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夏夕空

 

일곱 시 이십분. 카이토는 미리 맞춰놓은 오븐의 타이머가 울린 듯 반짝 눈을 떴다. 다시 눈을 감고 시스템 체크. 체온. 시각. 청각. 촉각-. 의식 활성화. 잔여 메모리 정리 완료. 충전코드를 목에서 뽑아 동그랗게 감아 담요 위에 올려두었다. 구색이라도 맞춰 놓고 있으라는 성준의 말에 충전코드가 연결된 거실의 자리 아래에 얇은 담요를 깔았다. 여기저기 보풀이 일어난 낡은 담요는 베란다 끝에 있던 작은 창고에 덜렁 놓여있었다. 다른 빈 상자 몇 개 에서는 버리지 않은 쓰레기나 잡동사니가 들어있었다. 창고의 존재를 최근에 알아챈 성준은 담요의 먼지를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이것만 왜 안 버린 거. 이상한 전주인 .”

이거 제가 쓰면 안 될까?”

더러워서 . 먼지는 안드로이드한테 별로래. 하긴, 넌 침수에 눈에..이제 와서 관리해봐야 무슨 소용이야.”

빨아서 쓸게요. 그러고 보니 정기 점검이 다음 주 부터 한 달 동안이네요. 혼자 다녀올게요.”

웃기시네. 가다가 전봇대에 박아서 영영 누워있고 싶어? 걸어가긴 멀던데, 자전거라도 빌릴까.”

 

6개월에 한번씩, 등록된 안드로이드들은 센터에서 정기점검을 받아야 했다. 센터를 이용하지 않은 등록은 엄밀히 말하면 불법이었기 때문에, 중고기기의 재등록을 하라는 메일과 문자가 여러 차례 날아왔다. 하지만 한자가 가득한 전문용어는 영 이해하기 힘들었다. 번역기 대용으로 카이토를 데려와 메일을 보여주었지만, 법률 용어를 쏟아내는 카이토의 설명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성준은 인터넷을 뒤져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센터를 찾아 전화로 재등록을 하고, 다음 점검 날에 들러 서류를 작성하라는 직원의 말을 메모해두었다. 계좌는 팩스로 보냈으니 임시 등록은 된 셈이었다.

 

마스터! 오늘 센터 간다고 말씀하신 날이에요.”

...지금이 몇 신...나 새벽에 누웠거든.”

아침 일곱 삼십이 분이! 센터는 아홉시에 오픈이고, 준비하고 거리를 계산해보면..”

나가. 열두시까지 들어오지 . 켄타가 자전거 빌려주기로 했으니까 그거나 받아놓고.”

알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켄타는 그 후로도 종종 마주쳤다. 늦은 저녁 장을 보러 나가는 시간이 켄타의 하교시간과 맞물려 있었고, 켄타는 늘 혼자 다녔기 때문에 말을 걸기도 쉬웠다.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켄타였다. 몸보다 커다란 기타를 매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걸어가던 켄타를 부르면 금방 어수룩한 얼굴로 뛰어와 인사를 하고, 카이토에게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자전거를 빌려달라는 부탁에도 싫은 소리 없이 일 보러 가는 김에 들리겠다고 답했다. 방을 나온 카이토는 냉장고를 열어 부족한 식재료를 기억했다. 남은 집안일을 조용히 해치우고 식탁에 앉아 현관문을 진득하게 바라보며 켄타를 기다렸다.

 

실례합니다. 자전거를 가져왔는데요.”

네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성준형의 부탁으로 자전거를 가져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건물에 자전거를 묶어 놓을 곳이 없더라고요. 가지고 올라오려니, 엘리베이터가 없고..”

곤란하네요. 지금 자전거는 어디에 있어요?”

화단의 울타리에 잠시 묶어놨는데, 얼른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거. 어떡하지, 형은요?”

마스터는 열두시까지 깨우면 안돼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같이 내려가요.”

 

카이토는 식탁위에 빠르게 메모를 남긴 후에 켄타와 함께 집을 나섰다. 한참 뒤에야 일어난 성준은 인기척 없는 집안을 둘러보다 테이블 위에 프린트 한 것처럼 반듯한 글씨의 메모를 발견했다.

 

[자전거를 돌보고 있겠습니다. 1층의 화단 옆.]

 

뭔 소리야...자전거가 강아지라도 되는 줄 알겠네.”

 

성준은 부스스한 머리를 만지며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1층의 화단에는 건물에 사는 할머니들이 손을 모아 돌보는 여름 꽃이 마악 피어나고 있었다. 낮은 화단의 울타리 옆에 켄타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카이토는 자전거 옆에 앉아 화단의 꽃을 만지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눈에 띄는 시퍼런 머리카락이 햇빛에 비쳐 반짝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치자 카이토는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어이, 카이토!!!!”

우와. 마스터! 일어나셨나요? 아직 열한시 사십오 분인데요!”

하는 거야 이 멍청아!!!”

 

카이토는 힘차게 다시 소리쳤지만, 성준은 작게 욕을 뱉은 후에 휴대전화를 챙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자전거 자물쇠를 손에 든 카이토가 빌라에 자전거 주차장이 없다고 해맑게 웃었다.

 

자전거 세워놓는 곳도 없다니. 일본은 자전거 많이 타고 다니잖아..?”

이 건물엔 없고, 이 옆에 있는 공통으로 쓰는 주차장은 요금을 내고 써 야해. 켄타군한테 비싼 돈을 내달라고 하긴 죄송해서..”

한 시간에 100엔이잖아!! 75만 엔짜리 초고가 기계주제에 무슨 소리야! 네가 쓸데없이 매일 먹는 아이스크림도 하나에 200엔이라고. 듣고 있어? 잠시만 기다려. 준비하고 다시 나올 테니. 오늘 더우니까 모자 쓰고. 카드랑 신분증..”

마스터. 시리얼 코드 적어가야해요.”

그랬지, . 네가 기억하고 있지 않아?”

그건 중요정보라서 제가 밝히는 건 불가능해요.”

 

성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걸어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에 메모해놓은 종이와 모자 두 개, 신분증을 넣은 지갑을 백팩에 넣고 늘 신던 슬리퍼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휴대전화를 확인해보니 켄타에게서 메시지가 세 개나 와있었다.

 

[자전거 가지고 갈게요.]

[전화 가능할까요?]

[시간이 없어서, 두고 갈게요. 카이토가 제 말은 전혀 안 듣네요. 죄송합니다.]

 

어서 뒤에 타. 나중에 켄타한테 사과해야겠다. 못살아 정말.”

켄타군, 정말 착하니까 걱정이에요.”

헛소리 말고 뒤에 타기나 해.”

 

성준은 기세 좋게 자전거에 앉아 뒤에 붙은 카이토의 손을 허리에 당겼다. 그리고 의외의 저항감에 고개를 돌렸다.

 

뭐해? 잡으라니까. 넘어지고 싶어? 허리 앞 쪽을 꽉 잡아.”

그게..앞으로 앉으면 마스터 등에 가려서 잘 안보여서. 그럼 옆으로..”

 

자전거로 달리니 빌라를 벗어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마트를 갈 때 지나가는 강과 다리를 단번에 넘어 낮은 주택가에 들어섰다. 카이토는 제법 무거웠고, 등에 바싹 붙어 무게가 더욱 느껴졌다. 목에서 땀이 흘렀지만 곧 바람에 식어갔다.

 

카이토, 여기서 어느 쪽?”

왼쪽으로 돌아서 200m 직진하세요. 다음으로 나오는 좁은 길은 무시하세요.”

 

앞을 빼꼼 내다보던 카이토가 다시 등에 달라붙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사이로 느지막이 산책하는 노부부와 나무그늘이 스쳤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등에서 조급하고 커다랗게 심장소리가 울렸다. 높고 거친 숨소리. 평소보다 뜨거운 체온. 지나가는 가게에서 은은하게 울리는 라디오 소리. 카이토는 빠르게 달라지는 것들을 저장했다. 작은 방에서 시작했던 풍경의 반경이 넓어지고 있었다. 마스터와 지나갔던 다리. . 사나흘에 한번 가는 마트. 머릿속의 지도에서 기호에 불과했던 작은 정보들. 악보 속에 갇혀 있던 노래를 부를 때처럼 신기한 일이었다.

 

 

 

***

 

 

이십분 쯤 들려서 도착한 센터는 한적했다. 이 곳은 직원과 수리기사를 포함해 하루에 근무하는 직원은 두세 명이 전부인 작은 곳이었다. 성준은 자전거를 앞에 대놓고 센터로 들어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닿자 땀에 젖은 옷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카이토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펄럭거리며 열을 식히더니 번호표를 뽑는 곳으로 걸어갔다.

 

더워...너 은근히 무겁잖아. 집에 땐 장도 보고 가려고 했는데, 벌써 힘들어.”

번호표 뽑았어요. , 벌써 저희 번호에요!”

 

아무도 없었으니 차례는 금방이었다. 창구의 직원은 전에 전화했던 목소리보다 가늘고 어린데다 귀여운 구석까지 있는 단발의 아가씨였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식 등록이랑, 얘 점검이요.”

알겠습니다. 등록은 제가 도와드리고, 기체는 안쪽의 메인터넌스 룸으로 들어가 주세. 삽십 분 정도 소요됩니다.”

 

상냥한 미소를 띤 직원은 자리에서 서류를 찾아 내밀었다. 카이토는 살짝 고개를 숙인 후에 창구 옆으로 난 안쪽 길로 걸어 들어갔. 받은 몇 개의 서류는 신상정보와 서약서, 계약서. 같은 것이었는데. 중요한 곳에는 영어가 적혀 있어 메일보다는 읽기가 쉬웠다. 성준은 볼펜으로 서류를 작성하며 연신 웃고 있는 직원에게 살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제 기체의 전 주인에 대한 정보나 카이토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안드로이드 기체 정보 법에 어긋나서 불가능합니다. 저희도 열람이 불가능해요. 다만..저 카이토라면 몇 번 봤죠. 눈 색이 달라서 기억하기도 쉽고. 자주 정기점검일 외에도 수리하러 왔어요.”

눈은 언제부터 그랬나요?”

제가 오기 전부터 그랬으니까, 적어도 2년은 넘었겠네요. . 최초 등록일은 6년 전이네.”

“6년 전? 여기서 등록된 건가요?”

정식 등록 완료 되었습니다. 이제 업데이트는 집에서도 다운로드로 가능하세요.”

 

확인 서류를 올려둔 직원은 볼일이 끝났으면 이만. 이라는 얼굴로 미소 지었. 별수 없이 돌아선 성준은 뒤에 있던 소파에 앉아 켄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 자전거 고마웠어. 언제 돌려줄까?]

[형 편할 때 주세요. 이제 방학이라 집에만 있을 거라.]

 

켄타의 어머니는 동네에 하나뿐인 악기사를 한다고 했다. 어머니. 라고 단정 지었으니 아버지는 어떤 이유로 함께 살고 있지 않을 텐. 더 이상 묻진 않았다. 그래서 작곡이나 기타를 배운지는 중학교 때부터라 꽤 되었다고 말했다. 고작 3년일지도 모르지만, 그 나잇대의 소년에겐 긴 시간이다. 성준은 답장을 보내다 잠시 고민한 후 뒷 문장을 붙여 전송했다.

 

[다음에 집에 놀러와. 카이토가 노래하 게 보고 싶어. 넌 할 수 있지?]

 

카이토는 할 일이 없으면 CDP의 노래를 계속 들었다. 성준은 짐을 뒤져 다른 CD를 찾아 주었고, 식사 시간에 마주 앉으면 들었던 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젠간 저도. 언젠가는. 하며 짓는 미소는 쓸쓸해보였다. 설거지를 할 때 가끔씩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분명 그것 보다 더 제대로 된걸 하고 싶을 것이다. 창구의 직원이 손을 들어 성준을 부르자 카이토가 열린 문에서 걸어 나왔.

 

저기. 잠시만. 눈은 수리가 안 되는 건가요?”

아예 망가져서 안돼요. 눈은 단일 파츠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시야는 어쩔 수 없지만, 평형감각이나 조정은 최대한 높여놨습니다.”

 

따라나온 늙은 수리기사는 카이토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 따라 움직이는 파란색 눈동자와 가만히 고정된 회색 눈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침수에 의해 추가적으로 몇 개를 더 손봤으니, 이제 절대 하지 말라며 신신 당부를 한 뒤에 카이토의 등을 툭툭 쳐 가라고 손짓했다.

 

마스터,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가자.”

침수에 의한 수리비는 전액 본인 부담으로 계산됩니다. 총액 42500엔입니다. 카드로 계산하시겠어요?”

“...카드로요.”

..죄송해요. 마스터.”

아오..힘없으니까 걸어가자..”

 

재등록 비에 수리비, 점검 비까지 합친 영수증은 어마어마했다. 얼마 전에 그림을 넘기고 받은 돈을 고스란히 지불했다. 날은 여전히 무더웠다.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던 성준은 센터를 나선 후로 조용히 걸어오던 카이토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영수증의 가격에 놀란 건 카이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비싼 줄 알았으면, 침수 수리는 하지 말걸 그랬다며 침울한 표정으로 당분간 아이스크림은 먹지 않겠다고 했다.

 

도대체 이 많은 돈을 들이고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노래, 채보, 기본적인 악기연주..”

그것 참 멋지네. 들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뭐라도 해야겠어. 노래 해봐.”

에엑. 지금요? 노래 데이터가 없는데요.”

아까 지나올 때 들었던 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 여름의 향기-. 그런 가사가 있었는데.”

아하. 그 노래의 제목은 여름의 저녁하늘이에요. 기본 음설정만 된 상태라서...아니에요. 부를게요.”

 

카이토는 고개를 돌려 더위와 영수증에 지쳐 짜증이 올라오기 일보 직전인 성준을 힐끗 쳐다보더니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시작했다. 어정쩡한 첫 음으로 시작한 노래는 불안하게 이어졌다. 높은 음은 더 불안했고, 기대했던 것 보다는 별로였다. 카이토가 만들어 주었던 스파게티의 맛처럼 기본에 충실하고 단순한 노래. 카이토는 신중하게 음을 골랐다. 걷는 중이라 폐활량은 부족하고 성준은 뚫어져라 노래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첫 노래를 이런 식으로 하고 싶진 않았는데. 가사와 음을 틀리지 않는 것에도 벅찼다. 조용한 노래는 숨소리를, 흔들리지 않도록. 카이토는 부드럽게 음을 이어갔다.

 

もりよあの끝이에요.”

마지막 가사는 무슨 뜻이지? 모르는 단어네.”

스며드는 따스함이여. 그 여름의 기억이여. 입니다.”

괜찮은데, 좀 더 잘 할 수 있을지도. 같은 느낌이야. 마트는 어느 쪽이지?”

 

카이토는 왼쪽을 가리켰다. 자전거를 돌리자 익숙한 마트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트 안에서, 그리고 집에 돌아갈 때 까지 카이토는 노래에 대해 말했다. 그 노래의 원곡. 부른 가수. 가사. 그리고 자신이 신경 쓴 부분과 고쳐야 할 부분에 대해서. 그렇게 말해봤자 해줄건 없다고 성준은 잘라 말했지만 카이토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이 잔뜩 든 봉지를 손에 쥐고 노래의 마지막 가사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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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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