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것'에 해당되는 글 44건

  1. 2019.01.03 HAPPY NEW YEAR!
  2. 2018.12.09 카이토 10주년 앤솔로지 수록 [당신과 다시]
  3. 2017.12.27 알지 못했던 크리스마스에
  4. 2017.08.26 리본의 기분 上
  5. 2017.08.16 blue rainbow
  6. 2017.05.04 09.사랑과 종언
  7. 2017.02.06 atelier noir : 검은 아틀리에
  8. 2016.09.18 RESTART
  9. 2016.05.21 08.거울과 여름 2
  10. 2016.03.18 07. 바다의 끝

HAPPY NEW YEAR!


커다란 갤러리창 밖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와. 눈이다. 갤러리의 몇몇 사람들의 작은 탄성이 들렸다. 눈길을 창 밖으로 돌렸다. 며칠 전 인사를 처음 나눈 미술상을 한다던 K가 다가와 마치 우리 사이는 몇년은 알고 있었던 동반자였다는 마냥 어깨에 손을 올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일본에는 눈이 오지 않습니까? 가본 적은 없지만, 동양은 신비한 곳이죠. 오리엔탈리즘. 그는 숨쉬듯 서구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무지하게 내뱉고 있었다. 성준은 창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작지만 선명한 눈꽃이 연말 분위기로 어딘가 들떠보이는 뉴욕 시내를 꾸미는 부속물 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저녁8시가 넘은 시간, 거리는 여러사람의 목소리가 한번에 뭉쳐 웅성이는 배경음악이 된다. K는 음. 하고 성준의 흥미를 끌어보려 추임새를 붙였다.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 K의 멱살을 잡게 되거나, 이 장소에서는 한번도 울리지 않았던 욕지거리가 나올것이다. 미술상이건, 뉴욕의 신진 작가들을 모은 협회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오랜 인연이었던 고등학교 선배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다. 전화로 이어진 목소리에선 자신의 생계가 걸린 문제라는 간절함이 담겨있었고, 어째서 자신의 생계를 고등학교 후배에 불과했던 나에게 걸고 있는지에 대한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전화를 받는 옆자리엔 카이토가 스케치북에 말도안되게 엉성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성준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며, 왼손으로 중심선을 다시 그어주었다. 무방비한 성준의 웃음에 선배는 울먹이며 고맙다는 결론을 혼자서 짓고 전시회 일정을 빠르게 메일로 보내왔다. 자신 답지 못한 대처에 대한 벌이라고. 여기기로 한다.


"눈이 오면 비행기가 지연되나요?"

"하하. 운에 맡겨야죠. 이정도로는 지연되지 않을겁니다."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는데. 새해를 뉴욕에서 맡게 될 줄은요."

"하하..2주정도 연장이였죠. 연말인데다, 요즘엔 부드러운 색감이 인기라 티켓 판매량이 좋아서. 준의 덕입니다. 뉴욕의 해피 뉴 이어! 는 아름답죠. 별처럼 빛나는 전광판들, 환호에 맞춰 키스하는 연인들.."

"새해는 매년 오는건데 뭘 새삼스럽게."


며칠 뒤면 아무렇지도 않게 똑같은 일상을 반복할거면서 어째서 이렇게 들뜬 분위기인지. 어떻게든 자신들의 내일은, 내년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희망을 품고선. 경멸에 가까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전 이후에 일정이 있어서 이만. 성준은 K의 손을 떨궈내며 해피 뉴 이어. 짧은 인사를 남기고 갤러리를 나섰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길거리를 불쾌하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택시스탑으로 걸어가 존 F. 케네디 공항을 외쳤다. 택시 운전자 석의 시계가 9시를 가리킨다. 휴대전화로 비행기 도착정보를 확인하자 택시기사까지 10년만에 만난 친구를 만난듯이 하하. 누굴 맞이하러 가나 보군요. 하지만 오늘은 차가 밀릴거에요. 뉴욕의 사람들은 해피 뉴 이어를 모두 함께 외치고 싶어하죠. 하고 킬킬 웃어댔다. 성준은 입술을 씹으며 그런가요. 하고 짧게 대답한 후 창밖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일본을 떠나온지 4주. 카이토에게 약속한 10일보다 한참 지연된 참이다. 여기서 발목을 잡힐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매일 저녁 전화기를 붙들고 언제오세요? 하는 카이토를 달래는 것도 지쳐가고 있었다. 카이토를 혼자 비행기에 태워 오리라는 생각은 큰 모험이었고, 성준은 자신이 크게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란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시회는 아마 내년까지 이어지겠지. 이 곳에서 새롭게 제안받은 프로젝트도 몇가지 있었다. 구미에 당기는 작업을 두어개 골라 둔 참이었다. 중요 인사들과 동업의 악수를 할때마다 카이토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마스터가 보고싶어요. 하는 무엇보다 간절한 목소리를 떨쳐내기 힘들었다.


[도착 했어?]

[인도장에 가만히 있어. 누가 말을 걸면 수령용지를 보여줘. 아무 말도 하지말고.]


세간에서 카이토는 어엿한 물건이었으므로, 상자속에 넣어 해외배송을 보내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카이토가 한번 더 꺼졌을때 그가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시험해볼 수 없었다. 작업을 하는 자신의 옆에서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졸리다며 두가지 색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작은 불안이 스친다. 사람이 하듯 눈을 비비는 시늉을 하며 벽에 다가가 기댄 얼굴은 어엿한 피곤이 묻어있었다. 성준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졸리다니. 네가 그런게 어딨어. 충전할때 된거 아냐? 제때제때 해야지"

"그럴리가요. 어제.."


눈이 닫히고 잠들듯 카이토는 고개를 떨구었다. 밤동안 충전을 해두었던게 벌써 다 되었나. 성준은 옅은 한숨을 쉬며 상자에서 충전단자를 꺼내 콘센트에 연결했다. 요즘엔 탈 부착식 배터리형에 많이 나온다는 모양이지만. 혹은 배터리를 새롭게 개발된 플라즈마형으로 교환할 수 있다지만. 카이토는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기종이었다. 카이토가 오랜 시간의 비행을 버틸수 있을까. 예의 하나는 괜찮은 녀석이니 사람들과의 대화는 괜찮겠지만. 불안이 실체화된 물음으로 머리를 콕콕 찌른다. 유명한 악기연주자들은 자신의 악기를 위해 비행기좌석을 하나 더 구매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했다. 항공사의 직원들은 오히려 비지니스 석을 구매한것에 감사를 표하며, 주의사항을 물어왔다. 성준은 휴대용 충전기와 아이스크림이 포함된 기내식을 부탁했다. 


"안녕하세요. 김성준 이라고 하는데. 오늘 제 수하물 하나가 도착한걸로 알고 있어서."

"네, 안녕하세요. 네네, 저희가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주신 추가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슬립모드 인가요? 꺼졌어요. 제가 안드로이드는 잘 몰라서. 아무튼 저희는 A인도장에 있습니다."

"네? 꺼졌다구요? 이런..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금방 갈께요."


택시에서 내린 성준은 항공사의 번호로 빠르게 연락하곤, 인도장으로 뛰어갔다. 열시간이 넘는 비행은 사람에게도 고단한 여정이었다. 하루치 배터리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카이토에겐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카이토를 물건 취급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은 억지였다. 


"헤이. 여기에요. 하하. 뛰어오시네. 김성준 작가님? 저도 팬이에요."

"하아. 아닙니다. 무리한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이토는.."

"귀여운 안드로이드를 가지고 계시네요. 기내식을 정말 좋아했답니다. 대기모드인지, 슬립모드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깨를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아서 제가 업어왔네요. 재밌었습니다."


덩치가 커다란 부기장. 마크. 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등을 돌리자 카이토가 업혀 있었다. 겨울이라 추우니 머플러랑, 두꺼운 코트를 입고 오라는 성준의 말을 솔직하게 지켜 커다란 후드가 달린 코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색을 숨기기에 좋아보여 예전에 사두었던 것이다. 


"폐를 끼쳤네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지금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전시회를 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그렇네요. 시간이 되면 보러오세요. 초대권입니다. 빠른 입찰권도 넣어뒀어요."

"하하하. 시간이 나면 이라뇨. 여기서 머무는 동안 꼭 가겠습니다. 그럼, 해피 뉴 이어."

"어머나. 감사합니다! 인사를 못해서 아쉽네요. 카이토, 즐거운 뉴욕 여행이 되길."


부기장과 밝은 웃음을 뿌리며 승무원들이 자리를 떠나자, 성준은 가방에서 보조배터리를 꺼냈다. 후드를 벗기고 은은하게 푸른 빛이 감도는 단자를 연결하고 등을 커다랗게 쓰다듬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손바닥으로 몇번 때리며 소리쳤다. 여행객이 대부분 떠난 공항은 목소리가 왕왕 울리다 차가운 공기에 먼 곳에서 순찰을 하는 직원의 귀까지는 닿지 못했다.


"카이토. 야. 카이토!"

"으으..졸려요. 어라. 마스터. 비행기는.."

"하아..벌써 내린지 오래야. 승무원이랑 친해졌어?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던데."

"세실님. 아이스크림을 주셨어요. 엄청 달고 맛있었는데. 하늘 위에서 먹어서 그럴지도요."

"마음에 들었으면 됐어. 일어나. 호텔에 가자."


여기가 뉴욕이군요. 카이토는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창 밖이 평소보다 흐리게 보인다. 눈의 탓이겠거니.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눈이 오고 있어. 성준이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일본은 이미 새해려나. 뉴욕은. 손목시계를 바라보자 카이토가 눈보다 빨리 10시 35분이요. 하고 대답했다. 충전기와 이어진 선을 코트 아래로 빼서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멍하니 밖을 응시하는 카이토의 손을 잡고 다시 택시를 잡아 탔다. 목적지는 장기숙박하고 있던 유명 호텔이었다. 연말인 탓에, 그 곳의 라운지도 사람이 빼곡하리라 성준은 직감했다. 택시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카이토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비행의 소감에 대해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늘의 위는 정말로 아름다웠다고. 구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더라며. 성준은 자신의 첫 비행을 떠올렸다. 의지와 상관없이 장기가 울렁거리는 불쾌한 경험이었다.


"제가 비행기를 탈 줄은 몰랐어요. 뉴욕에 올 줄도. 여긴 사람이 정말 많은 도시네요."

"다들 그렇지 뭐. 나도 새해를 여기서 맞을 줄은 몰랐어. 전시회 일정이 갑자기 길어져서. 10일이면 돌아간다고 했는데 약속을 못지켰네."

"괜찮아요. 이것보다 더 길어질거라고 예상했어요. 저에게 선택권은 많지 않으니까요. 멋진 곳이네요. 뭐든지 빛나고 있어요."

"마음에 들어? 호텔방이 커서 지내는데 불편하지 않을거야. 매일 청소를 해주러 올거고."

"그럼 전 뭘 하면 될까요? 여기까지 부르신 이유가 있을텐데. 승무원 세실님이 그랬어요. 마스터가 절 아주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안드로이드를 태워보는건 처음이라고요. 뉴욕에서 뭘 할거니. 라고 물어보셨는데..마스터를 보러 간다는 말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일본어로 이어지는 대화에 택시기사가 흥미로운듯 눈을 굴렸다. 성준은 노골적으로 시선을 무시하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존재는 존재 외에 역할이 또 필요한건가? 함의가 담긴 대답을 알아듣지 못한 듯 카이토는 예의 어리숙한 목소리를 웅얼거렸다. 눈발이 천천히 무게를 더해가며 또렷하게 둥근 모양을 만들어낸다. 


"내려. 다 왔어."

"네에. 감사합니다. 아차. 영어.."

"됐어. Have a nice day. Happy new year."

"마스터는 영어도 능숙하시네요. 일본어보단."

"그럼. 유학도 줄곧 이쪽해서 했으니까. 이미 사람들이 바글거리는군."


성준은 코트 뒤에 달린 커다란 후드를 카이토에게 씌우고 호텔로비로 들어갔다. 스위트룸을 몇달 전부터 예약해두고 멋진 한해의 시작을 기약하는 사람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배회하고 있었다. 1층에 만들어진 분위기 좋은 바에는 구석진 자리까지 모두 가득 차 있었다. 장면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카이토를 이끌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호텔..비싸보여요."

"흠..내 돈으로 묵고 있는거 아냐. 넌 내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잘 모를거야. "

"그런가요. 하지만 저도 마스터보다 멋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본 적 없어요."

"네 비교 풀이 너무 적은거아냐? 내일은 쉬기로 했으니까, 좀 쉬어야지. 너도."

"피곤하지 않아요. 충전하고 있어서 그럴지도..비행기 안에서는 많이 피곤했어요. 그럼 내일은 함께 있는건가요?"

"네가 얌전히 있겠다는 약속만 하면 갤러리에도...아니. 정말 얌전히 있어야하니까. 벌써 안기지마. 이러면 못데려가는 거라고. 알아?"


마침 엘리베이터의 벨이 울리더니 호텔방이 있는 12층에 도착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허리에 안긴 카이토와 한 덩어리처럼 호텔방으로 걸어갔다. 떨어져. 다른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매몰차게 손을 가져갈 순 없었다. 카이토의 차가운 손은 느껴질 정도로 떨리고 있었고, 허리를 잡은 힘은 평소에 느끼던것의 몇 배 였다. 엉거주춤한 모양으로 호텔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가 두개 놓인 방이었다. 며칠전 까지 묵던 1인용 방을 바꿔달라는 부탁또한 주최측은 흔쾌히 들어주었다. 마음대로 전시회 일정을 늘렸으니, 이정도는 감안하겠다는 눈치였다. 도착했다는 성준의 말에도 카이토는 허리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등에 고개를 파묻은걸 보면 이미 울고있겠지. 예상하기 쉬운 패턴이었다.


"카이토. 그만해. 나 좀 봐."

"마스터. 보고싶었어요. 다시 못보는줄 알고. 절 버리신줄 알았어요. 제가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돌아오시지 않을거라고. 제가 잘할게요. 열심히 할게요. 마스터가 시키는건."

"뭔소리야..네 필요는 존재로 충분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난 너 필요없어. 하지만 필요할 뿐이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널 여기까지 왜 데려왔느냐에 대한 대답이야. 나도 네가 없으면 불안해. 뭔가 놔두고 온것처럼. 당연하겠지. 널 놔두고 왔으니까. 이 멋진 풍경을 너한테도 보여주고 싶었어."


HAPPY NEW YEAR! 


여기저기서 카운팅을 하는 하나된 목소리가 도시에 울려퍼졌다. 미리 쏘아올린 형형색색의 폭죽이 새해 인사를 건네는 전광판 위를 솟구쳐 올라간다. 그러니까 제발. 성준은 카이토의 손을 잡아 커다란 창으로 향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서로를 껴안거나 키스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러 노래가 흘러나오고, 클라이막스로 향해가는 교향곡 처럼 분위기는 끝을 향해 고조된다. One. 하고 귀가 찢어질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울려퍼졌다. 이어 각각의 새해 인사가 여러나라의 언어로 확성기에서 흘러나왔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다 성준은 그제서야 카이토가 울음을 그쳤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올해는 카이토의 눈물을 좀 덜 보기를. 새해 소원을 그렇게 빌기로 한다.


"여기선 이게 새해 인사야. 올해도 잘 부탁해. 카이토." 


올해의 첫 입맞춤은 생각지도 못한 장소였다. 매일 똑같은 하루라고 지루해하려고만 하면, 삶은 이런 선물을 가져다 주는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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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카이토 10주년 앤솔로지 <Rhapsody in Blue> 수록 

[당신과 다시] 

재판 계획이 없으니 웹수록 합니다.



당신과 다시.

 

 

길을 걷는 소녀의 긴 머리칼 사이로 찬 바람이 불어왔다. 두 해를 입어 보풀이 일어난 교복 카디건을 여민 목덜미 사이로 주변 강 냄새가 나는 차가운 물기운이 스쳤다. 가벼운 춘추복에서 동복으로 갈아입어도 되는 시기가 언제부터였던지, 교문으로 나오는 길에 세워진 안내 게시판에 적혀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흘겨본 턱에 기억이 제대로 나질 않았다. 내일 학교 가면 제대로 봐 두어야지. 알싸하게 코를 스치는 찬 기운에 소녀는 빨개진 코를 훌쩍였다. 재채기가 나려는지 코가 간질거렸다. 소녀는 콧잔등을 부비며 스치는 물비린내를 킁킁거린다.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소녀는 생각했다. 목요일은 지루하다. 금요일이라는 짐이 있으니까. 월요일보다 금요일이 어쩌면 더 잔인한 날일지도 모른다. 소녀의 어깨에 멘 책가방 속엔 교과서 대신 시내에 있는 서점에서 산 피아노 악보집이 들어있었다. 전철 정기권을 사고 나면 빠듯한 용돈을 모아 샀다. 소녀는 시내에 나갈 때면 악기사에 들러 공연히 기타를 퉁겨보고, 전자건반을 두드려보았다. 친절한 악기사의 점원이 다가올 때면 슬쩍 기타를 내려놓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가격표의 숫자는 열일곱짜리 여자아이가 가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어른이 되면 저만큼의 돈을 쓸 수 있을까. 학교에는 종종 음악학원을 겸하여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재능이라든지, 부모님의 기대라든지. 어느 쪽이든 기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아들이. 소녀의 부모님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벽을 만난 듯 멈추고. 소녀의 발걸음도 함께 멈추었다. 익숙한 집 문 앞에 익숙하지 않은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매우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꿈처럼. 소녀는 카디건 소매로 눈을 비볐다.

 

"실례지만, 여긴 저희 집인데. 누굴 찾아 오셨어요?"

 

소녀는 장소와 시간에서 한 뼘쯤 붕 뜬 느낌의 푸른 머리칼의 남자를 떠보듯 질문했다. 집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소녀의 부모님. 혹은 소녀에겐 존재하지 않는 형제의 이름을 댈지도 모른다. 소녀는 의심하는 법을 알았다. 학급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와무라, 하나코. 아무튼 그런 느낌의 이름을 가진 활발한 아이가 소녀를 바라보며 '카요쨩은 귀엽지 않아.'라고 말하며 볼을 부풀리며 귀여운 말투로 이야기 했었다. 여자애는 꼭 귀여워야 하는 거야? 소녀가 퉁명스럽게 책상에 턱을 괴고 대답하자 대답마저 귀엽지 않다며 하나코는 볼멘 목소리였다.

 

"기다렸어요. 마스터."

". 누구시라고요?"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눈에 봐도 톡 튀는 새파란 눈의 남자가 몸을 쪼그리고 앉아있던 문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반갑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혼자서, 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마주친 듯이 말이다. 전혀 모르는 얼굴인데도. 파란 물감을 짜낸 듯한 머리칼과 눈은 한 번 보면 잊히려야 잊힐 수 없는 모습.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전 당신이 누군지 모르는데. 그리고 제 이름은."

"그거야 당연하죠. 전 당신의 연인이랍니다. 지금은 20XX년이니까. 십 년 정도 뒤에요."

"하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믿기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왔어요."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는.

얼굴이 멀쩡하다고 해서 사기꾼이나 정신병자가 아니란 법은 없다. 요즘은 멀쩡한 사람이 더 이상하다고 했다. 소녀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외투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전화의 폴더를 열었다. 집 앞에 이상한 사람이 있어요. 머리가 파란색이에요. 생긴 건 평범한데-. 휴대전화의 버튼이 1을 가리키자 남자는 수상한 기운을 알아채고선 소녀에게 다가와 다급하게 호소했다. 남자는 소녀의 손목을 잡으려다 흠칫 물러섰다. 소녀는 찰나의 기시감에 작은 소름이 돋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제 이야기를 한 번만 들어주세요, 전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이야기? 처음 보는 사람한테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게 제일 이상한데요."

"마스터는 어릴 때랑 똑같네요. 변한 것이라고는 머리길이 정도 밖에 없어요. 긴 머리도 어울려요."

 

남자의 파란 눈동자는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소녀를 향해 있었지만, 눈빛의 상대는 소녀가 아니었다. 의미 모를 말만 늘어놓는 남자를 소녀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당신 누구야."

"마스터가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숭어, 그리고 지금쯤이라면 악보집도 가지고 있을 텐데. 아직아닌가요?"

 

가방 속에.

 

소녀는 작게 속삭였다. 몇 년 전 우연히, 무심코 들었던. 귀에서 잊히지 않고 맴도는 연주곡. 소녀의 주위는 소녀의 단조로운 일상이나 행동처럼 조용했고, 소녀는 자신의 은밀한 선호를 다른 이에게 말할 정도로 타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여고생이 숭어라니, 연예인이나 좋아할 법한 나이인데 말이야. 마음속에서 같은 반의 하나코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딘가 음울한 카요와 달리, 하나코는 구김살 없이 귀여운 여자아이이다. 뜻밖의 이름에 소녀는 가방에서 커다란 악보집을 꺼냈다. 남자는 구원이라도 얻은 듯 밝은 얼굴로 악보집과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행이에요. 이번엔 제대로 만들었구나."

 

남자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다. 둘의 대화는 어긋났다. 시점이든, 초점이든. 어느 것이든 맞지 않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소녀는 자신을 마치 보석함에서 꺼낸 오래된 반지처럼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발을 향해 살짝 발길질했다.

 

"답답하니까.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을 거면 가버려."

"배고프지 않으세요? 저녁 함께 먹어요. 어제처럼."

 

소녀의 질문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그러나 의미 모를 상냥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소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남자의 '어제처럼' 라는 말에는 상당한 의미가 담겨 있는 듯 남자는 힘을 주어 그 단어를 강조했다. 소녀에게도 다른 이와 함께 하는 저녁은 오랜만이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괜찮았다.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새파란 머리의 초면인, 10년 후의 애인이라 우기는 남자라도 저녁의 일행으로 환영이었다.

 

"."

 

25번째 기억소자. 중간 저장 완료.

---현재의 마스터에 대한 설명-----

카이토는 머릿속 체크리스트에 있던 목록에 선을 그었다. 믿음의 크기는 현실감이었다. 카이토는 꿈을 꾸듯 몽롱한 기분으로 문을 여는 소녀의 뒤를 따랐다. 뚜벅이는 작은 구두의 발걸음이 돌계단을 경쾌하게 울렸다. 마스터의 좁은 연립아파트를 올라가는 계단은 발소리로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소재의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었다. 무겁고 길게 퍼지는 발소리는 남자. 얇고 넓은 소리는 여자의 하이힐. 카이토는 카요를 기다리며 발걸음의 개수를 셌다. 연립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일을 했다. 그래도 부족한 생활이었다. 마스터는 4시간을 자고 남은 시간에는 곡을 썼다. 마스터의 노래는 좁은 방에서 몰래 울려 퍼지기엔 아까운 곡이었다. 카이토가 부르기에도 무척이나 아까운 곡이었다.

 

 

***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어. 부모님이랑 따로 살거든."

 

마스터의 부모님은 그녀가 15살이 되던 해에 나란히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녀를 위해 남겨진 유산은 많지 않았다. 딸을 두고 먼저 죽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대학을 포기하고 찾은 단순한 사무직으로 얼마 안 되는 돈을 벌었다. 그녀가 고가였던 신디사이저를 사고, 꿈에도 그리던 보컬로이드를 마련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쁜 얼굴이었던지. 그것은 카이토가 기억하는 마스터의 가장 처음의 얼굴이었다. 열 두 번째. 열 세 번째. 스무 번째. 인공지능의 이름이 어리석도록 카이토는 퇴색된 숫자를 세었다. 몇 번이고 다시 만난 당신. 새삼스럽게도 늘 처음이라는 표정이다. 앳된 얼굴의 마스터가 새하얀 손가락으로 구식 도어락의 숫자를 눌렀다. 카이토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입 모양으로 말했다.

 

'2-5-0-8.'

 

마스터는 늘 그 숫자를 썼다. 기억력이 좋지 못해서. 마스터는 유달리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단정한 외모와는 달리 덜렁거리는 성격이었다. 숫자의 나열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마스터는 그 네 자리가 어쩐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기억에도 생명이 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기억은 스스로 소멸하고 만다. 그녀를 파먹고 들어간 병은 마스터에게 망각할 기억을 선택할 권리를 박탈했다. 마스터의 기억은 자멸한다. 그녀가 그녀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기억마저 숨을 멈추었다. 카이토는 그것이 자신에게 '리셋'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삶이 주어지지 않는 사람에게 그것은 '죽음'과 동음이의어였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그녀의 삶은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스터는 겨우 서른 살 생일을 다섯 달 앞두고 있었다. 마스터가 잊은 마스터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하나코는 마스터의 손을 잡고 울었다. 비록 그녀가 하나코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코는 마스터를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카이토는 하나코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잡은 손을 놓지 않겠다고 멩세했다.

 

"부엌은 여기. 앉아서 기다려 줄래요?"

"아뇨. 제가 해드릴게요."

"손님이잖아요.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지만, 손님은 움직이는 게 아니래요."

 

소녀는 모자가 달린 교복 외투를 벗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제저녁에 남겨두었던 볶음 반찬이 랩에 씌워져 있었다. 손님이 오면 대접을 해야 하는데-. 물론 그는 초대된 손님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대접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소녀는 밥을 잘 챙겨 먹는 편이 아니었다. 하굣길에 마음에 드는 가게를 찾아가 때우고 오는 일이 많았고, 집에서 먹는 날이면 간단한 인스턴트 음식이었다. 도시락은 늘 지하철역 앞의 편의점에서 구매했다. 만족할 만한 식생활은 아니었으나, 편한 것이 우선이었다. 소녀는 뚫어지게 냉장고 선반을 찬찬히 바라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먹다 남은 주스. 이웃에게서 받은 소녀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장아찌 절임. 소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냉장고 속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가 할게요. 마스터는 앉아 계세요. 씻고 오셔도 되고요. 학교 다녀오셨잖아요? 전 손님이 아니라, 그래요. 제 이름은 카이토랍니다. 성은 없어요."

"평범한 이름이네요."

"그렇죠? 마스터는 카요. 성은 타니무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문패에 적혀있었어요. 이름은 방문 앞의 장식에서. 카이토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웃으며 지어냈다.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어제 먹다 남은 반찬그릇을 꺼냈다. 의심의 눈초리는 지울 수 없었지만, 달리 반박할 말 또한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할게요."

난 옷 갈아입고 올게요!”

 

어느새 냉장고 문을 잡고 선 카이토가 옆에서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가까운 거리에 소녀는 몰래 숨을 삼켰다.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소녀는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가슴을 느끼며 옷을 벗었다. 어째서인지 스타킹을 벗고 치마단추를 푸는 손이 부끄러웠다. 누군가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건 착각일 테지만. 착각일 테지만, 착각. 눈을 돌리자 분명 닫았던 문이 살포시 열려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들자 이미 당황한 표정의 카이토와 번뜩 눈을 마주쳤다.

 

", , 그게."

"꺄아악!!! 어딜 보는거에요!!!!"

", 죄송합니다!"

"역시 변태였어!!! 경찰에 신고할 거야!!!!"

 

풀린 치마단추를 손으로 잡아 올리며 소녀는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침대에 놓여있던 쿠션을 방문을 향해 던지자 문이 빠르게 닫혔다. 소녀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도 변태아냐, 변태. 하고 한참이나 씩씩 댔다. 얼마 뒤에 저녁준비가 다 되었다며 빼꼼히 문을 연 카이토는 난처하게 말을 흐렸다.

 

"마스터, 죄송해요. 노크했는데."

"안 들렸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이상한 마스터는 뭐예요. 이름을 알면 이름으로 불러요."

"불러, 본적이 없어서. 마스터는 마스터니까."

 

뭐야. 정말. 소녀는 고개를 돌리고 혀를 찼다.

 

"혹시 콘센트를 쓸 수 있을까요?"

"뭐어. 휴대폰이라도 충전하게요?"

"아뇨. 저를 충전해야 해서요."

 

일련의 일에도 미동 없던 소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이토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살짝 들어 올려 허리 부분을 만지작 거리더니 진공청소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코드뭉치를 빼냈다.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이토의 등과 연결된 코드의 끝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제가 왜 당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지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저는 물건이랍니다."

"거짓말.“

그러니 잊지 말아주세요.”

 

58번째 기억소자. 중간 저장완료.

 

어떤 세계의 하늘에서는 유성이 마구 떨어졌다. 카요는 겨울이 되면 기차를 타고 깊이 언 호수의 중심에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구경했다. 숙박은 하지 않고 새벽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언젠가 카이토를 데리고 간 적도 있었다. 카이토는 두꺼운 담요를 이불처럼 깔고 누워 별자리의 이름을 말했다. 겨울의 별자리. 오리온. 시리우스. 프로키온. 리겔. 사전을 읽듯 거침없이 말하는 카이토의 입을 두툼한 벙어리장갑으로 막은 카요가 하늘을 가리켰다.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하자. 이름으로 말 할 수 없을 만큼 별들은 아름다웠다. 밤하늘처럼 검은 마스터의 눈이 반짝였다.

 

 

***

 

 

 

이상한 동거는 소녀의 예상외로 평범하게 이어졌다. 카이토는 놀라울 만큼 소녀의 취향을 꿰뚫고 있었다. 소녀가 아침에는 밥 대신 바나나 우유를 먹는다는 것도. 샤워하고 나면 수건이 세 장이 필요하다는 것도. 말하기 미묘한 습관까지 알고 있었다. 안다고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카이토의 행동을 보고 있자면 소녀를 배려하는 것이 아주 익숙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거리를 두는 것이, 그것마저 소녀를 배려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할 수밖에 없도록. 그것은 아주 기묘하고 새로운 감정의 탄생이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겉모습으로 치자면 소녀보다 여 댓 살은 많아 보이는 모습의 청년이 소녀에게 깍듯이 주인님, 주인님. 하며 따라붙는 모습은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썩 기분 나쁜 일이 아니란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었다. 소녀는 학교에서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도 혼자가 아니었다. 소녀는 몰래 배어나오는 웃음을 숨겼다.

 

"마스터ㅡ, 오늘 학교는 어땠어요?"

"똑같았지. ."

"흐음. 이상한 점은 없었구요?"

"네가 제일 이상해."

 

소녀는 머플러를 벗어 카이토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빤히 쳐다보았다.

 

"또 저번 처럼ㅡ, 변태처럼 머플러 냄새 맡을 거야?"

". 그건 정말. 무의식적인. 마스터 향기가 좋아서!"

"그걸 바로 변태라고 하는 거라고."

 

잊고 싶지 않은걸요. 카이토는 아련한 얼굴로 말했다. 카이토는 종종 그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확인하는 듯이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소녀는 미소의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질문의 대답을 알아버리면, 카이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소녀와 카이토는 간단히 저녁을 먹고, 사소한 이야기를 했다. 친구에게도 하지 않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

 

"피아노 말이야. 처음 만든 사람은 손이 아주 컸을 거야."

"아아. 확실히. 마스터는 손이 작은 편이죠."

"그래서 포기했어. 피아노는 비싸기도 하고."

"기타는 손이 작아도 재밌으니까요. 가격도 싼 편이에요."

 

재미, 라던지. 그런 것 때문에 하는 건 아니지만.

 

몇 겹을 벗겨낸 속마음이 카이토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주문처럼 튀어나오곤 했다. 소녀는 숭어를 들을 때면 유치하게도 노래나 음악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다. 음악을 듣다가 죽을 수도 있을까? 폭풍처럼 몰아치는 멜로디의 한가운데에는 고요한 평화의 바다가 있었다. 소녀는 봄바람 처럼 울렁이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꼭 숭어를 틀어달라고 부탁할 거야.”

벌써 장례식 계획이신가요. 그렇다면 그 부탁을 저에게 맡겨주세요.”

"너는 못 믿겠어."

"아아. 마음 아파요.“

 

 

67번째 기억소자. 중간 저장 완료.

 

 

***

 

 

"못 믿겠어. 넌 누구야?"

"마스터, 어째서."

 

난 보컬로이드를 산 적 없어.

 

그녀의 증상은 심해지기만 했다. 혼란스러운 눈동자는 창밖의 익숙한, 그러나 처음 보는 풍경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던 이 거리를 사랑했다. 자주 가는 단골 카페, 식료품점, 방음이 되지 않는 벽이지만 연주를 하면 함께 노래하며 즐거워하던 사람들. 그녀는 사랑받고 있었다. 사랑받던 기억을 잊어버린 단 건 너무나 잔인하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칼을 부여잡은 마스터는 자신의 이름과, 태어난 도시, 부모님의 이름. 그녀의 기둥이 되는 것들을 수첩에 적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살고 싶은지를 처절하게 기록했지만, 기록했다는 사실마저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지?"

"거짓말"

 

며칠 전 잠에서 깬 마스터는 갓난아이처럼 순수한 얼굴로 처음 보는 자신의 집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서랍 속 가득한 뇌 기능 개선제들. 진단서. 소견서. 검사결과지. 어느 것도 마스터의 도망치는 기억의 발자취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망각의 늪은 마스터를 온전히 잡아먹고 있었다. 카이토는 상자 속에 그녀의 인생을 나타낼 물건을 정리했다. 그녀의 짧은 인생과 그녀가 그녀임을 증명하는 사건과 물건들. 사진. 일기장. 짐을 정리한 카이토는 그녀의 휴대폰 속 단축번호 5번을 눌렀다. 안드로이드의 기본 기억 설정을 만들 듯, 그녀의 기억의 숨을 되찾기 위해. 그녀가 카이토의 숨을 불어넣어 준 것처럼.

 

하나코씨? . 저 카이토에요. 부탁이 있어서요.”

 

 

***

 

 

소녀는 자기 전이면 언제나 CD플레이어로 숭어를 들었다. 잠옷을 갈아입은 소녀가 방문을 열면 따뜻한 우유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카이토가 서있었다. 침대에 배를 베고 누운 소녀가 숭어를 들으며 멜로디를 흥얼거리면, 어느새 카이토가 화음을 맞추고 있었다. 두 개의 목소리는 어느 때면 세 개, 네 개로 겹쳐 들리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지. 둘밖에 없는 집인데. 잡지를 넘기던 소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벌써 이명이라든지. 스트레스성으로 흔하다고 해.”

학교에서 무슨 일 있으세요?”

없어. 하나코가 좀 귀찮게 굴어. 계속 같이 케이크 먹으러 가자구.”

왜 가지 않으세요?”

그냥. 한 번 어울려주면 다음에 거절하기 힘들어서.”

 

72번째 기억소자. 중간 저장 완료.

 

 

***

 

 

"다시 만들 수 있는 거죠.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전부 다 인 거지? 카요의 기억이 남은 건. 사라지게 하는 건 쉬워도 다시 만드는 건 어려워. 실패할 확률도 높고."

"파괴는 쉬워도 창조는 어렵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해 볼만 해요. 저는 접속이 가능하니까. 하나코도 마스터를 잃고 싶지 않잖아요?"

"당연히. 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어. 아아, 불쌍한 카요쨩.“

 

하나코는 진정제를 맞고 잠이 든 카요의 관자놀이에 작은 전극이 달린 침을 여러 개 꽂았다. 보컬로이드가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은 흔하다. 바이러스나 크랙 프로그램이 깔린 PC에 연결되면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 휘발성 메모리 단자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백업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지 않은 사람들은 비싼 돈을 들여서 기억압축파일을 만들곤 했다. 사용자의 기억을 토대로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실패 확률이 높았다. 타인이 기억하고 있는 토대로 만들어진 기억은 본질과 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싼 가격과 불확실하다는 단점이 있어도 기억 복원을 원하는 사람은 있었고, 하나코는 종종 안드로이드의 기억 압축파일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기억이란 건 절대적인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의식의 영역이었다. 짙은 안개처럼. 또는 옅은 물결처럼. 아래가 없는 하늘처럼.

 

"네가 원하는 만큼은 절대 되지 않을거 야. 최악의 경우엔 네가 기억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고. 뇌도 나름 논리적이거든. 넌 불청객인데다가 카요의 모든 기억에 등장한다는 건 뇌가 보기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할래요."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분명 카요쨩이겠지."

 

그녀의 말버릇이었다. 마스터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사고로 하루아침에 부모님이 죽은 뒤로 그녀의 불행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녀의 재산을 사기로 날린 멍청한 친척이나, 하고 싶은 음악을 제대로 배울 수 없는 각박한 생활. 그녀는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믿었다. 음악을. 카이토가 만들어주는 아침을. 하나코와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7년 전을 기억하고 있다. 눈을 뜬 순간부터 마스터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5월의 봄을 닮아 따사로운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세계의 태양이었다. 반짝이는 비늘을 가진 무지개색 숭어였다.

 

 

***

 

 

소녀는 식탁에 앉아 가계부를 썼다. 카이토는 먹지 않고, 옷을 갈아입지도, 씻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늘 깨끗한 모습이었다. 소녀의 옆에서 카이토는 저녁을 먹고 남은 찌꺼기를 행주로 닦았다. 가계부를 끄적이며 볼펜 끝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던 소녀가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이번 달은 적자야. 이제 굶어야겠어."

"안돼요. 성장기는 꼭꼭 챙겨 드셔야 한다구요."

"무슨 돈으로? 돈이 없단 말이야."

"친척분 한테 전화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싫어. 어차피 못 받을게 뻔해.“

 

너 때문이야. 네가 없었더라면. 소녀가 내뱉은 말은 순전히 치기어린 투정이었다. 카이토가 있어서 소녀의 아침은 따뜻했으며, 저녁은 외롭지 않았다. 팬케이크에 녹아드는 시럽처럼 익숙하게 일상으로 녹아들었다. 곧 자신의 말이 부끄러워진 소녀는 카이토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카이토?"

 

카이토가 손에 들고 있던 행주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카이토가 비눗방울이 터지듯 사라진 자리를 소녀는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76번째 기억소자. 중간 저장 완료.

 

 

카이토는 작은 방의 침대로 떨어졌다. 풀석이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나온 낡은 먼지들이 풀풀 날렸다. 휴우. 아슬아슬하게 미로를 빠져나온 듯 카이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에는 두꺼운 책들이 흩어져 있었다. 201X4. 201X10. 200X7. 책의 표지와 옆에는 반듯한 글씨체로 일정한 기간이 쓰여 있었다. 카이토는 11월의 책을 찾아 책장을 넘겼다. 책에는 사진과 필기체의 글이 낙서처럼 적혀있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는 백지의 책이었다. 책장 마다 새롭게 발굴한 기억의 문장들이 남아있었다. 카이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4시가 가까워져 온다. 곧 새벽이 가시고 아침이 밝아올 것이다.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 해. 너무 귀여우셔서 오래 잡아놓고 있었네.”

 

카이토는 잠이 든 카요의 손을 잡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의 전극과 연결된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조작하더니 손을 잡은 채로 침대에 다시 잠들었다.

 

 

***

 

 

여자는 카페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낮과 밤이 바뀐 교대직은 몸이 힘들어도 들어오는 돈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일상적인 두통을 느끼던 여자는 커피를 들이켰다. 우중충한 창 밖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여자는 쇼핑백에서 카탈로그를 꺼냈다.

 

"신시사이저. 사지 말 걸 그랬나."

 

우연한 일치라고 하기엔 신의 장난이 심했다. 몇 달을 고민하다 큰 맘을 먹고 신시사이저를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중고로 얻었던 세탁기가 고장 나버렸다. 여자는 귓속으로 흘러나오는 숭어의 멜로디를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튕겼다. 고요한 물을 가르며 헤엄치는 숭어. 커다랗고 위대한 숭어. 오선지를 흐르는 따스한 물결. 여자는 숭어를 감히 사랑했다. 그녀는 거대한 숭어를 상상하고 있었다. 카페의 종업원이 불쑥 나타나 초코케이크가 올려진 접시를 내밀자 그녀는 흠칫 놀라며 귀에 꽂았던 이어폰의 한쪽을 빼며 당황한 듯 웃었다.

 

"케이크는 시킨 적 없는데요."

"저쪽의 남성분이."

 

카페의 직원은 싱긋 웃으며 건너편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남자는 어느새 여자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는 신기하게도 푸른 머리칼이었다. 여자는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마스터. 저를 기억하시나요?"

"너는."

"어디 까지 기억하고 계신 거죠? 몇 살? 언제? 제 이름을 아시나요?"

"모르겠어. 아냐. 너는."

 

누구지?

 

59번째 기억소자. 중간 저장 완료.

 

 

 

-.

 

나의 노래를 불러주던 소중한.

 

"카이토.“

 

파도가 부서지듯 기억의 조각은 새하얀, 의미 없는 단위로 쪼개졌다.

45번째 소자. 중간 저장 완료.

 

 

***

 

 

여자는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한적한 기차역에서 기차를 탔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쓰지 않았던 겨울 휴가를 썼다.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근원적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 보다 짧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건강보다는 돈과 일에 매달렸다. 가방 속에는 보온병에 든 뜨거운 차와 악보집과 녹음기가 들어있었다. 여자는 누군가와 함께였다. 아니, 그것은 여자의 착각이었다. 여자는 일생을 홀로 지냈다. 친한 친구도 몇 있었지만, 친구로서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비참한 일이란 것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결핍은 결핍으로서 완전하다. 여자는 일기장에 떠오른 문장을 끄적였다. 앞좌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불쑥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자 여자는 손으로 일기장을 숨겼다.

 

혼자 온 건가요?”

으음. 그렇다면 왜요?”

이런 겨울에 시로야마 호수를 찾는 사람은 늘 혼자더라구요. 어때요. 동행해도 될까요?”

붙임성이 좋네요. 머리는 염색한 건가요?”

 

여자는 볼펜 끝으로 남자의 파란 머리칼을 가리켰다. 특이한색이네. 터키쉬 블루. 코발트블루. 나도 언젠간 특이한 색으로 염색하고 싶어요. 여자는 불쑥 자신의 희망을 말했다. 남자는 쑥스러운 눈치로 파란 머리끝을 손가락으로 넘기더니 작게 웃었다.

 

어떤 색으로?”

초록. 보라. 어느 색이든 상관없어요.”

당신다운 대답이네요.”

절 알아요? 우리 초면인데.”

 

남자는 타니무라 카요라는 여자의 소개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는, 이상한 대답을 하며 기어코 옆자리를 파고 들어왔다. 덜컹거리는 삼등석 기차는 끝을 모르고 눈이 내리는 풍경을 넘어 여러 정거장을 지나갔다. 여자는 책을 읽거나 가판대에서 코코아를 마셨다. 남자에게도 권했지만, 그는 손을 저으며 낡은 악보집을 읽었다.

 

그건, 악보? 음악 하는 사람이에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네요.”

. 무슨 말이야. 정말. 나도 작곡을 조금 해요. 아마추어지만.”

멋지네요. 언젠가 들어보고 싶어요.”

 

마지막 정거장에 도착한 여자는 근처 카페에서 밤을 기다렸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두 테이블 옆에 앉은 파란머리의 남자는 무언가를 열심히 기록했다. 카요는 어느새 남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여행 중 인걸까. 남자는 고단해 보였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남자는 눈을 접어 웃었다. 이윽고 밤이 되자 카요는 남자의 손을 이끌고 꽁꽁 언 호수를 걸었다. 겨울의 성좌는 유달리 맑았다. 불빛 하나 없이 얼은 호숫가라면 더욱 그랬다. 카요는 손가락을 높게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남자의 숨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그는 하늘색의 포근해 보이는 머플러를 하고 있었는데, 머리카락 색과 퍽 어울렸다.

 

별자리, 알아요?”

오리온. 시리우스. 프로키온. 리겔.”

별자리를 많이 알고 있네요. 당신은.”

이제 말은 그만하기로 해요. 이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니까요.”

 

두 개의 하얀 숨이 배어나왔다. 카요는 쏟아질 듯한 별을 영영 바라보았다. 어딘가로 곧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카요는 문득 자신이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느꼈다. 옆에서 피어나오던 하얀 숨이 사라지고. 호수의 얼음에 새겨진 발자국만이 남겨져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호숫가를 살피던 카요는 얼음 바닥에 누워 정적만이 가득 찬 밤하늘이 쏟아지는 어둠과 빛의 향연에 눈을 맡겼다. 누군가 함께라면 좋을텐데. 작게 읊조린 소원을 들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359번째 기억소자. 중간저장 완료.

 

 

***

 

 

여자는 잠에서 일어났다. 아주 깊은 잠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자는 찌뿌듯한 몸을 쭉 폈다. 머리가 뻐근했다. 그녀는 기억나지 않는 간밤 동안 묵은 숨을 푸욱 내쉬고 엉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냈다. 달력에는 엑스자가 그어져 있었다. 다행히 쉬는 날이구나. 그녀는 혼잣말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 일 그만뒀지 참.”

 

세달 전이였던가. 한 달 전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싱크대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어제저녁이었을 스파게티 소스가 묻어있는 그릇이 기름기가 뜬 물에 담겨있었다. 접시는 두 개. 어젯밤에 누군가 집에 왔었나?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해보려 애썼으나 어젯밤의 기억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머릿속을 헤메던 그녀는 반추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 병이 그렇지 뭐. 기억 속의 바다에는 침몰한 선박이 가득했다. 소중한 보물을 싣고 가던 배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잃어버린 보물이 무언지도 잊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약통이 든 상자에서 아침 분의 약을 꺼내 먹었다. 자박자박 걸어 화장실로 향하던 그녀는 초인종 소리에 문가로 걸어갔다. 문 고리를 걸고 살짝 현관문을 열자 처음 보는 보컬로이드가 눈앞에 서있었다.

 

. 카이토네. 보컬로이드?”

안녕하세요. 저는 사와무라 하나코씨로부터 선물이에요. 당신의 집에서 지내도 괜찮을까요?”

걔도 참. 이런 거 부담스럽다고 해도. 하지만, 카이토는 가지고 싶었어. 들어와요.”

 

카요는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 하나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하나코는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안드로이드를 개발하는 공학도였다. 조금 귀찮게 달라붙지만, 좋은 아이. 돈 잘 버는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월급을 몇 달치 부어도 모자랄 비싼 보컬로이드를 이렇게 생일 선물로 덥썩 보내주다니. 오래전부터 보컬로이드를 바래왔던 카요는 어색하게 자신을 보고 선 카이토를 향해 싱긋 웃었다.

 

여보세요-. 어라. 카요쨩! 일어난 거야?”

. 하나코도 참, 내 생일 얼마 안 남은건 어떻게 알고서. 연구소에서는 보컬로이드 싸게 살수 있다더니. 별로 비싸지 않았지?”

어라라.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네에.”

모르는 척 하긴. 선물해준 카이토 말이야, 잘 쓸게. 고마워. 늘 갖고 싶었어.”

이런. 역시 충돌 해버렸나. 카요쨩, 카이토 좀 바꿔줄래?”

 

카요는 고개를 갸웃이며 휴대폰을 카이토에게 넘겨주었다. 하나코는 엉뚱한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안녕하세요. 하나코씨. 80%정도는 복구했어요.”

충돌이 아니지, 네가 마지막에 삭제하고 나온 거야?”

어쩔 수 없었어요. 계속 충돌해서 기억도 함께 사라지던 걸요. 우회 회로로 여러 번 다시 해봤는데도.”

너는 그걸로 된 거야?”

다시 시작할 거에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시간 되면 놀러오세요. 하나코씨를 좀 더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후후. 공들였어요.”

 

하나코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귓가에 익숙한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버려놓은 설거지를 끝내고 손을 닦은 카요는 테이블 위에 있던 CD플레이어를 재생했다. 카이토는 냉장고에 있던 바나나우유를 꺼내 머그잔에 담았다.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아침부터 클래식이라니. 멋진 선택이에요. 숭어, 좋은 곡이죠.”

알고 있어? 맞아. 내가 죽는다면, 장례식에 꼭 숭어를 틀어달라고 유언에 남길 거야.”

 

아차, 처음 봤는데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네.

내 이름은 타니무라 카요. 앞으로 잘 부탁해.

 

카이토는 악수를 청하는 손을 잡았다. 예전의 어떤 때처럼. 카이토만 기억하고 있는 따스한 순간. 찬란히 빛나던 세계의 기억을 붙잡고 활짝 웃었다. 처음인 것처럼.

 

저는 보컬로이드 카이토. 언제나 당신을 위한 노래를 부를게요.”

 

다시. 당신과.

 

 

 

 

 

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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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이 오늘 착한이유 : 포카포카하게 써달라고 하셔서 




알지 못했던 크리스마스에 




가벼운 산책이나 하자고 성준은 거실에 무력하게 누워있던 카이토를 불렀다. 연말 전시회 일정이 끝난 성준은 며칠 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며 빠져든 생각들은 깊고 어두운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을정도로 뒤틀리고 복잡한 연상과 이미지를 풀고 자르고 정제하여 캔버스에 옮겨담을 때면 원래의 이미지는 처참하게 살해된 시체처럼 느껴졌다. 성준의 그림을 두고 누군가는 숨이 깃든 생명체라고 표현했다. 길고 긴 토막살인을 끝내고 지친 살인자처럼, 붓 한 점 들 힘도 남지 않았다. 공복시간이 길어지자 꼬르륵거리던 위장도 어느새 포기해버렸는지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욕구는 구갈이다. 작업실 바닥에는 구겨진 생수병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옅은 숨을 호흡하며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던 성준은 근육통이라 예상되는 온몸의 비명을 느끼며 작업실에서 걸어나왔다. 


"아-. 배고파. 카이토. 밥 안먹은지 얼마나 됐지."

"3일 정도네요. 문 앞에 샌드위치를 여섯번 가져다 뒀는데. 전부 말라서 제가 버렸답니다."

"음. 그 점은 미안. 집중하면 두 가지를 한번에 하고 싶지 않아."

"절 보는 것도 포함 되는 거겠죠."

"넌 음...오히려 반대라고 할까. 그보다 그 말투는 뭐야. 삐진거야?"

"삐지다니요. 제가 감히."


어떻게 된게 점점 다루기 힘들어진다.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기도 벅차서 폭팔하는 일이 많은 성준에게 같은 모양으로 달려드는 카이토는 새로운 자극이 되면서도 커다랗게 엉긴 감정 수십개를 불러일으키는 마약같은 환각제-. 아니. 이 비유는 좀 이상하다. 고개를 저어버린다. 카이토는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대조되는 푸른색과 회색 눈동자색이나, 멋지게 비자연적인 색을 가진 샛파란 머리카락이나,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 떼어놓고 보면 별 것 아닌 속성들이 합쳐져 움직이는 카이토는 걸어다니는 작품 그 자체였다. 성준은 확실하게 삐졌다는 표시로 입을 비쭉이는 카이토를 바라보다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격무의 여파로 사라지지 않는 두통으로 생각이 삐걱거린다. 카이토와 싸울 이유도, 싸울 힘도 느끼지 못한다. 마주보고 선 카이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마감이 바빴어. 연말 전시회는 자선행사에 잘 쓰여서, 주문 수량이 많아."

"그렇게 보고 싶다고 문 두드렸는데.."

"널 보고있으면 너무 많은게 생각나. 지금 그리는 그림같은건 찢어버리고 다시 그리고 싶어진다고."

"..부끄러운 말씀이네요. 제가 그 정도는 아니랍니다."

"아니. 맞아."


한풀 꺾인 성준의 목소리에 카이토는 당황한 듯 팔을 허우적 거리다 성준의 어깨를 어설프게 안았다. 그게뭐야. 항상 원하는 건 더 확실히 하라고 했잖아. 어깨에 묻은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보고싶었다며. 너의 보고싶었어는 이 정도 냐고. 성준의 말에서 가시가 돋아날 기색이 느껴지자 그제서야 안아드는 감촉이 느껴졌다. 카이토는 한참이나 조용하더니 무언가가 터져나오듯 보고싶었어요. 보고싶었어요. 하고 고장난 라디오 처럼 보고싶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고작 며칠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

 하던 성준이 결국엔 저도 그랬다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영영 이대로 깨지 않는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마에 져버리고 싶다. 가물거리는 눈을 깜빡이다 성준은 어지러움을 느꼈고, 더 이상 음식을 위장에 넣지 않으면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본능이 스쳐왔다. 카이토의 어깨에서 몸을 일으켰다. 


"산책가자. 음식도 좀 사오고. 오늘이 며칠이지.."

"오늘은 12월 24일 이랍니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부르는 날이네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완전히 날짜 감각까지 잊어버렸네. 뭐, 특별하지 않지만. 이 시골에.."

"그렇네요. 오늘 바깥 기온이 낮아요. 따뜻하게 입고 가셔야겠어요."

"너도. 그래야겠네. 모자랑 장갑. 코트도 저번에 사준것 있잖아."


인터넷 쇼핑으로 사준 회색 털모자와 짙은색의 코트는 카이토에게 썩 잘 어울렸다. 매번 성준이 입던 낡고 커다란 옷만 입히는 것도 면목이 아니었다. 적당히 성준보다 한 사이즈 작은걸 사주었더니 마네킹처럼 길이가 맞아들었다. 일본 성인남자의 평균 신체수치를 가졌다고, 카이토가 쓸데없는 정보를 가르쳐주었다. 머플러는 늘 하고 다녀 보풀이 일어난 하늘색이었다. 새걸 사주겠다고 적당한 쇼핑몰에서 머플러를 보여줘도 그것만은 고집이었다. 



-




자전거를 탈 만큼 체력이 남아있진 않아, 오래 걸리더라도 마트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손을 잡고 오래 걸을 수 있어 카이토는 옛적에 삐진것 따위는 전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잡은 손을 흔들며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몇 개 불러주었다. 성준도 알고 있는 유명한 곡들이었다. 몇 개는 장단에 맞춰준다고 후렴구를 따라 불러주기도 했다. 노래는 우스갯소리라도 잘 부른다고 말할 수 있는 편이 아니었다. 노래를 부르는게 어떤 재미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노래에도 알지 못하는 예술의 세계가 있겠지. 카이토가 닿고 싶어하는 어떤 경지도 있을 것이다. 데려다 주지 못할텐데. 성준은 어느 여름날 카이토가 불러주었던 노래에 비해 최근의 노래는 왠지 모르게 자연스러워 졌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카이토의 목소리에 익숙해진 것인지,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카이토의 노랫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랫소리마다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며칠 전 눈이 내렸는지 길가에는 녹다 남은 눈이 흙과 섞여 애매한 모양으로 질척거렸다. 



-

 


상점가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시골동네라 하더라도 크리스마스는 본격적으로 챙기는지, 빨간색과 금색을 기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가게마다 크리스마스 한정 메뉴를 선전하고 있었다. 가게를 지나며 화려한 가판대에 눈을 굴리던 성준은 마찬가지로 눈을 떼지 못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걸어가던 카이토를 툭, 건드렸다. 금방 돌아보는 카이토의 눈빛은 아이스크림 매장에 떨어뜨려 놓았을때의 얼굴과 같았다. 사람이 아니면서 어째 더 식욕이 있는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먹는건 취미이자 기호라고 카이토가 당당하게 말했지만 당장이라도 목줄을 풀면 뛰쳐나갈 듯 일렁이는 표정이었다. 


"참.. 뭐라도 사갈까?"

"그래도 되나요?"

"네 눈빛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도 사주겠어. 뭐가 좋을까. 케이크? 잘 안먹어 봤으니까."

"한 번도 안 먹어 봤어요..마스터 오늘 왜이렇게 친절하세요?"

"난 원래 이랬는데. 음. 여기서 고를까. 먹고 싶은걸로 골라 봐."


성준은 적당히 앞에 있는 베이커리를 가리켰다. 주머니에서 카드를 쥐어주고 포장 시켜놓은 음식이 나올때 까지 골라오라고, 카이토의 등을 떠밀었다. 양손으로 받아든 카드를 들고 뛰어가는 카이토의 모습이 커다란 아이같았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는데. 작은 것에도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오히려 망설이게 된다. 지금의 소중한 세계는 어릴적 눈을 떼지 못했던 스노우볼처럼 한 없이 눈이 내리거나 물방울이 헤엄치는 둘 만의 작은 장소이다. 하얀 눈이 오기 시작하면 카이토가 좋아하는 낡은 담요를 깔아놓고서 긴 낮잠을 잘 것이다. 포장된 음식을 받아오자 이내 카이토가 한껏 신난 얼굴로 뛰어왔다. 


"한정 케이크래요. 제가 마지막으로 사는 거래요."

"저기 뒤에서 사람들이 잔뜩 사 가고 있는데?"

"에에. 아무튼. 부쉬 드 노엘을 샀어요."

"그게 뭔데.. 난 처음 듣는 이름이야."

"이름이 그렇대요. 초콜릿 케이크인데, 통나무 모양이에요."

"어쨌든 초콜릿 케이크란거네. 됐어. 집에 가자."

"헤헤. 크리스마스 선물 감사히 받을게요. 마스터."


같이 먹을건데. 성준은 손을 내밀었다. 케이크를 잡은 봉지와 잡을 손을 망설이던 카이토가 손을 옮기는데 걸리는 짧은 시간을 인내로 참아주기로 한다. 오히려 그 인내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손이 두 개인 줄 아는데 오래 걸리는건가. 퉁명스러운 시비를 입 밖에 내지 않는 것도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상점가에서는 유명한 캐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 것 만으로도 어딘가 잔뜩 들뜬 기분이 느껴졌다. 카이토와 마주 앉아 케이크를 먹으면, 곧 신나서 다시금 캐롤을 불러주겠지. 그건 자신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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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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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특히 학교폭력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카이토 과거편.



리본의 기분 


안드로이드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깨진 그릇 처럼 일정한 감정이 담기지 못하고 흐르고만 있었다. 켄타는 자신이 괴롭힘 당하는 이유를 유약한 체격과 소심한 성격이라 여겼다. 절반은 사실이다. 동급생 사이에서도 작은 축에 속했고, 말재주나 성격이 좋아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었다. 켄타는 커다란 기타를 가지고 학교에 다녔으나 학교 불량배들에게 몇 번 빼앗겨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이후로는 기타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기타연주에 애정이 많은것도 아니었다. 다만 무개성한 자신을 조금이라도 나타내고자 하는 발악의 일종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다른 이들의 눈에 띄기 전에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왔다. 악기사를 하는 집으로 돌아가려면 상점가를 지나야 만했다. 거기서 종종 불량배들과 마주쳤다. 어짜피 시골동네의 좁은 시가지라고 해봤자 독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다. 얼마 남지않은 용돈을 빼앗긴지 2주째였다. 용돈이 없는 켄타는 버스를 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릴적 부터 살았던 상점가의 뒷골목을 돌고 돌아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거리만을 골라 걸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12월의 날은 바람이 불어 차가웠다. 켄타는 멍하니 땅을 보며 거리를 걸었다. 언제쯤 상점가로 돌아가야 불량배들을 피할 수 있을지. 하루가 너무나도 길었다. 학교수업은 지루했고, 쉬는시간은 두려웠다. 나아질 방법을 생각해보아도 혼자서 할 수 있는건 숨죽이고 조용히 지내는것 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겁쟁이는 겁쟁이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켄타는 문득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을 깨달았다. 땅에 쳐박고있던 얼굴을 들자 눈 앞에는 맨발의 상처입은 안드로이드가 벽에 기대 앉아있었다. 켄타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런 날씨에 맨발로 뭐하는거야?"

"아무도 없는 장소를 검색했는데. 정보가 잘못되었네요."

"너..피가 흐르고 있어. 잠깐. 얼굴이.."

"얽혀서 좋을것 없습니다. 수리센터에 데려가도 소유주외에 수리는 불가능하니까 허튼생각.."

"뭐야..그렇지 않아도 한푼도 없어. 이 손수건으로 얼굴 닦아."


맨발의 안드로이드는 지저분한 흙과 먼지가 묻은 얼굴에서 끈적한 피가 흘러 마른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모양새가 여기저기 머리채를 잡아 끌린것 같았다. 안드로이드 학대. 켄타의 머릿속에는 어렵지 않은 결론이 떠올랐다. 안드로이드가 상용화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시골에서 정밀한 안드로이드를 사용하는 사람의 수는 적었다. 가사용 안드로이드는 완벽한 사람의 모양을 띤 비싼제품보다는 기본적인 돔모델이 보편적이다. 켄타가 내민 손수건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안드로이드의 얼굴에 손수건을 갖다댔다. 유기된 안드로이드가 회수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걸까. 그러나 얼굴과 몸에 난 상처는 새로운것으로 보였다. 손수건은 금방 안드로이드의 샛빨간 피빛으로 물들었다. 인공피는 시간이 지나도 새빨간 빛을 띄는 물감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켄타는 가방에 있던 물통을 꺼내 손수건에 묻혀 피를 씻어내고 안드로이드에게 다시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손수건이 더러워져서..죄송합니다."

"더 물어보지 않을게. 손수건은 가져. 신발도 없다니. 유기?"

"물어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면, 사항은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딱딱하네...가사용은 아니겠지."

"용도..라. 일단은 보컬로이드입니다."

"헤에. 그렇구나. 보컬로이드는 실제로 처음 봐."


자신의 기종명을 밝힌 카이토는 포기한 듯 옆에 쪼그리고 앉은 켄타를 한 번 바라보고는 한참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이 곳에서 기동한지 1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멀리까지 나온건 처음이었다. 본래 주인이 있는 안드로이드는 소유주의 반경에서만 활동하는것이 원칙이다. 카이토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알람이 울려 귀가 떨어져나갈 지경이었다. 목을 옥죄는 사슬을 깨고 도망쳐나온건 안드로이드에게도 기저에 존재하는 살고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마스터를 거역했다는 두려움, 공포, 그럼에도 그는 나쁘지 않다는 절대적인 연결이 함께 뒤섞여 얽힌 실타래처럼 뒤섞인 감정이 도출하는 결과는 끔찍한 혼란이다. 생존권을 위협할 만큼 마스터는 절대적인 존재인가. 그런 철학적인 문제는 카이토가 알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기본적인 손가락을 움직일 만큼만이라도 메모리를 할애하기 힘들었다. 주먹과 발로 걷어차여 넘어질때 충격을 받은 머리가 아직도 띵하게 울리고 있었다. 도망치는건 답이 아니다. 카이토가 어디에 있는지 쯤은 분실위치확인 서비스를 검색하면 금방 알 수 있을 터였다. 어딜 가든 보고있다는 수치스러움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소년은 태평하게 얼굴을 닦던 피가 묻은 손수건으로 이번엔 상처난 발목을 닦기 시작했다. 피부 표면이 따가웠다. 


"근처에 주인이 있는거야?"

"질문 하지 않는다고...됐습니다. 네. 직선거리로는 가까운 장소에 있습니다."

"주인에게 맞은거야?"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신고할까봐 그런거야? 무슨기분인지 알것 같아."


오히려 신고해보라며 낄낄대던 불량배녀석의 얼굴이 떠올라 켄타는 도리질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자세히 물어봤자 켄타가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닌것처럼 보였다. 켄타는 다시 입을 다물고 손에 들고있던 신발주머니에서 운동화를 꺼냈다. 체육시간에만 쓰는 런닝화였다. 


"자. 이거 신어. 너한텐 조금 작겠지만, 맨발보다는 나을거야."

"괜찮습니다. 이 근처는 포장된 길이라 다칠위험은 적어요."

"내가 못보겠어. 겨울에 맨발로 걸어다니는 안드로이드라니. 누가봐도 신고될거야."

"감사합니다. 신발은 깨끗이 씻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어디로 보내드리면 될지 주소를 가르쳐주세요."

"여기 상점가의 악기점. 거기가 우리집이야. 다음주 화요일에 다시 체육수업이 있어. 그전에 돌려준다면 좋을지도."


켄타는 주변을 살피더니 아무도 없는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이토에게 손을 흔들었다. 카이토는 발가락에만 겨우 들어간 작은 런닝화를 신은채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왠지 켄타는 눈물이 날것처럼 눈자위가 아리었다. 눈물을 보이면 정말 바보취급을 받을것 같아서, 익숙한 방법으로 도망치고 만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누워 후회했다. 최소한 집이 어딘지 정도는 물어볼걸. 온 몸이 엉망이 될만큼 맞을 정도로 난폭한 주인이 있는 집으로 보내지말걸. 어머니 몰래 방으로 데려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이토는 어떻게 되었을까. 집으로 돌아갔을까. 카이토의 메마른 목소리가 다시금 생각났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지 입으로 새어나오는 말들은 마스터는 나쁘지 않아. 나는 돌아가야해. 라고 세뇌하듯 반복하고 있었다.




***




카이토를 다시 만난건 다음 체육시간보다 이른 일요일이었다. 오전동안 가게를 혼자 보고 있던 켄타는 오후가 되어서야 외출을 허락받고 악기사에서 나섰다. 참고서와 악보 몇 개를 살 계획이었다. 겨우 어머니께 사정해서 가불한 용돈을 받아 켄타는 조금 들떠있었다. 저번에 사려고 했지만 돈을 빼앗기는 바람에 사지 못했던 것이다. 켄타는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고 걸었다. 서점에 가기 위해서는 게임센터를 지나가야 했다. 돌아가려고 하려다, 주말이니 녀석들도 하루쯤은 쉬지 않겠느냐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안일한 생각이었다. 게임센터 입구에서 담배를 피고있던 카와시마를 맞닥뜨리고 만것이다. 카와시마는 잘생긴 얼굴에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는 소위 엘리트로 불리는 아이였다. 그가 뒷골목에서 돈을 빼앗는 비행을 한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켄타 조차 당하기 전 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이. 켄타. 어디가는길이야?"

"아. 이런. 저..아..안녕. 카와..시마군."

"왜 그렇게 떨고 그래. 우리 잠시 이야기 좀 할까?"

"이번은 좀 봐줘. 가불한 용돈이라고.."


카와시마는 익숙하게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음험하게 키득거렸다. 게임센터 앞은 지나가는 행인이 많았다. 카와시마가 어깨를 멱살잡듯이 잡고 골목 뒤쪽으로 걸어갔다. 켄타는 마지막 발악으로 실랑이를 계속했다. 이번에야 말로 신고하겠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겁쟁이 켄타가 잘-도. 하며 카와시마는 비웃었다. 이윽고 상점가 뒷편에 있는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르자 카와시마는 본격적으로 위협적으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멱살을 잡고 벽으로 강하게 밀쳤다. 켄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의 폭력행위는 그만하세요."

"이 목소리. 카이토..?"


실눈을 뜬 켄타가 막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이토의 발목에는 켄타가 이전에 주었던 손수건이 피에 찌들어 묶여져 있었다. 이번에는 거실용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구석 모서리에 앉아있던 카이토가 몸을 비틀며 일어나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왔다. 카이토가 걷는 자리마다 핏방울이 한두개씩 떨어졌다. 왼 손가락 몇개는 뒤로 뒤틀려 꺾여있었고, 얇은 반팔을 입은 옷에는 핏자욱이 배어있었다. 카와시마는 황당한지 코웃음을 치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미친..뭐야. 저 너덜너덜한건?"

"그렇군요. 상황은 알겠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협박하거나 때리는 것은 강도죄입니다. 제가 본 그대로의 영상을 경찰서에 제출하면 되겠네요. 메모리를 지우는건 저의 소유주만이 가능하단것을 가해자님께 알려드립니다."

"무슨.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뭐야 저거?"

"녹음. 녹화. 0.1초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어서 그 손을 놓으세요."

"으, 저, 저 안드로이드 피투성이잖아!! 씨발, 나도 몰라!!"


멱살을 놓은 카와시마가 욕을 커다랗게 소리치며 골목을 뛰어갔다. 다리에 힘이 풀린 켄타가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발을 이상할 정도로 절뚝이며 걸어온 카이토가 더러운 붕대가 감긴 손을 켄타에게 내밀었다. 아래에 분명 상처가 있을것 같은 손을 잡기보다는 옆의 빈자리를 툭툭 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카이토는 잠시 고민하더니 벽에 기대어 앉았다. 


"당신도 혼자인가요?"

"그런가봐. 미나미 켄타. 내 이름. 켄타라고 불러."

"신발은 깨끗이 씻었어요. 돌려주러 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만날줄 몰라서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또 얼굴이 엉망이네. 주인에게 맞은거야?"

"이건...그렇지만 제가 나쁜일을 했기 때문이니까, 정당방위로 분류되겠죠."


안드로이드 학대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만 완벽한 법 조항은 명시되어있지 않았다. 개인의 소유물을 파손하는 일이 기물파손죄에 적용되는것도 우스운 것이다. 마스터가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마스터가 상냥하게 대해주던 때도 있었다.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마스터가 원하는 노래를 카이토는 부를 수 없었다. 마스터는 조교법을 공부하거나, 작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컬로이드를 주크박스쯤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카이토가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악보 파일만 끼워넣은 노래는 표시가 나기 마련이었다. 사기만 하면 제대로 된 노래를 부를줄 알았다고. 마스터는 말했다. 흥미를 잃고도 계속 부과되는 사용료에 화가 났을 것이다. 카이토는 마스터의 행동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걷어차이며 매일 빌었다. 카이토를 돌아보지 않는 냉랭한 눈빛에서도 따뜻했던 언제가를 떠올리며 쏟아지는 폭력을 받아내며 견뎠다. 그렇게 지내온 것이 8개월째였다. 신발장 앞에서 충전하고 있던 카이토에게 간만에 마스터가 말을 걸었다. 카이토의 새로운 제품이 나왔다고. 이 녀석이라면 너처럼 쓰레기같은 노래를 부르진 않을거라고- 웃었다. 그 웃음은 카이토가본 것 중에 가장 공포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될 만큼?"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켄타는 어려서 잘 모르겠지요."

"에. 작아보여도 나는 중학교 3학년이라고? 그러는 카이토는 몇 살인데?"

"저에게 나이의 개념은 없습니다. 기동한지는 1년 3개월째. 본체의 연령설정은 20대 정도."

"헤에. 형이잖아. 카이토 형. 말투도 어른스럽고."

"..그렇습니까. 마스터이외의 사람과 길게 대화해본 적이 없습니다. 형이라는 호칭이 알맞은지는 모르겠네요."


켄타는 형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었다. 순간 카이토가 살짝 미소짓는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상점가 뒷편의 막다른 골목길은 둘의 비밀스러운 아지트가 되었다. 카와시마의 협박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겁쟁이인채로의 학교생활은 마찬가지였다. 카와시마는 종종 그 안드로이드. 만나면 부셔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켄타를 위협하곤 했다. 무섭지 않으면서도, 카이토가 걱정되었다. 카와시마가 나서지 않아도 카이토는 곧 부서질 것 같았다. 켄타로서 해 줄수 있는건 새 붕대를 사와서 감아주거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게 전부였다. 어딜 나가든 신경쓰지 않아서 나오는것 뿐이라고 카이토는 말했다. 돌아가면. 켄타는 물음을 끊고 고개를 숙였다. 이미 물음의 답을 알고 있었다. 카이토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마 보기조차 힘든 폭력을 자신의 탓이라 여기며 감내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말 조차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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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rainbow

 

 

오늘따라 카이토가 조용하다. 사실만 놓고 보자면 좋은 일이지만, 이럴 녀석이 아니란걸 알고 있기에 성준은 불안해졌다. 요즘은 그리 촉박한 마감이 아니었다. 주제를 받아놓고 그리는 외주그림은 가볍게 그리는 편이었다. 그릴 마음이 든 김에 힘내서 그려버리자고 결정한것 뿐이라 며칠동안 줄곧 그리고 있었다. 작업은 순조로웠다. 별로 어려운 주제도 아니였고, 며칠전까지 카이토와 집안을 뒹굴며 보냈던 나날들이 씨앗이 되어 머릿속은 풍요로운 풍년의 기간을 맞이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외주그림에 그런 영감을 쏟아붓는게 아까울 정도였다. 이렇게나 그릴 수 있는 영감을 주면서도, 실제로 그림을 그릴때는 방해밖에 되지 않는다는게 모순이 아닌가. 성준은 홀로 작게 쿡쿡 웃었다. 넓은 붓으로 캔버스 위에 커다란 파란색의 원호를 그렸다. 무지개려나. 꼭 현실에 있는 것만을 그려야 한다는 법은 없다. 파란 무지개도 어떤 세상엔 있을것이다. 빛의 산란이라던지, 알지못하는 이유를 들어서라도 만들어내는 세계를 떠올린다. 화풍이 부드러워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마음이 안정되서 그런것이라고 하나마나한 말을 떠들어댄다. 마음이 안정되었다니, 오히려 카이토를 만나고 마음은 더 이지러워졌다. 끊임없이 파도치는 물결처럼. 때로는 연안류처럼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그럴때면 정말이지 심장주위가 시큰거린다. 성준은 힘을 쏟은 필체를 맞은편 벽에 기대 바라보다 가슴 주위를 움켜잡았다.

 

"어이-. 카이.."
"네!! 마스터!! 부르셨어요!!!"
"아직 부르고 있던 중이였어. 또 문 앞에 있었어? 그리고 그렇게 세게 열지 마. 부셔지겠다."
"히잉. 여섯시간만에 부르시면서 너무 차가워요.."
"여섯시간 밖에 안됐단 말이지..집중력이 떨어졌어."
"커피를 타올까요? 아니면 간식? 잠시 쉬는건 어떠세요? 아직 마감날짜까지는 일주일하고도 여덟시간 사십분이 남았으니까."
"잠시 산책할까. 머리를 식히고싶어."

 

산책이라는 말에 어디에서 키우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는 카이토에게 목줄을 씌워 끌고다니는것도 안전한 방법이겠다고 성준은 작업용 앞치마를 벗으며 생각했다. 바깥에선 잠시 한눈을 팔아도 사라지기 일쑤라, 시야에서 사라지지 말라고 명령이라도 내리기 일보직전이였다. 그만큼 데려나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가정용 안드로이드는 사용자의 500m밖을 벗어나지 않도록 설정되어있을텐데, 어째서 카이토는 그렇지 않은건지. 망가진 탓일지도 모른다. 산책이라고 해봐야 끝을 모르고 더운 날씨에 오래 걸을 수 없다. 애시당초 성준은 야외활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더위에 일부러 야외에서 땀을 흘리는건 체력낭비에 불과하다. 저녁이 되어 해는 떨어져 낮보다는 시원하겠지만, 역시 일부러 걸을 필요는 없다. 성준은 가벼운 티셔츠로 갈아입고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이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손잡아."
"에에-. 또에요? 마스터는 너무 느리게 걷고, 금방 돌아가려 하시잖아요."
"야. 넌 그래뵈도 내 소유니까... 좀 내 주위에서 걷는게 어때? 또 미아가 되거나 하면 귀찮거든."
"미아라뇨, 저에겐 GPS가 내장되어 있어요. 그럴리는 없다구요."
"아아. 그래서 얼마전에 그렇게 길 한복판에서 울고있었구나."
"우, 울다뇨. 그건..그냥, 마스터를 부른것 뿐이고."

 

GPS가 내장되어 있다고 카이토는 말하지만, 종종 기능하지 않았다.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는지, 내부적인 문제인건지. 카이토의 기능하지 않는 눈처럼 다른 부분도 잔 고장이 잦았다. 본래 가정용 제품은 수명이 길지 않다고 한다. 고쳐서 쓰는것 보다, 새것을 사는것이 훨씬 이득이 되도록 만들어진 시장체계였다. 소비재로서의 취급이다. 성준은 더이상 제작되지 않는다는 카이토의 여러 부품들을 중고시장에서 구해보려 애썼다. 그것 또한 상당한 프리미엄이 붙어있었다. 안구는 도통 구할 수 없었고, 구한다고 해도 정식서비스센터에서는 불법루트로 구한 파츠는 써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 카이토에게 불리하도록 세상은 설계된것 같다. 두어번 칭얼거리다 내미는 손을 잡은 카이토는 약간 풀죽은 얼굴이었다. 짐으로 취급받는 느낌이라 좋지 않다고, 기세좋게 속마음을 대놓고 말하는걸 보면 풀이 죽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성준의 손을 굳세게 잡고 있었다. 시골의 산책이라고 해봤자 가까운 마트에 다녀오는 것이다. 요즈음은 시끄러운 매미소리가 잦아들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끊임없이 떠들어대는건 카이토만으로 충분했다.

 

"짐 취급이라니. 그런 적 없어. 이게 다 네가..음..자격지심은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거지?"
"자격지심. 있어요. 똑같은 단어. 그리고 전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고집하고는. 그럼 이렇게 생각해. 원래...연인사이는 손을 잡고..걸으니까."
"헤에..헤헤... 그,그, 그런거였어요? 정말? 진짜에요?"
"됐어. 닥쳐. 두 번 말하게 하지마. 그냥 걸어."

 

괜히 말했다. 성준은 방금의 말을 죽어라고 후회하며 성큼성큼 걸었다. 손바닥 뒤집듯 밝아진 얼굴로 연인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했다. 그렇죠, 저희는 연인사이니까. 물론 마스터지만. 연인사이. 연인이니까요. 손을 잡는것도 당연하고. 연인은 손을 잡고 걸으니까.연인은. 코이비토. 라고 해요. 일본어로. 한국어랑 다른 한자를 써요.

 

"시끄러워!! 알고있어. 내가 방금 말했잖아. 그만 말하라고."
"아, 마트가 보여요. 잠시 들러서 더위를 식히고 갈까요?"
"오늘은 마트 안갈거야."
"그렇구나. 그럼 바로 돌아갈까요?"
"바로 돌아가지 않을거야. 네가 저번에 말해놓고도 기억 못하는거야? 오늘 마을 축제라며?"
"에. 그랬죠. 그렇긴 하지만..마스터는 사람이 많은곳은 질색이라고 하셨고.."
"그래서, 가기 싫다고? 네가 싫다고 하면 가지 않을거야."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 카이토는 정해진 프로토콜안에서만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정해져있다. 일주일 전, 카이토는 성준에게 다음주에 마을 축제가 있다고 말했다. 불꽃놀이도 하고, 야외 자판도 열린다고. 이 마을에서 지낸지 기억하지 못하는 나날을 합쳐서 3년은 될테지만, 한번도 가 본적은 없었다. 그런게 있는데 무지하게 재밌을 것이라는 카이토의 말에 성준은 사람이 많은곳은 질색이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해버리고 지나갔다. 가고싶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카이토는 손을 잡은채로 길가에 멈춰섰다. 이 상황에서 가장 알맞은 대답은 가고싶다. 이겠지만 이미 성준이 축제에 가는걸 꺼려한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것이 성준이 원하는 것일까. 그것에 맞는 대답을 해야하는데. 시한폭탄처럼 성준의 표정이 점점 구겨져갔다.

 

"뭐야. 정말 대답 안할거야?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거였어? 불꽃놀이는 나도 본 적 없어서 얼마나 예쁜진 모르지만. 너도 그렇잖아."
"불꽃놀이..아름다울거에요. 마스터와 함께 본다면 더욱 아름다울테죠."
"그거면 됐어. 사람 많은 곳에선 더 위험하니까, 손 놓지마."
"아얏. 거긴 손이 아니라 손목이에요."
"오늘은 60%정도 합격이야. 다음번엔 확실히 100%의 대답을 하라고. 알겠어?"

 

왠지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성준은 카이토의 손을 잡고 점점 시끄러워져오는 축제가 벌여진 거리로 향했다. 축제라고 해도 워낙 주변 동네에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 생각보다는 선선한 분위기가 풍겼다. 켄타를 부르는 편이 좋았을지도. 성준은 자판이 세워진 일대를 휘휘 둘러보았다. 야키소바,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파는 가게. 모형 사격자판. 구식의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고즈넉한 분위기가 싫진 않았다. 유카타를 입고온 사람들도 몇몇이 보였다.

 

"아이스.."
"어디에?"
"아이스 초코 바나나. 켁, 듣기만해도 달아보이는 이름이네."
"마스터, 하나만 사주세요."
"이럴땐 의사표현이 확실하지."

 

성준은 질렸다는 듯 혀를 차며 지갑을 꺼냈다. 드라이아이스가 든 박스에서 꺼내진 아이스초코바나나는 새하얀 냉기를 풀풀 풍겼다. 카이토는 거침없이 바나나를 입안에 깊게 밀어넣어 반쯤 깨물어 부셨다. 보기만해도 이가 시리고 두통이 밀려온다. 성준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2분도 되지 않았는데 앙상한 나무젓가락만 입에 물고 아래 위로 흔들다가 짜증난다는 성준의 얼굴에 장난을 멈추고 손에 쥐었다.

 

"이 시렵지 않아? 그렇진 않겠지."
"물론이죠. 그런 쓸모없는 감각은 인간들에게 있는것으로 충분해요."
"재수없게 말하네. 흠, 불꽃놀이를 제대로 보려면 사람이 없는 쪽으로 빠져나가야겠어."
"에에, 빙수도 있는데-."
"네가 아이스박스냐? 하나로 충분하잖아. 전기로 움직이는 주제에."

 

한쪽눈으로 보려면 넓고 트인 장소에서 보는게 좋겠지. 성준은 시끄러운 자판을 벗어나 잡초가 자라고 있는 공터로 걸어갔다. 이미 몇몇 무리가 자리를 펴고 앉아 있기도 했다. 불꽃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알 수 없으니, 성준은 하늘과 주위를 번갈아가며 살폈다. 곧 불꽃놀이가 시작한다는 시간이었다. 어느순간 말이 없어진 카이토가 서쪽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헤에. 불꽃소리가 들려요."
"불꽃 소리? 난 못들었는데. 오오.."

 

먼 곳에서 보일듯 보이지 않는 희미한 빛 줄기가 점멸하며 하늘로 솟더니 이내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동그랗게 퍼졌다. 싸구려 네온빛이 섞인 색이었다. 검은 하늘에 스크래치화를 그리듯, 흐드려지는 붗꽃처럼 터져나간다. 빛에 비친 카이토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차오른다.

 

"정말 아름다워요. 정말...아아.."
"불꽃놀이 정도에 이렇게 감동하는거야? 세상엔 이것보다 아름다운게 더 많다고."
"아직 보지 못했으니까, 이게 가장 아름다운걸로 할래요. 물론 마스터의 그림 다음이에요."
"일일히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도 네가 아니라면 보지 못했을거야."
"똑같네요. 그렇죠, 마스터."

 

감정이 필요 이상이 되면 우는 버릇은 고쳐야한다고 성준은 카이토에게 누누히 말해왔다. 울어버리면 개별의 감정은 섞여버리고 하나로 섞여 뭉근해진다. 그러나 역시 카이토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마치 물을 많이 부어버린 물컵처럼. 담을 수 없는 커다란 감정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망가진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성준은 잠시간 밝은 불꽃에 흔들리는 카이토의 얼굴을 감상한다. 태어나서 처음 불꽃놀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존재를 다만 물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성준은 어떤 세계에서는 카이토도 생명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파란 무지개도 어떤 곳에서는 존재할 것이다. 잡은 손을 놓고 눈물로 얼룩진 카이토의 얼굴을 핥아낸다. 눈물을 멈추려고 한 행동이지만, 되려 카이토는 어깨에 파고들어 더욱 눈물을 쏟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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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사랑의 종언


 

성준은 급하게 켄타가 마실 음료수와 즉석밥, 과자를 산 비닐봉지를 들고 켄타에게 받은 문자를 읽었다. 꽤 친해졌음에도 정중한 문자에 저절로 성준 자신도 긴장하게 된다. 실례이고, 미안하다는 여러 문장 뒤에 아무래도 집의 정리가 필요 하실 거 같아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준비되면 연락을 달라는 본 내용이 있었다. 전쟁 같은 마감을 끝낸 성준은 엉망이 된 작업실에서 며칠 동안 죽은듯이 잠을 잤다. 카이토가 생사확인을 위해 몇 번 왔다 간 것도 꿈결에 잊어버린 채였다. 켄타의 문자를 뒤늦게야 발견한 성준은 허겁지겁 거실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카이토를 불러 집을 치우게 하고 집을 나섰다. 카이토라는 녀석은 실수투성이에 덤벙대도, 기본 프로그램 자체는 괜찮은 편이었다. 천성과 환경에 의한 성격이 다른 것처럼. 세상에는 엄청난 수의 카이토가 있겠지만, 성준이 가진 카이토는 하나밖에 없다. 도플갱어-. 와는 다른 개념이다. 직접 느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인식과 감각 사이의 새로운 것이었다.

 

즉석밥도 없다니...이때까지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일본에 이사 온 날로부터 8개월을 꽉 채웠다. 생활은 안정되었느냐면 좋은 말로도 그렇지 못하고, 그림은 아직 과도기로 조금만 방심하면 허투룬 곳으로 빠지기 일쑤다. 그러면 이 일의 시작이자 원흉인 카이토를 부르고, 얼굴을 보면 다시금 어떤 시상이 떠오른다. 손에 닿을 듯 닿을듯 잡히지 않는 멀지만, 언젠가 느껴본 데자뷰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캔버스로 옮기기엔 너무 큰 감정이다. 이렇게 커다란 감정이 있을 거라고 예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자신을 압도하는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물론 카이토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독히 살아가기로 했다 하여도, 감정적인 자극이 없다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준은 빌라의 계단을 오르며 차오르는 숨을 골랐다.

 

 

나왔어. 집 제대로 치워놨겠지?”

그럼요. 하나밖에 없는 눈이지만 사각은 없답니다.”

. 좋아. 셋이서 먹으려고 아이스크림도 사 왔어.”

우와. 감사합니다. 켄타군은 언제 올까요?”

여섯시 반쯤...이지 않을까?”

이십분 정도 남았네요. 식탁은 닦아놓았는데..”

즉석밥. 이거 데워야해.”

 

성준은 비닐봉지를 뒤적거려 즉석밥 세 개를 꺼냈다. 기껏 슈퍼에 갔지만, 뭘 사와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켄타는 학생이니 술을 마시거나 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도 자신의 것으로 맥주 두 캔을 담았다. 간만에 혼자 나가는 것이라 애매했다는 이야기를 카이토에게 했다. 카이토는 뜨거운 물을 끓이고 맥주와 주스를 텅 빈 냉장고에 담으며 성준의 투덜거리는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역시 제가 없으니 헤매시는군요? 기뻐요.”

그런 의미는 아닌데. 애도 아니고. 길을 헤맷다 는 게 아냐.”

마음이 해맸다는 건가요.... 켄타군이 왔나 봐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카이토는 현관으로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카이토형..실례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오랜만이에요.”

어엉. 들어와. 일부러 신경 써줘서 미안하네.”

아뇨아뇨,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전시회 마감 수고하셨어요.”

 

켄타는 손에 든 종이봉투 속에서 정갈하게 담긴 플라스틱 통 여러 개를 꺼냈다. 연근 조림. 달걀 장조림. 가지볶음. 손수 만든 음식을 먹어보는 게 얼마만인지. 줄곧 타지생활을 반복해온 어머니께 성준 형 이야기를 종종 했더니 챙겨주시더라고요. 이런 시골에 유명한 화가가 계신다니. 언젠가 전시회에 가보고싶 네-. 하시면서. 켄타는 싱긋 웃으며 작은 그릇에 반찬을 담는 카이토를 도왔다. 켄타의 집은 악기상이라고 했지. 사람이 드문 곳이라 악기사는 잘 안 될텐데. 가업을 이어받은 건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없는 눈치이니, 켄타도 편하게 사는 것을 아닐 것이다. 친구도 별로 없는 모양이고. 피곤한 기력이 역력한 모습으로 성준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전시회는 뉴욕이라. 나도 이번은 가지 않아. 도록이라면 챙겨줄 수 있는데.”

, 정말요? 저 사실 형의 그림 인터넷에서밖에 보지 못해서.”

카이토, 내 작업실 책장에 있는 도록 좀 가지고 와.”

저도 함께 봐도 되는 건가요? 도록은 종류가 다섯 권인데. 어떤 것을 말씀하세요?”

...아무거나 상관없지만 최근 것이 그나마 낫지 않을까.”

 

성준은 뜨거운 밥과 연근 조림을 먹으며 마음속 깊이 감동했다. 카이토가 해주는 스파게티나 샌드위치도 맛은 그럭저럭 이었지만, 자판기에서 나온 듯한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켄타의 어머니를 위해서 일본에 전시회라도 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답례로 뭐든지 해줄게. 먼저 밥그릇을 모두 비운 성준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시내 나갈 때 백화점에서 화과자라도 사다 줄까. 어머니께서 좋아하신다면. 아니면 현금. 성준의 말에 켄타는 자리에서 일어날 듯 놀란 표정이었다.

 

그렇게 비싼 건 받아도 부담이에요! 현금은 더더욱...그럼, 형의 도록에 사인하나 받아가도 될까요?”

연예인도 아닌데... 원한다면.”

도록이 생각보다 크네요.”

실제 그림이 크니까. 나는 커다란 그림이 좋거든. 멀리서 볼 때, 가까이서 볼 때. 다른 느낌이 드니까.”

그렇군요...올해의 상반기까지의 도록이네요. 헤에.”

기복이 있을거야. 슬럼프에서 벗어나려고 이것저것 습작처럼 그린 것까지 다 넣어버려서.”

 

켄타는 품에 겨우 안을 정도로 커다란 도록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넘겼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카이토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풀을 먹어 빳빳한 종이에 인쇄된 그림들은 질감이나 양감까지 느껴질 정도로 인쇄가 완벽하게 되어있었다. 켄타는 멋있다, 굉장하다. 하고 짧은 감상을 내뱉으며 도록의 페이지를 넘겼다.

 

성준 형..이건..”

? 아아. 맞아. 그때 그리던 거야.”

굉장해요! 이 새파란 바다..색이 정말...그런데..”

저도 이 그림이 제일 좋아요. 바다와 고래는 멋있고. 아무래도 파란색이 좋으니까요.”

그렇네요..”

 

켄타는 눈을 돌려 카이토와 도록에 그려진 깊은 바다와 회색빛 심해를 번갈아보았다. 둘은 닮아있었다. 어떤 의미일까. 켄타가 카이토를 보면 느껴지는 일정량의 향수, 연민, 친근함, 사랑스러움처럼 정제된 감정이 그림에서 똑같이 느껴졌다. 설명하기 힘든 기시감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바다가 부르는 노래였다. 소리가 아닌 물살이 바다의 노래가 아닐까. 바닷속은 음파라는 노래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다. 성준의 짧은 코멘트가 달려있었다.

 

노래하고 있지만, 듣지 못할 뿐이다..”

에엑. 읽지 마. 부끄럽다고. 답례라고 하긴 민망하지만, 어머니께서 기뻐하셨으면 좋겠네. 제일 앞에 사인할게.”

분명히 좋아하실 거에요. 좋은 그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뭐 별거라고.”

그래서, 카이토형은 요즘 뭘 했어요?”

 

켄타는 카이토를 꼭 사람인 것 마냥 대한다. 카이토가 할 법한 일이라는 게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성준은 켄타와 카이토가 시시콜콜한 대화를 들으며 맥주캔을 비웠다. 혼자 지내겠다며 떠나온 일본인데 언제부터 일상을 차지하고 있는 사소하고 편안한 사람과 물건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둘의 주제는 역시 카이토의 노래로 귀결했다. 성준은 지겹다는 듯 혀를 찼다.

 

카이토형을 그런 식으로 밖에 안 쓰시다니. 사용료가 아깝지 않으세요?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쓰는 게 아깝지 않은건 아니잖아요.”

이미 물어봤어요. 마스터는 대답도 못했다고요.”

무슨 대답이 더 필요해? 청소기를 사놓고 옷걸이로 쓰는 사람도 있는데.”

세상에, 절 청소기 정도의 지능이라고 생각하시면 굉장히 곤란해요!”

청소기는 지능이 없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아무튼. 노래하지 않아도 난 만족하고 있다고.”

청소기는 슬퍼하겠죠. 기계는 본래 기능으로 사용되는 게 가장 행복하니까요. 그리고, 그리고쓰이지 않으면 언젠가 마스터가 저를 지겨워하는 순간이 오게 될 거에요. 전 그게 무서워요.”

그럴 리 없어.”

인간은 누구나 변해요. 마음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아니야. 난 네가 노래를 부르던, 부를 수 없던. 상관없어. 그냥 네가 좋아. 좋다기보단, 이건 사랑이겠지.”

 

켄타는 들고 있던 도록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성준을 향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말을 실제로 들을 줄이야. 켄타가 허탈하게 웃었다. 일시정지 한 듯 가만히 서 있는 카이토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엄청나게 고민하는 얼굴로 입술과 눈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카이토 형 과부하 일어나겠어요.”

몇 번을 말해줘도 똑같은 반응이군. 그게 그렇게 못 믿을만한 일인 건가? 카이토가 날 좋아하는건 당연한 일인데. 어째서 반대는 그렇게 놀랄 일이지? 대답해봐. 카이토.”

저희는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있으니까....?”

지겨워. 그 프로그램이야기. 그럼 프로그램을 끄면, 넌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는 거야?”

그런

 

카이토는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카이토의 침묵이 길어지자 성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임프린팅. 소유주에 대한 애착. 애정과 애착은 다른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은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사랑을 돈독히 하지만, 애착을 가진 이들은 불안해하고 다른 애착 상대를 찾아 헤맨다. 두 가지는 어느 선 까지는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자신을 구원하는 사람에게 애착을 가지는 건 어른이나 아이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동정으로 시작한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서로 불행해질 뿐이다.

 

거짓말로도 아니라고 말 하면 어디가 어떻게 되는 거냐?”

거짓말을 하지 못해요.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 그럼 나 혼자서 쇼했나보네.”

성준형..”

사람 마음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성준은 다 먹은 맥주캔을 손으로 구겼다. 먹먹하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느끼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작업실로 들어가 버렸다.

 

역린을 건드려버렸네요. 괜히 저 때문에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가서.”

아니에요. 마스터말 이 맞아요. 하지만, 정말..어떻게 될진...믿고싶지만. 임프린팅은 개발이 중지된 프로그램 설정이고 위험해서..”

카이토형..”

알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다고 대답하면 마스터는 분명 상처받을 거에요. 그건 싫었어요.”

 

믿음이나 희망은 인간의 시선에 해당하는 것이다. 미래를 판단하는 변수를 전부 나열한 알고리즘 중에서 가장 경험적 최선을 선택할 때. 카이토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정말 최선이기를 바라는 것 밖에 없었다. 한쪽 눈이 사라졌을 때, 다른 쪽 눈이 사각을 찾기 위해 애쓰는 정도의 기능이라면, 임프린팅 프로그램이 개발 중지되고 삭제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벌써 밤 10시에요. 집까지 배웅해 드릴까요?”

그렇네...이런 상황이라. 아뇨, 혼자서 돌아갈 수 있어요. 내일 아침에 다시 셋이서 이야기 해봐요. 오늘은 성준형을 건드리지 않는게 좋을거에요. 카이토형도.”

켄타군이 없었다면, 마스터도 저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거에요. 정말 고마워요. 저는..”

형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전 형에게 많은 것을 받았으니까요.”

 

켄타는 끝끝내 1층까지 따라 나오는 카이토를 뒤로 했다. 2년 전 여름. 상처투성이로 뒷골목에 버려져있던 켄타에게 다가온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을 떠올렸다. 먼지와 말라붙은 피딱지로 엉망이 된 손으로 골목에 던져진 켄타의 물건을 하나씩 주워 커터칼로 찢어진 학생용 가방에 넣었다. 더러운 붕대로 한쪽 눈을 가린 카이토는 맨발로 저벅저벅 걸어와 켄타에게 가방을 쥐어주고는 옆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바닥에 부딪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얼얼한 정신에도 켄타는 카이토와의 첫 대화를 또렷히 기억했다. 지금보다 딱딱했고, 켄타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 이상으로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다시 떠올려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신도 누군가에게 미움받고 있나요? 가엽게도.’

 

카이토가 누구의 소유인지, 어째서 그런 일을 당하고도 관리국에 신고당하고 있지 않은지 켄타는 얼마 뒤 알게 되었지만, 그러고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급하게 도망쳐 나온 카이토가 잠시 숨을 장소를 마련해 주는 일밖에 없었다. 방관자로서의 자신을 자책하던 켄타는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카이토가 다시 나타났을 때 마음먹었다. 이번에야 말로 카이토를 지옥에 떨어지게 놔두진 않을 것이다. 두 번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는 바보같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켄타는 도록을 넣은 가방을 넣고 집으로 향했다.

 


 

***


 

 

겨우 출입금지 종이가 떼어진 작업실 문이었지만, 카이토는 두드리지 못했다. 애정을 돌려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카이토도 잘 알고 있었다. 애착은 일방적이고 복잡한 것이다. 마냥 순수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괴로운 걸까. 이제야 겨우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을 뿐인데. 마스터를 좋아한다는,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사실조차 의심받다니 비참했다. 하지만 대답하지 못한 것은 머릿속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임프린팅을 끄게 되었을 때, 마스터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일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카이토는 무력하게 문 앞에 서 있다가, 익숙하게 문을 기대고 앉았다. 돌고 돌아서 결국 제자리걸음이라니. 카이토는 처음으로 자신이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불가능한 가정을 해보았다. 인간은 확신 없이도 미래나, 희망을 믿음으로 동기를 가질 수 있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카이토가 견디기엔 너무나도 절망적이고 커다란 벽이었다.

 

..으윽...흐엉...마스터어..”

뭘 잘했다고 울고 있어?! 너 진짜 오늘 나랑 싸우기로 마음 먹은거야?”

허엉...아뇨.

. 장난쳐? 뚝 그치라고!!”

 

카이토의 새된 울음소리에 성준은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문가에 기대섰다. 애도 아니고, 뭐 하나 제대로 안되면 울어버리는 저 빌어먹을 성질머리를 고쳐놓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고혈압으로 쓰러질 것이다.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애처로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카이토를 몇 번이고 울린 자신이 쓰레기라도 된 느낌이었다. 성준은 치밀어오르는 짜증과 화를 한숨에 삭이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짜증나 니까 당장 그쳐. 지금 상처받은 쪽이 누군데 네가 울고 있는 거야?”

미안해요...내가..제가...사람이 아니라서..확신할 수 없어요, 그런 결과는 말씀 드릴 수가 없단 말이에요..”

뭐가 확신할 수 없다는 거지? 넌 기계잖아. 나보다 훨씬 확실한게 많다고. 네가 확실하지 않다는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야. 회피하는 거라고.”

 

성준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가려 애썼지만 떨림을 숨길 수 없었다. 카이토에 대한 감정은 이미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자신을 좀먹고 있었다. 이게 이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이번에는 무너진 자신을 어떻게 세워야만 할지 전혀 알 수 없다. 겨우, 힘들게 부서진 폐허를 치우고 만든 것이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엉망으로 망가지는 사람과 관계 속에서 성준은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리. 늘 마음먹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모진 말을 하면서도 눈물흘리는 카이토의 얼굴을 바라보자 마음이 울렁였다. 지금이라도 논쟁은 그만두고 카이토를 그저 품에 안고싶다는생각이 가득했다. 카이토는 더이상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울고 있었다. 헐렁한 옷 소매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지않았다. 울지 말라는 명령 때문이었는지, 피가 날정 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으윽......흐윽..”

그만해. 그만. 카이토. 제발. 날 봐. 봐 줘. 이건 명령이 아니야. 부탁이야.”

내가 널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게 널 이렇게 괴롭게 하는 거라면..”

마스터..?”

네가 해준 말들. 언제나 기억할거야. 내 곁에 와줘서 고마웠어. , 내가 발견한거지만.”

무슨 말씀이세요? 마스터...저는 무슨....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버리지 마세요, ..흐윽..다시는 떼쓰지 않을게요..”

그럴리 없다고 말했잖아. 제발, 겨우 참고 있으니까. 더 힘들게 하지 마.”

 

성준은 알고 있었다. 카이토에게 선택권이란 것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카이토가 원해서 자신을 주인으로 선택한 것도, 원해서 성준을 따르게 된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우연과 성준과의 이해가 부합했을 뿐이었다. 카이토가 스스로 원한 것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것 하나였지만, 그것 또한 카이토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졌을 뿐이란 것을. 이토록 사랑스럽고 가여운 것을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 성준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감정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카이토를 놔 주는 것이 성준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카이토의 얼굴을 손으로 잡은 성준이 카이토와 눈을 마주했다. 카이토 파란동공 속에는 여전히 깊은 바다가 흐르고 있었다. 영영 그 속에서 유영하는 고래가 되고 싶었다. 어울리지 않게 눈이 뜨거워졌다.

 

카이토. 내일도 만날 테지만. 고마웠어. 괴로운 건 나만으로 충분해. 마스터키 해제-. 음성인식으로. 내 말 들어줘. 내가 좀 엉망이지만, 널 정말 좋아해. 네가 어떤 존재이든.....”

뭐 하시는 거예요? ..싫어요싫어..”

그러니까. 임프린팅 해제. release. delete. 관련된 기억은 함께 삭제.”

 

...정확한..인식을 위해, . 안돼. 한번 더.., 아니야. 싫어. 그만..”

임프린팅 해제. 제발. 다시는..나는..”

실행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했어. 성준은 재부팅을 위해 눈을 감고 넘어지는 카이토를 손으로 잡았다.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손으로 닦고서 카이토의 낡은 담요 위에 눕혀놓았다. 충전코드를 연결하자 목 뒤에서 파란불이 점멸했다. 성준은 담요 옆에 앉아 카이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카이토를 만났을 때의 당혹감. 그리고 공감각. 성준은 밤새 차가운 심해 속에서 헤엄쳤다.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생동감이자 죄악감이었다. 성준은 드디어 잠든 카이토를 안고 힘껏 오열했다. 이렇게, 이렇게나 좋아하고 있어. 모든 감정이 무너졌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나라는 사람이 달라질 만큼. 내가 카이토를 구원한 게 아니야. 카이토가 나를 구원했어. 한 번 터진 울음은 멈추질 않았다. 카이토의 안에서는 작고 윙윙거리는 모터 소리가 들렸다. 어디까지 지워질까. 다시 눈을 떴을 때 성준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차가운 카이토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은 성준은 끅끅거리는 울음을 겨우 삼켰다.

 

사랑해. 카이토. 이 말을 너에게서 듣고 싶었어. 그게 너무 큰 욕심이었나 봐.”



 

 

-10분만 있다가 읽어주세요

 

 

***



 

 

 

새벽이 되어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간 성준은 밀려드는 피로감에 두통약을 찾아 먹고 잠에 들었다. 카이토와 언젠가 가자고 이야기 했던 해변이 꿈에 나왔다. 카이토는 그렇게나 바다와 잘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이번 전시회가 끝나면. 휴가를 떠나자. 너도 내 헌 옷 대신 다른 옷 좀 입고서. 바닷가를 산책하고 얼음과 색소로만 만든 싸구려 빙수를 사 먹고, 커다란 호텔에 가면 청소할 필요가 없겠지. 바다에 발을 담근 너의 모습을 크로키하려고. 가끔은 수채화도, 색연필도 재밌으니까. 성준은 목 끝까지 꽉 차오르는 괴로움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사랑한 것들은 모두 망가지고 마는 것일까. 자신의 사랑에 이기지 못하고 부셔지는 카이토를 몇 번이고 상상했다. 감당 할 수 없는 감정은 독이다. 옳은 일을 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는 주문을 외웠다. 최소한 카이토는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부서진 부품은 수리하면 되지만, 부서진 마음은 지워버릴 수밖에 없다. 카이토는 이미 위태로울 수준까지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다. 성준은 꿈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는 카이토를 찾아서 소리치며 뛰었다. 맴도는 어둠과 절망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밝은 목소리에 성준은 놀라듯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으로 닦으며 카이토가 성준을 불렀다.

마스터. 괜찮으세요? 악몽이라도 꾸시는 걸까...앓는 소리를 하시고..”

허억. , 카이토.”

이런..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얼굴이 엉망이에요. 땀도 많이 흘리셨어요.”

.... , 그래. 아냐. 깨워줘서 고마워.”

어제..제가 배터리 계산을 잘못했는지 먼저 꺼졌죠. 켄타군-. 보고 싶었는데.”

??”

...왜 그러세요?”

어제 일이 기억나지 않아?”

제가 버그라도 일으켜서 이상한 짓이라도 했나요? 마지막 메모리가 어제 오후 60945초로 끝나버려서..”

 

카이토는 최신의 안드로이드라면 10분 간격으로 하고 있을 메모리 저장을 한 시간 간격으로 하고 있었다. CPU에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오후7시면 켄타가 집에 오지도 않았을 무렵이었다. 성준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하게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물어볼 곳이라고는 켄타 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성준 형? 어제 괜찮아..”

들어봐 .켄타. 이게...이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내가 어제 카이토 임프린팅을 해제했거든. 아니, 삭제해버렸지.”

? 그게 그렇게 쉽게 없어지나요? 저도 프로그램적인건 잘 모르지만요. 카이토형이 재부팅을 했다면, 정말 된 거 같긴 한데.”

그래. 그러면서 내가 관련된 기억까지 같이 삭제했거든. 이건 확실해. 저번에 서비스센터에 물어봤다고. 카이토는 이미 공기계로 지낸 기간이 길어서, 방화벽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 접근하기가 굉장히 쉬우니까 주의하라면서 마스터키 사용법을 배웠으니까.”

, 그런데 뭐가 예상과 다르신가요?”

카이토가 달라진 게 없어.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빼면.”

원래 감정적인 프로그램이라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티가 나지 않는거 아닐까요?”

 

성준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당황한 목소리로 고마워, 고마워. 하고 전화를 끊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있는 카이토에게 손짓했다.

 

카이토. 이리 와봐.”

-. 부르셨어요.”

..이상한 질문인데. 지금 임프린팅이 유지되고 있어?”

그게 뭔가요? 프로그램 이름같은데. CPU에는 없는 프로그램이네요.”

확실히 삭제되긴 한 건가..나를 어떻게 생각해?”

. 갑자기..이상한 질문이네요. 마스터는...그림을 엄청 잘 그리시고. 일 할때 방해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객관적인 사실 말고.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성준은 어제 욕망했던 행동을 이어갔다. 카이토를 가슴에 안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고마워, 고마워. 날 좋아해줘서. 선택해줘서. 있는 힘을 다해 카이토를 안았다.

 

..이러시죠? 제가 아무래도 어제 실수를 한 모양이네요.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실수한 건 나야. 잘못한건 나야..”

그러셨다해도 괜찮아요. 마스터가 어떤 일을 하든, 저는 마스터를 좋아하니까요. 파도가 흔들린다 해도 바다의 일부인 것 처럼.”

 

어제 읽은 도록의 첫 부분에 썼던 말이었다. 연안의 파도는 흔들리며, 부서지며 요동쳐도 결국 바다의 일부이다. 따스하고 밝은 햇빛이 머리카락에 쏟아진다. 먼길을 돌아 결국 찾아낸 나만의 장소.

 

내 옆에 있어. 내 옆에서 웃고, 노래해줘. 넌 정말 나에게 소중해.”

물론이죠. 전 마스터가 있어 존재하니까요.”

 

카이토와 손을 마주 잡고, 입을 맞추었다. 카이토와 두 번째 키스였다. 쿵쿵대는 심장소리가 머리까지 울렸다. 성준은 혼자서만 두근거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 부끄러웠지만, 집중한 카이토의 얼굴이 빨개지는것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눈을 질끈 감은 카이토는 손을 약하게 떨고 있었다. 성준이 조심스럽게 카이토의 볼을 만지자 카이토가 파란색과 회색 눈을 천천히 떴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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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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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것/연성 릴레이 2016. 9. 18. 13:08

성준카이 센티넬버스...1,,,,,,


난장판이 된 방 안에서 남자는 웃었다.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앞으로 넘어진 선반과 책장에서 쏟아진 책과 물건들이 여기저기 부숴진 채로 뒹굴었다. 남자는 눈물로 엉망인 얼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두개골 속에 든 것이 바깥으로 터져 나갈듯한 두통.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어지러움. 이명. 혼자인 방에서 들리는 소름 끼치는 환청. 윙윙대고 삐걱거리는 불안한 소리가 점멸하듯 커졌다 줄어든다. 그는 아침부터 갑자기 찾아온 발작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온 발작의 빈도가 줄어들고 있다. 좋은 징조는 분명히 아니다.


“또 혼자서 궁상떨고 있군. 센티넬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허억...S? 뭐야, 여긴. 여긴...어떻게..”

“아침부터 협회에서 너한테 서른 번 넘게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네가 죽었는지 확인해 달라더라.”

“전...화?”


전화에 신경쓸 겨를 따위 없었다. 전화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폭풍이 몰아치는 머리로는 간단한 사고조차 가로 막힌다. S는 그의 사생활을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친하진 않지만. 사실을 알고 있는 자로서 생기는 기본적인 연민이란 게 있었다. 성인이 된 센티넬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발작은 때로 생명에 위험이 될 정도로 몸을 최악의 상태로 만들기도 했다. 연구는 대부분 이루어졌다. 센티미터의 뇌에 위치하는 특이한 병소, 혹은 부분 하나가 신경계 작용에 반응하면 전 뇌를 폭주하게 만드는 초자연적 현상. 그리고 그것을 상쇄하는 가이드라는 존재.


“어이. 정신차려. 김성준. 성준?”

“머리가….머리…”

“예술가란 정말. 귀찮은 직업이군. 또 약했냐?”


성준은 알맞은 가이드를 찾을 수 없었다. 사춘기에 발현한 센티넬적 증상이 공교롭게도 그를 예술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감각의 폭주. 다중 감각. 정제된 환각이라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들의 결과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나타났다. 파장에 맞는 가이드를 찾는 건 현재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첫 번째 폭주 이후로 성준은 병원에 센티넬 등록을 하고, 피 검사 결과에 따라 자신에게 알맞으며, 현주소와 비슷한 곳에 위치하는 가이드를 소개 받았다. 그는 멋진 남성이었다. 단정한 목덜미가 인상적이었다. 늘 자신을 따라다니던 경미한 두통이 가라앉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자신의 짝을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휩싸였고, 깨진 착각의 조각은 불신으로 이어졌다. 가이드에 대한 불신. 센티넬로서 최악의 조건이다.


“아악..약은..하지 않았어...병원..”

“병원에 가면 또 어쩌려고? 진정제 맞고 누워있으려고? 그건 완벽한 해결 방법이 아니라고!”

“씨발...그럼 어떡하라고!!! 지금 내 머리가 깨지려하는데!!”

“가이드를 소개 받아. 찾으라고. 너 이러다가 죽어!”

“싫어…”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는 공생이다. 가이드 또한 자신이 일반 사람에게 끼치는 일종의 마취 효과를 인식할 때 병원을 찾아가게 된다.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는 약한 공포감은 가이드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장애를 만든다. 자신에게 맞는 센티넬과 가이드를 만나는 것은 그들의 삶의 질을 올리는 평화로운 방법이었다. 성준은 그동안 다섯번의 가이드 관계를 실패했다.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미간을 크게 찌푸리며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가던 성준이 밀려오는 구토 감에 바닥에 엎드려 구역질을 했다.


“미치겠군. 미친놈이 날 살인자로 만들 생각이야.”

“살인 방조죄에 해당하나요.”

“맞아. 날 범죄자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와서 이 새끼좀 진정 시켜봐, 카이토.”

“알겠습니다.”


성준은 희미한 시야를 뚫고 나오는 파란색의 인영을 응시했다. 눈이 풀려 흔들리는 초점으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란 손이 안개 속을 헤치고 다가와 뜨거운 이마에 가볍게 손을 터치했다. 작게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이었다. 그리고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듯 성준은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은 놀이기구에서 막 내린 것 처럼 몸이 흔들렸고, 폭주의 여파로 온 몸에 통증이 몰려들었다. 구토 감을 억제하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성준이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는 몇달만에 보는 S와 평범한 얼굴의 안드로이드가 서 있었다.


“뭐….우욱..”

“안녕. 성준.”

“무슨 일..인지는 아까 들었고. 그래, 일단은 고맙군. 그리고 저건 뭐지?”

“요즘 우리가 개발 중인 인공 센티넬기능이 탑재된 안드로이드야. 카이토 기종. 시범운행.”

“뇌파는 안정적으로 돌아왔습니다 만..신체 기능이 많이 손상된 상태에요.”

“그건 눈으로 봐도 알아. 새끼 고양이처럼 떨고 있잖아.”

“닥쳐. 어디서 조잡한 장난질이야? 난 가이드 필요 없어.”

“가정부는 필요해 보이네. 널 위해 청소 기능도 넣어뒀어.”


이것 봐, 일부러 모델을 구해서 만든 거라고.  S는 자랑하듯 카이토의 오른 팔을 잡고 내밀었다. 새것 같지 않은 사용 감이 드는 카이토였다. 단종된지 오래 되었으니 중고를 구했어, 중고도 구하기 어려웠지. 나름 희귀 모델이더라고.  


“맘에 들지 않아? 예전 그것처럼 눈 하나를 없애버릴까?”

“닥쳐!!”

“워,워. 장난이라고. 아직 너에게 장난치기엔 일렀나?”

“구해준 것은 고마워. 그리고 저거 가지고 당장 사라져.”

“내가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네가 누워서 토악질 하고있을때 이미 소유자 설정까지 해뒀다고. 이제 네 거야.”

“뭣..??”

“그래. 사라지도록 하지. 주인님을 잘 모시도록.”


성준은 몸을 일으켜 S를 잡으려 했지만 사지의 근육이 찢어 질듯 비명 하는 고통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유유히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S의 뒤통수에 대고 욕지거리를 내뱉은 후 바닥에 누웠다. 깊이 숨을 들이키자 아직도 머리가 웅웅대며 흔들렸다. 폭주의 여파가 며칠은 갈 셈이지. 제기랄. 작품 마감 일이 일주일인가 남았던가. 폭주할 때 캔버스를 찢어버리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마스터 라고 불러도 되나요?”

“아니. 안돼.”

“아직 호흡 수와 맥박, 체온이 정상 범위에 도달하지 않았네요. 침대로 옮기겠습니다. 안정이 필요해요...당신에게는.”

“뭐...뭐하는거야? 미쳤어?”

“보행 불가로 판단되는 상태입니다. 바닥 주변에는 위험한 파편들도 있고요.”


성준은 자신의 몸을 짐짝 들듯 들쳐매는 것에도 저항하지 못할 정도로 무력했다. 아침 내내 일어난 발작에 지칠대로 지쳤고, 카이토가 다시 나타났든, 그렇지 않든 지금은 자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카이토는 조심스럽게 넘어진 책장을 넘어 엉망이 된 침대를 발로 대충 폈다.


“우욱..토할거같은데..”

“제 등에 토하시면 곤란한데요. 침대에서 다시 조정해보도록 하죠.”

“내...내려줘….화장실에…”

“숨을 깊이 쉬세요. 아주 깊이. 온 몸에 힘을 내려놓는다고 생각해보죠.”


침대에 내려진 성준은 자신의 눈을 가리는 카이토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주문처럼 밀려드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따라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카이토가 몇 가지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듯 했다. 이전처럼 손을 잡지도, 격렬한 관계를 가지지도 않았지만 몸과 머리와 정신이 안정되어 가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대 의료 공학의 발전이란-. 성준은 띄엄띄엄 드는 생각 속에서 잊고 있던 얼굴을 떠올렸다. 잊으려 했던 것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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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과 여름



뜨거운 햇살이 얼굴을 녹일 듯이 쏟아진다. 열기에 눈을 뜨기가 힘들다. 피곤한 몸으로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피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저녁 늦게 시작 한 그림 작업은 새벽 해가 어스름히 떠서야 인기척에 눈을 뜬 카이토를 마주하며 끝났다. 그 날 이후 성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무 일도 없길 바라는 듯 작업에 몰두했다. 카이토와 어영부영 놀다가 예정된 전시회의 마감이 코앞이라는 사실을 협회의 직원에게서 온 드문 독촉 전화에서 알아버리고는, 고해성사라도 하듯이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이전 까지는, 세계 어디를 가든 마감날짜 보다 훨씬 일찍 작품을 보냈는데, 이번엔 어떻게 된 건지 협회 직원들 사이에서도 궁금증이 생긴 모양이었다. 드디어 슬럼프란 걸 인정한 것일까? 하는 부정적인 목소리도 있었겠지.

.. 그 반대라서 어떡하지.”

몸이 두 개, 아니 세 개라도, 모자랐다. 멍청한 생각이지만 카이토의 손을 빌려볼까, 하는 심산이 들었다. 카이토도 뭐, 어느 부류로 보면 음악을 하는 입장이니 무지한 인간들 보다는 솜털만치는 나을지도. 일순 무언가 생각난 성준은 웃어버렸다. 유화 물감 자국이 가득한 작업실의 바닥에 누워 큰 소리로 웃었다. 벽에 놓인 커다란 캔버스에 가득 찬 지금의, 순간의, 색채를 바라보았다. 노을, 밤하늘, 미적지근한 강물, 보라색 숲, 차가운 소나기. 토해내고 토해내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이미지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한 가운데 카이토가 서있었다.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머리는 맑았다. 일주일 내내 먹는 시간을 사치로 여기며 작업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마감날짜까지 사흘 남았으니 해외배송이면 아슬아슬했다. 시내에 나가서 다섯 개 쯤 되는 커다란 캔버스를 택배로 보내려면, 성준은 시내로 나가는 버스 시간표를 떠올렸다. 혼자서는 들 수 없고, 카이토를 시키자니-. 그래 봬도 시가로 하면 비싼데. 물감이 마를 시간이 부족해서 더 신중하게 옮겨야 한다. 성준은 아무렇게나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고 나가 작업실 문 앞에 붙어있던 [카이토 출입금지] 라고 적힌 종이를 뗐다. 카이토를 부르기도 전에 카이토는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왜 항상 이렇게 앉아있는 건데..”

이제 출입금지 해지인가요?!”

아니, 그냥 명패로 붙여놓으려고. 출입 금지의 한자도 틀렸고..”

조용히 하고 있을게요, 물감도 닦아드리고, 물통도 갈아올게요!”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야. 유화라는 말의 뜻을 몰라? 기름으로 닦는다고.”

치이. 물통이란 말은 관용어구에요. 기름통이라고 할 순 없잖아요, . 그것보다 마스터가 나오지 않는 56시간 동안 휴대전화에 전화가 많이 왔어요.”

 

그럴 리가. 성준에게 남은 인연이라고는 협회의 직원 몇 명이나, 가장 최근에 있었던 프랑스의 친구-라고 해봐야 몸이 떨어지면 멀어질 가벼운 성질의 지인들이 다였다. 협회라면, 작업 후 연락 하겠다고 했으니 여간한 일이 아니라면 연락하지 않을 테고. 성준은 오랜만이라며 달라붙는 카이토를 손으로 쳐내며 휴대전화를 켰다. 부재중 전화가 다섯 개나 있었다.

 

..? 켄타. 켄타. 켄타..켄타...”

역시 켄타군이구나-. 집에도 한번 찾아왔었는데, 마스터가 작업 중이라 돌아가 달라고 했어요.”

 

[. 그날 돌아간 뒤로 괜찮은 건가요? 감기라도 걸렸는지 걱정되네요. 시간 날 때 연락해주세요.]

[오늘 하굣길에 시간이 나는데 들려도 되나요? 마음대로라 죄송합니다.]

[작업 중 방해가 되었다면..]

 

“....이런...”

켄타군이 뭐래요? 놀러 온데요? 노래연습?”

닥쳐봐..지금 엄청 오해 받았어. 지금 몇 시지? 수업 중이려나.”

아침 여덟시니까, 아직은 아니에요.”


 

-


 

여보세요. . 성준 형?”

여보세요. . 켄타. , 미안. 내 마음대로 급하게 돌아가 놓고 말하는 걸 잊었네.”

살아계셨네요. 이틀 전인가, 집에 찾아갔는데 카이토가 삼 일째 방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잠시 무서운 생각했어요. 다행이네요. 카이토와 이야기가 잘 풀렸나 보네요.”

어엉? 어어... 그렇지. 예정되어 있던 전시회 준비하느라.”

다행이네요. 오늘 저녁에 들려도 되나요? 며칠 못 드셨을 텐데. 집에서 반찬 좀 들고 갈게요. 형은 매일 인스턴트밖에 못 드실 테니까.”

일본인들은...다들 이렇게 친절한 거야?”

 

켄타는 작게 웃더니 학교에 도착했다며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귀 옆에 딱 달라붙어서 전화내용을 엿들은 카이토는 켄타가 저녁에 온다는 말 이후로 흥분상태였다.

 

켄타군이 놀러온다니까 장보러가요, ? 집에 아무것도 없어요. 마스터가 드실 것도 없어요.”

안돼. 그림 붙이러 시내 가야 해. 저 커다란 것을 무슨 수로 들고 가지? 콜택시를 불러야겠어. 트렁크에 어떻게 잘 넣어보지 뭐.”

시내!!”

넌 집 보고 있어. 자리 부족하니까.”

에에..시내에 가면...악기상도 있고...악보집도 있고...기타도 여러 종류있고..”

안 데려간다니까...장은 다녀오면서 내가 대충 봐올게. 그 대신, 네가 할 일이 있어.”

. 오랜만에 마스터가 명령하셨다. 뭔가요?”

내 작업실 좀 치워. 엉망이니까.”

 

라는 말을 남긴 성준은 대충 옷을 갈아입고 커다란 캔버스를 낑낑거리며 대문 밖으로 옮겼다. 언젠 가의 저녁, 낙서처럼 크로키를 하던 성준에게 카이토는 성준에게 어째서 커다란 그림을 그리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카이토로서는 표면적이고, 그저 크기에 대한 질문이었지만 시시콜콜한 대답은 곧 잘 하던 성준이 멈칫하자, 카이토는 말실수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고개를 들어 성준을 바라보았다. 성준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훨씬, 섬세한 사람이었다. 성준의 태도는 작은 동요에도 요동치는 감정을 숨기기 위한 위악이다. 흔들리는 얼굴은 곧 사라지고, 내 마음이지. 하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오자 카이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건..너무 엉망이잖아요. 마스터..”

 

성준이 집을 나간 뒤 작업실에 들어간 카이토는 기합이 들어간 앞치마를 손으로 털었다. 습작으로 휘갈긴 작은 캔버스들이 바닥이며 벽에 엉망으로 널려있는 데다 신문지를 깔아 두었다 해도 벽이며 바닥에 묻은 유화물감은 마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반짝이는 것도 있는가 하면, 마른지 오래되어 굳은 것도 있었다. 온갖 색이 합쳐져 검은 기름통에서는 이상한 색소와 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이걸 반 나절만에 정리하라니. 너무하잖아. 어지럽히는 데는 일주일이 걸려놓고서. 카이토는 툴툴거리며 작은 캔버스를 주워 서랍장 위에 있던 빈 상자에 차곡차곡 넣었다. 본인은 습작이니 아무 쓸데없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하나하나가 멋진 그림이었다. 습작이라니, 자기혐오처럼 소름끼치는 단어였다. 어깨를 떨던 카이토는 벽에 기대있던 파란색의 캔버스를 주워들었다.

 

. 이거 나다. 어디 보자..716..”

 

카이토는 머리를 뒤져 716일의 파일을 떠올렸다. 그날이구나. 늦게 일어난 마스터와 함께 그림을 그렸던 날. 사물을 베끼는 정도의 프로그램은 기본적이었기에, 카이토는 견본으로 보고 있던 물병을 그럭저럭 그릴 수 있었다. 마스터는 물병을 그리는 카이토를 그렸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처음 하는 행동이었지만, 프로그램화 된 행동이라 어렵지 않았다.

 

이게 뭐야. 완전 똑같이 그렸잖아.”

사물의 좌표를 보고 종이에 배낀 거니까요..?”

좌표? 그건 또 무슨 기계 같은 소리야? 그림을 그리랬더니. 노래도 그렇게 부르냐? 악보에 적힌 대로.”

노래는 원래 악보에 있는 대로 발성하는 게 원칙인데요.”

그러냐...그렇게 노래하면 재밌어?”

 

재미? 카이토는 되물었다. 노래를 부르는 게 재미와 연관된 건지도 몰라? 노래를 불러서 행복한건 누구지? 성준의 이어지는 질문에 카이토는 대답할 수 없었다. 노래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라고 드문드문 대답했지만 불확실한 대답이었다. 신경 쓰지 말고 넘기라는 듯 성준은 카이토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었다. 무표정하게 사물을 베끼던 자신을 그린 캔버스를 카이토는 상자에 넣고 테이프로 봉했다. 기름을 먹인 걸레로 바닥을 닦고 종이를 대서 남은 기름을 흡수시켰다. 재미라는건 자신의 영역이라고 생각 하지 않았다. 분명 그림을 그리는 마스터는 평소와는 다르고, 마음 속에서 빛이 나는 모습이었다. 그건 인간이라서. 창작한 마스터피스와 복사본은 다른 것처럼. 꿈이나 희망이나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나.

 

그렇게 노래해도 마스터가 웃어준다면, 마스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비춰서 행복할지도.”

 

무의미한 모방감정. 의미를 부여하는 건 누구?

정돈된 방을 나온 카이토는 드문 피곤 감을 느꼈다. 거실에 깔린 자신의 낡은 담요에 몸을 말고 누워 충전기를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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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바다의 끝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어째서.

 

그래. 어째서일까.’

 

성준은 빌라의 계단을 뛰어오르며 턱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겨우 삼켰다. 머릿속으로는 카이토와 함께 보냈던 여름을 떠올렸다. 그가 바라던 조용한 일상을 변조하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몇 년이고 유행이 지난 노래를 부르는 카이토의 모습을 떠올렸다. 종일 거실에서 홀로 노래하다 저녁이 되어서야 작업실에서 나온 성준을 반기며 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과 소리 없는 웃음. 보라색 노을이 물들어가는 거리를 산책하며 자신이 보지 않은, 영영 볼 수 없을 것들을 꿈꾸며 말하는 목소리. 마스터가 그리는 바다라는 곳으로 가보고 싶어요. 마스터와 산책하고 싶어요. 노래하고 싶어요. 현관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성준은 곧장 카이토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카이토!! 문 열어!!! 할 말이 있어.”

할 말이 있다고. 중요할지도 몰라. 문 열라고! 이게 정말...켄타가 뭐라고 했지. 그래. 강제명령이야! 문 열어!!”

 

곧바로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사이를 빠끔히 내다본 카이토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켄타가 만일에 카이토가 문을 열지 않으면, 하고 가르쳐준 방법이었다. 스스로 나왔으면서 억지로 끌려나온 듯 멀뚱히 성준을 쳐다보더니 잠시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명령 실행 했습니다...켄타군, 치사한 것을 가르쳐 드렸네요.”

치사하다니, 앞으로 자주 써먹어야겠다. 너 이리 나와서 식탁에 앉아 봐. 물어볼 게 있어.”

갑자기 질문이라니. 이상한 바람이라도 부신건가요? 노래에 대한?”

그 놈의 노래타령 그만하고 앉아. 그리고 내가 묻는 질문에 솔직히 대답한다고 약속해.”

전 거짓말을 못하는데요. 뭐든지 편하게 여쭤보세요.”

 

성준은 카이토와 마주앉아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몇 달을 함께 했지만, 며칠 만에 보는 카이토 얼굴은 새로웠다. 진지한 분위기에 카이토는 어색한 듯 눈을 깜빡이다 콧잔등을 문질 거렸다. 화를 낼 것이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성준의 표정은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다급한 것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했다.

 

너의 전 주인은 어떤 사람 이였지?”

아하. 그건 저도 열람할 수 없는 봉인이라, 몰라요. 사용자가 바뀌면 이전의 메모리는 전부다 봉인되는 게 안드로이드 절대원칙이라.”

눈은 언제 다친 거지?”

안구 손상은...34개월 전. 손상에 대한 정보는 따로 보관하고 있어요. 그럼 다음질문은..어째서. 시겠죠. 그건 이전 사용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봉인상태입니다. 다만 등록된 손상의 이유는..외부 충격이네요. 이게 중요한 것인가요?”

날 만나기 전에 노래 해 본적 있어? 네가 볼 수 없다는 메모리 안에 음악파일이 있어?”

“...없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거죠? 사실은 한 번도 노래 불러 본 적 없으면서, 이제 와서....인가요. 그러네요.”

 

카이토는 고개를 숙였다. 괘씸하게. 이미 한 번 사용된 기기에 온전하지 않은 몸으로 기동 이상의 것을 바란다. 반쪽짜리 눈이 간지러웠다. 바라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마스터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더라면. 이런 감정은 없는 편이 나았다. 얼굴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이 밉고 미웠다.

 

카이토, 고개 들어.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거야. 너는 나를 좋아해?”

..?”

 

금지된 단어를 들은 듯 카이토가 흠칫 몸을 떨었다. 흐르던 눈물이 고개를 들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스터가 그런 질문을 할 리가 없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성준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리고 대답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좋아한다고. 처음부터, 마스터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고. 프로그램으로 이미 정해진 것이라도. 사람은 운명이라고 말하는 종류일지도 모른다고 비논리적인 기대를 품고 있었다. 카이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좋아..좋아해요.”

그래. 어떤 좋아요 인거지? 내가 너의 주인이라서? 너를 거두고 버리지 않아서? 임프린팅 설정을 끄더라도, 너는 나를 좋아할 수 있어?”

...확률적으로...혹은 실험적으로..”

미친..집어치워. 지금 생각 한 너의 결론을 말해. 네가 정확하게 나에게 바라는 걸 말하라고. 지난번의 기세는 어디 갔어?”

마스터..마스터에게 제 노래를 들려드리고..그러면 마스터가..절 좀 더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웃는 마스터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무리겠지만..”

그래. 만족스러운 대답이야.”

 

성준은 소리 없이 눈물 흘리는 카이토를 아무 말 없이 응시했다. 머리 위에서 시퍼런 바닷물이 쏟아진다. 천정에서 밝은 백사장이 펼쳐진 듯이 파도치는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푸르게 넘실거리는 바닷물을 성준은 본 적이 있었다. 살면서 보았던 바다 중에 무엇보다 깊고 조용하면서 거대한 생명체처럼 의지를 가진 듯 유영하는 물방울의 군집. 차가운 물이 목 뒤를 스치며 떨어진다. 가만히 두면 커다란 바다는 서서히 사라진 다는 것도 성준은 알고 있었다.

 

“...싫으신가요? 마스터는 제가 정말..귀찮기만 하신가요? 제가 좀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면..노래를 할 수 있다면..”

아니, 왜 계속 울어? 나는 나쁜 말 한 것도 없는데. 다 큰 남자가 징그럽게 눈물이나 뚝뚝 흘리고. 소름끼치니까 그쳐.”

우윽...흐엉...마스터어..”

울지 말라니까 왜 더 우는 거야...그래. 좀 더 이야기 해볼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이런..”

 

성준은 손을 뻗어 한 쪽에서만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의 시야 속 카이토는 자신이 만든 바다 속에서 투명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장면은 온 몸의 감각을 지배한다. 차가운 물을 넘어 깨문 입술로 가져갔다. 성준은 J와 헤어진 이후로 다른 누군가와 키스하는 건 처음이 아닌가 세어보았다. 부끄럽고 불행히도 처음이었다. 물속에서 키스 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카이토의 혀는 아이스크림처럼 차갑고 부드러웠다. 닿은 볼 사이의 가까운 거리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카이토의 감은 눈 사이에서 남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게 내 대답이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라고. 멍청아. 너 때문에 시야가 불투명하니까.”

거짓말...거짓말이죠. 장난치시는 거죠?”

내가 거짓말 할 만큼 한가해 보여?”

 

성준은 손바닥으로 카이토의 뒤통수를 툭 치고 지나갔다. 울렁이는 바다가 그치질 않았다. 쿵쾅거리는 심장고동이 먼 바다에서 지나가는 커다란 함선의 궤적처럼 귓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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