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것/당신과 다시'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8.12.09 카이토 10주년 앤솔로지 수록 [당신과 다시]

카이토 10주년 앤솔로지 <Rhapsody in Blue> 수록 

[당신과 다시] 

재판 계획이 없으니 웹수록 합니다.



당신과 다시.

 

 

길을 걷는 소녀의 긴 머리칼 사이로 찬 바람이 불어왔다. 두 해를 입어 보풀이 일어난 교복 카디건을 여민 목덜미 사이로 주변 강 냄새가 나는 차가운 물기운이 스쳤다. 가벼운 춘추복에서 동복으로 갈아입어도 되는 시기가 언제부터였던지, 교문으로 나오는 길에 세워진 안내 게시판에 적혀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흘겨본 턱에 기억이 제대로 나질 않았다. 내일 학교 가면 제대로 봐 두어야지. 알싸하게 코를 스치는 찬 기운에 소녀는 빨개진 코를 훌쩍였다. 재채기가 나려는지 코가 간질거렸다. 소녀는 콧잔등을 부비며 스치는 물비린내를 킁킁거린다.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소녀는 생각했다. 목요일은 지루하다. 금요일이라는 짐이 있으니까. 월요일보다 금요일이 어쩌면 더 잔인한 날일지도 모른다. 소녀의 어깨에 멘 책가방 속엔 교과서 대신 시내에 있는 서점에서 산 피아노 악보집이 들어있었다. 전철 정기권을 사고 나면 빠듯한 용돈을 모아 샀다. 소녀는 시내에 나갈 때면 악기사에 들러 공연히 기타를 퉁겨보고, 전자건반을 두드려보았다. 친절한 악기사의 점원이 다가올 때면 슬쩍 기타를 내려놓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가격표의 숫자는 열일곱짜리 여자아이가 가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어른이 되면 저만큼의 돈을 쓸 수 있을까. 학교에는 종종 음악학원을 겸하여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재능이라든지, 부모님의 기대라든지. 어느 쪽이든 기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아들이. 소녀의 부모님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벽을 만난 듯 멈추고. 소녀의 발걸음도 함께 멈추었다. 익숙한 집 문 앞에 익숙하지 않은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매우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꿈처럼. 소녀는 카디건 소매로 눈을 비볐다.

 

"실례지만, 여긴 저희 집인데. 누굴 찾아 오셨어요?"

 

소녀는 장소와 시간에서 한 뼘쯤 붕 뜬 느낌의 푸른 머리칼의 남자를 떠보듯 질문했다. 집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소녀의 부모님. 혹은 소녀에겐 존재하지 않는 형제의 이름을 댈지도 모른다. 소녀는 의심하는 법을 알았다. 학급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와무라, 하나코. 아무튼 그런 느낌의 이름을 가진 활발한 아이가 소녀를 바라보며 '카요쨩은 귀엽지 않아.'라고 말하며 볼을 부풀리며 귀여운 말투로 이야기 했었다. 여자애는 꼭 귀여워야 하는 거야? 소녀가 퉁명스럽게 책상에 턱을 괴고 대답하자 대답마저 귀엽지 않다며 하나코는 볼멘 목소리였다.

 

"기다렸어요. 마스터."

". 누구시라고요?"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눈에 봐도 톡 튀는 새파란 눈의 남자가 몸을 쪼그리고 앉아있던 문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반갑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혼자서, 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마주친 듯이 말이다. 전혀 모르는 얼굴인데도. 파란 물감을 짜낸 듯한 머리칼과 눈은 한 번 보면 잊히려야 잊힐 수 없는 모습.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전 당신이 누군지 모르는데. 그리고 제 이름은."

"그거야 당연하죠. 전 당신의 연인이랍니다. 지금은 20XX년이니까. 십 년 정도 뒤에요."

"하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믿기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왔어요."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는.

얼굴이 멀쩡하다고 해서 사기꾼이나 정신병자가 아니란 법은 없다. 요즘은 멀쩡한 사람이 더 이상하다고 했다. 소녀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외투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전화의 폴더를 열었다. 집 앞에 이상한 사람이 있어요. 머리가 파란색이에요. 생긴 건 평범한데-. 휴대전화의 버튼이 1을 가리키자 남자는 수상한 기운을 알아채고선 소녀에게 다가와 다급하게 호소했다. 남자는 소녀의 손목을 잡으려다 흠칫 물러섰다. 소녀는 찰나의 기시감에 작은 소름이 돋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제 이야기를 한 번만 들어주세요, 전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이야기? 처음 보는 사람한테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게 제일 이상한데요."

"마스터는 어릴 때랑 똑같네요. 변한 것이라고는 머리길이 정도 밖에 없어요. 긴 머리도 어울려요."

 

남자의 파란 눈동자는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소녀를 향해 있었지만, 눈빛의 상대는 소녀가 아니었다. 의미 모를 말만 늘어놓는 남자를 소녀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당신 누구야."

"마스터가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숭어, 그리고 지금쯤이라면 악보집도 가지고 있을 텐데. 아직아닌가요?"

 

가방 속에.

 

소녀는 작게 속삭였다. 몇 년 전 우연히, 무심코 들었던. 귀에서 잊히지 않고 맴도는 연주곡. 소녀의 주위는 소녀의 단조로운 일상이나 행동처럼 조용했고, 소녀는 자신의 은밀한 선호를 다른 이에게 말할 정도로 타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여고생이 숭어라니, 연예인이나 좋아할 법한 나이인데 말이야. 마음속에서 같은 반의 하나코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딘가 음울한 카요와 달리, 하나코는 구김살 없이 귀여운 여자아이이다. 뜻밖의 이름에 소녀는 가방에서 커다란 악보집을 꺼냈다. 남자는 구원이라도 얻은 듯 밝은 얼굴로 악보집과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행이에요. 이번엔 제대로 만들었구나."

 

남자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다. 둘의 대화는 어긋났다. 시점이든, 초점이든. 어느 것이든 맞지 않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소녀는 자신을 마치 보석함에서 꺼낸 오래된 반지처럼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발을 향해 살짝 발길질했다.

 

"답답하니까.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을 거면 가버려."

"배고프지 않으세요? 저녁 함께 먹어요. 어제처럼."

 

소녀의 질문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그러나 의미 모를 상냥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소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남자의 '어제처럼' 라는 말에는 상당한 의미가 담겨 있는 듯 남자는 힘을 주어 그 단어를 강조했다. 소녀에게도 다른 이와 함께 하는 저녁은 오랜만이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괜찮았다.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새파란 머리의 초면인, 10년 후의 애인이라 우기는 남자라도 저녁의 일행으로 환영이었다.

 

"."

 

25번째 기억소자. 중간 저장 완료.

---현재의 마스터에 대한 설명-----

카이토는 머릿속 체크리스트에 있던 목록에 선을 그었다. 믿음의 크기는 현실감이었다. 카이토는 꿈을 꾸듯 몽롱한 기분으로 문을 여는 소녀의 뒤를 따랐다. 뚜벅이는 작은 구두의 발걸음이 돌계단을 경쾌하게 울렸다. 마스터의 좁은 연립아파트를 올라가는 계단은 발소리로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소재의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었다. 무겁고 길게 퍼지는 발소리는 남자. 얇고 넓은 소리는 여자의 하이힐. 카이토는 카요를 기다리며 발걸음의 개수를 셌다. 연립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일을 했다. 그래도 부족한 생활이었다. 마스터는 4시간을 자고 남은 시간에는 곡을 썼다. 마스터의 노래는 좁은 방에서 몰래 울려 퍼지기엔 아까운 곡이었다. 카이토가 부르기에도 무척이나 아까운 곡이었다.

 

 

***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어. 부모님이랑 따로 살거든."

 

마스터의 부모님은 그녀가 15살이 되던 해에 나란히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녀를 위해 남겨진 유산은 많지 않았다. 딸을 두고 먼저 죽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대학을 포기하고 찾은 단순한 사무직으로 얼마 안 되는 돈을 벌었다. 그녀가 고가였던 신디사이저를 사고, 꿈에도 그리던 보컬로이드를 마련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쁜 얼굴이었던지. 그것은 카이토가 기억하는 마스터의 가장 처음의 얼굴이었다. 열 두 번째. 열 세 번째. 스무 번째. 인공지능의 이름이 어리석도록 카이토는 퇴색된 숫자를 세었다. 몇 번이고 다시 만난 당신. 새삼스럽게도 늘 처음이라는 표정이다. 앳된 얼굴의 마스터가 새하얀 손가락으로 구식 도어락의 숫자를 눌렀다. 카이토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입 모양으로 말했다.

 

'2-5-0-8.'

 

마스터는 늘 그 숫자를 썼다. 기억력이 좋지 못해서. 마스터는 유달리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단정한 외모와는 달리 덜렁거리는 성격이었다. 숫자의 나열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마스터는 그 네 자리가 어쩐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기억에도 생명이 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기억은 스스로 소멸하고 만다. 그녀를 파먹고 들어간 병은 마스터에게 망각할 기억을 선택할 권리를 박탈했다. 마스터의 기억은 자멸한다. 그녀가 그녀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기억마저 숨을 멈추었다. 카이토는 그것이 자신에게 '리셋'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삶이 주어지지 않는 사람에게 그것은 '죽음'과 동음이의어였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그녀의 삶은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스터는 겨우 서른 살 생일을 다섯 달 앞두고 있었다. 마스터가 잊은 마스터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하나코는 마스터의 손을 잡고 울었다. 비록 그녀가 하나코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코는 마스터를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카이토는 하나코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잡은 손을 놓지 않겠다고 멩세했다.

 

"부엌은 여기. 앉아서 기다려 줄래요?"

"아뇨. 제가 해드릴게요."

"손님이잖아요.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지만, 손님은 움직이는 게 아니래요."

 

소녀는 모자가 달린 교복 외투를 벗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제저녁에 남겨두었던 볶음 반찬이 랩에 씌워져 있었다. 손님이 오면 대접을 해야 하는데-. 물론 그는 초대된 손님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대접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소녀는 밥을 잘 챙겨 먹는 편이 아니었다. 하굣길에 마음에 드는 가게를 찾아가 때우고 오는 일이 많았고, 집에서 먹는 날이면 간단한 인스턴트 음식이었다. 도시락은 늘 지하철역 앞의 편의점에서 구매했다. 만족할 만한 식생활은 아니었으나, 편한 것이 우선이었다. 소녀는 뚫어지게 냉장고 선반을 찬찬히 바라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먹다 남은 주스. 이웃에게서 받은 소녀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장아찌 절임. 소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냉장고 속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가 할게요. 마스터는 앉아 계세요. 씻고 오셔도 되고요. 학교 다녀오셨잖아요? 전 손님이 아니라, 그래요. 제 이름은 카이토랍니다. 성은 없어요."

"평범한 이름이네요."

"그렇죠? 마스터는 카요. 성은 타니무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문패에 적혀있었어요. 이름은 방문 앞의 장식에서. 카이토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웃으며 지어냈다.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어제 먹다 남은 반찬그릇을 꺼냈다. 의심의 눈초리는 지울 수 없었지만, 달리 반박할 말 또한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할게요."

난 옷 갈아입고 올게요!”

 

어느새 냉장고 문을 잡고 선 카이토가 옆에서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가까운 거리에 소녀는 몰래 숨을 삼켰다.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소녀는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가슴을 느끼며 옷을 벗었다. 어째서인지 스타킹을 벗고 치마단추를 푸는 손이 부끄러웠다. 누군가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건 착각일 테지만. 착각일 테지만, 착각. 눈을 돌리자 분명 닫았던 문이 살포시 열려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들자 이미 당황한 표정의 카이토와 번뜩 눈을 마주쳤다.

 

", , 그게."

"꺄아악!!! 어딜 보는거에요!!!!"

", 죄송합니다!"

"역시 변태였어!!! 경찰에 신고할 거야!!!!"

 

풀린 치마단추를 손으로 잡아 올리며 소녀는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침대에 놓여있던 쿠션을 방문을 향해 던지자 문이 빠르게 닫혔다. 소녀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도 변태아냐, 변태. 하고 한참이나 씩씩 댔다. 얼마 뒤에 저녁준비가 다 되었다며 빼꼼히 문을 연 카이토는 난처하게 말을 흐렸다.

 

"마스터, 죄송해요. 노크했는데."

"안 들렸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이상한 마스터는 뭐예요. 이름을 알면 이름으로 불러요."

"불러, 본적이 없어서. 마스터는 마스터니까."

 

뭐야. 정말. 소녀는 고개를 돌리고 혀를 찼다.

 

"혹시 콘센트를 쓸 수 있을까요?"

"뭐어. 휴대폰이라도 충전하게요?"

"아뇨. 저를 충전해야 해서요."

 

일련의 일에도 미동 없던 소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이토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살짝 들어 올려 허리 부분을 만지작 거리더니 진공청소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코드뭉치를 빼냈다.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이토의 등과 연결된 코드의 끝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제가 왜 당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지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저는 물건이랍니다."

"거짓말.“

그러니 잊지 말아주세요.”

 

58번째 기억소자. 중간 저장완료.

 

어떤 세계의 하늘에서는 유성이 마구 떨어졌다. 카요는 겨울이 되면 기차를 타고 깊이 언 호수의 중심에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구경했다. 숙박은 하지 않고 새벽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언젠가 카이토를 데리고 간 적도 있었다. 카이토는 두꺼운 담요를 이불처럼 깔고 누워 별자리의 이름을 말했다. 겨울의 별자리. 오리온. 시리우스. 프로키온. 리겔. 사전을 읽듯 거침없이 말하는 카이토의 입을 두툼한 벙어리장갑으로 막은 카요가 하늘을 가리켰다.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하자. 이름으로 말 할 수 없을 만큼 별들은 아름다웠다. 밤하늘처럼 검은 마스터의 눈이 반짝였다.

 

 

***

 

 

 

이상한 동거는 소녀의 예상외로 평범하게 이어졌다. 카이토는 놀라울 만큼 소녀의 취향을 꿰뚫고 있었다. 소녀가 아침에는 밥 대신 바나나 우유를 먹는다는 것도. 샤워하고 나면 수건이 세 장이 필요하다는 것도. 말하기 미묘한 습관까지 알고 있었다. 안다고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카이토의 행동을 보고 있자면 소녀를 배려하는 것이 아주 익숙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거리를 두는 것이, 그것마저 소녀를 배려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할 수밖에 없도록. 그것은 아주 기묘하고 새로운 감정의 탄생이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겉모습으로 치자면 소녀보다 여 댓 살은 많아 보이는 모습의 청년이 소녀에게 깍듯이 주인님, 주인님. 하며 따라붙는 모습은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썩 기분 나쁜 일이 아니란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었다. 소녀는 학교에서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도 혼자가 아니었다. 소녀는 몰래 배어나오는 웃음을 숨겼다.

 

"마스터ㅡ, 오늘 학교는 어땠어요?"

"똑같았지. ."

"흐음. 이상한 점은 없었구요?"

"네가 제일 이상해."

 

소녀는 머플러를 벗어 카이토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빤히 쳐다보았다.

 

"또 저번 처럼ㅡ, 변태처럼 머플러 냄새 맡을 거야?"

". 그건 정말. 무의식적인. 마스터 향기가 좋아서!"

"그걸 바로 변태라고 하는 거라고."

 

잊고 싶지 않은걸요. 카이토는 아련한 얼굴로 말했다. 카이토는 종종 그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확인하는 듯이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소녀는 미소의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질문의 대답을 알아버리면, 카이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소녀와 카이토는 간단히 저녁을 먹고, 사소한 이야기를 했다. 친구에게도 하지 않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

 

"피아노 말이야. 처음 만든 사람은 손이 아주 컸을 거야."

"아아. 확실히. 마스터는 손이 작은 편이죠."

"그래서 포기했어. 피아노는 비싸기도 하고."

"기타는 손이 작아도 재밌으니까요. 가격도 싼 편이에요."

 

재미, 라던지. 그런 것 때문에 하는 건 아니지만.

 

몇 겹을 벗겨낸 속마음이 카이토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주문처럼 튀어나오곤 했다. 소녀는 숭어를 들을 때면 유치하게도 노래나 음악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다. 음악을 듣다가 죽을 수도 있을까? 폭풍처럼 몰아치는 멜로디의 한가운데에는 고요한 평화의 바다가 있었다. 소녀는 봄바람 처럼 울렁이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꼭 숭어를 틀어달라고 부탁할 거야.”

벌써 장례식 계획이신가요. 그렇다면 그 부탁을 저에게 맡겨주세요.”

"너는 못 믿겠어."

"아아. 마음 아파요.“

 

 

67번째 기억소자. 중간 저장 완료.

 

 

***

 

 

"못 믿겠어. 넌 누구야?"

"마스터, 어째서."

 

난 보컬로이드를 산 적 없어.

 

그녀의 증상은 심해지기만 했다. 혼란스러운 눈동자는 창밖의 익숙한, 그러나 처음 보는 풍경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던 이 거리를 사랑했다. 자주 가는 단골 카페, 식료품점, 방음이 되지 않는 벽이지만 연주를 하면 함께 노래하며 즐거워하던 사람들. 그녀는 사랑받고 있었다. 사랑받던 기억을 잊어버린 단 건 너무나 잔인하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칼을 부여잡은 마스터는 자신의 이름과, 태어난 도시, 부모님의 이름. 그녀의 기둥이 되는 것들을 수첩에 적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살고 싶은지를 처절하게 기록했지만, 기록했다는 사실마저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지?"

"거짓말"

 

며칠 전 잠에서 깬 마스터는 갓난아이처럼 순수한 얼굴로 처음 보는 자신의 집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서랍 속 가득한 뇌 기능 개선제들. 진단서. 소견서. 검사결과지. 어느 것도 마스터의 도망치는 기억의 발자취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망각의 늪은 마스터를 온전히 잡아먹고 있었다. 카이토는 상자 속에 그녀의 인생을 나타낼 물건을 정리했다. 그녀의 짧은 인생과 그녀가 그녀임을 증명하는 사건과 물건들. 사진. 일기장. 짐을 정리한 카이토는 그녀의 휴대폰 속 단축번호 5번을 눌렀다. 안드로이드의 기본 기억 설정을 만들 듯, 그녀의 기억의 숨을 되찾기 위해. 그녀가 카이토의 숨을 불어넣어 준 것처럼.

 

하나코씨? . 저 카이토에요. 부탁이 있어서요.”

 

 

***

 

 

소녀는 자기 전이면 언제나 CD플레이어로 숭어를 들었다. 잠옷을 갈아입은 소녀가 방문을 열면 따뜻한 우유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카이토가 서있었다. 침대에 배를 베고 누운 소녀가 숭어를 들으며 멜로디를 흥얼거리면, 어느새 카이토가 화음을 맞추고 있었다. 두 개의 목소리는 어느 때면 세 개, 네 개로 겹쳐 들리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지. 둘밖에 없는 집인데. 잡지를 넘기던 소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벌써 이명이라든지. 스트레스성으로 흔하다고 해.”

학교에서 무슨 일 있으세요?”

없어. 하나코가 좀 귀찮게 굴어. 계속 같이 케이크 먹으러 가자구.”

왜 가지 않으세요?”

그냥. 한 번 어울려주면 다음에 거절하기 힘들어서.”

 

72번째 기억소자. 중간 저장 완료.

 

 

***

 

 

"다시 만들 수 있는 거죠.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전부 다 인 거지? 카요의 기억이 남은 건. 사라지게 하는 건 쉬워도 다시 만드는 건 어려워. 실패할 확률도 높고."

"파괴는 쉬워도 창조는 어렵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해 볼만 해요. 저는 접속이 가능하니까. 하나코도 마스터를 잃고 싶지 않잖아요?"

"당연히. 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어. 아아, 불쌍한 카요쨩.“

 

하나코는 진정제를 맞고 잠이 든 카요의 관자놀이에 작은 전극이 달린 침을 여러 개 꽂았다. 보컬로이드가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은 흔하다. 바이러스나 크랙 프로그램이 깔린 PC에 연결되면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 휘발성 메모리 단자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백업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지 않은 사람들은 비싼 돈을 들여서 기억압축파일을 만들곤 했다. 사용자의 기억을 토대로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실패 확률이 높았다. 타인이 기억하고 있는 토대로 만들어진 기억은 본질과 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싼 가격과 불확실하다는 단점이 있어도 기억 복원을 원하는 사람은 있었고, 하나코는 종종 안드로이드의 기억 압축파일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기억이란 건 절대적인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의식의 영역이었다. 짙은 안개처럼. 또는 옅은 물결처럼. 아래가 없는 하늘처럼.

 

"네가 원하는 만큼은 절대 되지 않을거 야. 최악의 경우엔 네가 기억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고. 뇌도 나름 논리적이거든. 넌 불청객인데다가 카요의 모든 기억에 등장한다는 건 뇌가 보기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할래요."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분명 카요쨩이겠지."

 

그녀의 말버릇이었다. 마스터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사고로 하루아침에 부모님이 죽은 뒤로 그녀의 불행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녀의 재산을 사기로 날린 멍청한 친척이나, 하고 싶은 음악을 제대로 배울 수 없는 각박한 생활. 그녀는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믿었다. 음악을. 카이토가 만들어주는 아침을. 하나코와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7년 전을 기억하고 있다. 눈을 뜬 순간부터 마스터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5월의 봄을 닮아 따사로운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세계의 태양이었다. 반짝이는 비늘을 가진 무지개색 숭어였다.

 

 

***

 

 

소녀는 식탁에 앉아 가계부를 썼다. 카이토는 먹지 않고, 옷을 갈아입지도, 씻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늘 깨끗한 모습이었다. 소녀의 옆에서 카이토는 저녁을 먹고 남은 찌꺼기를 행주로 닦았다. 가계부를 끄적이며 볼펜 끝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던 소녀가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이번 달은 적자야. 이제 굶어야겠어."

"안돼요. 성장기는 꼭꼭 챙겨 드셔야 한다구요."

"무슨 돈으로? 돈이 없단 말이야."

"친척분 한테 전화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싫어. 어차피 못 받을게 뻔해.“

 

너 때문이야. 네가 없었더라면. 소녀가 내뱉은 말은 순전히 치기어린 투정이었다. 카이토가 있어서 소녀의 아침은 따뜻했으며, 저녁은 외롭지 않았다. 팬케이크에 녹아드는 시럽처럼 익숙하게 일상으로 녹아들었다. 곧 자신의 말이 부끄러워진 소녀는 카이토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카이토?"

 

카이토가 손에 들고 있던 행주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카이토가 비눗방울이 터지듯 사라진 자리를 소녀는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76번째 기억소자. 중간 저장 완료.

 

 

카이토는 작은 방의 침대로 떨어졌다. 풀석이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나온 낡은 먼지들이 풀풀 날렸다. 휴우. 아슬아슬하게 미로를 빠져나온 듯 카이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에는 두꺼운 책들이 흩어져 있었다. 201X4. 201X10. 200X7. 책의 표지와 옆에는 반듯한 글씨체로 일정한 기간이 쓰여 있었다. 카이토는 11월의 책을 찾아 책장을 넘겼다. 책에는 사진과 필기체의 글이 낙서처럼 적혀있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는 백지의 책이었다. 책장 마다 새롭게 발굴한 기억의 문장들이 남아있었다. 카이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4시가 가까워져 온다. 곧 새벽이 가시고 아침이 밝아올 것이다.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 해. 너무 귀여우셔서 오래 잡아놓고 있었네.”

 

카이토는 잠이 든 카요의 손을 잡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의 전극과 연결된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조작하더니 손을 잡은 채로 침대에 다시 잠들었다.

 

 

***

 

 

여자는 카페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낮과 밤이 바뀐 교대직은 몸이 힘들어도 들어오는 돈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일상적인 두통을 느끼던 여자는 커피를 들이켰다. 우중충한 창 밖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여자는 쇼핑백에서 카탈로그를 꺼냈다.

 

"신시사이저. 사지 말 걸 그랬나."

 

우연한 일치라고 하기엔 신의 장난이 심했다. 몇 달을 고민하다 큰 맘을 먹고 신시사이저를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중고로 얻었던 세탁기가 고장 나버렸다. 여자는 귓속으로 흘러나오는 숭어의 멜로디를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튕겼다. 고요한 물을 가르며 헤엄치는 숭어. 커다랗고 위대한 숭어. 오선지를 흐르는 따스한 물결. 여자는 숭어를 감히 사랑했다. 그녀는 거대한 숭어를 상상하고 있었다. 카페의 종업원이 불쑥 나타나 초코케이크가 올려진 접시를 내밀자 그녀는 흠칫 놀라며 귀에 꽂았던 이어폰의 한쪽을 빼며 당황한 듯 웃었다.

 

"케이크는 시킨 적 없는데요."

"저쪽의 남성분이."

 

카페의 직원은 싱긋 웃으며 건너편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남자는 어느새 여자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는 신기하게도 푸른 머리칼이었다. 여자는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마스터. 저를 기억하시나요?"

"너는."

"어디 까지 기억하고 계신 거죠? 몇 살? 언제? 제 이름을 아시나요?"

"모르겠어. 아냐. 너는."

 

누구지?

 

59번째 기억소자. 중간 저장 완료.

 

 

 

-.

 

나의 노래를 불러주던 소중한.

 

"카이토.“

 

파도가 부서지듯 기억의 조각은 새하얀, 의미 없는 단위로 쪼개졌다.

45번째 소자. 중간 저장 완료.

 

 

***

 

 

여자는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한적한 기차역에서 기차를 탔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쓰지 않았던 겨울 휴가를 썼다.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근원적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 보다 짧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건강보다는 돈과 일에 매달렸다. 가방 속에는 보온병에 든 뜨거운 차와 악보집과 녹음기가 들어있었다. 여자는 누군가와 함께였다. 아니, 그것은 여자의 착각이었다. 여자는 일생을 홀로 지냈다. 친한 친구도 몇 있었지만, 친구로서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비참한 일이란 것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결핍은 결핍으로서 완전하다. 여자는 일기장에 떠오른 문장을 끄적였다. 앞좌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불쑥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자 여자는 손으로 일기장을 숨겼다.

 

혼자 온 건가요?”

으음. 그렇다면 왜요?”

이런 겨울에 시로야마 호수를 찾는 사람은 늘 혼자더라구요. 어때요. 동행해도 될까요?”

붙임성이 좋네요. 머리는 염색한 건가요?”

 

여자는 볼펜 끝으로 남자의 파란 머리칼을 가리켰다. 특이한색이네. 터키쉬 블루. 코발트블루. 나도 언젠간 특이한 색으로 염색하고 싶어요. 여자는 불쑥 자신의 희망을 말했다. 남자는 쑥스러운 눈치로 파란 머리끝을 손가락으로 넘기더니 작게 웃었다.

 

어떤 색으로?”

초록. 보라. 어느 색이든 상관없어요.”

당신다운 대답이네요.”

절 알아요? 우리 초면인데.”

 

남자는 타니무라 카요라는 여자의 소개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는, 이상한 대답을 하며 기어코 옆자리를 파고 들어왔다. 덜컹거리는 삼등석 기차는 끝을 모르고 눈이 내리는 풍경을 넘어 여러 정거장을 지나갔다. 여자는 책을 읽거나 가판대에서 코코아를 마셨다. 남자에게도 권했지만, 그는 손을 저으며 낡은 악보집을 읽었다.

 

그건, 악보? 음악 하는 사람이에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네요.”

. 무슨 말이야. 정말. 나도 작곡을 조금 해요. 아마추어지만.”

멋지네요. 언젠가 들어보고 싶어요.”

 

마지막 정거장에 도착한 여자는 근처 카페에서 밤을 기다렸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두 테이블 옆에 앉은 파란머리의 남자는 무언가를 열심히 기록했다. 카요는 어느새 남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여행 중 인걸까. 남자는 고단해 보였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남자는 눈을 접어 웃었다. 이윽고 밤이 되자 카요는 남자의 손을 이끌고 꽁꽁 언 호수를 걸었다. 겨울의 성좌는 유달리 맑았다. 불빛 하나 없이 얼은 호숫가라면 더욱 그랬다. 카요는 손가락을 높게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남자의 숨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그는 하늘색의 포근해 보이는 머플러를 하고 있었는데, 머리카락 색과 퍽 어울렸다.

 

별자리, 알아요?”

오리온. 시리우스. 프로키온. 리겔.”

별자리를 많이 알고 있네요. 당신은.”

이제 말은 그만하기로 해요. 이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니까요.”

 

두 개의 하얀 숨이 배어나왔다. 카요는 쏟아질 듯한 별을 영영 바라보았다. 어딘가로 곧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카요는 문득 자신이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느꼈다. 옆에서 피어나오던 하얀 숨이 사라지고. 호수의 얼음에 새겨진 발자국만이 남겨져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호숫가를 살피던 카요는 얼음 바닥에 누워 정적만이 가득 찬 밤하늘이 쏟아지는 어둠과 빛의 향연에 눈을 맡겼다. 누군가 함께라면 좋을텐데. 작게 읊조린 소원을 들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359번째 기억소자. 중간저장 완료.

 

 

***

 

 

여자는 잠에서 일어났다. 아주 깊은 잠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자는 찌뿌듯한 몸을 쭉 폈다. 머리가 뻐근했다. 그녀는 기억나지 않는 간밤 동안 묵은 숨을 푸욱 내쉬고 엉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냈다. 달력에는 엑스자가 그어져 있었다. 다행히 쉬는 날이구나. 그녀는 혼잣말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 일 그만뒀지 참.”

 

세달 전이였던가. 한 달 전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싱크대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어제저녁이었을 스파게티 소스가 묻어있는 그릇이 기름기가 뜬 물에 담겨있었다. 접시는 두 개. 어젯밤에 누군가 집에 왔었나?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해보려 애썼으나 어젯밤의 기억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머릿속을 헤메던 그녀는 반추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 병이 그렇지 뭐. 기억 속의 바다에는 침몰한 선박이 가득했다. 소중한 보물을 싣고 가던 배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잃어버린 보물이 무언지도 잊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약통이 든 상자에서 아침 분의 약을 꺼내 먹었다. 자박자박 걸어 화장실로 향하던 그녀는 초인종 소리에 문가로 걸어갔다. 문 고리를 걸고 살짝 현관문을 열자 처음 보는 보컬로이드가 눈앞에 서있었다.

 

. 카이토네. 보컬로이드?”

안녕하세요. 저는 사와무라 하나코씨로부터 선물이에요. 당신의 집에서 지내도 괜찮을까요?”

걔도 참. 이런 거 부담스럽다고 해도. 하지만, 카이토는 가지고 싶었어. 들어와요.”

 

카요는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 하나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하나코는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안드로이드를 개발하는 공학도였다. 조금 귀찮게 달라붙지만, 좋은 아이. 돈 잘 버는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월급을 몇 달치 부어도 모자랄 비싼 보컬로이드를 이렇게 생일 선물로 덥썩 보내주다니. 오래전부터 보컬로이드를 바래왔던 카요는 어색하게 자신을 보고 선 카이토를 향해 싱긋 웃었다.

 

여보세요-. 어라. 카요쨩! 일어난 거야?”

. 하나코도 참, 내 생일 얼마 안 남은건 어떻게 알고서. 연구소에서는 보컬로이드 싸게 살수 있다더니. 별로 비싸지 않았지?”

어라라.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네에.”

모르는 척 하긴. 선물해준 카이토 말이야, 잘 쓸게. 고마워. 늘 갖고 싶었어.”

이런. 역시 충돌 해버렸나. 카요쨩, 카이토 좀 바꿔줄래?”

 

카요는 고개를 갸웃이며 휴대폰을 카이토에게 넘겨주었다. 하나코는 엉뚱한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안녕하세요. 하나코씨. 80%정도는 복구했어요.”

충돌이 아니지, 네가 마지막에 삭제하고 나온 거야?”

어쩔 수 없었어요. 계속 충돌해서 기억도 함께 사라지던 걸요. 우회 회로로 여러 번 다시 해봤는데도.”

너는 그걸로 된 거야?”

다시 시작할 거에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시간 되면 놀러오세요. 하나코씨를 좀 더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후후. 공들였어요.”

 

하나코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귓가에 익숙한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버려놓은 설거지를 끝내고 손을 닦은 카요는 테이블 위에 있던 CD플레이어를 재생했다. 카이토는 냉장고에 있던 바나나우유를 꺼내 머그잔에 담았다.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아침부터 클래식이라니. 멋진 선택이에요. 숭어, 좋은 곡이죠.”

알고 있어? 맞아. 내가 죽는다면, 장례식에 꼭 숭어를 틀어달라고 유언에 남길 거야.”

 

아차, 처음 봤는데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네.

내 이름은 타니무라 카요. 앞으로 잘 부탁해.

 

카이토는 악수를 청하는 손을 잡았다. 예전의 어떤 때처럼. 카이토만 기억하고 있는 따스한 순간. 찬란히 빛나던 세계의 기억을 붙잡고 활짝 웃었다. 처음인 것처럼.

 

저는 보컬로이드 카이토. 언제나 당신을 위한 노래를 부를게요.”

 

다시. 당신과.

 

 

 

 

 

Posted by michu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