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rainbow

 

 

오늘따라 카이토가 조용하다. 사실만 놓고 보자면 좋은 일이지만, 이럴 녀석이 아니란걸 알고 있기에 성준은 불안해졌다. 요즘은 그리 촉박한 마감이 아니었다. 주제를 받아놓고 그리는 외주그림은 가볍게 그리는 편이었다. 그릴 마음이 든 김에 힘내서 그려버리자고 결정한것 뿐이라 며칠동안 줄곧 그리고 있었다. 작업은 순조로웠다. 별로 어려운 주제도 아니였고, 며칠전까지 카이토와 집안을 뒹굴며 보냈던 나날들이 씨앗이 되어 머릿속은 풍요로운 풍년의 기간을 맞이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외주그림에 그런 영감을 쏟아붓는게 아까울 정도였다. 이렇게나 그릴 수 있는 영감을 주면서도, 실제로 그림을 그릴때는 방해밖에 되지 않는다는게 모순이 아닌가. 성준은 홀로 작게 쿡쿡 웃었다. 넓은 붓으로 캔버스 위에 커다란 파란색의 원호를 그렸다. 무지개려나. 꼭 현실에 있는 것만을 그려야 한다는 법은 없다. 파란 무지개도 어떤 세상엔 있을것이다. 빛의 산란이라던지, 알지못하는 이유를 들어서라도 만들어내는 세계를 떠올린다. 화풍이 부드러워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마음이 안정되서 그런것이라고 하나마나한 말을 떠들어댄다. 마음이 안정되었다니, 오히려 카이토를 만나고 마음은 더 이지러워졌다. 끊임없이 파도치는 물결처럼. 때로는 연안류처럼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그럴때면 정말이지 심장주위가 시큰거린다. 성준은 힘을 쏟은 필체를 맞은편 벽에 기대 바라보다 가슴 주위를 움켜잡았다.

 

"어이-. 카이.."
"네!! 마스터!! 부르셨어요!!!"
"아직 부르고 있던 중이였어. 또 문 앞에 있었어? 그리고 그렇게 세게 열지 마. 부셔지겠다."
"히잉. 여섯시간만에 부르시면서 너무 차가워요.."
"여섯시간 밖에 안됐단 말이지..집중력이 떨어졌어."
"커피를 타올까요? 아니면 간식? 잠시 쉬는건 어떠세요? 아직 마감날짜까지는 일주일하고도 여덟시간 사십분이 남았으니까."
"잠시 산책할까. 머리를 식히고싶어."

 

산책이라는 말에 어디에서 키우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는 카이토에게 목줄을 씌워 끌고다니는것도 안전한 방법이겠다고 성준은 작업용 앞치마를 벗으며 생각했다. 바깥에선 잠시 한눈을 팔아도 사라지기 일쑤라, 시야에서 사라지지 말라고 명령이라도 내리기 일보직전이였다. 그만큼 데려나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가정용 안드로이드는 사용자의 500m밖을 벗어나지 않도록 설정되어있을텐데, 어째서 카이토는 그렇지 않은건지. 망가진 탓일지도 모른다. 산책이라고 해봐야 끝을 모르고 더운 날씨에 오래 걸을 수 없다. 애시당초 성준은 야외활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더위에 일부러 야외에서 땀을 흘리는건 체력낭비에 불과하다. 저녁이 되어 해는 떨어져 낮보다는 시원하겠지만, 역시 일부러 걸을 필요는 없다. 성준은 가벼운 티셔츠로 갈아입고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이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손잡아."
"에에-. 또에요? 마스터는 너무 느리게 걷고, 금방 돌아가려 하시잖아요."
"야. 넌 그래뵈도 내 소유니까... 좀 내 주위에서 걷는게 어때? 또 미아가 되거나 하면 귀찮거든."
"미아라뇨, 저에겐 GPS가 내장되어 있어요. 그럴리는 없다구요."
"아아. 그래서 얼마전에 그렇게 길 한복판에서 울고있었구나."
"우, 울다뇨. 그건..그냥, 마스터를 부른것 뿐이고."

 

GPS가 내장되어 있다고 카이토는 말하지만, 종종 기능하지 않았다.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는지, 내부적인 문제인건지. 카이토의 기능하지 않는 눈처럼 다른 부분도 잔 고장이 잦았다. 본래 가정용 제품은 수명이 길지 않다고 한다. 고쳐서 쓰는것 보다, 새것을 사는것이 훨씬 이득이 되도록 만들어진 시장체계였다. 소비재로서의 취급이다. 성준은 더이상 제작되지 않는다는 카이토의 여러 부품들을 중고시장에서 구해보려 애썼다. 그것 또한 상당한 프리미엄이 붙어있었다. 안구는 도통 구할 수 없었고, 구한다고 해도 정식서비스센터에서는 불법루트로 구한 파츠는 써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 카이토에게 불리하도록 세상은 설계된것 같다. 두어번 칭얼거리다 내미는 손을 잡은 카이토는 약간 풀죽은 얼굴이었다. 짐으로 취급받는 느낌이라 좋지 않다고, 기세좋게 속마음을 대놓고 말하는걸 보면 풀이 죽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성준의 손을 굳세게 잡고 있었다. 시골의 산책이라고 해봤자 가까운 마트에 다녀오는 것이다. 요즈음은 시끄러운 매미소리가 잦아들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끊임없이 떠들어대는건 카이토만으로 충분했다.

 

"짐 취급이라니. 그런 적 없어. 이게 다 네가..음..자격지심은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거지?"
"자격지심. 있어요. 똑같은 단어. 그리고 전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고집하고는. 그럼 이렇게 생각해. 원래...연인사이는 손을 잡고..걸으니까."
"헤에..헤헤... 그,그, 그런거였어요? 정말? 진짜에요?"
"됐어. 닥쳐. 두 번 말하게 하지마. 그냥 걸어."

 

괜히 말했다. 성준은 방금의 말을 죽어라고 후회하며 성큼성큼 걸었다. 손바닥 뒤집듯 밝아진 얼굴로 연인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했다. 그렇죠, 저희는 연인사이니까. 물론 마스터지만. 연인사이. 연인이니까요. 손을 잡는것도 당연하고. 연인은 손을 잡고 걸으니까.연인은. 코이비토. 라고 해요. 일본어로. 한국어랑 다른 한자를 써요.

 

"시끄러워!! 알고있어. 내가 방금 말했잖아. 그만 말하라고."
"아, 마트가 보여요. 잠시 들러서 더위를 식히고 갈까요?"
"오늘은 마트 안갈거야."
"그렇구나. 그럼 바로 돌아갈까요?"
"바로 돌아가지 않을거야. 네가 저번에 말해놓고도 기억 못하는거야? 오늘 마을 축제라며?"
"에. 그랬죠. 그렇긴 하지만..마스터는 사람이 많은곳은 질색이라고 하셨고.."
"그래서, 가기 싫다고? 네가 싫다고 하면 가지 않을거야."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 카이토는 정해진 프로토콜안에서만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정해져있다. 일주일 전, 카이토는 성준에게 다음주에 마을 축제가 있다고 말했다. 불꽃놀이도 하고, 야외 자판도 열린다고. 이 마을에서 지낸지 기억하지 못하는 나날을 합쳐서 3년은 될테지만, 한번도 가 본적은 없었다. 그런게 있는데 무지하게 재밌을 것이라는 카이토의 말에 성준은 사람이 많은곳은 질색이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해버리고 지나갔다. 가고싶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카이토는 손을 잡은채로 길가에 멈춰섰다. 이 상황에서 가장 알맞은 대답은 가고싶다. 이겠지만 이미 성준이 축제에 가는걸 꺼려한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것이 성준이 원하는 것일까. 그것에 맞는 대답을 해야하는데. 시한폭탄처럼 성준의 표정이 점점 구겨져갔다.

 

"뭐야. 정말 대답 안할거야?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거였어? 불꽃놀이는 나도 본 적 없어서 얼마나 예쁜진 모르지만. 너도 그렇잖아."
"불꽃놀이..아름다울거에요. 마스터와 함께 본다면 더욱 아름다울테죠."
"그거면 됐어. 사람 많은 곳에선 더 위험하니까, 손 놓지마."
"아얏. 거긴 손이 아니라 손목이에요."
"오늘은 60%정도 합격이야. 다음번엔 확실히 100%의 대답을 하라고. 알겠어?"

 

왠지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성준은 카이토의 손을 잡고 점점 시끄러워져오는 축제가 벌여진 거리로 향했다. 축제라고 해도 워낙 주변 동네에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 생각보다는 선선한 분위기가 풍겼다. 켄타를 부르는 편이 좋았을지도. 성준은 자판이 세워진 일대를 휘휘 둘러보았다. 야키소바,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파는 가게. 모형 사격자판. 구식의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고즈넉한 분위기가 싫진 않았다. 유카타를 입고온 사람들도 몇몇이 보였다.

 

"아이스.."
"어디에?"
"아이스 초코 바나나. 켁, 듣기만해도 달아보이는 이름이네."
"마스터, 하나만 사주세요."
"이럴땐 의사표현이 확실하지."

 

성준은 질렸다는 듯 혀를 차며 지갑을 꺼냈다. 드라이아이스가 든 박스에서 꺼내진 아이스초코바나나는 새하얀 냉기를 풀풀 풍겼다. 카이토는 거침없이 바나나를 입안에 깊게 밀어넣어 반쯤 깨물어 부셨다. 보기만해도 이가 시리고 두통이 밀려온다. 성준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2분도 되지 않았는데 앙상한 나무젓가락만 입에 물고 아래 위로 흔들다가 짜증난다는 성준의 얼굴에 장난을 멈추고 손에 쥐었다.

 

"이 시렵지 않아? 그렇진 않겠지."
"물론이죠. 그런 쓸모없는 감각은 인간들에게 있는것으로 충분해요."
"재수없게 말하네. 흠, 불꽃놀이를 제대로 보려면 사람이 없는 쪽으로 빠져나가야겠어."
"에에, 빙수도 있는데-."
"네가 아이스박스냐? 하나로 충분하잖아. 전기로 움직이는 주제에."

 

한쪽눈으로 보려면 넓고 트인 장소에서 보는게 좋겠지. 성준은 시끄러운 자판을 벗어나 잡초가 자라고 있는 공터로 걸어갔다. 이미 몇몇 무리가 자리를 펴고 앉아 있기도 했다. 불꽃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알 수 없으니, 성준은 하늘과 주위를 번갈아가며 살폈다. 곧 불꽃놀이가 시작한다는 시간이었다. 어느순간 말이 없어진 카이토가 서쪽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헤에. 불꽃소리가 들려요."
"불꽃 소리? 난 못들었는데. 오오.."

 

먼 곳에서 보일듯 보이지 않는 희미한 빛 줄기가 점멸하며 하늘로 솟더니 이내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동그랗게 퍼졌다. 싸구려 네온빛이 섞인 색이었다. 검은 하늘에 스크래치화를 그리듯, 흐드려지는 붗꽃처럼 터져나간다. 빛에 비친 카이토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차오른다.

 

"정말 아름다워요. 정말...아아.."
"불꽃놀이 정도에 이렇게 감동하는거야? 세상엔 이것보다 아름다운게 더 많다고."
"아직 보지 못했으니까, 이게 가장 아름다운걸로 할래요. 물론 마스터의 그림 다음이에요."
"일일히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도 네가 아니라면 보지 못했을거야."
"똑같네요. 그렇죠, 마스터."

 

감정이 필요 이상이 되면 우는 버릇은 고쳐야한다고 성준은 카이토에게 누누히 말해왔다. 울어버리면 개별의 감정은 섞여버리고 하나로 섞여 뭉근해진다. 그러나 역시 카이토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마치 물을 많이 부어버린 물컵처럼. 담을 수 없는 커다란 감정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망가진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성준은 잠시간 밝은 불꽃에 흔들리는 카이토의 얼굴을 감상한다. 태어나서 처음 불꽃놀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존재를 다만 물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성준은 어떤 세계에서는 카이토도 생명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파란 무지개도 어떤 곳에서는 존재할 것이다. 잡은 손을 놓고 눈물로 얼룩진 카이토의 얼굴을 핥아낸다. 눈물을 멈추려고 한 행동이지만, 되려 카이토는 어깨에 파고들어 더욱 눈물을 쏟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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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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