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NEW YEAR!


커다란 갤러리창 밖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와. 눈이다. 갤러리의 몇몇 사람들의 작은 탄성이 들렸다. 눈길을 창 밖으로 돌렸다. 며칠 전 인사를 처음 나눈 미술상을 한다던 K가 다가와 마치 우리 사이는 몇년은 알고 있었던 동반자였다는 마냥 어깨에 손을 올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일본에는 눈이 오지 않습니까? 가본 적은 없지만, 동양은 신비한 곳이죠. 오리엔탈리즘. 그는 숨쉬듯 서구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무지하게 내뱉고 있었다. 성준은 창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작지만 선명한 눈꽃이 연말 분위기로 어딘가 들떠보이는 뉴욕 시내를 꾸미는 부속물 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저녁8시가 넘은 시간, 거리는 여러사람의 목소리가 한번에 뭉쳐 웅성이는 배경음악이 된다. K는 음. 하고 성준의 흥미를 끌어보려 추임새를 붙였다.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 K의 멱살을 잡게 되거나, 이 장소에서는 한번도 울리지 않았던 욕지거리가 나올것이다. 미술상이건, 뉴욕의 신진 작가들을 모은 협회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오랜 인연이었던 고등학교 선배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다. 전화로 이어진 목소리에선 자신의 생계가 걸린 문제라는 간절함이 담겨있었고, 어째서 자신의 생계를 고등학교 후배에 불과했던 나에게 걸고 있는지에 대한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전화를 받는 옆자리엔 카이토가 스케치북에 말도안되게 엉성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성준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며, 왼손으로 중심선을 다시 그어주었다. 무방비한 성준의 웃음에 선배는 울먹이며 고맙다는 결론을 혼자서 짓고 전시회 일정을 빠르게 메일로 보내왔다. 자신 답지 못한 대처에 대한 벌이라고. 여기기로 한다.


"눈이 오면 비행기가 지연되나요?"

"하하. 운에 맡겨야죠. 이정도로는 지연되지 않을겁니다."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는데. 새해를 뉴욕에서 맡게 될 줄은요."

"하하..2주정도 연장이였죠. 연말인데다, 요즘엔 부드러운 색감이 인기라 티켓 판매량이 좋아서. 준의 덕입니다. 뉴욕의 해피 뉴 이어! 는 아름답죠. 별처럼 빛나는 전광판들, 환호에 맞춰 키스하는 연인들.."

"새해는 매년 오는건데 뭘 새삼스럽게."


며칠 뒤면 아무렇지도 않게 똑같은 일상을 반복할거면서 어째서 이렇게 들뜬 분위기인지. 어떻게든 자신들의 내일은, 내년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희망을 품고선. 경멸에 가까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전 이후에 일정이 있어서 이만. 성준은 K의 손을 떨궈내며 해피 뉴 이어. 짧은 인사를 남기고 갤러리를 나섰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길거리를 불쾌하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택시스탑으로 걸어가 존 F. 케네디 공항을 외쳤다. 택시 운전자 석의 시계가 9시를 가리킨다. 휴대전화로 비행기 도착정보를 확인하자 택시기사까지 10년만에 만난 친구를 만난듯이 하하. 누굴 맞이하러 가나 보군요. 하지만 오늘은 차가 밀릴거에요. 뉴욕의 사람들은 해피 뉴 이어를 모두 함께 외치고 싶어하죠. 하고 킬킬 웃어댔다. 성준은 입술을 씹으며 그런가요. 하고 짧게 대답한 후 창밖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일본을 떠나온지 4주. 카이토에게 약속한 10일보다 한참 지연된 참이다. 여기서 발목을 잡힐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매일 저녁 전화기를 붙들고 언제오세요? 하는 카이토를 달래는 것도 지쳐가고 있었다. 카이토를 혼자 비행기에 태워 오리라는 생각은 큰 모험이었고, 성준은 자신이 크게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란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시회는 아마 내년까지 이어지겠지. 이 곳에서 새롭게 제안받은 프로젝트도 몇가지 있었다. 구미에 당기는 작업을 두어개 골라 둔 참이었다. 중요 인사들과 동업의 악수를 할때마다 카이토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마스터가 보고싶어요. 하는 무엇보다 간절한 목소리를 떨쳐내기 힘들었다.


[도착 했어?]

[인도장에 가만히 있어. 누가 말을 걸면 수령용지를 보여줘. 아무 말도 하지말고.]


세간에서 카이토는 어엿한 물건이었으므로, 상자속에 넣어 해외배송을 보내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카이토가 한번 더 꺼졌을때 그가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시험해볼 수 없었다. 작업을 하는 자신의 옆에서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졸리다며 두가지 색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작은 불안이 스친다. 사람이 하듯 눈을 비비는 시늉을 하며 벽에 다가가 기댄 얼굴은 어엿한 피곤이 묻어있었다. 성준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졸리다니. 네가 그런게 어딨어. 충전할때 된거 아냐? 제때제때 해야지"

"그럴리가요. 어제.."


눈이 닫히고 잠들듯 카이토는 고개를 떨구었다. 밤동안 충전을 해두었던게 벌써 다 되었나. 성준은 옅은 한숨을 쉬며 상자에서 충전단자를 꺼내 콘센트에 연결했다. 요즘엔 탈 부착식 배터리형에 많이 나온다는 모양이지만. 혹은 배터리를 새롭게 개발된 플라즈마형으로 교환할 수 있다지만. 카이토는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기종이었다. 카이토가 오랜 시간의 비행을 버틸수 있을까. 예의 하나는 괜찮은 녀석이니 사람들과의 대화는 괜찮겠지만. 불안이 실체화된 물음으로 머리를 콕콕 찌른다. 유명한 악기연주자들은 자신의 악기를 위해 비행기좌석을 하나 더 구매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했다. 항공사의 직원들은 오히려 비지니스 석을 구매한것에 감사를 표하며, 주의사항을 물어왔다. 성준은 휴대용 충전기와 아이스크림이 포함된 기내식을 부탁했다. 


"안녕하세요. 김성준 이라고 하는데. 오늘 제 수하물 하나가 도착한걸로 알고 있어서."

"네, 안녕하세요. 네네, 저희가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주신 추가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슬립모드 인가요? 꺼졌어요. 제가 안드로이드는 잘 몰라서. 아무튼 저희는 A인도장에 있습니다."

"네? 꺼졌다구요? 이런..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금방 갈께요."


택시에서 내린 성준은 항공사의 번호로 빠르게 연락하곤, 인도장으로 뛰어갔다. 열시간이 넘는 비행은 사람에게도 고단한 여정이었다. 하루치 배터리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카이토에겐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카이토를 물건 취급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은 억지였다. 


"헤이. 여기에요. 하하. 뛰어오시네. 김성준 작가님? 저도 팬이에요."

"하아. 아닙니다. 무리한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이토는.."

"귀여운 안드로이드를 가지고 계시네요. 기내식을 정말 좋아했답니다. 대기모드인지, 슬립모드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깨를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아서 제가 업어왔네요. 재밌었습니다."


덩치가 커다란 부기장. 마크. 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등을 돌리자 카이토가 업혀 있었다. 겨울이라 추우니 머플러랑, 두꺼운 코트를 입고 오라는 성준의 말을 솔직하게 지켜 커다란 후드가 달린 코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색을 숨기기에 좋아보여 예전에 사두었던 것이다. 


"폐를 끼쳤네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지금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전시회를 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그렇네요. 시간이 되면 보러오세요. 초대권입니다. 빠른 입찰권도 넣어뒀어요."

"하하하. 시간이 나면 이라뇨. 여기서 머무는 동안 꼭 가겠습니다. 그럼, 해피 뉴 이어."

"어머나. 감사합니다! 인사를 못해서 아쉽네요. 카이토, 즐거운 뉴욕 여행이 되길."


부기장과 밝은 웃음을 뿌리며 승무원들이 자리를 떠나자, 성준은 가방에서 보조배터리를 꺼냈다. 후드를 벗기고 은은하게 푸른 빛이 감도는 단자를 연결하고 등을 커다랗게 쓰다듬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손바닥으로 몇번 때리며 소리쳤다. 여행객이 대부분 떠난 공항은 목소리가 왕왕 울리다 차가운 공기에 먼 곳에서 순찰을 하는 직원의 귀까지는 닿지 못했다.


"카이토. 야. 카이토!"

"으으..졸려요. 어라. 마스터. 비행기는.."

"하아..벌써 내린지 오래야. 승무원이랑 친해졌어?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던데."

"세실님. 아이스크림을 주셨어요. 엄청 달고 맛있었는데. 하늘 위에서 먹어서 그럴지도요."

"마음에 들었으면 됐어. 일어나. 호텔에 가자."


여기가 뉴욕이군요. 카이토는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창 밖이 평소보다 흐리게 보인다. 눈의 탓이겠거니.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눈이 오고 있어. 성준이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일본은 이미 새해려나. 뉴욕은. 손목시계를 바라보자 카이토가 눈보다 빨리 10시 35분이요. 하고 대답했다. 충전기와 이어진 선을 코트 아래로 빼서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멍하니 밖을 응시하는 카이토의 손을 잡고 다시 택시를 잡아 탔다. 목적지는 장기숙박하고 있던 유명 호텔이었다. 연말인 탓에, 그 곳의 라운지도 사람이 빼곡하리라 성준은 직감했다. 택시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카이토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비행의 소감에 대해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늘의 위는 정말로 아름다웠다고. 구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더라며. 성준은 자신의 첫 비행을 떠올렸다. 의지와 상관없이 장기가 울렁거리는 불쾌한 경험이었다.


"제가 비행기를 탈 줄은 몰랐어요. 뉴욕에 올 줄도. 여긴 사람이 정말 많은 도시네요."

"다들 그렇지 뭐. 나도 새해를 여기서 맞을 줄은 몰랐어. 전시회 일정이 갑자기 길어져서. 10일이면 돌아간다고 했는데 약속을 못지켰네."

"괜찮아요. 이것보다 더 길어질거라고 예상했어요. 저에게 선택권은 많지 않으니까요. 멋진 곳이네요. 뭐든지 빛나고 있어요."

"마음에 들어? 호텔방이 커서 지내는데 불편하지 않을거야. 매일 청소를 해주러 올거고."

"그럼 전 뭘 하면 될까요? 여기까지 부르신 이유가 있을텐데. 승무원 세실님이 그랬어요. 마스터가 절 아주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안드로이드를 태워보는건 처음이라고요. 뉴욕에서 뭘 할거니. 라고 물어보셨는데..마스터를 보러 간다는 말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일본어로 이어지는 대화에 택시기사가 흥미로운듯 눈을 굴렸다. 성준은 노골적으로 시선을 무시하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존재는 존재 외에 역할이 또 필요한건가? 함의가 담긴 대답을 알아듣지 못한 듯 카이토는 예의 어리숙한 목소리를 웅얼거렸다. 눈발이 천천히 무게를 더해가며 또렷하게 둥근 모양을 만들어낸다. 


"내려. 다 왔어."

"네에. 감사합니다. 아차. 영어.."

"됐어. Have a nice day. Happy new year."

"마스터는 영어도 능숙하시네요. 일본어보단."

"그럼. 유학도 줄곧 이쪽해서 했으니까. 이미 사람들이 바글거리는군."


성준은 코트 뒤에 달린 커다란 후드를 카이토에게 씌우고 호텔로비로 들어갔다. 스위트룸을 몇달 전부터 예약해두고 멋진 한해의 시작을 기약하는 사람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배회하고 있었다. 1층에 만들어진 분위기 좋은 바에는 구석진 자리까지 모두 가득 차 있었다. 장면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카이토를 이끌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호텔..비싸보여요."

"흠..내 돈으로 묵고 있는거 아냐. 넌 내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잘 모를거야. "

"그런가요. 하지만 저도 마스터보다 멋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본 적 없어요."

"네 비교 풀이 너무 적은거아냐? 내일은 쉬기로 했으니까, 좀 쉬어야지. 너도."

"피곤하지 않아요. 충전하고 있어서 그럴지도..비행기 안에서는 많이 피곤했어요. 그럼 내일은 함께 있는건가요?"

"네가 얌전히 있겠다는 약속만 하면 갤러리에도...아니. 정말 얌전히 있어야하니까. 벌써 안기지마. 이러면 못데려가는 거라고. 알아?"


마침 엘리베이터의 벨이 울리더니 호텔방이 있는 12층에 도착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허리에 안긴 카이토와 한 덩어리처럼 호텔방으로 걸어갔다. 떨어져. 다른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매몰차게 손을 가져갈 순 없었다. 카이토의 차가운 손은 느껴질 정도로 떨리고 있었고, 허리를 잡은 힘은 평소에 느끼던것의 몇 배 였다. 엉거주춤한 모양으로 호텔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가 두개 놓인 방이었다. 며칠전 까지 묵던 1인용 방을 바꿔달라는 부탁또한 주최측은 흔쾌히 들어주었다. 마음대로 전시회 일정을 늘렸으니, 이정도는 감안하겠다는 눈치였다. 도착했다는 성준의 말에도 카이토는 허리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등에 고개를 파묻은걸 보면 이미 울고있겠지. 예상하기 쉬운 패턴이었다.


"카이토. 그만해. 나 좀 봐."

"마스터. 보고싶었어요. 다시 못보는줄 알고. 절 버리신줄 알았어요. 제가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돌아오시지 않을거라고. 제가 잘할게요. 열심히 할게요. 마스터가 시키는건."

"뭔소리야..네 필요는 존재로 충분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난 너 필요없어. 하지만 필요할 뿐이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널 여기까지 왜 데려왔느냐에 대한 대답이야. 나도 네가 없으면 불안해. 뭔가 놔두고 온것처럼. 당연하겠지. 널 놔두고 왔으니까. 이 멋진 풍경을 너한테도 보여주고 싶었어."


HAPPY NEW YEAR! 


여기저기서 카운팅을 하는 하나된 목소리가 도시에 울려퍼졌다. 미리 쏘아올린 형형색색의 폭죽이 새해 인사를 건네는 전광판 위를 솟구쳐 올라간다. 그러니까 제발. 성준은 카이토의 손을 잡아 커다란 창으로 향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서로를 껴안거나 키스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러 노래가 흘러나오고, 클라이막스로 향해가는 교향곡 처럼 분위기는 끝을 향해 고조된다. One. 하고 귀가 찢어질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울려퍼졌다. 이어 각각의 새해 인사가 여러나라의 언어로 확성기에서 흘러나왔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다 성준은 그제서야 카이토가 울음을 그쳤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올해는 카이토의 눈물을 좀 덜 보기를. 새해 소원을 그렇게 빌기로 한다.


"여기선 이게 새해 인사야. 올해도 잘 부탁해. 카이토." 


올해의 첫 입맞춤은 생각지도 못한 장소였다. 매일 똑같은 하루라고 지루해하려고만 하면, 삶은 이런 선물을 가져다 주는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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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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