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place 01

긴것/My Place 2014. 8. 18. 17:45

MY PLACE

1.

이사를 했다.

그동안의 생활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증거가 이 공간에 있다.

햇빛 겨우 들던 반지하를 벗어나 번듯한 오피스텔로 값을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이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일과 병행 하려니 신경 쓰이는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자신을 증명하는 것만 같아 즐거웠다.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겠느냐고 묻던 고향의 지인들에게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다.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나 자신에게도.

취미의 연장선을 직업으로 선택했을 때 나는 이 선택이 절벽으로 줄 없이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주위의 반응도 그러했다. 나는 고향에서 꽤 괜찮은 학교의 실용적인 과를 다니고 있었으니 그들에게 ‘음악’이란 멀고도 한참은 실용성에서 벗어난 개념이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일과 작업, 지독하게 막히는 출퇴근 시간의 짜증을 참지 못하고. 처음 이 도시로 왔을 때의 향취가 가득 담긴 짐은 소각장에 모두 태워버렸다.

이제 생계수단과 같은 모양을 한 음악의 귀퉁이를 베어 물고 작업실과 가까운 오피스텔로 옮겨왔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오피스텔은 깔끔하고 아직 새것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버린다고 버렸는데도, 박스 열 개가 넘어가는 이삿짐을 올려놓자마자 가장 커다랗고 하얀 상자에 매어져 있던 끈을 풀었다.

상자에 들어가면서 튀어나온 입으로 자긴 짐이 아니라느니, 제 발로 걸어가겠다느니 쫑알거리던 카이토는 편안히 돌아누운 모습이 마치 덩치만 큰 어린애 같아 나는 한동안 카이토를 지켜보고 있었다. 2년의 시간 동안 나는 카이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설명서 너머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안드로이드 기술의 기이함을 느끼곤 한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조용한 정적만이 카이토를 감싸고 있다. 얼굴을 덮고 있는 파란 머리칼을 살짝 넘겼다가 이내 혼자 후다닥 일어서버리고 말았다. 취미로 들였다가, 조금이나마 생계수단이 되어주고 있는 손에 딱 맞게 길이 든 카이토와 나는 이제 물이 올랐다고 해도 좋을 만큼 노래에서는 궁합이 잘 맞는다. 싸우는 일도 줄었고. 일방적인 강요나 억지도 가라앉아 평화로운 우리 사이만큼이나 깨끗한 새 벽지가 발라져 있는 큰 거실은 조용하게 내 눈에 익숙해지려 존재감을 알려온다. 새벽부터 움직였던 긴장이 이제야 풀린다.

이제 깨워볼까.

혼자서 짐 정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어제저녁까지 새로 이사 올 집을 가보지 못했던 카이토는 마지막으로 상자를 정리하며 도착하자마자 깨워달라고 부탁했었다. 이삿짐을 옮겨갈 차의 정원이 겨우 2명인 트럭이여서, 어쩔 수가 없다는 말에

“오랜만의 물건취급이네요.” 하고 토라져 고개를 돌려버린다. 호강에 겨운 투정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꽤 카이토에게 잘 해주는 편이니까.

한동안은 게이가 아닐까, 하는 고민에 휩싸이게 할 정도로 처음 만난 뒤에 나는 카이토에게 빠져있었다. 누군가에게 느끼는 감정은 말로는 표현하기 미묘한 법이지만 이번의 것은 정말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감정을 해부하고 분석하는 동안 나는 카이토와 일정 간격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몇 달간, 그 거리를 유지하는데 익숙해졌던 카이토에게서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람다움’이 사라지면 부르는 노래에서도 기계음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까다로운 녀석. 목 뒤의 스위치를 꾹 누르자 사람이 잠에서 깨듯 무거운 눈꺼풀이 파스스 떨렸다.

“카이토, 일어나. 새집이다.”

“오면서 상자 막 옮기신 거 아니에요? 부딪힌것 처럼 온몸이 아픈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됐고, 집 구경이나 한 뒤에 짐 같이 풀자.”

상자에서 몸을 일으킨 카이토는 그토록 자랑하던 새집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눈에 담았다. 인간의 정착 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하의 욕구를 감내하고 움직일 정도로 대단한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귀찮은 건 싫어. 하기 싫은 것은 하기 싫어.’ 마이웨이식 입버릇을 삶의 모토로 하는 마스터가 두 개, 세 개 외주 일을 받아가며 작곡을 하며 자신의 노래를 만들 때보다 더 열심히 밤을 새우는 것을 보니 이전의 집에 여간 신물이 난 게 아니었나 보다. 사실은 그럴 만했다. 악기와 잡동사니가 이리저리 쌓여 몸 누일 공간 만들기가 힘들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비가 오면 천정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방음은 하나도 되지 않아 옆 방의 혈기왕성한 커플의 은밀한 대화가 귀에 박혀왔다.

이를 으득갈며 이사 갈 꺼야. 이사. 하고 베게로 귀를 막으면, 남은 한쪽의 귀는 손을 내밀어 막아주었다.

“신경 안 써도 돼, 네 귀나 막아.”

“전 그냥 뮤트 해놓으면 되는데요.”

아. 그렇지 참.

민망한 남녀의 신음이 여과 없이 흘러 얼굴을 붉혀온다. 자리가 없어 옆에 딱 달라붙은 카이토의 일정한 체온이 등에 맞붙어 있었다. 혼자였다면 저질스러운 음성에 맞춰 자위라도 했을 것이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성욕을 가라앉히고 귀에 닿은 손을 슬쩍 밀어 내린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깊은 늪에 빠져드는 듯 아래쪽이 울려온다. 상상하는 것은 옆 방의 천박한 남녀가 아니다.

조금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한 건 그때부터였다.

*

오. 저번 집보다 훨씬 깔끔하고. 넓고.

“작업실도 집에서 쓰실 거 에요?”

“누구 덕에.”

한쪽 방에 풀리지 않은 채로 놓인 새로운 믹싱장비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좁은 장소와 빌어먹게 비싼 장비들 탓에 나는 작업실을 여기저기 빌려 다녀야만 했고, 작업을 위해 며칠 집을 비우게 되면 그야말로 카이토와의 전쟁이 따로 없었다. 시위하듯 그렇지 않아도 좁은 집안을 들쑤셔놓거나, 전화에서 불이 난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문자메시지가 줄줄이. 여러 번 혼을 내도 ‘보고 싶어서.’ 하는 진심 어린 눈빛에 지고 만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인 내 탓이려니.

“그러면 이제 작업한다고 밖에 나가실 일은 별로 없겠네요?”

“네네. 신 난다-겠네.”

“좋아요. 이번에 돈 많이 쓰셨네요. 이것들 다 신상품이죠?”

당연하지. 너보다 더 좋은 스펙의 기계들이라고. 기기가 든 커다란 상자를 자랑스럽게 툭툭 쓰다듬었다. 음악상에서 고뇌하던 나날이 스친다.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할 것인가. 길가를 지나가며 그림의 떡 보듯 침 삼켰던 물건을 직접 결제 할 때의 기쁨이란. 어른이다. 나도 이 정도 물건을 만질 수 있는 초보 티 벗은 작곡가이다.

“이제 이걸로 열심히 벌어야 해. 다 빚내서 산 거고.”

“의욕이 가득하시네요. 이 기세를 쭉 유지하시는 거에요.”

“너도, 이제 제대로 된 노래를 불러야지.”

그동안은 습작 정도로 대충 얹혀진 노래나 과제곡 정도만을 조교연습으로 했었다. 남의 노래를 부르는 데에 익숙해진 카이토에게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자아실현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네! 하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파란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린다.

무리하게 든 돈을 이제라도 줄이느라 이삿짐서비스는 짐을 옮겨주는 것까지만 신청했다. 제대로 짐을 정리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들뜬 마음에 며칠이 걸려도 좋으니 천천히 새것의 기분을 음미하고 싶었다.

이것저것 옮기고 나니 해는 져 버린 지 오래 되었고, 나는 이것만 옮기고 그만하자. 고 바닥에 늘어진 카이토를 설득한다. 발길에 걸리는 몸덩이를 툭툭 발로 건드리자 칭얼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방전이에요. 더 못 움직이겠어요.”

“장난치지 마. 나 이거 혼자서 못 옮긴단 말이야.”

“오 분만요. 아니 십분만 있다가.”

등 돌아누운 카이토를 놔두고 혼자서라도 들어보려고 커다란 상자의 모서리를 잡았다. 뭐가 들었는지 내 허리를 넘어오는 크기의 상자는 발끝을 걸어 밀어보려 해도 꼼짝을 않는다.

“아오….여기 뭐가 든 거야? 카이토, 이 상자 옆에 글씨 뭐라고 쓰여 있어?”

“제가 보이는 쪽에 안 적혀 있어요. 어어, 발 조심하세요!”

온몸에 힘을 줘 억지로 들어 올렸다가 엄청난 무게에 손을 놓치고 말았다. 커다란 상자가 바닥에 떨어지며 커다란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청각이 예민한 카이토는 헤드셋이 끼워진 귀 파츠를 손으로 막았다. 놓친 손에 소리의 진동이 찌릿하게 흘렀다. 바닥과 천장을 울리는 소리에 혼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손으로 귀를 막은채로 카이토는 눈을 꾹 감았다.

“으아….아랫집 사람들 천장 다 부서지는 소리 났겠다.”

“귀가 찡찡 울려요. 아래층에 나중에 같이 사과하러 가야겠어요.”

“그러니까 이것 좀 잡아달라고 했잖아!”

“성질도 급하셔라. 오 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요. 정말로 방전될 것 같았다고요.”

“너 정말….한 대만 때려도 되냐.”

주먹을 쥐는 내 모습에 안드로이드 학대. 하고 팔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한다.

얄미워 죽을 것 같다. 어차피 아랫집에 사과하러 가서도 고개 숙이는 건 나고.

“망할 보컬로이드. 일어나. 더 늦어지기 전에 사과하러 갈 거야.”

“이사 와서 첫 인사가 사과라니. 아랫집에 무서운 사람이 살면 어떡하시게요.”

조폭이라든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조잘대는 저놈의 입을 한 대 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대로 요즘 세상은 무서우니까. 유하게 넘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다지 큰 체구가 아니고, 싸움은 커녕 말싸움도 이길 자신이 없다. 침을 꿀꺽 삼키고 바로 아랫집의 초인종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놀랍게도 문가로 다가오는 목소리는 내 옆에 있는 녀석과 비슷한 음성이었다. 중간 잠금을 건 채 고개를 빼꼼 내민 얼굴은 카이토였다. 편하게 기성 반팔과 홈웨어를 입었어도, 절대 풀지 않는 머플러와 특이한 파란색 머리칼, 눈동자.

“어라.”

“무슨 일이세요?”

“음, 저기. 저는 윗집에 오늘 이사 온 사람인데요. 아까 짐을 옮기다가 큰 소리가 나서. 혹시 못 들으셨어요?”

“아하! 그게 그 소리였구나. 마스터를 불러 드릴게요.”

조그맣게 꾸벅이고 총총 뛰어가는 아랫집의 카이토는 마스터-하고 거실 옆의 방에 들어갔다.

“우와. 아랫집에도 카이토가 있어요.”

“그러게….신기하다. 카이토는 잘 안 쓰는-”

잠금쇠가 열리고 문이 커다랗게 열렸다. 마스터라고 나온 사람은 키가 180은 훨씬 넘어 보이는, 건장하고 멀쩡한 남자였기에 나는 살짝 움츠러들었다. 별로 착해 보이지 않는 인상에 짜증이 가득한 얼굴. 그은 피부와 반팔 사이로 느껴지는 단단한 몸이 카이토를 사용하는 작곡가라기보다는 운동선수 쪽이 어울려 보였다. 그는 예상 했던 퉁명스러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아까 천장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 낸 사람?”

“앗. 네. 죄송합니다. 오늘 이사 왔어요. 짐 옮기다가 실수했네요. 많이 놀라셨나요?”

“귀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뭐야, 당신도 보컬로이드 쓰고 있네. 게다가 카이토.”

흐음. 나와 카이토의 아래위를 시선으로 훑던 그는 벽에 기대 팔짱을 꼈다.

“노래는 만들어?”

“아직 서툴지만요. 그보다….몇 살이신데 저한테 반말이신 거죠?”

“아. 미안 미안. 앞으로 얼굴 마주칠지도 모르는데.”

들어와요. 어색한 존댓말로 안내한 그는 자신을 A. 25 프리랜서로 카페나 바에서 연주도 하고, 작곡도 해서 겨우 빌어먹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렇군요. 첫 인사가 사과라서 이상하지만. 저는 D라고 하고. 나이는 28….저도 대충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식탁에 마주앉아 고개를 숙였다. 맞은편엔 A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와 그의 카이토가 대칭으로 앉아있으려니 왠지 웃긴 모습이었다. 전형적인 남자의 방의 분위기가 풀풀 나는 A의 거실에는 전자피아노와 기타가 떡하니 중앙에 놓여있어 그가 카이토를 쓰는 작곡가라는 사실을 형형이 나타내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한 캔 들고 마실래요? 하고 묻더니, 고개를 끄덕이자 자신의 것까지 두 캔. 그리고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두 개 꺼내왔다.

“자. 카이토들은 아이스크림 먹고.”

“앗.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아직 짐 정리를 덜 해서 편의점에서 대충 사올 생각이었어요.”

“아아. 뭐, 존댓말이 잘 안 나오네요. 그냥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리고 말 놓아도 돼요.”

D형. D형. 혼자서 읊조리는 그는 이미 그러기로 마음먹은 듯 스스로 호칭을 정리했다. 나는 외동이고 그동안 노래에 집중하느라, 기보단 솔직히 별로 교류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내가 형이라고 불릴 일은 많이 없었다. 나보다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형이라고 부르는 건 더욱 없었던 일이고.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D형. 같은 카이토 쓰는 사람 만나기 쉽지 않아요. 그것도 남자사용자는.”

“헤에. 그렇지. 나도 처음 보고 그렇게 생각했어.”

“그것도 진짜 작곡하는 사람은 더욱더.”

목이 따가울 때까지 꿀꺽꿀꺽 맥주를 삼킨다.

진짜 작곡하는 사람. 이상하게 무게가 담긴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이토들은 이미 조잘대며 자기소개 시간을 마치고 아이스크림을 신나게 먹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한입에 배어 나오는 행복한 미소에 나는 무심코 흐뭇하게 아이를 보는 엄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A는 다시 평소의 진한 인상의 얼굴로 돌아와 나와 카이토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흠. 하고 풀어지는 소리를 하더니 어디서 이사를 왔는지, 작곡은 어떤 쪽을 하는지. 어디서 배웠는가. 카이토를 사용한 지는. 질문을 쏟아냈다. 나를 시험하려는 질문의 목적을 숨기지 않아 듣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A는 아마 카이토를 사용한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카이토는 보컬로이드로 유명한 C사의 제품 중 거의 유일한 남성 성인형. 상당히 호불호가 갈리는 기종이고, 온갖 편견과 루머가 끊이질 않았다. 카이토의 사용자들은 그들만의 울타리를 만들어 자기 새끼를 보호하듯 카이토를 감싸고 들었다. 곱게 보지 않는 눈은 그들의 울타리를 욕하기도 했다.

그의 카이토는 투박한 모양새의 초기기종에 사용 감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아이스크림을 떠먹는 동작이 부분마다 끊기고 어색하다. 드러난 양팔에는 수차례 수리한 흔적이 남아있어서 그다지 곱게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궁금한 게 많나 봐?”

“정말로 카이토 쓰는 사람은 만나기 힘들어서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초면인데.”

“아냐….뭐. 말해주지 않을 것도 없지. 작곡은 단기학교에서 잠깐 배웠어. 원래 전공은 다른 쪽. 카이토는 음….카이토, 기동시간?”

“2-0-X-X. 7월 28일. 총 826일입니다.”

“그렇대. 보통 작곡은 바로 컴퓨터로 하는 편이야. 아직 실제로 악기를 잘 못 다루거든. 한다면 기타 쪽이려나.”

“그렇군요. 저는 T예고를 나왔어요. 전공은 피아노. 대학은 진학 포기.”

생긴 것과는 다르게 A는 상당히 표준적인 음악전공자의 길을 걸어온 녀석이었다. T예고면 나라에서 손꼽히는 예고 중 하나였다. 외국의 유명 음대로 진학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 보컬로이드 사용은 시시한 유희로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A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남은 맥주캔을 비운다.

“카이토 사용한 지는 올해로 8년.”

“우와….상당한 초기 사용자네. 그럼 고등학교 때 부터?”

“음. 그렇죠. 카이토는 저희 피아노반의 공용 보컬로이드였으니까요.”

공용.

미묘한 어감이다.

카이토는 ‘나’의 전용물이라는 인식 탓인지, 공용이라는 단어는 더러운 불순물이 낀 듯 불쾌감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D의 미묘한 표정변화에 A는 설명을 덧붙였다.

“공용. 예고는 그런 것도 있구나. 신기한데.”

“시범운행. 실패했지만. 저는 졸업 작품도 카이토로 했고.”

“피아노 전공이?”

“반주를 제가 했어요. 작곡은 다른 친구와 함께. 콜라보도 가능하니까.”

헤에, 들어보고 싶다. 진심 반 겉치레 반으로 뱉은 말에 A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결된 거실의 유리로 된 장식장의 문을 열었다. 꺼내온 CD를 넘겨주며 들어봐요. 건조하게 말했지만, CD속 음악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T예고의 졸업CD는 상업적으로 팔릴 정도로 퀄리티가 있다고 들었다.

“잘 들어볼게. 그럼 오늘은 이만 갈까. 시끄럽게 해서 미안했어.”

“앗. 네. 전화번호 드릴게요. 명함은 아직 없어서.”

“아아. 어. 종이 주면 나도 적어줄게. 짐정리만 하면 집에서 작업할거니까.”

정리 다 하면 초대할게.

얼떨결에 작업실 사람들 외엔 부모님 전화번호밖에 없는 단출한 전화번호를 넘겨주었다. 도시로 올라오면서 연락이 끊긴 지인들의 번호는 없는 셈 치고. A의 팔에 매달린 카이토는 친구가 생겨서 기쁘시겠어요. 하고 A를 올려다본다. 분명 카이토와 같은 기종인데도 낡고 수수한 분위기. 조용조용한 어조가 어른스러운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형이야. D형. 너도 다른 카이토는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까. 친구 하면 되겠네.”

“친구-”

“카이토로는 A쪽이 형이야. 8년이나 움직였대.”

“와아. 그럼 노래 많이 부르셨겠어요. 부럽다.”

그렇지도 않아요.

현관에서 배웅하는 A의 등 뒤에 반쯤 가려진 카이토는 작게 손을 휘저었다.

일부러 시선을 내려 카이토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그의 카이토는 조그맣게 감탄사를 남기고 등 뒤로 사라져버렸다. 낯을 가린다는 A의 말은 지긋지긋하다는 어투를 담고 있었다. 그런 세심한 부분까지 생길 수가 있나. 의문을 품었지만 나는 고개를 숙이고 A의 집을 나섰다. 시간상으로 오래 지나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자 해가 완전히 진 밤이 되어 있었다.

다음에 놀러와. CD도 잘 들을게.

“형. 문자 할게요. 안녕히 가세요. 야. 인사 안 해?”

“아….안녕히 가세요. 카이토도, 안녕.”

“응! 다음에도 마스터랑 놀러올게요!”

오늘은 놀러 온 게 아니라는 나의 말을 시답잖게 넘기는 카이토는 처음 만난 다른 카이토가 신기했는지 며칠 동안 아랫집의 카이토 말이죠. 하고 자신과의 차이점을 짚었다. 나와 카이토가 느낀 바는 비슷했다.

'긴것 > My Pla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my place +  (0) 2014.08.18
my place 04(完)  (0) 2014.08.18
my place 03  (0) 2014.08.18
my place 02  (0) 2014.08.18
Posted by michu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