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여름



뜨거운 햇살이 얼굴을 녹일 듯이 쏟아진다. 열기에 눈을 뜨기가 힘들다. 피곤한 몸으로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피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저녁 늦게 시작 한 그림 작업은 새벽 해가 어스름히 떠서야 인기척에 눈을 뜬 카이토를 마주하며 끝났다. 그 날 이후 성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무 일도 없길 바라는 듯 작업에 몰두했다. 카이토와 어영부영 놀다가 예정된 전시회의 마감이 코앞이라는 사실을 협회의 직원에게서 온 드문 독촉 전화에서 알아버리고는, 고해성사라도 하듯이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이전 까지는, 세계 어디를 가든 마감날짜 보다 훨씬 일찍 작품을 보냈는데, 이번엔 어떻게 된 건지 협회 직원들 사이에서도 궁금증이 생긴 모양이었다. 드디어 슬럼프란 걸 인정한 것일까? 하는 부정적인 목소리도 있었겠지.

.. 그 반대라서 어떡하지.”

몸이 두 개, 아니 세 개라도, 모자랐다. 멍청한 생각이지만 카이토의 손을 빌려볼까, 하는 심산이 들었다. 카이토도 뭐, 어느 부류로 보면 음악을 하는 입장이니 무지한 인간들 보다는 솜털만치는 나을지도. 일순 무언가 생각난 성준은 웃어버렸다. 유화 물감 자국이 가득한 작업실의 바닥에 누워 큰 소리로 웃었다. 벽에 놓인 커다란 캔버스에 가득 찬 지금의, 순간의, 색채를 바라보았다. 노을, 밤하늘, 미적지근한 강물, 보라색 숲, 차가운 소나기. 토해내고 토해내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이미지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한 가운데 카이토가 서있었다.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머리는 맑았다. 일주일 내내 먹는 시간을 사치로 여기며 작업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마감날짜까지 사흘 남았으니 해외배송이면 아슬아슬했다. 시내에 나가서 다섯 개 쯤 되는 커다란 캔버스를 택배로 보내려면, 성준은 시내로 나가는 버스 시간표를 떠올렸다. 혼자서는 들 수 없고, 카이토를 시키자니-. 그래 봬도 시가로 하면 비싼데. 물감이 마를 시간이 부족해서 더 신중하게 옮겨야 한다. 성준은 아무렇게나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고 나가 작업실 문 앞에 붙어있던 [카이토 출입금지] 라고 적힌 종이를 뗐다. 카이토를 부르기도 전에 카이토는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왜 항상 이렇게 앉아있는 건데..”

이제 출입금지 해지인가요?!”

아니, 그냥 명패로 붙여놓으려고. 출입 금지의 한자도 틀렸고..”

조용히 하고 있을게요, 물감도 닦아드리고, 물통도 갈아올게요!”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야. 유화라는 말의 뜻을 몰라? 기름으로 닦는다고.”

치이. 물통이란 말은 관용어구에요. 기름통이라고 할 순 없잖아요, . 그것보다 마스터가 나오지 않는 56시간 동안 휴대전화에 전화가 많이 왔어요.”

 

그럴 리가. 성준에게 남은 인연이라고는 협회의 직원 몇 명이나, 가장 최근에 있었던 프랑스의 친구-라고 해봐야 몸이 떨어지면 멀어질 가벼운 성질의 지인들이 다였다. 협회라면, 작업 후 연락 하겠다고 했으니 여간한 일이 아니라면 연락하지 않을 테고. 성준은 오랜만이라며 달라붙는 카이토를 손으로 쳐내며 휴대전화를 켰다. 부재중 전화가 다섯 개나 있었다.

 

..? 켄타. 켄타. 켄타..켄타...”

역시 켄타군이구나-. 집에도 한번 찾아왔었는데, 마스터가 작업 중이라 돌아가 달라고 했어요.”

 

[. 그날 돌아간 뒤로 괜찮은 건가요? 감기라도 걸렸는지 걱정되네요. 시간 날 때 연락해주세요.]

[오늘 하굣길에 시간이 나는데 들려도 되나요? 마음대로라 죄송합니다.]

[작업 중 방해가 되었다면..]

 

“....이런...”

켄타군이 뭐래요? 놀러 온데요? 노래연습?”

닥쳐봐..지금 엄청 오해 받았어. 지금 몇 시지? 수업 중이려나.”

아침 여덟시니까, 아직은 아니에요.”


 

-


 

여보세요. . 성준 형?”

여보세요. . 켄타. , 미안. 내 마음대로 급하게 돌아가 놓고 말하는 걸 잊었네.”

살아계셨네요. 이틀 전인가, 집에 찾아갔는데 카이토가 삼 일째 방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잠시 무서운 생각했어요. 다행이네요. 카이토와 이야기가 잘 풀렸나 보네요.”

어엉? 어어... 그렇지. 예정되어 있던 전시회 준비하느라.”

다행이네요. 오늘 저녁에 들려도 되나요? 며칠 못 드셨을 텐데. 집에서 반찬 좀 들고 갈게요. 형은 매일 인스턴트밖에 못 드실 테니까.”

일본인들은...다들 이렇게 친절한 거야?”

 

켄타는 작게 웃더니 학교에 도착했다며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귀 옆에 딱 달라붙어서 전화내용을 엿들은 카이토는 켄타가 저녁에 온다는 말 이후로 흥분상태였다.

 

켄타군이 놀러온다니까 장보러가요, ? 집에 아무것도 없어요. 마스터가 드실 것도 없어요.”

안돼. 그림 붙이러 시내 가야 해. 저 커다란 것을 무슨 수로 들고 가지? 콜택시를 불러야겠어. 트렁크에 어떻게 잘 넣어보지 뭐.”

시내!!”

넌 집 보고 있어. 자리 부족하니까.”

에에..시내에 가면...악기상도 있고...악보집도 있고...기타도 여러 종류있고..”

안 데려간다니까...장은 다녀오면서 내가 대충 봐올게. 그 대신, 네가 할 일이 있어.”

. 오랜만에 마스터가 명령하셨다. 뭔가요?”

내 작업실 좀 치워. 엉망이니까.”

 

라는 말을 남긴 성준은 대충 옷을 갈아입고 커다란 캔버스를 낑낑거리며 대문 밖으로 옮겼다. 언젠 가의 저녁, 낙서처럼 크로키를 하던 성준에게 카이토는 성준에게 어째서 커다란 그림을 그리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카이토로서는 표면적이고, 그저 크기에 대한 질문이었지만 시시콜콜한 대답은 곧 잘 하던 성준이 멈칫하자, 카이토는 말실수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고개를 들어 성준을 바라보았다. 성준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훨씬, 섬세한 사람이었다. 성준의 태도는 작은 동요에도 요동치는 감정을 숨기기 위한 위악이다. 흔들리는 얼굴은 곧 사라지고, 내 마음이지. 하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오자 카이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건..너무 엉망이잖아요. 마스터..”

 

성준이 집을 나간 뒤 작업실에 들어간 카이토는 기합이 들어간 앞치마를 손으로 털었다. 습작으로 휘갈긴 작은 캔버스들이 바닥이며 벽에 엉망으로 널려있는 데다 신문지를 깔아 두었다 해도 벽이며 바닥에 묻은 유화물감은 마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반짝이는 것도 있는가 하면, 마른지 오래되어 굳은 것도 있었다. 온갖 색이 합쳐져 검은 기름통에서는 이상한 색소와 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이걸 반 나절만에 정리하라니. 너무하잖아. 어지럽히는 데는 일주일이 걸려놓고서. 카이토는 툴툴거리며 작은 캔버스를 주워 서랍장 위에 있던 빈 상자에 차곡차곡 넣었다. 본인은 습작이니 아무 쓸데없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하나하나가 멋진 그림이었다. 습작이라니, 자기혐오처럼 소름끼치는 단어였다. 어깨를 떨던 카이토는 벽에 기대있던 파란색의 캔버스를 주워들었다.

 

. 이거 나다. 어디 보자..716..”

 

카이토는 머리를 뒤져 716일의 파일을 떠올렸다. 그날이구나. 늦게 일어난 마스터와 함께 그림을 그렸던 날. 사물을 베끼는 정도의 프로그램은 기본적이었기에, 카이토는 견본으로 보고 있던 물병을 그럭저럭 그릴 수 있었다. 마스터는 물병을 그리는 카이토를 그렸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처음 하는 행동이었지만, 프로그램화 된 행동이라 어렵지 않았다.

 

이게 뭐야. 완전 똑같이 그렸잖아.”

사물의 좌표를 보고 종이에 배낀 거니까요..?”

좌표? 그건 또 무슨 기계 같은 소리야? 그림을 그리랬더니. 노래도 그렇게 부르냐? 악보에 적힌 대로.”

노래는 원래 악보에 있는 대로 발성하는 게 원칙인데요.”

그러냐...그렇게 노래하면 재밌어?”

 

재미? 카이토는 되물었다. 노래를 부르는 게 재미와 연관된 건지도 몰라? 노래를 불러서 행복한건 누구지? 성준의 이어지는 질문에 카이토는 대답할 수 없었다. 노래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라고 드문드문 대답했지만 불확실한 대답이었다. 신경 쓰지 말고 넘기라는 듯 성준은 카이토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었다. 무표정하게 사물을 베끼던 자신을 그린 캔버스를 카이토는 상자에 넣고 테이프로 봉했다. 기름을 먹인 걸레로 바닥을 닦고 종이를 대서 남은 기름을 흡수시켰다. 재미라는건 자신의 영역이라고 생각 하지 않았다. 분명 그림을 그리는 마스터는 평소와는 다르고, 마음 속에서 빛이 나는 모습이었다. 그건 인간이라서. 창작한 마스터피스와 복사본은 다른 것처럼. 꿈이나 희망이나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나.

 

그렇게 노래해도 마스터가 웃어준다면, 마스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비춰서 행복할지도.”

 

무의미한 모방감정. 의미를 부여하는 건 누구?

정돈된 방을 나온 카이토는 드문 피곤 감을 느꼈다. 거실에 깔린 자신의 낡은 담요에 몸을 말고 누워 충전기를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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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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