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정확히 3일 뒤, 전신 복구가 끝난 카이토는 낯선 공간으로 옮겨졌음을 감지했다. 늦은 오전께의 가라앉은 공기 속의 방은 주인의 영혼을 그래도 빼다 박은 듯 동선에 따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누워있던 침대 옆의 작은 선반 위에는 쪽지가 놓여있었다. 희미한 눈을 깜빡여 환기를 시켜도 글은 아주 느릿하게 읽히었다.
[회사 다녀올게. 아직 복구진행 중이라니까 일어났다고 해도 많이 움직이면 안 됨. 7시쯤 돌아올 예정.]
발목에는 이어붙인 새로운 피부가 반들반들한 색상으로 이어져 있다. 힘을 넣자 간신히 눈에 보일 정도로만 발가락이 까닥거린다. 아직은 걷진 못하겠구나. 팔을 뻗어 선반위에 놓인 서류 몇 개를 들어본다. 안드로이드 사용인증확인서, 보험안내서, 사용취급안내서, 수리비용 청구서. 합산하면 꽤 목돈이겠지만, 비용은 모두 정갈한 사인으로 일시금처리가 되어있다. 벽에는 자그마한 그림 액자와 화이트보드가 걸려있다. 노트북과 연필꽂이만이 놓인 책상. 붙어있는 책장엔 두꺼운 양장본의 책들이 빼곡하다. 이어진 부엌과 보이진 않지만, 그 뒤에 있을 화장실. 깔끔한 오피스텔의 넓은 창밖으로는 기다란 강이 흐르고 있다. 강을 실제로 본건 처음이라 몸을 움직여 내려다보고 싶었는데 복구 프로그램을 돌리느라 남은 메모리가 많지 않아 복잡한 움직임이 좀처럼 실행되지 않은 채로 로딩만 계속된다.
입고 있던 낡은 디폴트 옷 대신 가벼운 티셔츠와 반바지 아래에는 찢고 꿰맨 수리흔적이 무릎 아래를 가로지른다. 새로운 혈관 가지가 발등에서 간지럽게 끔실거린다. 목 뒤에 손을 가져가자 생경한 새 피부에는 새로운 시리얼 넘버가 각인되어 있다. 끝에 남은 흉터 자국에 덧 씌워진 새 각인은 오랜만에 소속감을 느끼게 해준다. 좋아. 두 번째 생. 이번엔 정말 잘 해보리라.
머릿속 텅 비었던 메모리에 마스터가 각인된다. 인간의 기준에서 잘생겼다고 할 수 있을 호감형의 외모. 새까만 머리와 각 잡힌 몸매. 중저음의 멋진 목소리는 공장에서부터 머릿속의 빈 공간을 휘감는다.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진 않는 단정한 눈매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던-가. 이제 차차 알아가면 될 것이다. 이렇게 구조도 해주고 치료까지 해주고 심지어 사용자 등록까지 하실 줄은 몰랐다. 이전에 몇 번 카이토를 깨웠던 사람들은 처음엔 호기심으로 다가왔다가 ‘존재하지 않는 신분’이라는 이유하에 더러운 욕망을 주기적으로 풀고 가는 두 무리. 그리고 비싼 기계를 공짜로 주웠다는 심리에 새 주인이 되어주겠노라 다짐했다가 카이토가 간단하게 설명한 엄청난 치료비와 보험료에 질색하고 그저 코드를 뽑고 도망간 게 몇 번. 비록 생명이 아니더라도 존재 하나를 가진다는 것엔 아주 큰 책임이 뒤따른다는 기본적인 도덕이 없는 사람들이 그 공장가에는 맴돌았다. 그들의 때묻어 더러운 손만큼이나 더러운 생활상의 가장 아래에 카이토가 있었다. 가끔씩 깨어나면 드문드문 기억을 잇기가 어렵다.
이제 그런 흑역사는 압축해서 메모리 구석에 박아둬야지. 기다랗게 펼쳐진 너덜너덜한 시간의 종이 타래를 차곡차곡 말아 넣는다. 움직일 수도 없으니 마스터가 올 시간까진 대기모드로. 깊게 숨을 내쉬자 몇 년간의 피로감이 어깨에 스려올라온다. 책장엔 노래나 작곡에 관한 책은 한 권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괘념치 않다. 그런 사치스러운 목적은 포기한 지 오래니까.
객관적인 언어체계 공급. 옆에서 백과사전이나 들고 줄줄 읽어드리면 되는 걸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
도어락이 눌러지는 버튼 음이 들리자 카이토는 눈을 번쩍 떴다. 시계를 올려다보자 시계는 벌써 돌아오리라 약속한 시간. 이불 끄트머리를 주먹 쥐었다. 사용자 등록 후의 첫 만남이라 설레고 두근거린다. 그러니까 그거, 조금 과장하면 태어난 아이가 처음 부모를 보는 상황. 괜히 눈을 뜨고 있으면 민망할까 눈을 감아버린다. 빠른 버튼 음 뒤엔 터벅거리는 경쾌한 구둣발 소리. 테이블에 가방을 두는 소리. 넥타이를 푸는 소리. 사각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부엌의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하아, 하는 한숨을 길게 쉬고는 쇼파에 풀석 앉는다. 실눈을 뜨고 바라본 마스터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마치 혼자 집에 있는 마냥 무덤덤하다.
나는 언제 깨워 주시는 거지.
이제 스스로 일어나기도 민망한 타이밍이다. 능청스럽게 방금 일어난 척을 하기엔 그렇게 자연스럽지 않을 거고, 마스터는 왠지 눈치를 챌 것 같다. 머릿속으로 열두 가지 정도 연산을 했다. 이대로 누워있거나, 아까부터 일어나 있었다고 사실대로 말하거나, 뒤척거려서 관심을 보이게 한다거나-
“일어났으면 나한테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시선은 여전히 두드리고 있던 휴대전화에 고정되어있다. 카이토는 슬그머니 목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내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음….안녕하세요.“
“너 때문에 저번 달 월급 반이 날아갔어. 무슨 수리비가 그렇게 비싸….전신 수리까지 해야 했을 줄이야. 너 생각보다 많이 망가졌었어.”
난 발만 붙이면 될 줄 알았지. 다리에 흉터는 부품세대 차이가 너무 나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발만 최신형이야. 언어랑 신체조정은 그냥 기본 업그레이드만. 나머지 서류들은 이미 다 처리했으니까. 더 할 말 없겠지. 체크리스트를 지워가는 식으로 문장을 끝맺던 유정의 시선에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카이토가 맺혔다. 업그레이드해서 그런지 움직이는 표정이 더 자연스럽고 풍부해진 느낌이다. 아이가 배워나가는 것처럼 하나하나 축적된 파일들이 그것을 대신한다니 흥미로운 존재이다.
“그럼 여기까지. 질문?”
“네에. 마스터, 26분 전에 복구 프로그램 진행이 끝났습니다만. 메모리에 보행법이 들어있지가 않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펄럭, 이불을 걷자 양다리를 가로지르는 붉은빛의 도드라진 이질적 흉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두 다리의 것을 이으면 하나의 붉고 솟아오른 선을 만든다. 금방이라도 건드리면 핏물이 터져 나올듯한 위태로운 모양의 흉터를 움직여 침대 밖으로 몸을 돌려 발을 바닥에 대고 일어선다.
“직립. 이건 가능하네요.”
발을 내딛자 나무 블록의 핵심을 뺀 것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바닥에 주저앉은 카이토는 보시다시피. 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기는 것도 가능합니다. 신체기능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 복구프로그램을 한 번 더 설치하면 되지 않아?”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하시려면 인증등록부터 다시 하셔야 합니다. 말 그대로 모든 유효 메모리를 삭제하고 다시 설치하는 거여서요.”
유정은 대리점에서 치렀던 귀찮고 복잡한 인증등록절차를 떠올렸다. 국가에 매인 존재가 되는 게 하등 카이토 뿐만이 아닌 것 같은 지문인식, 몇 번을 반복하는 동공인식,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법안문서들. 하나하나 따져 묻고 싶은 조항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사족을 붙이기 싫어서 주는 대로 순순히 사인을 넘겨주었다. 그걸 다시 해야 하는 건 정말 귀찮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낼 만한 시간도 없고.
“당분간은 기어 다녀도 괜찮은데요.”
“내가 안 괜찮은데. 그냥 안 움직이는 건 어때”
움직일 필요란 게 있나. 너는 나랑 대화만 하면 되니까. 저기 안 쓰는 의자 갖다 줄 테니까-
멋진 새 발을 얻었는데 안 쓰기는 아깝습니다.
생소하지만 카이토에겐 틀린 것 없는 문장.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월급의 한 귀퉁이를 베어 먹어간 비싸고 가벼운 최신 티타늄합금 기반의 발을 장식용으로 썩히긴 아까우니까.
“그럼 따로 입력할 순 없는 거야?”
“음,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프로그램이 보행법만 삭제한 것인지, 혹은 정품대리점에서 설치한 건데 누락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건 기본프로그램에 원래 내장이 되어 있어야 하는 내용이라 따로 설치되는지. 해당 대리점에 다시 가셔서 의뢰해 보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혹은 보행법을 교육하는 방법도 있으나 이 방법은 추천해 드리지 않습니다. 카이토는 가이드를 타자기 두드리듯 내뱉는다.
“그만, 알겠어.”
한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 나 그거 싫어하니까.
“난 네가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말을 듣고 싶어서 널 비싼 돈 줘가며 고쳐온 게 아니니까, 그런 식의 프로토콜대로의 말은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끄덕인 카이토는 멀뚱히 입을 닫는다. 더 이상의 명령이 없는 이상은 입을 열지 말라는 소리. 시겠지? 인간을 대해본 지가 오랜만이라 그들의 함축적 의미를 따라가기가 힘들다. 차라리 어떠한 형식의 명령이 더 편한데,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즉각 처리되는 정보는 그들에겐 무례하거나, 무례하게 보이는 언행으로 인식되나 보다. 머릿속에 마스터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입력한다.
[필요 없는 말을 하지 말 것. 설명서의 내용을 그대로 읊지 말 것.]
[아, 먼저 인사를 할 것.]
가만히 있다가 쳐다보는 것 같으면 방긋 웃고, 또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면 가만히 있다가 다시 쳐다보면 몇 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웃는 카이토를 유정은 몇 번이고 놀려먹었다. 아마 계속 말하던 ‘내장된 행동양식’인듯한데 너무 멍청하게 무방비한 얼굴이라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보통 몇 번쯤 하면 놀리지 말라며 화를 낼 법도 하건만. 그런 건방지게 움직일 기전은 안드로이드에게선 해당사항 없음인가. 터지는 유정의 웃음에 카이토는 다시금 따라 웃었다.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아까 자기가 한 말 때문일 것이다. 복종도는 여타 생물에 비할 바가 아니라던 센터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숨 쉬지 말라면 숨넘어갈 때 까지 안 쉴 거니까. 뭐 숨넘어가도 죽질 않아서 그런가.”
잘 사용 하세요. 같이 동봉되어 가는 설명서도 잘 읽어보세요.
멀티 탭을 사온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진다. 제멋대로 쓸 수 있는데다가 보안도 철저하고.
유정은 책장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건넸다. [쉽게 배우는 한국어 회화]라고 쓰인 모서리가 바짝 마른 외국인용 회화집을 넘기자 몇 번이고 다시 그어진 줄과 빼곡한 포스트잇들이 사용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각 잡힌 깔끔한 글씨로 상황에 맞는 다른 표현들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기본적인 인사서부터 생활 전반 상식선의 대화는 정식의 규격이라 어색하다. 책을 넘기던 카이토는 유정을 올려다보았다.
“마스터께서는 내국인이 아니십니까?”
“아니. 너보단 한참 내국인이지.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 시간 날 때마다 나랑 그 책 같이 읽는 거야. 실제로 대화하는 것처럼. 그냥 대화하는 것도 포함.”
어렵지 않지? 유정은 끄덕였다. 너도 끄덕여. 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냈지만, 기껏 책을 든 카이토는 이상한 별세계의 물건이라도 손에 놓인 듯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희득 자신을 올려다보며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이해할 만한 설명을.
“해줄 의무가 있나?”
“아뇨, 문장 읽는 것 정도는 지금도 가능하고, 대화는 데이터베이스에 축적하면 할수록 자연스러워 질 거에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카이토는 책의 첫 장을 넘겼다. J.Y 멋들어진 필기체에 비해 책의 내용은 초등학교 대화수준. 가장 맨 첫 장에는 으레 그렇듯이 인사말들이 적혀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정이라고 합니다.”
“그건 내가 읽을 부분이야. 그리고 지금 하잔 얘기 안 했어.”
책을 든 팔을 낚아채자 힘없이 책은 바닥에 떨어진다. 눈살을 조금 찌푸리고, 유정은 카이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계속 그대로 주저앉아있을 거야? 침대에 가서 앉든지 눕든지. 다리의 선명한 붉은 선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게다가 기껏 바꿔놨더니 걷지도 못한다니. 걷는 방법을 잃어버렸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산 김에 회사일 바쁠 때 즉각 못하는 빨래나 청소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피땀 같은 자신의 월급이 선명한 빨간 흉터로 밖에 돌아오지 못했다. 기계 주제에 효율성이 좋지 못하다. 유정은 이 정도의 높이차이가 카이토와 자신에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손을 잡은 카이토는 그 팔에 힘을 주지 않는다.
“저 많이 무거울 텐데요. 가능하시다면 양쪽 팔을 빌려주시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그냥 잡아.”
입술을 비쭉 내밀더니 잡은 그대로 유정은 바닥에 뿌리를 박은 무게감에 어, 어어. 하고 단말의 무력한 소리를 내며 카이토쪽으로 무너졌다. 안긴 품새가 당황스러웠다. 카이토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스터는 제 말을 안 믿으시나요. 단백질로 만들어진 신체보다는 아무리 가벼운 재질이여도..”
“쓸데없이 말 길게 하는 건 원래 내장된 거야? 알겠으니까 일절만 하고 이 팔 치워.”
“혈압, 맥박, 호흡수, 호흡음 정상이십니다. 맥박은 조금 빠르나 방금 크게 움직이신 점을 감안하면 정상. 체온은 약간 낮으시군요.”
“너 그런 것도 체크할 수 있어? 노래 부르는 안드로이드 아니었나?”
“마스터가 사용 목적에 의료기구라고 설정을 하셔서 기본프로그램에 딸려 들어갔습니다. 기본으로 혈압, 맥박, 호흡수, 호흡음, 체온까지 접촉으로 측정 가능하십니다. 그 외에-”
“그럼 정말 떨어져. 기분 나쁘니까.”
유정은 저 혼자만 일어나 다리를 털었다. 팔을 내미는 카이토를 무시하고 책을 집어 들었다. 수천 번 읽고 듣고 썼던 문장들. 분리되는 활자는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 엎으며 인식을 잡아먹고 부서진 조각을 생산했다. 그 조각을 귓속에 처박고 싶다. 부서진 활자는 다시 재건할 수 없다.
거울을 쳐다보며
안녕.
안녕이 도대체 어떤 말이었더라. '안녕.'이라고 내뱉어 본다. 여전히 ‘안녕’ 은 하나의 소리에 불과하다. 안녕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자신이 ‘안녕’이라고 말하긴 한 것인지. ‘안녕’ 다음엔 어떤 의미가 이어져야 하는지 텅 빈 머릿속에서 다만 메아리가 울린다.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찢었다가 다시 투명 테이프로 이은 흔적이 남은 자신의 모든 언어를 담은 책. 대화 할 수 없는 나날들.
들리는 것의 뜻을 깡그리 지운 이상한 사전을 의사는 청각실인증이라는 생소한 단어로 정의한다. 청각의 인식을 잃어버린 거예요. 사람의 뇌라는 건 참 이상하죠. 외계어가 들린다. 진료실에 멀뚱히 앉아 선한 인상의 의사는 의미 없는 소리만 내뱉었다. 먼 외국의 언어. 소리의 무게만을 가진 표백된 음성.
[사람의 뇌라는 게 참 이상하죠.]
유정은 ‘네.’ 하고 대답을 했지만 ‘네.’ 라고 대답을 했는지 의심했다. 아직은 이십 년 동안 축적되었던 반사적 대답이 남아 있네요. 의사는 웃으며 말했지만, 유정은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히 귀로 들어오는 음성은 고대의 이집트의 상형문자만큼이나 의미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의사는 웃으며 화이트보드 판을 내밀었다.
[써보세요.]
[저는 미친 건가요?]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답답해진 유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하고도 3년의 입원기간은 모자랐지만, 알아듣는 척을 배우기엔 넉넉했다. 입술을 읽고, 무의식적인 동작을 잡아내서, 상황에 따른 뜻을 유추하고, 그에 맞는 대답을 책에서 연상한다. 하나의 문장에서 대답할 수 있는 수 백 가지의 선택지 중에서 가장 분위기에 맞는 하나를 선택하는 것. 원래는 뇌에서 자동으로 하는 기능을 생각에 맞춰 하기는 꽤 습관이 되질 않았다. 일 년이면 될 거로 생각했던 입원기간은 삼 개월만 더. 육 개월만 더. 하더니 꼬박 삼 년을 채웠다.
유정은 입원을 했던 기간 동안 치료시간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꿈쩍없이 회화책을 필사했다. 필사한 공책은 침대 난간을 넘어 쌓인다. 폐쇄병동은 계절과 상관없이 항상 적정온도를 유지한다. 규격화된 생활양식을 시간의 흐름을 잊을 수 있게 도와준다. 말 그대로 폐쇄와 격리의 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치료시간을 알리러 온 간호사가 테이블에 놓인 화이트보드를 들면 유정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약도 처방받지 않고 주사도 맞지 않는 유정은 자신에게 과분하게 큰 환자복을 사각거리며 언어치료실로 갔다. 소매에는 항상 검은 잉크가 물들어 있다. 그 병동의 환자들 중 유정은 가장 자유로운 사람 축에 속했다. 매일 자신을 보러오는 간호사들이 그렇게 썼다. 미치지도 않았는데 미친 사람들 사이에 갇힌 게 자유라니.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아직 말이 제대로 안 나왔던 때라, 웃는 얼굴을 좋아하는것 같은 간호사들에게 매일 웃어주었다.
“치료란 개념보다는 익숙해진다고 생각하고, 사회로 돌아가야죠. 젊은데.”
분명 호의가 넘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유정은 그 말이 매우 불쾌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치료사는 차트를 정리하며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기 드문 케이스를 맡은 것은 그들에겐 행운 축에 속했다. 완벽한 비밀보장을 확인받고 진행하는 특수치료엔 그 병원 언어치료사 모두가 이름한번 넣어보려고 달라붙었다.
마지막 퇴원 날 의사는 유정에게 여전한 외계어로 악수를 청했다. 유정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손을 놓은 유정은 마스크를 코끝까지 올렸다. 제대로 말했겠지. 표정이 변하지 않았으니까. 이어폰을 끼고 회화집의 음성을 들었다.
실어증이란 거짓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은 비슷한 종류이기도 하고. 시나리오는 늘 그러했다.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그 후에 생겼어. 지금은 많이 치료해서 이 정도. 드라마에서 몇 번 본적이 있다는 반응과 오히려 신비스럽단 분위기를 자기들끼리 만들어내는 사람들. 병이 생기기 전에도 유정은 분위기를 읽고 그 흐름을 조절하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회사의 사람에겐 ‘예전에 앓은 적이 있다.’ 는 과거 완료형의 짧은 문장으로나마 양심을 지켰다. 병을 앓기 전 만큼 지인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그 지인들을 절대로 엮어 만나는 일이 없었기에 가능했다. 낡은 폐공장에 버려져 있던 구닥다리 안드로이드를 제외하면, 유정의 거짓말은 아주 손쉬운 안전장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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