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사랑의 종언


 

성준은 급하게 켄타가 마실 음료수와 즉석밥, 과자를 산 비닐봉지를 들고 켄타에게 받은 문자를 읽었다. 꽤 친해졌음에도 정중한 문자에 저절로 성준 자신도 긴장하게 된다. 실례이고, 미안하다는 여러 문장 뒤에 아무래도 집의 정리가 필요 하실 거 같아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준비되면 연락을 달라는 본 내용이 있었다. 전쟁 같은 마감을 끝낸 성준은 엉망이 된 작업실에서 며칠 동안 죽은듯이 잠을 잤다. 카이토가 생사확인을 위해 몇 번 왔다 간 것도 꿈결에 잊어버린 채였다. 켄타의 문자를 뒤늦게야 발견한 성준은 허겁지겁 거실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카이토를 불러 집을 치우게 하고 집을 나섰다. 카이토라는 녀석은 실수투성이에 덤벙대도, 기본 프로그램 자체는 괜찮은 편이었다. 천성과 환경에 의한 성격이 다른 것처럼. 세상에는 엄청난 수의 카이토가 있겠지만, 성준이 가진 카이토는 하나밖에 없다. 도플갱어-. 와는 다른 개념이다. 직접 느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인식과 감각 사이의 새로운 것이었다.

 

즉석밥도 없다니...이때까지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일본에 이사 온 날로부터 8개월을 꽉 채웠다. 생활은 안정되었느냐면 좋은 말로도 그렇지 못하고, 그림은 아직 과도기로 조금만 방심하면 허투룬 곳으로 빠지기 일쑤다. 그러면 이 일의 시작이자 원흉인 카이토를 부르고, 얼굴을 보면 다시금 어떤 시상이 떠오른다. 손에 닿을 듯 닿을듯 잡히지 않는 멀지만, 언젠가 느껴본 데자뷰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캔버스로 옮기기엔 너무 큰 감정이다. 이렇게 커다란 감정이 있을 거라고 예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자신을 압도하는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물론 카이토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독히 살아가기로 했다 하여도, 감정적인 자극이 없다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준은 빌라의 계단을 오르며 차오르는 숨을 골랐다.

 

 

나왔어. 집 제대로 치워놨겠지?”

그럼요. 하나밖에 없는 눈이지만 사각은 없답니다.”

. 좋아. 셋이서 먹으려고 아이스크림도 사 왔어.”

우와. 감사합니다. 켄타군은 언제 올까요?”

여섯시 반쯤...이지 않을까?”

이십분 정도 남았네요. 식탁은 닦아놓았는데..”

즉석밥. 이거 데워야해.”

 

성준은 비닐봉지를 뒤적거려 즉석밥 세 개를 꺼냈다. 기껏 슈퍼에 갔지만, 뭘 사와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켄타는 학생이니 술을 마시거나 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도 자신의 것으로 맥주 두 캔을 담았다. 간만에 혼자 나가는 것이라 애매했다는 이야기를 카이토에게 했다. 카이토는 뜨거운 물을 끓이고 맥주와 주스를 텅 빈 냉장고에 담으며 성준의 투덜거리는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역시 제가 없으니 헤매시는군요? 기뻐요.”

그런 의미는 아닌데. 애도 아니고. 길을 헤맷다 는 게 아냐.”

마음이 해맸다는 건가요.... 켄타군이 왔나 봐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카이토는 현관으로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카이토형..실례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오랜만이에요.”

어엉. 들어와. 일부러 신경 써줘서 미안하네.”

아뇨아뇨,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전시회 마감 수고하셨어요.”

 

켄타는 손에 든 종이봉투 속에서 정갈하게 담긴 플라스틱 통 여러 개를 꺼냈다. 연근 조림. 달걀 장조림. 가지볶음. 손수 만든 음식을 먹어보는 게 얼마만인지. 줄곧 타지생활을 반복해온 어머니께 성준 형 이야기를 종종 했더니 챙겨주시더라고요. 이런 시골에 유명한 화가가 계신다니. 언젠가 전시회에 가보고싶 네-. 하시면서. 켄타는 싱긋 웃으며 작은 그릇에 반찬을 담는 카이토를 도왔다. 켄타의 집은 악기상이라고 했지. 사람이 드문 곳이라 악기사는 잘 안 될텐데. 가업을 이어받은 건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없는 눈치이니, 켄타도 편하게 사는 것을 아닐 것이다. 친구도 별로 없는 모양이고. 피곤한 기력이 역력한 모습으로 성준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전시회는 뉴욕이라. 나도 이번은 가지 않아. 도록이라면 챙겨줄 수 있는데.”

, 정말요? 저 사실 형의 그림 인터넷에서밖에 보지 못해서.”

카이토, 내 작업실 책장에 있는 도록 좀 가지고 와.”

저도 함께 봐도 되는 건가요? 도록은 종류가 다섯 권인데. 어떤 것을 말씀하세요?”

...아무거나 상관없지만 최근 것이 그나마 낫지 않을까.”

 

성준은 뜨거운 밥과 연근 조림을 먹으며 마음속 깊이 감동했다. 카이토가 해주는 스파게티나 샌드위치도 맛은 그럭저럭 이었지만, 자판기에서 나온 듯한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켄타의 어머니를 위해서 일본에 전시회라도 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답례로 뭐든지 해줄게. 먼저 밥그릇을 모두 비운 성준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시내 나갈 때 백화점에서 화과자라도 사다 줄까. 어머니께서 좋아하신다면. 아니면 현금. 성준의 말에 켄타는 자리에서 일어날 듯 놀란 표정이었다.

 

그렇게 비싼 건 받아도 부담이에요! 현금은 더더욱...그럼, 형의 도록에 사인하나 받아가도 될까요?”

연예인도 아닌데... 원한다면.”

도록이 생각보다 크네요.”

실제 그림이 크니까. 나는 커다란 그림이 좋거든. 멀리서 볼 때, 가까이서 볼 때. 다른 느낌이 드니까.”

그렇군요...올해의 상반기까지의 도록이네요. 헤에.”

기복이 있을거야. 슬럼프에서 벗어나려고 이것저것 습작처럼 그린 것까지 다 넣어버려서.”

 

켄타는 품에 겨우 안을 정도로 커다란 도록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넘겼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카이토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풀을 먹어 빳빳한 종이에 인쇄된 그림들은 질감이나 양감까지 느껴질 정도로 인쇄가 완벽하게 되어있었다. 켄타는 멋있다, 굉장하다. 하고 짧은 감상을 내뱉으며 도록의 페이지를 넘겼다.

 

성준 형..이건..”

? 아아. 맞아. 그때 그리던 거야.”

굉장해요! 이 새파란 바다..색이 정말...그런데..”

저도 이 그림이 제일 좋아요. 바다와 고래는 멋있고. 아무래도 파란색이 좋으니까요.”

그렇네요..”

 

켄타는 눈을 돌려 카이토와 도록에 그려진 깊은 바다와 회색빛 심해를 번갈아보았다. 둘은 닮아있었다. 어떤 의미일까. 켄타가 카이토를 보면 느껴지는 일정량의 향수, 연민, 친근함, 사랑스러움처럼 정제된 감정이 그림에서 똑같이 느껴졌다. 설명하기 힘든 기시감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바다가 부르는 노래였다. 소리가 아닌 물살이 바다의 노래가 아닐까. 바닷속은 음파라는 노래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다. 성준의 짧은 코멘트가 달려있었다.

 

노래하고 있지만, 듣지 못할 뿐이다..”

에엑. 읽지 마. 부끄럽다고. 답례라고 하긴 민망하지만, 어머니께서 기뻐하셨으면 좋겠네. 제일 앞에 사인할게.”

분명히 좋아하실 거에요. 좋은 그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뭐 별거라고.”

그래서, 카이토형은 요즘 뭘 했어요?”

 

켄타는 카이토를 꼭 사람인 것 마냥 대한다. 카이토가 할 법한 일이라는 게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성준은 켄타와 카이토가 시시콜콜한 대화를 들으며 맥주캔을 비웠다. 혼자 지내겠다며 떠나온 일본인데 언제부터 일상을 차지하고 있는 사소하고 편안한 사람과 물건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둘의 주제는 역시 카이토의 노래로 귀결했다. 성준은 지겹다는 듯 혀를 찼다.

 

카이토형을 그런 식으로 밖에 안 쓰시다니. 사용료가 아깝지 않으세요?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쓰는 게 아깝지 않은건 아니잖아요.”

이미 물어봤어요. 마스터는 대답도 못했다고요.”

무슨 대답이 더 필요해? 청소기를 사놓고 옷걸이로 쓰는 사람도 있는데.”

세상에, 절 청소기 정도의 지능이라고 생각하시면 굉장히 곤란해요!”

청소기는 지능이 없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아무튼. 노래하지 않아도 난 만족하고 있다고.”

청소기는 슬퍼하겠죠. 기계는 본래 기능으로 사용되는 게 가장 행복하니까요. 그리고, 그리고쓰이지 않으면 언젠가 마스터가 저를 지겨워하는 순간이 오게 될 거에요. 전 그게 무서워요.”

그럴 리 없어.”

인간은 누구나 변해요. 마음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아니야. 난 네가 노래를 부르던, 부를 수 없던. 상관없어. 그냥 네가 좋아. 좋다기보단, 이건 사랑이겠지.”

 

켄타는 들고 있던 도록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성준을 향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말을 실제로 들을 줄이야. 켄타가 허탈하게 웃었다. 일시정지 한 듯 가만히 서 있는 카이토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엄청나게 고민하는 얼굴로 입술과 눈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카이토 형 과부하 일어나겠어요.”

몇 번을 말해줘도 똑같은 반응이군. 그게 그렇게 못 믿을만한 일인 건가? 카이토가 날 좋아하는건 당연한 일인데. 어째서 반대는 그렇게 놀랄 일이지? 대답해봐. 카이토.”

저희는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있으니까....?”

지겨워. 그 프로그램이야기. 그럼 프로그램을 끄면, 넌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는 거야?”

그런

 

카이토는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카이토의 침묵이 길어지자 성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임프린팅. 소유주에 대한 애착. 애정과 애착은 다른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은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사랑을 돈독히 하지만, 애착을 가진 이들은 불안해하고 다른 애착 상대를 찾아 헤맨다. 두 가지는 어느 선 까지는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자신을 구원하는 사람에게 애착을 가지는 건 어른이나 아이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동정으로 시작한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서로 불행해질 뿐이다.

 

거짓말로도 아니라고 말 하면 어디가 어떻게 되는 거냐?”

거짓말을 하지 못해요.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 그럼 나 혼자서 쇼했나보네.”

성준형..”

사람 마음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성준은 다 먹은 맥주캔을 손으로 구겼다. 먹먹하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느끼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작업실로 들어가 버렸다.

 

역린을 건드려버렸네요. 괜히 저 때문에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가서.”

아니에요. 마스터말 이 맞아요. 하지만, 정말..어떻게 될진...믿고싶지만. 임프린팅은 개발이 중지된 프로그램 설정이고 위험해서..”

카이토형..”

알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다고 대답하면 마스터는 분명 상처받을 거에요. 그건 싫었어요.”

 

믿음이나 희망은 인간의 시선에 해당하는 것이다. 미래를 판단하는 변수를 전부 나열한 알고리즘 중에서 가장 경험적 최선을 선택할 때. 카이토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정말 최선이기를 바라는 것 밖에 없었다. 한쪽 눈이 사라졌을 때, 다른 쪽 눈이 사각을 찾기 위해 애쓰는 정도의 기능이라면, 임프린팅 프로그램이 개발 중지되고 삭제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벌써 밤 10시에요. 집까지 배웅해 드릴까요?”

그렇네...이런 상황이라. 아뇨, 혼자서 돌아갈 수 있어요. 내일 아침에 다시 셋이서 이야기 해봐요. 오늘은 성준형을 건드리지 않는게 좋을거에요. 카이토형도.”

켄타군이 없었다면, 마스터도 저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거에요. 정말 고마워요. 저는..”

형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전 형에게 많은 것을 받았으니까요.”

 

켄타는 끝끝내 1층까지 따라 나오는 카이토를 뒤로 했다. 2년 전 여름. 상처투성이로 뒷골목에 버려져있던 켄타에게 다가온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을 떠올렸다. 먼지와 말라붙은 피딱지로 엉망이 된 손으로 골목에 던져진 켄타의 물건을 하나씩 주워 커터칼로 찢어진 학생용 가방에 넣었다. 더러운 붕대로 한쪽 눈을 가린 카이토는 맨발로 저벅저벅 걸어와 켄타에게 가방을 쥐어주고는 옆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바닥에 부딪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얼얼한 정신에도 켄타는 카이토와의 첫 대화를 또렷히 기억했다. 지금보다 딱딱했고, 켄타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 이상으로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다시 떠올려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신도 누군가에게 미움받고 있나요? 가엽게도.’

 

카이토가 누구의 소유인지, 어째서 그런 일을 당하고도 관리국에 신고당하고 있지 않은지 켄타는 얼마 뒤 알게 되었지만, 그러고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급하게 도망쳐 나온 카이토가 잠시 숨을 장소를 마련해 주는 일밖에 없었다. 방관자로서의 자신을 자책하던 켄타는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카이토가 다시 나타났을 때 마음먹었다. 이번에야 말로 카이토를 지옥에 떨어지게 놔두진 않을 것이다. 두 번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는 바보같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켄타는 도록을 넣은 가방을 넣고 집으로 향했다.

 


 

***


 

 

겨우 출입금지 종이가 떼어진 작업실 문이었지만, 카이토는 두드리지 못했다. 애정을 돌려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카이토도 잘 알고 있었다. 애착은 일방적이고 복잡한 것이다. 마냥 순수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괴로운 걸까. 이제야 겨우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을 뿐인데. 마스터를 좋아한다는,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사실조차 의심받다니 비참했다. 하지만 대답하지 못한 것은 머릿속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임프린팅을 끄게 되었을 때, 마스터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일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카이토는 무력하게 문 앞에 서 있다가, 익숙하게 문을 기대고 앉았다. 돌고 돌아서 결국 제자리걸음이라니. 카이토는 처음으로 자신이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불가능한 가정을 해보았다. 인간은 확신 없이도 미래나, 희망을 믿음으로 동기를 가질 수 있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카이토가 견디기엔 너무나도 절망적이고 커다란 벽이었다.

 

..으윽...흐엉...마스터어..”

뭘 잘했다고 울고 있어?! 너 진짜 오늘 나랑 싸우기로 마음 먹은거야?”

허엉...아뇨.

. 장난쳐? 뚝 그치라고!!”

 

카이토의 새된 울음소리에 성준은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문가에 기대섰다. 애도 아니고, 뭐 하나 제대로 안되면 울어버리는 저 빌어먹을 성질머리를 고쳐놓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고혈압으로 쓰러질 것이다.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애처로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카이토를 몇 번이고 울린 자신이 쓰레기라도 된 느낌이었다. 성준은 치밀어오르는 짜증과 화를 한숨에 삭이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짜증나 니까 당장 그쳐. 지금 상처받은 쪽이 누군데 네가 울고 있는 거야?”

미안해요...내가..제가...사람이 아니라서..확신할 수 없어요, 그런 결과는 말씀 드릴 수가 없단 말이에요..”

뭐가 확신할 수 없다는 거지? 넌 기계잖아. 나보다 훨씬 확실한게 많다고. 네가 확실하지 않다는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야. 회피하는 거라고.”

 

성준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가려 애썼지만 떨림을 숨길 수 없었다. 카이토에 대한 감정은 이미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자신을 좀먹고 있었다. 이게 이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이번에는 무너진 자신을 어떻게 세워야만 할지 전혀 알 수 없다. 겨우, 힘들게 부서진 폐허를 치우고 만든 것이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엉망으로 망가지는 사람과 관계 속에서 성준은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리. 늘 마음먹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모진 말을 하면서도 눈물흘리는 카이토의 얼굴을 바라보자 마음이 울렁였다. 지금이라도 논쟁은 그만두고 카이토를 그저 품에 안고싶다는생각이 가득했다. 카이토는 더이상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울고 있었다. 헐렁한 옷 소매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지않았다. 울지 말라는 명령 때문이었는지, 피가 날정 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으윽......흐윽..”

그만해. 그만. 카이토. 제발. 날 봐. 봐 줘. 이건 명령이 아니야. 부탁이야.”

내가 널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게 널 이렇게 괴롭게 하는 거라면..”

마스터..?”

네가 해준 말들. 언제나 기억할거야. 내 곁에 와줘서 고마웠어. , 내가 발견한거지만.”

무슨 말씀이세요? 마스터...저는 무슨....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버리지 마세요, ..흐윽..다시는 떼쓰지 않을게요..”

그럴리 없다고 말했잖아. 제발, 겨우 참고 있으니까. 더 힘들게 하지 마.”

 

성준은 알고 있었다. 카이토에게 선택권이란 것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카이토가 원해서 자신을 주인으로 선택한 것도, 원해서 성준을 따르게 된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우연과 성준과의 이해가 부합했을 뿐이었다. 카이토가 스스로 원한 것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것 하나였지만, 그것 또한 카이토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졌을 뿐이란 것을. 이토록 사랑스럽고 가여운 것을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 성준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감정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카이토를 놔 주는 것이 성준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카이토의 얼굴을 손으로 잡은 성준이 카이토와 눈을 마주했다. 카이토 파란동공 속에는 여전히 깊은 바다가 흐르고 있었다. 영영 그 속에서 유영하는 고래가 되고 싶었다. 어울리지 않게 눈이 뜨거워졌다.

 

카이토. 내일도 만날 테지만. 고마웠어. 괴로운 건 나만으로 충분해. 마스터키 해제-. 음성인식으로. 내 말 들어줘. 내가 좀 엉망이지만, 널 정말 좋아해. 네가 어떤 존재이든.....”

뭐 하시는 거예요? ..싫어요싫어..”

그러니까. 임프린팅 해제. release. delete. 관련된 기억은 함께 삭제.”

 

...정확한..인식을 위해, . 안돼. 한번 더.., 아니야. 싫어. 그만..”

임프린팅 해제. 제발. 다시는..나는..”

실행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했어. 성준은 재부팅을 위해 눈을 감고 넘어지는 카이토를 손으로 잡았다.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손으로 닦고서 카이토의 낡은 담요 위에 눕혀놓았다. 충전코드를 연결하자 목 뒤에서 파란불이 점멸했다. 성준은 담요 옆에 앉아 카이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 카이토를 만났을 때의 당혹감. 그리고 공감각. 성준은 밤새 차가운 심해 속에서 헤엄쳤다.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생동감이자 죄악감이었다. 성준은 드디어 잠든 카이토를 안고 힘껏 오열했다. 이렇게, 이렇게나 좋아하고 있어. 모든 감정이 무너졌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나라는 사람이 달라질 만큼. 내가 카이토를 구원한 게 아니야. 카이토가 나를 구원했어. 한 번 터진 울음은 멈추질 않았다. 카이토의 안에서는 작고 윙윙거리는 모터 소리가 들렸다. 어디까지 지워질까. 다시 눈을 떴을 때 성준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차가운 카이토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은 성준은 끅끅거리는 울음을 겨우 삼켰다.

 

사랑해. 카이토. 이 말을 너에게서 듣고 싶었어. 그게 너무 큰 욕심이었나 봐.”



 

 

-10분만 있다가 읽어주세요

 

 

***



 

 

 

새벽이 되어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간 성준은 밀려드는 피로감에 두통약을 찾아 먹고 잠에 들었다. 카이토와 언젠가 가자고 이야기 했던 해변이 꿈에 나왔다. 카이토는 그렇게나 바다와 잘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이번 전시회가 끝나면. 휴가를 떠나자. 너도 내 헌 옷 대신 다른 옷 좀 입고서. 바닷가를 산책하고 얼음과 색소로만 만든 싸구려 빙수를 사 먹고, 커다란 호텔에 가면 청소할 필요가 없겠지. 바다에 발을 담근 너의 모습을 크로키하려고. 가끔은 수채화도, 색연필도 재밌으니까. 성준은 목 끝까지 꽉 차오르는 괴로움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사랑한 것들은 모두 망가지고 마는 것일까. 자신의 사랑에 이기지 못하고 부셔지는 카이토를 몇 번이고 상상했다. 감당 할 수 없는 감정은 독이다. 옳은 일을 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는 주문을 외웠다. 최소한 카이토는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부서진 부품은 수리하면 되지만, 부서진 마음은 지워버릴 수밖에 없다. 카이토는 이미 위태로울 수준까지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다. 성준은 꿈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는 카이토를 찾아서 소리치며 뛰었다. 맴도는 어둠과 절망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밝은 목소리에 성준은 놀라듯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으로 닦으며 카이토가 성준을 불렀다.

마스터. 괜찮으세요? 악몽이라도 꾸시는 걸까...앓는 소리를 하시고..”

허억. , 카이토.”

이런..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얼굴이 엉망이에요. 땀도 많이 흘리셨어요.”

.... , 그래. 아냐. 깨워줘서 고마워.”

어제..제가 배터리 계산을 잘못했는지 먼저 꺼졌죠. 켄타군-. 보고 싶었는데.”

??”

...왜 그러세요?”

어제 일이 기억나지 않아?”

제가 버그라도 일으켜서 이상한 짓이라도 했나요? 마지막 메모리가 어제 오후 60945초로 끝나버려서..”

 

카이토는 최신의 안드로이드라면 10분 간격으로 하고 있을 메모리 저장을 한 시간 간격으로 하고 있었다. CPU에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오후7시면 켄타가 집에 오지도 않았을 무렵이었다. 성준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하게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물어볼 곳이라고는 켄타 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성준 형? 어제 괜찮아..”

들어봐 .켄타. 이게...이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내가 어제 카이토 임프린팅을 해제했거든. 아니, 삭제해버렸지.”

? 그게 그렇게 쉽게 없어지나요? 저도 프로그램적인건 잘 모르지만요. 카이토형이 재부팅을 했다면, 정말 된 거 같긴 한데.”

그래. 그러면서 내가 관련된 기억까지 같이 삭제했거든. 이건 확실해. 저번에 서비스센터에 물어봤다고. 카이토는 이미 공기계로 지낸 기간이 길어서, 방화벽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 접근하기가 굉장히 쉬우니까 주의하라면서 마스터키 사용법을 배웠으니까.”

, 그런데 뭐가 예상과 다르신가요?”

카이토가 달라진 게 없어.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빼면.”

원래 감정적인 프로그램이라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티가 나지 않는거 아닐까요?”

 

성준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당황한 목소리로 고마워, 고마워. 하고 전화를 끊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있는 카이토에게 손짓했다.

 

카이토. 이리 와봐.”

-. 부르셨어요.”

..이상한 질문인데. 지금 임프린팅이 유지되고 있어?”

그게 뭔가요? 프로그램 이름같은데. CPU에는 없는 프로그램이네요.”

확실히 삭제되긴 한 건가..나를 어떻게 생각해?”

. 갑자기..이상한 질문이네요. 마스터는...그림을 엄청 잘 그리시고. 일 할때 방해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객관적인 사실 말고.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성준은 어제 욕망했던 행동을 이어갔다. 카이토를 가슴에 안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고마워, 고마워. 날 좋아해줘서. 선택해줘서. 있는 힘을 다해 카이토를 안았다.

 

..이러시죠? 제가 아무래도 어제 실수를 한 모양이네요.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실수한 건 나야. 잘못한건 나야..”

그러셨다해도 괜찮아요. 마스터가 어떤 일을 하든, 저는 마스터를 좋아하니까요. 파도가 흔들린다 해도 바다의 일부인 것 처럼.”

 

어제 읽은 도록의 첫 부분에 썼던 말이었다. 연안의 파도는 흔들리며, 부서지며 요동쳐도 결국 바다의 일부이다. 따스하고 밝은 햇빛이 머리카락에 쏟아진다. 먼길을 돌아 결국 찾아낸 나만의 장소.

 

내 옆에 있어. 내 옆에서 웃고, 노래해줘. 넌 정말 나에게 소중해.”

물론이죠. 전 마스터가 있어 존재하니까요.”

 

카이토와 손을 마주 잡고, 입을 맞추었다. 카이토와 두 번째 키스였다. 쿵쿵대는 심장소리가 머리까지 울렸다. 성준은 혼자서만 두근거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 부끄러웠지만, 집중한 카이토의 얼굴이 빨개지는것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눈을 질끈 감은 카이토는 손을 약하게 떨고 있었다. 성준이 조심스럽게 카이토의 볼을 만지자 카이토가 파란색과 회색 눈을 천천히 떴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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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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