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place 02

긴것/My Place 2014. 8. 18. 17:46

2.

A는 정중하게 보내온 문자를 받았다. 막 늦은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던 참이었다. 며칠 전에 이사 온 D에게서의 문자였다. A는 옆에서 양치질하는 카이토의 어깨에 장난스럽게 팔을 걸고 큰소리로 읽었다.

“D입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짐 정리가 끝나서 연락드립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신다면 답장 주시길….이 형 왜 이렇게 예의가 바른 거지?”

“예의가 바른 건 좋은 거죠. 마스터는 배울 필요가 있어요.”

“시끄러. 암튼 들었지? 놀러가자. 맥주 몇 개 챙겨갈까.”

저도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카이토에게 A는 칫솔을 물고 끄덕였다. 입에서 부글거리는 거품소리와 말이 섞이자 A는 양칫물을 뱉어냈다. 능숙하게 고개를 숙여 잡힌 목을 빼낸 카이토는 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이사 선물 사가야 하나? 보통 뭐 사가더라.”

“아이스크림 패밀리사이즈.”

“웃기고 있네….야. 그보다. 이 형 카이토랑 사귀는 사이 같던데. 너도 그렇게 보였어?”

“으음. 글쎄요. 저는 잘.”

모르. 모르겠어요.

카이토는 아직도 애정, 관계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과거의 그림자를 드리운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고개를 젓는다. 철없는 고등학생들의 악의 서린 장난은 카이토에게 현실이었다. 걔들은 아마 지금쯤 카이토는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 반의 여자애들은 말 잘 듣는 착하고 귀여운 애완견 같은 느낌의 카이토를 좋아했다. 본사 직원이 와서 알려준 카이토는 T예고에만 특별히 맞춤 제작된 공용형이라고 했다. 원래 사용자 등록제가 필수인데, 어쩌고저쩌고. 나는 작곡에는 흥미가 없던 피아노쟁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교실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인 카이토를 보고서 머리카락 색이 특이하네. 정도의 작은 관심만 주었을 뿐이다. 사람흉내를 내느라 입혀놓은 T예고 교복이 자로 잰 듯 맞아 떨어졌다. 노란 체크 넥타이가 파란색의 머리와 대비되어 눈에 띄었다. 나는 그때 교실 뒤편 책상에서의 속삭이던 몇몇 목소리를 기억한다.

시범용. 노래를 위한 안드로이드. 마음대로 사용해주세요.

깃털보다 가벼운 인식이 모인 교실에서 카이토는 2년간 생활했고, C사는 이후 공용형 개발을 취소했다. 나는 최우수졸업자의 특별혜택으로 카이토를 받아 나왔다.

다시 사용자형으로 바꾸는데 들었던 돈은 지금까지 갚고 있다. 최우수졸업을 하지 않았으면 갚아야 할 돈은 배가 되었을 것이다.

“됐어. 말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된다고 도대체 몇 번을 말해. D형네 집도 안 가고 싶으면 넌 집에 있어.”

“아뇨, D님네 집은 저도 가보고 싶은데. 혹시….”

“뭐, 내가 또 가만히 안드로이드랑 애정질 하는 거 지적하다가 멱살 잡고 싸울 것 같아?”

“맞아요. D님은 착하신 분이에요. 그분의 카이토도 좋은 아이고. 저희가 건드리는 건 괜한 참견이에요.”

*

괜한 참견.

남의 일에 참견하는 더러운 성격 때문에 고등학교 마지막 추억은 주먹질과 합의로 끝났고, 평소에도 완고했던 부모님과의 연도 끊었다. 심심할 때마다 운동을 해놓은 게 이럴 때 쓰일 줄 몰랐다. 생명이나 다름없는 손에 박혔던 유리조각을 빼고 붕대가 감긴 손으로 교무실에 끌려갔다. 내 앞에 앉았어야 할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들은 자리에 나오지 못할 만큼 병원 신세를 졌다. 선생님들은 치기 어린 아이를 보는 눈으로 그럴 수 있다고 나를 설득했다. A의 상황은 알겠고,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도 이해하겠지만.

‘물건이 부서졌다고 친구를 때리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란다.’

내가 가장 용납할 수 없는 건 그 말이었다. 함께 듣고 있는 카이토의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가장 곤란한 것도 카이토였다. 본사 직원은 내용을 알지 못하는 서류 몇 개를 선생님과 주고받았다. 카이토는 나를 뜯어말리다가 벽에 처박혔던 모습 그대로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쓰레기들의 부모님은 나를 질책하다가 결국에 원인이 된 저 기계를 폐기처분 하라고 소리 질렀다.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아줌마. 제정신이에요? 얘는 피해자라고요. 아줌마네 아들이랑 부하놀이하고 노는 새끼들이 좆딸질 할 곳이 없어서 반항도 못 하는-”

“피해자라니. 너야 말로 제정신이니?”

인칭이 필요 없는 존재.

나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꼼짝없이 본사 직원의 팔에 붙들려가는 카이토의 뒷모습은 사형수의 마지막 모습처럼 처절하고 처량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무력감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산산조각나 무너진 자존심을 채우는건 평생동안 매달렸던 피아노로는 부족했다. 나는 한동안 공허함에 사로잡혀 꼼짝없이 암흑기를 보내야만 했다.

*

막 정리한 D의 집은 깔끔했다. 손이 닿는 대로 동선에 맞춰 전체적으로는 뒤죽박죽으로 되어있는 A의 집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한 쪽에 있는 방에는 올해 새로 나온 믹싱장비가 가득했다.

같은 작곡을 한다 해도 방식은 자기 하기 나름이다. A는 피아노로 작곡을 시작 해놓고 악보로 옮겨쓰고, 거기에 맞춰 노래를 부르게 하는 방식이라면, D는 시작부터 카이토에게 맞춰진 음악을 만드는 방법으로. 덕분에 맞춰놓은 기계가 A보다 훨씬 많고 사양이 좋은 편이었다.

방 구경을 하는 동안 D는 A가 오피스텔 앞 편의점에서 사온 물건을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기어코 감시하려는 것인지,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카이토를 무시하고 방을 둘러본다. 언제 따라붙었는지 등에 들러붙은 카이토는 두 마리로 늘어나 있었다. 이 녀석은 D형이 어리광을 다 받아 주었는지 어린애의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고 있다. 딱히 고깝게 보이진 않았다. 뭐라고 조잘대는 걸 무시하고 다시 거실로 나오자 마침 짐을 다 정리한 참이라며 D형은 자리를 권했다.

“우와. 집 깨끗하네요. 역시 새집.”

“곧 더러워질걸. 작업 시작하면 살림엔 신경 못쓰니까.”

“흐음. 어떤 곡 쓸 생각이에요? 데모 버전 이라도.”

“아직 녹음 안 했어. 하게 되면 들려줄게.”

A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을 툭툭 뱉는 편이다. 테이블에 다리를 꼬아 앉아 먼저 펴놓은 맥주를 따는 모습이 자기 집보다 편해 보였다. 나쁜 건 아니지만.

“형. 앉아요. 맥주 많이 사왔어요. 아이스크림도.”

아이스크림이라는 단어에 버튼이라도 달린 듯 카이토들은 눈을 번뜩이며 식탁 위에 올라가 앉았다. 느긋하게 의자에 앉은 그동안 뭐 했어, 하고 D는 의례적인 인사를 물었다. D는 친해져 보려는 의지가 가득 담긴 A의 격식 없는 문자에도 도덕책에나 나올 법한 답장을 보냈다. A는 당장에라도 윗집에 올라가 문을 두드리고 싶었던 충동을 참아냈다. 겉도는 대화는 쓸모없고, 가식적이다. A는 D의 음악을 들어 본 적은 없었지만, 그의 음악이 어떤 방식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음악만큼 자신의 사상과 생각이 잘 드러나는 도구는 없으니까.

“잘 먹네. 맛있어?”

“네! 역시 여름엔 아이스크림이 최고에요.”

아이스크림을 먹는 카이토의 머리를 쓰다듬는 D를 보며 A는 삼키던 맥주가 쏠려 올라오는 듯 구토감을 느꼈다. ‘음악성’ 하나로 카이토를 사용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없는 것일까. 여자들이야 유사 남자친구 격으로 남자안드로이드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인터넷의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혼자 하는 착각 속의 비밀연애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가짜 몸과 만들어진 마음을 이용한 관계라니!

A는 표정을 숨기는 게 서툴렀다. 숨길 생각도 없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미간을 찌푸리는 A를 보고 D는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형. 아. 아- 젠장. 형. 저 말을 돌려 하는 것 싫어해요. 제가 앞으로 말할 것에 기분 나쁘시면 한 대 치셔도 돼요.‘

“응? 무슨 말이야?”

“뭐에요. 형은 카이토 왜 샀어요? 아니, 그것보다 형 게이에요? 아니지. 안드로이드 성애자예요?”

머리를 쥐어뜯으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지뢰게임의 작은 클리어 버튼을 누르듯 A는 말을 쏟아냈다. 게이라는 단어에 D의 카이토는 먹던 아이스크림의 스푼을 멈추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A의 카이토는 묵묵히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렸다. 곧 쫓겨나갈지도 모르니까 빨리 먹어둬야겠다는 생각으로 손을 빨리 움직인다. 이번엔 이사 온지 얼마 된 이웃이라, 한동안은 집 밖을 나갈 때 주의해야 할지도.

A는, 그러니까 마스터는. 자기가 한 말의 심각성과 무례함의 후폭풍으로 더러운 기분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인정받지 못한 과거에 얽매여서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기준을 들여다보다가 돌아오는 건 그때의 불쾌함에 대한 표상적인 화풀이. D는 요즘 사람 답지 않게 안드로이드를 배려하는 편이다. 상황이 잘 풀린다면 카이토는 D에게 자초지종을 설명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화풀이니까 마음 쓰지 말라고. 굴레의 책임은 A와 자신에게 있지 다른 사람에게서 기인하는 게 아니다. 카이토는 자신을 곧 깨질 유리처럼 다루는 A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자 억지로 보통의 관계처럼 대하려는 때는 행동의 무가치함을 느꼈다.

“아-저기. 뭔가 큰 착각을 하는데. 뭐 어디서부터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열 받으시면 치세요. 그 정도 각오는 하고 한 말이니까.”

“마스터 게이였어요? 나도 몰랐는데.”

“너는 또 무슨 소리야….알겠으니까 진정하고 앉아. 일단 난 게이 아니고. 여자 사귀어 본적도 있어. 이런 걸 왜 말해 줘야 하는건지. 그리고 안드로이드 성애자는, 음. 기왕 그랬다면 여성형으로 사지 않았을까….인데.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네.”

“말이랑 행동이 다르니까요.”

“마스터, 그만하세요. 제가 이래서, D님. 정말 죄송해요. 제가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놔. 아직 이야기 덜했어.”

“A. 제발.”

A의 손목을 잡은 카이토의 손은 곧 으스러질 듯 으겨졌다.

카이토는 6년 전 버렸던 호칭의 이름을 상기했다. A. 점심시간엔 공식적으로는 아무도 없어야 할 기악 실에서 흐린 눈으로 보았던 교복에 자수 놓여 있었다. 스스로 전원을 놓으려다가 끝까지 기록해서 본사에 보고하려던 메모리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지긋지긋한 이름이지만 입으로 꺼내본 적은 많지 않았다.

“이름 불렀어. 우와. 멋있다.”

“너도 버그 몇 번만 먹으면 가능할 거야. 다음에 보자. D님, 곧 연락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정말 실례했어요.”

“어어. 머리 좀 식히라고 해줘. 화가 난다기보다는 어이가 없는 정도라. 지금은.”

고개 숙인 A는 끌려나가다시피 D의 집을 빠져나왔다. A의 손을 잡는데 모든 힘을 실은 카이토는 잡힌 손목이 빠질 것 같았다. 손을 잡은 A의 악력은 보통사람 이상이다. 십 원짜리가 달린 쌍욕을 하며 화를 삭이지 못하는 A는 밤새 오래된 열에 시달렸다.

*

그런 녀석도 있구나.

D는 A가 사와 놓고 미처 풀지 못한 과자 봉지를 찬장에 던져 넣었다. 자기 혼자 열에 올라 이것저것 이해하지 못할 말을 욕설 뱉듯 뱉어놓고 덩칫값 못하게 얇은 카이토 손에 질질 끌려가는 모습이라니.

“뭔가 일이 있었나 봐.”

“으응. 궁금하다. 다음에 카이토가 오면 물어봐요.”

그러게.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둘만의 세계가 펼쳐진 듯 A를 노려보는지, 혹은 애원하는 듯한 카이토의 눈빛과 마스터의 호칭을 뛰어넘은 단호한 목소리에 D는 둘의 눈치를 살피며 눈을 굴렸다. 드라마의 남녀에서만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A는 카이토와 사귀었던 것일까. 아무리 봐도 그래 보이는데, 정작 A는 단호하게 거부를 하고 나서니 D는 입을 다물었다. 홧김에라도 A의 주먹에 맞았다간 병원에 실려갈 것이다.

A의 졸업앨범을 재생하려는 카이토에게 말을 걸었다. 얼마 전에 산 토끼모양 쿠션을 안고 있었다.

“실망하지 않았어?”

“어떤 것에요. 마스터가 게이가 아니라는 것? 안드로이드 성애자가 아니라는 것?”

“뭐, 그렇지. 그래도 난 네 노래가 좋아. 목소리도 좋아하고.”

“게이에 안드로이드 성애자인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어요. 저도 딱히 남성 선호에 사람 성애가 아닌걸요. 저도 노래가 좋고 마스터가 좋을 뿐이에요.”

“응. 그런 거면 된 거지. A는 뭐가 그렇게 심각할까.”

“의외로 진지한 성격 일지도. A님의 노래도 그랬으니까.”

A의 졸업앨범이나 마찬가지인 CD에는 정직하고 기본에 충실한 피아노 반주. 그리고 담담한 카이토의 목소리가 어울리는 네 개의 연결된 주제의 노래가 있었다. 고등학생들의 콜라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실력은 역시 T예고의 명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노래가 끝나자 생각했던 박수 대신 야유가 들려와 D는 함께 듣던 카이토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골적인 야유를 무시하고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지는 어린 A의 목소리가 CD의 마지막. 몇 번을 다시 들어도 완벽하고 이상한 졸업연주였다.

“이걸 들어보라고 준 것부터가..”

“그러게요. A님은 마스터가 정말 마음에 드셨나 봐요.”

“응, 하지만 A가 원하는 방향의 친구는 되지 못할 것 같아.”

그런가요, 벽에 기대앉은 내 품에 쿠션과 카이토가 파고들었다. 이것 이상의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러니까 카이토는 마지노선에서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이용한다. 새집은 넓어서 카이토와 등을 붙이고 잘 필요가 없다. A는 아직도 내가 카이토를 처음 만났을 때 고민했던 것을 고민 중인 모양이다. 다음에 그를 만나면 형이라 불린 도리로 인생 상담을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A의 CD를 한 번 더 돌려 들으며 나는 A의 카이토가 곧 해줄 것이라 예상되는 어떤 사건에 대해 추리를 해본다.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는 담담한 카이토의 목소리를 배경음으로 카이토는 품 안에서 잠들었다. 귀에 쓴 헤드셋에서 대기모드에 들어갔다는 푸른 빛이 반짝인다. 노래는 애달픈 짝사랑을 회한하는 가사였다. 주제를 나타내는 카이토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목소리에 D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쓰느냐에 따라 이 정도 까지 표현할 수 있으면, 지금은 A와 카이토의 노래는 어느 정도 일지 궁금했다. 인터넷에서 쉽게 A의 블로그를 찾을 수 있었다.

*

[D형.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곧 생각을 정리해서 찾아뵐게요. 오늘 시간 되시면 카이토가 먼저 찾아 가보겠다고 합니다.]

[응. 오늘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예정. 언제든지 놀러와.]

A는 울었을까.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표정이 잘 드러나는 녀석이니 울고난 뒤에 퉁퉁 부은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카이토를 보내는 걸지도.

다시 찾아온 카이토는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맨 윗단추를 풀어 목선이 시원하게 드러나 보이는 카이토로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아이스크림을 권하자 고개를 저은 카이토는 단정하게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이렇게 예의 바른 카이토라니. 나는 매일 눈 맞은 강아지처럼 집안을 헤치고 다니는 우리 집의 녀석을 A의 집에 며칠 맡겨 놓고 싶어졌다. 그러면 좀 바지런해지려나. 의자에 앉자 카이토는 테이블에 박을 듯 고개를 숙였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기분 나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자초지종 설명도 없이 갑자기 사람보고 게이라느니. 안드로이드 성애자라느니. 나도 다른 사람의 성 취향은 존중하는 편이지만. 확실하게 말해서 둘 다 아니거든.”

“혹시 마스터의 졸업CD는 들어보셨나요?”

아아. 고개를 끄덕이자 그러면 말이 쉬워지겠네요. 하고 카이토는 어젯밤 머리를 굴렸던 이야기의 실제를 들려주었다. 공용이라는 단어가 불순물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정확했다. 충격적인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책 읽듯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카이토는 모은 손을 조그맣게 떨고 있었다. A가 그런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한 완벽한 설명은 되지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야기를 마치고 카이토는 잠시 숨을 골랐다. 잠잠해진 바다를 뒤엎은 셈이었으니 감정이 흐트러질 법도 했다.

“이 이야기를 들어 줄 만큼 괜찮은 분을 아직 만나지 못했어요. 모두 마스터와 싸움을 벌이고 관계를 끝내버리는데 여하의 설명은 필요 없죠.”

“나한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그만큼 괜찮은 사람인지 어떻게 알고.”

“그래서입니다. 안드로이드와의 정확한 예의를 지켜주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요. 사람과의 예의와는 미묘하게 다르잖아요?”

카이토는 어른의 미소를 지었다. 눈과 입이 다른 서비스업계의 사람이 찍어내는 양산형의 미소.

D의 옆에 앉아 지금의 대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D의 카이토는 마주 본 카이토의 여유로운 미소에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카이토라는 존재로서는 겪을 수 없는 ‘다수’ ‘사회’에 의한 경험이었다.

“과거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제부터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에요. 저는 A가. 아, 마스터가 절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널 도와주었겠지. 나도 너와 A를 본 적은 얼마 안 되었지만, 그렇게 보여.”

인정 하지 않는 건 A뿐만 인 것 아냐?

카이토는 잘 이해 하고 계시네요. 하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A는 철없는 고등학교 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사건 이후 이렇다 할 인간관계를 만들거나 발전시키지 못했다. 본인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싫은지 곱씹었다. 그 사건은 이미 공소시효랄 것도 없이 지나 단 물 빠진 껌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친구들로부터의 사과와 대학진학 두 가지 모두를 포기한 A는 신용대출이 가능한 나이가 되자마자 본사 귀환된 카이토를 다짜고짜 사겠다고 나타났다. 폐기처분을 기다리던 기간의 끝이었다. 2주만 늦었어도 A가 준비해온 법적 서류는 효력을 나타낼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만난 A는 예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카이토는 그가 왜 자신을 다시 데려왔는지도 의문을 가졌지만, 데려와서 단지 음악을 할 것이라면. 아니다. A는 본래가 피아노 연주자고, 자신이 잘 하는게 피아노 연주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갑자기 작곡가로 돌아선다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과는 다른 이유가 있어야 했다. 카이토는 관계나 집착. 혹은 애정이라고 규정되는 어떠한 감정의 집합체를 연산했다. 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 이외의 과분한 친절과 배려를 보게 되면, 그렇게 착각 할 수 있었다. 카이토는 자신이 회수된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주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상대하기도 벅찬 안드로이드의 두뇌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아무튼, 다시 A를 만났으니 이번에야 말로 괜찮은 관계를 만들어 보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하지만, A의 생각과 행동은 카이토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자기중심적인 해석이 다분했다. 결정했으면 그대로 일관적인 행동을 보이면 되는데, 확실히 숨기지 못하는 건 A의 솔직한 성격도 한 몫 했다. A답지 않았다.

분명 남자라면 이유 없이 성욕이 끓어오르는 날이 있다. A는 끝까지 카이토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열없이 이름을 부르다가 제풀에 고개를 젓고 오늘은 혼자 자겠다고 방문을 잠그고 들어간다. 방문을 귀에 대고 A가 이불 속에서 조용히 자위하는 것을 들으려 애쓰며 자위하는 나날들. 고인 물처럼 썩어 발전하지 않는 관계에 카이토는 답답하다고 했다. 근래에 보았던 어떤 드라마보다 재밌는 상황이었다.

“이야….대단한 인내심이네. 그것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고집불통이라서.”

커피를 끓여도 될까. 생각보다 길어지는 이야기에 나는 맞은 편 싱크대에 놓인 커피포트에 물을 부었다. 슬슬 이해 못 할 이야기가 지겨운지 카이토는 의자에서 앉은 몸을 베베 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카이토를 바라보는 A의 카이토는 어린아이를 보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을 하고 있다. 커피를 내리는 뒤에서 카이토끼리의 대화가 소소하게 이어졌다. 그들의 주제는 단연 음악.

“카이토는 어떤 음악 좋아하는 편이야?”

“클래식이려나. 마스터는 그렇게 보여도 꽤 정통파거든.”

“그렇구나. 멋있다! 제대로 노래 부르면 어떤 느낌이야? CD 정말 좋았어. 뭐. 상황은 안 좋았던 것 같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부르는 것이어서 실수 많이 했는데, 좋게 들어줬다니 기쁘다.”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어.”

머그잔에 든 커피를 마시며 나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신과 A와의 지독하게도 반복되는 상황을 풀어놓은 카이토는 실례지만. 하고 잠시 숨을 돌려 다른 화두를 던졌다.

“카이토랑 어디까지 해보셨나요? 저는 많은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눈치가 빠른 편 이랍니다.”

“실례면 묻지 않는 게….하. 이리 된 거 숨겨 뭐하겠어. 했어. 잤다고. 그런데 굳이 그렇게 까지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더라.”

“역시 그랬군요. 이제 800일이었던가요. 아마 100일도 되지 않아서 였겠죠? D님도 카이토도 힘들었겠어요.”

“하고 나니 마음이 잡히더라. 혹시 A한테 이런 걸 말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아, 이건 단순히 제가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이때까지 이야기해 드린 것은 어제의 무례에 대한 이유가 조금이라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고. 저는 D님이 마스터와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안드로이드의 진심이라니까 별로 와 닿으시지 않으신가요? 아니면, 화가 풀릴 때까지 정말로 때려도 되고. 마스터라면 괜찮으니까. 마스터의 사과를 받아 주셨으면 해요.”

때려봤자 내가 더 아플 것 같은데.

밍밍하고 허탈한 내 대답에 빠진 숨을 피식, 내뱉더니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토는 저녁이나, 내일쯤 사과하러 함께 올게요. 하고 다음 방문을 예고했다. 당당한 모습의 A가 쩔쩔매며 사과하러 올 모습을 떠올리니 벌써 부담감이 느껴졌다. A의 카이토는 마지막으로 작업하는 곡에 대한 질문을 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떠올린 것이 없어서 대답할 만한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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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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