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고백이라도 하면 어떡하시게요. 하던 카이토의 말을 고심해 볼걸 그랬다. 소심한 성격이라 몇 달은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짝사랑은 넘실거리는 꽃 봄바람에 이기지 못하고 분홍빛 리본의 끝을 맺을 날을 혼자 정해버리고 만 것이다. 유정은 아침에 평소와는 다르게 화사한 원피스와 짧은 가디건을 입은 그녀에게
“오늘 옷 예쁘네요.” 하고 웃어주었던 것을 후회했다.
여자들은 어찌 그리 외모에 홀리고 또 자기들만의 환상을 다른 사람한테까지 덕지덕지 붙여서는. 그게 자신의 환상에 맞지 않으면 순간 적으로 돌려버리고선. 회사에서 몇 달 동안 물 밑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노골적으로 표하던 부서의 여직원은 며칠 전에 도시락을 가져다주더니, 끝내 유정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저 그런 고백을 해버린다. 일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사귀어 달라고.
남은 점심시간동안 밖을 나가있을걸 그랬다. 속으로 거절 할 그럴싸한 말을 짜낸다.
“마음은 정말 고마워요. 도시락도 돌려주면 무안할까봐 먹었는데, 그게 오해를 하게 만든 거 같아요.”
이미 그녀는 마음은-에서 생각을 멈추고 얼굴을 붉게 달았다. 이 부분이 정말 싫다. 울지만 말아줬으면.
“맛있었어요.”
“아..아니에요...”
그렁그렁 맺힌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평소엔 다른 기 센 여직원들 사이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웃고만 있었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용기를 내기까지 얼마나 긴 고민이 필요했을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히 보였다. 출근 시간을 일부러 맞춰서 들어와 인사 한번, 눈 한 번 더 마주치려고 하는 것도 알았고. 점심시간엔 굳이 먹던 도시락을 싸오지 않고서라도 같이 식당을 가려고 했었던 것도. 마주 보는 자리에 앉으려 일부러 뒤에 들어오는 것도.
“친구라도, 퇴근 후에 밥이라도 같이 먹는 사이부터라도 안 되는 걸까요?”
“그렇게 하면 제가 너무 나쁜 사람이 되잖아요.”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때부터 입술을 읽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의 고백에 당황한 것 까지 합쳐져 그녀가 울며 속삭이는 외계어는 고막을 지나 뇌로 들어가 아무런 의미가 되지못하고 흘러 사라졌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을까. 고백은, 아니 그녀는.
아마도 여자들의 입방아에서 한참은 오르락 내르락 했을 주제. 휴게실의 뒤편에서 사무실의 굵직한 자리들을 맡은 여자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줄곧 피해왔었던 여러 음성이 겹친 외계어의 오케스트라에서, 가락을 잡을 수 없는 귀머거리처럼. 평소처럼 상대방의 태도와 다른 요소들을 비교하면서 더듬어 보려고는 했는데. 흔들린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가 않는다.
“어떡하지..”
진정하자. 분명히 특이한 말을 하진 않았을 거다. 유정은 자신이 세워두었던 위급 시의 대책을 떠올렸다. 무조건 수긍의 대답을 하면서 웃는다-하지만 그건 지금에서는 위험했다. 만일 고개를 끄덕이다가 혹시 그녀와 사귀겠다는 말에 수긍한다면 상황은 최악이 된다.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언어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이미 한 여직원의 품에 안겨 울고 있다. 흐느끼는 소리만이 희뿌연 언어 사이에서 또렷이 들린다. 드디어 유정을 똑바로 쳐다보고 여직원은 입을 움직였다.
“..유정씨 너무해요.”
차라리 가슴을 쓸었다. 그런 건덕지는 없었나 보다.
“미안해요. 정말로.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건조했던 그 대화는 회사 여자들의 입속에서 씹히고 씹혀 그 침에 불리고 풍선껌처럼 부풀려져 그 사건. 저 사건 때처럼 유정의 손을 훌쩍 떠나 멀리 사라졌다. 아주 익숙하고도 지겨운 입소문의 눈덩이가 소리 없이. 폭삭 자신에게 떨어지는 부드럽고 차가운 기분. 기껏 점심시간을 샌드위치로 때우고 사무실의 문을 열자 눈빛이 와르르 쏟아졌다.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벌게진 눈의 그녀는 퉁퉁 불어터진 얼굴로 유정을 바라보았다. 고백하고도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한 그녀의 모든 수치심은 대중의 분노로 치환되고 있었다. 평소에 시답잖게 말을 걸어오던 가벼운 옆자리의 사람이
“너, 그런 새낀 줄 몰랐다.” 하고는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고등학생 때나 할 법한 시비를 걸었다. 어깨를 털고 그저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말할 필요 없고 잘됐다. 조용히 커피나 마시고 싶다 치면 헐렁하게 걸어와 책상에 기대서 한다는 얘기들이란 싸구려 신문의 귀퉁이를 장식하기에도 가치 없는 주제였다. 입술 보기도 귀찮아서 대충 대답을 해주고 만다. 이런 관계였는데 내가 어떤 새끼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지, 비논리성에 할 말이 없다. 차라리 카이토가 더 논리적이겠다.
-
“왜 오늘은 그 여자 얘기 안 해주세요?”
“할 필요가 없으니까.”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앉아있던 카이토를 밀어 내치고 옷을 벗지도 않고 누웠다. 엉겁결에 나동그라진 카이토는 씩씩대며 발밑으로 기어왔다. 내일 출근부터 펼쳐질 밀고 당겨지고 아래에 흐를 수많은 소비적인 감정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릿속에서는 마지막 퇴근 전에 보았던. 원망이 가득 담긴 그녀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지금 친구들과 술집에서 신나게 자신을 씹어대고 있을까. 아니면 유정의 예상대로 아기자기한 그녀의 방에 틀어박혀 배개에 얼굴을 묻고 있을까. 자신처럼.
“피곤해.”
“이불 빨래 맡기신지 얼마 안됐는데, 씻고 누우세요.”
“피곤해.”
이불에 얼굴을 틀어박고 쫑알대는 카이토의 모든 잔소리에 피곤해. 하고 성의 없는 대답을 했다. 정말 피곤했다. 피곤함이 다른 생각을 모두 지워버린다.
“뭐가 그렇게 피곤하세요?”
“말하는 게.”
말로써 누군가를 이해시키고 이해한다는 게. 이해란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 알고 있어. 카이토? 모두 다른 위치에 서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거. 가장 가까운 부모님도 자식을 이해하지 못해.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넘쳐나지. 이해는 너무 어려운 일이야. 자신을 이해하는 것도 힘든 사람이 많아. 평생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남에게 보여주고 퍼주기다만 가는 게-
“머릿속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제가 알아듣진 못해요.”
“그게 참 재미있는 점이야.”
유정은 얼굴을 빼꼼 내밀고 기쁘지 않게 웃었다.
그게 흥미롭고. 불확실하지만 거기에 믿어볼 수밖에 없는 게.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아. 그러니까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는 거지.
“넌 나를 이해할 수 있어?”
그 웃음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카이토는 깊은 의미를 헤아리기를 포기했다. 여러 의미가 합쳐져 더는 하나의 것이라고 보기 힘든 의미가 끈적하게 입꼬리 끝에 달랑거린다. 어떤 걸 잡아도 근원을 들어내자면 유정이라는 개체의 모든 것을 뒤엎을 대답밖엔. 아니면 그저 기계가 뱉어내는 단어의 모음엔 감흥 없이 으응. 하고 평소 같은 얼굴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런 걸 물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이해라는 건, 저도 잘 모르지만. 하지만 저는 이해를 해야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다고 배우지 않았는데요.”
“하, 정말 내가 원하던 답이 아니잖아. 실망이야.”
그러나 누운 채로 손을 뻗어 바라보는 카이토의 볼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카이토는 반항이란 게 입력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 손을 겹쳐 잡을 뿐이었다.
“넌 통각이란 게 없어? 왜 아프단 말을 안 해.”
사실은. 그때 말이에요.
카이토는 아주 천천히 이야기했다.
“통각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그때는 마스터가 아니었던 어린 인간이, 알량한 연민에 그대로 절 놔두고 가면 어떡할까. 제가 연산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인 거죠. 그게 제 생존방식이에요.”
유정은 몇 달 전의 폐공장을 기억했다. 구둣발로 한 번에 부서졌으면 좋았을 텐데. 뜻밖에 단단한 다리는 몇 번을 밟고. 밟아도. 밟아도. 되지 않아서 필통에 어설프게 들어있던 커터칼로 칼집을 내고, 쑤시고, 자르고. 마지막으로 두 손에 잡고 질긴 나뭇가지를 억지로 휙휙 돌려 마지막 전선을 끊어냈을 때까지. 그 사이에서 수도꼭지처럼 쏟아지는 붉은 윤활제를.
줄곧 보고 있었다고. 기쁘게.
“마스터의 생존방식이 그것이라면, 그건 나쁜 것이 아니에요.”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보다 쓰레기처럼 사는 인간이 넘치는 세상이니까. 볼과 손과 손은 섞이지 않는 온도를 어떻게든 움직여보려고 애를 쓴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볼을 만진지가 언제더라.
언제부터 손을 잡는 게 아무렇지 않게 되었는지, 만난 지 고작 반년 남짓한 안드로이드에게선 거울을 보는듯한 평온한 마음이 들었다. 아주 조용한 음악처럼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카이토는 생활 속에 스며들었다.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아도, 물어보지 않아도 항상 웃어오는 얼굴이. 진심 없는 메아리에 불과하다던 기계의 말은 그 어떤 울림보다 따뜻하게 들려왔다. 이것 또한 카이토의 생존방식이라면, 개발자는 카이토를 사랑했음이 틀림없다.
“정말 피곤해.”
목을 끌어안았다. 심장이 있어야 할 장소와 가까운 곳이었지만, 카이토의 몸속에서는 자그마한 기계음과 관이 공명하는 소리만 났다. 차라리 그게 더 진실 된 것 같다고, 건방지게 머리를 쓰다듬는 카이토를 이번만은 그래, 그냥 이대로만 있자. 그러자. 하고 혼자 뛰는 가슴을 가라앉힌다. 머리카락이 손에서 물결친다.
“미안하다고 말해야겠지?”
“마스터는 착한 사람이에요.”
아주, 정말, 진짜로. 힘주어 말하는 발음이 너무 정확해서 입술을 보지 않아도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모처럼 꿈을 꾸지 않았다.
목에 안긴 카이토는 배터리가 닳은 채로 그대로 잠들어 있다. 한번 충전하면 며칠은 간다는 요즘 기종과는 다르게 하루 종일 버티기가 힘들었다. 무거워서 침대 위로는 옮기지 못하고, 고개만 침대로 살짝 내려다 주었다. 처음의 그때처럼. 그대로 충전코드를 연결했다. 오랜만에 노래 없는 조용한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한다. 침대 위로 엎어진 어깨를 멀뚱히 쳐다보며 셔츠 단추를 잠갔다. 고요하게 햇살만 드는 방이 어색하다.
아침부터 피곤해, 피곤하다. 하고 중얼거리면 어디서 주워들은 노래를 불러준다. 말 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노래는 카이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켜준다.
“음만 겨우 지키지만요.”
끝을 맺지 못하는 노래의 가사는 허밍으로 끝난다. 조잡스러운 가사보다는 그게 더 듣기가 편하다. 가사가 있으면, 그것에 대한 생각밖에 하지 않게 되지만, 가사가 없으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노래에 까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면, 아. 사는 건 왜 이렇게 피곤한 일인지. 주어진 목적에만 맞춰 살면 되는 카이토가 조금 부러워진다. 카이토가 움직이는 것을 산다고 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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