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memory

짧은것/X KAITO 2014. 8. 21. 19:15

가만히 눈을 감으면, 보일 듯 말 듯한 어느 얼굴이 점멸한다. 마스터의 얼굴은 아닌 누군가의 모습이 뽑힌 메모리 사이에 추적추적 차가운 비가 되어 내리 앉는다. 떠올려보려 애를 써도 마구잡이로 낙서된 엉망진창인 검은색의 사람.

아마도 나는 그 사람과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머리가 시큰거렸다. 수면모드로 들어가려 의식을 내려놓으면 아래에 숨어있던 폭풍이 떠오른다. 허리를 감싼 마스터를 깨우지 않으려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크게 고장 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흔하진 않지만, 전체 초기화.

종종 지끈거리는 머리와 흔들리는 기억은 때문이리라, 마스터는 설명했다.

평소에도 사람으로 말하자면 건망증처럼 어떤 것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고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는 것도. 카이토라면 가지고 있을 기본적인 성격도 사라진 나는 종종 수리 센터에 가자고 권했지만 마스터는 그러자고 해놓고선, 그 약속을 매 번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기억하지 않아도 좋아. 지워진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도 카이토를 잃지 않았으니 다행이야."

 

이상적인 마스터,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자랑스럽게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마스터는 좋은 주인이다. 목이 망가져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이런 나를, 사람이 아닌 것에 의미 없는 애정을 아까울 정도로 쏟아낸다. 음표 하나 몰랐다는 마스터가 하나 하나 공부해서 가르쳐 주는 과제곡마다 나는 마스터가 기뻐할 만큼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한 곡을 부르고 나면 한참 기침을 해야 하는 약한 몸으로 느릿하지만, 그걸로 나는 행복했다.

 

"으음….또 깬 거야? 메모리가 엉켰어?"

"깨셨어요? 죄송해요….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기쁘면서도 그것은 이따금 아팠다. 어째서 아픈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의문은 눈물로 바뀌어 얼굴을 타고 흐른다. 마스터는 커다란 손으로 내 볼을 부비다 눈을 덮었다. 눈가에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흔들리는 머릿속을 잡으려는 듯 가득 껴안고 등을 다독여 주어서, 나는 생각나지 않는 그에 대한 기억을 포기하기로 한다. 지워졌다면, 그것은 기억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소멸이다.

 

"괜찮아. 나쁜 기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어."

"그러고 싶은데, 계속 떠올라요. 오류 인가 봐요."

"자꾸 우리 카이토 괴롭히네, 혼내줘야겠어."

 

장난스레 건네는 말에 걱정이 묻어있었다. 마스터 품에서 울며 잠이 들면 그는 이마와 물기 어린 눈에 입을 맞추고, 나는 힘겹게 그를 안았다. 밤이 되면 침식하는 지워진, 과거의 알 수 없는 메모리조각은 유리조각처럼 투명하지만, 끝이 날카롭다. 텅 빈 머릿속을 굴러서 지끈거린다.

 

 

*

 

 

이거, 별것 아냐.

내 친구였지만 그 녀석은 별로 좋은 녀석이 아니었다. 화가 나면 주먹부터 나가는 부류의 사람이라 깊이 사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우연히 녀석의 집에 들렀을 때 시답잖게 어질러진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방구석 모퉁이가 카이토와 첫 만남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몸을 떠는 안드로이드는 낡고 피가 묻어 검붉은 빛을 띠는 등줄기가 위태로워 보였다. 내 눈길이 멈춘 것을 알아도 그 녀석은 무시하라는 듯 '그것'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마치 어지러운 방 일부라는 듯. 녀석과 이야기하는 중간 나는 방의 모퉁이를 쳐다보았다.

 

"신경 쓰이냐?"

"야, 저게 뭐야. 꺼놓던지…."

"저거 보컬로이드인데. 모르냐? 노래하는 거라는데…. 손대기 싫어."

 

끄려면 만져야 하는데, 이젠 그것도 싫어졌다는 말이다. 모퉁이에서 자그마하게 흔들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든 얼굴에는 지독하게 맞아 터진 빨갛고 파란 멍이 가득했다. 그가 평소에 노래에 관심이 있다던가, 그런 고상한 취미 들은 적이 없으니까 어디서 대충 얻어 온 것을 화풀이용으로 쓰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를테면 말하는 샌드백, 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에게 화를 주체못하고 손찌검을 하다 헤어진 녀석인데 오죽할까 싶었다.

 

"너 때문에 신경 쓰인다잖아. 닥치든지 꺼지든지."

"-..다리가. 망가져서…."

"말 대답하냐? 그럼 닥치라고."

"네, 마스터."

 

그러더니 녀석은 질 낮은 목소리로 저것. 다리 내가 발로 한번 차니까 한 번에 부서지더라. 되게 약해. 하고 농담으로 때리는 맛이 나름 괜찮다고 킬킬거렸다. 불쌍하네. 영혼 없는 내 대답에 그는 그래 봐야 고물이라고 받아쳤다. 아프게 쿨럭이는 숨소리나 텅 비어 보이는 회색 눈은 줄곧 마스터라 칭하는 그를 향해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카이토를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었다. 며칠 뒤 다시 찾아간 그 녀석의 방에는 숨만 겨우 붙어있는 카이토가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술 마시고 들어왔는데, 눈에 보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피부가 드러난 손이나 얼굴에 온갖 종류의 상처로 성한 곳이 없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에 깨진 술병 조각이 박혀 아직도 이마에서는 짙은 색의 피가 말라붙어 전날의 끔찍한 폭력을 떠올리게 했다.

 

“정말 저렇게 놔둘 거야?”

“니가 뭔 상관이야. 내가 동물 학대를 한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것도 아닌데.”

 

쳇. 기분 나쁘다는 듯 혀를 찬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목에 감긴 더러운 머플러를 잡아 올렸다. 목이 졸린 카이토는 이미 기능을 하지 않는 다리로 땅을 딛다 넘어졌다. 그 와중에도 카이토는 앵무새처럼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하고 닿지 않을 말을 다급하게 외쳤는데, 쉰 목소리가 빌어먹게 처절해서 그 녀석의 화를 돋우기엔 충분했다. 미련하리만큼 일방적인 각인된 애정이 부질없게 둘을 이어주고 있었다.

 

나는 그게 왜 탐이 났는지 모르겠다.

 

“너 이거 마음에 들어서 그래? 줄까? 근데 이거 남자야.”

“힉..안돼..마스터, 버리지..마세요. 제가 잘할게요. 죄송해요….”

“넌 좀 닥쳐..진짜 확 갖다 고물상에 팔아넘기기 전에….하긴, 고물상 가도 얼마 못 받겠다.”

“너 이거 얼마 주면 팔거야?”

“싫어, 싫어요. 팔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절 사가지마세요..”

“시끄럽네...손댄 김에 꺼야겠다.”

 

마주친 눈은 짙은 원망을 담고 있었다.

당신이 너무 싫어요.

내가 카이토에게 들었던 첫 마디.

줄어든 통장의 숫자로 진득한 애정을 가득 구매한 날.

 

 

*

 

 

마스터는 관계 후에 입버릇처럼 나를 사랑 하냐고 물었다. 안드로이드에게 마스터를 사랑하느냐 묻는 말은 답이 정해진 의미 없는 질문이다. 나는 그렇다고, 노래만큼 당신을 사랑한다고 언제나 대답했다. 그러면 마스터는 조금 쓸쓸한 얼굴을 했다. 노래만큼이라는 수식어가 부족한 것이었을까. 노래보다 소중한 것이 생길 거라고는 고장나 뒤죽박죽인 머릿속에서는 답이 도출되지 않는다. 낮이면 홀로 앉은 이 방에서 오랫동안 마스터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 떠오르는 건 찢어진 페이지의 검은 얼굴. 그리고-

 

날 사랑하느냐 묻는 당신.

깊은 연산은 파고들수록 알 수 없는 방정식만이 나타날 뿐이다. 원형의 그래프를 그리다가, 회전하는 관계는 스산히 부셔진다. 무한으로 증식하는 조각난 메모리들 사이에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려다 번번이 찢어지고 만다.

 

[카이토, 뭐 하고 있어?]

 

메신저의 알람이 울렸다. 회사에 있을 마스터의 점심시간. 곧 전화 수신 아이콘이 떠올랐다.

 

“여보세요? 카이토. 뭐해? 메시지 못 봤어?”

“봤어요. 답장 보내려고 했는데….점심은 드셨어요?”

“응. 먹고- 식후땡 하러 나왔지. 아이스크림 하나 먹지 그랬어. 또 가만히 앉아있었어?”

“헤헤….아뇨, 바깥 구경도 하고. 악보도 읽었어요.”

“보고 싶다. 일찍 들어갈게….끊어야겠다. 뽀뽀-”

 

수화기 너머로 쪽. 하고 입술 붙이는 소리가 넘겨졌다. 마지못해 차가운 수화기에 입을 맞추고, 닿은 곳을 소매로 닦았다. 마스터에게 말 한 것을 지키려면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어야 했다. 냉동실의 문을 열어 한 칸을 가득 채운 아이스크림 중에서 하나를 골라 먹었다. 하루에 하나를 먹는다 해도, 냉장고가 비려면 모자랐다. 마스터는 내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고 말했는데, 기억이 지워진 나는 그렇지 않았다. 맛있었냐고 묻는 흐뭇한 미소가 보기 좋았을 뿐이다.

 

“사랑해. 보고 싶어.”

 

정말로?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의 답은 망가진 기억과 함께 삭제 된 게 아닐까.

집에 돌아온 마스터는 버릇처럼 이마와 눈에 입을 맞추고, 나를 품는다. 마치 놀이공원에 놀러 온 아이처럼, 잠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스터를 안고 살이 닿으면 시원한 향기에 취해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도 따뜻해서, 고장 난 눈물이 쏟아지려는 따가운 눈을 마스터의 가슴에 부볐다. 어깨에 고개를 파묻자 귀에 달콤한 주문을 속삭였다.

 

“지금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야.”

 

명령에 복종한다. 그것이 나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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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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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유카 [고백을 거절 할 때]


신발을 벗는 유정은 바닥에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장미가 한송이에 얼마라고 한다면, 이 1000송이의 장미에는 꽤나 돈이 들었을것이다. 그 금전의 표현이 그녀의 가장 큰 가치표현일 것이라고 유정은 생각했다. 함께 받은 차 열쇠는 손에 쥐어주고, 억지로 구겨받은 장미꽃다발을 조수석에 던져넣고 운전 해오는 길은 머리아픈 장미향이 코를 찔러댄다다.

"보통 남자 쪽이 주는거 아닌가요. 그것도 엄청난 확신이 있을때만."


그래서 그런 날 선 말을 던져버리고,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을 곱씹었다.
지금의 유정보다 높은 지위니 수입정도가 괜찮거니 하여 불확실한 고백에도 이정도 투자를 하는건가. 그렇다면 값싸고도 값싼 여자가 분명하다. 최근 몇 년 간의 고백중 가장 기분나쁜 종류의 것이었다. 오만하고, 역겨웠다.
받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까 하다, 코를 찌르는 차마 생생한 붉은빛이 선명하게 풀내음이 나는 것을 버릴수가 없었다. 신발소리에 뛰쳐나온 카이토는 꽃다발을 쳐다보았다. 혹시나, 하는 즐거운 짐작으로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이게 뭐에요?"
"몰라서 묻는건 아닐꺼고. 너해."


발로 톡, 포장지를 넘겨차자 꽃 잎 몇몇개가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이리 하잘것 없는 움직임에도 떨어지는 꽃을, 어찌 사랑의 상징물로 만든것일까. 고까운 시선을 카이토에게로 가져갔다. 파란 매니큐어가 발린 손가락으로 붉은 꽃잎을 주워담은 장미다발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색 대비가 좋네."
"예쁘다. 색도 향도 참 짙어요."
"의미 없는 색이고 향이지."


유리 물병을 가져다가 풀어헤친 장미를 꽂아두었다. 1000송이 전부를 넣기에는 온 집이 장미향으로 가득 찰까봐서, 네 다섯 송이만 넣어두었어도 며칠동안 집에는 진득한 향기가 끈덕지게 맴돌았다. 향기가 느껴질때마다 유정은 카이토를 불러 가까이 두었다. 카이토에게서는 아무 향기도 나지않는다. 장미를 만진 카이토의 손은 그대로 그 물이 들어있었다.


"손에 붉은 물 들었다. 이리줘봐."
"씻으면 지워질거에요. 화장실-"
"이리줘."


손목을 잡아 끈 유정은 붉은 기가 도는 손가락을 핥았다. 입 안에 그녀의 더러운 향수냄새 같은게 감도는것 같았다.



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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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카이 소재멘트 '사랑을 담아 꽃다발을' 키워드는 예지몽

보컬로이드는 꿈을 꾸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 사라진 시간동안 나의 남은 반의 쪽짜리 의식은 쿠키를 정리하거나, 조각모음을 할 것이다. 사실은 그게 어떤 기전인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른다. 인간들이 자신들이 왜 꿈을 꾸는지 모르는것처럼. 다만 어렴풋이 남아 눈을 떴을때 사르르 사라지는 그러한 메모리 소거음이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했다.

오늘은 달랐다.
사르르 하고 메모리 사라지는 음에 더하여 어떤 영상이 펼쳐졌다. 그렇게 밖에 설명 할 수가 없었다. 현실이 아닌줄은 펼쳐진 풍경이 아름다운 색색의 꽃이 휘드러지게 펼쳐진 들판이였기에. 나는 이런곳을 생전 와본적이 없는 도시 출생이였다. 며칠 전 TV속의 영상을 보고는 마스터와

"와, 저런곳도 있어요? 멋지다. 색이 정말 여러가지에요. 눈아플정도로. 우와.."
"나도 가본적 없어..어디냐 저기. 제주도? 섬이야."
하고 입맛다시듯한 대화를 했던게 떠올랐다.

나는 흑백이였다. 그게 좀 신기했다. 내손을 내려다보곤 만져봐도 아무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것보다 사르르, 하고 물결치는 온갖색들이 눈부시게 인식을 요구했다. 발밑의 조그 만 것부터 시작해서 키 크기만 한것들까지 세상에. 너무 예쁘다. 하고 읊조리자 메아리치듯 울려퍼졌다.
이런게 꿈이라면 매일 겪어도 기분좋을것 같아. 비록 만져도 꽃의 느낌이나 향기는 느껴지지 않아도 나는 그 섬에 갈수 없을테니 이게 최선아닐까.
마스터도 함께 봤으면, 하고 생각하자 장면은 파스스 깨져와 덮여진 이불의 느낌으로 돌아왔다.

"카이토? 왜 깨워도 안일어나. 놀랬잖아."
"어..그랬어요? 저 신기한거 봤어요. 우리 며칠전에 TV에서 본 꽃들판 있죠, 그게 제 메모리에 많이 남았나봐요."

그거, 나 꿈꿨어요.

마스터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그랬구나. 하고 웃어주었다.
"꿈..꿈이란말이지. 그럼 조금 신기한 꿈일수도 있겠다."
"신기하죠. 그걸 꿈이라고 말 할수 있는걸까요?"

"그럼, 예지몽이라고 할껄 그런거."

하고 마스터는 등뒤에서 온갖 파스텔빛이 가득한 조그마한 꽃들판을 내밀었다.
퍼지는 꽃향기에 눈이 따가워 눈물이 나오려는걸 참고 씩 웃었다.

"역시 함께보는게 더 너무 좋아요."

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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