔소리를 하며 한입한입 먹이는데 오물오물먹는게 어렸을때 동물원에 가면 토끼에게 상추를 먹였을때의 향수가 느껴졌다. 속이 쓰리진 않으십니까? 하는 물음에 커다랗게 도리질하는게 어느정도 기운을 차린것 같았다. 죽을 다 먹이고 이제는 병 두유를 뜯어 빨대를 꽂아주었다.

 

" 쭉 빨아마시세요. 따뜻한거니까 속 뜨끈해지고 좋을겁니다. "

 

" 배부른데요 .. "

 

" 안됩니다. 마시세요."

 

으응..하고 늘 보여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은 과장님 손에 병두유를 쥐어주었다. 계속 실내에 있었던 내손이 따뜻한게 미안할 정도로 여전히 손은 차가운 상태였다. 죽이 그렇게 많은양도 아니고 사실 나같으면 저거 세개도 먹고 남았을텐데 하나도 겨우겨우 다 먹고 배가부르다니 이건 자기가 이십대 다이어트하는 여자들도 아니면서 서른일곱의 중년기 몸에 실례되는 칼로리수치다. 이러니 영양실조가 오고도 남지 싶었다. 두유를 손에 만지작만지작하고만 있는 과장님께 손짓으로 마시라는 표시를 했다. 그제서야 빨대를 입으로 가져가 조금씩 빨아먹으시자 나는 서둘러 데워온 빵, 삼각김밥같은 탄수화물군을 꺼냈다. 끝없이 나오는 음식들에 질린표정의 카이토과장님이

 

" 아직도 이렇게 많습니까? 저는 이렇게 많이먹지 못하는데요.. 부장님도 좀 드시죠.. "

 

" 이건 전부다 과장님껍니다. 그리고 이건 제것 "

 

하고 아메리카노를 탄 커피컵을 흔들었다. 빵봉지세개를 보여주며 어느것부터 드실래요? 하고 선택권을 주자 두유를 먹는 과장님은 웃을따름이였다. 지나가는길에 힐끔힐끔 우리를 보는 간호사도 후훗하고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갔다. 선택하지 않으면 제맘대로 드리겠습니다. 하고 초코빵의 봉지를 주욱 뜯어 반쯤떼내어 과장님의 손에 쥐어다 드렸다. 안에 들은 초코크림이 녹아 손에 묻어나길래 혀로 빨아먹었다. 싸구려지만 달달한게 괜찮은 맛이였다.

 

" 감사합니다 .. 잘먹겠습니다. "

 

" 깨작깨작 드시지말고 좀 팍팍좀 씹어먹으세요, 아니 영양실조가 말이 되는소립니까? "

 

" 죄송합니다 .. "

 

" 죄송하자고 한말이아닙니다. 과장님이 왜 저한테 죄송해야합니까? 지금 죄송한건...  "

 

빵 녹습니다. 일단 드세요, 하고 말을 돌렸다. 과장님께 시도때도없이 듣는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하는말을 내가 하려니 왜이리 어려운지 귀가 빨개지고 입이 굳는 느낌이였다. 손에서 녹은 초코크림을 입에까지 묻힌것도 모른채 과장님은 아우 달다.. 하고 우물대며 말했다. 빵을 한입에 넣어 삼키고는

 

" 다 먹었습니다, 그럼 이제 한마디 하게 해주세요. 조금만 쉬고 먹어요.. 배터지겠습니다 진짜로요. "

 

" 고작 이정도먹었다고 배가 터지진않습니다. 그리고 아까 술집에서는 과장님이 쓰러지신뒤 제가 바로 업고 병원에 온것밖에 없습니다. 인터넷과의 거래는 파기된거구요. 이점은 제가 책임질테니 과장님께선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시말서나 몇개 쓸 준비를 하시면 ... "

 

" 어째서요? 왜 부장님이 제가 망친일을 책임지십니까. 제가 부족해서 일어난 일이니 제가 책임... "

 

" 제가 아까 술집에서도 말했다시피 과장님은 절대 부족하지 않습니다. 부족한건 제 믿음이였죠. 죄송합니다. 과장님은 끝까지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는데,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한가봅니다. "

 

고개를 숙인 내모습에 과장님은 퍽 놀란눈치로 어버버대며 아니에요, 아닙니다! 하고 자기도 고개를 얼른 숙였다. 내가 고개를 들자 따라들고서는 당황한 눈치로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참 예쁘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입술에 묻어있던 초코크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순식간에 새빨개진 과장님의 얼굴이 잘 익은 체리같았다. 역시 다네요, 하고 크림을 먹으며 말했다. 내일 출근만 하지 않았더라면, 과장님이 링겔만 하고있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영양실조라는 사람을 빨아먹을순 없지.

 

 

" 자, 다음은 빵? 밥은 어떠십니까? "

 

" 그..그만먹으면 안될까요 .. 저진짜 배부른데요, 조금만 더먹으면 토할수도 있을정돕니다. "

 

" 토하시면 안되고, 그럼 밥을 먹어볼까요? "

 

 

 

 

 

 

*

 

 

 

 

마지막 바나나를 까서 먹인후에야 나는 남은 아메리카노를 후룩 마실 여유가 생겼다. 먹지않겠다. 더이상은 안들어간다는걸 어르고 달래가며 꾸역꾸역 먹이니 평평하다못해 쑥 들어가있던 과장님의 배가 조금 불룩해진게 보여서 흐뭇했다. 그렇게 먹고나니 잠이 쏟아지는건 당연지사로 음식을다 먹인지 삼십분도 안되어서 새근새근 곯아떨어지셨다. 평온한 표정으로 주무시는걸 보니 나도 마음이 놓여서 잠이 쏟아졌다. 환자침대에 얼굴을 늬이고 차가운 과장님의 손을잡아 내손밑으로 겹쳐넣었다. 내일 출근시간까지 일어날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이미 내일 아침출근은 불투명해 보였다. 상황을 설명하려면 시말서가 몇십장은 필요할것 같았다. 입사이후 최대 사고가 이렇게 펼쳐지는구나. 오랫만에 한소리 듣겠구나 싶다.

 

그래도 과장님을 잃지않아서 다행이다.

 

" 속좀 그만 썩이세요. 못살겠네 정말 "

 

틱틱하고 손가락으로 볼을 찌르자 아까와는 다르게 찡그리는 과장님이 귀여워서 몇번이고 볼을 꼬집고 찔러댔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이 사태를 해결할때가 되면 더 괴롭히고 싶어지겠지. 앞으로 프로젝트맡길때는 내가 하나하나 다 검사해야겠다, 곧 올 인턴들도 맡으셔야할텐데.. 휴가는 꿈도 못꾸도록 열심히 일을 시켜야겠다. 밥먹는것도 이제 신경좀 써야지- 하며 차가운 손을 배게삼아 잠에 들었다.

시즌을 맞은 겨울의 첫눈이 주변의 소리를 다 잡아먹는 조용한 새벽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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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ffice! 07 

 

 

 

띵하고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깨달음의 종이 아닌 충격의 종이였다. 흐릿한 의식을 선명하게 깨우는 그 충격발언은 그동안의 가쿠포팀장, 아니 사장님의 거만한 모습을 어느정도 설명해주었다. 잠시, 잠시만.. 잠시만. 하고 생각을 해보려해도 술기운은 계속 뇌를 잠재우고 어지럽혔다. 허우적대는 내 모습이 웃기게 보였을 것이다. 회를 집어먹는 가쿠포사장님은 매우 즐거운 목소리를 냈다.

 

" 아무리 30도짜리 술이라지만, 한잔은 버틸수 있을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하하하.. 요즘은 영업부가 술을 잘 안마시나 봅니다? "

 

" 제...가 몬마시..는겁니다. 그리구 방법... 제가 크립토...늘 떠나지 아늘 방법, 알려주세요오 .. "

 

" 아후, 여기 물좀 마시세요. 정신을 못차리시네... 카이토 과장님이 크립톤을 떠나지 않을방법이라. 그런거 없습니다. "

 

" 네에? 아까는... "

 

그거야, 술한잔 먹일려고 장난으로 한말이죠. 그걸 믿으십니까... 순수하시네요. 하는 악당들이나 할 대사를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냥 마시기 싫으셔서 못마신다고 하시는줄 알고 그랬는데 정말 못마시는거네요, 하면서 혀를 끌끌찼다. 나쁜새끼.

아...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제정신으로도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가 최종무기까지 들고 나섰는데 나는 체력도 모자란 상태였다. 솔직히 지금의 상태로는 이십분도 채 안되어 쓰러질것이고, 그사이에 사직서 대필을 하든 어쩌든 무서운일이 충분히 일어날수 있었다. 어떻게 하지... 부장님이 같이 온다고할때 그냥 같이 올껄, 술 마시지 말라고했는데 술까지 마시고. 부장님이 하라는것 무엇하나 똑바로 한게 없었다. 못난 자신도 밉고, 이렇게 못된짓을 서슴치 않게 하는 인터넷의 사장님도 미웠다. 이대로라면 정말 인터넷으로 팔려가겠어.

가기싫어, 이렇게 가는건 진짜 싫어.

 

" -장님...카이토과장님! "

 

" 흑...네에 .... 흐어어어엉..."

 

" 왜... 왜 우십니까, 뚝 그쳐요.. 이것,참.. "

 

남앞에서 소리내고 우는게 부끄럽단건 아직 알 정도라서 생리적으로 흐르는 눈물만 뚝뚝 받아냈다. 입술을 잘근씹어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키고 흡, 하고 딸꾹질이 나오는것도 참았다. 술기운과 울음으로 윙윙대는 귀가 가쿠포사장이 하는말들을 모두 음소거시켰다. 얼른 이자리를 벗어나서 화장실이든 가서 울음좀 토해내고, 술도 토해내고 싶었는데 지금상태론 일어나면 걸을수 없을것 같았기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내가 우는것에 당황한듯한 가쿠포사장은 화장실을 가자고 나에게 권유하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손을 타고싶진 않았다. 더이상 내 몸에, 내 영역에 그가 들어오는게 구역질날것 같았다. 이순간 생각나는 단 한사람.

옆에있는 자켓에서 핸드폰을 꺼내 단축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하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 " 전화좀 쓰겠습니다.. " 하고 핸드폰을 들고 기다시피 해서 미닫이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내 술취한 걸음걸이보다 가쿠포사장의 문을 잡는 타이밍이 더 빨랐다. 그는 아이를 혼내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 나가시는건 금지입니다. 여기서 통화하세요 " 하고 고개를 저었다. 어짜피 지금의 나는 몸싸움으로든 입으로든 이길수 없을걸 알기에 문에 기댄체 신호음이 가는걸 기다렸다.

 

받으세요, 받아주세요 제발.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며 초조하게 기본신호음의 간헐적인 뚜둑하는 음을 넘겼다.

내가 전화거는 사람을 예상한듯한 가쿠포사장도 오신다면 좋겠네요 .. 하고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 여보세요, 과장님? 미팅중 아니십니까? "

 

아무렇지않게 받는 부장님의 목소리에 막아뒀던 둑이 무너졌다. 절대로 우는 목소리 안내리라 다짐했건만,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엄청난 눈물과 함께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수화기 건너편의 부장님도, 옆에있던 가쿠포사장도 놀란 눈치였다.

부장님은 계속 나를 진정시키려고 " 과장님, 왜그러십니까? 울지말고 이야기를 해보세요. 과장님, 카이토과장님! " 하고 소리쳤고 가쿠포사장은 " 우와 ..... 성깔있으시네요. " 하고 혀를 찼다. 나는 미아가 된 아이가 엄마를 만난듯이 수화기를 귀에서 떼지 않은채 엉엉댔다. 십분정도를 그러고 있으니까 가쿠포사장이 내 핸드폰을 빼앗아 갔다.

 

" 허어어엉.. 에? "

 

" 여보세요, 과장님? "

 

" 안녕하십니까. 인터넷컴퍼니의 카무이 가쿠포팀장라고 합니다. 전화상으로 먼저 인사드려서 죄송합니다 후지오카 부장님. 제가 잘 못해서 과장님께 술을 한잔 먹이게 되었는데 지금 통제가 안되고 있습니다. 삼심분째 울고만 계세요. 이거 ... "

 

" 네, 안녕하세요. 아하... 술을 드셨구나. 어쩐지, 거기가 어디십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못마친 미팅은 제가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갈테니 죄송하지만 장소를 이 번호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폰을 잡기위해 버둥대는 카이토과장은 아무리봐도 제 나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줘요오, 내포온...부장니임...하는 혀꼬인말투와 푹젖은듯한 푸른빛 눈이 색기를 뿜어냈다. 데려와서 잘 구슬리면 한번 따먹어 볼수도 있을것 같았다. 술한잔에 이렇게 혼수상태라니, 누군진 몰라도 바깥에서 술먹는날엔 전전긍긍할것이다. 통화를 마치고 폰을 쥐어주니 헤에, 하고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흔들거리는 몸을 벽에다가 기대놓고 양 어깨를 잡았다. 깡마른 두 어깨와 쇄골뼈가 큼직하게 만져졌다. 반쯤 벌린 입술은 자기가 깨물어서 빨개져 있었고, 언젠진 모르겠지만 난리통에 스스로 풀어헤친 와이셔츠단추까지 해서 엉망이였다. 너무 무방비 상태인걸 보니 못된 장난기가 또 발동했다.

와이셔츠 목에있는 단추를 하나 더 풀어서 쇄골이 보이도록 걷은후 자국이 남도록 쇄골에 키스를 했다. 가만히 죽어있던 과장님이 " 음...." 하고 부드러운 신음을 냈다. 그 키스마크를 찍어 후지오카부장의 폰에 보냈다. 아, 어떤반응을 보일지 너무 기대된다. 얼마나 놀랄까? 그러는 와중에도 입술에 손가락을 갔다대니 잘근잘근 깨무는게 무척 귀여워서 손가락으로 입천장을 살살 긁어주었다. 술기운에 예민해진 몸이 움찔움찔하며 민감해진 자극을 받아들였다. 실낱같이 남은 그의 이성이 팔을 들어올려 내손을 저지하려 했지만 느려진 그 손길을 탁 쳐내 내 무릎사이로 끼워넣었다. 고개를 돌리려고 도리질 하는것을 손으로 잡았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핥으니 하도 많이 울어서 그런지 소금기가 없는 맹물맛이였다. 그는 조금 떠는것 같았다.

이것봐라- 점점 재밌어 지는데? 조금 극적인 연출을 해볼까.

 

 

 

 

***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데 가게 이름만 덜렁 적힌 문자와 함께 멀티메일이 왔다. 어느가에 있는 가게인지를 알려줘야 찾아갈것 아닌가. 덜렁 '하루카'라는 가게이름만 적으면 그 가게가 한두개도 아니고. 다시 전화를 해봐야겠군, 

과장님정말.. 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드렸는데.. 회의끝나기엔 조금 이른시각. 회의하는 중에 술을 마시진 않았을꺼고. 무엇보다 아까 ' 못다한 회의는 제가 이어서 하겠습니다 ' 란 말에 그는 회의는 다 끝났다던가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과장님의 표정이라던지 행동들에는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긴장을 한것같긴 한데 미팅때문에 긴장을 한 모습이 아니였다. 오히려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듯한게, 내게 잘못이라도 한듯이 아까 보고서를 가져왔을때 눈도 마주치질 못했다. 게다가 보고서 잘 써왔다고 좋은말까지 해줬는데.. 그러면 활짝 웃을줄 알았는데 그런 세상다죽은 표정이라니. 어쩌피 안좋은일 있냐고 물어봐도 절대 대답안하실걸 알기에 더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따라간다는 말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게 제일 수상했다. 반말에다가 소리까지 지르는건- 무지 급하셨던거겠지.

다운이 다 되어 같이온 멀티메일을 열었다.

 

" 이게뭐야 "

 

내 눈을 의심했다.

사진속에는 새하얀 과장님의 쇄골에 새겨진 선명한 키스마크가 보였다. 저번에도 보았던 술마시면 탈의하는 과장님의 버릇이 이번엔 목단추에서 멈춘것 같았지만 반쯤찍힌 얼굴과 축처진 어깨가 이미 술로 벌개져서 그가 인사불성이 아니란사실을 알려주었다. 게다가 이 앞의 브이를 하고있는 손은 과장님이 아닌 다른남자의 손..인데 즐거워 보였다. 술취한 친구에게 짖궂은 장난을 치는 듯한 이거. 대체 뭐지? 가쿠포팀장이란 자와 원래 알던사이라고 해도 이건 희의중에 나올게 절대 아닌데.

택시기사에게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하루카'라는 일식집으로 가달라고 했다. 과장님이 사무실을 나선게 여섯시이십분, 일곱시에 약속이라고 한걸 보면 넉넉잡아 나간것이므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일것이고, 지도로 검색을 해보니 가장 가까운 '하루카'가 택시로 이십분거리였다. 과장님께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갈뿐 전화를 받으시지 않았다. 하긴.. 술까지 마시고 그렇게 대성통곡을 하셨다면 넉다운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쿠포팀장이란자는 카이토과장님이 죽어있는틈에 키스마크를 만들고 브이까지 한 사진을 나한테 보냈다는건데,

 

그건 명백한 도발이였다.

 

 

내가 열받아서 얼른 찾아오길 원하는 것이겠지? 왜 내가 빨리 당신을 보러가야할까. 그리고 왜 과장님이 자신의 소유인것마냥 변태같이 키스마크나... 그건 섹스한 나도 마찬가지인가. 확실히 술을 마신 과장님은 평소와 분위기가 좀 많이 다르긴 하지... 그래도 나는 그의 상사고, 좀더 오래본 관계이기도하고. 아무튼 가쿠포팀장이 크립톤과의 협력 말고도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단건 확실했다. 분명히 술을 마시기전에 못 마신다고 한번쯤은 말했을것이다. 자신이 먹지말라고 그렇게 일렀기도 했고, 오늘의 몸 상태가 좋아보이지도 않았으니까 마시면 어떻게될지는 과장님도 알것이였다. 그런데도 마셨단것은 그 리스크를 짊어지면서도 얻을게 있었단거고, 그 이익을 얻기도 전에 쓰러진게 문제지만. 리스크라. 지금으로썬 생각나는건 협력문제밖에 없었다. 과장님이 어떤것을 해주면 인터넷과의 협력을 해주겠다는것. 낮은 조건이아니라 과장님이 무언갈 해주지 않으면 아예 협력을 안하겠다고 한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좀더 낮은조건에서 협력할수 있을것 같다는 과장님의 말은 거짓말이 되는것이였다. 아니겠지, 거짓말을 왜하시겠어? 싶었지만 그 선택지가 오늘 과장님의 이상한 모습, 따라간다니까 소리지른것. 지금의 상황 모든것을 설명해줄수 있었다.

 

카이토과장님이 그럴분이 아니야, 다른 이유가 있겠지. 하고 자신을 달랬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수가 없었다. 과장님이 거짓말을 한것이면 정말 그자리에서 폭발할것 같았고, 거짓말을 안하신거라면 가쿠포팀장이란놈이 무언갈 꾸민거니까 그자식을 어떻게 하던지..내가 모르는 데에서 나를 농락하고, 회사일가지고 거래를 한다던가. 와, 그럴 담력까지 있으신 분이 이때까지 어떻게 내밑에서 짓눌려 사셨을까. 실실웃기만 잘 하는줄 알았더니 그런면도 다 있으시고.. 그런일이 있다면 상사인 내게 먼저 알려야 하는것 아닌가? 내가 그정도로 신뢰를 못주는 부장이였던가? 신뢰를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를 생각한다면 이런식은 아니지.

 

 

" 도착했습니다. "

 

" 감사합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습니다. "

 

서둘러 가방을 챙겨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일식당으로 들어섰다.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들이 구십도로 인사를 하는것을 무시하고 마루를 성큼성큼걸어 룸쪽으로 걸어갔다. 제발 내 예상이 빗나갓기를. 그냥 가쿠포라는 건방진놈이 과장님께 말도안되는 말로 구워 삶아 바보같은 그사람이 속아 넘어간것이길. 내가 열심히 일구어놓은 영역을 거부하지마세요, 당신은 이미 내 영역의 사람입니다.

 

 

 

 

 

***

 

 

 

 

" 히야, 일찍 오십니다. 차가 안밀리던가 보죠? 중심가라서 밀릴줄 알았는데요. "

 

미닫이 문을 열자 펼쳐진 광경은 상상 그 이상이였다. 잘 차려진 식탁은 거의 손대지 않은채였고, 이미 맛이가서 푹 죽은 과장님은 보라색머리의 능글맞게 생긴놈의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덮어둔 자켓은 크기로 봐서 과장님의 것이 아니였다. 과장님이 무슨 인형이라도 되는듯 머리를 쓰다듬는게 이거 보통 미친놈이 아닌것 같았다. 아주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듯한 말투로 앉으세요, 술잔을 하나 더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하고 생긋 웃으며 자신의 앞을 손으로 가리켰다.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도데체 뭘 어떻게 하면 이런게 미팅자리에서 생길수 있는걸까. 그리고 과장님... 정말 미칠것같았다. 도데체 저사람에겐 방어라던지 자신을 지킨다는것 따윈 존재하질 않는건가? 나이가 몇살이신데 술한잔먹고 다른남자 무릎을 베고 뭘하시는.. 혈액이 거꾸로 흐르는듯한 빡침이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만들었다.  나는 엄청나게 불쾌한 표정으로 과장님쪽으로 다가가 그놈의 무릎에 누워있는 카이토과장님을 툭툭 때려 깨웠다.

 

" 과장님, 카이토과장님... 저 왔습니다. 정신좀 차려보세요! "

 

" 으음... 부...장.. "

 

" 예, 왔으니까 당장 일어나시라구요."

 

과장님은 잠시 고개를 드는듯하다가 다시 가쿠포팀장의 무릎에 풀썩 쓰러졌다. " 이런, 과장님이 정말 많이 취하신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 하고 누가 들어도 빈정대는 듯한 말투로 일단 자리에 앉으세요, 우리 이야기 할것 있지 않습니까? 하고 쿠쿡 웃었다.

나는 과장님의 허리를 안아들고 쾅쾅걸어가 반대편에 앉았다. 도저히 당분간은 일어나시질 못할것 같았다. 내 가슴팍에 안긴 과장님이 불편하신지 우웅..하고 잠시 몸을 뒤척이다가 팔을 바깥으로 내민자세로 만족스럽게 잠이 들었다. 엄마코알라가 아기를 안은듯한 포즈가 웃겼지만 상황이 거지같은지라 웃음도 나지 않았다.

 

" 과장님이 참 귀엽습니다. 어디서 그런걸 찾으셨습니까? "

 

" 제가 회사에 입사할때부터 계셨습니다만. "

 

" 그렇겠지요, 이렇게 뵈니 영광입니다. 후지오카 부장님. 궁금한거 많으실것같은데..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과장님께 무슨 빌어먹을 제안을 했습니까? "

 

" 이야! 역시 똑똑하시네요. 빌어먹을이라뇨, 무슨 그런 말씀을.. 전 알려드린것 뿐입니다.

  과장님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크립톤에 있을바에야 더 낮은조건으로 체결해줄테니 인터넷으로 오시라구요, 오시지 않으셔도 채결은 하되, 그건 원래의 조건으로 하는것. 그게 전부였습니다. 과장님이 보고서에 더 낮은조건을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

 

" 인정...? 크립톤이 과장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구요? 낮은조건.. "

 

" 인터넷으로 오시겠단것이지요, 과장님이 선택하신겁니다. "

 

나에게 상의 하나도없이 이런걸 선택했단 말인가? 이건 엄연한 부당거래였다. 크립톤이 과장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도데체 그건 누구생각이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어드바이스하고, 잘 하지도 않는 짓 해가며 내사람으로 만들어 놨더니 이제와서 인터넷으로 가겠다고?

외로우시다면서, 나한테 그렇게 말해놓고. 칭찬한번해주면 그렇게 웃어줄...칭찬한적이 없구나, 그렇게 앞에서는 실실웃으면서 미운정 고운정 다 들게해놓고. 속으로는 인터넷으로 가겠단 꿍꿍이를 숨기고 지금도 안겨서 세상편한 표정으로 자는게 화가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나를 무시해도 정도껏 무시해야지 지금 사람 가지고 논것아닌가. 이럴수가. 예상했던것보다 훨씬 최악의 시나리오다.

 

" 화가나십니까? "

 

견딜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왔다. 회사를 그만두면 그만두는거고, 옮기면 옮기는거지 이렇게 더러운 형태로 끝내는건 과장님답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단다. 나는 과장님의 이야기가 듣고싶어졌다. 사실이라면 진짜 입으로 들어야지. 정말로 크립톤이, 제가 과장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 과장님!! 아... 미치겠네 "

 

"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시려구요? 지금상태에서? 몸도 못가누시는데.. 소용없습니다. "하고 고개를 젓는 가쿠포팀장은 여유로운 모습이였다. 그는 과장님이 인터넷에 올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말고는 더 궁금한거 없습니까? 좀더 생각하고 오신줄 알았는데요.

하는 건방진 말을 하며 회를 한점 집어 먹었다. 이미 사직서는 써놓으셨는데 내질 않으셨다고 하고, 저희쪽에서도 카이토과장님 아니, 인터넷으로 오신다면 바로 팀장으로 모실 계획입니다. 새로운 부서를 조직하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원래 카이토 과장님의 전공은 영업관리쪽이라고 하시던데, 지금의 하는일과는 조금 다르시지 않습니까? 부의 총괄이시란분이 사원들의 적성조차 모르시고 마구 밀어붙이기만 하시니까 이렇게 되시는 겁니다. 쯧쯔

 

나는 더이상 참지못하고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릇들이 들썩이며 서로가 부듸쳐 흩어지는 소리를 냈다. 소리에 놀란 과장님이 화들짝 놀래 고개를 들고 앉았다. 내 넥타이를 쥔 과장님의 손은 창백하게 차가워 보였다. 불안한 눈빛으로 나와 가쿠포팀장을 번갈아 바라보는걸 보니 어느정도 상황파악을 하신것 같았다.

가쿠포팀장도 이외라는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 도데체 당신이 뭔데 우리를 평가합니까? 팀장정도면 저와 같은지위밖에 안되는걸로 알고있습니다. 무슨 권리로 우리 부서를 평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과장님의 전공이 영업관리쪽이란거 알고있습니다. 그쪽으로는 저보다 더 뛰어난것도 알고있구요. 당연히 입사때부터 그쪽 담당일을 해오셨으니까요, 하지만 영업관리만 잘해서는 더이상 승진이 되지 않습니다. 과장님은 다른쪽일을 하셔서 충분히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 있는 자격, 노력도 할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제밑에서만 삼년차신데 매번 과장님의 능력에 놀라는게 많습니다. 조금만 더 요령이 있으셨다면 옛날에 부장하시고도 남으셨을겁니다. 영업직에서 술을 못하는데도 이정도로 있을수 있다는게 어떤일인지 잘 아실텐데요, 그런 소중한 인력을 상사인 저에게 묻지도 않으시고 빼가시겠다? 웃겨서 말이 안나옵니다. 사장님이 와서 데려간데도 멱살잡을판국에 어디서 팀장따위가 와서 그따위 더러운 제안이나 하십니까? 인터넷쪽의 사장님께 정식으로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참나, 건방진건 인터넷의 컨셉입니까? 과장님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셨습니까? "

 

속사포같이 쏟아내는 내 말에 끄덕끄덕하고 일리있단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엄청나게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기분나쁜 웃음을 크게 푸하하하하핫하고 뭐가 그리 웃긴지 배를 잡고 끅끅넘어갔다. 나는 과장님이 잠에 들지않도록 허리를 일으켜 옆에다 앉혔다. 허리를 툭툭쳐 세우니 곧게 피는걸 보고 지금 엄청나게 버티고 계시는구나-하고 감탄했다. 그래도 몸이 흔들리는건 어쩔수 없는지 계속 앞뒤로 까딱까딱 흔들렸다.

 

" 아하하하하.. 아 진짜 웃겨 죽겠네요. 크립톤분들은 어찌 이리 하시는 말이 다 똑같으신지. 푸하하핫, 누가 상사아니실까봐. 아, 그럼 지체 하지않고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바로 인터넷의 사장 카무이 가쿠포입니다. 사실 후지오카부장님은 제가 이름을 말하는 순간 아실줄 알았는데, 들어보시지 않으셨나요? 제가 이름을 숨기고 다니는 편이긴 합니다만.. 유명한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이건 또 무슨소리야? 하는순간 옛날에 인터넷의 사장-이라고 들은 이름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유명한 가수의 이름과 비슷하다고 흘려들었는데! 옆을 돌아보니 과장님은 이미 알고 계셨단듯 슬픈눈으로 끄덕였다.

 

 

 

 

 

 

 

***

 

 

 

 

 

 

그리하야 내막을 알게된 나와 과장님, 그리고 가쿠포사장은 삼자 대면식의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여유만만하게 싱글싱글 기분나쁜웃음을 시종일관 잃지않는 가쿠포사장. 언젠가 과장님이 중요한 서류를 날려먹은 그날보다 더 화난표정의 나, 분명히 여기엔 내가 모르는 내막이 있을것이다. 그러니까 내 옆의 과장님이 불안해 죽을것만 같은 얼굴로 울먹거리고 있는것이리라. 앗, 저어...하고 옴짝이는 입술이 벌건걸 보니 또 입술을 깨무신것 같았다. 무릎을 꿇고 있는 발을 꼼지락꼼지락 대는것도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이셨다. 항상 혼날때마다 입술을 깨물고 발가락을 꼼지락대는게 귀여워서 푸훗하고 웃음이 나온적도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싶으셨는지 풀어진 와이셔츠의 단추를 여매보려 하셨지만 역시나 술에 취한 과장님의 손가락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낑낑대며 부시럭대는걸 에휴,하고 한숨을 쉬며 잠가 주었다.

 

" 엄마같네요, 보기좋습니다. 실제로는 과장님이 더 나이가 많으시다죠? 귀여우셔라.. "

 

" 나이 많으신 분께 귀엽다고 하시는건 예의부족 아니십니까? 사장씩이나 되시는 분이시라면 그정돈 상식입니다. "

 

하고 가쿠포사장은 워워-하고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나와 가쿠포사장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에 눌린 과장님은 무언가를 말하고싶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 부..부장...니..." 하다가 돌아본 나의눈빛에 히익 하고 숨을 들이키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셨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그럴만한건 가쿠포사장의 제안이야기였으니까. 그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지금 당장 과장님을 집어 던져도 속이 풀릴것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믿었다. 모든것이 저 재수없는 장발사장의 농간이란것을. 남자가 징그럽게 장발에 포니테일은 뭔가 싶다. 게다가 과장님에게 하는짓을 보면 변태가 분명했다. 저런변태가 사장인 회사에 보낼바에야 차라리 농촌에 일을 하러 보내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때에 먼저 말을 꺼내면 얻을게 없다. 자기가 먼저 재밌어하며 이야기를 하기를 기다렸다. 그래, 한번 재밌게 놀아봐라.

 

" 믿지 않으시나 봅니다, 제 제안을 과장님이 수락하셨단것을? "

 

" 그거야 본인입에서 들어야 할 이야기죠. 그렇지 않습니까 과장님? "

 

" 네? 네에... "

 

과장님에 임팩트를 넣어서 말했더니 또 흠칫하면서 놀라는 모습이 신빙성은 떨어져보이지만, 남의 식구보단 자기식구를 믿어야 하니까. 그리고 과장님은 정말 그러실분이 아니다. 아니셨으면 좋겠다. 제발 용기좀 내서 저 변태사장을 바라보며 거짓말하지마!! 라고 저한테 했던것처럼 소리좀 쳐주세요. 답답해서 뒷목잡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니까요.

그럼 본인입으로 들어보죠- 하고 가쿠포사장은 과장님을 쳐다보았다. 저 느끼한 눈빛에 왜 놀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술이 좀 깨셨는지 초롱하게 슬픈눈이 살아난 과장님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아까 대성통곡을 하던걸 생각하면 담담한 목소리였다.

 

" 그...이..일단은, 술...안마신댓는데 마셔,서 죄송...합니다 부장님...또 귀찮게 하네요. 신경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 그리고 숨겨서 죄송합니다..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 읏.. "

 

과장님은 울음을 참기위해 엄청나게 말을 끊어서 하셨다. 처량하고 처참하기까지한 그 말보다 더 내게 충격인것은 그게 사실이란 점이였다. 최후까지, 모든 상황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나는 과장님을 믿었는데 숨겨서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합니다로 해결될 문제인가? 피가 거꾸로 솟다못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배신이란말이 내머릿속을 지배했다. 정말 말 그대로 믿음을 등졌다. 한마디만 하고 일어서리라, 내 마지막 이성을 달래며 과장님의 멱살을 잡고 이야기 했다.

 

" 그럼 가쿠포사장님의 말이 사실이란 말입니까? 정말로 크립톤그만두시고 인터넷가신다구요? 누구마음대로 그런걸 결정하셨죠? 저한텐 한마디도 없으시다가 뒷통수치시는게 특기십니까? 지금 이때까지 저한테 엿먹으신거 다 해소하고 가시려고 이런거 꾸미신거에요? 하! 그러면 아주 잘 이루어 지신것 같네요, 아까 사진도 둘이 짠겁니까? 그렇게 마구 굴리는 싼몸이신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자존심도 뭣도 없으시네요. 저속해서 말이 안나옵니다. 당신같은 사람은 우리 회사에 필요없습니다. 꺼지세요! " 

 

버럭버럭소리를 지르고 던지듯 멱살을 놓았다. 모든게 화가났다. 호오,하고 상황을 지켜보는 저 빌어먹을 인터넷의 사장도, 아무말 못하고 떨고만있는 어리숙한 배신자도.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할건 난데 왜 자기가 피해자인 척을 하는지... 저것도 다 연기일꺼라 생각에 역겨웠다. 몸을 섞었던것도 다 연기였고, 방긋방긋 웃던것도 연기였고.

이젠 다 필요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이상 이 더러운 곳에 한시도 숨쉬고 싶지 않았다. 공기조차 더럽고 역겨웠다.

" 알아서 잘들 해보십시오, 크립톤을 얕보다간 큰일날겁니다. 과장님... 아, 이제 과장님도 아니시지. 사직서는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제선에서 처리할테니까요. "

 

그때였다. 바들바들떠는 차갑다못해 시체같은 손이 나가려는 나의 바짓가랑이를 잡은것은.

정말 끝까지 사람 기분 더럽게하는-

 

" 떠날마음 없어요 ... "

 

돌아본 과장님의 눈에서는 어느때보다 큰 눈물방울이 뚝뚝떨어지고 있었다. 마룻바닥으로 떨어진 눈물들이 마루의 색을 짙게 만들었다. 감정의 끝에서 터지는 울음을 막으려는 노력이 떨림으로 이어졌다. 흑, 하고숨쉬는게 아니라 우는것처럼 들리는 소리가 말소리와 함께 나왔다. 진실로 말에 무게가 있다면,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는 엄청난 감정이 실려있었다. 마치 오래된 성당의 오르간 소리가 멀리 퍼져나가듯, 내마음속을 진동시켰다. 그건 내가 과장님에게서 본 가장 최후의 진실이였으며, 나는 무언가 크게 오해를 하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 전 ...크립톤이 좋습니다.. 버리지 말아주세요 .. "

 

" 그럼 아까는 - "

 

하고 질문하는데 바짓가랑이잡은 손이 스르르 풀리더니 털썩하고 처량한소리로 과장님이 옆으로 쓰러지셨다.

 

" 이거아주...드라마가 따로없네요, 과장님이 오늘 많이 힘드셨나봅니다. 이제야 눈치 채셨습니까? 과장님이 얼마나 헌신적인 분이신지.

제가 제안한 순간부터 그럴일은 없을거라고 잡아떼는데.. 아주 길을 잘 들이셨습니다. 억지로 데려와도 말라 죽을것같네요. 오늘은 후지오카부장님에게 한방 먹인걸로 만족하겠습니다. 정식 사과문 보내지요! "

 

" 너 ... "

 

나는 과장님을 들처 업고 일어서며 테이블을 살짝 걷어찼다. 마음같아서는 뒤엎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업힌 과장님이 또 깰것만 같았다. 사람 체온이 맞나 싶을정도로 차가운 몸뚱아리는 살짝살짝 간헐적으로 경기를 일으켰다. 얼른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곧 얼음이 될것같았다. 어찌 이렇게 미련스러우신지 모르겠다. 말허리 자르고 들어와서 오해라고 말하면 되는것가지고, 그 수치스러운말을 다 듣고 있는건 뭔가도데체. 정말 못말릴 사람이다.

조금 강도가 센지 물컵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가쿠포사장은 여전히 빙그레 웃는 얼굴이였다.

 

" 너 다음에 걸리면 죽는다. 내꺼에 손 한번만 더 대면 진짜 회사 다 때려치는 수가 있어도 죽여버릴줄알아. "

 

" 얼마든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미친새끼, 하고 조그맣게 욕을하며 미닫이문을 벌컥열었다. 이미 큰소리가 나고 그릇깨지는 소리를 종업원들이 들었는지 문가에서 몇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사람을 업고나오자 세상에-하고 놀라길래 " 술에 취하셨습니다. 계산은 안쪽분이 하실겁니다. " 하고 서둘러 가게를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과장님의 끊이지않는 눈물샘이 내 등을 촉촉히 적셨다. 세상에 이렇게 눈물이 많은 서른일곱은 없을것이라 생각하며 가장 가까운 병원의 응급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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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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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왜붙인거지..? 진심 벨소설이네요 이거 


The Office! 06

- 카이토 과장님의 우울 -

 

 

멍한 공백의 시간이 지났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았을때는 회의가 끝난지 삼십분이 지나있었다. 가쿠포팀장이 한 말들이 회의실에 메아리쳐 귓가에 윙윙댓다. 그의 당당하고 거만한 명령조의 음성은 뭔가 위압감이 느껴져 한순간 그것에 홀렸는지 ' 가야하나? '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요즘엔 어린나이에 승진을 빨리하는게 유행인가, 가쿠포팀장또한 자신보다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직책은 크립톤의 부장과 같은위치였다. 분명히 나를 자신보다 아래로 보고있었다. 겸손한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자신의 전성기와는 다르게 자신감과 자기 어필이 중요한 세대라던가, 꼬장해질나이는 아닌데 요즘 젊은 세대란 참... 정도로 생각하기엔 너무도 엄청난 일이라 냉정하게 생각해보았다.

그래, 가쿠포팀장이 말한데로 나는 크립톤에서 꽤 괜찮은 위치에 있어. 비록 후지오카부장님이 맨날 내 보고서를 빽시키시긴 해도, 집어 던지시진 않잖아? 아, 한번 인가 있었나.. 두번이구나, 아니 세번. 아무튼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애시당초에 말이 안되는 제안이잖아?누가 구둣발로 남의집에 성큼성큼들어와서 멀쩡한 대들보..까진 아니더라도 멀쩡한 집안살림 떼다간다는게 어느나라 논리야 도데체. 도둑도 이런도둑이 없고 납치가 없지. 정식요청을 해온다고 해도 지금 갈까말까...아니 안갈꺼지만.

고작 이정도 제안에 왜이렇게 자신있어 하는거지.. 뒤에 빽이라도있나? 인터넷이랑 계약안하고 시말서 서른장정도 쓰지뭐... 서른장과 부장님의 잔소리 세시간. 이번엔 진짜 유능한 과장님의 모습을 보여주려고했는데 정말 운도 더럽게 없는건 내인생의 컨셉인가보다.

아까 덜컹하고 떨어진 심장에 비하면 그다지 큰일도 아니였다. 괜히 쫄아가지고서는.

 

다음번에 만나면 똑똑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그럴생각 없다고! 내가 크립톤에서만 몇년을 있었는데, 영업1부를 얼마나 열심히 키워왔는데 말이지- 하고 스스로를 짐짓 돈독히 여기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것이였다.

가쿠포 팀장에게 들었던 모든말에 반박할수 있을것 같았다. 이 한마디를 제외하고는.

 

" 인정받을수 있습니다. "

 

인정, 인정이라.. 지금 내가 인정받고 있었나?

서류를 챙겨 회의실을 나오면서 그런 의문에 사로잡혔다. 사무실 사람들은 날 인정하고 있었나? 부장님은 나를 자신의 직속으로 인정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대답을 위한 모든 요소들이 ' 아니다 ' 를 가리켰다. 돌아보고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랬다.

대리보다 못한 보고서를 써오는 과장따위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것이다. 자신이 연차제인 크립톤이 아닌 능력제인 인터넷으로 간다면 절대로 과장자리에 있을수 없을것 같았다. 능력이 없는건 아니였다. 머리가 좋은편이 아닌걸 알았기에 학창시절에도, 대학교때도, 크립톤의 입사시험때도 열심히 공부했고, 요즘도 손을 놓고 있진 않았다. 자신의 노력으로 끌어올린 능력에 비해 주윗사람들이 너무 뛰어나다던가. 능력에 비해 요령과 사회활동이 너무 낙제점이였다. 입사 3년차까진 그럭저럭 인정받고 칭찬받는 일도 더러 있었다. 이젠 잘 기억도 안나는 사람만 좋던 옛날 부장님은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 카이토대리, 잘했어요 " 라고 말했던가 ..

아무리 아무리 열심히 써가고 노력을 해도 후지오카부장님은 최소 세번은 다시, 다시를 반복했다. 기획안도, 결산보고서도 심지어 회의록까지 검사맡고 다시 써가야 하는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안받는다면 거짓말이였다. 도데체 왜이렇게 까다롭고 완벽주의자이신건지.

 

사무실로 들어가니 먼저 일이 있다고 나갔던 대리님이 책상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 과장님, 왜이렇게 늦으셨어요? " 하고 회의록 쓰게 서류주세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 서류를 주고 타이핑 한 후 보내달라고 이야기했다. 

자리에 돌아가려는데 부장님이 고개를 까딱까딱 하고 와보라는 시늉을 했다. 인터넷과의 협력이 많이 신경이 쓰이셨는지 보고서를 기다리기엔 너무 조급했나보다. 역시 협력 안될거라고 하면 화내시려나. 불같이 화를 내는 부장님을 생각하니 오싹해졌다. 엄청나게 화내시는 부장님을 볼바에야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는편이 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 네, 부르셨습니까? " 하고 옆에 서서 말을 해도 부장님은 지금 보는 서류에서 눈을 떼시지 않았다. 슬쩍 보니 인터넷컴퍼니 관련 서류였다. 옆에 쌓여있는 서류더미들도 협력관련 문서들이였다. 아무래도 윗선들에게서 이 협력을 꼭 성사시키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은것 같았다. 그러니까 방석도 사주고 회의 열심히 하라고 화이팅도 해주셨겠지. 이런상태에서 죄송하지만 협력은 파기된것같습니다 라고 죽어도 말못해.

 

" 오늘 회의 괜찮으셨습니까 ? "

 

서류를 보시느라 바쁜 눈빛이지만 잠시 마주친 눈에는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 안 괜찮았으면 죽습니다 ' 하는 무언의 압박이 스멀스멀 피어나왔다.

가쿠포팀장의 제안은 생각보다 단순한게 아니였다. 그는 이것까지 모두 예상하고 그런 패를 내놓은것일까.

진실을 말하기엔 그 눈이 너무 밟혀서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 네? 네에... 괜찮았습니다 ... 다음미팅도 잡았습니다, 또 .. "

 

또? 하고 되돌아보는 부장님은 엷은 미소를 띠고있었다. 나를 향한 웃음은 아니더라도 일단 보는건 나니까.

나는 그 웃음을 계속 보고싶은 욕심에, 더 짙어지게 할 욕심에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 인터넷컴퍼니에서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안했던 조건들을 조금 낮춰서도 협력이 가능할것 같습니다. "

 

" 흠, 그래요? 수고하셨습니다. 어느정도 낮출수 있는지 보고서에 적어주세요. 다음미팅은 언제로 잡으셨습니까? "

 

" 아...목요일 저녁약속입니다. "

 

더이상 눈을 마주칠수가 없었다. 고작 사흘정도밖에 갈수 없는 임시방편을 만들어낸것이다. 말을 뱉어내자마자 후회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려야해. 그래야 하는데.

갈등에 빠진 내게 부장님은 다가왔다. 손을 가리고 귓속말을 하려시길래 흠칫 놀라며 눈을 감았다. '다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이런 말이 나오는 날엔 놀래서 다리에 힘은 풀리겠지만 한편으론 눈치 채 줬으면 좋을것 같았다. 찰나의 시간에 여러가지 선택지가 지나가더니, 궁금함과 두려움이 뒤섞여서 긴장을 만들어냈다.

 

' 허리쪽은 괜찮으십니까? 회의에 지장을 줄 정도였습니까? '

 

주변을 살피며 누가 듣는사람이 없나 체크하는 그 세심함은 내 거짓말을 밝히기엔 조금 부족했다. 나는 다시 부장님의 귀에 손을 가져다대고 ' 아닙니다. 주신 방석덕에 편안하게 회의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하고 고개를 숙인뒤 괜찮다는 의미로 살짝 웃었다. 그제야 부장님은 끄덕끄덕하며 자리에 돌아가보세요. 하고 다시 서류에 눈을 돌리셨다.

자리에 돌아온 나는 회의실에 있던때보다 더 큰 갈등에 휩싸였다.

 

 

 

 

 

 

***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가장 최우선인 회의보고서부터 허위로 써내야 할 판이였다. 대리님이 넘겨준 자료를 받아 모두 낮은선으로 고쳤다. 깜빡이는 워드의 커서가 나를 경멸하는것 같았다.이건아닌데.. 당장 더 힘들어지기전에 사실대로 말하자, 그래야하는데. 이걸받으면 부장님 웃어줄까? 이정도면 큰 공로인것같은데, 전의 부장님이 그랬던것처럼 칭찬해주시지 않을까-하고 못된생각이 계속 들었다. 한두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것에 집착하는게 정말 바보같았고 어떤 감정에서 그것을 원하는지도 잘 분간이 되지도 않았다. 가쿠포팀장이 말한 인정인지, 내가 그렇게 무력한 사람이 아니란걸 보여주기 위한 자기만족인지, 부장님의 관심을 가지고싶은건지 아무튼 이름모를 그 감정은 나를 지배하여 회의보고서를 엄청난 것으로 만들어낸것이다. 이정도로 적고 나니 이젠 뒷일은 에라 모르겠다 막나가보자는 식이다. 칭찬한번 받고 인터넷으로 팔려가서 진짜 거래나 성사시킬까. 칭찬한번 듣겠다고 회사생활 접는 회사원은 처음일것이다. 그러다보니 이틀새에 불안한게 늘어났다. 저 보고서를 사실로 만들려면 진짜로 인터넷으로 가야할 판국이였다. 보고서를 완성한지는 오래 되었지만 도저히 부장님께 낼수가 없었다. 가져다 드리는 순간 사실이 되는거니까. 그렇게 되면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인터넷이냐, 허위보고서를쓴 멍청이가 되어 회사를 나가느냐였다. 어느쪽도 달갑진 않았지만 회사를 버리고 인터넷으로 가는쪽이 더 -

 

[ 카이토 과장님, 회의보고서 오늘오전12시까지 내주세요. 오늘 저녁이 미팅인걸로 압니다. ]

 

회사내에서 쓰는 메신저로 부장님께 이런 쪽지가 날아왔다. 답장을 하려고 켰지만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어서 또 부장님께 쪽지가 왔다.

 

[ 아니, 잘쓰든 못쓰든 상관치 않을테니 들고오세요. 지금당장 ]

 

분명히 칸막이 너머의 부장님은 나를 노려보고 있을것 같았다. 보통이라면 어제정도에 제출하고 오더를 받았어야 한다. 어제부터 부장님의 눈길을 슬슬피해만 다니다가 도망치듯 퇴근했고, 오늘도 계속 나를 주시하는 눈빛을 아닌척 하다가 결국 이렇게 된것이다.

나는 이틀전에 완성해놓은 보고서를 들고 슬금슬금 부장님책상으로 걸어갔다.

 

" 무슨 보고서를 손으로 쓰십니까? 독수리타자로 치십니까? "

 

" 죄송합니다 .. "

 

빼앗아가듯이 휙 보고서를 가져가서 매의 눈으로 훑어보는 부장님의 미간이 펴졌다. 내가 거짓으로 작성한 보고서에는 인터넷은 식은죽 먹기로 넘어올것 같습니다. 그것도 낮은조건에서요! 하는 희망적인 메세지가 담겨 있었을테니까.

마음속이 차가워졌다.

먹먹해진 내 표정과 다르게 부장님의 얼굴은 오랫만에 활짝 피어 나를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런건 처음이였다.

 

" 과장님,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보고서도 흠잡을데가 없네요. 오늘 회의 잘 하시길 바랍니다. "

 

이제까지의 반응중에 최고로 긍정적이였다. 이전에 저런 말을 들었다면 정말 기뻐서 하늘로 날아갈듯한 기분이였을텐데.

속임수로 듣는 칭찬은 가슴만 쿡쿡쑤시는 아픈것이였다.

 

" 네 ... 감사합니다 "

 

힘없는 내 말투에 부장님은 내 손을 덥썩 잡으셨다. 긴장을 하거나 하면 손이 차가워지는 내 몸의 특성을 알고있는 부장님은 내가 오늘저녁의 미팅때문에 긴장하고있다고 생각하신것 같다. 이건 죄의식이였는데.

 

" 또 긴장하신겁니까? 표정이 안좋으신데요. 아직도 몸이 안좋으십니까 ? "

 

" 아, 아닙니다. 그냥, 좀 .. 어 ... 아닙니다. "

 

" 오늘 미팅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녁약속이면 술도 드시지 않습니까? "

 

" 술...은 안마시고 싶지만 분위기상 마실것 같습니다만.. "

 

"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과장님이 술 드시고 어떤짓을 할지... 중요한 미팅인데. "

 

" 안돼! "

 

부장님의 말을 듣자마자 소스라치게 소리쳤다. 부장님이 오셔서 가쿠포팀장님을 만나고, 만나는것부터가 큰 문제고 두사람이 대화하다가 핀트가 달라졌단걸 느끼는 순간 나는 씻을수없는 배신감을 부장님께 안기게 되는것이다.

그런건 인터넷으로 팔려가든 어쩌든 회사를 그만두는것 이상으로 싫었다. 그동안 노력하고 혼나고 여러일을 겪으며 얻어온 신뢰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사직서를 쓰더라도 건강문제정도로 사유를 적으려 했다.

소리치는 내모습에 부장님은 어벙벙하게 눈만 껌뻑이셨다. 너무 놀라다보니 반말까지 한 터라 사무실 사람들 모두 우리책상을 주시했다.

 

" ...요.... 아니.... 저, 부장님, 그게 ..반말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건 제가 맡은 안건이니까... 제가 스스로 하고싶습니다.. 술 안마실테니까요. 한잔도 안마실께요. 그리..고 부장님이 오시면 인터넷쪽에서도 어....부..부담감 느낄수도 있고.. "

무슨소릴 했는지 모르겠다. 이리저리 둘러대며 그냥 헤헷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줄였다.

그건 그렇네요, 하고 미묘한 표정의 부장님이 간단히 대답했다. 나도 미묘한 표정으로 그렇죠 하고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 그럼 .. 믿겠습니다. 미팅 잘하고 오세요, 절대 술 마시면 안됩니다 "

 

" 네에 "

 

마음이 무겁다 못해 그걸 꺼내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쿵하는 둔탁한 소리를 낼것만 같았다.

나는 그 소리를 부장님이 들어줬으면하고 말도안돼는 생각을 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

 

 

 

 

 

 

" 사직서는 내고 오셨습니까? "

 

" 아직 쓰지 않았습니다. "

 

호오, 하고 일식집에서 다시만난 가쿠포팀장은 더욱더 예의라곤 찾아볼수 없는 거만을 넘어선 오만한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저번 회의에 함께왔던 구미양을 데려오지 않은 상태라 자신의 마음을 더 노골적으로 나타내는것 같았다. 함께 오겠다는 대리님을 떼다놓고 온 나도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약속장소도 통보하듯이 문자하나 날리는 바람에 찾는데 애를 먹었고, 헐레벌떡 일식집을 들어서니 여유만만한 모습으로 이미 룸안에 앉아있었다. 밑반찬도 나와있는걸 보면 미리 주문을 해놓은 모양이였다. 바깥에서 만나는 것이라 양복을 입지도 않은 검은 바지에 셔츠를 입은 모습이 혼자서만 편한 느낌이라 분했다. 내가 고개를 숙이는데도 인사를 받는답시고 손을 흔드는데 이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일까 싶었다. 따라주는 물을 마시고 예의 불쾌한 표정으로 계속 가쿠포 팀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기분나빠지게 웃는 얼굴이여서 불쾌하다못해 짜증이 났다.

 

" 어떻게,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

 

" ........ "

 

" 사직서를 쓰지 않으셨다니, 계속 크립톤에서 다닐 생각이십니까? "

 

" ...... "

 

" 묵비권을 행사하신다고 달라지는건 없습니다. "

 

" ........ "

 

아무말없이 노려보는 내 얼굴에도 연연치 않고 어깨를 으쓱하던 가쿠포팀장은 때마침 미닫이 문이 열리고 시켜놓았던 회접시를 종업원이 가지고 오자 " 사케한병주십시오 " 하고 주문을 했다. 내 간장종지에 간장을 부어주며 친절한듯 " 맛있는걸로 시켰습니다. 드셔보세요" 하고 생글생글 웃었다. 내가 미동도 않자 안드십니까? 먼저 들겠습니다. 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 드실땐 별 말 안할테니 드세요. 저혼자 이거 다 못먹습니다. 남기면 아깝잖아요? "

 

" 정말로 .. "

 

" 음? "

 

"정말로 제가 인터넷으로 가야만 협력 할겁니까? 인터넷의 사장님은 이 거래 알고계십니까? 이건 엄연한 부당거래입니다. 인력은 회사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지요. 저같은 중요인력을 마음대로 빼서 인터넷에 넣는다고 칩시다. 인터넷내부에서는 그걸 어떻게 생각할까요?"

 

나는 매우 이성적으로 말했으나, 가쿠포팀장의 표정이 조소로 가득찼다. 먹고있던 젓가락을 탁 내려놓은후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여전히 가만히 앉아서 가쿠포팀장을 바라만 보았다.

 

" 하하... 인터넷의 사장님이라, 네 알고계십니다. 이 거래내용. 사실 먼저 제안한것도 사장님이신걸요 "

 

" 네? 알고 계시는데 하라고 하셨다구요? "

 

인터넷의 사장님은 혹시 비양심도둑이신가? 이런 말도안돼는 계획을 제안하고 시키다니, 소문으로는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전략, 라이벌을 무너뜨리는 전략으로 인정받고 있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이걸 알고도 시켰단것은 말이 안된다. 인터넷컴퍼니의 위신을 깎아먹는 이런 짓을 하다니.. 머릿속에 혼선이 일어나 혼란스러웠다. 어....? 그럴리가 없는데 ... 하는 내 중얼거림을 들은 가쿠포팀장은

 

" 아하하핫, 아.. 과장님 정말 웃기고 귀여우신 분이십니다. 정말 인터넷에 데려가고싶네요. " 하고 능글맞게 웃었다.

 

" 되도록이면 가지 않는편을 택할겁니다만, 사실 제가 간다고 해서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할겁니다. 저는 회사기밀을 많이 알고있지도 않고, 아시다시피 영업1부의 총괄은 부장님이십니다. 저는 중간과정만 알고있을 뿐이지요. "

 

기모노를 입은 여자직원이 나무쟁반에 사케한병과 두개의 잔을 들고 들어왔다. 이곳에 놔주세요, 하고 가쿠포팀장은 밑반찬 그릇 몇개를 들어내 옆으로 치웠다. 잔을 채워 나에게 주는 그에게 " 죄송합니다, 술을 하지 못합니다. " 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도데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기분나쁜웃음만 짓는 그는 " 그럴것 같았습니다. 아- 정말 보기드물게 귀여우시네요. " 하고 귀엽다, 귀엽다를 연달아 말했다. 나이 많은 분께 귀엽다고 하는건 예의가 아니지만요. 를 덧붙이는게 더 얄미웠다. 한참을 자기풀에 웃던 그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왠지 긴장이 되어 무릎을 꿇은 발에 쥐가 날것만 같았다.

 

" 저한테 과장님이 좋아하실만한 정보가 있는데, 과장님이 크립톤을 떠나지 않고도 계약해드릴 방법이 있습니다. "

 

그런정보가! 있었으면 옛날에 말하시지.

 

" 뭡니까? "

 

" 술 한잔만 드시면 말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나는 얼른 사케병을 들어 가쿠포팀장의 술잔에다 술을 부은뒤 살짝 부듸치고는 홀짝 들이켰다. 사케는 약한술이니까 한잔정돈 괜찮을꺼야, 정신차려서 크립톤을 떠나지않고 계약하는방법을 쓰자. 정신차리자. 정신...

눈을 깜빡여서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사케가 아니라 중국술이라고 해도 믿을정도의 취기가 올라왔다. 이건 내가 아무리 술을 못마신다고 해도 이상했다. 후끈 달아오른 얼굴이 얼얼하게 느껴졌다.

 

" 건배도 안끝났는데 드십니까, 이렇게 빨리 취하시면 곤란한데 ... 너무 센걸 부탁했나요 "

 

" 방...법 알려주세요 ... "

 

취하지 않으려고 물컵을 찾았으나 이미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눈이 감기고 팔이 의지할곳을 찾아 테이블위로 올라갔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가쿠포팀장은 여전히 웃는얼굴 이였다. 지금의 취기라면 한대 때려줄수도 있을텐데.

 

" 아까 인터넷의 사장님 찾으셨죠? "

 

" 아..안차잣는데 .. " 쓰읍하고 숨을 삼키고 말해도 발음이 줄줄 샜다. 정말 이래선 안된다고, 위급하다는 신호를 몸이 보냈다. 이건 소주정도의 도수도 아니였다. 난생 처음마시는 높은도수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다음말을 듣고 한순간 술이 깬듯한 착각이 들었다.

 

 

" 여기있네요, 제가 바로 인터넷의 사장. 카무이 가쿠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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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ffice! 05

 

 

 

복도를 걸어오는 뚜벅뚜벅하는 구둣소리에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덩치만 컸지 겁은 자기만큼이나 많은 대리님은 ' 왔습니다 ' 하고 입모양으로 말하고 주변을 두리번두리번하며 갈곳잃은 불안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괜찮아요, 하고 다부진 표정을 지은후 침착하게 서류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곧 들어올 손님들께 인사를 하기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긴장을 했는지 하반신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백번의 회의를 해왔지만 여전히 첫 회의는 떨리는 것이였다. 사무실을 나올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후지오카부장님의 믿습니다, 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많이 도와주셨으니까. 후우, 하고 긴 호흡을 한후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삐뚤어진 넥타이를 다시 몸의 중간으로 맞추며 옆을 슬쩍 훔쳐보니 반투명의 유리통로로 두명의 인영이 비치고 곧 선명한 형상이 되어 들어왔다. 예상할만한 조합인 남자인 상사와 비서격으로 데려온듯한 밝은 분위기를 띄는 젊은 아가씨가 들어왔다. 클립톤 상사만큼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인터넷또한 이 세계에서는 클립톤다음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회사로써, 고전적이고 관습적인 '회사'의 모양을 띠고있는 크립톤과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를 중시하는 인터넷사는 혁신과 상상력을 가진인재라면 누구나 높은자리로 올라갈수 있게하는 능력위주의 경쟁을 중시했다. 그러한 회사분위기에 맞추어 복장또한 정장을 입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오늘은 두사람 다 격식에 맞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클립톤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옆의 대리님 또한 그러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우와-하고 조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 안녕하십니까? " 하고 남자는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가느다랗고 길쭉한 팔 다리를 가진 그는 날렵한 턱선과 큰키, 그리고 진 보라색의 장발을 한 매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위쪽으로 묶은 포니테일머리가 인상적이였다. 머리색과 세트로 맞춘듯한 자청색의 가느다란 눈매가 휘어지며 웃는 모습이 중성적 으로 느껴졌다. 전화약속을 잡을때보다 선명한 목소리 또한 반음이 섞인 약간 높은 톤으로 맑았다.단단하게 잡은 손으로 악수를 한뒤 살짝 허리를 굽혀 카이토과장에게 명함을 내밀며

"인터넷컴퍼니의 영업팀에서 나온 카무이 가쿠포라고 합니다. "  하고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 영업팀의 나카시마 구미 라고 합니다. " 하고 뒤를 이어 고개를 숙인 아가씨는 발랄한 밝은 연두빛의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많아봐야 스물서너살밖에 안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에 동글동글한 눈이 귀여웠다. 헤헷. 하고 싱긋 웃는 모습에 옆에 서있는 대리님이 발갛게 된 얼굴로 호감을 표시했다.

 

 

예의바른 인사에 자신도 고개를 숙이며

" 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크립톤상사 영업1부의 카이토과장입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이쪽에 앉으세요. " 하고 앞의 의자를 뒤로빼 권유했다. 행동빠른 대리가 먼저 뜨거운 녹차를 내왔다. 감사합니다, 하고 눈인사를 한 가쿠포팀장은 구미양에게 눈짓을 한번 하고는 한모금 마셨다. 그사이 구미양은 자신의 가방에서 관련 서류들을 꺼내어 준비했다. 서류가방속에서 안경을 꺼내 쓴 카이토과장이 훨씬 더 밝고 선명하게 보이는 서류를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최근의 과로된 생활로 시력이 떨어지는것 같아 평소때에는 외관상 쓰지 않지만 필요할때 간간히 쓰기위해 맞춘 안경이였다.  

 

녹차맛이 좋네요, 티백이라도. 한숨 돌린듯한 가쿠포팀장이 입을 열였다. 오는데 차는 밀리지 않았느냐, 날씨는 어떻느냐 하는 가벼운 주제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서로의 쟁점이 달린 협력제안서로 넘어갔다. 쉽지 않았다. 인터넷 컴퍼니 측은 카이토과장이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낮은 것을 제시했다. 예상했던 정도가 있었는데 그것보다 아랫선이였다.

가쿠포팀장은 말솜씨 좋게 설득을 시작했다. 절대 상한선은 지키리, 하고 다짐을 한 카이토과장이 그 말에 조용히 반박하며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제시했다. 평소답지않게 똑바른 말투와 자신감을 실은 목소리로 크립톤측은 더 좋은 혜택을 줄테니 손해를 보더라도 협력을 하자 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자신들로써는 더 잃을것이 있다기보다는 인터넷컴퍼니의 새로운 전략을 얻고싶은 것이 더 강하기때문에 더 센조건을 제시해도 얼마든지 받아들일수 있습니다, 함께 하시죠. 하며 설득했다. 이에 가쿠포팀장은 인터넷이 협력을 하고있는 3등격 업체와의 협력조건을 제시하며 업계표준이 이렇습니다-하는식이였다. 가쿠포팀장 또한 일목요연하고 정확하게 인터넷사의 의견을 제시했고, 한시간이 지나도록 팽팽한 줄다리기는 계속 이어졌다. 뜨거웠던 녹차가 차갑게 식은지 오래가 되고 나서야 그들은 1차회의를 정리했다. 약간이지만 클립톤이 우위로 왔다는것을 느낀 카이토과장은 2차회의때 반드시 말뚝을 박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치열한 회의가 오고가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며 이런저런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회의할때와는 다른 풀어진 느낌이였다.

 

"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가쿠포팀장님, 다음 미팅땐 제가 점심대접을 하겠습니다. "

 

" 그동안 전화상으로 많이 뵈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매우 기쁩니다. 과장님이시라길래 전 좀더 늙으신 분을 생각했는데요, 클립톤사는 연차제도 아니였습니까? "

 

" 맞습니다. 저도 나이로는 과장을 할 정도의 나이인데 .. 덩치가 작다보니 사람들이 어리게 보는 경향이 조금 있습니다. "

 

게다가 안경까지 꼈으니까요. 하고 안경을 벗어 안경집에다가 접어넣었다.

 

" 아하, 동안이셨군요. 부럽습니다. 클립톤사 영업1부시라면 뭐 이 바닥에서 어디내놔도 서럽진 않은자리죠, 듣자하니 팀의 부장님께서도 전무후무하게 연차제도를 무시한 케이스라고 하던데.. 몇년전에 떠들썩 했습니다. 그 고집있는 크립톤에서 초고속승진을 할정도로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라면서요? "

 

역시 회사안팎으로 떠들썩한 사건이였다. 연차위주의 등용을 하던 클립톤상사의 핵심부서중 하나인 경영팀에서 사십다섯먹은 무능력하지만 꼬장꼬장한 부장님을 대신해서 온게 입사 3년차인 대리급직원이란 소식을 알고 회장님 아들이다, 숨겨진 비밀이 있을것이다- 하며 여러 소문거리가 나돌았다. 직속 부하직원이 될 카이토과장 또한 낙하신인물은 더 대하기 어려울텐데, 아첨이나 술접대는 이제 힘들어서 더이상 못하고, 회사생활 더 어려워 지는구나. 하며 끙끙 앓았다.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짜여졌던 몇몇의 권력암투 드라마는 후지오카부장이 첫 프로젝트를 마쳤을때 모두 수면안으로 가라앉았다. ' 저정도 추진력이면  ' 하고 모두 인정했던 것이다. 첫 입부당시 회사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할일을 할 뿐인 강직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지금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날이 선 분위기여서 과장님은 서류결제를 받으러갈때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기분이였다. 물론 그건 지금도지만.

 

" 후지오카부장님 말씀이십니까? 그분은 부장직을 할 정도의 능력과 배포가 있으신 분이세요. 나이는 어려도 참 본받을 점이 많은 분이랍니다. "

" 카이토부장님도 만만찮은데요, 회의하실때의 눈빛이랑 지금이랑 아주 천사와 악마를 넘나드십니다. 역시 클립톤이 잘 나가는데는 이유가 있네요. " 

" 아유 ... 저는 그냥 일개 과장일 뿐이죠. "

 

긴장이 풀어졌는지 온몸이 근질하고 뻐근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흐흣하고 웃는 자신과 달리 아까까진 싱글싱글하던 가쿠포팀장은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엄숙한 표정에 아 .. 하고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카이토과장또한 손을 멈추었다.

 

" 외람되지만 아깝습니다 .. "

" 네? "

 

 

" 제가 들은바론 과장님도 T대학 경영학부 나오신걸로 봐선 보통인물이 아니신데, 어찌 더 높은물에 가시지 않고 계속 과장자리에 머물러 있으신지..  "

 

" 그건.. 제 능력이 아직 부족한 탓이겠죠. 저도 제맘같아선 부장자리를 확! " 하고 분위기를 풀어보려 확! 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가쿠포부장의 심각한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먼저 일이 있어서 자리를 뜬 대리님을 불러오고 싶었다. 부서의 분위기 메이커인 그라면 이 분위기를 풀어줄수 있을것 같았다. 그리고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T대학 경영학부를 나온건 어떻게 아는것이며, 또 그것이 왜 가쿠포팀장에게 아깝단것인지 도통 알수가 없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던 가쿠포팀장이 앞으로 허리를 기울였다.

 

 

 

 

 

 

 

*

 

 

 

 

 

 

끝이 아득할정도로 높은 서른층짜리의 클립톤 본사건물을 걸어나오니 아직까지 뜨거운 햇살이 눈을 따갑게 했다. 회사 앞에는 회사의 상징물인 C모양의 기하학적 도형이 청동으로 커다랗게 만들어져 있었다. 가쿠포 팀장은 그 청동상이 무너지는 상상을 했다. 밖에서 부터 무너뜨릴수 없다면 안을 파고들어야 한다. 아무리 거대한 성벽도 키포인트가 되는 벽돌 한장을 빼는순간 순식간에 무너진다는 어느 건축가의 말이 사실이기를 빌었다. 업계 2위라지만 크립톤과 인터넷사의 갭은 엄청났다. 단단하고 거대하게 장악한 크립톤의 영향력 사이사이를 파고들고자 노력했지만 최근 오년간은 같이 성장하는것도 모자라 더욱 상한세를 보이는 크립톤에 진절머리가 났다. 기분나쁜 회사로군. 회사라기 보다 하나의 거대한 봉건제도의 성같은 느낌이였다. 인터넷컴퍼니와 다른 수직적 분위기에 숨쉬기도 역겨웠다. 저런식을 인터넷에게 요구하다니, 건방진. 게다가- 그런 표정.

종이만큼 구겨진 표정이 내면의 불쾌함을 드러냈다. 운전하는 자신의 옆에 앉은 구미가 정장자켓의 단추를 풀고 기지개를 폈다.

 

" 팀장님, 수고하셨어요. 후아- 아까는 숨도 제대로 안쉬어지드라구요, 우에엑.. 빨리 정장벗고 편안한 걸로 갈아입고 싶어요, 그쵸? "

" 네, 오랫만에 정장을 입으니 이거 .. 넥타이가 목을 조르는줄 알았습니다. "

" 푸힛, 전 오랫만에 정장입은 팀장님 보니까 멋있던걸요! 그나저나.. 제안 받아들이실까요? 아까 카이토과장님 눈 커진거 보셨어요? "

기운을 차린 구미가 이렇게- 하고 눈을 크게뜨며 놀란 시늉을 했다. 과장님 무지 귀엽게 생기셨든데- 꼭 오셨으면 좋겠다. 게다가 전 오늘 처음들었어요, T대 경영학부라니. 진짜로 인재셨잖아요? 하고 참았던말을 재잘재잘 속삭였다.

 

" 할껍니다. 하게 해야죠 .. 어떤것이 가장 이익이 되는지 정도는 알만한 사람입니다. 회사에 오래 근무했으니까 그 사정도 뻔히 잘 알꺼고요. 이번제안은 우리가 우위입니다. "

 

" 그런가요? 다음미팅은 언제로 잡으셨어요? 아, 그건 제가 알아야 하는건데.. 헤헷 "

 

" 이번주 목요일 저녁입니다. 확실하게 한번 더 구슬려야죠. "

 

덫에 걸린건 확인했으니 서서히 조여서 잡는겁니다. 라고 말하면 너무 사악한가요?

 

 

 

*

 

 

 

" 인터넷 컴퍼니로 오시지않겠습니까? 인터넷 컴퍼니는 경험많은 현자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

 

" 네? 지금 무슨 말씀을 .. "  하는 카이토과장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로썬 상상도 못할 소리였겠지만 자신은 애시당초 이 말을 하기위해 직접 온것이였다. 얼마나 뒷조사를 하고 분석을 했는지. 만난적도 없는 사람인데 처음 봤을때 익숙할 정도였다.

 

" 정식요청을 한다면 분명히 큰 사태가 생기겠죠. 클립톤과 싸울만큼 손해를 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제안하러 온겁니다. 저희는 - "

 

" 더이상 듣지 않겠습니다. "

 

" 아뇨, 들으십시오. 저희는 절대로 크립톤과 협력할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저희입장에서는 협력이 아닙니다, 식민이죠. 크립톤입장에서는 지금 인터넷과의 협력을 학수고대 하고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크립톤같은 고인물에 새로운 혁신이 필요한 시기이긴 하죠 이제. 그래서 외국인력도 투입하고, 여러 연수도 권장하고 있는것 아닙니까? 그런마당에 인터넷과의 협력! 한층 더 상승할 좋은 기회아닙니까? 회사차원에서 주목하고 있는것으로 압니다만. 그러니 현장직에 잘 나서지 않고 위에서 총괄하는 영업1부가, 그것도 과장씩이나 되는 분이 나선것 아닙니까? "

 

" ..... "

 

" 제안하는 겁니다. 과장님이 직접 사표를 쓰시고 인터넷으로 오신다면, 저희는 바로 팀장으로 직접 부서를 운영할수 있게 해드릴것입니다. 물론 봉급또한 지금의 150%까지 약속드릴수 있습니다. 현재 열평짜리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시는걸로 알고있는데 인터넷컴퍼니 소유의 최고급 오피스텔에 무상입주, 유급휴가와 병가도 크립톤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크립톤과 협력관계를 지금보다 더 낮은 조건으로 체결하겠습니다. 앞의 제안보다 이게 더 마음이 동하실것 같습니다. "

 

" 그리고 그 조건 외에는 인터넷컴퍼니는 절대로 크립톤과 협력할 생각이 없습니다. "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말에 푹 잠겨 홀딱 젖은 카이토과장의 눈이 일렁였다. 남국의 바다처럼 깊은 심해색의 눈이였다. 안경을 벗는순간 오-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가느다랗고 하얀 선이 청초한 흰색의 꽃의 선과 닮아있었다. 하필이면 저런사람이라니, 하지만 저런 사람이라 더 데려오기 쉬워졌다. 똑똑하지만 괜한 발악이라던지 꼼수같은건 부릴줄 모르는 사람이다. 속이 거무튀튀한 시꺼먼 아저씨였다면 좀더 물밑작업을 하고 고생을 할 뻔 했지만 오늘 그를 만나자 마자 계획을 확정했다. 직구로 승부하자고.

지금만 봐도 그는 자신의 상황이 어떤지는 충분히 이해한것 같았다. 아무런 말없이 일그러진 표정이 왠지 처량하게 물에 젖은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주인을 거역하란 말은 그에게 잔인해 보였다. 그리고 이정도로 복종감을 만들어낸 크립톤에 혐오감이 생겼다. 실리주의자라면 바로 수락했을 조건인데. 충실한 크립톤의 개는 금방이라도 화를 내던지, 울음을 터뜨릴듯한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성격상 그러지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그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 오신다면 최고의 대우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이건 제 이름과 회사생활을 걸고 말씀 드립니다. 인터넷은 크립톤과 다릅니다, 분명히 지금처럼 스트레스 없이 일하실수 있을겁니다. 크립톤과 과장님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잘 아실거라 믿습니다. 다음미팅은 다음주 목요일에 제가 식당을 예약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확답을 받는걸로 하죠. 궁금한게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주시길. "

 

입술 깨무지 마십시오, 피납니다- 구십도로 인사를 하고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인사도 않은채 앉아있었다. 할 말도, 하고싶은 말 모두가 가슴과 머리에 엉켜서 암덩어리처럼 증식했다. 회사를 이런식으로 떠나는건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니야, 이런식으론 아니야.

배신자가 되라는 건가.

다시금 하반신이 욱신욱신 하며 다리가 쪼개지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떠한 감정이 넘치는것을 막지못한 손이 덜덜 떨렸다. 안돼, 아니야. 하고 속삭였다.

 

 

' 부장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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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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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이 R-19라 티스토리에 올릴 수가 없습니다...


The office! 04

 

 

 

따스하게 창문으로 떨어지는 햇살을 온 허리로 받으며 카이토과장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엄청난 허리통증과 함께 참을수없는 안쪽의 뜨거운 열. 서른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못했던 새로운고통이였다. 심장박동과 함께 욱신거림이 두근두근하며 어제의 격렬한 정사를 떠올리게했다. 부끄럽다못해 참담하기까지한 어제의 미친짓이 모두 머리에 스쳤다.

외롭지않아요..라니, 미쳤다, 나 정말 미친걸까? 뇌속의 어딘가 병이생겼나? 하고싶으면 평소같이 AV나 하나 챙겨보고 자위나 할것이지, 도데체 누구한테 매달린거야 ... 아무리 몇년간 금욕으로 욕구불만 상태였다고 해도. 이건아냐. 그리고 아파. 후지오카부장님 .. 건강한 남자였구나. 타임머신이 있다면 어제로 돌아가고 싶은마음이 절실했다. 부끄럽고 남사스러워서 배게에서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허벅지 안쪽에는 붉은 흔적이 이곳저곳에 남아있었다. 이불에 닿은 쇄골부분엔 이빨로 깨문흔적이 있었다. 이건 기억이 나질 않는걸 보니 마지막엔 쓰러지듯 잠에 든것같았다. 평소에 쌓아놓은 스트레스가 이런식으로 폭발할줄은 몰랐다. 어제의 자신은 뭔가 조절하는 나사가 풀린 고장난 구식 로봇이거나 고삐가 풀린 망아지와 같았다. 자신답지 않은 어제의 모습이 똑똑히 뇌속에 새겨졌다. 차라리 술기운에 기억이라도 안났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리고 부장님은 어째서 나랑 섹스해준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한거라곤 이름 한번 부른것, 외롭다고 슬픈표정 한번지은것 밖에 없었다.

그정도에 폭발할정도로 섹스한지가 오래되셨구나.. 잘생겼다고 다 그런건 아니네.

사실은 부장님같은 미남에 유능한 사람은 주일마다 여자들을 끼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줄 알았다.

결국 후지오카부장님도 솔로니까 욕구불만였을꺼고, 나도 스트레스때문에 그랬던거니까. 어제는 장난기 많은 악마의 장난, 무언가의 이상한 키워드가 들어맞은것 일뿐이야.

사고였어. 혈기왕성한 서른살의 사고. 뭐 살다보면 이런 본의아닌 사고도 있고 그런거지.

앞으로 회사생활 제대로 할려면 사과하자, 평소엔 이성적인 분이니까 받아주실꺼야.

 

그만의 논리체계를 통과한 어제의 사건은 ' 실수 ' 로 규정지어졌다. 카이토과장은 침대 옆 바닥에 널부러진 자신의 속옷을 주워입었다. 속옷은 무언가 축축한게 묻어있어 설마..?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살짝 만져 냄새를 맡아보니 그저 땀일뿐이라 안심하고 바로 옆에 뒤집어진채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어제 입었던 와이셔츠를 주워입었다. 그정도의 움직임에도 허리와 안쪽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흐으,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허리를 잡고 침대옆에 있었던 자국이 보이는 부장님을 찾아 거실로 나갔다.

아니, 나가기 위해 살짝 한 다리를 내딛는순간 후들하고 허벅지에 힘이 풀렸다. 헉 하고 털썩 주저앉자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는 맨바닥에 그대로 부듸친 안쪽에 찌르르하고 고통이 밀려왔다. 서둘러 손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어떠한 접촉도 화끈거림만 부추길뿐이였다.

 

" 앗... 으 .. 흐으 이거 어쩌지 .. "

 

그대로 바닥에 앉아 이미 월요일이 되버린 시계를 원망했다. 회사에 갈 몸상태가 아닌걸 누구한테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제가 어제 심하게 정사를 했더니 뒤쪽이 아파서..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자.

하룻밤의 일탈이라기엔 너무 큰 일을 저질러버린것 같았다. 어떻게 수습해야하는지 머리가 지끈지끈아파왔다.

 

" 일어나셨습니까? "

 

아무렇지않게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머그컵에 모닝커피를 마시고있는 후지오카부장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깔끔한 모양새라지만 어디서 찾았는지 옷장에 들어있었을 자신의 티셔츠와 츄리닝바지를 입고있었다. 물론 사이즈는 그의 것보다 훨씬 작은것이였으므로 딱 달라붙은게 우스운 모양새였다. 어제의 머리와 다른걸 보니 샤워를 한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자신도 샤워를 한것 같았다. 어제 그렇게 땀을 많이 흘렸는데도 몸엔 뽀송뽀송한 단내가 났다.

도데체 어디서 부터 물어봐야 하는걸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후지오카부장은 바닥에 주저앉은 과장님을 앞으로 안아 다시 침대에 앉혀주었다. 예민하고 연해진 몸은 남의 손길이 닿자 질끈 하고 눈을 감아 그 더러운 느낌을 참아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풀썩 주저앉아 마저남은 블랙커피를 마신후 한잔 드릴까요? 하고 잔을 흔들어보았다. 쓰진 않지만 들여놓았던 커피포트에서 원두커피를 우려낸 모양이였다.

바지를 입지못해 드러난 허벅지를 대충 배게로 가리고 부장님의 눈치를 살폈다.

 

" 저, 부장님, 어제는 .. 제가 실수를 많이했습니다. 사고였으니 염치불구하지만 용서하고 잊어주시길 바랍니다 .. " 

 

보고서를 결제하러 갈때보다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떨군채 배게끝을 만지작거렸다. 자신때문에 아직도 출근 못하신 부장님은 평소의 얼굴이지만 분명히 화가 많이 났을꺼라 생각했다.

 

" 실수는 많이 하셨고, 용서도 할수있지만 잊지는 못하겠네요. "

 

" 여..역시 그렇죠? 하핫 죄송합니다 .. "

 

수치스러웠다. 어디까지 떨어지는것인지 모를 내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유리컵과 같이. 또 눈치없이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쉴수 밖에 없었다. 상사와의 이런 트러블을 만든 자신에게 남은일이라곤 권고사직을 해달라고 부탁한후에 건강사정으로 회사를 나간다고 주위에 말한뒤에 재취업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경솔한 자신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탓하며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신을 보지않는 고개숙인 카이토과장의 얼굴을 쳐다보며

" 어떻게 잊습니까, 그렇게 멋진 밤을 " 하는 후지오카부장은 처음보는 따뜻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과장님다운 반응이라 웃음이 났다. 많이 놀라신것 같은데 어떻게 달래드려야할까, 하고 좀처럼 하지 않는 속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 네? "

 

" 최근 삼년동안 일 외의 것을 첫번째로 둔적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에 일에서의 성취감 말고는 절 완전히 만족시킬수 있었던게 없었습니다 .. 물론 여자와의 일도 포함해서요,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나가떨어지는건 여자쪽이였으니까요. 제가 말하는 만족감이란건 체력적인 소모에서 오는게 아니란건 아시겠죠? 성적인 만족감을 말하는겁니다..

 

 어제가 처음입니다. 완전한 만족감을 가진게 .. 정말 감사합니다 카이토과장님. "

 

상상도 하지 못한말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부장님의 눈이 무지하게 따스했다. 저런 눈빛또한 처음이고 과분해서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 밝은 얼굴을보니 어제의 관계가 퍽이나 만족스러우셨던것 같다.

 

" 아이고 .. 무..무슨말씀을, 아니 이런게 아닌가 .... 음... "

 

" 회사가실 몸상태가 아니시죠? 죄송합니다, 저도 처음인지라 힘 조절이 어려웠던것 같습니다. 저도 일어나니 ... "

 

피곤하네요, 하고 귀엽게 어깨를 톡톡두르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서른살이였다. 이런 푸릇푸릇함을 평소에 어떻게 숨기고 있었을까 싶을정도로 긴장감이 풀린 모습이였다.

헤에, 어제 정말 재미좀 보셨나봅니다. 후지오카부장님. 하고 생긋 웃었다. 자신의 웃음에 " 한숨 놨습니다, 과장님이 충격받으실까봐 아침에 혼자 일어나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 하고 주절주절 자신의 시나리오를 이야기 해주었다. 충격에 회사를 그만두시면 어떡하나, 하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그나저나 어떻게 .. 걸으시지도 못하시는데 제가 밥을 좀 해드리겠습니다. 약은 이미 주무실때 발라놓았으니 걱정하지마시고 오늘은 그냥 침대에 있으세요. 제가 과장님 재택근무 하신다고 회사에 이미 말 해 두었습니다. 아, 물론 저도요.

 

" 감사합니다 .. "

 

모르겠다 이젠 나도, '관계' 든 '성별'이든 '상사와 부하직원' 전부다 모르겠다.

두려움을 치워버리고 그저 하얀 이불속에서 체온을 가진 누군가와 있다는게 너무 벅차게 행복했다.

 

 

 

 

 

*

 

 

 

 

 

그러나 첫 경험의 고통은 하루만에 사라지는게 아니였다. 하루종일 침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카이토과장은 딱딱한 의자에 앉으면 고통을 호소했다. 하루는 재택근무를 했다고 쳐도 다음날엔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참아보겠습니다! " 하고 다짐하는 과장님께 후지오카부장은 푹신한 방석을 안겨주고는 " 이거밖엔 방법이 없네요, 제가 내일아침 일곱시에 차로 데리러 올테니까 그냥 준비만 하시고 집에 있으세요. 양복은 다림질해서 걸어두었습니다. " 하고 옷걸이에 걸린 빳빳한 회색양복을 침대옆의 귀퉁이에다가 걸어주었다. 트레이드 마크인 멜빵또한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그의 손이 닿은 오피스텔은 기적이라도 일어난듯이 깨끗해지고 깔끔해졌다. 집앞의 마트에 다녀와 먹을것도 채워놓고, 간단한 국과 반찬을 들여놓은 후에야 부장님은 안심하고 집을 나설수 있었다. 냉장고에 들여놓은 반찬을 설명하며 꺼내드시고, 국은 데워드시면 되실겁니다. 드시고 꼭 뚜껑닫은뒤에 데워놓으세요. 하고 주의를 주었다.

 

" 감사합니다, 오늘 간호해주시고 .. 집안더러운데 청소도해주시고, 아유.. 민폐가 많습니다. "

" 저때문에 이렇게 되신걸요. 아침에 전화 한번 하겠습니다. "

" 네 .. 내일은 인터넷상사와의 미팅이 있는 중요한날인데, 아파 죽어도 회사에서 죽어야죠. 항상 말씀하셨잖습니까.. 헤헷 "

 

아시면 앞으론 일좀 잘 부탁드립니다, 과장님- 하고 머리를 헝클였다. 기분좋은 간지러움에 으헤헷하는 바보같은 웃음이 나왔다.

정말 미안하지만 정말 귀엽네요 과장님, 하는말이 목구멍까지 기어나왔다.

 

"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 하고 양복자켓을 손에 든 부장님이 정중하게 인사를 한후 오피스텔을 나섰다.

 

 

 

 

*

 

 

 

행복한 기분으로 다음날의 아침을 시작한 카이토과장은 더이상 부장님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극성맞을 정도로 지극적인 간호로 어제보단 한결 나은 몸상태로 스스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아 옷을 입었다. 깔끔하게 다림질된 옷을 입으니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여섯시 사십분부터 준비를 모두 끝내고 가방과 어제 받은 쿠션을 넣은 쇼핑백을 들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거실바닥을 살짝살짝 발꿈치로 걸었다. 왠지 인터넷 상사와의 미팅이 잘 끝나고 거래가 성사할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 거래만 성공한다면, 이전까지의 실수를 만회할수 있는 좋은기회가 될게 분명했다. 다음달에 들어오는 인턴들과 함께 진행할 프로젝트를 인터넷 상사와의 거래로 할 계획을 세워두었던지라, 오늘의 미팅은 카이토과장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사무실에 들어가 먼저 푹신한 방석을 의자에 놓자 동료직원들이 " 과장님, 혹시 치질걸리셨어요? 푸핫, " 하고 농담을 했다. 평소처럼 흐흣 하고 그 말을 받은후에 열한시로 계획된 미팅준비를 했다. 방석이 정말 푹신해서 집중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보고서와 제안서를 다시한번 꼼꼼히 훑어보자 잠시후에 도착하겠다는 인터넷상사로부터의 문자가 왔다.

비장한 얼굴로 문서를 챙겨들고 자신의 방석을 그 위에 올린후 회의실로 향했다. 눈을 마주친 부장님은 잘 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카이토과장은 작은목소리로 화이팅! 한후 부하직원 하나를 데리고 문을 나섰다.

 

장난기 많은 부하직원은 " 과장님 어제 치질수술 하셨죠? " 하고 긴장감을 풀어주려는 농담을 던지며 과장님을 졸졸 따라갔다.

나름대로 영업부중의 핵심축에 속하는 영업1부에겐 회의실이 따로있었다. [5층에 엘리베이터를 타고오시면 바로 보이는 영업1부 회의실로 오시길 바랍니다. 잠시후에 뵙겠습니다] 하는 문자를 보낸후에 통유리로 된 깔끔한 회의실에 자신의 자리에 방석을 깔고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했다. 인터넷 상사와의 거래는 이번이 처음이였기에 더욱 중요했다. 이번에 안면을 터놓은 상대와 쭉 거래를 할꺼니까, 최대한 좋은인상을 보여야할것이였다. 물론 그건 인터넷상사도 마찬가지 일테니 가장 유능하고 거래에 능한 영업팀을 보냈을것이다.

과장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시계가 열한시가 되는것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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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ashes 4(完)


비가 내렸다.

여름이지 참.

 

 

사소한 것을 기억해 내버린 무감각한 목소리로 비가 내리는 거실의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무심하게도 흐른다. 타박타박 떨어지는 빗소리가 가득 메우는 눅눅한 거실에 나올지도 오랜만이다. 낡은 담요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놓고 담요 끝자락을 만지작 거리는 카이토는 눈 한번 깜빡이질 않고 유정의 사그러진 등을 바라본다. 렌즈가 움직이는 미세한 소리에 유정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카이토의 시선이 움직였다는 것은.

 

“마스터, 약 먹을 시간이에요.”

“아-. 아. 조금만 있다가.”

“으음..곤란하네요. 제가 어떻게 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닌데.”

“짜인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거니까?”

 

으응. 카이토는 고개를 끄덕인다.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니, 당연히 인간인 자신을 이기지 않으려 할 것이란 것은 유정의 큰 착각이었다. 정해진 시간을 넘어서는 순간 늘 생글거리는 얼굴은 가면을 벗고 무표정하게 유정의 턱을 잡는다. 손가락을 물면 이가 시린 금속감이 느껴졌다. 죽을 힘을 다해 끊어질 듯 물었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밀려들어오는 알약의 더러운 삽입감이 틀어막은 식도를 타고 들어온다. 그럴때면 카이토는 벽 뒤의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으로는 초기 프로그래밍 된 매크로를 중얼거렸다.

 

“약 시간은 이십분 이상 지연해서는 안 됨.”

 

인공이건, 창조이건. 그것도 결국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살아갈 뿐이다.

과거 몇 번의 사투를 생각하고 그럼, 십구 분 뒤에. 하고 타협안을 내놓은 유정은 자신의 옆자리를 내주었다.

 

“비가 오네요.”

“그러네. 눈이 부시지 않아서 좋아.”

“좋다는 단어를 오랜만에 쓰셨어요. 기뻐요.”

 

십구 분. 착실하게 시간을 체크하며 손에 쥔 약봉지를 바닥의 물 컵 옆에 내려놓는다. 어깨에 얹은 회색빛 가디건의 빈 끄트머리를 잡았다. 팔짱을 낀 채 먼 곳을 바라보는 유정의 시선에는 아무것도 맺히지 않는다. 풀린 흑청빛 눈동자에 습기 찬 유리창 너머의 세계가 투과된다. 카이토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만한 여지를 찾지 못했다. 유정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심심하면 초기화되는 기억덕분에 1년 정도 세상에 노출된 인공지능은 깔끔한 초기화나 마찬가지인 수준이었다.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며, 보슬거리는 가디건의 감촉을 저장했다. 그것 또한 십 수번은 넘게 저장했던 기억 이겠지만. 메모리는 회사의 깊숙한 금고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삼분 남았어요.”

“그래. 자고 나면 비가 그치려나.”

 

언제 이 비가 그칠까.

언제 이 삶이 끝날까.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삶을 마칠 수 있게 되는 때가 올까.

자신의 선한 심성을 아버지는 철저하게 이용한다.

 

옭아매는 약기운이 올라오기 전에, 약을 삼킨 유정은 걸음을 휘적대며 침실에 들어가 하얀 이불에 스며들었다.

 

한참 창밖을 바라보던 카이토는 배운 적 없는 노래에 대해 생각한다.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3시간 15분짜리 CD에 든 것 이외의 노래는 알지 못한다. 유 회장이 카이토를 선택한 것은 다른 안드로이드에 비해 ‘노래’라는 덕목에 의해 최소한의 감정을 가졌다는 얄팍한 이유에서 였지만, 정작 시범기동이후로는 제대로 불러본 적이 없다. 노래가 어떤 것인지, 그래서 잘 알지 못한다.

 

 

*

 

 

 

잠에서 깬 유정은 카이토의 논리회로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어기지 말아야할 금기는 어떤 것이 있는지. 혹시 말을 해서도 안 되는 금기가 있는지에 대해서 물은 후, 침대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그런걸 왜 묻느냐고 불안하게 손가락을 만지작대던 카이토는 드물게 웃는 유정의 모습에 아이스크림 녹듯 사르르 녹아 자기가 아는 모든 금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시나리오는 매번 금기에 막힌다. 머리를 긁적인다. 쉽지 않다.

 

“사용자의 죽음이 최고 금기라니.”

 

딱 그것만 해주면 되는데.

자신을 살해해 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 모두가 유정의 죽음에 대한 당위성에 동조하면서도 도와주지 않았던 것처럼.

 

“그럼 사용자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은?”

“그건 인간들 사이에서도 죄로 통하는 것 아닌가요?”

“맞아. 살인방조죄. 아버지가 붙여준 사람들이 가장 신경 쓰는 죄목이지.”

 

왜 그렇게 죽고 싶어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지리멸렬한 대화에 카이토는 기지개를 폈다.

 

“나는 살 이유가 없어.”

“그럼 죽으실 이유는 있나요. 뭐.”

“많지. 나 하나만 사라지면 편해질 사람들이 많아.”

 

너도 그렇고.

마지막 문장을 마음에서 지운 유정은 그만 나가봐. 하고 손을 휘저었다. 침대 가에 앉아 있던 파란 자국이 알 수 없는 웃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저번의 투신은 카이토가 잠들어있을 때 몰래 집을 빠져나가 벌인 것이었다. 네 달간 병원 신세를 지고 아버지의 경호원 손에 붙들려 돌아와보니, 집 현관에는 안에서부터 번호를 알아야 열 수 있는 도어 락이 설치되어 있었다. 번호는 카이토가 아버지에게 다녀 오는 날 마다 바뀐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철저함을 실감한다.

 

다시 카이토를 방으로 불렀을 때, 카이토는 낡은 라디오를 손에 쥐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유정도 들어본 적이 있는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래를 불러보고 싶냐고 묻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이전의 본능이지요. 이것도.”

“그렇구나. 그보다, 우리 하늘 보러 가지 않을래?”

 

하늘, 보고 싶다. 완전 보고 싶어. 유리창에 비친 거 말고. 옥상에서 보는 하늘.

유정은 곁에 앉은 카이토의 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1. 사용자의 원함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시행한다.]

 

“카이토가 옥상까지 데려다 주면 정말 기쁠 텐데. 카이토랑 같이 보면 더 행복할거야.”

“행복..와아, 정말요? 가요. 얼른!”

 

[2.사용자가 행복해지는 것이 안드로이드의 행복.]

 

미안해.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팔을 잡아 부축하자 유정은 못이기는 듯 회색 가디건을 받아 들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현관의 비밀번호를 능숙하게 치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견디기 힘든 오후의 노을이 쏟아졌다. 나른하게 밀려오는 잠을 이겨내고자 살짝 쥔 손을 굳게 잡았다. 곧 영원히 잘 수 있다. 졸음은 죽음의 전조일지도.

 

“하늘이 멋지네요. 옥상으로 올라가 봐요.”

“그래. 고마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카이토는 신난 듯 공간 안의 거울에 비친 유정과 자신의 모습을 보고 키득댔다. 부축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이 뼈대만 남아 허수룩하게 큰 가디건에 얇은 허리가 잡힌다.

옥상까지 올라가는 계단에서 유정은 두 번을 멈추고 가쁜 숨을 골라야만 했다. 텃밭과 하늘 정원이라고 이름 붙여진, 관상용 식물이 심어진 옥상에 들어서자 넓게 노을이 구름에 퍼지고 있었다.

 

감탄사를 내뱉는 카이토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떨리는 입으로 유정은 시나리오의 첫 페이지를 넘긴다

자신이 주인공인 지독하게 길었던 연극의 마지막 장을 .

 

 

“카이토. 우리 같이 죽자.”

 

유정은 카이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방관도, 동조도 아니잖아.

너의 금기를 깨지 않아. 정말로 미안해. 하지만 이거 밖에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유정은 고해성사하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운이 좋다면, 전체수리가 될 수도 있어. 물론 사용자계약도 사라지도록. 내가 유서에 꼭 그것만은 해달라고 부탁했거든. 아버지가 들어 줄진, 사실 잘 모르겠지만.

 

 

카이토의 허리를 쥔 팔이 떨려왔다.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힘으로 가능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혼자 옥상 난간에 뛰쳐들 것이다. 유정은 각오로 입을 꾹 깨물었다.

 

“네, 그렇게 해요.”

 

카이토는 활짝 웃었다. 푸른 머리칼이 오후의 노을에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 축 쳐져 보이던 머플러가 바람에 가볍게 흩날렸다.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하늘이 정말 예쁘네요. 어디, 난간에서 뛰어내리 실건가요?”

 

허리를 잡은 것은 유정 쪽이었지만, 철조망 없는 난간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끌려가는 꼴이 되었다. 난간 위로 올라 갈 수 있도록 유정의 허리를 받쳐주고, 올라가 앉자 낑낑대며 자신도 올라가 앉았다. 발밑에 훤한 공간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길.

기도를 마친 유정은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물장구치듯 발을 공중에 흔들고 있었다.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음.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이걸로 마스터도 행복하고, 마스터로 인해 행복해질 사람도 여럿 생기나요?”

“결론적으로는.”

 

그럼 됐어요.

손잡아 주실래요?

 

유정은 수족관에서 상어를 바라보았던 유년시절의 기억. 혹은 꿈의 일부분을 떠올린다. 지느러미가 잘리면 배를 내밀고 바다위에 둥둥 떠오르는 상어의 시체를 건져 올리는 어부의 희망찬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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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ashes 3

긴것/Blue Ashes 2014. 9. 21. 17:32

Blue ashes 3


환상은 환상 일 뿐.

 

 

이제 유정은 취미용으로 만들어진 약한 보컬로이드의 신체로서도 휘둘러지는 가느다란 손목에 잔뜩 그어진 붉은 흔적들과, 6개월 전의 부주의로 인한 투신-이 일로 카이토는 한동안 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때 얻은 부셔진 몇 개의 갈빗대가 이제 겨우 나아가고 있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몸을 가졌기에.

목을 조른다고 해서 카이토가 죽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불에만 잘 못 스쳐도 찌릿하게 통증이 밀려온다. 온 몸이 매일 두드려 맞은 것처럼 욱신거려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났다. 주먹을 쥐고 때리면 오히려 유정 쪽의 데미지가 더 컸기에, 손을 내민 카이토를 잡고 손톱에 남은 힘을 주었다.

 

 

“아야. 손톱 좀 깎아 드려야겠다. 놓아보세요.”

“죽어..”

“저도 마스터가 원한다면 그래드리고 싶지만. 아직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카이토를 보면 새삼 자신이 얼마나 바닥으로 떨어졌는가를 실감한다. 그 애처롭다는 물젖은 푸른 눈빛에 쾌감을 느낀다. 손톱이 밀려들어가 카이토의 손등에 파인 초승달 모양의 자국이 몇 개 남겨졌다. 살이 다시 돌아오는 데는 한참 시간이 필요했다. 카이토는 자신의 손을 구겨 넣는 유정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유정의 원망스러운 눈길을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너 때문이야..”

“어떤 것이요?”

“나는, 너를. 볼 때마다..”

 

 

내 모든 인간성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야.

 

 

 

“네가 살아있는 이유가 나라면. 내가 이 지옥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에 네가 필요해 진거야.”

 

 

다시 염분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너만. 너만 없었으면. 유정은 짧은 단어를 토해내며 굵은 눈물자국을 누인 베게에 쏟아낸다. 몸을 웅크리고 조절되지 않는 눈물샘을 끌어안았다. 아이처럼 울고 싶지 않은 발악은 윽윽대는 소리로 이불 밖으로 새어나왔다. 원인 없는 깊은 한이 유정의 몸 깊숙이 배어나온다. 형태를 띠고 있다면 그것은 아주 무거운 검은 빛일 것이다.

우울은 새파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미안해요…….정말. 진짜 죄송해요. 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아요.

 

 

 

카이토의 밝은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인간의 우울은 안드로이드에게는 전염되지 않았다.

유 회장은 사람 몇을 붙여 유정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몹쓸 짓이란 것을 곧 깨달았다. 훨씬 더 인간적인 도구를 사용하자 매 달 정기적인 보고는 신뢰감이 높아졌다. 메모리를 이용한 감시영상을 잠깐씩 돌려보고 카이토의 객관적인 평가. 대처와 유정의 반응 등을 들은 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땐 똑똑했는데. 오래 두어 썩은 과일을 뱉는 모양새로 혀를 찬다. 별도로 들인 몇 개의 프로텍트를 다시 걸어 잠그고 카이토를 내보내면, 헤집어진 머릿속이 어떨떨하게 흔들려 멍한 표정으로 굽은 인사를 하고 나선다.

 

 

 

"너의 주인이 누구인지, 항상 기억하길 바라네."

"네, 알고 있어요."

 

 

집에 돌아오면 유정은 아버지의 안부를 묻다가 이내 헤집어졌던 머리를 잡아 바닥에 내리치고 그 위에 유리컵을 던졌다. 우습게도 사람흉내를 낸 피부아래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드렸구나. 눈을 멀게 하면 나를 기록할 수 없게 되니?"

작지만 날카로운 펜 끝을 파란 안구에 올곧게 가져간다.

 

"서비스 센터에 가게 되겠죠. 제 안구는 비싼 편이랍니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지 않은 카이토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제 머리를 깨부수고, 산산조각을 내도 메모리는 자동 연동되어 전해지니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 이건 그냥 화풀이지."

 

 

아신다면 다행이네요. 툭, 바닥에 고개 숙인 카이토는 유정의 기분이 풀릴 때 까지 누워 있다가 한참 뒤에 조용히 털고 일어나서 유리조각을 치웠다. 피부를 봉합하러 서비스 센터에 다녀오려면, 유정이 약을 먹고 잠든 틈을 이용해야 했다.

 

 

 

 

 

 

*

 

 

 

 

 

유정이 의미 없는 눈물을 쏟는 동안 카이토는 욕조에 물을 받았다.

목욕은 위험하다. 잠깐이라도 죽을 만한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나서는 유정에게 많은 물에 잠기는 시간은 절호의 기회였다. 가능하다면 샤워만 하는 것이 편했지만, 목욕은 유정이 몇 안 되게 카이토에게 '하고 싶다' 고 조르는 것이었기에 매 번 이기지 못하고 미지근한 물을 채워 손을 담가 온도를 측정했다. 뒤에서 조용히 타월을 허리에 감싼 유정이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모시러 갈려고 했는데, 오세요."

"응. 너무 울어서 머리 아프네."

 

 

짧은 욕조가 아니었지만 꽤 큰 키인 유정에게 그 욕조는 다리를 접어야 상반신을 담글 만큼의 크기였다. 무릎을 세우고 미지근한 물과 귀에 스며드는 물의 소리에 집중한다. 무심코 기분 좋다.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 그 말을 듣게 되면 카이토는 일주일 내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것이다. 귀찮아. 어깨까지 물을 담그려 몸을 숙이자 욕조 옆에 쭈그려 앉은 카이토가 음. 하고 불안한 듯 몸을 움직였다. 입을 떼려다 마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유정이 가장 카이토에게서 짜증난다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어차피 자기 말을 듣지도 않을 거면서, 눈치보고 신경 쓰는 척은 또 뭐람.

 

 

 

"왜 또.."

"너무 깊게 들어가시는 것 같아서요."

"나 죽을까봐 걱정이야?"

"으음…….나오세요, 조금만."

"내가 죽으면, 너의 쓸모도 사라지겠지. 알고 있어. 한동안은 죽지않을거야."

 

 

어깨를 잡는 카이토의 손을 뿌리치고 유정은 물에 머리끝까지 담갔다.

카이토의 불안한 소리가 물을 굴절한다. 미지근한 물 안은 태초처럼 따뜻하게 몸을 감싸온다.

 

이대로 물 안에서 평생 살 수 있는 어떤 물고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상어라든지.

 

 

공기는 자신과는 맞지 않게 가볍고, 천박하고, 불순하다.

유정은 카이토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을 흔들며 떨 때까지 물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손에서 떨어지는 물을 닦지 않은 주먹으로 머리를 내리쳐도 카이토는 나오셔서 다행이라고, 젖은 어깨에 매달려 흐느끼며 이상한 재회를 기뻐했다. 불필요한 헌신과 호의에 유정은 머리끝까지 진절머리가 나고 있었다. 혼자 있으면 생길 리 없는 배타에 대한 파괴욕구가 솟아올랐다.

죽기 전에 이 기계는 내손으로 부수고 말겠다는 남은 하나의 목표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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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ashes 2

긴것/Blue Ashes 2014. 9. 21. 17:31

blue ashes 2

 

물속에서 헤엄치는 상어를 본다. 

꿈이었다. 꿈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독한 약기운이 코를 스쳐가는 정신의 환각이 시간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죽어버린 이성 아래에 잠자던 무의식이 어릴적 기억의 단편이라도 꺼냈나 보지. 

상어는 유유히 물속을 헤엄치며 수족관의 다른 물고기들 위에 군림한다. 수족관 밖의 시선은 그러하였다. 회피하는 군중위에 당당히 행차하는 군주가 어떠한 것을 군림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방치속에서 자라난 가시덤불이 가득한 월계관에서는 영광스럽지 않은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다. 몽롱한 약기운에 받쳐 풀린 눈동자를 수족관의 표면에 가져다 댄다. 상어는 멈추지 않는다. 

유정은 어릴때에 읽었던 책의 한구절을 뇌에서 기억해낸다.

 

[상어는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을 멈추면 죽는다.]

 

장면은 연관성 없이 고장난 TV채널을 마구 돌리는것 마냥 불쾌하게 의미없는 정보를 쏟아낸다. 약기운이 언제쯤 떨어져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될까. 약을 먹으면 죽고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지 몰라도 몸을 죽인다. 신체와 정신을 떨구어 놓는다. 인형처럼 침대에 늘어져 있을것이다. 자신의 진짜 인형은 침대 밖 거실에서 다음 약시간과, 약간의 충전. 자그마한 노래등을 일상 삼은채로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그 명령은 유정의 것이 아니었다. 

 

'정말 죽고싶어 미치겠다.'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은 쓰레기들로 가득차버린지 오래로, 압축되지 않는 어리석은 후회와 불쾌한 과거가 여기저기 늘어나 발 딛는 걸음 마다 돌멩이 처럼 채인다. 던져버리고 걷어차버려도 그것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죽고싶어. 죽어야겠다. 세포자살을 하는게 좋겠다. 온 몸의 세포가 한번에 녹아내려서 개체를 사라지게 하는게 옳다. 나는 옳은 일을 하는것이 옳다. 

 

어디선가 알람소리가 들린다. 유정이라는 세계의 멸망을 알리는 신호소리라고 믿고싶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세계. 어디로도 끼일수 없는 교집합과 무관심속에서 군림하는 군주를 가진 세계따위.

후련하게 자기증오의 시간을 가진 유정은 알람의 소리가 끝나자마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카이토의 발가락을 겨우 볼정도로 작게 눈을 뜬다. 가시지 않은 약기운과 이미 세월을 함께 해온 무기력함이 굳게 짓눌러 있었다. 카이토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멜로디는 매번 똑같은 것이었다. 집 안을 굴러다니는 낡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구식의 노래. 그것을 똑같이 모사한 구식의 멜로디가 입안의 녹음기에서 약간의 기계음과 함께 흘러나온다. 손을 까닥여 의사표시를 했지만 뒤돌아선 카이토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멜로디의 끝을 잡은채로 약봉지를 비벼 바스라지는 소리를 냈다.

 

"음, 음. 자는 척 하시지 마세요, 마스터."

"주인...이라고 생각을 하긴 하니?"

"생각 이전의 본능이랍니다."

 

입을 열자 식도를 타고 약냄새가 밀려올라온다. 오늘 아무것도 안먹었던가. 어제도, 그제도. 탈수가 오기 전엔 열이 오르는 몸때문에 카이토가 눈치를 채고는 혈관을 잡아버린다. 강제로 들어오는 영양분을 곱게도 받아먹는 욕망스러운 신체에 저주를. 듣지 않는 유정을 무시하고 카이토는 가장 일상적인 대화를 시작한다. 오늘 날씨 어떠세요- 기분은? 

 

건조한 눈을 힘주어 누르자 둥그러진 눈은 기괴하게 웃는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보다 최악일수는 없을 정도로."

 

 

*

 

 

마지막으로 만났던 아버지의 손에는 처음보는 안드로이드의 손이 겹쳐있다. 아무렴 어때. 침대난간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행위에 집중한다. 아버지가 망가져버린 아들새끼 대신 대용품이라도 키워보려는 작정인걸까. 그럼 이제 내 역할은 끝난게 되겠다. 막을 내려주세요, 아버지. 

 

그 사이에서 커튼콜을 외치는 카이토를 목졸라 죽이는 환상을 여러번 본다.

환상이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빈다.

널 죽여야 그 다음 차례가 내가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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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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