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이 오늘 착한이유 : 포카포카하게 써달라고 하셔서 




알지 못했던 크리스마스에 




가벼운 산책이나 하자고 성준은 거실에 무력하게 누워있던 카이토를 불렀다. 연말 전시회 일정이 끝난 성준은 며칠 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며 빠져든 생각들은 깊고 어두운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을정도로 뒤틀리고 복잡한 연상과 이미지를 풀고 자르고 정제하여 캔버스에 옮겨담을 때면 원래의 이미지는 처참하게 살해된 시체처럼 느껴졌다. 성준의 그림을 두고 누군가는 숨이 깃든 생명체라고 표현했다. 길고 긴 토막살인을 끝내고 지친 살인자처럼, 붓 한 점 들 힘도 남지 않았다. 공복시간이 길어지자 꼬르륵거리던 위장도 어느새 포기해버렸는지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욕구는 구갈이다. 작업실 바닥에는 구겨진 생수병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옅은 숨을 호흡하며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던 성준은 근육통이라 예상되는 온몸의 비명을 느끼며 작업실에서 걸어나왔다. 


"아-. 배고파. 카이토. 밥 안먹은지 얼마나 됐지."

"3일 정도네요. 문 앞에 샌드위치를 여섯번 가져다 뒀는데. 전부 말라서 제가 버렸답니다."

"음. 그 점은 미안. 집중하면 두 가지를 한번에 하고 싶지 않아."

"절 보는 것도 포함 되는 거겠죠."

"넌 음...오히려 반대라고 할까. 그보다 그 말투는 뭐야. 삐진거야?"

"삐지다니요. 제가 감히."


어떻게 된게 점점 다루기 힘들어진다.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기도 벅차서 폭팔하는 일이 많은 성준에게 같은 모양으로 달려드는 카이토는 새로운 자극이 되면서도 커다랗게 엉긴 감정 수십개를 불러일으키는 마약같은 환각제-. 아니. 이 비유는 좀 이상하다. 고개를 저어버린다. 카이토는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대조되는 푸른색과 회색 눈동자색이나, 멋지게 비자연적인 색을 가진 샛파란 머리카락이나,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 떼어놓고 보면 별 것 아닌 속성들이 합쳐져 움직이는 카이토는 걸어다니는 작품 그 자체였다. 성준은 확실하게 삐졌다는 표시로 입을 비쭉이는 카이토를 바라보다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격무의 여파로 사라지지 않는 두통으로 생각이 삐걱거린다. 카이토와 싸울 이유도, 싸울 힘도 느끼지 못한다. 마주보고 선 카이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마감이 바빴어. 연말 전시회는 자선행사에 잘 쓰여서, 주문 수량이 많아."

"그렇게 보고 싶다고 문 두드렸는데.."

"널 보고있으면 너무 많은게 생각나. 지금 그리는 그림같은건 찢어버리고 다시 그리고 싶어진다고."

"..부끄러운 말씀이네요. 제가 그 정도는 아니랍니다."

"아니. 맞아."


한풀 꺾인 성준의 목소리에 카이토는 당황한 듯 팔을 허우적 거리다 성준의 어깨를 어설프게 안았다. 그게뭐야. 항상 원하는 건 더 확실히 하라고 했잖아. 어깨에 묻은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보고싶었다며. 너의 보고싶었어는 이 정도 냐고. 성준의 말에서 가시가 돋아날 기색이 느껴지자 그제서야 안아드는 감촉이 느껴졌다. 카이토는 한참이나 조용하더니 무언가가 터져나오듯 보고싶었어요. 보고싶었어요. 하고 고장난 라디오 처럼 보고싶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고작 며칠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

 하던 성준이 결국엔 저도 그랬다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영영 이대로 깨지 않는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마에 져버리고 싶다. 가물거리는 눈을 깜빡이다 성준은 어지러움을 느꼈고, 더 이상 음식을 위장에 넣지 않으면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본능이 스쳐왔다. 카이토의 어깨에서 몸을 일으켰다. 


"산책가자. 음식도 좀 사오고. 오늘이 며칠이지.."

"오늘은 12월 24일 이랍니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부르는 날이네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완전히 날짜 감각까지 잊어버렸네. 뭐, 특별하지 않지만. 이 시골에.."

"그렇네요. 오늘 바깥 기온이 낮아요. 따뜻하게 입고 가셔야겠어요."

"너도. 그래야겠네. 모자랑 장갑. 코트도 저번에 사준것 있잖아."


인터넷 쇼핑으로 사준 회색 털모자와 짙은색의 코트는 카이토에게 썩 잘 어울렸다. 매번 성준이 입던 낡고 커다란 옷만 입히는 것도 면목이 아니었다. 적당히 성준보다 한 사이즈 작은걸 사주었더니 마네킹처럼 길이가 맞아들었다. 일본 성인남자의 평균 신체수치를 가졌다고, 카이토가 쓸데없는 정보를 가르쳐주었다. 머플러는 늘 하고 다녀 보풀이 일어난 하늘색이었다. 새걸 사주겠다고 적당한 쇼핑몰에서 머플러를 보여줘도 그것만은 고집이었다. 



-




자전거를 탈 만큼 체력이 남아있진 않아, 오래 걸리더라도 마트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손을 잡고 오래 걸을 수 있어 카이토는 옛적에 삐진것 따위는 전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잡은 손을 흔들며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몇 개 불러주었다. 성준도 알고 있는 유명한 곡들이었다. 몇 개는 장단에 맞춰준다고 후렴구를 따라 불러주기도 했다. 노래는 우스갯소리라도 잘 부른다고 말할 수 있는 편이 아니었다. 노래를 부르는게 어떤 재미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노래에도 알지 못하는 예술의 세계가 있겠지. 카이토가 닿고 싶어하는 어떤 경지도 있을 것이다. 데려다 주지 못할텐데. 성준은 어느 여름날 카이토가 불러주었던 노래에 비해 최근의 노래는 왠지 모르게 자연스러워 졌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카이토의 목소리에 익숙해진 것인지,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카이토의 노랫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랫소리마다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며칠 전 눈이 내렸는지 길가에는 녹다 남은 눈이 흙과 섞여 애매한 모양으로 질척거렸다. 



-

 


상점가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시골동네라 하더라도 크리스마스는 본격적으로 챙기는지, 빨간색과 금색을 기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가게마다 크리스마스 한정 메뉴를 선전하고 있었다. 가게를 지나며 화려한 가판대에 눈을 굴리던 성준은 마찬가지로 눈을 떼지 못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걸어가던 카이토를 툭, 건드렸다. 금방 돌아보는 카이토의 눈빛은 아이스크림 매장에 떨어뜨려 놓았을때의 얼굴과 같았다. 사람이 아니면서 어째 더 식욕이 있는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먹는건 취미이자 기호라고 카이토가 당당하게 말했지만 당장이라도 목줄을 풀면 뛰쳐나갈 듯 일렁이는 표정이었다. 


"참.. 뭐라도 사갈까?"

"그래도 되나요?"

"네 눈빛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도 사주겠어. 뭐가 좋을까. 케이크? 잘 안먹어 봤으니까."

"한 번도 안 먹어 봤어요..마스터 오늘 왜이렇게 친절하세요?"

"난 원래 이랬는데. 음. 여기서 고를까. 먹고 싶은걸로 골라 봐."


성준은 적당히 앞에 있는 베이커리를 가리켰다. 주머니에서 카드를 쥐어주고 포장 시켜놓은 음식이 나올때 까지 골라오라고, 카이토의 등을 떠밀었다. 양손으로 받아든 카드를 들고 뛰어가는 카이토의 모습이 커다란 아이같았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는데. 작은 것에도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오히려 망설이게 된다. 지금의 소중한 세계는 어릴적 눈을 떼지 못했던 스노우볼처럼 한 없이 눈이 내리거나 물방울이 헤엄치는 둘 만의 작은 장소이다. 하얀 눈이 오기 시작하면 카이토가 좋아하는 낡은 담요를 깔아놓고서 긴 낮잠을 잘 것이다. 포장된 음식을 받아오자 이내 카이토가 한껏 신난 얼굴로 뛰어왔다. 


"한정 케이크래요. 제가 마지막으로 사는 거래요."

"저기 뒤에서 사람들이 잔뜩 사 가고 있는데?"

"에에. 아무튼. 부쉬 드 노엘을 샀어요."

"그게 뭔데.. 난 처음 듣는 이름이야."

"이름이 그렇대요. 초콜릿 케이크인데, 통나무 모양이에요."

"어쨌든 초콜릿 케이크란거네. 됐어. 집에 가자."

"헤헤. 크리스마스 선물 감사히 받을게요. 마스터."


같이 먹을건데. 성준은 손을 내밀었다. 케이크를 잡은 봉지와 잡을 손을 망설이던 카이토가 손을 옮기는데 걸리는 짧은 시간을 인내로 참아주기로 한다. 오히려 그 인내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손이 두 개인 줄 아는데 오래 걸리는건가. 퉁명스러운 시비를 입 밖에 내지 않는 것도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상점가에서는 유명한 캐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 것 만으로도 어딘가 잔뜩 들뜬 기분이 느껴졌다. 카이토와 마주 앉아 케이크를 먹으면, 곧 신나서 다시금 캐롤을 불러주겠지. 그건 자신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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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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