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간은 새로운 마음으로.


계절은 쉽사리 흘러갔다. 일본의 여름은 숨 막힐 정도로 무더웠다. 두 사람이 지내기에 제법 커다란 집이었기에 에어컨은 거실에서만 사용했다. 덕분에 성준은 여름 내내 카이토와 함께 생활했다. 열도. 열도라서 그런가. 성준이 지나가는 말로 힐끗 부채를 부치며 입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 카이토가 고개를 저었다. 열의 의미가 다르다고. 악의라고는 새털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상쾌한 어투였다. 성준은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줘서 고맙다."

"천만에요! 한국어로는 열과, 열은 같은 음이니까요."

"그런 것 까지 알 수 있는데 한국어는 못하는 거야?"

"그렇죠? 기본 언어설정사항에 한국어는 없으니까요."

"집에서까지 일본어 사용해서 불편해. 너는..아니야. 됐어."


불편해. 귀찮아. 짜증 나. 세 가지 단어는 성준이 카이토에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의 일련이었다. 그런데도 카이토는 성준이 카이토를 위해 집안의 턱을 시공으로 없애버린 것이나,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늘 손을 놓지 않는 점에서 자신이 불편하고 귀찮거나 짜증 나기만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성준의 그림은 여름이 지나도록 캔버스를 채워갔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날이면 둘이서 도록 집을 읽거나, 켄타를 불러 저녁밥을 함께 먹었다. 켄타는 미묘하게 카이토를 떠보는 듯한 질문을 했으나 카이토에겐 전혀 먹히진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과거의 사건을 이리저리 맴도는건 불쾌하다. 켄타 또한 생각이 있겠지. 성준은 밥알을 씹어넘기며 인내심의 줄을 견고히 했다.

미적지근히 여름이 지나자 외풍이 들도록 커다란 창이 있는 성준의 집에는 쌀쌀한 바람이 타고 들어왔다. 아침 겸 점심을 간단히 때운 뒤 작업실에서 한창 그림을 그리던 성준의 귀에 카이토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마스터- 택배가 도착했어요! 사인 해주세요!"

"나 작업 중이잖아! 그런 건 네가 하고 넘기면 안 되는 거야?"

"본인 확인 수령이 필요한 건데요. 저는 마스터의 대리인이 될 수 없는데-. 마스터-."

"알겠어, 알겠다고. 나가고 있으니까 소리 그만 질러."


페인트투성이인 앞치마를 벗어 던진 성준은 붓을 내려놓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작업실에 들어가 있을땐 절대 방해하지 말 것. 성준은 카이토에게 수차례 명령했다. 방해라는 것은 문을 노크 없이 열고 들어오는 것, 노크를 세 번 하고서 들어오라는 말이 없는데 들어오는것, 작업실에 소리가 들릴 만큼 노래를 부르는 것, 창문 밖에서 내다보는 것 등이 해당한다고 세세하게 항목을 붙여주기까지 했다. 발전은 없는가 보군. 한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몇 시간 동안 성준의 세계에는 그림과 그. 둘 만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시간도, 공간도 필요 없는 공감각의 바다를 유영하는 물고기를 방해하는 공기란. 예전이었다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붓을 집어 던졌을 것이다. 자신의 욕을 듣고 울먹이는 카이토 얼굴을 생각하며 성준은 택배수령사인을 대충 휘갈겼다.


"이게 뭔가요?"

"난로야. 새로 주문했어. 외풍이 들면 겨울에 추우니까."

"지금 사용하고 계시잖아요?"

"앞으로 더 추워질 테니, 저거론 어림없어. 예전 것은 이제 버려야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박스의 밀봉테이프를 휙휙 뜯어내는 성준을 바라보던 카이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너는 체내 열이 조절되니까. 이건 내가 쓸 거야. 괜히 화상 입으니까 가까이 가지 말고. 음, 작업실에 있는 거랑 바꿔야지."


작업실에서 쓰던 난로를 거실로 내놓은 성준은 새로 산 난로를 가지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아직 뜨거우니까 만지지 말라는 명령을 남긴채로. 카이토는 천천히 식어가는 낡은 난로 옆에 앉았다. 아직은 따스한 열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난로에 가져가던 손을 거두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너 이제 버려지는구나."

"사용 가치가 없는 물건은 언젠가 버림받는 거야."

"슬픈 걸까. 그건 슬픈 일인 걸까?"

카이토는 난로의 접근회로에 데이터를 건드려 보았으나 싸구려 난로에 달린 지능 회로에선 아무런 답이 없었다. 물건은 성장하거나 성숙하지 않는다. 다만 퇴색한다.

"나는..노래하기위해 만들어졌는데.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나도 버림 받는걸까?"

"그건 슬픈 일인 걸까? 마스터와 헤어지게 된다면."


언젠가의 그 날 처럼.


메모리를 숨긴다 하더라도,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부서진 물건은 흔적을 남긴다. 사라진 왼쪽의 시야. 침수된 코어. 지워진 메모리는 새하얀 영역을 남겼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없기를 바라는 빈 공간.



***



늦은 아침을 맞이하듯 창밖에선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녀석답지 않게 침묵하고 있는 게, 비가 와서 가라앉은 건가. 심드렁하게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성준은 마주앉은 카이토의 입에서 나오는 뜻밖의 말에 입술에 대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뭐라고 했어?"

"마스터, 제가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했어요."

"지금까진 내 허락받고 노래 불렀어? 부르지 말라고 해도 불렀잖아."

"그건 회사에서 제공된 기본 악보랑 온라인에 올려져 있던 데이터를 재생시킨 것 뿐이에요. 제가 말하는 건 저의 노래, 보컬로이드는 노래하는 악기라고요. 라디오가 아니에요."


켄타가 집에 놀러 오는 날이면 카이토는 자신보다 작은 켄타의 어깨며 팔에 달라붙어 노래, 노래불러요. 하고 어리광을 부렸다. 여전히 카이토에게 이기지 못하는 켄타는 USB를 연결하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카이토는 성준도 들어본 적이 있는 유명한 가요를 몇 개 불렀다. 주크박스처럼 베이스가 되는 악보를 넣으면 목소리로 재생하는 구조인가. 켄타는 보컬로이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성준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노트의 종류나 확장자에 관해서 설명했지만 무신경하게 대충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관심 외의 일에 신경을 쓸 만큼 섬세한 성격도 아닐뿐더러, 괜한 기대감을 심어주면 곤란하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난 화가야. 음악은 전혀 모른다고."

"알아요. 하지만 이건 마스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구체적으로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노래를...만들어 주세요."


성준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자기 의사를 주장하는 거야? 자기 몸 하나 제대로 못 추스리고 눈도 못 쳐다보던 카이토가? 안드로이드는 주인에게 절대복종. 아무리 관심 밖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는 요즘 세상에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사용자에게 요구가까지 하는 안드로이드라니.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던지, 산책을 나가자는 부탁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카이토의 회색빛 눈동자는 올곧게 성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이토는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노래를. 하고 남은 여운을 읊조렸다.


"지금도 부르고 있잖아. 왜 내가 만들어야 하는 건데?"

"마스터의, 저만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마스터는 예술적 재능이 있으니까 하실 수 있어요!"

"해본 적이 없다는데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내 잠재성을 네가 평가하지 마!"

"그럼, 마스터는 제대로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왜 저를 기동시키고 있으신 건가요?"

"그걸 네가 말하면 안 되지...임마..."


억지스러운 부탁이야. 나는 들어줄 수 없어. 성준은 딱 잘라 이야기하려다 카이토의 질문에 멈춰 서고 말았다.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오히려 부담스럽고 방해되는 카이토를 6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하루도 종료하지 않은 채 데리고 있는 이유. 머리가 복잡했다. 단지 카이토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상만으로 이어지기에는 부족했다. 카이토와 있을 때면 느껴지던 미묘하고 이상한 대화들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구석의 감정을 이끌어 낸다. 그림을 그리는 데에 도움이 되니까. 자신이 생각해도 구차한 변명이었다. 성준은 의자에서 일어난 카이토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 네가 여기 있어서 기동시켰고, 어찌 됐든 소유자가 된 이상 관리할 의무가 있어."

"그냥 있어서라니...마스터는 지나가는 물건 전부에게 관심을 가지고 책임을 가지세요? 책임을 가지고 있으시다면 더욱 노래를 만들어주세요. 보컬로이드의 사용목적은 연주라고요."

"말도 안 되는 억지 그만 부려. 노래는 듣기만 하고 만들어 본 적 없다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 아냐?"

"마스터는 멍청이에요!!! 조카신발!!!"

"좆까 씨발이겠지..멍청아.."


예전에 한국 친구와 통화하던 걸 엿들은 카이토가 이상하게 번역하고 물어보길래, 상대방에게 자신이 화가 났음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라 말해주었는데 역시 잘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카이토는 눈을 흘기더니 쿵쿵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성준은 허탈하게 웃었다.


나 지금 저 녀석이랑 싸운 거야? 멍청하게 웃기만 하는 카이토랑?



***



카이토의 고집은 예상보다 대단했다. 먹지도, 화장실을 갈 필요도 없었으니 전기만 충전되는 방에서 삼 일째 꼼짝을 하지 않았다. 잠근 문을 두드려보려다 포기하고 돌아선 게 몇 번째였다. 자존심이 있지. 잘못 한 것도 없는데. 내가 주인인데. 작업실에서 사흘동안 씨근거리던 성준은 결국 켄타에게 구조요청을 했다. 켄타가 다니는 학교근처 카페까지 나간 성준은 오래간만에 본 켄타에게 푸념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이토 형이랑 싸웠다고요? 싸웠..다고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더니, 기분 상했는지 방에서 나오질 않아. 원래 안드로이드라는 게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거야? 주인한테?"


한국이나, 다른 외국에서 만났던 안드로이드는 인형처럼 차갑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기계적인 과제를 수행했어. 사무 일이 없어서 지겹다는 사무용 안드로이드나, 가사 일이 없으니 만들어달라는 안드로이드는 없잖아. 어째서 카이토는. 심지어 나한테 욕을 했어. 못된건 빨리 배운다더니.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성준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던 켄타가 마시고 있던 주스 잔을 내려놓고 찬찬히 입을 열었다.


"저도 놀랐어요. 하지만, 카이토형처럼 초기 버전의 안드로이드에는 임프린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들었는데..그게 작용한 게 아닐까요?"

"아..그. 애정과 유대가 어쩌 고하는 그거 말하는거야? 그럼 나랑 애정..아니, 친해지고 싶어서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거야?"

"아마 어떤 촉발요인이 카이토형에게 있었고, 그게 어쩌면 임프린팅 설정을 건드린 거겠죠."


귀찮은 설정이네. 애완동물도 아닌데 왜 주인이랑 애정과 유대를 필요로 하는거지? 성준은 입을 삐죽이며 앓는 소리를 했다. 정말, 정말 귀찮아. 괜히 신경 쓰인다고. 세 살 먹은 아이처럼 떼쓴다고 가능한 일이면 처음부터 노랜지 뭔지 만들어 줬겠지. 빈말로도 카이토가 부르는 노래는 멋지다거나, 잘 부른다고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노래를 고집하는 카이토의 태도에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기분이었다.


"망할. 내가 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잖아. 노래라는게....넌 이전 주인이 썼던 카이토의 노래를 들어본 적 있어?"

"아사노 씨가 사용했던 건 카이토라 형이 부르는건 본 적이 없어요."

"그래, 과거의 주인도 주지 않았잖아. 근데 나한테 갑자기 왜그러...응? 잠깐. 전 주인은 카이토를 사용했다고 했잖아. 근데 노래 부르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네. 카이토 형이 자기도 노래한다고는 말 했지만, 직접 본 적은 없어서."

"그게 아니라. 카이토랑 카이토형이랑 동일인물이 아니야?"

"아...아사노씨는 보컬로이드를 2대 소유하고 계셨어요."

"보컬로이드를 2대나 가질 수 있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켄타를 바라보자 켄타도 놀란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몇 가지 서류심사를 통과하면 2대의 기기를 가질 수 있지만, 2배 이상으로 발생하는 부대비용과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 때문에 굳이 똑같은 기기를 2개나 들이는 사람은 희소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던 켄타는 들어본 적 없냐고 질문했다.


"카이토는 옛날이야기 하지 않아. 물어본 적도 없고. 그럼 같은 카이토를 하나 더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음... 동일한 기기냐는 질문이시면 애매하네요. 카이토형은 V1버전이고, 카이토는 V3버전 이였어요. 모르시겠죠. 합성 엔진이 달라요. 형은 초기의 구버전이고, 카이토는 새로 나온 버전."


한때 카이토의 눈을 수리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고 다닐 때 읽었던 글이 떠올랐다. 안드로이드의 안구 한 쪽만 정확하게 손상되기는 매우 드문 일이라, 부분 수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고의에 의한 폭행, 혹은 자해의 확률이 가장 높다는 글이었다. 당시에는 설마, 하고 웃어 넘겼지만. 머릿속에 몇 달 전 카이토를 등록하며 했던 대화가 스치고 지나갔다.


'카이토 눈은 언제부터 그랬나요?'

'글쎄요. 제가 오기 전부터 그랬으니까..적어도 2년은 넘었어요.'


성준은 서둘러 겉옷을 챙겼다. 집으로 돌아가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든, 두드리든. 카이토와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문자로 알려달라는 켄타의 배웅을 뒤로 한 채, 빠르게 카페의 문을 열고 비 내리는 거리 사이를 헤집고 걸어갔다. 카이토를 바라보면 느껴졌던 막연한 감정은 부서지고, 새로운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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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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