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화

-테디베어...

성준은 정물화를 보듯 카이토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미술학도는 기본적으로 그림에 필요한 해부학을 가볍게 배운다. 성준은 책에서 보았던 근육이나 뼈, 장기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림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살아있는 실제가 아니니까. 그런 생각은 카이토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카이토는 처음부터 사람이 되다 만 석고상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정상으로 짧은 팔과 다리에 더러운 붕대가 엉망으로 매어진 뭉툭한 사지 끄트머리를 버둥거리며, 카이토는 살아있었다. 그것이 살아있다는 유기적인 의미는 아닐지라도. 두 뼘만 한 사지를 자신에게 뻗자 성준은 뒤로 물러나다 호기심에 다가섰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호기심이었다. 미지의 물건은 생경한 감각으로 피부에 닿았다. 카이토가 기댄 벽과 바닥에 흥건한 검은 액체의 경계선을 밟은 성준은 비릿한 냄새에 눈을 찌푸렸다. 인기척에 드디어 잔 상처가 가득한 얼굴에서 눈을 뜬 카이토는 언제나처럼 빈 회색 눈으로 성준을 응시했다.

마스터, 오랜만이에요.”

아아. 그러네.”

이런 모습이라.”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

짜증 나니까. 성준은 입에 붙은 오래되고 단물 빠진 단어를 씹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때도 있었지. 몰이해와 몰지각의 스트레스가 짜증이라고 인식되던 때도. 이상하게 따뜻한 목소리나 급격하게 차가워지는 손을 잡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환각이라면 피하고 싶은 종류는 아니었다. 아닌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렇게 더 망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어도 됐을거라는 잔인한 상념마저 떠올랐다. 마치 자신의 생존을 입증하듯 성준의 호칭을 부르며 기어오려는 몸의 중심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성준은 무의식적으로 넘어지려는 몸을 신발을 신은 발로 저지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든 건 이후였다. 카이토는 몸이 온전할때도 꽤 무거운 편이었다. 팔다리가 잘린 지금은 이전 보다는 가볍겠지만, 여전히 성준이 들만 한 무게의 기계는 아니었다.

발이라니. 너무해요.”

더럽잖아.”

그건 절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스터의 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전히 눈치 없네.”

발에 가해진 압력때문인지, 카이토 몸에 감겨있던 붕대에서는 검은 액체가 배어나왔다. 불쾌하게 검은색으로 물들어가는 빛은 성준의 비위를 자극했다. 성준은 과거의 잘못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돌아온다는 과거의 금언을 떠올렸다. 죄는 비극으로. 비극은 눈으로. 손으로. 자신의 손으로. 몸을 숙여 거친 붕대에 손을 가져가자 카이토가 움찍였다.

어째서냐고? 그런 눈 보기 싫으니까. 애매하게 나타나선..”

저의 존재는 저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면서.”

누구의 의지도 아니지.”

한 꺼풀씩 벗겨지며 드러나는 맨몸에 성준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마주친 투명하게 파란 카이토의 눈이 흔들릴 때, 무언가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붉은 카이토의 피가 검게 썩어 곪은 양 팔의 남은 흔적의 끄트머리에. 어설프게 봉제인형의 모습을 따라한 울퉁불퉁한 기형적인 골격을 응시하자 카이토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성준은 손에 묻은 진득한 검은 액체를 입에 가져갔다. 다분히도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역겨워.”

익숙한 단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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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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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간은 새로운 마음으로.


계절은 쉽사리 흘러갔다. 일본의 여름은 숨 막힐 정도로 무더웠다. 두 사람이 지내기에 제법 커다란 집이었기에 에어컨은 거실에서만 사용했다. 덕분에 성준은 여름 내내 카이토와 함께 생활했다. 열도. 열도라서 그런가. 성준이 지나가는 말로 힐끗 부채를 부치며 입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 카이토가 고개를 저었다. 열의 의미가 다르다고. 악의라고는 새털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상쾌한 어투였다. 성준은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줘서 고맙다."

"천만에요! 한국어로는 열과, 열은 같은 음이니까요."

"그런 것 까지 알 수 있는데 한국어는 못하는 거야?"

"그렇죠? 기본 언어설정사항에 한국어는 없으니까요."

"집에서까지 일본어 사용해서 불편해. 너는..아니야. 됐어."


불편해. 귀찮아. 짜증 나. 세 가지 단어는 성준이 카이토에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의 일련이었다. 그런데도 카이토는 성준이 카이토를 위해 집안의 턱을 시공으로 없애버린 것이나,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늘 손을 놓지 않는 점에서 자신이 불편하고 귀찮거나 짜증 나기만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성준의 그림은 여름이 지나도록 캔버스를 채워갔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날이면 둘이서 도록 집을 읽거나, 켄타를 불러 저녁밥을 함께 먹었다. 켄타는 미묘하게 카이토를 떠보는 듯한 질문을 했으나 카이토에겐 전혀 먹히진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과거의 사건을 이리저리 맴도는건 불쾌하다. 켄타 또한 생각이 있겠지. 성준은 밥알을 씹어넘기며 인내심의 줄을 견고히 했다.

미적지근히 여름이 지나자 외풍이 들도록 커다란 창이 있는 성준의 집에는 쌀쌀한 바람이 타고 들어왔다. 아침 겸 점심을 간단히 때운 뒤 작업실에서 한창 그림을 그리던 성준의 귀에 카이토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마스터- 택배가 도착했어요! 사인 해주세요!"

"나 작업 중이잖아! 그런 건 네가 하고 넘기면 안 되는 거야?"

"본인 확인 수령이 필요한 건데요. 저는 마스터의 대리인이 될 수 없는데-. 마스터-."

"알겠어, 알겠다고. 나가고 있으니까 소리 그만 질러."


페인트투성이인 앞치마를 벗어 던진 성준은 붓을 내려놓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작업실에 들어가 있을땐 절대 방해하지 말 것. 성준은 카이토에게 수차례 명령했다. 방해라는 것은 문을 노크 없이 열고 들어오는 것, 노크를 세 번 하고서 들어오라는 말이 없는데 들어오는것, 작업실에 소리가 들릴 만큼 노래를 부르는 것, 창문 밖에서 내다보는 것 등이 해당한다고 세세하게 항목을 붙여주기까지 했다. 발전은 없는가 보군. 한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몇 시간 동안 성준의 세계에는 그림과 그. 둘 만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시간도, 공간도 필요 없는 공감각의 바다를 유영하는 물고기를 방해하는 공기란. 예전이었다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붓을 집어 던졌을 것이다. 자신의 욕을 듣고 울먹이는 카이토 얼굴을 생각하며 성준은 택배수령사인을 대충 휘갈겼다.


"이게 뭔가요?"

"난로야. 새로 주문했어. 외풍이 들면 겨울에 추우니까."

"지금 사용하고 계시잖아요?"

"앞으로 더 추워질 테니, 저거론 어림없어. 예전 것은 이제 버려야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박스의 밀봉테이프를 휙휙 뜯어내는 성준을 바라보던 카이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너는 체내 열이 조절되니까. 이건 내가 쓸 거야. 괜히 화상 입으니까 가까이 가지 말고. 음, 작업실에 있는 거랑 바꿔야지."


작업실에서 쓰던 난로를 거실로 내놓은 성준은 새로 산 난로를 가지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아직 뜨거우니까 만지지 말라는 명령을 남긴채로. 카이토는 천천히 식어가는 낡은 난로 옆에 앉았다. 아직은 따스한 열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난로에 가져가던 손을 거두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너 이제 버려지는구나."

"사용 가치가 없는 물건은 언젠가 버림받는 거야."

"슬픈 걸까. 그건 슬픈 일인 걸까?"

카이토는 난로의 접근회로에 데이터를 건드려 보았으나 싸구려 난로에 달린 지능 회로에선 아무런 답이 없었다. 물건은 성장하거나 성숙하지 않는다. 다만 퇴색한다.

"나는..노래하기위해 만들어졌는데.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나도 버림 받는걸까?"

"그건 슬픈 일인 걸까? 마스터와 헤어지게 된다면."


언젠가의 그 날 처럼.


메모리를 숨긴다 하더라도,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부서진 물건은 흔적을 남긴다. 사라진 왼쪽의 시야. 침수된 코어. 지워진 메모리는 새하얀 영역을 남겼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없기를 바라는 빈 공간.



***



늦은 아침을 맞이하듯 창밖에선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녀석답지 않게 침묵하고 있는 게, 비가 와서 가라앉은 건가. 심드렁하게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성준은 마주앉은 카이토의 입에서 나오는 뜻밖의 말에 입술에 대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뭐라고 했어?"

"마스터, 제가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했어요."

"지금까진 내 허락받고 노래 불렀어? 부르지 말라고 해도 불렀잖아."

"그건 회사에서 제공된 기본 악보랑 온라인에 올려져 있던 데이터를 재생시킨 것 뿐이에요. 제가 말하는 건 저의 노래, 보컬로이드는 노래하는 악기라고요. 라디오가 아니에요."


켄타가 집에 놀러 오는 날이면 카이토는 자신보다 작은 켄타의 어깨며 팔에 달라붙어 노래, 노래불러요. 하고 어리광을 부렸다. 여전히 카이토에게 이기지 못하는 켄타는 USB를 연결하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카이토는 성준도 들어본 적이 있는 유명한 가요를 몇 개 불렀다. 주크박스처럼 베이스가 되는 악보를 넣으면 목소리로 재생하는 구조인가. 켄타는 보컬로이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성준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노트의 종류나 확장자에 관해서 설명했지만 무신경하게 대충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관심 외의 일에 신경을 쓸 만큼 섬세한 성격도 아닐뿐더러, 괜한 기대감을 심어주면 곤란하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난 화가야. 음악은 전혀 모른다고."

"알아요. 하지만 이건 마스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구체적으로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노래를...만들어 주세요."


성준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자기 의사를 주장하는 거야? 자기 몸 하나 제대로 못 추스리고 눈도 못 쳐다보던 카이토가? 안드로이드는 주인에게 절대복종. 아무리 관심 밖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는 요즘 세상에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사용자에게 요구가까지 하는 안드로이드라니.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던지, 산책을 나가자는 부탁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카이토의 회색빛 눈동자는 올곧게 성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이토는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노래를. 하고 남은 여운을 읊조렸다.


"지금도 부르고 있잖아. 왜 내가 만들어야 하는 건데?"

"마스터의, 저만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마스터는 예술적 재능이 있으니까 하실 수 있어요!"

"해본 적이 없다는데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내 잠재성을 네가 평가하지 마!"

"그럼, 마스터는 제대로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왜 저를 기동시키고 있으신 건가요?"

"그걸 네가 말하면 안 되지...임마..."


억지스러운 부탁이야. 나는 들어줄 수 없어. 성준은 딱 잘라 이야기하려다 카이토의 질문에 멈춰 서고 말았다.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오히려 부담스럽고 방해되는 카이토를 6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하루도 종료하지 않은 채 데리고 있는 이유. 머리가 복잡했다. 단지 카이토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상만으로 이어지기에는 부족했다. 카이토와 있을 때면 느껴지던 미묘하고 이상한 대화들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구석의 감정을 이끌어 낸다. 그림을 그리는 데에 도움이 되니까. 자신이 생각해도 구차한 변명이었다. 성준은 의자에서 일어난 카이토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 네가 여기 있어서 기동시켰고, 어찌 됐든 소유자가 된 이상 관리할 의무가 있어."

"그냥 있어서라니...마스터는 지나가는 물건 전부에게 관심을 가지고 책임을 가지세요? 책임을 가지고 있으시다면 더욱 노래를 만들어주세요. 보컬로이드의 사용목적은 연주라고요."

"말도 안 되는 억지 그만 부려. 노래는 듣기만 하고 만들어 본 적 없다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 아냐?"

"마스터는 멍청이에요!!! 조카신발!!!"

"좆까 씨발이겠지..멍청아.."


예전에 한국 친구와 통화하던 걸 엿들은 카이토가 이상하게 번역하고 물어보길래, 상대방에게 자신이 화가 났음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라 말해주었는데 역시 잘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카이토는 눈을 흘기더니 쿵쿵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성준은 허탈하게 웃었다.


나 지금 저 녀석이랑 싸운 거야? 멍청하게 웃기만 하는 카이토랑?



***



카이토의 고집은 예상보다 대단했다. 먹지도, 화장실을 갈 필요도 없었으니 전기만 충전되는 방에서 삼 일째 꼼짝을 하지 않았다. 잠근 문을 두드려보려다 포기하고 돌아선 게 몇 번째였다. 자존심이 있지. 잘못 한 것도 없는데. 내가 주인인데. 작업실에서 사흘동안 씨근거리던 성준은 결국 켄타에게 구조요청을 했다. 켄타가 다니는 학교근처 카페까지 나간 성준은 오래간만에 본 켄타에게 푸념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이토 형이랑 싸웠다고요? 싸웠..다고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더니, 기분 상했는지 방에서 나오질 않아. 원래 안드로이드라는 게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거야? 주인한테?"


한국이나, 다른 외국에서 만났던 안드로이드는 인형처럼 차갑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기계적인 과제를 수행했어. 사무 일이 없어서 지겹다는 사무용 안드로이드나, 가사 일이 없으니 만들어달라는 안드로이드는 없잖아. 어째서 카이토는. 심지어 나한테 욕을 했어. 못된건 빨리 배운다더니.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성준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던 켄타가 마시고 있던 주스 잔을 내려놓고 찬찬히 입을 열었다.


"저도 놀랐어요. 하지만, 카이토형처럼 초기 버전의 안드로이드에는 임프린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들었는데..그게 작용한 게 아닐까요?"

"아..그. 애정과 유대가 어쩌 고하는 그거 말하는거야? 그럼 나랑 애정..아니, 친해지고 싶어서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거야?"

"아마 어떤 촉발요인이 카이토형에게 있었고, 그게 어쩌면 임프린팅 설정을 건드린 거겠죠."


귀찮은 설정이네. 애완동물도 아닌데 왜 주인이랑 애정과 유대를 필요로 하는거지? 성준은 입을 삐죽이며 앓는 소리를 했다. 정말, 정말 귀찮아. 괜히 신경 쓰인다고. 세 살 먹은 아이처럼 떼쓴다고 가능한 일이면 처음부터 노랜지 뭔지 만들어 줬겠지. 빈말로도 카이토가 부르는 노래는 멋지다거나, 잘 부른다고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노래를 고집하는 카이토의 태도에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기분이었다.


"망할. 내가 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잖아. 노래라는게....넌 이전 주인이 썼던 카이토의 노래를 들어본 적 있어?"

"아사노 씨가 사용했던 건 카이토라 형이 부르는건 본 적이 없어요."

"그래, 과거의 주인도 주지 않았잖아. 근데 나한테 갑자기 왜그러...응? 잠깐. 전 주인은 카이토를 사용했다고 했잖아. 근데 노래 부르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네. 카이토 형이 자기도 노래한다고는 말 했지만, 직접 본 적은 없어서."

"그게 아니라. 카이토랑 카이토형이랑 동일인물이 아니야?"

"아...아사노씨는 보컬로이드를 2대 소유하고 계셨어요."

"보컬로이드를 2대나 가질 수 있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켄타를 바라보자 켄타도 놀란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몇 가지 서류심사를 통과하면 2대의 기기를 가질 수 있지만, 2배 이상으로 발생하는 부대비용과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 때문에 굳이 똑같은 기기를 2개나 들이는 사람은 희소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던 켄타는 들어본 적 없냐고 질문했다.


"카이토는 옛날이야기 하지 않아. 물어본 적도 없고. 그럼 같은 카이토를 하나 더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음... 동일한 기기냐는 질문이시면 애매하네요. 카이토형은 V1버전이고, 카이토는 V3버전 이였어요. 모르시겠죠. 합성 엔진이 달라요. 형은 초기의 구버전이고, 카이토는 새로 나온 버전."


한때 카이토의 눈을 수리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고 다닐 때 읽었던 글이 떠올랐다. 안드로이드의 안구 한 쪽만 정확하게 손상되기는 매우 드문 일이라, 부분 수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고의에 의한 폭행, 혹은 자해의 확률이 가장 높다는 글이었다. 당시에는 설마, 하고 웃어 넘겼지만. 머릿속에 몇 달 전 카이토를 등록하며 했던 대화가 스치고 지나갔다.


'카이토 눈은 언제부터 그랬나요?'

'글쎄요. 제가 오기 전부터 그랬으니까..적어도 2년은 넘었어요.'


성준은 서둘러 겉옷을 챙겼다. 집으로 돌아가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든, 두드리든. 카이토와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문자로 알려달라는 켄타의 배웅을 뒤로 한 채, 빠르게 카페의 문을 열고 비 내리는 거리 사이를 헤집고 걸어갔다. 카이토를 바라보면 느껴졌던 막연한 감정은 부서지고, 새로운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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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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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bye!

긴것/연성 릴레이 2015. 7. 25. 18:18

지금 당장 옆사람을 쏘지 않으면 죽는다 


good bye!

 

 

세계가 멸망한다는 사실은 맛없는그러나 풍요로운 영양을 위해 꼭 먹어야하는 음식처럼 억지로 씹어 넘기고 나자바로 그 날은 내일로 다가왔다갑작스럽다 투덜거려도 어쩔 수 없었다지구에 충돌하리라고 운석이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오히려 끌어들인 것은 중력이라 하니 더욱 할 말이 없었다그것은 그동안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게 한 생명의 기원이었지만중력은 그런 자신을 너무도 과신한 걸지도 모른다사람은 중력의 덕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이제 와서 염치없이 중력의 탓을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1.

 

창밖으로 시퍼렇고 커다란 운석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시계는 오전 7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밖은 해가 진 저녁보다 새벽처럼 어슴푸레한 빛이었다. TV에서는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한동안은 궤도를 측정한다며 여론을 선동하더니 이젠 그들도 포기한 모양이었다마지막 아침을 맞은 성준은 허무하도록 상쾌하게 기지개를 피며 거실로 나와 손에 든 물건을 카이토에게 내밀었다.

 

카이토이런 게 머리맡에 있었어.”

안녕히 주무셨어요작은 쪽지네요전 쓴 적이 없는데요총은 갑자기 어디서 나셨어요?”

이건..믿을 수 없겠지만 꿈이었는데..”

 

성준은 한 달 동안 지구를 향해 점점 다가오는 운석을 그렸다날이 지날수록 망원경을 쓰지 않아도 굴곡진 모양이나 우주 어디선가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얄밉게도 운석의 빛은 카이토의 눈의 색과 닮아있었다내일이 마지막이라 완성은 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고작 유감인가세계가 멸망하는 것이.”

당신은 뭐야?”

유감 이상의 감정을 가진 것이지어때선택 하나 해볼래?”

 

꿈의 천정에서 작은 권총과 쪽지가 팔랑이며 떨어졌다권총은 성준의 손에 맞게 적당한 사이즈였다.

 

[쪽지가 사라지기 전에 총으로 살인을 하면세계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살인..?”

자살은 재미없으니 제외하지그럼다시 만날 수 있기를.”

 

머리맡에는 시커먼 권총과 반듯한 글씨체의 쪽지가 놓여있었다꿈이라 하기엔 꺼림칙하게 생생했다천정에서 누군가가 바라보는 듯 한 느낌에 성준은 위를 올려다 보았으나 쏟아지는 것은 불안한 기운과 귓가를 울리는 카이토의 당연한 질문 뿐이었다.

 

살인...꼭 살인이여야 하는 건가요?”

 

쪽지의 끝이 검게 변하더니 카이토의 손 위에서 타들어가기 시작했다처음 들어보는 권총은 묵직했다권총 뒤의 고리를 잡아당기자 실탄 하나가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권총을 들자마자 공격불가 알림과 메시지가 눈에 나타나 가뜩이나 좁은 시야가 붉은 창으로 뒤덮였다.

 

밑져야 본전이지어차피 오늘로 끝이라는데.”

마스터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살인이 가능한 경우는 하나 밖에 없잖아머리를 쏴.”

싫어요마스터 오늘 좀 이상해요.”

쏠 수 있지말 두 번 하게 하지 마.”

 

어느새 쪽지는 작은 귀퉁이 하나만 남겨져 있었다성준은 총구를 이마에 가져갔다한쪽 눈 밖에 없는 카이토가 제대로 쏠 수 있도록 정중앙에 두고서 점점 흩어지는 남은 쪽지조각을 보며 조급하게 외쳤다.

 

카이토어서.”

마스터죄송해요...”

됐으니까 빨리!!”

 

허공에 총성이 울려 퍼지자 성준은 질끈 눈을 감았다운석이 충돌하면 지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불타 사라진다고 했다고통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TV나 라디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권총을 이마에 맞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귓가를 칼로 후벼파듯 날카롭게 찌르는 총성의 메아리가 울리고카이토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졌다커다란 소리에 귀에서는 이명이 왱왱거렸다아직 살아있는 무감각에 눈을 뜨자 바닥의 권총 위에는 기름 냄새가 나는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총의 반동으로 카이토는 미친 듯이 손을 떨고 있었다.

 

“...전 사람은 해칠 수 없게 프로그래밍 되어있어요미리 말 하지 않아서 죄송해요.”

이런 멍청아!! 그러면 말을 했어야지네 팔은 왜 쏘는 거야?! 안 그래도 병신이면서!!”

제가 해를 입힐 수 없는 대상은 물건도 포함돼서요..쏠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아쉬웠던 총성과 함께 쪽지는 공중에서 작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카이토가 입은 새하얀 코트 밖으로 시뻘건 피가 물들고총알이 박힌 팔은 반쯤 떨어져 제멋대로 너덜 너덜거렸다출혈 속도로 보았을 때오늘 까지는 버틸 수 있겠다고 카이토는 웃으며 말했다.한낮인지 알 수 없는 어두운 하늘이 운석의 그림자로 드리워지자 성준은 캔버스에 파란색의 붓을 계속 덧칠했다파란 물감에 검은색을 섞어 아래쪽부터 명암을 만들었다운석이 다가오는 소리가 웅웅대며 커지고땅이 일어나 운석을 맞을 준비를 하는 듯이 울렁거렸다카이토의 피로 가득한 바닥에 앉은 성준은 붓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다오늘 이내로 끝날 수 있어서요슬슬 출혈량이 위험했어요.”

불가능한 선택지를 주고 허세부리긴괜히 기분 더럽게 놀아났잖아.”

그 분이 제가 보컬로이드인걸 모르셨을까요?”

그럴 리가.”

 

그 세계는 연기처럼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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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상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외적, 내적 상처가 심해 재활은 불가능. 기본 안드로이드인격 손상. 신체 재활용 불가능. 세 번째 상담을 마치고 폐기처분 신청서를 작성하면 상담팀을 괴롭혔던 K-221 카이토는 복구 불가능한 초기화 후 폐기 될 것이다. 서류를 정리하고 병실로 향하는 길에 나는 A를 만났다.

 

"T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디 가요? 221?“

그렇지 뭐. 오늘이 세 번째야. 마지막.”

나도 인사 가야겠다. 같이 가요.”

 

상담팀은 폐기처분율을 줄이는 것이 일이다. 완벽하게 수리될 순 없어도, 원래의 기능을 잃어도, 다른 역할로 쓰일 수 있도록. A는 폐기처분율을 줄이는 것에 큰 공헌을 하고, 그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카이토에게 특별히 신경 쓰는 것도 그녀의 성취감에 의한 것이리라. 노크를 하고 병실의 문을 열자 A는 침상을 높인 채 앉아있는 카이토에게로 종종 달려갔다.

 

카이토군, 안녕! 오늘 기분은 어때?”

. . 별로에요. 안녕하세요.”

 

나는 빌려 갔던 메모리칩을 내밀었다. 행복했던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기억소자. 카이토는 마스터와의 관계도 좋지 못했다. 불러 본 노래도 없다고 했다. 카이토는 카이토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너무나도 정해진 순사처럼. 그럴듯한 이야기처럼 흘러가는 게 못마땅했다.

 

선생님, 제 메모리 다 봤죠.”

. 오늘 상담은 앞으로 대해서야. 서류 보면서 설명할게.”

저한테 앞으로란건 없어요.”

 

A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조금 침울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포기해서 카이토가 폐기처분 되는 것 같다고 어제부터 내 주위를 맴돌며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위치가 아니다. 안드로이드의 재활은 효율과 가까운 개념이다. 대부분의 안드로이드는 다시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건 선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A는 자만에 빠져있었다. 나는 폐기처분 신청서와 재활감정 신청서를 꺼냈다. 카이토는 폐기처분 신청서를 손에 들고 찬찬히 읽어나갔다.

 

재활감정.”

닥쳐요. 선생님 분명히 약속했잖아요. 그리고 선생님도 이제 알잖아요. 난 구제불능이에요. 다시는 사람을 위해 노래하고 싶지 않다고요. 이런 카이토는 있으면 안 돼요.”

 

나는 카이토가 아니에요. 카이토가 말했다.

그 화장실 안에서 카이토는 죽었다고.

갈기갈기 찢기고 희롱당하고 농락당해서.

 

형식상 설명이야. 입 다물고 들어. 본 기체는 재활 불가능의 상태를 인지하였으며, 보호 아래 있는 상담사의 의견과 동일함을 증명합니다. 인정하십니까?”

, 인정합니다.”

폐기처분 일정은 오후 여섯 시이고.”

지금 꺼주세요. 남길 말 없어요. A선생님, J선생님, B선생님한텐 미안하고. 재수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선생님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네가 폐기됨과 동시에 널 그렇게 만든 용의자들의 죄는 사라져. 원한다면 재활센터에서 재판을 진행할 수 있고.”

됐어요. 이제 꺼 주실래요?”

그래. 안녕.”

 

나는 카이토의 뒷목을 쓰다듬었다. 카이토의 피부는 건조하고, 손에 달라붙는 느낌이 좋았다. 아깝다, 라는 감정이 적절 한 것인지 모르겠다. 조금 더 카이토를 일찍 발견했었더라면, 소용없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대상자에게 감정 이입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다. 나는 현실에 집중하기로 한다. 내 손가락이 움직이면, 카이토의 불행한 시간은 끝난다. 전원 버튼의 주위를 맴돌았다.

 

선생님이 제 마스터였더라면,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난 안드로이드 안 키워. 여기서 보는 것도 징그러워.”

나도 그래요. 안녕히 계세요, 라고 말하기도 싫을 정도로.”

 

카이토는 내 손목을 힘없이 잡았다. 나는 눈을 감은 카이토의 전원 버튼을 깊게, 삽입하듯이 부드럽게 몇 초 동안 눌렀다. 뒤로 넘어가는 카이토의 몸을 손으로 지지하며 침대에 조용히 눕힌 뒤에, 남은 서류를 챙겨 병실을 나섰다. A가 슬픈 얼굴로 상담실에서 카이토의 파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머슴쩍게 A에게 미안하다고, 카이토의 보관용 메모리를 파일 안에 붙이며 말했다. A는 끝까지 카이토의 메모리를 보지 못하겠다고 했다. 나도 추천하지 않는 바였다. 뒷맛이 더럽고, 무력하게 망가진.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나를 노려보는 새빨갛고 파란 눈동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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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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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夏夕空

 

일곱 시 이십분. 카이토는 미리 맞춰놓은 오븐의 타이머가 울린 듯 반짝 눈을 떴다. 다시 눈을 감고 시스템 체크. 체온. 시각. 청각. 촉각-. 의식 활성화. 잔여 메모리 정리 완료. 충전코드를 목에서 뽑아 동그랗게 감아 담요 위에 올려두었다. 구색이라도 맞춰 놓고 있으라는 성준의 말에 충전코드가 연결된 거실의 자리 아래에 얇은 담요를 깔았다. 여기저기 보풀이 일어난 낡은 담요는 베란다 끝에 있던 작은 창고에 덜렁 놓여있었다. 다른 빈 상자 몇 개 에서는 버리지 않은 쓰레기나 잡동사니가 들어있었다. 창고의 존재를 최근에 알아챈 성준은 담요의 먼지를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이것만 왜 안 버린 거. 이상한 전주인 .”

이거 제가 쓰면 안 될까?”

더러워서 . 먼지는 안드로이드한테 별로래. 하긴, 넌 침수에 눈에..이제 와서 관리해봐야 무슨 소용이야.”

빨아서 쓸게요. 그러고 보니 정기 점검이 다음 주 부터 한 달 동안이네요. 혼자 다녀올게요.”

웃기시네. 가다가 전봇대에 박아서 영영 누워있고 싶어? 걸어가긴 멀던데, 자전거라도 빌릴까.”

 

6개월에 한번씩, 등록된 안드로이드들은 센터에서 정기점검을 받아야 했다. 센터를 이용하지 않은 등록은 엄밀히 말하면 불법이었기 때문에, 중고기기의 재등록을 하라는 메일과 문자가 여러 차례 날아왔다. 하지만 한자가 가득한 전문용어는 영 이해하기 힘들었다. 번역기 대용으로 카이토를 데려와 메일을 보여주었지만, 법률 용어를 쏟아내는 카이토의 설명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성준은 인터넷을 뒤져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센터를 찾아 전화로 재등록을 하고, 다음 점검 날에 들러 서류를 작성하라는 직원의 말을 메모해두었다. 계좌는 팩스로 보냈으니 임시 등록은 된 셈이었다.

 

마스터! 오늘 센터 간다고 말씀하신 날이에요.”

...지금이 몇 신...나 새벽에 누웠거든.”

아침 일곱 삼십이 분이! 센터는 아홉시에 오픈이고, 준비하고 거리를 계산해보면..”

나가. 열두시까지 들어오지 . 켄타가 자전거 빌려주기로 했으니까 그거나 받아놓고.”

알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켄타는 그 후로도 종종 마주쳤다. 늦은 저녁 장을 보러 나가는 시간이 켄타의 하교시간과 맞물려 있었고, 켄타는 늘 혼자 다녔기 때문에 말을 걸기도 쉬웠다.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켄타였다. 몸보다 커다란 기타를 매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걸어가던 켄타를 부르면 금방 어수룩한 얼굴로 뛰어와 인사를 하고, 카이토에게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자전거를 빌려달라는 부탁에도 싫은 소리 없이 일 보러 가는 김에 들리겠다고 답했다. 방을 나온 카이토는 냉장고를 열어 부족한 식재료를 기억했다. 남은 집안일을 조용히 해치우고 식탁에 앉아 현관문을 진득하게 바라보며 켄타를 기다렸다.

 

실례합니다. 자전거를 가져왔는데요.”

네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성준형의 부탁으로 자전거를 가져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건물에 자전거를 묶어 놓을 곳이 없더라고요. 가지고 올라오려니, 엘리베이터가 없고..”

곤란하네요. 지금 자전거는 어디에 있어요?”

화단의 울타리에 잠시 묶어놨는데, 얼른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거. 어떡하지, 형은요?”

마스터는 열두시까지 깨우면 안돼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같이 내려가요.”

 

카이토는 식탁위에 빠르게 메모를 남긴 후에 켄타와 함께 집을 나섰다. 한참 뒤에야 일어난 성준은 인기척 없는 집안을 둘러보다 테이블 위에 프린트 한 것처럼 반듯한 글씨의 메모를 발견했다.

 

[자전거를 돌보고 있겠습니다. 1층의 화단 옆.]

 

뭔 소리야...자전거가 강아지라도 되는 줄 알겠네.”

 

성준은 부스스한 머리를 만지며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1층의 화단에는 건물에 사는 할머니들이 손을 모아 돌보는 여름 꽃이 마악 피어나고 있었다. 낮은 화단의 울타리 옆에 켄타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카이토는 자전거 옆에 앉아 화단의 꽃을 만지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눈에 띄는 시퍼런 머리카락이 햇빛에 비쳐 반짝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치자 카이토는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어이, 카이토!!!!”

우와. 마스터! 일어나셨나요? 아직 열한시 사십오 분인데요!”

하는 거야 이 멍청아!!!”

 

카이토는 힘차게 다시 소리쳤지만, 성준은 작게 욕을 뱉은 후에 휴대전화를 챙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자전거 자물쇠를 손에 든 카이토가 빌라에 자전거 주차장이 없다고 해맑게 웃었다.

 

자전거 세워놓는 곳도 없다니. 일본은 자전거 많이 타고 다니잖아..?”

이 건물엔 없고, 이 옆에 있는 공통으로 쓰는 주차장은 요금을 내고 써 야해. 켄타군한테 비싼 돈을 내달라고 하긴 죄송해서..”

한 시간에 100엔이잖아!! 75만 엔짜리 초고가 기계주제에 무슨 소리야! 네가 쓸데없이 매일 먹는 아이스크림도 하나에 200엔이라고. 듣고 있어? 잠시만 기다려. 준비하고 다시 나올 테니. 오늘 더우니까 모자 쓰고. 카드랑 신분증..”

마스터. 시리얼 코드 적어가야해요.”

그랬지, . 네가 기억하고 있지 않아?”

그건 중요정보라서 제가 밝히는 건 불가능해요.”

 

성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걸어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에 메모해놓은 종이와 모자 두 개, 신분증을 넣은 지갑을 백팩에 넣고 늘 신던 슬리퍼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휴대전화를 확인해보니 켄타에게서 메시지가 세 개나 와있었다.

 

[자전거 가지고 갈게요.]

[전화 가능할까요?]

[시간이 없어서, 두고 갈게요. 카이토가 제 말은 전혀 안 듣네요. 죄송합니다.]

 

어서 뒤에 타. 나중에 켄타한테 사과해야겠다. 못살아 정말.”

켄타군, 정말 착하니까 걱정이에요.”

헛소리 말고 뒤에 타기나 해.”

 

성준은 기세 좋게 자전거에 앉아 뒤에 붙은 카이토의 손을 허리에 당겼다. 그리고 의외의 저항감에 고개를 돌렸다.

 

뭐해? 잡으라니까. 넘어지고 싶어? 허리 앞 쪽을 꽉 잡아.”

그게..앞으로 앉으면 마스터 등에 가려서 잘 안보여서. 그럼 옆으로..”

 

자전거로 달리니 빌라를 벗어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마트를 갈 때 지나가는 강과 다리를 단번에 넘어 낮은 주택가에 들어섰다. 카이토는 제법 무거웠고, 등에 바싹 붙어 무게가 더욱 느껴졌다. 목에서 땀이 흘렀지만 곧 바람에 식어갔다.

 

카이토, 여기서 어느 쪽?”

왼쪽으로 돌아서 200m 직진하세요. 다음으로 나오는 좁은 길은 무시하세요.”

 

앞을 빼꼼 내다보던 카이토가 다시 등에 달라붙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사이로 느지막이 산책하는 노부부와 나무그늘이 스쳤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등에서 조급하고 커다랗게 심장소리가 울렸다. 높고 거친 숨소리. 평소보다 뜨거운 체온. 지나가는 가게에서 은은하게 울리는 라디오 소리. 카이토는 빠르게 달라지는 것들을 저장했다. 작은 방에서 시작했던 풍경의 반경이 넓어지고 있었다. 마스터와 지나갔던 다리. . 사나흘에 한번 가는 마트. 머릿속의 지도에서 기호에 불과했던 작은 정보들. 악보 속에 갇혀 있던 노래를 부를 때처럼 신기한 일이었다.

 

 

 

***

 

 

이십분 쯤 들려서 도착한 센터는 한적했다. 이 곳은 직원과 수리기사를 포함해 하루에 근무하는 직원은 두세 명이 전부인 작은 곳이었다. 성준은 자전거를 앞에 대놓고 센터로 들어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닿자 땀에 젖은 옷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카이토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펄럭거리며 열을 식히더니 번호표를 뽑는 곳으로 걸어갔다.

 

더워...너 은근히 무겁잖아. 집에 땐 장도 보고 가려고 했는데, 벌써 힘들어.”

번호표 뽑았어요. , 벌써 저희 번호에요!”

 

아무도 없었으니 차례는 금방이었다. 창구의 직원은 전에 전화했던 목소리보다 가늘고 어린데다 귀여운 구석까지 있는 단발의 아가씨였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식 등록이랑, 얘 점검이요.”

알겠습니다. 등록은 제가 도와드리고, 기체는 안쪽의 메인터넌스 룸으로 들어가 주세. 삽십 분 정도 소요됩니다.”

 

상냥한 미소를 띤 직원은 자리에서 서류를 찾아 내밀었다. 카이토는 살짝 고개를 숙인 후에 창구 옆으로 난 안쪽 길로 걸어 들어갔. 받은 몇 개의 서류는 신상정보와 서약서, 계약서. 같은 것이었는데. 중요한 곳에는 영어가 적혀 있어 메일보다는 읽기가 쉬웠다. 성준은 볼펜으로 서류를 작성하며 연신 웃고 있는 직원에게 살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제 기체의 전 주인에 대한 정보나 카이토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안드로이드 기체 정보 법에 어긋나서 불가능합니다. 저희도 열람이 불가능해요. 다만..저 카이토라면 몇 번 봤죠. 눈 색이 달라서 기억하기도 쉽고. 자주 정기점검일 외에도 수리하러 왔어요.”

눈은 언제부터 그랬나요?”

제가 오기 전부터 그랬으니까, 적어도 2년은 넘었겠네요. . 최초 등록일은 6년 전이네.”

“6년 전? 여기서 등록된 건가요?”

정식 등록 완료 되었습니다. 이제 업데이트는 집에서도 다운로드로 가능하세요.”

 

확인 서류를 올려둔 직원은 볼일이 끝났으면 이만. 이라는 얼굴로 미소 지었. 별수 없이 돌아선 성준은 뒤에 있던 소파에 앉아 켄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 자전거 고마웠어. 언제 돌려줄까?]

[형 편할 때 주세요. 이제 방학이라 집에만 있을 거라.]

 

켄타의 어머니는 동네에 하나뿐인 악기사를 한다고 했다. 어머니. 라고 단정 지었으니 아버지는 어떤 이유로 함께 살고 있지 않을 텐. 더 이상 묻진 않았다. 그래서 작곡이나 기타를 배운지는 중학교 때부터라 꽤 되었다고 말했다. 고작 3년일지도 모르지만, 그 나잇대의 소년에겐 긴 시간이다. 성준은 답장을 보내다 잠시 고민한 후 뒷 문장을 붙여 전송했다.

 

[다음에 집에 놀러와. 카이토가 노래하 게 보고 싶어. 넌 할 수 있지?]

 

카이토는 할 일이 없으면 CDP의 노래를 계속 들었다. 성준은 짐을 뒤져 다른 CD를 찾아 주었고, 식사 시간에 마주 앉으면 들었던 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젠간 저도. 언젠가는. 하며 짓는 미소는 쓸쓸해보였다. 설거지를 할 때 가끔씩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분명 그것 보다 더 제대로 된걸 하고 싶을 것이다. 창구의 직원이 손을 들어 성준을 부르자 카이토가 열린 문에서 걸어 나왔.

 

저기. 잠시만. 눈은 수리가 안 되는 건가요?”

아예 망가져서 안돼요. 눈은 단일 파츠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시야는 어쩔 수 없지만, 평형감각이나 조정은 최대한 높여놨습니다.”

 

따라나온 늙은 수리기사는 카이토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 따라 움직이는 파란색 눈동자와 가만히 고정된 회색 눈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침수에 의해 추가적으로 몇 개를 더 손봤으니, 이제 절대 하지 말라며 신신 당부를 한 뒤에 카이토의 등을 툭툭 쳐 가라고 손짓했다.

 

마스터,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가자.”

침수에 의한 수리비는 전액 본인 부담으로 계산됩니다. 총액 42500엔입니다. 카드로 계산하시겠어요?”

“...카드로요.”

..죄송해요. 마스터.”

아오..힘없으니까 걸어가자..”

 

재등록 비에 수리비, 점검 비까지 합친 영수증은 어마어마했다. 얼마 전에 그림을 넘기고 받은 돈을 고스란히 지불했다. 날은 여전히 무더웠다.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던 성준은 센터를 나선 후로 조용히 걸어오던 카이토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영수증의 가격에 놀란 건 카이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비싼 줄 알았으면, 침수 수리는 하지 말걸 그랬다며 침울한 표정으로 당분간 아이스크림은 먹지 않겠다고 했다.

 

도대체 이 많은 돈을 들이고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노래, 채보, 기본적인 악기연주..”

그것 참 멋지네. 들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뭐라도 해야겠어. 노래 해봐.”

에엑. 지금요? 노래 데이터가 없는데요.”

아까 지나올 때 들었던 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 여름의 향기-. 그런 가사가 있었는데.”

아하. 그 노래의 제목은 여름의 저녁하늘이에요. 기본 음설정만 된 상태라서...아니에요. 부를게요.”

 

카이토는 고개를 돌려 더위와 영수증에 지쳐 짜증이 올라오기 일보 직전인 성준을 힐끗 쳐다보더니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시작했다. 어정쩡한 첫 음으로 시작한 노래는 불안하게 이어졌다. 높은 음은 더 불안했고, 기대했던 것 보다는 별로였다. 카이토가 만들어 주었던 스파게티의 맛처럼 기본에 충실하고 단순한 노래. 카이토는 신중하게 음을 골랐다. 걷는 중이라 폐활량은 부족하고 성준은 뚫어져라 노래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첫 노래를 이런 식으로 하고 싶진 않았는데. 가사와 음을 틀리지 않는 것에도 벅찼다. 조용한 노래는 숨소리를, 흔들리지 않도록. 카이토는 부드럽게 음을 이어갔다.

 

もりよあの끝이에요.”

마지막 가사는 무슨 뜻이지? 모르는 단어네.”

스며드는 따스함이여. 그 여름의 기억이여. 입니다.”

괜찮은데, 좀 더 잘 할 수 있을지도. 같은 느낌이야. 마트는 어느 쪽이지?”

 

카이토는 왼쪽을 가리켰다. 자전거를 돌리자 익숙한 마트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트 안에서, 그리고 집에 돌아갈 때 까지 카이토는 노래에 대해 말했다. 그 노래의 원곡. 부른 가수. 가사. 그리고 자신이 신경 쓴 부분과 고쳐야 할 부분에 대해서. 그렇게 말해봤자 해줄건 없다고 성준은 잘라 말했지만 카이토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이 잔뜩 든 봉지를 손에 쥐고 노래의 마지막 가사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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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ry night

 

여름의 저녁바람이 시원하게 창을 타고 들어왔다한창 땀에 물까지 젖었던 몸을 씻고나오니,카이토는 집에 들어올 때까지 감고 있었던 눈을 멀뚱히 뜨고 거실 바닥에 앉아있었다성준은 혹시나 망가진 회색 눈까지 수복되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했지만그 눈은 기계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물이 들어간 정도의 가벼운 고장처럼 보이진 않았다강물에 빠져 쫄딱 젖었던 카이토의 몸은 다녀오는 동안 축축하게 말라있었다저대로 놔두면 기분 나쁘게 옷이며 머리며 눅눅한 강물에 떠있던 풀냄새가 스며들 것이다성준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카이토를 불렀다.

 

카이토옷 벗어봐세탁기 돌려야겠다.”

제가 입은 옷이요?”

넌 그 사이에 욕실 가서 몸 좀 닦고 와어서 줘지금 세탁기 쓸 거.”

머플러까지요?”

 

성준은 대답 없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내놓으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카이토가 옷이라는 명사의 뜻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아닐 테카이토는 다시 빤히 쳐다보더니 일어나 바지벨트를 풀어 벗은 후에 내밀고목까지 올려져 있던 코트의 지퍼를 내렸다코트 안은 의외로 평범한 회색 티셔츠와 검은 드로우즈 차림이었다코트의 품이 커다랬던 것에 비해 카이토의 몸은 단단하게 마른 체형이었다기다란 머플러가 감싸고 있던 목덜미는 얄팍했고목과 쇄골을 이어지는 선부터 검은 문신처럼 제조번호가 적혀있었다카이토는 쑥스러운지 목 뒤를 훑더니 하얀 옷가지를 말아 내밀었다.

 

적당히 씻어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지?”

그런데 마스터갈아입을 옷이 없는데..”

내 옷장에서 대충 찾아 입어얼른 들어가이상한 냄새 배기 전.”

 

성준은 카이토의 등을 떠밀어 욕실로 보낸 후에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로 나갔다뜨겁고 습기찬 바람이 덜 마른 머리카락을 헤집었다세제를 넣고 세탁기의 문을 닫은 후에 웅웅거리는 소리와 진동을 내며 돌아가는 등에 기대 느릿하게 지는 진홍색 노을이 내린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하나 태웠다허기가 진지 오래되어 음식을 할 기운이 나질 않았다카이토는 음식을 할 수 있을까보컬로이드에겐 기본적인 안드로이드 기능은 있다고 했으니요리나 청소 같은 가사도움 기능정도는 있을 테지만손상되었을지도 모른다심부름도 못 보내는 안드로이드를 집에 두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작업하는 중엔 누구라도 신경 쓰기 귀찮고집중력을 깨는 것은 치워놓는 것이 편했다담배 하나가 끝나 갈 때 쯤 카이토는 헐렁한 티셔츠와 허벅지 아래가 훤한 드로우즈 차림으로 베란다에 나타났다카이토는 마르고 새하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남은 담배연기를 손으로 휘휘 저어 밀어냈다.

 

마스터여기 계셨네요마스터 옷이 다 저한테 커서..”

..무슨 짓이야..바지는 어쨌어옷장에 반바지 많을 텐데.”

바지는..흘러내려서요청바지는 불편하고..속옷은 커도 입었어요.”

당연한 소리 자랑스럽게 하지 아참음식 할 줄 알아?”

기본적인 기능은 있어요해 본적은 없습니다.”

 

검은 티셔츠를 원피스처럼 입고 카이토는 장을 보았던 리스트에서 할 수 있을 만한 요리를 손꼽기 시작했다요리라고 하기 민망한 샌드위치토스트간단한 파스타손가락은 고작 세 개를 접고 끝나버렸다.

 

“..그게 끝이야?”

오늘 장 보신 게 식빵이랑 우유파스타면토마토소스커피캔 다섯 개아이스크림 두 개.맥주 여섯캔감자칩 한 봉지가 끝이라조합으로 검색되는 요리가 세 가지 밖에 없어요.”

아이스크림은 넣은 적이 없는데?”

제가 넣었습니다먹고 싶어서요.”

가지가지 한다아무거나 만들어봐피곤해서 손도 까닥 하기 싫어.”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토는 가슴께까지 내려온 티셔츠의 목을 올렸다그러자 어깨가 드러나 더욱 이상한 꼴이 되어버렸다긴 바지나 여름엔 두꺼워 보이는 기다란 코트를 입었을 때보다 훨씬 가벼워보이는 몸짓으로 부엌으로 가더니 얼마 되지 않아 성준을 식탁으로 불렀다식탁 위에는 토마토 소스로 만든 파스타가 한 접시 놓여있었다.

 

파스타를 만들었어요.”

네 건 없어?”

음식물은 처리하기 귀찮고제 것 까지 만들어버리면 마스터가 내일 드실게 없어요.”

그럼 아이스크림 먹어나 먹는 거 이렇게 쳐다 볼 거?”

그건 마스터와 함께 먹으려고 했는데요.”

난 아이스크림 안 좋아해애도 아니고둘 다 너 먹어하난 내일 먹든지.”

 

파스타는 생각했던 그대로의 맛이었다시간을 맞춰 면을 삶고 시중에서 파는 소스를 부은 평범하고칭찬 할 점이라고는 따뜻하다는 것 밖에 없었다하지만 아이스크림을 잡고 눈을 빛내며 파스타에 대한 코멘트를 기다리는 카이토를 마주보니 무슨 말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성준은 두 번째 입을 꾸역꾸역 삼킨 후에 입을 닦으며 말했다.

 

괜찮네아이스크림 먹을 값 정도는 했어.”

감사합니다잘 먹겠습니다!”

맥주 하나 마실까...먹고 작업하려고 했는데.”

마스터제가 꺼내드릴게요.”

 

의자 위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있더니카이토는 후다닥 일어나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내왔다건네는 맥주를 받으며 짧게 고맙다는 말을 하자 카이토는 만족한다는 얼굴로 다시 의자 위에 올라와 앉았다열어 놓은 바깥 창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순식간에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비운 후에 베란다에 나가 담배 하나를 더 피웠다그 사이에 카이토는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닦고 있었다마치 다음 일을 기다리는 듯 주춤거리며 다가오며 마스터하고 성준을 부르자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았다.

 

수고했어설거지는 내가 해도 되는데이제 쉬어난 작업할거니까.”

마스터혹시 작업실 책장에 있던 CD를 들어봐도 되나요?”

내 작업실에 CD가 있어?”

 

작업실의 책장은 협회에서 바로 들여놓은 짐이 정리되어 있었다노래를 듣는 취미는 없었고,하물며 CD를 사는 버릇 또한 없었다성준은 카이토가 말하는 CD를 확인하기 위해 함께 작업실로 들어갔다카이토는 미술도구로 엉망인 방 앞에서 손가락으로 벽에 있는 장식장의 두 번째 단을 가리켰다.

 

이거...예전에 선물 받은 거네.”

선물을 잊어버리시다니밀봉 되어 있는 걸로 봐선 들어본 적도 없으시죠?”

상대를 고려하지 않은 선물이지.”

 

선물 받은 것은 몇 년 전의 일이었다아마도 뉴욕에서 지낼 때였다작업실의 옆집에 살던 캐나다인이었는데초대 하지 않아도 시간 빌 때마다 작업실에 놀러와 술을 마시거나 자신이 좋아한다는 재즈 음악의 CD를 틀어놓고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길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하곤 했다마약을 했다던지어떤 배우와 사귀었다가 헤어졌다던지대부분 가십과 거짓이 잔뜩 발린 쓸데없는 잡담이었다귀찮다고 생각했지만그가 없는 저녁은 언젠가부터 쓸쓸하기 시작했다깊고 본연한 외로움이 이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외로움은 자각하기 시작하자 눈덩이처럼 불어나검은 눈을 가리고 감정의 늪구덩이에서 살아나기 위해서 그것이 사랑이라 말하기 시작했다그때는 그것이 삶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

 

 

성준은 바닥에 깔린 미술도구 사이를 휙휙 넘어가 캐리어 안에서 낡은 CD플레이어를 꺼내 카이토의 손에 쥐어주었다버튼 여기저기에 먼지가 끼여 있었지만 사용한 적은 없었다버렸다고 생각했는데용케도 이리저리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이걸로 들어그때 같이 선물 받은 거야.”

그런 소중한 것을 제가 써도 되나요감사합니다.”

됐어너 이어폰을 낄 수 있는 구조인거야 그 헤드셋이 있는 쪽은?”

탈부착 가능해요이건 인이어 헤드셋이라고반주를 잡음 없이 들을 수 있도록 쓰고 있어요.”

 

한 손으로 헤드셋을 살짝 돌리자 딸깍 하는 소리가 나더니 왼쪽과 비슷한 모양의 귀가 나타났다카이토는 귓바퀴를 바로 잡으려는 듯 몇 번 만지더니 CD와 플레이어와 자신의 헤드셋을 품에 안고 생긋 웃었다.

 

그럼 작업 수고하세요저는 거실에서 있을 테니필요하면 언제든지..”

카이토잠시만손 풀게 크로키 몇 장 할 건데 들으면서 잠시만 앉아 있다.”

크로키라면빠른 스케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앉아있어도 되고서있어도 돼말은 하지 말고, CD들어도 되니까.”

 

성준은 바닥에 있던 크로키용 스케치북을 꺼내들고 기다랗게 깎인 연필이 여러개든 통에서 끝이 뭉툭한 것을 하나 골라 종이의 모서리에 대고 휘갈겨 다듬었다카이토가 앉은 창 뒤로 해가 져 완연히 검보랏빛 구름이 느린 바람에 흘러갔다이어폰을 귀에 넣고 CD를 재생한 카이토는 정물처럼 가만히 앉아있었지만열어둔 창에서 부는 바람이 머리와 옷을 흔들었다.

 

"하나 끝났어가만히 잘 있네이제 다른 자세 해봐눕던지뒤로 돌아서 앉는 거..“

헤에봐도 되나요마스터 손이 굉장히 빨리 움직여서신나는 곡의 지휘를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와서 봐비슷한 걸로 두 세 개 더 한건데머리카락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지.”

 

카이토는 이어폰을 내려놓고 다가와 밝은 얼굴로 스케치북을 바라보았다지나간 찰나가 스며든 종이에는 검게 칠해진 명암으로 박제되어 있었다카이토는 자신을 창작이라는 인간의 특권의 부수물이라 여겼다음악 이외의 방식이라 해도창작은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세 장의 스케치는 이어지면 눈을 감는 동작으로 이어졌다.

 

신기해요저와 똑같다고 할 순 없지만비슷한 특징은 보이네요제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나 보네요대칭이..”

그런 식의 평가는 그만 둬노래는 어때?”

마니악한 길거리 재즈 음악이에요바의 라이브를 바로 녹음한 것이라 객석의 소음이 함께 섞여있어서 생생한 분위기이고피아노 반주가 항상 엇박으로 시작하는 것이 재밌네요유명한 재즈곡을 밝게 편곡한 2번 트랙과 우울하게 편곡한 3번 트랙이 대조되네요장난기가 많으신 분이에요.”

그랬지.”

“..아시는 분이신가요?”

 

카이토는 CD의 뒷편에 써져있던 글귀를 보았지만 모른 척 했다데이터베이스에 검색 되지 않는가장 자신 있는 곡을 선택해서 한 사람만을 위해 녹음한 CD. 노래에는 사랑이 흘렀고여유로운 분위기는 노래를 하던 바를 눈앞에 드리웠다어두운 조명나이를 제법 먹은 피아노시간은 아마도 한밤중이 되기는 이른 초저녁익숙한 반주자와 손을 맞추지 않아도 서로의 리듬을 조화롭게 만드는 오랜 세월그리고 목소리에는 가득히 한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FOR J. with love.

 

성준의 표정이 굳어갔다그는 변덕스러웠지만영 변하진 않을 거라 믿었다가장 괴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멀어진 관계는 영원히 멀어지고 말았다사람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생각과 마음은 언제든지 바람에 흔들리고숨이 이어지는 한 모든 순간 사람은 변한다그림처럼 박제된 관계는 없었다괴로움이나 외로움도 사라지고무뎌진다일렁이는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지만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예전 일이야.”

제가 마스터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이 이것보다 보잘 것 없어서 분하네요.”

네가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

제 모든 것이죠저의 음악과 짧은 생활과 기성품인데다 조금 망가진 몸까지.”

 

가진 모든 것을 바쳐도 멋진 시간장소사람음악그의 사랑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다.안드로이드의 무력감은 이어진다기계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언제라도 잊히기 쉽고감동을 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당신에 대한 사랑을 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발자취에라도 닿을 수 있을지 까마득했다성준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카이토에게 손짓을 했다은은한 담뱃불 사이로 비추는 마스터는 괴로워 보였다행복한 시간을 할퀸 흉터는 깊고잠들어 있던 고래가 숨을 펴듯 수면 위로 차고 올라와 마음의 수면을 흔들었다.

 

마스터괜찮으세요?”

옆에 있어.”

작업 하시는데 괜찮으신가요?”

됐으니까그냥 옆에 있어.”

 

다 태운 담배를 바닥에 있던 종이컵에 넣은 성준은 의자에서 일어나 카이토가 앉은 바닥 옆에 앉았다카이토는 망설이더니 손가락 하나를 잡더니 어깨에 기대고 한참동안 가만히 심장에서 퍼지는 불규칙적인 두근거림과 마스터의 숨이 드나드는 공기소리를 들었다어느새 잠든 밤이 지나 새벽이 이어지듯 언제까지고 이어지길 바라며언젠간 노래로 괴로운 밤을 메우고마스터의 빈 어느 공간을 채울 수 있도록이루어지기 힘든 기원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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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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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의 카이토군 03

2015. 7. 10.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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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Great relief 


오랜만에 잡은 붓을 한참이나 멈추고 있던 성준은 캔버스 아래에 놓여있던 크고 작은 붓이 잔뜩 든 양철통에 붓을 던져 넣었다. 한 붓을 그리고 나면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미술의 성질이었다. 그는 앞뒤가 막힌 미로에 갇힌 개미처럼 하잘 것 없이 초라하게 눈앞에 놓인, 삼십분 전 까지 손을 움직이던 새파란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물의 느낌은 사라진다. 눈을 감자 차갑게 닿던 물과 군청에서부터 이어지는 파랑의 오로라가 검은 시야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점점 멀어져갔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감각의 끝에는 카이토의 눈동자가 있었다.

 

“배고픈데..집에 먹을 것 하나도 없지.”

“마스터. 다 끝나셨나요?”

 

거실로 나오자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카이토가 강아지를 부른 듯 폴짝 일어나 뛰어왔다. 성준은 카이토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카이토는 애매하게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는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여 카이토를 쳐다보다가 이내 아무 말 없이 지나쳐 물감 투성이인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파란 물이 퍼지는 세면대에 손을 씻으며 성준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저런 얼빠진 얼굴에서 공감각 이미지가 나타난 거, 우연이겠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거실로 나오자 카이토가 보이지 않았다. 성준은 발 빠르게 문이 열려져 있던 작업실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도 카이토는 캔버스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캔버스에 발린 파란색의 만화경과 새파란 카이토의 뒷모습은 하나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카이토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익숙해져서 일까, 웃는 모습이 점점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건 물속인가요?”

“안드로이드는 물속에 들어갈 수 없으면서 용케 알았네.”

“사진으로 본 적이 있어요.”

 

안드로이드는 생활방수가 기본적이다. 완전 침수는 그들이 사람과 비슷한 모습이기에 종종 벌어지는 사고이기 때문에, 안드로이드를 구매한 사람들에게 가장 주의할 것으로 손꼽는다. 안드로이드 패키지의 오른쪽 옆 부분엔 커다랗게 절대 목욕을 시켜 전신을 침수 시키지 마시오. 라고 인쇄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성준은 한국의 친구가 어머니께 가사도우미 안드로이드를 사드렸다가, 새로 온 식구에게 어머니가 깨끗이 목욕을 시킨 바람에 집에 들이자마자 완전침수로 폐기처분 했다는 눈물어린 일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없어요.”

 

빈 말이라도 할 법 할 텐데, 카이토는 딱딱하게 대답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작업실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누구라도 한 마디씩 건네기 마련이었다. 아무 의미 없는 잘 그렸다며 변변찮게 머리를 긁적이거나 쓸모없는 미사여구로 그럴 듯하게 말을 꾸며내기도 한다. 역시 안드로이드에게 발상이나 감상에 대한 요구는 과분한 것이었다. 허기를 채우기로 마음먹은 성준은 창밖을 내다보며 주변의 건물을 살폈지만, 가게처럼 보이는 것은 없었다.

 

“여기 가까운 슈퍼라든지..어디 있어?”

“슈퍼..제가 알려드릴게요! 내비게이션으로! 제가 같이 따라가도 되나요?”

“어디에 있는 지나 말해 주면 되는데.”

“이 동네는 가게들이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처음 찾아가면 헤맬 수 있어요. 기왕이면 사용하시는 게 좋지 않으세요? 네? 네에?”

“야, 알겠으니까. 그만 가까이 오라고. 짐 정도는 들 수 있지?”

 

성준은 한쪽 눈을 빛내며 다가오던 카이토를 밀어내고 함께 따라 나섰다. 팔 다리는 멀쩡하니 짐꾼으로 써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은 돌부리에도 휘청거리는데다 길가에 커다랗게 세워진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치더니 미안하다며 전봇대 앞에 대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눈뜨고 보기 힘든 가관에 성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카이토는 시야가 좁아 어쩔 수 없다며 저도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더니 저만치로 후다닥 걸어 나갔다. 주변은 한적한 시골의 풍경이 완연했다. 얇은 시냇물이 흐르는 다리를 천천히 걸어가던 강에서 바지를 걷은 채 무언가를 찾고 있던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소년은 불안하게 성준을 올려다 보다 다리 건너편으로 먼저 건너가 있던 카이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스터-. 빨리 오세요.”

“...카이토 형?”

“..누구..?”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강 아래로 시선을 돌린 카이토는 소년을 보고도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형이라고 불린 것 치고는 전혀 모르는 초면이라는 얼굴이었다. 어수룩해 보이는 소년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부끄러운지 흔들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가 착각했나 봐요. 죄송합니다.”

“곤란해 보이는데, 도와줄까?”

 

소년은 자신을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에 올해 겨우 입학한, 미나미 켄타라고 소개했다. 성준은 간단히 이름과 얼마 전에 이사 왔다는 사실 만을 밝힌 뒤 바지를 걷고 강으로 내려갔다. 따라오는 카이토에게 강 옆의 잔디밭에 앉아 있으라고 명령한 후에 다시 고개를 돌려 켄타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한 쪽만 불그스레한 얼굴이나 걷은 다리에 검은 멍이 든 것으로 봐서는, 강에서 잃어버렸다는 USB가 켄타의 부주의에 의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골에서 까지 학교폭력인가. 여러 가지 의심이 들었지만 초면에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닐뿐더러, 남의 일에 깊게 간섭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는 생각에 성준은 입을 다물고 적당히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덮었다.

 

“그런데 켄타, 저 녀석이랑 아는 사이야?”

“아, 죄송해요. 이 동네가 워낙 좁아서 아는 보컬로이드 인 줄 알고 헷갈려서 말을 걸었네요.”

“이곳 사람들은 안드로이드를 많이 가지고 있어?”

“노인이 많은 동네라, 가사도우미용 안드로이드는 많아도 보컬로이드는 많지 않아요. 제가 알기로는 아사노씨를 포함해서 7개체 정도 있었는데..”

“아사노씨?”

 

이거구나. 성준은 아사노라는 사람이 카이토의 전 주인이라 확신했다. 카이토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뒤져서 카이토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자신의 공감각을 일으킨 것인지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카이토는 이전의 기억이 ‘보호’ 되었다며 마스터인 성준에게는 열람권한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쓰러져가는 모래성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되묻자 켄타는 의외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가셨는데, 제가 착각한 카이토의 소유자 분이세요.”

“그렇구나, 그런데 어떻게 아사노씨의 보컬로이드가 아니라고 확신했어?”

 

기껏 이야기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눈치도 없이 카이토는 멀찍한 곳에서 마스터-. 켄타군-. 하고 큰소리로 부르며 팔을 휘휘 저었다. 성준이 귀찮다는 듯 대충 물기 어린 손을 흔들자 카이토는 기쁜 듯이 방긋 웃었다. 켄타는 그런 카이토를 바라보더니 쓸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표정이 좋은 카이토네요."

“아사노씨네 카이토는 언제나 무표정이거든요. 저렇게 웃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

 

 

 

마스터가 내린 두 번째 명령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 거기, 가만히 앉아있어!!”

“알겠습니다!”

 

그러기를 한 시간이었다. 흐름이 느린 강이라 멀리 흘러가지 않았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켄타군과 마스터는 강바닥을 헤집고 있었다. 도움이 되고 싶은데, 적당한 침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마스터는 요지부동으로 거기,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게다가 벌써 둘은 친해진 듯이 편하게 웃으며 카이토에게는 들리지 않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멍하니 집을 지키던 카이토는 가청주파수를 내리고 USB에서 흘러나올만한 흐름을 찾으려 귀를 기울였다. 강 속에서 가는 거미줄이 늘어나듯 느껴지던 전파가 커지더니 노이즈가 섞여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외침처럼 들리기도 했다. 카이토는 눈을 감은 채로 소리의 근원인 강물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스터와 켄타군이 있는 곳과는 더 떨어진 아래쪽이었다. 발목과 다리에 찰박거리던 물이 흔들리자 카이토의 손에는 검은 USB가 잡혔다.

 

“마스터!! 찾았어요!”

 

카이토는 신나게 USB를 든 채로 물을 첨벙거리며 걸어갔다. 카이토의 귀에는 USB가 지저귀는 작은 멜로디가 서투르지만 차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허겁지겁 물 속을 걸어가던 카이토는 이끼가 낀 바닥의 돌을 밟아 뒤로 완전히 넘어졌다.

 

“으악!!! 저 바보가!!”

 

성준은 커다란 물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몇 시간 전 집에서 상자를 밟고 넘어지듯 뒤로 커다랗게 넘어가는 카이토가 보이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허우적대며 뛰어갔지만, 이미 바지가 젖어 걸음이 무거워 마음처럼 뛰어갈 수가 없었다.

 

‘전신 침수가 되면 기동 정지가 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안 그래도 고장 났는데, 방수기능이 아예 안 되는 거면?’

 

등과 목이 오싹했다. 물속에 완전히 잠겨버린 카이토에게 다다를수록 초조하게 숨이 차올랐다. 가라앉은 어깨를 잡아 건져 올리자 손으로 코와 귀를 막고 있던 카이토가 기침을 하며 물을 뱉어냈다. 반쪽짜리 시야가 물에 이지러져 눈앞의 인영이 희미했다. 카이토는 보이지 않아도, 익숙한 체온으로 자신을 안은 것이 마스터임을 인지했다. 꽉 쥔 주먹을 펴자 검은 USB가 나타났다. 그러나 어깨를 잡은 마스터의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난 채였다. 켄타군의 걱정스런 목소리도 뒤에서 들려왔다.

 

“케헥..저는 성인 남성형이라 무거울 텐데..”

“침수로 고장 나면 수리 할 수도 없는데, 그렇게 폐기처분 되고 싶어?!”

“죄..죄송해요. 마스터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몸은 어때? 움직이는 데에 이상은 없어?”

“오른쪽 안구에 물이 들어갔는데, 이 정도면 자체수복으로 처리 할 수 있습니다.”

 

어깨를 잡았던 힘이 스르르 풀리자 카이토는 마스터의 얼굴이 궁금했다. 화가 아직도 난 것인지, 너무 화가 나서 손을 풀어버린 것인지. 그러나 시야는 아직도 뿌옇게 흐트러져 초점이 제대로 잡히질 않았다. 겨우 강가로 나와 숨을 돌린 성준이 USB를 건네자 켄타는 죄송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찾아주셔서 감사하지만, 두 분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으니, 받을 수 없어요.”

“그건 카이토가 내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한 행동으로 일어난 사고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고장 나지도 않았고. 중요한 물건이잖아?”

“노래 만들고 계신 거죠? 짧지만 굉장히 좋은 멜로디가 담겨있네요. 나중에 완성되면 들려주세요.”

“카이토...형..”

 

울먹이던 켄타는 카이토가 건넨 USB를 받아들고 연거푸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켄타가 다리 반대편으로 사라지자 성준은 허벅지까지 젖은 옷으로 휘청거리는 카이토가 손짓하는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몇 발자국 되지 않아서 앞으로 넘어진 카이토는 시야가 확실하지 않으니, 눈의 자가수복을 시행하겠다고 말하며 두 눈을 감아버렸다. 덕분에 성준은 장을 보는 내내 카이토의 손이나 소매를 잡아당겨 위치를 알렸다. 한 손에는 무거운 짐을, 한 손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카이토의 손을 잡고 무거운 몸으로 걸어가던 성준은 이곳이 한적한 동네라 천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성인 남성끼리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건 어떤 의미에서든 눈에 띄는 것이라, 연인이 있을 때에도 하지 않았던 짓이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걸어가던 카이토가 어느새 따뜻해진 손을 꼭 쥐며 입을 열었다.

 

 

“마스터의 물 속 그림은 포근한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물 속이란 건 생각보다 차갑고 무서운 곳이네요.”

“..아까 물어봤을 때는 어물쩍 넘어가더니, 이제 와서 대답하는 거야?”

“그때는 물속에 들어갔던 적이 없었던 걸요. 안 해 본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 드릴 순 없죠.”

“쓸데없이 확실하긴.”

“침수되지 않으려고 가만히 있을 때는 어둡고, 춥고, 조용해서 굉장히 무서웠는데..”

 

카이토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감았던 눈을 살포시 뜨고 성준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는 완전히 사람다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카이토의 머릿속에 있던 새하얀 오선지 위에 조그만 음표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행복의 기억, 물의 기억, 두려움의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마스터를 부르는 임프린팅의 재료로 만들어진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확실히 조각은 쌓여 아직은 모르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마스터의 손이 나타나 밖으로 꺼내주셨을 때, 굉장히 안심했어요.”

“...두 번 다시 그런 짓 하지 마.”

“알겠습니다.”

 

성준은 며칠 뒤 완성된 그림을 찍어 협회담당자에게 보여주었다.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담당자는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저희가 말하기도 전에 사진을 보내 주시다니, 상당히 마음에 드는 작품이신가봐요! 그리고 확실하네요. 멋진 바다 그림이에요. 주변에 바다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이 작품의 제목은 어떻게 되나요?”

“relief. 안도감으로.”

 

성준은 한 줄기 투명한 하얀 빛이 비추는 바다가 그려진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캔버스 아래에 기대 잠든 카이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당자의 폭포처럼 쏟아지는 칭찬세례를 피하려 휴대폰의 수화기를 귀에서 멀찍이 떼놓았다. 손가락 사이로 푸른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바다의 표면이 흔들리는 것처럼 물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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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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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의 카이토군 02

2015. 7. 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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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의 카이토군 01

2015. 6. 28.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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