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살픗 눈을 감으면 세상은 혼자인 듯 몇 개의 발자국만 남겨진다.
길을 걷는 유정은 위험하게도 거리의 득실거리는 세균 같은 감각을 차단하기 위해 병원에서나 쓸 법한 커다란 하얀빛의 멸균 마스크를 끼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플레이 리스트를 헤매는 음악을 배경 삼아 넓은 보폭으로 사람들 사이를 물살 가르듯 지나친다.
머릿속으로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의 문장을 나열하자 어느새 하고 싶은 일들은 의식의 저편으로 가라앉는다. 어느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이십 대 후반, 자신의 나이에선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다. 의무와 부담감만이 보란 듯이 길을 비추고. 사람들은 좋지도 않은 머리를 굳이 굴려 실낱같은 기회라도 잡아보려 애쓴다.
유정은 가끔 자신이 하늘을 날고 있다는 상상을 했다. 주위의 누군가가 들으면 엉뚱하게 생각할진 몰라도, 세상 어느 것에도 쓸모없는 말들을 웃어가며 듣고 있는 동안엔 자신에게 던져지는 수많은 화살표 사이를 훌쩍 뛰어넘는 유쾌한 상상들을 하면, 그것은 현실성 없는 진실한 웃음으로 나타났다.
‘약속까지 남은 네 시간.’
주위엔 싸구려 커피를 내려 파는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몇 개 있었지만, 커피 맛은 둘째 치고라도 추운 겨울 날씨에 사람들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몇 개의 주요 가닥만 붙잡으면 눈에 훤히 보이는 멍청한 상황이 가득한 군중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어질러진 방에 사람을 가둬놓고 치우지도 못하게 하는 건 고문이다. 속 시끄러운 생각을 접어버린다.
입고 있던 코트를 목까지 다시 여미고 귀에서 살짝 빠져나온 이어폰을 다시 밀어 넣는다. 어제는 잔업이 바빠서 운동을 못 했으니, 대신으로 오늘은 남은 시간동안 여기저기를 둘러 걸어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몇 번 와보지 않은 장소라 익숙하지 않은 건물들이 시야에 펼쳐진다. 번화가를 벗어나자 풍경은 금방 주택과 공장지대로 모습을 바꾼다. 흙바닥에 구둣발이 맞붙어 끌리는 소리가 옆의 나대지에 퍼진다. 가까이에는 높은 철조망 뒤에 높게 쌓인 커다란 고철들이 산을 이룬다. 겨울의 바람에 노출된 버려진 중장비들이 나열되어있는 맞은편, 인기척 없는 공장의 한쪽 벽 커다랗게 [임대 매매]라고 써진 낡은 현수막은 한쪽 귀퉁이가 떨어진 채로 바람에 날린다. 몇백 평은 되어 보이는 버려진 공장은 커다란 문에 몇 년은 삭아 들어간 녹이 퇴적되어 손을 대면 그대로 거친 붉은빛이 묻어난다.
유정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마스크를 벗었다.
시원한 겨울바람을 한껏 들이마시자 묵직했던 폐에 물이 찬 듯 살아난다. 여전히 귀에선 가사 없는 악곡이 재생된다. 혼자 있는 시간에서까지 남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한꺼번에 넣어둔 언어 없는 음악은 건조한 공장 문을 여는 호기심의 배경음이 된다. 유정은 보통 자신의 안위 이상의 일엔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떡하니 열쇠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문 앞에선 어린 시절에 잠시 가졌던 치기라던 지가 되살아난다. 손목의 시계는 아직 충분하다.
커다란 자물쇠를 떨어내자 영화에서나 들을 법한 거대한 철문이 바닥에 끌린다. 잘 밀리지 않아 발로 걷어차듯 밀어 넘기자 끼긱-하는 육중한 소리가 빈 공장에 메아리친다. 외국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곳에서 늘 몇 달 방치된 시체가 발견되곤 한다.
오싹한 상상을 하며 맨 크로스 백의 끈을 움켜쥐었다. 한 손에는 혹시나 모를 비상사태를 위해 휴대전화의 잠금을 풀어 들었다. 꼭 있을 법한 버려진 낡고 녹슨 중장비들, 빛바랜 쓰레기들, 높은 곳에 있는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먼지들이 풀풀 휘날린다. 차가운 금속의 냄새에 유정은 가라앉은 안정감을 느꼈다.
예상했던 풍경에 풀어진 어깨로 여유롭게 공장을 둘러보던 유정은 쌓여있던 드럼통 뒤에서 시체를 발견했다. 흠칫 놀라 손에 쥔 휴대폰을 눌러 빛을 가까이 대자 마치 잠든 모습으로 바닥에 박힌 표지에 사슬로 연결되어있는 시체.
시체.
머리칼이 쭈뼛 섰다. 얼어붙은 걸음에 머리는 급속도로 회전을 시작한다.
‘저게 정말 시체라면?’
‘시체가 아니라면?’
두 가지의 선택지를 시작으로 알고리즘으로 펼쳐진다. 눈으로는 빠르게 시체를 분석했다. 20대 초반의 남성, 주위의 바닥은 오래된 핏자국 없이 깨끗하다, 굵은 사슬로 묶인 발목과 연결된 바닥의 커다란 못, 직사광선에 사그라지기 시작한 입혀진 옷. 그리고 인공적인 파란빛의 머리색. 가장 수상한 것은 주위에 뿌려진 조그만 뼛조각들. 어깨와 다리에 쌓인 보얀 먼지는 시체가 적어도 몇 달은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았단 것을 말해준다. 그 정도 시간이면 원래 썩고도 남았을 텐데.
방부제를 많이 먹으면 시체가 썩지 않는다는 괴담이 사실로 밝혀지는 증거로 쓸 수 있을 만큼 시체는 멀쩡했다. 죽은 것이라는 사실만 빼놓고는.
그리고 알고리즘의 끝에서 유정은 결론을 내렸다.
‘이건 시체가 아니다.’
음. 목에 걸려있던 사레를 밀어 넘기고 일단은 사라진 하나의 선택지에 안도를 느낀다. 복잡한 일은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까이 다가가 발과 연결된 쇠사슬을 건드렸다. 묵직한 두께만큼의 무게가 끝에 닿는다. 유정은 턱에 괴고 있던 마스크를 다시 코끝까지 밀어 올린다. 직접 손을 대고 싶진 않지만, 딱히 바닥에 떨어진 나무토막들도 깨끗해 보이지 않아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걷어 올려 대충 목 언저리를 건드렸다. 툭, 하는 작은 충격에 어깨에 쌓여있던 먼지가 우수수 휘날린다. 마스크에 다시금 고마움을 느낀다.
짐작 가는 바가 맞는다면.
떨어져 한쪽으로 꺾인 목 뒤로 검은색의 각인된 숫자가 적혀 있다. 들어맞은 예상에 유정은 싱긋 웃었다. 그럼 그렇지. 저것도 여기에 남겨진 공장용 기계들과 다름없는 폐품이군. 완성된 안드로이드 기술의 유희용 확장판. 의지를 갖춘 신디사이저.
실제로 본건 처음이지만, TV나 컴퓨터에서 문득 지나가는 선전에서는 이렇게 처참한 몰골이 아니었다. 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형형색색의 머리와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 초보자들도 사용하기 쉬운 인터페이스로 만들어져 홈 레코딩의 신세계를 열었다-라. 주인 없는 공장에 버려진 고가의 보컬로이드. 이름이 그랬던 거 같다.
‘깨워볼까?’
그렇게 동한 이유는 눈치를 채고 보니 이제야 등 뒤로 떨어져 있는 충전 케이블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옆의 콘센트. 아주 오래 꺼져있었을 기계는 사람의 손길 한 번이면 깨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생명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심하게도 잔인한 일이다. 한 치의 관용도, 인권도 없는 물체.
창조주가 새 생명을 움트는 마음으로 콘센트를 연결한다. 움찔, 하는 작은 미동이 시작을 알린다.
기계는 파란 구슬이 박힌 눈으로 유정을 바라본다. 눈꺼풀에 앉은 먼지가 깜빡임에 우수수 떨어졌다. 고개를 훌훌 돌리자 시야를 가릴 정도로 먼지가 춤을 추며 휘날린다. 쿨럭하는 기침을 몇 번 하고 기계는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목소리는 깔끔하다.
“지금은 몇 년도 지요?”
대답 대신 유정은 시간이 적힌 휴대전화의 잠금 화면을 내민다. 2-0-1-X.
“3년 4개월 19일 6시간 39분….40분….”
침묵이 감돌았다. 유정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계속 자신이 달고 있던 먼지를 털어내다가 그걸 마시고 기침하는 바보 같은 행동을 빤히 쳐다보며 최소한의 예의로 유실물 센터에 전화를 해주어야 하는 건지, 혹은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이 기계의 주인을 위해 구경 잘했습니다-하고 코드를 뽑고 갈 길을 가야 하는 지를 저울질한다. 3년 동안 버려놓은 기계를 지금 와서 데려갈 것 같진 않지만. 복잡한 서류와 처리절차, 과태료를 감수하면서까지 기계를 폐기처분 시켜주려는 인덕 높은 사람이 아니었나. 이것의 주인은. 게다가 혹시나 모를 상황을 위해 묶어두고 가는 철저함인지 잔인함인지 모를 것 까지.
계속 재채기와 싸우고 있는 기계는 일말의 긴장감마저 녹아 없애고 있다. 멍청하게 소매로 얼굴을 닦으려다 아. 하고 그제서 자신의 결박상태를 눈치 챈 듯 발을 흔들어 소리를 냈다. 유정은 바탕화면의 가장 가까운 아이콘을 눌러 메모장 앱을 꺼내 툭툭 두드렸다.
[신고해줄까]
“에취! 어, 어디를 말씀하십니까?”
[안드로이드 유실 센터]
“아…. 전 유실된 상태가 아닙니다.”
연 갱신기간 동안 서비스 센터 인증을 갱신하지 않은 안드로이드는 모두 유실로 처리될 텐데, 3년 만에 깨어났다는 정보와 모순된다. 폐기처분이 되었더라면 당연히 센터에서 보호처리. 유실. 보호처치. 그 이외에서 주인과 떨어질 방법이 있었던가? 기이한 모습만큼이나 그 기계의 존재는 장면에 모순된다. 고개를 갸웃 이며 다시 자판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경찰서에 신고 할 문제가 있어?]
“당신은 말을 할 줄을 모르십니까?”
[나에 대해선 알 것 없어.]
“그렇습니까. 그럼 갈 길 가시길 바랍니다.”
[풀어줄까?]
“당신은 풀어줄 마음이 없고, 저도 풀려날 의무가 없습니다.
다시, 당신은 말을 할 줄 모르십니까? 혹은 안드로이드와 대화하는 것을 혐오하십니까?”
똑똑한데, 안드로이드는 말의 무게를 알아차린다. 유정에겐 남은 약속시각까지 위협적인 커다란 사슬을 풀 방법도 기력도 의무도 없다. 이제 슬슬 이 가벼운 일탈적 산책을 끝낼 때였다. 하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평소 매뉴얼대로 하기로 한다.
[나는 실어증이야. 그건 말을 하는 법을 잃어버렸다는 뜻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호흡음을 기초로 발성기관에는 아무런 문제가 감지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저의 말을 올바르게 이해합니다. 당신은 문자를 통한 언어표현이 가능합니다. 두 가지가 가능한 실어증은 현대의학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설정된 문자가 재생되는 모양인지 뒤의 단어가 앞의 단어를 잡아먹는 형태는 자연스러운 음성과 다른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가벼운 트릭이지만 거기에 정황 가능한 상황, 자연스러운 연기가 합쳐진 가면은 아무에게도 벗겨진 적이 없다. 감히 높은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도 벗길 사람도 없을 것이라 유정은 믿는다. 대학 다닐 때는 몇몇이 모기처럼 피 한 방울 빨아보겠다고 나서면 끝끝내 밤을 새워서라도 후려쳐야 직성이 풀리던 것을 생각하면 성격이 많이 죽은 편이다. 힘 뺄 필요 없이 모기장을 설치하면 되는 일이었던 것을.
유정은 손에 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목 뒤를 쓰다듬었다. 어느 정도 크기를 내야 공장 구석구석에 퍼지지 않을 정도로 소리가 나오더라.
“사람은 객관적인 사실보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더 신뢰하는 편이지.”
“음성이 멋지시네요.”
“어….뭐, 그래. 그럼 신고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것이 없다면 이만 가보도록 할게. 충전 케이블은 안 빼고 갈 테니 알아서 하고.”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바이바이, 눈웃음과 입에선 미소. 공장에서 찍어 나온 한 세트를 트릭을 알아낸 서비스로 주고선 미련 없이 이어폰의 음량을 키웠다.
멀뚱히 대꾸 없이 뚜벅뚜벅 울려 퍼지는 구두 소리가 빈 콘크리트벽에 울려 퍼진다. 앞으로 안드로이드는 주의해야겠다. 3년이나 된 구식기계가 간파할 정도로 얕은 수였었나. 마스크로 입김을 불어내자 더운 김이 푹푹 빠져나갔다. 열린 채로 있던 문을 발을 밀어냈다.
“잠시만요!”
그래야지. 하나, 둘, 셋, 열까지 마음속으로 센다. 처음에 잡았으면 바로 대답해줬을지도. 절그럭절그럭하는 쇠붙이는 급한 소리와 저기요-사용자님-하는 조금 전과는 다른 애타는 목소리. 기껏 깨워줬는데 감사인사조차 듣지 못하고 가는 건 좀 아쉬웠다. 흥미롭기도 하고. 돌아본 뒤에는 자신을 가로막는 구속을 낑낑거리며 손으로 빼려 엉거주춤하게 일어날 태세를 하고 있다. 쩔뚝이며 두 발자국. 세 발자국부터는 기어서.
돌아오는 유정의 인영은 네 발자국 앞에 섰다. 무릎을 꿇은 기계는 유정을 올려다본다.
“갑자기 왜 마음이 변한 거지?”
“저기, 저것.”
내려다보는 팔 움큼에는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뼈들이 있었다. 그 뼈를 모았던 건가. 혹시 전 주인의-
어딘가에서 있을 법한 신파소설이 머릿속에 스쳐 간다. 사용자의 사망으로 인증이 소멸한 안드로이드는 어떻게 됐더라. 가리킨 저쪽엔 작고 건조하고 기다란 뼛조각. 사그라지는 살과 대조적으로 보존된 기계.
“가져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부탁이에요.”
“질문에 대답하면 못 해줄 것도 없지.”
“네. 어떤 질문이시죠?”
“첫 번째, 이 뼈는 누구의 것이지? 대답 여하에 따라 나는 네 의사와 상관없이 경찰에 신고 할 수 있어. 두 번째, 넌 왜 여기에 있는지 그 원인과 원인 제공자에 대한 설명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힐긋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오래 주진 않을 거란 암묵적 표시를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선이라면 깔끔하게 가설의 논리를 확정할 것이고, 어려운 수학문제를 해설을 조금 참고하긴 했지만 풀어냈다는 승리감에 약속장소로 향할 것이다. 이해하지 못할 답은 그것을 안다고 해도 전혀 기쁘지 않으니까.
“잠시 연산할 시간을 부탁드립니다. 부디 오래된 모델이라 이해를.”
“아아-.”
무릎 꿇은 앞에 뼈가지를 우수수 내려뜨리고 기계는 눈을 감는다. 눈 밑으로 이진법의 숫자들이 지나가고 귀의 위치에 달린 원판의 파츠에서 턴테이블이 돌아간다. 방금 만난 사람의 뇌 속을 파헤치지 않아도 이해선 상을 해부하는 톱니바퀴의 숨 가쁜 움직임이.
“첫 번째. 이 유골의 주인은 저와 3년 4개월 19일 6시간 39분 전 함께 있었던 개의 것입니다. 인간의 것이 아님을 설명해드릴 증거가 있으니 부디 신고는 삼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당신께 죄송하오나 본 기체는 왜 이 장소에 있는지에 대한 원인이 메모리에서 검색되지 않습니다. 프로텍트 접근을 원하시면 코드를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프로텍트? 메모리에 암호가 걸려있어?”
“그렇습니다. 암호해제를 원하신다면 가까운 서비스센터를 방문하셔서-”
“잠시, 왜 내가 해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거야. 기본해제코드는 너의 어느 곳에 기록되어 있지? 보통 목 뒤?”
끄덕. 인 그대로 기계는 순종적으로 목을 내밀었다. 유정은 파란 머리칼 사이로 기본 해제코드가 쓰여 있었을 자리의 칼자국을 발견했다. 시리얼 코드가 있었을 자리까지 길게 날카로운 것으로 움푹 팬 상흔에 손을 가져다 대니 움찔. 시리얼 코드의 아래쪽에는 K-A-I-T-O. VER. 2.5 모델의 이름인가.
“기종의 이름은?”
“사용자 지정 명칭은 검색결과가 없습니다. 기본정보를 말씀드립니다.
본 기체 명은 카이토. 마지막 갱신은 2-0-1-U년 6월 15일. 업데이트 버전 2.5. 당신의 질문에 대답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
그럼 이제. 하고 카이토는 공손하게 손을 그것이 말하는 대로 개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의 뼈로 가져간다. 발로 스윽 밀어 손에 닿을 정도의 제한선에서 허겁지겁 손을 뻗어 자신의 가슴에 알을 품는 어미 새의 모양을 한다.
“너무 늦었어. 미안해.”
조용히 그것은 둥그런 뼈의 구멍으로 속삭인다. 그 구멍은 귀가 아닐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무생물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기시감만 밀려온다. 결국, 이 이상한 장면에서 알게 된 건 아무것도 없다. 괜히 이쪽 패만 내준 꼴이다. 오래된 안드로이드는 정말 주의해야겠군. 표정을 읽지 않는 모델은 요즘 없으니까, 오히려 이쪽이 더 위험해.
“당신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응. 뭐. 그보다 발목. 안 아픈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아예 안으로 굽혀져서 부셔졌는데. 발목에 쇳덩이를 깔고 무릎을 꿇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 아냐.”
아. 하고 카이토는 오른 다리를 뻗었다. 발이 안쪽으로 비정상적인 형태로 굽혀있다. 부러진 발목의 티타늄 접합부 사이로 붉은 윤활제가 떨어졌다. 족쇄는 발목 크기에 맞춰 제작한 것인지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아 보인다. 누가 저렇게 악취미에 돈을 들였을까. 인터넷 뉴스에서 심심찮게 마주치던 안드로이드 학대와 그때마다 여론에서 들끓는 인권에 대한 새로운 정의들.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종은 먹이사슬 중간에 끼어들어 피라미드를 무너뜨린다. 덕분에 그들에겐 여러 제약이 걸어졌다. 경제활동 금지. 미등록 기종 폐기처리제도. 섬뜩한 SF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인류 멸종의 근원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유만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한때 세상을 뒤흔든 ‘이종 간 연애금지법’은 비록 논란 속에 아무런 결말 없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고 해도 그들이 외쳤던 [LIKE HUMAN, NOT LIKE HUMAN]의 문구는 군중 인식의 바닥에 자리 잡아 비인간 경시 풍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오롯이.
“오른쪽 발목의 연결부가 비정상적인 각도 계산으로 부러졌군요.”
“각도 계산 때문이라.”
괜찮습니다. 별로 걸을 일이 없으니까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바닥에는 뼛조각이 섬뜩하게 피 웅덩이에 가라앉고 있다. 헛구역질 나는 오일냄새가 마스크를 꿰뚫는다. 유정은 이 상황이 실제 사람에게서 일어났더라면 과연 자신이 어느 정도의 침착함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양심을 시험한다. 개의 뼈. 안드로이드의 윤활제. 그리고 다음 약속까지 남은 시간 삼십 분. 이대로 놔두고 가면 과다출혈로 충전 여하와 관계없이 카이토는 멈출 것이다. 서비스 센터에 데려간다면 보험이 없는 안드로이드는 수리할 수 없으니까, 보호자 신청을 권유받을 테지. 그렇게 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n년산 기계를 사용등록과 동시에 폐기등록을 하기위해 여러 절차를 처리해야 하나. 도대체 이 법체계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인지 아닌지를 모르겠다. 일반인은 한 번 읽어선 알 수도 없는 서류들을 만들어가야 겨우 폐기등록을 해주는 건 그만큼 폐기율을 줄이려는 의도였겠지만 그것은 불법폐기와 암시장형성만 부추기는 꼴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남성형은 암시장에서 잘 팔리지도 않는다고 들은 데다가, 유정은 복잡한 폐기서류를 처리할 생각도, 직접 손을 더럽혀 가며 암시장에 팔아넘길 생각도 없었다. 사용한다면, 어느새 구두 밑으로 스며드는 윤활제를 피하려 한 발짝 물러섰다. 카이토는 손에 든 뼈를 떨어뜨리며 발목을 부여잡는다. 눈꺼풀이 떨리고 있었다.
“체내 잔여 윤활제가 70% 미만으로 떨어집니다. 강제종료를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질문할게. 정말 아무 도움 필요 없어?”
“저는 그 도움에 상응하는 대가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야. 시간이 없으니 짧게 설명하자면, 나는 아직 사용자 등록을 한 적 없는 순정사용자이고. 보험료를 낼 정도의 금전적 능력은 있어. 너에게 원하는 건 교감이 들어가지 않은 객관적인 언어체계 공급.”
쓰레기도 잘 사용 해보면 어딘가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해서. 좀 이런 것에 오기가 생기거든.
슬쩍 떠본 쓰레기라는 호칭에도 기분 나쁜 눈치는 없다.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토는 윤활액이 찐득하게 묻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언어는 업그레이드된 확장판 구매를 하신다면 더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하십니다. 사용자 등록은 아직 이니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크로스백을 뒤져 물티슈를 꺼낸 유정은 가득 그 손에 건넸다. 악수하자는 의미인데요. 손을 닦으며 의아하게 묻는 카이토를 무시한다. 이 충동적인 결정은 회사와 집의 무한 반복인 요즘의 지루한 생활을 하는 자신에게 주는 조그마한 이벤트이자 자신에게 주는 약간의 유희이기도 하다.
“등록을 하면 뭐라고 부를 건데?”
“당연히 마스터입니다.”
“좀 오글거리네. 내 이름은 유정이야. 정이 이름. 그렇다고 해서 정이란 이름으로 부르란 건 아니지만. 카이토.”
“그럴 일 없습니다. 유정님.”
“그건 더 이상해”
휴대전화를 꺼내 약속 취소 문자를 보낸다. 다음에 신경 써서 만나줘야 할 것을 기억한 후 머릿속에 다음 약속 날짜를 기록한다. 시계를 줄곧 흘깃거리던 유정을 감지한 카이토는 약속이 있지 않으냐고 물었지만, 유정은 그쪽이 취소해버렸어. 하고 미소 지을 뿐이었다.
“손 다 닦았으면 이제 일어나볼까?”
“경찰이나 119에 신고를 접수하신 다음 4~5cm 두께의 쇠를 부술 만큼의 기계를 들고 와 달라고 요청을 해야.”
“너 왠지는 모르지만, 발목 부러져도 안 아프지? 아까도 그런 것 보니.”
이미 덜렁거리는 발목에서 구속의 효력을 잃은 오른쪽은 손으로 몇 번 살살 돌리자 무거운 소리를 공장 벽에 울리며 발과 함께 떨어졌다. 즉시 몽땅 난 발목을 휙 잡아 들어올린다. 더 이상의 추가적인 손실은 위험하겠지.
“수리 당연히 해줄 테니까. 이쪽 발도 잘라버리자.”
“에….음. 저의 선택권이 있는 질문입니까?”
“바보 같은 말투랑 다르게 똑똑하네. 없어.”
눈을 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유정은 커다란 손으로 눈을 덮어버린다. 반항한 번 못하고 출혈량을 감당하지 못한 기계는 강제종료로 쓰러진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한 번에 제대로 두 동강난 두 쪽의 발을 닦아 가방에 불룩하게 튀어나오게 넣고 뒤로 넘어간 카이토를 옆구리에 끼워 공장을 나가 가까운 대리점을 찾아갔다. 이것저것 무슨 내용인지 읽을 시간도 주지 않고 사인을 받아가는 서류 속에서 유정은 흥미로운 문항을 발견했다.
[주요사용 목적 : 의료보조기구 ∨]
체크를 하는 손에 담당 직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컬로이드에게 으레 주어지는 목적이란 취미용. 가사용. 정도의 시답잖은 고가의 취미용품에 불과하다. 그저 기본의 안드로이드에 노래를 위한 몇 가지 부가기능을 더 붙인 것에 의료보조라니. 혹시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 싶어 친절하게 그는 설명을 덧붙이려 했으나, 한사코 휴대폰의 메모장으로 [이거만 작성하면 되는 건가요?] 하는 문장만 들이대는 커다란 마스크를 낀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의 손님은 비싼 수리비와 등록요금을 모두 일시금으로 긁어버린다. 또 어딘가의 돈 많고 시간 많은 도련님이겠거니 하고 서류를 넘긴다. 어차피 법적으로 문제 될 건 없고, 자그마한 대리점에 전체 수리는 잘 맡겨지지 않으니 오래간만에 찾아온 커다란 일거리. 두 발이 잘린 안드로이드를 손에 아무런 흔적 없이 들고 매장의 문을 여는 모습에 직원들은 한순간 얼어붙었지만, 유기된 것을 주웠다는 문자의 설명에 모두 수상한 모습의 손님을 웃으며 맞았다. 좋은 일 하셨네요. 하는 호의적인 웃음에도 젊은 그는 아무 대답 없이 휴대폰 액정을 내밀었다.
“맡겨놓고 가시겠어요? 적혀진 주소로 수리 끝나면 배송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