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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21 Blue ashes 4(完)
  2. 2014.09.21 Blue ashes 3
  3. 2014.09.21 Blue ashes 2
  4. 2014.09.21 Blue ashes 1

Blue ashes 4(完)


비가 내렸다.

여름이지 참.

 

 

사소한 것을 기억해 내버린 무감각한 목소리로 비가 내리는 거실의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무심하게도 흐른다. 타박타박 떨어지는 빗소리가 가득 메우는 눅눅한 거실에 나올지도 오랜만이다. 낡은 담요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놓고 담요 끝자락을 만지작 거리는 카이토는 눈 한번 깜빡이질 않고 유정의 사그러진 등을 바라본다. 렌즈가 움직이는 미세한 소리에 유정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카이토의 시선이 움직였다는 것은.

 

“마스터, 약 먹을 시간이에요.”

“아-. 아. 조금만 있다가.”

“으음..곤란하네요. 제가 어떻게 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닌데.”

“짜인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거니까?”

 

으응. 카이토는 고개를 끄덕인다.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니, 당연히 인간인 자신을 이기지 않으려 할 것이란 것은 유정의 큰 착각이었다. 정해진 시간을 넘어서는 순간 늘 생글거리는 얼굴은 가면을 벗고 무표정하게 유정의 턱을 잡는다. 손가락을 물면 이가 시린 금속감이 느껴졌다. 죽을 힘을 다해 끊어질 듯 물었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밀려들어오는 알약의 더러운 삽입감이 틀어막은 식도를 타고 들어온다. 그럴때면 카이토는 벽 뒤의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으로는 초기 프로그래밍 된 매크로를 중얼거렸다.

 

“약 시간은 이십분 이상 지연해서는 안 됨.”

 

인공이건, 창조이건. 그것도 결국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살아갈 뿐이다.

과거 몇 번의 사투를 생각하고 그럼, 십구 분 뒤에. 하고 타협안을 내놓은 유정은 자신의 옆자리를 내주었다.

 

“비가 오네요.”

“그러네. 눈이 부시지 않아서 좋아.”

“좋다는 단어를 오랜만에 쓰셨어요. 기뻐요.”

 

십구 분. 착실하게 시간을 체크하며 손에 쥔 약봉지를 바닥의 물 컵 옆에 내려놓는다. 어깨에 얹은 회색빛 가디건의 빈 끄트머리를 잡았다. 팔짱을 낀 채 먼 곳을 바라보는 유정의 시선에는 아무것도 맺히지 않는다. 풀린 흑청빛 눈동자에 습기 찬 유리창 너머의 세계가 투과된다. 카이토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만한 여지를 찾지 못했다. 유정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심심하면 초기화되는 기억덕분에 1년 정도 세상에 노출된 인공지능은 깔끔한 초기화나 마찬가지인 수준이었다.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며, 보슬거리는 가디건의 감촉을 저장했다. 그것 또한 십 수번은 넘게 저장했던 기억 이겠지만. 메모리는 회사의 깊숙한 금고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삼분 남았어요.”

“그래. 자고 나면 비가 그치려나.”

 

언제 이 비가 그칠까.

언제 이 삶이 끝날까.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삶을 마칠 수 있게 되는 때가 올까.

자신의 선한 심성을 아버지는 철저하게 이용한다.

 

옭아매는 약기운이 올라오기 전에, 약을 삼킨 유정은 걸음을 휘적대며 침실에 들어가 하얀 이불에 스며들었다.

 

한참 창밖을 바라보던 카이토는 배운 적 없는 노래에 대해 생각한다.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3시간 15분짜리 CD에 든 것 이외의 노래는 알지 못한다. 유 회장이 카이토를 선택한 것은 다른 안드로이드에 비해 ‘노래’라는 덕목에 의해 최소한의 감정을 가졌다는 얄팍한 이유에서 였지만, 정작 시범기동이후로는 제대로 불러본 적이 없다. 노래가 어떤 것인지, 그래서 잘 알지 못한다.

 

 

*

 

 

 

잠에서 깬 유정은 카이토의 논리회로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어기지 말아야할 금기는 어떤 것이 있는지. 혹시 말을 해서도 안 되는 금기가 있는지에 대해서 물은 후, 침대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그런걸 왜 묻느냐고 불안하게 손가락을 만지작대던 카이토는 드물게 웃는 유정의 모습에 아이스크림 녹듯 사르르 녹아 자기가 아는 모든 금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시나리오는 매번 금기에 막힌다. 머리를 긁적인다. 쉽지 않다.

 

“사용자의 죽음이 최고 금기라니.”

 

딱 그것만 해주면 되는데.

자신을 살해해 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 모두가 유정의 죽음에 대한 당위성에 동조하면서도 도와주지 않았던 것처럼.

 

“그럼 사용자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은?”

“그건 인간들 사이에서도 죄로 통하는 것 아닌가요?”

“맞아. 살인방조죄. 아버지가 붙여준 사람들이 가장 신경 쓰는 죄목이지.”

 

왜 그렇게 죽고 싶어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지리멸렬한 대화에 카이토는 기지개를 폈다.

 

“나는 살 이유가 없어.”

“그럼 죽으실 이유는 있나요. 뭐.”

“많지. 나 하나만 사라지면 편해질 사람들이 많아.”

 

너도 그렇고.

마지막 문장을 마음에서 지운 유정은 그만 나가봐. 하고 손을 휘저었다. 침대 가에 앉아 있던 파란 자국이 알 수 없는 웃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저번의 투신은 카이토가 잠들어있을 때 몰래 집을 빠져나가 벌인 것이었다. 네 달간 병원 신세를 지고 아버지의 경호원 손에 붙들려 돌아와보니, 집 현관에는 안에서부터 번호를 알아야 열 수 있는 도어 락이 설치되어 있었다. 번호는 카이토가 아버지에게 다녀 오는 날 마다 바뀐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철저함을 실감한다.

 

다시 카이토를 방으로 불렀을 때, 카이토는 낡은 라디오를 손에 쥐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유정도 들어본 적이 있는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래를 불러보고 싶냐고 묻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이전의 본능이지요. 이것도.”

“그렇구나. 그보다, 우리 하늘 보러 가지 않을래?”

 

하늘, 보고 싶다. 완전 보고 싶어. 유리창에 비친 거 말고. 옥상에서 보는 하늘.

유정은 곁에 앉은 카이토의 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1. 사용자의 원함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시행한다.]

 

“카이토가 옥상까지 데려다 주면 정말 기쁠 텐데. 카이토랑 같이 보면 더 행복할거야.”

“행복..와아, 정말요? 가요. 얼른!”

 

[2.사용자가 행복해지는 것이 안드로이드의 행복.]

 

미안해.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팔을 잡아 부축하자 유정은 못이기는 듯 회색 가디건을 받아 들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현관의 비밀번호를 능숙하게 치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견디기 힘든 오후의 노을이 쏟아졌다. 나른하게 밀려오는 잠을 이겨내고자 살짝 쥔 손을 굳게 잡았다. 곧 영원히 잘 수 있다. 졸음은 죽음의 전조일지도.

 

“하늘이 멋지네요. 옥상으로 올라가 봐요.”

“그래. 고마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카이토는 신난 듯 공간 안의 거울에 비친 유정과 자신의 모습을 보고 키득댔다. 부축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이 뼈대만 남아 허수룩하게 큰 가디건에 얇은 허리가 잡힌다.

옥상까지 올라가는 계단에서 유정은 두 번을 멈추고 가쁜 숨을 골라야만 했다. 텃밭과 하늘 정원이라고 이름 붙여진, 관상용 식물이 심어진 옥상에 들어서자 넓게 노을이 구름에 퍼지고 있었다.

 

감탄사를 내뱉는 카이토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떨리는 입으로 유정은 시나리오의 첫 페이지를 넘긴다

자신이 주인공인 지독하게 길었던 연극의 마지막 장을 .

 

 

“카이토. 우리 같이 죽자.”

 

유정은 카이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방관도, 동조도 아니잖아.

너의 금기를 깨지 않아. 정말로 미안해. 하지만 이거 밖에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유정은 고해성사하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운이 좋다면, 전체수리가 될 수도 있어. 물론 사용자계약도 사라지도록. 내가 유서에 꼭 그것만은 해달라고 부탁했거든. 아버지가 들어 줄진, 사실 잘 모르겠지만.

 

 

카이토의 허리를 쥔 팔이 떨려왔다.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힘으로 가능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혼자 옥상 난간에 뛰쳐들 것이다. 유정은 각오로 입을 꾹 깨물었다.

 

“네, 그렇게 해요.”

 

카이토는 활짝 웃었다. 푸른 머리칼이 오후의 노을에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 축 쳐져 보이던 머플러가 바람에 가볍게 흩날렸다.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하늘이 정말 예쁘네요. 어디, 난간에서 뛰어내리 실건가요?”

 

허리를 잡은 것은 유정 쪽이었지만, 철조망 없는 난간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끌려가는 꼴이 되었다. 난간 위로 올라 갈 수 있도록 유정의 허리를 받쳐주고, 올라가 앉자 낑낑대며 자신도 올라가 앉았다. 발밑에 훤한 공간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길.

기도를 마친 유정은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물장구치듯 발을 공중에 흔들고 있었다.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음.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이걸로 마스터도 행복하고, 마스터로 인해 행복해질 사람도 여럿 생기나요?”

“결론적으로는.”

 

그럼 됐어요.

손잡아 주실래요?

 

유정은 수족관에서 상어를 바라보았던 유년시절의 기억. 혹은 꿈의 일부분을 떠올린다. 지느러미가 잘리면 배를 내밀고 바다위에 둥둥 떠오르는 상어의 시체를 건져 올리는 어부의 희망찬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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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ashes 3

긴것/Blue Ashes 2014. 9. 21. 17:32

Blue ashes 3


환상은 환상 일 뿐.

 

 

이제 유정은 취미용으로 만들어진 약한 보컬로이드의 신체로서도 휘둘러지는 가느다란 손목에 잔뜩 그어진 붉은 흔적들과, 6개월 전의 부주의로 인한 투신-이 일로 카이토는 한동안 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때 얻은 부셔진 몇 개의 갈빗대가 이제 겨우 나아가고 있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몸을 가졌기에.

목을 조른다고 해서 카이토가 죽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불에만 잘 못 스쳐도 찌릿하게 통증이 밀려온다. 온 몸이 매일 두드려 맞은 것처럼 욱신거려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났다. 주먹을 쥐고 때리면 오히려 유정 쪽의 데미지가 더 컸기에, 손을 내민 카이토를 잡고 손톱에 남은 힘을 주었다.

 

 

“아야. 손톱 좀 깎아 드려야겠다. 놓아보세요.”

“죽어..”

“저도 마스터가 원한다면 그래드리고 싶지만. 아직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카이토를 보면 새삼 자신이 얼마나 바닥으로 떨어졌는가를 실감한다. 그 애처롭다는 물젖은 푸른 눈빛에 쾌감을 느낀다. 손톱이 밀려들어가 카이토의 손등에 파인 초승달 모양의 자국이 몇 개 남겨졌다. 살이 다시 돌아오는 데는 한참 시간이 필요했다. 카이토는 자신의 손을 구겨 넣는 유정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유정의 원망스러운 눈길을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너 때문이야..”

“어떤 것이요?”

“나는, 너를. 볼 때마다..”

 

 

내 모든 인간성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야.

 

 

 

“네가 살아있는 이유가 나라면. 내가 이 지옥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에 네가 필요해 진거야.”

 

 

다시 염분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너만. 너만 없었으면. 유정은 짧은 단어를 토해내며 굵은 눈물자국을 누인 베게에 쏟아낸다. 몸을 웅크리고 조절되지 않는 눈물샘을 끌어안았다. 아이처럼 울고 싶지 않은 발악은 윽윽대는 소리로 이불 밖으로 새어나왔다. 원인 없는 깊은 한이 유정의 몸 깊숙이 배어나온다. 형태를 띠고 있다면 그것은 아주 무거운 검은 빛일 것이다.

우울은 새파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미안해요…….정말. 진짜 죄송해요. 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아요.

 

 

 

카이토의 밝은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인간의 우울은 안드로이드에게는 전염되지 않았다.

유 회장은 사람 몇을 붙여 유정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몹쓸 짓이란 것을 곧 깨달았다. 훨씬 더 인간적인 도구를 사용하자 매 달 정기적인 보고는 신뢰감이 높아졌다. 메모리를 이용한 감시영상을 잠깐씩 돌려보고 카이토의 객관적인 평가. 대처와 유정의 반응 등을 들은 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땐 똑똑했는데. 오래 두어 썩은 과일을 뱉는 모양새로 혀를 찬다. 별도로 들인 몇 개의 프로텍트를 다시 걸어 잠그고 카이토를 내보내면, 헤집어진 머릿속이 어떨떨하게 흔들려 멍한 표정으로 굽은 인사를 하고 나선다.

 

 

 

"너의 주인이 누구인지, 항상 기억하길 바라네."

"네, 알고 있어요."

 

 

집에 돌아오면 유정은 아버지의 안부를 묻다가 이내 헤집어졌던 머리를 잡아 바닥에 내리치고 그 위에 유리컵을 던졌다. 우습게도 사람흉내를 낸 피부아래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드렸구나. 눈을 멀게 하면 나를 기록할 수 없게 되니?"

작지만 날카로운 펜 끝을 파란 안구에 올곧게 가져간다.

 

"서비스 센터에 가게 되겠죠. 제 안구는 비싼 편이랍니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지 않은 카이토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제 머리를 깨부수고, 산산조각을 내도 메모리는 자동 연동되어 전해지니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 이건 그냥 화풀이지."

 

 

아신다면 다행이네요. 툭, 바닥에 고개 숙인 카이토는 유정의 기분이 풀릴 때 까지 누워 있다가 한참 뒤에 조용히 털고 일어나서 유리조각을 치웠다. 피부를 봉합하러 서비스 센터에 다녀오려면, 유정이 약을 먹고 잠든 틈을 이용해야 했다.

 

 

 

 

 

 

*

 

 

 

 

 

유정이 의미 없는 눈물을 쏟는 동안 카이토는 욕조에 물을 받았다.

목욕은 위험하다. 잠깐이라도 죽을 만한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나서는 유정에게 많은 물에 잠기는 시간은 절호의 기회였다. 가능하다면 샤워만 하는 것이 편했지만, 목욕은 유정이 몇 안 되게 카이토에게 '하고 싶다' 고 조르는 것이었기에 매 번 이기지 못하고 미지근한 물을 채워 손을 담가 온도를 측정했다. 뒤에서 조용히 타월을 허리에 감싼 유정이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모시러 갈려고 했는데, 오세요."

"응. 너무 울어서 머리 아프네."

 

 

짧은 욕조가 아니었지만 꽤 큰 키인 유정에게 그 욕조는 다리를 접어야 상반신을 담글 만큼의 크기였다. 무릎을 세우고 미지근한 물과 귀에 스며드는 물의 소리에 집중한다. 무심코 기분 좋다.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 그 말을 듣게 되면 카이토는 일주일 내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것이다. 귀찮아. 어깨까지 물을 담그려 몸을 숙이자 욕조 옆에 쭈그려 앉은 카이토가 음. 하고 불안한 듯 몸을 움직였다. 입을 떼려다 마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유정이 가장 카이토에게서 짜증난다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어차피 자기 말을 듣지도 않을 거면서, 눈치보고 신경 쓰는 척은 또 뭐람.

 

 

 

"왜 또.."

"너무 깊게 들어가시는 것 같아서요."

"나 죽을까봐 걱정이야?"

"으음…….나오세요, 조금만."

"내가 죽으면, 너의 쓸모도 사라지겠지. 알고 있어. 한동안은 죽지않을거야."

 

 

어깨를 잡는 카이토의 손을 뿌리치고 유정은 물에 머리끝까지 담갔다.

카이토의 불안한 소리가 물을 굴절한다. 미지근한 물 안은 태초처럼 따뜻하게 몸을 감싸온다.

 

이대로 물 안에서 평생 살 수 있는 어떤 물고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상어라든지.

 

 

공기는 자신과는 맞지 않게 가볍고, 천박하고, 불순하다.

유정은 카이토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을 흔들며 떨 때까지 물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손에서 떨어지는 물을 닦지 않은 주먹으로 머리를 내리쳐도 카이토는 나오셔서 다행이라고, 젖은 어깨에 매달려 흐느끼며 이상한 재회를 기뻐했다. 불필요한 헌신과 호의에 유정은 머리끝까지 진절머리가 나고 있었다. 혼자 있으면 생길 리 없는 배타에 대한 파괴욕구가 솟아올랐다.

죽기 전에 이 기계는 내손으로 부수고 말겠다는 남은 하나의 목표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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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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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ashes 2

긴것/Blue Ashes 2014. 9. 21. 17:31

blue ashes 2

 

물속에서 헤엄치는 상어를 본다. 

꿈이었다. 꿈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독한 약기운이 코를 스쳐가는 정신의 환각이 시간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죽어버린 이성 아래에 잠자던 무의식이 어릴적 기억의 단편이라도 꺼냈나 보지. 

상어는 유유히 물속을 헤엄치며 수족관의 다른 물고기들 위에 군림한다. 수족관 밖의 시선은 그러하였다. 회피하는 군중위에 당당히 행차하는 군주가 어떠한 것을 군림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방치속에서 자라난 가시덤불이 가득한 월계관에서는 영광스럽지 않은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다. 몽롱한 약기운에 받쳐 풀린 눈동자를 수족관의 표면에 가져다 댄다. 상어는 멈추지 않는다. 

유정은 어릴때에 읽었던 책의 한구절을 뇌에서 기억해낸다.

 

[상어는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을 멈추면 죽는다.]

 

장면은 연관성 없이 고장난 TV채널을 마구 돌리는것 마냥 불쾌하게 의미없는 정보를 쏟아낸다. 약기운이 언제쯤 떨어져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될까. 약을 먹으면 죽고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지 몰라도 몸을 죽인다. 신체와 정신을 떨구어 놓는다. 인형처럼 침대에 늘어져 있을것이다. 자신의 진짜 인형은 침대 밖 거실에서 다음 약시간과, 약간의 충전. 자그마한 노래등을 일상 삼은채로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그 명령은 유정의 것이 아니었다. 

 

'정말 죽고싶어 미치겠다.'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은 쓰레기들로 가득차버린지 오래로, 압축되지 않는 어리석은 후회와 불쾌한 과거가 여기저기 늘어나 발 딛는 걸음 마다 돌멩이 처럼 채인다. 던져버리고 걷어차버려도 그것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죽고싶어. 죽어야겠다. 세포자살을 하는게 좋겠다. 온 몸의 세포가 한번에 녹아내려서 개체를 사라지게 하는게 옳다. 나는 옳은 일을 하는것이 옳다. 

 

어디선가 알람소리가 들린다. 유정이라는 세계의 멸망을 알리는 신호소리라고 믿고싶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세계. 어디로도 끼일수 없는 교집합과 무관심속에서 군림하는 군주를 가진 세계따위.

후련하게 자기증오의 시간을 가진 유정은 알람의 소리가 끝나자마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카이토의 발가락을 겨우 볼정도로 작게 눈을 뜬다. 가시지 않은 약기운과 이미 세월을 함께 해온 무기력함이 굳게 짓눌러 있었다. 카이토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멜로디는 매번 똑같은 것이었다. 집 안을 굴러다니는 낡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구식의 노래. 그것을 똑같이 모사한 구식의 멜로디가 입안의 녹음기에서 약간의 기계음과 함께 흘러나온다. 손을 까닥여 의사표시를 했지만 뒤돌아선 카이토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멜로디의 끝을 잡은채로 약봉지를 비벼 바스라지는 소리를 냈다.

 

"음, 음. 자는 척 하시지 마세요, 마스터."

"주인...이라고 생각을 하긴 하니?"

"생각 이전의 본능이랍니다."

 

입을 열자 식도를 타고 약냄새가 밀려올라온다. 오늘 아무것도 안먹었던가. 어제도, 그제도. 탈수가 오기 전엔 열이 오르는 몸때문에 카이토가 눈치를 채고는 혈관을 잡아버린다. 강제로 들어오는 영양분을 곱게도 받아먹는 욕망스러운 신체에 저주를. 듣지 않는 유정을 무시하고 카이토는 가장 일상적인 대화를 시작한다. 오늘 날씨 어떠세요- 기분은? 

 

건조한 눈을 힘주어 누르자 둥그러진 눈은 기괴하게 웃는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보다 최악일수는 없을 정도로."

 

 

*

 

 

마지막으로 만났던 아버지의 손에는 처음보는 안드로이드의 손이 겹쳐있다. 아무렴 어때. 침대난간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행위에 집중한다. 아버지가 망가져버린 아들새끼 대신 대용품이라도 키워보려는 작정인걸까. 그럼 이제 내 역할은 끝난게 되겠다. 막을 내려주세요, 아버지. 

 

그 사이에서 커튼콜을 외치는 카이토를 목졸라 죽이는 환상을 여러번 본다.

환상이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빈다.

널 죽여야 그 다음 차례가 내가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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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ashes 1

긴것/Blue Ashes 2014. 9. 21. 17:30

Blue ashes 1 

 

희석된 눈물을 닦아주려던 카이토는 입술을 올리려다말고,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카이토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알지 못할정도로, 망가진 기계처럼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을 바라본다. 유정은 약을 먹고 나서도 우는 날이 많아졌다. 어떠한 일인지, 카이토에겐 말해주지 않을 작정으로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의자에 위태롭게 걸터앉아서 소리없는 눈물을 식탁에 떨구었다. 숨이 멎은듯 조용하게, 단단한 식탁에 떨어지는 액체들이 모여서 하나의 강을 이룰지도 모르겠다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카이토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오늘은 저리가라고 손을 쳐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는게 더 정확했지만. 어깨를 건드리려다 공연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커다란 물에 섞인 숨소리가 막혀 흐르지도 못하고 고여있는 유정의 감정을 간질였다.

 

얼굴을 감싸쥔 양 손이 개화하자, 벌개진 눈끝에서는 하염없이 흘렀을 진득한 눈물이 얼굴에 범벅이 되어있었다. 망가진 얼굴을 보는건 카이토도 괴로워서, 쳐다보지 말라는듯 호소하는 눈빛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열기가 떨리는 어깨에서 부터 손끝까지가 어떠한 덩어리로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옆에 있으니까, 큰소리로 목놓아 울지 못하는것은 아닐까. 숨이 막힌다. 시간은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흘러간다. 차라리 어딘가로 사라지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것 조차 허락을 받을 수 없지만.

 

'웃는 얼굴을 본게 언제였더라.'

 

의자 등받이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함께 웃었던 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기억으로 밖에 회상할 수 밖에 없다. 눈 언저리가 쓰려와 카이토는 눈을 비적댔다. 같이 울었던 날도 있었다. 그것을 '같이' 라고 한다면 장소의 동일성 밖에 없었지만은. 혹시나 자신이 울게되면, 유정이 그치진 않을까 하는 작은 믿음에서였다. 자신이 그만큼의 공간을 허락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조그만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 소나기가 그친듯 뚝. 멈춰선 순간이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아직 물기어린 검은눈동자가 휘어졌다. 근 두시간을 울어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척, 장식장 위에서 티슈를 꺼내 건넸다. 지친듯 하늘거리는 손으로 건네받아서는 티슈를 꽉 주먹 쥐었다. 카이토는 다시 하나를 빼내서 눈 가를 닦아주었다. 짧은 한숨에서 남은 한이 밀려왔다. 목소리에 울먹임이 역력하게 전해졌다. 

 

"보지마. 차라리 눈을 감던지 해줘."

 

오랫만에 듣는 유정은 물기어린 목소리로 건조한 명령을 내린다. 더 울고싶어도 남은 기운이 없었다. 저리 가라고 말해도 가지 않을꺼지. 난처한듯 카이토는 으음, 하고 앓는 소리를 했다. 

 

"그것보다 더 상위의 명령이 있으니까요."

"알아, 죽지 않을께."

 

죽지 않아서, 너의 필요를 계속 만들어 주도록 할께. 

잔인하게도.

무거운 숨이 따갑게 기도를 타고 들어왔다. 유독가스를 마시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억지로 밀려오는 숨을 받았다.

카이토는 여전히 티슈를 든채로 어떤 표정을 지을지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화가 나려다가 푹 식어버린다. 

화낼 상대도, 목적도 아니란 것은 잊지않았다. 

그저 그곳에 카이토가 있을 뿐이었다.

다만 그랬다.

 

 

*

 

 

 

끝내 유정은 몇 마디 효력없는 단어를 끊어질듯 말듯 억지로 토해내고는, 들어오지마. 다섯글자만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부탁에 가까운 명령을 저녁 약 시간 전 까지는 지켜주기로 했다. 지쳐서 잠에 들어주면 좋으련만, 침대에 누워서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무거운 생각을 수집하다간 가벼운 이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확 내던져버릴것이다. 힘이 좀 남는 날에는 벽에 물건이 깨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깨져서 조각이 날만한것은 유정의 방에서 거의 치워진 뒤였지만 고집스레 책이며 하다못해 플라스틱 컵을 던져버린다. 벽에 부듸치고도 그대로 모양을 유지하면 바닥에 내리쳐서라도 균열을 내고야 만다. 썩어 문드러지고 다 망가진 자신만큼. 올곧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카이토를 보지 못하게 된걸 지도 모르겠다.

 

거실엔 카이토의 생활공간에 해당하는 깔려진 담요위에 앉아서 줄곧 시계를 쳐다본다. 6시반엔, 저녁과 저녁약. 신경은 수직선상의 방에 꽂혀있다. 조그만 소리에도 끔쩍끔쩍 고개를 돌려 집중력을 유지했다. 문가에 앉아있을까 고민하다가 들키면, 힘은 없어도 악바라진 손으로 머리칼을 쥐어채 벽에 내리친다. 방안의 물건들과 카이토의 취급은 똑같았다. 이마에 핏줄기가 흘러내리면서도 손은 괜찮냐고 물어보고는. 좀처럼 망가지거나 하지 않아서 분한 기분이 들 뿐이다. 약기운이 사라지면 카이토를 뿌리치고 죽어버려야지. 꼭 그래야지.

커다란 배개에 얼굴을 파묻고 한계까지 숨을 참았다. 하얗게 바래진 머리는 언제쯤 생각이란걸 하지 않게 될런지,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원망, 후회, 자책, 끝없는 종말같은 미로속에 웅크리고 앉은 검은 동물은 하도 보지못한 빛에 시력을 잃어버린다.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세번 횟수를 반복할때까지 유정은 숨을 쉬지 않았다. 사라져버리고 싶다.

쓸데없는 약기운에 죽은듯 잠들기도 싫고, 바작바작 말라가는 입을 닦아주는 카이토도 보기 싫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개나 시트에 입술에서 나온 피가 말라붙었다. 먹으라면 먹고, 자라면 자는. 누에고치 같은 생활이 역겨워진다. 아버지가 마지막의 알량한 배려로 붙여준 안드로이드는 억지로 생을 구축한다. 

 

"마스터, 약.."

"듣고있는거 알아요."

"들어갈게요."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흘긴 카이토는 들리지 않게 조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만났을때도 바짝 마른 몸이 점점 사라질듯 부피를 줄여간다. 삐쩍 튀어나온 앙상한 목덜미가 푹 들어가있었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서 검은 머리칼을 살짝 건드리면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다.  

 

"안먹어."

"네에."

"안먹을거야."

"소온. 아니면 입에 넣어드릴까요?"

"노려봐도 안무서운데."

 

그 증오가 저를 향한게 아니라서, 매서운 눈빛을 가뿐히 넘겨낸다.

오늘은 왠지, 한 번에 입을 벌려 주었다. 꾸울꺽. 하고 삼키는 시늉을 한 카이토는 아, 삼키셨어요? 하고 입안을 확인 받고서야 만족한듯 미소지었다. 칼만 있다면 저 얼굴을 다 찢어놓고 싶어진다. 

 

"나가."

"알겠습니다. 주무세요."

 

떨어진 이불을 챙겨 침대머리맡에 접어 두고는 동굴을 나가듯 쏙 빠져나간다. 

이미 바닥에 최악을 보인지는 오래 되었다. 유정은 더이상 잃을것도, 얻을것도 없었으니까.

곧 밀려올 몸의 수면에 정신을 감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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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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