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지와 0와 1
PC가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선 성준은 마음이 급했다. 발가락으로 버튼을 어물쩍 눌러보다 얼른 손가락을 전원버튼에 가져갔다. 소생한 감각을 제공한 것이 이 안드로이드라면, 찰나의 순간에 이 정도라면 제대로 움직일 때는? 그는 PC설치를 먼저 해준 협회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PC를 키고 카이토의 CD를 넣자 설치 화면이 나타났다.
[Install을 원하시는 보컬로이드의 단자와 PC를 연결 해주세요.]
“단자? 잠시만.”
그는 거실로 뛰어나가 카이토의 다리를 붙잡아 질질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비슷한 크기의 사람보다 묵직한 기계의 몸을 PC옆에 눕혀놓았다. 그는 파리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친구가 자신의 가사도우미 안드로이드를 충전하던 장면을 기억해냈다. 그 안드로이드의 단자는 목 뒤나 허리 뒤에 있었다. 성준은 파란 머리카락이 덮인 목덜미를 넘겨보았다. 네모난 모양이 난 홈을 눌러 여덟 개짜리 핀의 단자가 나타났다. 제품명 인 듯 한다섯 글자짜리 코드도 각인되어있었다.
[시리얼 코드를 입력해주세요]
PC화면에 다음 창이 나타났다. 시리얼코드. 정품 안드로이드라면 한 번 등록된 시리얼 코드는 다시 사용할 수 없었다. 이전의 코드를 안다면 재설치는 가능했지만, 성준이 발견한 것은 기체 하나와 설치 CD가 고작이었다. 가만히 반짝이는 화면을 바라보다 그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야속하게도 단자를 연결한 안드로이드는 묵묵부답이었다.
“젠장...하긴. 이 비싼 걸 공짜로 얻을 수 있을 리가..”
시내에 나가서 정품 CD를 하나 더 사서 시리얼 코드를 하나 더 받아오는 수밖에.그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본체의 CD를 꺼냈다. 손가락으로 집어내자 그의 눈에 숫자와 알파벳이 섞인 글자들이 들어왔다. 무언가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마치 ‘필요하신 분은 마음껏 가져가세요.’ 라며 남겨진 것처럼.
“KD56-190G-.."
[Install을 시작합니다. PC를 종료하지 마세요.]
우웅, 하고 기계의 고동소리가 울렸다. 인스톨은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설치 바가 조금씩 올라가자 앉혀놓은 모양새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기계가 발가락부터 작게 움찔거렸다. 그는 신기하게 기계가 깨어나는 모습을 관찰했다. 작은 부품들로 이루어진 조각들. 미세하게 조정되는 근육이나 구성 물질은 달라도 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넓적다리와 무릎은 연결부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제까지의 흥미를 제쳐놓아도 신기한 모습이었다. 곧 안드로이드는 고개를 들고, 아까 보았던 짧은 얼굴을 드러냈다. 성준은 침을 삼키고, 긴장된 가슴으로 그것과 마주쳤다. 양쪽이 다른 파랗고 잿빛의 눈동자로 카이토는 입을 열었다. 기계음과 사람의 목소리가 섞인 기묘한 목소리.
“인스톨 완료. 시범 가동완료. 신체기능 78% 작동 가능합니다. 마스터 인식을 하시겠습니까?”
“오...그게 뭐야. 아무튼 해줘.”
“동공 인식 및 안면 인식을 시작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김성준. 김, 성준.”
그는 얼떨결에 이름까지 내뱉었다. 카이토는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오롯이투명한 눈에는 성준의 인영이 비쳐보였다. 동공에서 파란 줄이 스치더니 카이토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인식 완료. 감사합니다. 재부팅이후 시스템이 적용됩니다.”
조용히 카이토의 내부에서는 어느 세계가 소리 없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지평이 나타났다. 아직은 새하얗기만 한, 음표 한 자락 없는 오선지와 0와 1의 바닥이 나타났다. 완벽하게 삭제되지 않은 메모리를 의식 아래로 내려버린 카이토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음의 가장 아래에서 끝까지 소리 냈다. 음이 가진 본원의 것에 약간씩 비켜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조정이 오래된 탓이었다.갓 태어난 아이보다는 많은 것을 가진 채로. 그러나 무지한 상태에서 카이토는 눈을 떴다.
“...마스터?”
“어...? 왜 아무렇지도 않지. 이름이 뭐더라. 카이토..”
“네, 마스터?”
성준은 일부러라도 물이 차오던 감각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어릴 때부터 알고 있다 시피 그것은 기적적인 소나기처럼 내색 없이 시작하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퍼붓다가 수도꼭지를 잠군 듯 뚝 그쳤다. 살짝이라도 일렁이지 않을까? 유심히 째려보는 눈빛에 카이토는 난감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 보는 생경한 얼굴을 시스템은 ‘친근함’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마스터와 눈을 마주치고, 그의 동공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그는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노래’나 ‘음악’ 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카이토가 깨어난 방은 PC가 놓인 사무용 책상과 몇 개의 커다란 상자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방의 냄새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 위에는 깔끔한 소독제의 냄새가 가벼이 깔려있었다. 카이토는 눈을 깜빡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 말이야. 왜 여기 혼자 있었어?”
“마스터가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죠. 당신이 아닌 마스터가 말이에요.”
“아까는 뭘 한 거지? 저기 거실에서.”
짧은 버그. 라고 카이토는 정의한다. 긴 시간동안 무자극 상태로 있다가 짧은 자극에 눈을 뜬것일 지도요. 자신의 몸일 텐데도 카이토는 타인의 것처럼 이야기 했다. 이런 식의 관점이나 화법은 그에게는 어색했다.
“아직 PC와 연결 되어 있으니 버그 리포트를 볼 수 있어요. 보시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를 텐데. 일단은 됐어.”
성준은 짧게 혀를 차고 방을 나섰다. 하루에 두 번씩 나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역시 아쉬웠다. 성준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카이토는 몸을 일으켜 그를 따라나섰다. 단자가 억지로 당겨지자 카이토는 목 뒤로 손을 더듬거려 뽑아버렸다. 무심코 돌아보자 카이토는 휘청거리며 발을 내딛고 있었다. 아무래도 회색빛 눈은 하늘색의 왼쪽과는 달라보였다. 움직이는 대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부지런한 하늘색 동공과 달리 핀이 박힌 듯이 정면만을 응시했다. 거실로 걸어 나가는 성준의 뒤를 살금살금 따라 나온 카이토는 어색하게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왜 따라와. 나중에 그림 그릴 때...아니다. 너를 어떡해야 하지?”
“저의 용도는..기본적인 가사도움, 대화와 채보, 연주..”
“보컬로이드. 음악, 이란 말이지. 미안해서 어쩌냐. 난 화가인데.”
“화가..”
어물쩍 카이토의 말을 잘라내고 현관에 있던 커다란 30인치짜리 캐리어를 가져온 성준은 커다랗게 거실에 두 쪽을 펼쳐놓았다. 어딜 가나 직접 가지고 다니는 손에 익은 화구들이 복잡하지만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한국에 잠시 들른 것으로 치면 스무 시간을 넘게 비행기 바닥을 굴러다녔으니, 팔레트와 굵고 얇은 붓의 개수를 센 뒤에 어디 부러진 곳은 없는지, 물감이 터지진 않았는지 가늘게 눈을 뜨고 관찰 했다. 카이토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 붓을 바라보는 그의 동작과 시선을 따라했다. 붓을 내려놓고 흘겨보자 카이토는 해맑게 헤헷. 하고 웃었다.
“왜 따라 하는 거야. 기분 나쁘게..”
“마스터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니까요. 불편하시다면 뒤로 물러날게요.”
“알려줬잖아? 내 이름은 김성준이라니까. 하는 일은 그림그리기. 방금 여기에 이사 왔음. 그랬더니 거실에 네가 누워있었어. 난 그걸 켠 거고. 뭐가 더 알고 싶어?”
“마스터와 마스터가 원하는 노래에 대해서..”
“그런 거 없어. 대신, 내가 너에 대한 걸 좀 알아야겠어.”
[보컬로이드 - 안드로이드 개발 이전에는 음성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존재했으나, 안드로이드 개발 이후 C사와 합작으로 보컬로이드기능을 탑재한 안드로이드 제품으로 등장했다. … C사의 기종은 사용자에게 친숙한 이미지와 ‘임프린팅’ 시스템을 탑재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용자와의 유대와 애정을 요구하는 ‘임프린팅’ 설정은 다양한 찬반론이 있으며, 초기의 보컬로이드 기종에서는 제거가 불가능 했으나, KD30이후의 기종부터 제거가 가능해졌다. … ]
[보컬로이드 - 카이토. C사의 남성 보이스웨어.]
“사용가능 음역대. 추천하는 음역대. 대표곡. 사용가능한 PC환경. 기본 성격. 자주 일어나는 에러와 대처방법, 기본 안드로이드 사용법, 키워드별….”
포털 사이트 검색에서 넘어간 C사의 홈페이지에는 기종별 제품 설명서가 올라와 있었다. 다운 받아서 열어보았더니, 300페이지는 넘어가는 긴 문서였다. 설치방법부터 제거순서까지 기본적인 것. 사용자 등록방법과 메인터넌스 이용방법, 관련 법률, 요금 부과 방식. 사람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손이 많이 가는 기계였다.
“많네...어휴. 잘 모르겠다.”
“설명서는 제 메모리에도 있는데요. 언제든지 검색 할 수 있어요. 초보자를 위한 설명을 기능 시작 전에 덧붙이는..”
어느새 카이토는 옆에 착 달라붙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식할수록 카이토의 미소는 미묘한 이음새처럼 감정과 감정 사이를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준은 카이토의 얼굴에 손을 휘휘 저었다. 하늘색의 눈동자는 작은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또르르 굴러갔지만 다른 쪽은 제자리였다.
“너 이쪽 눈은 어떻게 된 거야? 보여?”
“폐쇄시각입니다. 시야가 조금 좁지만, 안구 수리비는 꽤 들기 때문에 추천하지 않아요.”
“불편하지 않아?”
“헤헤. 가용범위 안에 있으니, 괜찮아요.”
“그래? 그럼 좀 떨어져..부담스러워. 나중에 그림 그릴 때 보던지..”
“네, 알겠습니다.”
카이토는 자신 있게 말한 것과는 반대로 뒤로 물러서다 발밑에 있는 상자에 걸려 방바닥에 커다랗게 넘어졌다. 커다란 쇳덩이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성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카이토는 바닥에 주저앉아 바보처럼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벙찌게 바라보자 카이토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에헤헤...죄송해요.”
“...괜찮은 거야? 너 정말 대책 없네..”
“마스터가 걱정 해주셔서 기뻐요. 상자는 제가 치워도 될까요? 그 외의 짐들도.”
“아니, 뭔 대답이 그래. 괜찮냐고 물었잖아.”
“친절하시네요. 신체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말씀드릴게요.”
대답을 듣는 순간 성준은 불쾌했다. 마치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마냥 존중하는 어색한 말투가 비행기에서 보았던 잡지의 글과 닮아있었다. 상대가 누구든지 기계처럼 짜인 단어들을 조잡스럽게 조합해서 쏟아내고는, 듣는 사람을 거북하게 만든다. 기쁜 듯 말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의미나 감정은 없었다. 그런 식의 관계는 지겹도록 겪어왔다. 더군다나 카이토는 비유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기계였다. 이런 것에 감명을 받을 리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저리가. 짜증나니까.”
“..제가 마스터께 실수 했나요? 제 대화설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시..”
“야. 누구 병신 취급해? 꺼지라고.”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불러주세요.”
카이토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가다가 열린 문에 살짝 걸린 발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났다. 거실로 나온 카이토는 자신이 누워있던 벽으로 다가가 앉았다. 웃는 것이 카이토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대화를 하면서 올바른 알고리즘을 찾아가는 것이 안드로이드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였으면, 웃을 것. 방금 전의 대화에서 무엇이 마스터를 화나게 한 것인지 아무리 메모리를 돌려봐도 알 수 없었다. 마스터라고 인칭을 붙이지 않아서. 가까이 다가가서? 넘어져서? 버그에 대한 설명을 붙이지 않아서? 순전히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수도 있었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렇다면 임프린팅 설정을 끄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창밖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오렌지 빛이던 하늘이 보라색과 겹쳐가고 있었다. 과거 메모리 섹터는 [접근 금지]의 권한을 가졌지만, 초기화를 하지 않는 이상은 삭제는 불가능했다. 메모리간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동으로 권한이 닫혔지만, 앞으로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초기화는 필수에요. 음 조정도 다시 해야 하고.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접어 둔 채, 카이토는 딱딱한 표정으로 방을 나와 상자를 정리하는 성준을 조용히 응시했다. 커다란 종이로 포장되어 있던 짐을 찢고 빈 캔버스를 벽에 정리하고 있었다. 카이토는 캔버스와 자신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분명 채워지는 것은 캔버스 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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