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Great relief 


오랜만에 잡은 붓을 한참이나 멈추고 있던 성준은 캔버스 아래에 놓여있던 크고 작은 붓이 잔뜩 든 양철통에 붓을 던져 넣었다. 한 붓을 그리고 나면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미술의 성질이었다. 그는 앞뒤가 막힌 미로에 갇힌 개미처럼 하잘 것 없이 초라하게 눈앞에 놓인, 삼십분 전 까지 손을 움직이던 새파란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물의 느낌은 사라진다. 눈을 감자 차갑게 닿던 물과 군청에서부터 이어지는 파랑의 오로라가 검은 시야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점점 멀어져갔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감각의 끝에는 카이토의 눈동자가 있었다.

 

“배고픈데..집에 먹을 것 하나도 없지.”

“마스터. 다 끝나셨나요?”

 

거실로 나오자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카이토가 강아지를 부른 듯 폴짝 일어나 뛰어왔다. 성준은 카이토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카이토는 애매하게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는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여 카이토를 쳐다보다가 이내 아무 말 없이 지나쳐 물감 투성이인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파란 물이 퍼지는 세면대에 손을 씻으며 성준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저런 얼빠진 얼굴에서 공감각 이미지가 나타난 거, 우연이겠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거실로 나오자 카이토가 보이지 않았다. 성준은 발 빠르게 문이 열려져 있던 작업실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도 카이토는 캔버스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캔버스에 발린 파란색의 만화경과 새파란 카이토의 뒷모습은 하나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카이토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익숙해져서 일까, 웃는 모습이 점점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건 물속인가요?”

“안드로이드는 물속에 들어갈 수 없으면서 용케 알았네.”

“사진으로 본 적이 있어요.”

 

안드로이드는 생활방수가 기본적이다. 완전 침수는 그들이 사람과 비슷한 모습이기에 종종 벌어지는 사고이기 때문에, 안드로이드를 구매한 사람들에게 가장 주의할 것으로 손꼽는다. 안드로이드 패키지의 오른쪽 옆 부분엔 커다랗게 절대 목욕을 시켜 전신을 침수 시키지 마시오. 라고 인쇄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성준은 한국의 친구가 어머니께 가사도우미 안드로이드를 사드렸다가, 새로 온 식구에게 어머니가 깨끗이 목욕을 시킨 바람에 집에 들이자마자 완전침수로 폐기처분 했다는 눈물어린 일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없어요.”

 

빈 말이라도 할 법 할 텐데, 카이토는 딱딱하게 대답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작업실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누구라도 한 마디씩 건네기 마련이었다. 아무 의미 없는 잘 그렸다며 변변찮게 머리를 긁적이거나 쓸모없는 미사여구로 그럴 듯하게 말을 꾸며내기도 한다. 역시 안드로이드에게 발상이나 감상에 대한 요구는 과분한 것이었다. 허기를 채우기로 마음먹은 성준은 창밖을 내다보며 주변의 건물을 살폈지만, 가게처럼 보이는 것은 없었다.

 

“여기 가까운 슈퍼라든지..어디 있어?”

“슈퍼..제가 알려드릴게요! 내비게이션으로! 제가 같이 따라가도 되나요?”

“어디에 있는 지나 말해 주면 되는데.”

“이 동네는 가게들이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처음 찾아가면 헤맬 수 있어요. 기왕이면 사용하시는 게 좋지 않으세요? 네? 네에?”

“야, 알겠으니까. 그만 가까이 오라고. 짐 정도는 들 수 있지?”

 

성준은 한쪽 눈을 빛내며 다가오던 카이토를 밀어내고 함께 따라 나섰다. 팔 다리는 멀쩡하니 짐꾼으로 써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은 돌부리에도 휘청거리는데다 길가에 커다랗게 세워진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치더니 미안하다며 전봇대 앞에 대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눈뜨고 보기 힘든 가관에 성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카이토는 시야가 좁아 어쩔 수 없다며 저도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더니 저만치로 후다닥 걸어 나갔다. 주변은 한적한 시골의 풍경이 완연했다. 얇은 시냇물이 흐르는 다리를 천천히 걸어가던 강에서 바지를 걷은 채 무언가를 찾고 있던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소년은 불안하게 성준을 올려다 보다 다리 건너편으로 먼저 건너가 있던 카이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스터-. 빨리 오세요.”

“...카이토 형?”

“..누구..?”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강 아래로 시선을 돌린 카이토는 소년을 보고도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형이라고 불린 것 치고는 전혀 모르는 초면이라는 얼굴이었다. 어수룩해 보이는 소년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부끄러운지 흔들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가 착각했나 봐요. 죄송합니다.”

“곤란해 보이는데, 도와줄까?”

 

소년은 자신을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에 올해 겨우 입학한, 미나미 켄타라고 소개했다. 성준은 간단히 이름과 얼마 전에 이사 왔다는 사실 만을 밝힌 뒤 바지를 걷고 강으로 내려갔다. 따라오는 카이토에게 강 옆의 잔디밭에 앉아 있으라고 명령한 후에 다시 고개를 돌려 켄타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한 쪽만 불그스레한 얼굴이나 걷은 다리에 검은 멍이 든 것으로 봐서는, 강에서 잃어버렸다는 USB가 켄타의 부주의에 의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골에서 까지 학교폭력인가. 여러 가지 의심이 들었지만 초면에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닐뿐더러, 남의 일에 깊게 간섭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는 생각에 성준은 입을 다물고 적당히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덮었다.

 

“그런데 켄타, 저 녀석이랑 아는 사이야?”

“아, 죄송해요. 이 동네가 워낙 좁아서 아는 보컬로이드 인 줄 알고 헷갈려서 말을 걸었네요.”

“이곳 사람들은 안드로이드를 많이 가지고 있어?”

“노인이 많은 동네라, 가사도우미용 안드로이드는 많아도 보컬로이드는 많지 않아요. 제가 알기로는 아사노씨를 포함해서 7개체 정도 있었는데..”

“아사노씨?”

 

이거구나. 성준은 아사노라는 사람이 카이토의 전 주인이라 확신했다. 카이토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뒤져서 카이토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자신의 공감각을 일으킨 것인지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카이토는 이전의 기억이 ‘보호’ 되었다며 마스터인 성준에게는 열람권한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쓰러져가는 모래성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되묻자 켄타는 의외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가셨는데, 제가 착각한 카이토의 소유자 분이세요.”

“그렇구나, 그런데 어떻게 아사노씨의 보컬로이드가 아니라고 확신했어?”

 

기껏 이야기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눈치도 없이 카이토는 멀찍한 곳에서 마스터-. 켄타군-. 하고 큰소리로 부르며 팔을 휘휘 저었다. 성준이 귀찮다는 듯 대충 물기 어린 손을 흔들자 카이토는 기쁜 듯이 방긋 웃었다. 켄타는 그런 카이토를 바라보더니 쓸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표정이 좋은 카이토네요."

“아사노씨네 카이토는 언제나 무표정이거든요. 저렇게 웃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

 

 

 

마스터가 내린 두 번째 명령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 거기, 가만히 앉아있어!!”

“알겠습니다!”

 

그러기를 한 시간이었다. 흐름이 느린 강이라 멀리 흘러가지 않았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켄타군과 마스터는 강바닥을 헤집고 있었다. 도움이 되고 싶은데, 적당한 침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마스터는 요지부동으로 거기,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게다가 벌써 둘은 친해진 듯이 편하게 웃으며 카이토에게는 들리지 않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멍하니 집을 지키던 카이토는 가청주파수를 내리고 USB에서 흘러나올만한 흐름을 찾으려 귀를 기울였다. 강 속에서 가는 거미줄이 늘어나듯 느껴지던 전파가 커지더니 노이즈가 섞여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외침처럼 들리기도 했다. 카이토는 눈을 감은 채로 소리의 근원인 강물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스터와 켄타군이 있는 곳과는 더 떨어진 아래쪽이었다. 발목과 다리에 찰박거리던 물이 흔들리자 카이토의 손에는 검은 USB가 잡혔다.

 

“마스터!! 찾았어요!”

 

카이토는 신나게 USB를 든 채로 물을 첨벙거리며 걸어갔다. 카이토의 귀에는 USB가 지저귀는 작은 멜로디가 서투르지만 차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허겁지겁 물 속을 걸어가던 카이토는 이끼가 낀 바닥의 돌을 밟아 뒤로 완전히 넘어졌다.

 

“으악!!! 저 바보가!!”

 

성준은 커다란 물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몇 시간 전 집에서 상자를 밟고 넘어지듯 뒤로 커다랗게 넘어가는 카이토가 보이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허우적대며 뛰어갔지만, 이미 바지가 젖어 걸음이 무거워 마음처럼 뛰어갈 수가 없었다.

 

‘전신 침수가 되면 기동 정지가 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안 그래도 고장 났는데, 방수기능이 아예 안 되는 거면?’

 

등과 목이 오싹했다. 물속에 완전히 잠겨버린 카이토에게 다다를수록 초조하게 숨이 차올랐다. 가라앉은 어깨를 잡아 건져 올리자 손으로 코와 귀를 막고 있던 카이토가 기침을 하며 물을 뱉어냈다. 반쪽짜리 시야가 물에 이지러져 눈앞의 인영이 희미했다. 카이토는 보이지 않아도, 익숙한 체온으로 자신을 안은 것이 마스터임을 인지했다. 꽉 쥔 주먹을 펴자 검은 USB가 나타났다. 그러나 어깨를 잡은 마스터의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난 채였다. 켄타군의 걱정스런 목소리도 뒤에서 들려왔다.

 

“케헥..저는 성인 남성형이라 무거울 텐데..”

“침수로 고장 나면 수리 할 수도 없는데, 그렇게 폐기처분 되고 싶어?!”

“죄..죄송해요. 마스터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몸은 어때? 움직이는 데에 이상은 없어?”

“오른쪽 안구에 물이 들어갔는데, 이 정도면 자체수복으로 처리 할 수 있습니다.”

 

어깨를 잡았던 힘이 스르르 풀리자 카이토는 마스터의 얼굴이 궁금했다. 화가 아직도 난 것인지, 너무 화가 나서 손을 풀어버린 것인지. 그러나 시야는 아직도 뿌옇게 흐트러져 초점이 제대로 잡히질 않았다. 겨우 강가로 나와 숨을 돌린 성준이 USB를 건네자 켄타는 죄송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찾아주셔서 감사하지만, 두 분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으니, 받을 수 없어요.”

“그건 카이토가 내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한 행동으로 일어난 사고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고장 나지도 않았고. 중요한 물건이잖아?”

“노래 만들고 계신 거죠? 짧지만 굉장히 좋은 멜로디가 담겨있네요. 나중에 완성되면 들려주세요.”

“카이토...형..”

 

울먹이던 켄타는 카이토가 건넨 USB를 받아들고 연거푸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켄타가 다리 반대편으로 사라지자 성준은 허벅지까지 젖은 옷으로 휘청거리는 카이토가 손짓하는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몇 발자국 되지 않아서 앞으로 넘어진 카이토는 시야가 확실하지 않으니, 눈의 자가수복을 시행하겠다고 말하며 두 눈을 감아버렸다. 덕분에 성준은 장을 보는 내내 카이토의 손이나 소매를 잡아당겨 위치를 알렸다. 한 손에는 무거운 짐을, 한 손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카이토의 손을 잡고 무거운 몸으로 걸어가던 성준은 이곳이 한적한 동네라 천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성인 남성끼리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건 어떤 의미에서든 눈에 띄는 것이라, 연인이 있을 때에도 하지 않았던 짓이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걸어가던 카이토가 어느새 따뜻해진 손을 꼭 쥐며 입을 열었다.

 

 

“마스터의 물 속 그림은 포근한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물 속이란 건 생각보다 차갑고 무서운 곳이네요.”

“..아까 물어봤을 때는 어물쩍 넘어가더니, 이제 와서 대답하는 거야?”

“그때는 물속에 들어갔던 적이 없었던 걸요. 안 해 본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 드릴 순 없죠.”

“쓸데없이 확실하긴.”

“침수되지 않으려고 가만히 있을 때는 어둡고, 춥고, 조용해서 굉장히 무서웠는데..”

 

카이토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감았던 눈을 살포시 뜨고 성준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는 완전히 사람다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카이토의 머릿속에 있던 새하얀 오선지 위에 조그만 음표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행복의 기억, 물의 기억, 두려움의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마스터를 부르는 임프린팅의 재료로 만들어진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확실히 조각은 쌓여 아직은 모르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마스터의 손이 나타나 밖으로 꺼내주셨을 때, 굉장히 안심했어요.”

“...두 번 다시 그런 짓 하지 마.”

“알겠습니다.”

 

성준은 며칠 뒤 완성된 그림을 찍어 협회담당자에게 보여주었다.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담당자는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저희가 말하기도 전에 사진을 보내 주시다니, 상당히 마음에 드는 작품이신가봐요! 그리고 확실하네요. 멋진 바다 그림이에요. 주변에 바다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이 작품의 제목은 어떻게 되나요?”

“relief. 안도감으로.”

 

성준은 한 줄기 투명한 하얀 빛이 비추는 바다가 그려진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캔버스 아래에 기대 잠든 카이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당자의 폭포처럼 쏟아지는 칭찬세례를 피하려 휴대폰의 수화기를 귀에서 멀찍이 떼놓았다. 손가락 사이로 푸른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바다의 표면이 흔들리는 것처럼 물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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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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