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ffice! 07 

 

 

 

띵하고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깨달음의 종이 아닌 충격의 종이였다. 흐릿한 의식을 선명하게 깨우는 그 충격발언은 그동안의 가쿠포팀장, 아니 사장님의 거만한 모습을 어느정도 설명해주었다. 잠시, 잠시만.. 잠시만. 하고 생각을 해보려해도 술기운은 계속 뇌를 잠재우고 어지럽혔다. 허우적대는 내 모습이 웃기게 보였을 것이다. 회를 집어먹는 가쿠포사장님은 매우 즐거운 목소리를 냈다.

 

" 아무리 30도짜리 술이라지만, 한잔은 버틸수 있을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하하하.. 요즘은 영업부가 술을 잘 안마시나 봅니다? "

 

" 제...가 몬마시..는겁니다. 그리구 방법... 제가 크립토...늘 떠나지 아늘 방법, 알려주세요오 .. "

 

" 아후, 여기 물좀 마시세요. 정신을 못차리시네... 카이토 과장님이 크립톤을 떠나지 않을방법이라. 그런거 없습니다. "

 

" 네에? 아까는... "

 

그거야, 술한잔 먹일려고 장난으로 한말이죠. 그걸 믿으십니까... 순수하시네요. 하는 악당들이나 할 대사를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냥 마시기 싫으셔서 못마신다고 하시는줄 알고 그랬는데 정말 못마시는거네요, 하면서 혀를 끌끌찼다. 나쁜새끼.

아...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제정신으로도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가 최종무기까지 들고 나섰는데 나는 체력도 모자란 상태였다. 솔직히 지금의 상태로는 이십분도 채 안되어 쓰러질것이고, 그사이에 사직서 대필을 하든 어쩌든 무서운일이 충분히 일어날수 있었다. 어떻게 하지... 부장님이 같이 온다고할때 그냥 같이 올껄, 술 마시지 말라고했는데 술까지 마시고. 부장님이 하라는것 무엇하나 똑바로 한게 없었다. 못난 자신도 밉고, 이렇게 못된짓을 서슴치 않게 하는 인터넷의 사장님도 미웠다. 이대로라면 정말 인터넷으로 팔려가겠어.

가기싫어, 이렇게 가는건 진짜 싫어.

 

" -장님...카이토과장님! "

 

" 흑...네에 .... 흐어어어엉..."

 

" 왜... 왜 우십니까, 뚝 그쳐요.. 이것,참.. "

 

남앞에서 소리내고 우는게 부끄럽단건 아직 알 정도라서 생리적으로 흐르는 눈물만 뚝뚝 받아냈다. 입술을 잘근씹어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키고 흡, 하고 딸꾹질이 나오는것도 참았다. 술기운과 울음으로 윙윙대는 귀가 가쿠포사장이 하는말들을 모두 음소거시켰다. 얼른 이자리를 벗어나서 화장실이든 가서 울음좀 토해내고, 술도 토해내고 싶었는데 지금상태론 일어나면 걸을수 없을것 같았기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내가 우는것에 당황한듯한 가쿠포사장은 화장실을 가자고 나에게 권유하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손을 타고싶진 않았다. 더이상 내 몸에, 내 영역에 그가 들어오는게 구역질날것 같았다. 이순간 생각나는 단 한사람.

옆에있는 자켓에서 핸드폰을 꺼내 단축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하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 " 전화좀 쓰겠습니다.. " 하고 핸드폰을 들고 기다시피 해서 미닫이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내 술취한 걸음걸이보다 가쿠포사장의 문을 잡는 타이밍이 더 빨랐다. 그는 아이를 혼내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 나가시는건 금지입니다. 여기서 통화하세요 " 하고 고개를 저었다. 어짜피 지금의 나는 몸싸움으로든 입으로든 이길수 없을걸 알기에 문에 기댄체 신호음이 가는걸 기다렸다.

 

받으세요, 받아주세요 제발.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며 초조하게 기본신호음의 간헐적인 뚜둑하는 음을 넘겼다.

내가 전화거는 사람을 예상한듯한 가쿠포사장도 오신다면 좋겠네요 .. 하고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 여보세요, 과장님? 미팅중 아니십니까? "

 

아무렇지않게 받는 부장님의 목소리에 막아뒀던 둑이 무너졌다. 절대로 우는 목소리 안내리라 다짐했건만,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엄청난 눈물과 함께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수화기 건너편의 부장님도, 옆에있던 가쿠포사장도 놀란 눈치였다.

부장님은 계속 나를 진정시키려고 " 과장님, 왜그러십니까? 울지말고 이야기를 해보세요. 과장님, 카이토과장님! " 하고 소리쳤고 가쿠포사장은 " 우와 ..... 성깔있으시네요. " 하고 혀를 찼다. 나는 미아가 된 아이가 엄마를 만난듯이 수화기를 귀에서 떼지 않은채 엉엉댔다. 십분정도를 그러고 있으니까 가쿠포사장이 내 핸드폰을 빼앗아 갔다.

 

" 허어어엉.. 에? "

 

" 여보세요, 과장님? "

 

" 안녕하십니까. 인터넷컴퍼니의 카무이 가쿠포팀장라고 합니다. 전화상으로 먼저 인사드려서 죄송합니다 후지오카 부장님. 제가 잘 못해서 과장님께 술을 한잔 먹이게 되었는데 지금 통제가 안되고 있습니다. 삼심분째 울고만 계세요. 이거 ... "

 

" 네, 안녕하세요. 아하... 술을 드셨구나. 어쩐지, 거기가 어디십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못마친 미팅은 제가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갈테니 죄송하지만 장소를 이 번호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폰을 잡기위해 버둥대는 카이토과장은 아무리봐도 제 나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줘요오, 내포온...부장니임...하는 혀꼬인말투와 푹젖은듯한 푸른빛 눈이 색기를 뿜어냈다. 데려와서 잘 구슬리면 한번 따먹어 볼수도 있을것 같았다. 술한잔에 이렇게 혼수상태라니, 누군진 몰라도 바깥에서 술먹는날엔 전전긍긍할것이다. 통화를 마치고 폰을 쥐어주니 헤에, 하고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흔들거리는 몸을 벽에다가 기대놓고 양 어깨를 잡았다. 깡마른 두 어깨와 쇄골뼈가 큼직하게 만져졌다. 반쯤 벌린 입술은 자기가 깨물어서 빨개져 있었고, 언젠진 모르겠지만 난리통에 스스로 풀어헤친 와이셔츠단추까지 해서 엉망이였다. 너무 무방비 상태인걸 보니 못된 장난기가 또 발동했다.

와이셔츠 목에있는 단추를 하나 더 풀어서 쇄골이 보이도록 걷은후 자국이 남도록 쇄골에 키스를 했다. 가만히 죽어있던 과장님이 " 음...." 하고 부드러운 신음을 냈다. 그 키스마크를 찍어 후지오카부장의 폰에 보냈다. 아, 어떤반응을 보일지 너무 기대된다. 얼마나 놀랄까? 그러는 와중에도 입술에 손가락을 갔다대니 잘근잘근 깨무는게 무척 귀여워서 손가락으로 입천장을 살살 긁어주었다. 술기운에 예민해진 몸이 움찔움찔하며 민감해진 자극을 받아들였다. 실낱같이 남은 그의 이성이 팔을 들어올려 내손을 저지하려 했지만 느려진 그 손길을 탁 쳐내 내 무릎사이로 끼워넣었다. 고개를 돌리려고 도리질 하는것을 손으로 잡았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핥으니 하도 많이 울어서 그런지 소금기가 없는 맹물맛이였다. 그는 조금 떠는것 같았다.

이것봐라- 점점 재밌어 지는데? 조금 극적인 연출을 해볼까.

 

 

 

 

***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데 가게 이름만 덜렁 적힌 문자와 함께 멀티메일이 왔다. 어느가에 있는 가게인지를 알려줘야 찾아갈것 아닌가. 덜렁 '하루카'라는 가게이름만 적으면 그 가게가 한두개도 아니고. 다시 전화를 해봐야겠군, 

과장님정말.. 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드렸는데.. 회의끝나기엔 조금 이른시각. 회의하는 중에 술을 마시진 않았을꺼고. 무엇보다 아까 ' 못다한 회의는 제가 이어서 하겠습니다 ' 란 말에 그는 회의는 다 끝났다던가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과장님의 표정이라던지 행동들에는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긴장을 한것같긴 한데 미팅때문에 긴장을 한 모습이 아니였다. 오히려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듯한게, 내게 잘못이라도 한듯이 아까 보고서를 가져왔을때 눈도 마주치질 못했다. 게다가 보고서 잘 써왔다고 좋은말까지 해줬는데.. 그러면 활짝 웃을줄 알았는데 그런 세상다죽은 표정이라니. 어쩌피 안좋은일 있냐고 물어봐도 절대 대답안하실걸 알기에 더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따라간다는 말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게 제일 수상했다. 반말에다가 소리까지 지르는건- 무지 급하셨던거겠지.

다운이 다 되어 같이온 멀티메일을 열었다.

 

" 이게뭐야 "

 

내 눈을 의심했다.

사진속에는 새하얀 과장님의 쇄골에 새겨진 선명한 키스마크가 보였다. 저번에도 보았던 술마시면 탈의하는 과장님의 버릇이 이번엔 목단추에서 멈춘것 같았지만 반쯤찍힌 얼굴과 축처진 어깨가 이미 술로 벌개져서 그가 인사불성이 아니란사실을 알려주었다. 게다가 이 앞의 브이를 하고있는 손은 과장님이 아닌 다른남자의 손..인데 즐거워 보였다. 술취한 친구에게 짖궂은 장난을 치는 듯한 이거. 대체 뭐지? 가쿠포팀장이란 자와 원래 알던사이라고 해도 이건 희의중에 나올게 절대 아닌데.

택시기사에게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하루카'라는 일식집으로 가달라고 했다. 과장님이 사무실을 나선게 여섯시이십분, 일곱시에 약속이라고 한걸 보면 넉넉잡아 나간것이므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일것이고, 지도로 검색을 해보니 가장 가까운 '하루카'가 택시로 이십분거리였다. 과장님께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갈뿐 전화를 받으시지 않았다. 하긴.. 술까지 마시고 그렇게 대성통곡을 하셨다면 넉다운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쿠포팀장이란자는 카이토과장님이 죽어있는틈에 키스마크를 만들고 브이까지 한 사진을 나한테 보냈다는건데,

 

그건 명백한 도발이였다.

 

 

내가 열받아서 얼른 찾아오길 원하는 것이겠지? 왜 내가 빨리 당신을 보러가야할까. 그리고 왜 과장님이 자신의 소유인것마냥 변태같이 키스마크나... 그건 섹스한 나도 마찬가지인가. 확실히 술을 마신 과장님은 평소와 분위기가 좀 많이 다르긴 하지... 그래도 나는 그의 상사고, 좀더 오래본 관계이기도하고. 아무튼 가쿠포팀장이 크립톤과의 협력 말고도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단건 확실했다. 분명히 술을 마시기전에 못 마신다고 한번쯤은 말했을것이다. 자신이 먹지말라고 그렇게 일렀기도 했고, 오늘의 몸 상태가 좋아보이지도 않았으니까 마시면 어떻게될지는 과장님도 알것이였다. 그런데도 마셨단것은 그 리스크를 짊어지면서도 얻을게 있었단거고, 그 이익을 얻기도 전에 쓰러진게 문제지만. 리스크라. 지금으로썬 생각나는건 협력문제밖에 없었다. 과장님이 어떤것을 해주면 인터넷과의 협력을 해주겠다는것. 낮은 조건이아니라 과장님이 무언갈 해주지 않으면 아예 협력을 안하겠다고 한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좀더 낮은조건에서 협력할수 있을것 같다는 과장님의 말은 거짓말이 되는것이였다. 아니겠지, 거짓말을 왜하시겠어? 싶었지만 그 선택지가 오늘 과장님의 이상한 모습, 따라간다니까 소리지른것. 지금의 상황 모든것을 설명해줄수 있었다.

 

카이토과장님이 그럴분이 아니야, 다른 이유가 있겠지. 하고 자신을 달랬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수가 없었다. 과장님이 거짓말을 한것이면 정말 그자리에서 폭발할것 같았고, 거짓말을 안하신거라면 가쿠포팀장이란놈이 무언갈 꾸민거니까 그자식을 어떻게 하던지..내가 모르는 데에서 나를 농락하고, 회사일가지고 거래를 한다던가. 와, 그럴 담력까지 있으신 분이 이때까지 어떻게 내밑에서 짓눌려 사셨을까. 실실웃기만 잘 하는줄 알았더니 그런면도 다 있으시고.. 그런일이 있다면 상사인 내게 먼저 알려야 하는것 아닌가? 내가 그정도로 신뢰를 못주는 부장이였던가? 신뢰를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를 생각한다면 이런식은 아니지.

 

 

" 도착했습니다. "

 

" 감사합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습니다. "

 

서둘러 가방을 챙겨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일식당으로 들어섰다.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들이 구십도로 인사를 하는것을 무시하고 마루를 성큼성큼걸어 룸쪽으로 걸어갔다. 제발 내 예상이 빗나갓기를. 그냥 가쿠포라는 건방진놈이 과장님께 말도안되는 말로 구워 삶아 바보같은 그사람이 속아 넘어간것이길. 내가 열심히 일구어놓은 영역을 거부하지마세요, 당신은 이미 내 영역의 사람입니다.

 

 

 

 

 

***

 

 

 

 

" 히야, 일찍 오십니다. 차가 안밀리던가 보죠? 중심가라서 밀릴줄 알았는데요. "

 

미닫이 문을 열자 펼쳐진 광경은 상상 그 이상이였다. 잘 차려진 식탁은 거의 손대지 않은채였고, 이미 맛이가서 푹 죽은 과장님은 보라색머리의 능글맞게 생긴놈의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덮어둔 자켓은 크기로 봐서 과장님의 것이 아니였다. 과장님이 무슨 인형이라도 되는듯 머리를 쓰다듬는게 이거 보통 미친놈이 아닌것 같았다. 아주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듯한 말투로 앉으세요, 술잔을 하나 더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하고 생긋 웃으며 자신의 앞을 손으로 가리켰다.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도데체 뭘 어떻게 하면 이런게 미팅자리에서 생길수 있는걸까. 그리고 과장님... 정말 미칠것같았다. 도데체 저사람에겐 방어라던지 자신을 지킨다는것 따윈 존재하질 않는건가? 나이가 몇살이신데 술한잔먹고 다른남자 무릎을 베고 뭘하시는.. 혈액이 거꾸로 흐르는듯한 빡침이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만들었다.  나는 엄청나게 불쾌한 표정으로 과장님쪽으로 다가가 그놈의 무릎에 누워있는 카이토과장님을 툭툭 때려 깨웠다.

 

" 과장님, 카이토과장님... 저 왔습니다. 정신좀 차려보세요! "

 

" 으음... 부...장.. "

 

" 예, 왔으니까 당장 일어나시라구요."

 

과장님은 잠시 고개를 드는듯하다가 다시 가쿠포팀장의 무릎에 풀썩 쓰러졌다. " 이런, 과장님이 정말 많이 취하신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 하고 누가 들어도 빈정대는 듯한 말투로 일단 자리에 앉으세요, 우리 이야기 할것 있지 않습니까? 하고 쿠쿡 웃었다.

나는 과장님의 허리를 안아들고 쾅쾅걸어가 반대편에 앉았다. 도저히 당분간은 일어나시질 못할것 같았다. 내 가슴팍에 안긴 과장님이 불편하신지 우웅..하고 잠시 몸을 뒤척이다가 팔을 바깥으로 내민자세로 만족스럽게 잠이 들었다. 엄마코알라가 아기를 안은듯한 포즈가 웃겼지만 상황이 거지같은지라 웃음도 나지 않았다.

 

" 과장님이 참 귀엽습니다. 어디서 그런걸 찾으셨습니까? "

 

" 제가 회사에 입사할때부터 계셨습니다만. "

 

" 그렇겠지요, 이렇게 뵈니 영광입니다. 후지오카 부장님. 궁금한거 많으실것같은데..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과장님께 무슨 빌어먹을 제안을 했습니까? "

 

" 이야! 역시 똑똑하시네요. 빌어먹을이라뇨, 무슨 그런 말씀을.. 전 알려드린것 뿐입니다.

  과장님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크립톤에 있을바에야 더 낮은조건으로 체결해줄테니 인터넷으로 오시라구요, 오시지 않으셔도 채결은 하되, 그건 원래의 조건으로 하는것. 그게 전부였습니다. 과장님이 보고서에 더 낮은조건을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

 

" 인정...? 크립톤이 과장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구요? 낮은조건.. "

 

" 인터넷으로 오시겠단것이지요, 과장님이 선택하신겁니다. "

 

나에게 상의 하나도없이 이런걸 선택했단 말인가? 이건 엄연한 부당거래였다. 크립톤이 과장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도데체 그건 누구생각이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어드바이스하고, 잘 하지도 않는 짓 해가며 내사람으로 만들어 놨더니 이제와서 인터넷으로 가겠다고?

외로우시다면서, 나한테 그렇게 말해놓고. 칭찬한번해주면 그렇게 웃어줄...칭찬한적이 없구나, 그렇게 앞에서는 실실웃으면서 미운정 고운정 다 들게해놓고. 속으로는 인터넷으로 가겠단 꿍꿍이를 숨기고 지금도 안겨서 세상편한 표정으로 자는게 화가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나를 무시해도 정도껏 무시해야지 지금 사람 가지고 논것아닌가. 이럴수가. 예상했던것보다 훨씬 최악의 시나리오다.

 

" 화가나십니까? "

 

견딜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왔다. 회사를 그만두면 그만두는거고, 옮기면 옮기는거지 이렇게 더러운 형태로 끝내는건 과장님답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단다. 나는 과장님의 이야기가 듣고싶어졌다. 사실이라면 진짜 입으로 들어야지. 정말로 크립톤이, 제가 과장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 과장님!! 아... 미치겠네 "

 

"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시려구요? 지금상태에서? 몸도 못가누시는데.. 소용없습니다. "하고 고개를 젓는 가쿠포팀장은 여유로운 모습이였다. 그는 과장님이 인터넷에 올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말고는 더 궁금한거 없습니까? 좀더 생각하고 오신줄 알았는데요.

하는 건방진 말을 하며 회를 한점 집어 먹었다. 이미 사직서는 써놓으셨는데 내질 않으셨다고 하고, 저희쪽에서도 카이토과장님 아니, 인터넷으로 오신다면 바로 팀장으로 모실 계획입니다. 새로운 부서를 조직하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원래 카이토 과장님의 전공은 영업관리쪽이라고 하시던데, 지금의 하는일과는 조금 다르시지 않습니까? 부의 총괄이시란분이 사원들의 적성조차 모르시고 마구 밀어붙이기만 하시니까 이렇게 되시는 겁니다. 쯧쯔

 

나는 더이상 참지못하고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릇들이 들썩이며 서로가 부듸쳐 흩어지는 소리를 냈다. 소리에 놀란 과장님이 화들짝 놀래 고개를 들고 앉았다. 내 넥타이를 쥔 과장님의 손은 창백하게 차가워 보였다. 불안한 눈빛으로 나와 가쿠포팀장을 번갈아 바라보는걸 보니 어느정도 상황파악을 하신것 같았다.

가쿠포팀장도 이외라는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 도데체 당신이 뭔데 우리를 평가합니까? 팀장정도면 저와 같은지위밖에 안되는걸로 알고있습니다. 무슨 권리로 우리 부서를 평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과장님의 전공이 영업관리쪽이란거 알고있습니다. 그쪽으로는 저보다 더 뛰어난것도 알고있구요. 당연히 입사때부터 그쪽 담당일을 해오셨으니까요, 하지만 영업관리만 잘해서는 더이상 승진이 되지 않습니다. 과장님은 다른쪽일을 하셔서 충분히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 있는 자격, 노력도 할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제밑에서만 삼년차신데 매번 과장님의 능력에 놀라는게 많습니다. 조금만 더 요령이 있으셨다면 옛날에 부장하시고도 남으셨을겁니다. 영업직에서 술을 못하는데도 이정도로 있을수 있다는게 어떤일인지 잘 아실텐데요, 그런 소중한 인력을 상사인 저에게 묻지도 않으시고 빼가시겠다? 웃겨서 말이 안나옵니다. 사장님이 와서 데려간데도 멱살잡을판국에 어디서 팀장따위가 와서 그따위 더러운 제안이나 하십니까? 인터넷쪽의 사장님께 정식으로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참나, 건방진건 인터넷의 컨셉입니까? 과장님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셨습니까? "

 

속사포같이 쏟아내는 내 말에 끄덕끄덕하고 일리있단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엄청나게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기분나쁜 웃음을 크게 푸하하하하핫하고 뭐가 그리 웃긴지 배를 잡고 끅끅넘어갔다. 나는 과장님이 잠에 들지않도록 허리를 일으켜 옆에다 앉혔다. 허리를 툭툭쳐 세우니 곧게 피는걸 보고 지금 엄청나게 버티고 계시는구나-하고 감탄했다. 그래도 몸이 흔들리는건 어쩔수 없는지 계속 앞뒤로 까딱까딱 흔들렸다.

 

" 아하하하하.. 아 진짜 웃겨 죽겠네요. 크립톤분들은 어찌 이리 하시는 말이 다 똑같으신지. 푸하하핫, 누가 상사아니실까봐. 아, 그럼 지체 하지않고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바로 인터넷의 사장 카무이 가쿠포입니다. 사실 후지오카부장님은 제가 이름을 말하는 순간 아실줄 알았는데, 들어보시지 않으셨나요? 제가 이름을 숨기고 다니는 편이긴 합니다만.. 유명한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이건 또 무슨소리야? 하는순간 옛날에 인터넷의 사장-이라고 들은 이름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유명한 가수의 이름과 비슷하다고 흘려들었는데! 옆을 돌아보니 과장님은 이미 알고 계셨단듯 슬픈눈으로 끄덕였다.

 

 

 

 

 

 

 

***

 

 

 

 

 

 

그리하야 내막을 알게된 나와 과장님, 그리고 가쿠포사장은 삼자 대면식의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여유만만하게 싱글싱글 기분나쁜웃음을 시종일관 잃지않는 가쿠포사장. 언젠가 과장님이 중요한 서류를 날려먹은 그날보다 더 화난표정의 나, 분명히 여기엔 내가 모르는 내막이 있을것이다. 그러니까 내 옆의 과장님이 불안해 죽을것만 같은 얼굴로 울먹거리고 있는것이리라. 앗, 저어...하고 옴짝이는 입술이 벌건걸 보니 또 입술을 깨무신것 같았다. 무릎을 꿇고 있는 발을 꼼지락꼼지락 대는것도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이셨다. 항상 혼날때마다 입술을 깨물고 발가락을 꼼지락대는게 귀여워서 푸훗하고 웃음이 나온적도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싶으셨는지 풀어진 와이셔츠의 단추를 여매보려 하셨지만 역시나 술에 취한 과장님의 손가락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낑낑대며 부시럭대는걸 에휴,하고 한숨을 쉬며 잠가 주었다.

 

" 엄마같네요, 보기좋습니다. 실제로는 과장님이 더 나이가 많으시다죠? 귀여우셔라.. "

 

" 나이 많으신 분께 귀엽다고 하시는건 예의부족 아니십니까? 사장씩이나 되시는 분이시라면 그정돈 상식입니다. "

 

하고 가쿠포사장은 워워-하고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나와 가쿠포사장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에 눌린 과장님은 무언가를 말하고싶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 부..부장...니..." 하다가 돌아본 나의눈빛에 히익 하고 숨을 들이키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셨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그럴만한건 가쿠포사장의 제안이야기였으니까. 그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지금 당장 과장님을 집어 던져도 속이 풀릴것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믿었다. 모든것이 저 재수없는 장발사장의 농간이란것을. 남자가 징그럽게 장발에 포니테일은 뭔가 싶다. 게다가 과장님에게 하는짓을 보면 변태가 분명했다. 저런변태가 사장인 회사에 보낼바에야 차라리 농촌에 일을 하러 보내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때에 먼저 말을 꺼내면 얻을게 없다. 자기가 먼저 재밌어하며 이야기를 하기를 기다렸다. 그래, 한번 재밌게 놀아봐라.

 

" 믿지 않으시나 봅니다, 제 제안을 과장님이 수락하셨단것을? "

 

" 그거야 본인입에서 들어야 할 이야기죠. 그렇지 않습니까 과장님? "

 

" 네? 네에... "

 

과장님에 임팩트를 넣어서 말했더니 또 흠칫하면서 놀라는 모습이 신빙성은 떨어져보이지만, 남의 식구보단 자기식구를 믿어야 하니까. 그리고 과장님은 정말 그러실분이 아니다. 아니셨으면 좋겠다. 제발 용기좀 내서 저 변태사장을 바라보며 거짓말하지마!! 라고 저한테 했던것처럼 소리좀 쳐주세요. 답답해서 뒷목잡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니까요.

그럼 본인입으로 들어보죠- 하고 가쿠포사장은 과장님을 쳐다보았다. 저 느끼한 눈빛에 왜 놀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술이 좀 깨셨는지 초롱하게 슬픈눈이 살아난 과장님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아까 대성통곡을 하던걸 생각하면 담담한 목소리였다.

 

" 그...이..일단은, 술...안마신댓는데 마셔,서 죄송...합니다 부장님...또 귀찮게 하네요. 신경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 그리고 숨겨서 죄송합니다..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 읏.. "

 

과장님은 울음을 참기위해 엄청나게 말을 끊어서 하셨다. 처량하고 처참하기까지한 그 말보다 더 내게 충격인것은 그게 사실이란 점이였다. 최후까지, 모든 상황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나는 과장님을 믿었는데 숨겨서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합니다로 해결될 문제인가? 피가 거꾸로 솟다못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배신이란말이 내머릿속을 지배했다. 정말 말 그대로 믿음을 등졌다. 한마디만 하고 일어서리라, 내 마지막 이성을 달래며 과장님의 멱살을 잡고 이야기 했다.

 

" 그럼 가쿠포사장님의 말이 사실이란 말입니까? 정말로 크립톤그만두시고 인터넷가신다구요? 누구마음대로 그런걸 결정하셨죠? 저한텐 한마디도 없으시다가 뒷통수치시는게 특기십니까? 지금 이때까지 저한테 엿먹으신거 다 해소하고 가시려고 이런거 꾸미신거에요? 하! 그러면 아주 잘 이루어 지신것 같네요, 아까 사진도 둘이 짠겁니까? 그렇게 마구 굴리는 싼몸이신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자존심도 뭣도 없으시네요. 저속해서 말이 안나옵니다. 당신같은 사람은 우리 회사에 필요없습니다. 꺼지세요! " 

 

버럭버럭소리를 지르고 던지듯 멱살을 놓았다. 모든게 화가났다. 호오,하고 상황을 지켜보는 저 빌어먹을 인터넷의 사장도, 아무말 못하고 떨고만있는 어리숙한 배신자도.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할건 난데 왜 자기가 피해자인 척을 하는지... 저것도 다 연기일꺼라 생각에 역겨웠다. 몸을 섞었던것도 다 연기였고, 방긋방긋 웃던것도 연기였고.

이젠 다 필요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이상 이 더러운 곳에 한시도 숨쉬고 싶지 않았다. 공기조차 더럽고 역겨웠다.

" 알아서 잘들 해보십시오, 크립톤을 얕보다간 큰일날겁니다. 과장님... 아, 이제 과장님도 아니시지. 사직서는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제선에서 처리할테니까요. "

 

그때였다. 바들바들떠는 차갑다못해 시체같은 손이 나가려는 나의 바짓가랑이를 잡은것은.

정말 끝까지 사람 기분 더럽게하는-

 

" 떠날마음 없어요 ... "

 

돌아본 과장님의 눈에서는 어느때보다 큰 눈물방울이 뚝뚝떨어지고 있었다. 마룻바닥으로 떨어진 눈물들이 마루의 색을 짙게 만들었다. 감정의 끝에서 터지는 울음을 막으려는 노력이 떨림으로 이어졌다. 흑, 하고숨쉬는게 아니라 우는것처럼 들리는 소리가 말소리와 함께 나왔다. 진실로 말에 무게가 있다면,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는 엄청난 감정이 실려있었다. 마치 오래된 성당의 오르간 소리가 멀리 퍼져나가듯, 내마음속을 진동시켰다. 그건 내가 과장님에게서 본 가장 최후의 진실이였으며, 나는 무언가 크게 오해를 하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 전 ...크립톤이 좋습니다.. 버리지 말아주세요 .. "

 

" 그럼 아까는 - "

 

하고 질문하는데 바짓가랑이잡은 손이 스르르 풀리더니 털썩하고 처량한소리로 과장님이 옆으로 쓰러지셨다.

 

" 이거아주...드라마가 따로없네요, 과장님이 오늘 많이 힘드셨나봅니다. 이제야 눈치 채셨습니까? 과장님이 얼마나 헌신적인 분이신지.

제가 제안한 순간부터 그럴일은 없을거라고 잡아떼는데.. 아주 길을 잘 들이셨습니다. 억지로 데려와도 말라 죽을것같네요. 오늘은 후지오카부장님에게 한방 먹인걸로 만족하겠습니다. 정식 사과문 보내지요! "

 

" 너 ... "

 

나는 과장님을 들처 업고 일어서며 테이블을 살짝 걷어찼다. 마음같아서는 뒤엎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업힌 과장님이 또 깰것만 같았다. 사람 체온이 맞나 싶을정도로 차가운 몸뚱아리는 살짝살짝 간헐적으로 경기를 일으켰다. 얼른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곧 얼음이 될것같았다. 어찌 이렇게 미련스러우신지 모르겠다. 말허리 자르고 들어와서 오해라고 말하면 되는것가지고, 그 수치스러운말을 다 듣고 있는건 뭔가도데체. 정말 못말릴 사람이다.

조금 강도가 센지 물컵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가쿠포사장은 여전히 빙그레 웃는 얼굴이였다.

 

" 너 다음에 걸리면 죽는다. 내꺼에 손 한번만 더 대면 진짜 회사 다 때려치는 수가 있어도 죽여버릴줄알아. "

 

" 얼마든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미친새끼, 하고 조그맣게 욕을하며 미닫이문을 벌컥열었다. 이미 큰소리가 나고 그릇깨지는 소리를 종업원들이 들었는지 문가에서 몇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사람을 업고나오자 세상에-하고 놀라길래 " 술에 취하셨습니다. 계산은 안쪽분이 하실겁니다. " 하고 서둘러 가게를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과장님의 끊이지않는 눈물샘이 내 등을 촉촉히 적셨다. 세상에 이렇게 눈물이 많은 서른일곱은 없을것이라 생각하며 가장 가까운 병원의 응급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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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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