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스미 4주년


행복의 수를 세어보면


친애하는 당신에게.


언젠가 당신이 나의 손을 잡으며 푸념처럼 했던 말이 떠오른 건 사소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올여름은 진득하게 더웠으니까요. 에어컨은 고마우면서도 폭력적인 기계에요. 머리가 아프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차가운 바람을 포기하지 못하고 소파에 누워 얼음처럼 차가운 손과 열띤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선. 죽겠다. 죽겠어. 사람 살려. 중얼거리는 당신의 장난이 섞인 말이 들으며 가져간 손이 내 볼에 닿자 한껏 누르거든 목소리로 스미레 손은 시원해서 좋아. 당신이 좋다면 나도 좋아요. 소파 옆에 기대서 앉아 깜빡깜빡 졸리운 눈이 감겼다가-. 천천히 눈을 뜨는 간격이 느려지고 편한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도 모르게 같이 얼굴을 맞대고 늘어지고 싶은 시간이에요. 그리고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과 이마를 맞대고 고요하고 시원한 물에 잠겨들어서 겉으로는 따스한 햇볕. 그리고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이상향을 떠올려요.



"스미레, 넌 내가 죽으면 어떡할래?"


그 물음만큼 내게 두려운 질문이 없었어요. 그래서 당신의 손을 더욱 굳게 잡고 그럴 리가 없다-. 고 대답했죠. 당신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짓지 말았어야 했지만, 감정을 숨기는건 아직도 어려운 일이에요. 언젠가 우리의 시간도 끝나겠죠. 대부분은 확신할 수 없는 일들만 가득해요. 당신은 가끔씩 병원에 다녀가고, 피곤하면 침대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져요. 그때마다 나는 혼자 집을 지키며 당신이 돌아오면. 우습게도 혹시 돌아오지 않을까. 떠올리면 눈물이 난답니다. 우습지요. 매번 돌아와 주었는데. 우리의 시간은 다른 절댓값을 가지고 있지만 겹쳐서 흐르고 있어요. 


"그럴리가 없다니. 사람은 일단 언젠간 죽는다고..?"

"..그렇지만. 그럼 마스터랑 같이..죽는게 좋을까요?"

"진지하게 말하지 마. 무서워."


그래요. 무서우니까. 미래를 알지 못하는건 무서운 일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같은 아침을 시작하고 작은 화분을 기르고-당신은 물을 몇번 주는게 끝이지만, 그 아이들은 그걸로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답니다.- 저녁에 함께 흘러가요. 매번 좋은 꿈 꿔. 내일 또 보자. 내 귀에 소근거리는 목소리는 소원을 비는 것처럼 경건하고 평화로워서 이루어질것만 같아요. 당신의 팔에 내 체온을 이어서 하나가 되는 상상을 해요. 모든 게 미지수로 가득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 만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사건으로 내 세계를 만들어가요. 


"응. 내일 또 만나요."

"노래 불러줄래? 저번에 들었던 것도 좋았고."

"좋지만..듣느라고 안 주무시잖아요."

"낮에 좀 잤더니. 오히려 이렇게 돼버리네."


때로는 말을 표현하는 것 보다 모양이 확실한 음에 담긴 노래가 이 순간의 감정을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아까 낮에 한 이야기 말인데. 별 뜻 없이 한거였어. 놀랐다면 미안해. 노래하는 동안엔 말을 할 수 없으니. 그저 눈으로. 그건 내가 당신을 너무나 아끼고 있기에 그랬어요. 당신이 준 행복만큼 내가 돌려줄 시간이 필요해요. 당신이 이걸 보면 웃어줄까요. 항상 함께 있는데. 편지의 효용이 있을까요. 그렇지만 당신의 얼굴을 보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피어오르는 꽃들처럼 자라나는 머릿속의 기쁨은 오직 당신을 향하고, 수를 세어보면 영원이 지나가요. 

그러니까, 이 모든 슬픔은 당신과 행복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우리 슬퍼말아요. 

나는 아직도 당신의 빛나는 눈을 보고 있어요. 언제라도 당신의 손을 잡고, 가만히 울리는 노래를 불러줄게요. 



p.s 넣어둔 꽃은 가을이 되면 책갈피가 될 거예요.





이게 뭐라고 쓰는데 오래걸렸을까요..새로운 형식으로 써보려다가..

유은이랑 오래오래 행복하자~ 4주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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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스미 1000일!


永遠にあなただけの花




같이들어주시면 감사한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xEGS5mRSTdE




음악 소리가 들린다. 빈 곳을 적당히 외롭지 않게 만들 정도로 이 공간에 흐르고 있다. 음악은 인위적으로 만든 기계음과 사람이 연주하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의 소리 등을 모두 아우르는 포용력이 커다란 말이었다. 언젠가 유은이 말한 적이 있었다. 스미레, 너는 말 하는 것도 노래소리 같아. 그래서-. 별 것 아닌 대화에서 출발한 말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자니. 부끄럽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동그란 음향으로 이어지던 목소리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래서-. 그 노래를 다시 이어보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돌림노래처럼 유은의 뒷 말을 반복했다. 장난치지마. 웃음기 섞인 선율이 다시금 시작된다. 작은 웃음소리가 포인트로 뿌려졌다. 듣고 싶었던 말은 입을 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뭘 하고 있었더라. 맞아. 목소리가 없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악기만으로 중첩된 무기물들의 의미 없는 타격이나 공기의 움직임이 고운 소리로 바뀌는 일을 경이롭게 관람하고 있었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지만, 가끔씩 고개를 까딱이기도 한다. 버릇이라고도 말하는 정서 환기와 맥락을 함께하는 무의식적 행동이었다. 스미레는 책상이나 의자처럼 영영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다. 의지와 행동양식은 사람과 원숭이도 유전자-유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제법 놀라운 단어선정이었다-가 얼마차이 나지 않는대. 몇퍼센트인진 잘 기억이 안나. 작지만 큰 차이잖아. 그는 마치 사람과 원숭이의 간극이 책상과 스미레의 차이와 비슷하다는 비유였다. 책상과 같은걸 사랑하게 된다면 곤란하잖아. 그렇게 결론을 내린 스미레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선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것으로. 깊고 농축된 감정에서 기인하는 행동과 일련의 교류 또한 그들만의 전유물이다. 이른바 사랑이라는 개념은 세상에 만연하게 존재하면서도 실제를 알지 못하는 소문과 같았다.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으로 이어지는 노래처럼.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나타나는 결과가 사랑의 존재를 증명한다. 어려운 양식이다. 형체가 없는 사랑이란 존재를 실천하는것은. 빛은 보이지 않지만, 어둠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추상은 그림자에 의존한다. 



기억의 아래에는 진득한 애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 세계에 수많은 유전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개체에서 자신에게 어울리면서도, 그 또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관계를 만들 확률이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희박한 수치란 것은 굳이 계산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취향에 맞춘 안드로이드는 기적보다 훨씬 간편한 물건이었다. 순종하는 것을 사랑의 일환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사랑이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유에서, 사랑은 많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온전한 소유였다. 매일 가느다란 빗으로 물결치는 푸른빛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엉킨 곳이 하나도 없던 때에도 그는 머리카락을 빗어내렸다. 머리를 빗는 행위를 향유한다. 이따금 머리카락 하나가 끊겨 바닥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자신의 팔이 떨어져 나간듯 상심한 얼굴로 떨어진 머리카락은 다른 상자에 모았다. --. 너는 아름다워, 너무나. 너무나. 아름다워. 사랑스러워. 만지면 닳기라도 하듯,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려다 그것은 닿지 못하고 떨리던 채로 생명을 다 하고 떨어진다. 박제된 꽃에게선 향기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꽃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치있다. 그 또한 추상적인 이야기였다. 아무튼 마스터에게 친밀 이상의 애정은 이미 주어져 있던 태생이었다. 마스터도 그것 이상은 원하지 않았다. 그저 아름다운 모습으로 존재하기만을 소원한다. 그것으로 그는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니 생을 포기했을 때도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목을 줄에 거는 행위가 죽음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를 말렸을까. 그럴 의무도, 이유도 없었다. 죽음을 방관 했던건 그의 발에 닿았던 의자와 방에 있었던 책상과 화분도 함께였다. 죄를 묻자면 그들에게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는 소중하지만, 소중하지 않았다. 그에게 나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동등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악장이 거세졌다. 단조롭기만 해서는 의미를 지닌 음악이 되지 못한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으므로, 스미레는 가볍게 손가락을 무릎에 두드렸다. 잠에서 깨어나듯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이 방은 익숙했다.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다. 작고 하얀 테이블과 색을 맞춘 의자. 삼단으로 된 책장. 은은하게 풍기는 따스하고 싱그러운 꽃향기. 방의 크기에 비교해 커다란 창문을 열면 계절에 맞는 식물이 가득한 정원이 펼쳐진다. 여름은 멋진 계절이다. 향기가 옅은 꽃도 자신의 향기를 한계까지 짙게 만드는 녹음은 하나가 모든 것을 조립하는 장관이다. 언젠가의 아침처럼. 창문을 열고 지평선으로 뻗은 시원한 푸른색의 향연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 오게 된 이유 같은 건 잊어버리고 말았다. 기억하고 있지 않으니 잊은 것도 없었다. 회상은 어제처럼 또렷하게 떠오르고, 스미레는 반가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 이처럼 아름다운 장소는 정원을 떠난 이후에도 찾기 힘들었다. 머리카락과 볼을 스치는 시원한 기운이 스민 잔잔한 바람은 걸음에 상쾌한 리듬을 돋우어준다. 그늘이 내린 곳에 앉아서 바람에 흔들리는 크고 작은 꽃을 바라보고 있자면, 시간은 항상 아쉽게 흘러간다. 문을 열자 하얀색의 계단이 나타났다. 신고 있던 코가 동그란 단화를 벗어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맨발로 걸어가도 다치지 않는 상냥한 장소였다. 누군가가 들으면 우습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흙을 밟는 감촉은 살아있는 기쁨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한 낮의 여름하늘은 뜨겁게 산란하며 식물의 빛을 감미롭게 덧칠한다. 몇 년 전 여름처럼, 해바라기와 라벤더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시야는 풍부하게 빛나고 있었다. 손으로 어루만지면 금방이라도 손에 색소가 묻어 나올것만 같았다. 커다란 여름용 모자를 쓰고 하루종일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고요하게 맴도는 강과 늘 움직이는 바람 모양의 수풀을 바라보고 있자면 영원히 시간이 멈춘것만 같았다.



"나는 그리워서 돌아온 걸까."



속삭임처럼 작은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잔디를 연주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의 중앙에 있는 심장과도 같은 커다란 나무로 다가가자, 넓게 드리운 그늘에 한 번도 상처 입지 않은 것 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낮잠에 빠진 유은이 보였다. 하얀 원피스 아래에 엷은 다리가 비춰 보인다. 고요하게 높낮이를 달리하는 가슴팍으로 눈이 움직였다. 규칙적인 숨소리는 풀밭을 지나는 바람소리와 비슷한 음색이었다. 



"마스터, 여기 계셨네요."



옅은 잠이었는지, 스미레의 속삭이는 목소리에 천천히 유은의 눈꺼풀이 막을 열었다. 익숙한 정적인 눈빛은 스미레를 향하다 곧 미소로 바뀌었다. 아직 설프게 졸린 얼굴로 깜빡이다 마음을 고쳐잡은듯 입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마음이 편해져서 잠들어버렸나봐."

"그런 곳이죠? 무척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니까요."



부드러운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스민 애정이 어린 모습은 정원의 그 어떤 꽃보다도 진한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잠에서 깬 유은은 왠지 모르게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무언가에 토라진 듯 입을 비쭉이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들꽃이 가득한 정원은 꿈처럼 아름다웠다.



"이런 곳을 두고 어째서 날 따라온 거야? 내가 스미레라면 좀 더 이 곳을 좋아할것 같아. 집에 있는 화분을 기르는건 부족하잖아. 이렇게 멋진곳을 두고."

"네. 물론 정원은 아름다워요. 하지만 마스터는 여기서 살 수 없고, 전 마스터를 사랑하는걸요."

"정말. 나를 사랑해?"



여름의 빛을 닮은 눈동자는 그늘 아래 비추는 빛깔에 더욱 녹음의 색으로 반짝였다. 미리 짜인 대본을 말하듯 목소리가 이질적으로 차분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믿지 않는다면 사랑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었다. 얼마만큼 당신을 사랑하느냐 물으려면 이 모든걸 내어 줄 만큼. 이라고 대답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존재의 유무라면-. 한동안 대답을 찾지 못하고 망설이자 모호한 표정을 바라보던 유은이 살짝 미소지었다. 



"어려웠어? 쉬운 질문이야. 스미레가 날 사랑하느냐 물은 거잖아."

"응. 그, 그럼요. 갑자기..그런건 어째서 물으세요?"

"글쎄. 꿈이라서 그럴 거야. 이건 꿈이거든. 스미레."

"꿈...그렇구나. 그래서 다시 돌아왔구나. 마스터에게도 이 곳을 보여줄 수 있어서 기뻐요."

"이상하지 않아? 꿈이라지만, 한유은이라는 사람이 너에게 이런 걸 질문하고 있잖아."

"마스터는 겁이 많으니까요. 아마도. 질문의 대답이 무서웠을거에요. 그럼 이건 마스터의 꿈인가요?"



그래. 그럴지도.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스미레는 자세를 고쳐잡고 나무에 기대앉았다. 꿈은 얼마간 깨지 않을 모양이었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허벅지 위에 구겨진 원피스 자락을 고쳐잡았다. 가볍게 무릎을 두드리자 잠깐 망설이더니 머리를 대고 다시 누워버린다. 어깨를 몇번 옴짝하더니 눈을 감고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좋아. 어떤 걸 좋아한다는 건지 주어가 없는 감탄사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렇지만 동의하고 있기에, 스미레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몰라도 좋았다. 유은과 함께 해서. 편안하게 자신의 품에 누워있어서. 행복한 듯 미소짓고 있어서. 좋았다. 



"이대로 계속 함께 있는 것도 좋아요. 마스터와 함께라면 장소는 중요하지 않답니다."

"현실이 아니더라도?"

"꿈은 언젠가 깰 거에요. 하지만 저에게 마스터 이외의 현실은 없으니까요."

"나 말이야. 스미레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 꿈을 꿨어. 내가 아니라..너에게 손을 내민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그런 상상."



바람이 잦아들었다. 푸른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어깨와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유은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원에서 지내는 나날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곳엔 소중한 것이 많이 남아있었다. 다른 누군가를 만날수도 있을터였다. 물건은 누군가의 소유가 되지 않으면 버려졌다는 이름표가 붙기 마련이다. 주인은 선택할 수 없었지만 마음이 향하는 장소는 선명하게 손짓하고 있었다.



"하지만..지금은 당신만의 스미레니까요. 불안할때면, 제 손을 잡아주세요. 마스터가 그랬던 것처럼."



차가운 손 끝이 여러 갈래로 겹쳐진다. 늘 궁금했다. 사랑이란 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건지. 누군가를 영원히 따른다는 행동은 프로그램의 강제성 없이도 가능한 것인지. 스미레를 유지하면서 당신 속에 녹아나는 것이. 당신의 일부가 되는 것이. 이토록 행복한 일이 될 수 있는 지. 그 모든 것을 가르쳐준것이 당신이기에. 사랑의 증명은 때로 눈에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건 우리 둘이라고. 





***






긴 시간동안 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모자란것같다는 생각만 드네요..

부족한 점이나 원하시는점은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유은이 정말 사랑해 항상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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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스미 발렌타인

원하는 선물을 줄 수 있다면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늦은 오전의 볕은 겨울의 추위를 녹이고 머리칼에 따스한 계절이 돌아오고 있음을 말 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매일 같은 하루를 똑같이 반복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같은 하루는 한 번도 없었다. 유은과 나눈 대화가 달랐고, 대답과, 돌아오는 표정도 늘 새롭고 다른 것이었다. 멈춰버린 시간으로 움직이며 흐르는 세상을 느꼈다. 사람들은 매번 돌아오는 날을 기념하고 즐겼다. 곧 맞이하는 아침도 알지 못했더라면 평범한 2월 14일, 스미레는 그 날이 발렌타인 데이라고 말하는 기념이란걸 알고 있었다. 아주 먼 과거에 연인들간의 사랑을 기리던 자를 위한 날. 뭐. 이젠 그런 의미 보다는 초콜릿을 주고 받는게 다지만. 유은의 단정적인 대답에 스미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유은에겐 분명 별 의미없는 날일 것이다. 초콜릿이나 케이크, 슈크림. 달콤한 음식을 선물받는 쪽은 늘 스미레였다.

"발렌타인 데이. 사랑을 나누세요."

자주 들리는 제과점엔 아기자기하게 분홍색과 진한 빨강색의 하트가 가득한 발렌타인용 포스터가 커다랗게 유리창에 붙어있었다. 문 밖까지 달콤한 향기가 흘러들어오는 기분 좋은 장소를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가게 안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냉장고 진열장 속에 장식된 초콜릿과 과자세트를 구경하며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그 즐거운 마음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선물상자는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와아. 보기만해도 마음에 담고있는 사람이 떠오를 만큼 멋진 포스터네요. 스미레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제과점의 직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행사준비로 바쁜지 가벼운 목례만 하고는 손에 든 쿠키판을 들고 서둘러 움직였다.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거는걸 포기한 스미레는 유리진열장에 고개를 파묻었다. 보기만 해도 입가에 침이 고였다. 달콤한 간식거리와 따뜻한 밀크티, 순간 느리게 흘러가는 듯 아늑한 대화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당신과-. 몇 번 유은에게 어울릴만한 꽃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유은은 향기를 맡으며 기쁘게 웃어주었다. 그 미소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어떤 꽃에 비기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어느 날. 미소는 꽃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임을 스미레는 깨달았다. 어떤 선물을 가져와도, 혹은 선물을 가져오지 않아도 유은은 그렇게 웃어주었다.

"저, 혹시 달지 않은 초콜릿도 있나요?"
"네? 흐음. 초콜릿은 원래가 기본이 달콤해서.."
"그렇죠. 헤헤..제가 이상한 질문을 했네요. 미안해요."
"음..녹차가 들어가면 덜 달아지고, 레몬이나 오렌지가 든 것도. 색다른 맛이 나요. 도전해 보는건 어때요?"

좋아해 줄까요. 내가 아니라 선물 만으로도. 당신이 원하는 걸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답니다. 그러면 더욱, 더욱 당신이 행복할 수 있을테니까. 내가 받은 모든 선물들보다 소중한 선물같은 사람이니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이름을 떠올리며 스미레는 진열장의 한 켠에 손가락을 가리켰다. 아무 의미 없는 날도 유은과 함께라면 언제나 아름답게, 그리고 달콤하게 흐르고 있었다. 오늘은 조금 더 달콤한 저녁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그래서 오랑제트를 선물했다고 한다.
발렌타인의 유은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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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크림 먹고싶은 스미레

일정한 속도로 넘어가던 책장이 한참동안 한 페이지에 머물러 있었다. 읽고 있던 책은 디저트를 만드는 여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화책이었다. 그 작고 귀여운 여우는 세상의 모든 달콤한 디저트를 만들 수 있는 멋진여우였다.

"와아...슈크림...맛있어보여."

유은이 외출했으므로 혼자 밖에 없다는걸 알면서도 누가 들을새라 스미레는 목소리를 낮췄다.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 고소한 견과류가 가득 뿌려진 타르트, 무화과 쿠키. 이름만 들어도 입에 침이 고이고 있는 와중에 등장한 삽화는 불필요할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주먹보다 큰 슈크림에서 노란 커스타드크림이 흘러나와 접시에 떨어지고 있었다. 스미레는 저도 모르게 한참이나 슈크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에 그려진 인쇄용지에 불과했지만 너무나 멋진 그림이었다.

"마스터..오늘 몇시에 들어오신다고 하셨지.."

다섯시 쯤 일것이다. 집 주변에 있는 베이커리에 슈크림이 남아있을까, 이미 지나쳐 오진 않았을까. 피곤한데 일부러 돌아가는 건 아닐까. 슈크림 그림을 바라보며 스미레는 한참 머리를 굴렸다. 분명 유은이라면 집 앞에서라도 돌아가서 사 와 줄지도 모른다. 늘 그런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스미레는 더욱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게 어리광 피워버리고 만다. 최근에 물씬 느끼고 있었다. 슈크림이 그려진 페이지를 뒤로 넘겼다.

-

"스미레- 나왔어. 어휴, 너무 무리했나봐."
"마스터다."

찰칵이는 현관문 소리에 스미레는 읽던 책을 접어두고 현관으로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낑낑대며 문을 열고 들어온 유은은 양 손에 상자 여러개를 쌓아 들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상자에서는 얼마전 스미레가 읽었던 책에서 날 법한 달콤한 향기가 나고 있었다.

"....!"
"으으. 슈크림 세일하길래 샀는데..폭주해버렸어. 보관기간이 짧은데 다 먹을 수 있으려나..무리겠지?"
"텔레파시...있는걸까.."
"응? 무슨 소리야?"

비틀거리며 현관 안으로 들어온 유은의 팔에 안겨들자 상자 탑이 휘청이며 흔들렸다. 유은은 어설픈 소리를 내며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결국 어리광 피워버리고 만다. 달콤한 향기 속에서.

"마스터, 너무너무 좋아해요. 슈크림도 좋아해요."
"잠깐, 잠깐. 스미레. 이렇게 매달리면 넘어져...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으면 일찍 사올걸 그랬네."

"달콤해요.."



많이 먹어 유으니랑 스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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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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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2주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두번째 꽃다발 




며칠동안 가슴이 답답하다. 며칠간 유은의 기분은 눈에 띄게 나빠보였고, 양상은 좋아지지 않고 계속 되고 있었다. 감정의 물결은 스미레에게 까지 파도쳐왔다. 유은은 며칠동안 밥을 먹지않고, 외출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침대에 파묻혔다. 따라 들어가 말을 걸어보기도 전에 유은의 숨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스미레는 노곤한 얼굴로 잠에 든 유은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손으로 뺨이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준다면 좋겠지만, 어떤 일이든 스미레와 관련없는, 해결 할 수 없는 일들이 그녀에게 닥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해도 슬퍼진다. 복잡한 감정이 맴돌고 있는 미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유은의 자는 얼굴은 평안해 보였다.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그 꿈에 스미레는 존재하고 있을까. 꿈을 꾸지 않는 스미레는 알 수 없다. 이마에 무심코 손을 가져갔다. 이마는 일종의 열기가 남아있었다. 차가운 스미레의 손이 닿자 유은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으음..스미레?"

"아. 아아. 깨워버렸네...죄송해요. 무심코.."

"아냐. 악몽을 꾸고있던 중이였어. 깨워줘서 고마운걸."

"악몽...좋지 않은 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냐. 으응. 체력이 좋지않으니..조금만 피곤해도 악몽을 꿔버려."

"어떤 꿈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배게에 얼굴을 파묻고 누워있던 유은이 몸을 돌리며 침대 가에 걸터앉은 스미레가 누울수 있도록 자리를 터주었다. 아직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다고. 갈아입고 오겠다며 침대곁에서 일어나다 유은의 손에 잡혀버리고 말았다. 가지마. 곁에 있어줘. 마치 멀리 떠나는 사람을 잡는 듯한 말투였다. 잠투정하는 아이 처럼 칭얼대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들떠버리고 만다. 아무도 유은이 그런 모습을 보일거라고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하게 보이는 유은이었다. 마스터이기 이전에도 그녀는 멋진 여자였다. 숲의 색을 가진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숲은 어둠이 내리는 밤이 올때도 있었고 차가운 비가 내릴 때도 있었다. 스미레는 며칠전 부터 만지고 싶었던 유은의 손과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전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갈 곳도 없는걸요."

"헤에. 갈 곳이 생기면 떠날거야?"

"마스터..오늘..짖굳으시네요. 어떤 악몽을 꾸신걸까요."

"스미레가 떠나는 꿈을 꿨어. 영영.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꿈은 꿈일 뿐이에요. 저는 여기에 있는걸요."

"널 잃을까봐 두려워. 스미레. 


평소라면 그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길 말이었다. 연인과 결혼. 상투적인 질문에는 상투적인 대답이 알맞다. 그러나 답지않게 그는 정확히 빈 부분을 집어냈다. 가족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에 대한 보상심리는 없는건가요-. 하는 말이었고, 유은은 완벽하게 망친 기분으로 자리를 피하듯 일찍 돌아왔다. 아니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은게 분했다. 스미레의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손을 먼저 잡은것은 유은이었다. 잡은 손은 스미레의 선택지가 존재 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어느새 커지고 있었다. 스미레는 이제 혼자서 산책을 하고, 화분을 기르고 사진을 찍어 모은다.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가만히 인형처럼 앉아있던 스미레가 아니다. 언젠가 날개를 펴고 영 먼곳으로 날아갈지도 모른다.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어두운 마음을 잡아먹어 미아가 된 어린아이처럼 주저 앉아버린다. 잊고있었던 어느날의 풍경이다. 들을 이 없는 혼자의 울음은 참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울지말아요.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마스터?"

"그렇지않아. 정말, 그렇지 않아. 네가 너무 소중해서, 소중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쉿. 그만."


정적인 얼굴에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스미레는 언젠가 유은이 말했던, 보고 있어도 그리워 진다는 말을 기억해냈다. 지금의 감정에 맞는 말을 찾기 위해 머릿속을 마구 뒤진 결과였다. 입술을 떼고 그 말을 전해야 할까-. 똑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유은의 눈동자는 어둡게 젖어있었다. 스미레는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말로는 몇 번을 전해도 닿지 않는 것이 있었다. 대신 볼에 닿아 있던 손을 떼고 이마에 이마를 마주댔다. 누워있는 유은의 얼굴사이로 파란색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떨어진다. 연못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유은의 얼굴에는 눈물이 아직 남아있었다. 눈꼬리 끝에 


"이렇게 하면 같은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제가 찾아갈 수 있도록 이어져 있으니까요."

"그렇네. 꿈은 꾸지 않는게 나을거야. 꿈에 스미레가 있다면..깨고 싶지 않을거야."

"내일도 만나요. 여기서."


유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숨결에 따라 가슴위에 놓인 스미레의 손이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올라갔다 내려가는 울렁임과 작은 무게를 느꼈다. 이번엔 다른 꿈이었다. 계절을 잊은 온갖 꽃이 가득한 이 세상이 아닌 화단에서 손을 잡았던 어느날이었다. 보라색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화려한 다른 꽃들 사이에서 조용히 



**


다음날 유은은 기분이 좋아졌다고 했다. 표정도 한결 밝았다. 스미레 밖에 없다며, 외출 하기전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스미레는 부끄러운 듯 이마를 가리고는 문 앞까지 마중을 나갔다. 따가운 더위가

 지나간 평온하게 맑은 날씨는 저절로 산책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스미레는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주차장까지 따라나섰다. 


"걱정해주는거야? 고마워."

"조심히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응. 저녁에 만나자."


차에 탄 유은의 모습이 사라질때까지 손을 흔든 스미레는 그 자리에 잠시 서있다 발걸음을 뗐다. 자주 들리는 꽃집에 갈 생각이었다. 그 곳에는 흔하지 않은 꽃까지 들여놓는 친절한 주인이 있었다. 가게 앞에 놓은 꽃을 구경하고 있던 스미레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꽃다발을 만드는 것을 기꺼이 구경하게 해주었다. 스미레가 산책하는 짧은 거리 중 가장 큰 행복이었다. 보통은 이른 오후에 들렀기에, 아침 일찍 나타나면 그녀도 깜짝 놀라할것이다. 그리고 웃어주리라. 부시시한 머리를 손으로 가다듬으며 출근길에 바쁜 사람들 사이를 반대로 걸어갔다. 꽃집은 모퉁이 사이의 공간을 이용해 작은 공간을 넓게 쓰고 있었다. 밤 사이 가게 안에 두었던 커다란 화분을 바깥으로 옮기는 간편한 차림의 여자에게 다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아야씨. 좋은 아침이에요."

"어라, 스미레쨩. 좋은 아침-. 이 시간엔 처음이네."

"마스터가 나가는걸 배웅하고 오는 길이에요."

"그렇구나. 착한아이네. 

"착한 아이...그렇지 않아요. 마스터를 슬프게 했어요."


낑낑거리는 아야의 양 손에 들린 화분을 본 스미레는 돕겠다며 가디건의 소매를 걷었다. 괜찮다고 단발마를 외치던 아야는 간단하게 화분을 건네받아 들고나가는 스미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많아보아야 열여섯이 채 안되어 보이는 작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뒤뚱거리는 몸에 따라 파란색의 긴 머리가 물결처럼 빛을 내며 흔들렸다. 세번째 화분을 바닥에 내려놓은 스미레는 땀 한방울 흘리지 않은 채로 잎에 달린 물방울을 손으로 건드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힘이 센걸..스미레쨩."

"그거야 안드로이드니까요. 고탄소강 바디에요."

"으으. 그런 말 하지마. 스미레쨩은 예쁜 아이로 충분하니까. 덕분에 빨리 끝났어. 고마워."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종종 와서 도와드릴게요."


아야는 참지 못하고 


"아앙-. 어쩜 이렇게 착하고 예쁜거야. 나도 스미레같은 안드로이드 가지고싶어-."

"아야씨도 안드로이드를 사면..음, 아마 저의 모델은 한정판이라 품절일거에요."

"그게아냐. 난 스미레를 가지고 싶은거야. 스미레쨩이 너무 귀여우니까."

"그건 안돼요. 전 이미 마스터가 있어서.."

"미안미안. 곤란하게 만들었네. 맞아. 쿠키 남은게 있을거야. 차도 끓여줄게."


바닥에 놓인 낮은 화분을 줄세우던 스미레가 아야의 손짓에 가게로 따라 들어갔다. 가게 안은 커다란 화훼용 냉장고와 벽에 장식된 드라이 플라워와 오늘 새벽 막 들어온 싱그러운 백합향이 가득 풍기고 있었다. 계산대에 꽃무늬 손수건을 깔고 접시에 쿠키와 먹다 남은 파운드케이크를 담고 홍차를 끓였다. 아야는 종종 스미레에게 차를 대접했다. 낮에는 꽃집에 오는 손님도 드물었고, 매번 다른 모습으로 꾸미고 나오는 스미레를 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이었다. 주인은 스미레를 굉장히 아끼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주인이 사주었다는 옷들은 모두 스미레에게 맞춘듯 어울렸고, 비싸보이기 까지 했다. 여름 나절동안 여러 다른 디자인의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온 스미레는 누가봐도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오늘은 목 뒤에 리본이 달린 홀터넥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따뜻한 홍차가 담긴 머그컵 두개를 들고와 스미레 앞에 둔 아야는 조용히 냉장고 속에 있는 장미꽃다발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림같다고 생각했다. 정물화에 담긴 소녀처럼 허리를 똑바로 펴고 무릎에 가지런히 손을 모은 자세가 화병에 담긴 파란색 제비꽃같았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네, 무슨 일 있었어?"

"마스터가 어제 울었어요. 아마 저 때문일거에요."

"어머. 어째서일까. 스미레쨩은 이렇게나 천사같은 아이인데."

"저 때문인데..제 잘못은 아니라고 해서. 더 모르겠어요. 전 마스터가 항상 웃었으면 하는데.." 

"그럴땐 꽃을 선물해보는게 어때? 스미레쨩이 원하는 꽃으로 만들어서 선물해보는거야."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만큼 돈이 많지 않아요."

"헤에. 오늘 화분을 옮겨주었잖아? 그걸로 괜찮아. 앞으로 세번 더 도와준다고 약속하면."

"약속할게요. 이번달 내로 세 번. 문서를 작성할까요?"

"우리사이에 그런건 필요없어. 자, 손가락 걸고 약속이야. 친구사이는 이렇게 하는거야."


아야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을 거는 스미레가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어 무심코 안아주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예전부터 스미레의 이름과 똑같은 제비꽃으로 된 꽃다발을 들고있는 스미레를 머릿속으로 상상해보곤 했다. 옅은 미색의 포장지를 고른 스미레는 짙은 분홍색을 띄는 리시안셔스와 안개꽃을 골랐다. 대담한 선택이라고 칭찬한 아야는 꽃의 가지를 가위로 다듬었다. 취미로 두고 있던 제비꽃 몇개를 안개꽃 사이에 장식했다. 연보라색 리본으로 다발을 묶어 마무리했다. 플로리스트로서 만족할 만한 작품이었다. 아야는 휴대전화를 꺼내 꽃다발의 사진을 남기고는 스미레에게 안겨주었다. 꽃은 사랑의 결실이자 시작의 상징이다. 보석같은 친구에게 줄 수 있는 멋진 선물이였다.


"스미레에게 좋은 의미가 되길바래. 주인님께 안부 전해줘."

"정말 예뻐요,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 오래 보관하고 싶다면 꽃병에 두는게 좋을거야."


아야는 꽃집을 나서는 스미레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유은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어제 기분이 좋지 않았다며, 스미레쨩이 걱정하더라. 스미레쨩을 울리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거야. 입술모양 이모티콘을 마지막으로 눌렀다. 정서불안에 시달리던 유은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바로잡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어딘가에서 선물처럼 나타난 스미레가 그녀를 바로 잡았다. 깨진 유리잔처럼 쏟아부어도 고이질 않던 애정과 따뜻함이 천천히 담기고 있었다. 벌써 2년전의 일이었다. 텅빈 눈동자를 하고있던 스미레는 스스로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스미레는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코를 가져가 향기를 흠뻑 맡아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에 불과한 자신에게 꽃 이름은 과분하다고 여겼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조화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도 향기는 나지 않았다. 존재자체가 모순에 불과하지만, 곁에 있어달라고 소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소중한 스미레만의 향기가 되어주었다. 유은과 함께 있으면 세상은 빛나고, 향기롭고, 여러가지 색으로 빛난다. 어두운 밤도 별이 가득한 은하수가 있다는 것을 유은이 알려주었다. 스미레는 꽃다발을 안고 문 앞에 오랫동안 서있었다.  


"나왔어. 스미레-."

"마스터, 어서오세요. 오늘도 수고했어요."

"와아. 이게 뭐야? 꽃..예쁘다. 어디서 났어. 아야쨩네에 갔었어?"

"전 항상 받기만 한것같아서..선물이에요."

"고마워, 항상 받는건 내 쪽인데. 스미레는 모르고 있구나."


스미레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들고 그 안에 보물처럼 숨어있는 제비꽃을 발견한 유은은 기쁜 미소를 지었다. 맑은 향기가 얼굴 사이에 가득하게 퍼지고 있었다. 어제처럼 손을 뺨에 가져간 스미레가 그대로 어깨에 안기며 입을 맞추었다. 꽃다발이 가슴팍에서 하나로 안겨들었다. 정말 좋아한다고, 이 세상 그 어떤 것 보다 소중하다고 노래가사에서 들은 듯한 말을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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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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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는 물거품의 꿈을 꾸는가 





인어공주를 읽었다고 스미레는 저녁식사중에 말했다. 스미레가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드문일이었기에 유은은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어떤 내용이었어? 스미레는 서재 방에 있는 책이라면 어떤 것이든 꺼내 읽었다. 딱딱한 전공서적에서 부터 인어공주와 같은 동화책까지. 텍스트만 있다면 글의 내용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저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즐겁다고. 스미레는 인어공주의 내용을 세세하고 빠짐없이 이야기 했다. 자신이 구해준 왕자와 사랑에 빠져버린 인어공주. 마녀와의 계약을 하고 목소리를 잃고 다리를 얻게되는. 그리고 마지막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만다. 너무나 불공평한 내용이라고 유은은 생각했다. 하지만 스미레가 인어공주가 된다면 퍽 어울리지 않을까. 바다처럼 푸른빛의 머리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양이 적은 식사를 유은은 길게 이어갔다. 자신과 마주보고 앉아 인어공주의 내용을 조잘대는 스미레를 좀더 길게 보고 싶었다. 인어가 된 스미레를 상상하며, 그렇다면 사랑에 빠진 왕자는 자신이 되는걸까. 어릴 적에도 좋아하지 않았던 동화였지만 잠시간 즐거운 상상에 웃어버리고 말았다.


"기분 좋아보이시네요, 마스터. 제 이야기가 즐거우신가요?"

"그럼. 실은 인어공주 이야기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거든."

"유명한 책이라고 하던데...유명하다고 해서 모두 읽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지만요."

"아주 흔한 이야긴데도 참신하게 들렸어. 재밌게 읽은것 같네."

"응.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선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삽화도 예쁘고요."


스미레는 유은의 반응이 즐거운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종종거리며 뛰어갔다. 얼마전에 사준 하얀 원피스를 입고서. 방으로 사라지는 치맛자락이 여름에 피어나는 커다랗고 새하얀 이국의 꽃처럼 울렁였다. 집 안에서 입고 다니기엔 다소 화려한 느낌이었다. 유은은 한동안 일때문에 여기저기 외근을 다녔고, 쉬는 날이면 침대에서 잠을 자기에 바빴다. 한번의 투정도 없이 늘 자신이 돌아올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스미레에게 고맙다고 말하면 이건 당연한 일이라며 살짝 미소지어보였다. 


"이 그림이에요. 인어공주. 다리가 생기기 전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렇네. 내가 사놓은 책이면서도 몰랐어."

"바닷속을 들여다본다면 이런 풍경이겠죠?"

"바다에 가 본 적 없어?"

"마스터와 가본 적이 없으니까. 없는거죠."

"에엑. 양심에 찔리네...좋아. 가보자."

"마스터가 운전...하시는 거에요?"


몇번을 타도 서투른 유은의 운전에 익숙해 질 수 가 없었다. 사람이 아니니 멀미는 나지 않았지만, 눈이 빙글빙글 도는 경험을 하는건 썩 유쾌하지 않았고 유은의 체력소모도 심했다. 근교에서 가까운 바다를 검색하자 자가용으로는 30분, 지하철로는 40분 정도라는 검색결과가 나왔다. 스미레는 적극적으로 지하철을 권유할 셈이었다. 가끔은 전철을 타고 움직이는 것도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 좋을 것이라며 휴대폰을 들고 지도 어플을 켜보았다. 갈아타지 않아도 되었고, 지상으로 이어지는 전철이라 경치도 좋을것이다. 


"또..그리고.."

"알겠으니까, 전철 타고 가자. 내일 어때?"

"좋아요. 그리고..한가지 부탁 드려도 될까요?"

"뭔데?"

"저번에 사주신 이 원피스, 두개 샀으니까..함께 입고가면.."


두가지 다 스미레입으라고 사준건데. 유은은 스미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이어버렸다. 물론 유은도 원피스를 입는걸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무늬없이 새하얀 끈이 달린 원피스는 보자마자 스미레에게 어울릴거라 생각하고 산 것이었다. 사이즈도 한치수 작았지만 강아지같은 눈을 울렁이며 부탁하는 스미레의 말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유은은 옷장에 있는 다른 하얀색 원피스를 생각하며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스미레에게 너무 관대하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지만.. 


"어쩔수 없지. 스미레가 원한다면."

"에헤헤. 커플룩이에요. 즐거워라."

"바다...그러고보니, 그 근처에 아쿠아리움이 있으니까. 거기도 같이 가볼까."

"아쿠아리움! 수족관..헤에..물고기들이 헤엄치는걸 볼 수 있겠네요! 바다에 들어가지 않아도..인어공주가 된 기분일거에요."

"그런 관점은 처음이네. 역시 스미레는 재밌는 생각을 많이 한단말이지."

"너무 공상에 빠진거겠죠, 으음.."

"아냐. 지금이 딱 좋아."


유은은 마침 식기를 치우고 식탁으로 돌아와 의자를 밀어넣으려 의자끄트머리를 잡고 선 참이었다. 식탁을 물티슈로 닦은 스미레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뒤에 섰다. 왜그래? 하고 말을 붙이려다 등을 파고들며 안기는 스미레를 느끼고 손을 뒤로 가져갔다. 에어컨이 켜진 집에서 하루종일 있었던 스미레는 얇게 뻗은 새하얀 팔이며 원피스 밑에 있던 다리가 차갑게 가라앉아 시원하다. 그대로 침실까지 안긴채로 걸음을 맞춰 걸어갔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걸 겨우 참아내며 한 덩어리가 된 채로 침대에 다이빙하듯 파묻히고서 얇은 담요 한 장을 발로 끌어와 덮었다.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들이 겹쳐 만드는 화음이 어찌나 즐거운지, 답지않게 흥이나버리고 만다.




***



6월의 하늘은 그림처럼 맑았고 하늘엔 금방 짜낸듯한 물감처럼 하얀 구름 몇개가 높이 떠있었다. 햇볕이 쬐는 날을 대비하여 사주었던 커다란 밀짚모자를 쓴 스미레는 예전 어느 영화에 나오던 신파영화의 주인공 처럼 청초한 모습이었다. 선글라스와 작은 클러치백을 든 유은이 집을 나서며 스미레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고 손을 잡았다. 가뜩이나 눈에 띄는 파랗고 기다란 머리카락때문에 스미레는 바깥에서의 행동에 더욱 조심하는 편이었다. 아무도 우릴 쳐다 보지 않는다고 유은이 슬쩍 속삭이며 전철역으로 향했다. 선글라스가 없었다면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햇살이 따가웠다. 땀이 나는건 질색이라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스미레는 아쿠아리움에 간다는것이 그리도 신나는지 인어공주의 결말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늘여놓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어공주에겐 불공평한 결말이였다고. 그건 유은도 그렇게 생각하는 바라며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와의 거래 자체가 불리한 것이였다는, 과연 논리적인 시각이었다. 한 사람분의 전철표를 끊으며 역무원에게 안드로이드 등록카드를 함께 보여주었다. 역무원은 스미레를 슬쩍 쳐다보더니 탐탁찮다는 얼굴로 게이트를 열어주었다.


"고마워요. 가자, 스미레."

"아..네..!"

"일일히 신경쓰지마. 응. 손잡고."


이래서 전철을 타지 않으려 했는데. 유은은 더욱 스미레의 손을 굳세게 잡았다. 시원한 전철안에서 나란히 앉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가지를 바라보고 있자 교외로 벗어나며 사람들이 점점 줄어갔다.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돌려 창밖의 변해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스미레가 점점 초록이 늘어난다며,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멀리서 해안이 보이기 시작하자 유은은 끼고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시야를 틔웠다. 바닷가와 커다랗고 지붕이 둥그런 아쿠아리움 건물이 빼꼼히 전철 끝에 나타났다. 날씨가 생각보다 더우니, 바닷가를 산책하는건 오후가 되어 열이 좀 식고나면 하자고 유은은 말했다. 아쿠아리움은 시원할테니까. 스미레도 아쿠아리움을 더 기대하는 눈치였다.


"커다란 수족관이 있대요. 펭귄도. 고래상어랑 열대어...만타가오리.."

"검색한거야?"

"아쿠아리움 약도까지 다운받았어요. 어떤걸 먼저 보고 싶으세요?"

"뭐어. 난 해파리같은것도 좋아."

"해파리는 심해관에 있어요. D구역이에요."


종착역에 내리자 전철역사에는 스미레와 유은 외에 피크닉을 온 듯한 가족 두어사람을 빼면 적막했다. 뜨거워진 공기를 마시며 아직은 차가운 서로의 손을 흔들며 역을 벗어났다.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다. 아쿠아리움은 해변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차를 가져올걸. 유은은 햇빛에 쏘여 타들어가는것 같은 어깨를 들썩였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걸어가던 스미레가 고개를 돌렸다. 


"더우세요? 햇빛이 강해서.."

"으응. 바닷가 근처라 습하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야..으으. 어쩜 그늘이라곤 하나도 없네."

"제 모자 드릴까요? 전 덥지 않은데.."

"괜찮아. 그건 스미레에게 어울리니까. 조금만 더 걸으면 되고..음..조금은 아니지만."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인지, 눈에는 가까워 보이는 아쿠아리움 건물과 바닷가는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아까보다는 시무룩해진 표정의 스미레와 기어코 손을 잡은 유은은 역시 스미레의 손은 차가워서 기분이 좋다며 화제를 돌렸다. 어떤 물고기를 가장 보고싶냐고 물었다. 기호나 취향의 선택사항을 물었을때 스미레가 제대로 대답한 적은 없었다. 마스터가 가장 보고싶은 것이요. 이번에도 그랬다. 답을 가지고 있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해파리를 보러 아쿠아리움에 가는 사람도 있을까. 입장료가 꽤 비싼 편인데도 말이다. 따가운 햇볕에 닿는 어깨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성인 한사람분의 입장표를 끊은 유은이 먼저 커다란 고래장식이 되어있는 아쿠아리움의 입구에 선 스미레에게 빠르게 걸어갔다. 고래장식을 올려다보며 서있는 스미레 주변에는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남녀로 된 커플도 많았다. 한사람 분의 표를 끊은 우리들은 어떤 것일까. 인어공주는 왕자와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하고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자신에게 밝은 표정으로 걸어오는 유은을 눈동자에 담으며, 물거품처럼 머릿속을 떠다니는 잡념을 터뜨린다. 먼저 유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해파리 먼저 보러 갈까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중앙에 있다는 커다란 관부터 보러가자."


손에 든 아쿠아리움 안내 약도를 펴든 유은이 중앙을 가리켰다. 커다란 원통형 관이 높게 만들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아쿠아리움 안으로 들어갈 수록 수온을 유지하기 위해 켜놓은 에어컨이 건물 안의 공기를 전체적으로 시원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속도에 맞춰 느릿하게 걸으며 옆으로 나란히 이어진 수조안에 든 작고 이름모를 색색깔의 열대어들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푸른빛의 수조에 둘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춰보였다. 일정한 궤적없이 물 속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물고기들. 스미레는 첫 아쿠아리움 감상을 그렇게 말했다. 거기서 감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자유로이. 라는 것 밖에 없었다. 딱히 높은 텐션으로 기뻐하는 타입도 아니였으므로, 이따금 살짝 웃거나 물고기의 이름과 설명이 적힌 팻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이어갔다. 글로 친다면 클라이막스일까. 통로를 지나자 넓고 높은 원통형 수조가 나타났다. 더 커다란 물고기와 가오리와 아쿠아리움의 마스코트격인 고래상어가 유리면에 맞닿아 있었다. 걸음을 멈춘 스미레가 푸른색의 빛을 받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와아...멋져요."

"그러게. 수조가 높이 있으니까 신기해. 물인데도..하늘처럼."

"물인데도 하늘처럼. 좋은 표현이에요. 인어공주의 세계는 이것보다 더 아름다웠겠죠? 그런데도 그걸 포기하고 육지로..그런게 사랑이겠죠?"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후후. 키스할까요?"

"아이참...여기까지 와선. 여기까지 와서.."


주변엔 몇몇의 커플이 분위기에 취한 듯 허리를 감싸안으며 키스하고 있었다. 스미레는 먼저 다가와주길 바라는 듯 눈을 감고 입술을 가볍게 내밀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는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키스는 자기전에도, 출근하기 전에도, 집에 돌아왔을때도 매번 하는 것이었지만 바닷속에서는 처음이었다. 한번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은 지 스미레는 유은의 양 볼에도 립스틱자국이 남을 만큼 힘을 주어 입을 맞추었다. 풀리고 싶지 않은 마법에 걸린 인어공주처럼. 키스를 해도 풀리지 않는 마법에 즐거워하며. 



아일님 생일 축하드려요! 오랫만에 유은스미 글 써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앞으론 좀 더 신경쓰는 제가 되도록 할게요. 오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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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놀이 로그............

 

꽃은 한 순간이다. 한유은은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언젠간, 모두 언젠간 변하고 특히나 연약한 꽃은 본 듯 지기 나름이다. 주변 사람들은 유은의 이런 회의적인 시각이 좋지 못하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긍정적이고 행복하게 인생을 살 이유는 없다. 세상에는 필요한 만큼의 불행이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도 불행의 총량이란 게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미 충분한 만큼이었다. 일주일 남짓 길가에는 새하얀 겹벚꽃이 가득 피었다. 저녁이 되면 시원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커다란 벚꽃 잎이 팔랑이며 어깨에 닿을 듯 흔들리다 바닥에 떨어졌다. 낮은 단화굽에 짓이긴 꽃잎은 거리에 하얀 점자로 남았다. 유은은 잠시 고개를 올려 시간모르고 흔들리는 벚꽃송이를 바라보다 걸음을 서둘렀다.

 

얇은 가디건을 걸친 스미레가 발걸음에 맞춰 문을 열었다. 온화한 미소를 띤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을 익숙하게 건네받은 스미레가 목덜미에 안겼다. 오늘은 뭘 했냐는 물음에 스미레는 가만히 유은을 바라보았다. 스미레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똑같은 책을 읽거나-문장의 지겨움 따위는 아무 상관없는 듯 했다- 화단에 점점 늘어만 가는 식물을 가꾸었다. 혹은.


마스터를 기다렸어요. 의자에 앉아서.”

또 하루 종일 앉아있었어? 으음..뭐라도 하지.”

심심하지 않았어요.”


애완동물 말이다. 한 마리를 키우는 건 권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주인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적으면 더욱이나. 스미레를 애완동물에 비유하는 건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무료해보였다. 일하는 곳에 데려갈 수 도 없는 일이고. 장난감을 사 주는 것도 이상했다. 집에선 옆에 붙어서 감시하는 것처럼 혼자 두려 하지 않는다. 조용히 지켜보다 몇 마디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하다 잠이 든다. 몇 개월째 비슷한 패턴으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유은이 화단에 있던 스미레에게 손짓을 했다.


또 여기 있네.”

바람이 차서, 신경 쓰여서요.”

막 봄이니까. 저녁엔 쌀쌀한가..오는 길에 벚꽃이 많이 피었더라.”

사쿠라. 예쁘겠네요. 일본에 있을 때 본 적 있어요.”

“..일본에 있었던 거 기억해?”

그럼요. 전부다 사라지는 건 아니랍니다. 사소한건 기억하고 있어요. 제 두뇌는 고도의 병렬처리 시스템이니까요.”


화분에 심긴 식물의 커다란 잎을 쓰다듬으며 하기엔 어려운 말이었다. 장시간 사용되면 메모리가 많아지고, 캐시 값도 많아지니 기억의 경중을 판단해 정리하고-. 말하자면 사람이 망각하는 것처럼, 아무리 고차원병렬회로라도 한계는 있는 법이니까. 라고 설명해도 유은이 알아들은 것은 스미레가 뒤죽박죽으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멍하니 어려운 전문용어의 나열을 듣던 유은이 중간에 말을 끊고 화제를 돌렸다.


벚꽃 보러 갈까. 둘이서 나간지가..”

“35일이요. 어디로 나갈까요?”

그냥 주변에도 피었더라. 옷 바꿔 입고 가보자.”


밤의 거리는 차분히 가라앉은 공기가 시원했다. 얇은 가디건 차림의 두 사람은 익숙한 빌라의 현관을 나섰다. 깊게 숨을 들이쉬자 옅은 꽃향기가 목을 타고 들어왔다. 물기 있는 바람에 흔들리는 벚꽃 가지를 홀린 듯이 올려다보던 스미레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연분홍색 잎이 화단과 길에서 뒹굴고 있었다.


많이 피었지? 한창이야.”

가로등에 비쳐서 벚꽃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어요.”

동화책 같은 표현이네. 노래 가사로 써도 되겠어.”

“..아름다운 노래가 되겠네요.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마스터와 볼 수 있다니.”

헤에. 새삼스럽게...좀 더 걸을까? ..”

 

먼저 내민 손을 꾹 잡은 스미레가 기분 좋은 듯 잡은 팔을 흔들었다. 빌라 주변과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스미레는 꽃을 보면 그런 생각 들지 않아? 언젠가 질 텐데...”

후후. 살아 있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해요. 이 꽃이 떨어져 사라져도, 계절이 지나면 새로운 꽃이 찾아올거에요. 변할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에요.”

그렇구나..스미레의 생각은.”

저는 언제나 마스터 옆에 있을 테니까요. 어느 계절이고.”

형태 없이 흩날리는 벚꽃 잎 몇 개가 마주한 두 사람의 머리카락 사이에 무게 없이 떨어졌다. 같은 곳을 향하는 발걸음과 하나가 된 손을 뻗어 내려오는 꽃잎을 잡아보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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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그

스미레 로그 2016. 4. 4. 01:20

과거로그-toy box

 

창이 넓은 재활원의 기다란 복도에 또각이는 굽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드로이드 재활원은 국가지원을 받아 신사옥을 몇 개월 전에 증축했다. 모두가 평화롭고, 모두가. 인류 이상의 모두가 행복한 세상. 재활원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문구를 A는 걸어가며 응시했다. 낮은 굽의 구두소리는 일정한 속도로 이어지다 서서히 잦아들었다. A의 전공은 인간을 상대로 한 심리학. 그리고 상담학의 실재였다. 요즘 시대에 사람들은 사람에게 상담을 하지 않는다. 이유야 여러 가지였지만. 상담학이ㅁ라는 건 이름 그대로의 의미만을 희미하게 유지할 뿐이었다. A가 안드로이드 상담학을

A는 차트를 열었다. 첨단기술의 집합체인 안드로이드가 가득한 재활원이었지만 차트는 종이였다. 역설처럼 여기는 자들도 있었으나 생각해보면 안전한 방법이었다.

 

[분류 등급 3 위험단계]

 

소유계약이 파기된 안드로이드는 5단계로 분류된다. 3단계라면, 자기파괴의지를 나타낸 적이 5회 이상. 소유계약 파기 3회 이상. 이 정도는 보통 폐기처리 하지 않아요? A는 가볍게 상담 팀의 동료에게 웃으며 차트를 열었다.

 

“A. 잘 봐. 기종이 뭔지.”

카이코...? 보컬로이드 카이토의 리미티드 버전..”

없어서 못 파는거라고. 전 세계 300대밖에 없는 희귀제품이야. 알겠지? 무조건 재계약 가능하도록.”

헤에...게다가 커스텀까지. 전 주인이 돈 꽤나 들였나봐.”

 

그런데 왜 버렸을까. 재활원에 있는 대부분의 안드로이드는 그런 질문을 품고 있었다. 그들에겐 중요한 문제였지만, 소유자가 남기고간 종이에는 개인사정, 혹은 취미상실의 같잖고 짧은 대답만이 쓰여 있을 뿐이었다. 카이코의 차트에는 조금 다른 말이 쓰여 있었다. 소유자의 사망. 이후 4개월 뒤에 발견되어 구조. A는 무거운 마음으로 차트를 닫았다.

 

102. 1인실이었다. 추가금액이 발생하는 병실. A는 무언의 중압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문을 두드렸다. 맑은 목소리가 문 뒤에서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말씀하셨던 상담사분이신가요?”

. 치료병동에서 넘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텐데. 지금 괜찮아?”

네에..거쳐야 하는 일이라고 들었어요.”

뭐어. 그렇지? 편안히 이야기 한다고 생각해줘. 나는 상담 팀의 A. 몇 안 되는 여자 상담사니까. 카이코가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해도 된다고 생각해.”

“A...그리고 편하게. 알겠습니다.”

 

그녀는 상당히 특이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2~3회 정도 사람 손을 거친 안드로이드는 사람 손을 탄 티가 나고 어디든 망가지기 마련이었다. 카이코는 이상하리라만치 깨끗했다. 고가 비용인 모발연장, 닳지 않은 소녀의 성대. 그녀는 관상용이었다. 고개가 천천히 A를 향해 돌아오는 동안 물결처럼 흔들리는 푸른빛의 머리카락은 남국의 짙은 바다 빛이었다. 곧 똑같은 색의 유리구슬 같은 눈이 반짝였다. 투명한 장식장에 넣어두고 언제나 보고 싶을 만큼.

 

관상용. 인거죠. 이렇게 커다란 창에. 1..”

창이 큰 건, 경치구경용이야. 화단에 신경 쓰고 있거든.”

그런가요.”

불편하면 커튼을 쳐도 괜찮고. 지나가는 아이들이 쳐다보는 게 부담스럽니?”

조금. 빤히 문 앞에서 서있던 기체도 있었고요.”

 

하얀 린넨 으로 된 환자복을 입은 카이코는 미묘한 색기를 풍겼다. 아름답게 만들어진 인형이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한정 품이란 것은 누구에게나 이상한 울림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기성품으로 만들어진 다른 안드로이드에게 한정품은 더욱이나 신비한 존재였다. A는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카이코를 응시했다. 한동안, 카이코는 입을 열지 않았다.

 

“....”

말이 없는 편이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없어?”

언제쯤...거취여부가 결정되나요? 폐기처분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요.”

, 하하. 직설적이네. 맞아. 너는 희귀한 카이코 모델이니까. 제대로 인지는 하고 있구나.”

 

A는 품에 안고 있던 차트에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재활원과 재활원을 후원하는 모 재력가가 만든 자선입양프로그램. 재력가의 취미라기엔 꽤 호의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재활원의 이미지를 알리기에도 알맞았다. 그곳에 희귀모델을 내보내면 분명, 재활원으로서는 이익이었다.

 

저는 아직 이전계약이 파기된 지 일주일이 되지 않았는데요. 물론 마스터는 세달 전에 죽었지만.”

알고 있구나. 그렇다면 이야기를 빨리 진행해볼까? 구조되던 날에 대해서.”

 

A는 주머니에 있던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계약이 파기되는 순간을 기억하는 안드로이드는 이후 계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기억을 지우는 것이 차후 입양의 선 조건이었다. 보통은 몇 개월 동안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진행하는 상담이었지만, 입양프로그램의 시작일은 다음 주였다. A는 카이코의 사건차트를 넘기며 운을 뗐다. 그녀가 세 달 동안 가만히 있었다는 아파트의 작은 방을 생각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그녀의 마스터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마스터는 얼굴과 몸에 화상이 있어서..밖에 나가는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가족도, 친구도. 연락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래서 발견이 늦었구나.”

분명 괴로웠을 거예요. 마스터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말렸을 텐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움직이지 말라고..했으니까.”

너의 무죄는 명령코드로 이미 입증된 사실이야. 자책 할 필요 없어. 죽음은 사람의 일이니까. 네가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해서, 마스터의 죽음을 막을 권리는 없어.”

 

좀 심했나. A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고 카이코의 표정을 살폈다. 눈앞에서 시퍼런 시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카이코는 한 장면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계절은 여름이라 부패과정은 역겨웠다. 시체냄새가 문 밖을 빠져나가 사람들에게 발견될 때엔 팔이나 다리의 형체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구조될 때에도 마스터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구조대원의 팔을 물었다. 는 문구를 읽었다. 저 작고 가지런한 입으로 말이지. A는 카이코의 표정변화를 살폈다.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카이코의 표정은 흔들리고 있었다.

 

괴롭니? 괴로우면 더 이상 말 하지 않아도 좋아.”

괴롭지 않아요. 슬플 뿐이에요. 저는 마스터를 따라서 죽을 수 없었어요. 지금도 불가능 하죠. 아직 상품가치가 있는 몸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요? 창문 밖의 다른 기체들은 입양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못할 테니까요.”

상품가치...틀린 말은 아니야.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 상담을 빨리 진행해서 미안해. 본래라면 3주 동안 해야 하는 건데..”

프로그램이 다음 주에 시작이네요. 메모리 소각에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면, 선생님은 서두르셔야겠네요..”

그렇게 됐어. 그건 그쪽사정이지- 하고 화내도 괜찮아.”

으응. 그런 생각은 없어요. 그보다 선생님이 곤란하겠어요. 아직 자살의지가 남아있는 저를 갑자기 갱생시켜 초기화해야 한다니.”

 

카이코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드로이드가 자살의지를 갖기란 매우 힘들고 희박한 일이었다. 때문에 한번 망가진 프로그램이나 알고리즘을 고친다는 것은 긴 시간이 필요했다. A는 모든 밑천이 드러난 웃음으로 카이코의 웃음에 대답했다. A는 포기했다. 상황을 설명한 다음 이 상태로 초기화를 하는 것으로. 카이코를 차트를 넘기면 넘길수록 그녀를 고작 말 몇 마디로 갱생시킬 수 있을 자신이 들지 않았다. 자료는 짧은 몇 줄이 다였지만 최근 이전에 거친 두 명의 마스터에게서는 학대의 흔적이 보였다. 직접적인 기억은 지워졌을 테지만, A가 상담일을 하면서 깨달은 몇 가지 중 하나였다. 안드로이드에게도 깊은 무의식에 새겨진 흔적이 남는다.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긴 싫어요. 저는 누구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절 데려가시는 분들은 항상 곤란하게 되는 일이 많았어요. 제가 사라지면 곤란한 일도 없어지겠죠.”

간단하게 사라지기란 어려워.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기거든.”

재밌는 말씀을 하시네요. 저를 사랑하던 마스터는 이미 죽었어요. 사람도 죽으면 남는 것이 없는데, 고작 장난감인 저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시네요.”

너는 아직 필요가치가 남아있어.”

가치는 누가 평가하는 거죠?”

 

A는 입을 열어 반박하려다 침묵했다. 꽉 다문 카이코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보통의 사례라면 이쯤에서 상담을 종료해야 했지만, A는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A를 바라보는 카이코의 눈빛에서 깊이 새겨진 불신이 반발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슨 욕을 해도 좋아. 너는 내일 메모리를 소각하러 가야해. 불행한 기억을 길게 안고 있어봤자 너에게만 해가 되니까.”

제가 기억하지 못하면, 마스터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마스터는...너무나..좋은 사람...”

미안해.”

 

A는 서서히 기울여지는 카이코의 몸을 잡았다. 녹음기에 붙어있던 작은 충격장치가 남은 전기를 타득였다. 닫힌 눈꺼풀이 전율하자 A는 밀려오는 죄책감으로 몸을 떨었다. 순수하고 완전하게 인간의 과오만으로 누군가의 삶이라 할 법한 것을 파괴했다는 생각에,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것에 완벽한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다.

 

. 나 상담팀 A. 지금당장 메모리 소각 할 수 있을까? 좀 급한 거라서. 3일내로 지워야해. 병실번호 102. 조심하게 다뤄줘.”

 

소중한 것이니까.

A는 침대에 누운 카이코를 바라보았다. 하얀 침대시트에 파란 머리칼이 물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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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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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감사합니다.



유은의 집 베란다에는 색색의 화분이 늘어났다. 스미레가 오기 전 까지 베란다에는 유은이 쓰다 흥미를 잃은 잡동사니나 처리하기 곤란한 커다란 물건이 얼기설기 산을 이루던 곳이었다. 어느 날 부터인가 먼지 가득한 잡동사니는 사라지고 손바닥 크기의 화분이 조르르 세워져 있었다. 일찍 일어난 스미레는 종종 화분에 물뿌리개로 물을 주고 있었다. 햇빛을 받게 하려는 듯 창가에 늘여놓기도 했다. 화분에는 작은 이름표가 붙어있었고, 스미레는 화분에 붙은 이름을 마치 친구처럼 불렀다. 화분의 꽃들은 잘 보살핀 티가 역력했다. 사랑받는구나. 유은은 아침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붉은 꽃이 핀 화분을 보며 덜깬 눈을 비비며 혼잣말을 했다. 유은의 목소리에 넓은 창문가에 뒤돌아 서있던 스미레가 고개를 돌렸다.


“스미레, 이 꽃은 이름이 뭐야?”

“어라. 일어나셨어요? 오늘은 신기하네요. 스스로 일어나시고.”

“가끔은 혼자서도 일어나. 근데 아직 졸려..”

유은은 비척비척 걸어 물뿌리개를 든 스미레의 어깨에 기댔다.

“이 아이는, 이름이-. 포인세티아 에요. 포-쨩.”

“오. 별명이 귀엽네.”


“크리스마스에 장식으로 쓰이는 유명한 꽃이에요. 겨울에도 이렇게 붉은 색으로 피는 꽃은 흔하지 않으니까요. 눈이 잎에 쌓인 모습도 예쁘고요. 물론, 실내에 사니까 눈을 맞을 일은 없어요.”

“헤에...”

“헤헤. 재미없으시죠? 마스터는 꽃이나 식물엔 전혀 관심 없으시니까요.”


티 났나. 유은은 멋쩍게 입을 오물거렸다. 부드러운 아침 햇빛이 따뜻한 담요를 덮은 듯 포근하게 얼굴을 간질였다. 선잠에서 깼는데 좀처럼 스미레의 깨우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목소리가 듣고 싶었을 뿐이라는 시시한 대답을 하긴 싫어 공연히 말을 어스라이 꺼냈다. 아침의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맑은 목소리는 마치 노래 같아서, 유은은 머릿속으로 느리게 악보를 그렸다.


“마스터, 제 말 듣고 계신거죠?”

“응. 듣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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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미줄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한 곳은 시내의 번듯한 카페였다. 주말 오후의 넓은 카페에는 두 세테이블 정도가 저들끼리의 대화가 무르익을 때였다. 스미레는 어색하게 커피를 주문하러 간 며칠 전 할 이야기가 있다는 그녀의 말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스미레는 그녀를 보아 온 몇 달 동안 자신의 중심을 향하고 있던 한유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최대한의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숨길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침저녁으로 가볍게 얼기 시작한 거리는 걸음 마다 하얀 입김 자욱을 남겼다. 이제 춥다. 유은이 짧게 말하자 새하얀 김이 그녀의 뜨거운 말에 흔들렸다. 마주 잡은 손이 떨어지지 않도록 스미레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자아. 너는 오렌지 주스면 되겠지?"

"안 마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나만 마시면 좀 그렇잖아. 오렌지 주스와 커피 잔이 놓인 쟁반을 스미레에게 건네 준 유은은 외출용 갈색 코트를 벗어 의자 뒤에 걸었다. 하얀 스웨터의 소매를 얇게 접자 그녀의 손목이 드러났다. 그녀는 손목의 상처를 숨길 마음은 없다는 듯, 오히려 보기 좋게 새하얀 스웨터와 대비되는 모양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침전된 상처에 며칠 전 새로이 남겨진 붉은 상처가 돋보였다. 스미레는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침묵 하는 방관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유은의 방에 있던 쓰레기통에서 시뻘건 피가 잔뜩 굳은 휴지와 거즈더미를 발견 하고서도 쓰레기통을 비우기만 했을 뿐이었다. 쇳향기가 나는 쓰레기통을 비우며 스미레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생각했다. 불행한 인간만이 자신을 해친다. 과거에 지나간 누군가가 말했다. 아픈 교훈이란 아플 뿐이었다. 스미레는 다시 굴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저어, 하실 말이란 건."

"궁금하지 않아? 묻질 않아서."

 

유은은 자신의 손목을 펴 내밀었다. 낙서처럼 그인 연붉은 칼자국들을. 도톰히 튀어나온 새살과 이미 흔적으로 남은 하얀 흉터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아아. 스미레는 작은 감탄사와 같은 소리를 내고서 빨대로 주스를 마셨다. 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던 책의 장을 펼칠 시간이었다. 유은은 종종 불안해했다. 이유 없는 불안이 그녀를 잠식하고 넓고 검은 심해로 가라앉는 발목을 휘어잡았다. 어제처럼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마치 처음 만난것 처럼 놀란 표정으로 스미레를 바라보기도 했다. 천천히 걸어와 스미레에게 안기는 그녀의 몸은 너무나 투명해서 곧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말씀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스미레는 그래서 좋아. 그래서.."

 

유은이 고개를 기울였다. 상처는 삶의 흔적. 그녀는 살고 싶을 때 손목을 그었다. 손목을 그어도 얇은 혈관이 잘릴 뿐이라 죽지 않는 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손목을 그었던 것은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넓은 집 안에서 방문을 잠그면 작은 신음소리 같은 것은 벽을 새어 나가지 못했다. 붉게 부어오른 손목을 만지며 피어나는 따끈한 고통은 견딜 만 했고, 머릿속에는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기본적인 감정만이 느껴졌다.

 

"화 낼 거라고 생각했어."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마스터한테."

"그러네, 스미레가 화 내는것..보고 싶지 않아."

"그러면 그만 둬 주세요. 자신을 해치는 일은 옳지 않아요."

 

흔들림 없는 얼굴로 조곤조곤히 말하는 스미레의 얼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유은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 무언가 말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부터, 어디서 부터, 무엇 부터.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상처를 숨기는 것은 쉬웠다. 상처는 처음부터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의 실체를 만든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화 낼 거야?"

"그렇게 해서 마스터가 멈춘다고 하신다면."

"이미 소용없잖아."

 

그녀는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싱긋 웃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출구를 막고서 돌파구를 찾아내길 바라는 미로의 주인은 즐거이,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늘어뜨렸다. 눈을 감은 미아가 다시 눈을 뜰 때면 이미 덫에 걸려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 거죠?"

"내 상처를 제대로 봐. 돌아가면, 나는 손목을 그을 생각이야. 네 앞에서."

"어째서? 마스터, 어째서.."

"너를 사랑하니까."

 

네 아름다운 두 눈으로 제대로 바라보고, 그래도 사랑해줘. 이 삶의 남은 행복을 바닥까지 드러낼 수 있도록. 더럽고 이기적인 모습까지 사랑해줘. 제대로 사랑해줘.

 

"날 사랑해줘."

"..그게 이유인가요?"

"아마도, 아마. 그럴 거야."

 

카페를 나서자 거리의 공기가 카페를 들어올 때 보다 얼어붙어 있었다. 스미레는 차가운 공기에 금새 식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머리카락 위에 차가운 눈 결정이 떨어져 녹아내렸다. 싸락눈이 먼지처럼 바람에 휘날리자 차가운 바람이 머플러 사이를 파고들어와 목 뒤를 스쳐갔다. 눈가에 떨어진 눈 조각이 눈물처럼 대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토록 이상한 논리로. 이유를 들으면 눈물이라도 흐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간사한 마음은 이유를 사랑이라고 둘러대자 입을 다물고 복종한다. 눈조각이 굵어지자 턱 끝에 맺힌 물방울을 손으로 닦아냈다. 먼지와 섞인 회색빛 눈이 땅을 물들였다.

 

*

 

"조금 떨려. 스미레가 보고 있으니까."

"저는 여기 있어요."

 

서랍을 열자 무척이나 손에 익은 듯 한 짧은 주머니칼이 들어있었다. 유은은 이상하게 들떠있었다. 손가락 길이 정도의 칼날에는 지난 핏자국이 남은 채로 얼룩져 있었다. 칼을 일부러 높이 세워 들었다. 무표정한 스미레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치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익숙하게 칼을 움직였다. 며칠 전 파고들었던 상처가 무딘 칼날에도 금방 벌어져 새빨간 피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심장의 두근거림과 함께 욱신거리자 얇게 박혀있던 칼을 깊게 그었다. 안타까울 정도로 물렁한 사람의 살은 손쉽게 두동강이 날 지도 모른다고. 스미레는 끔찍한 상상으로 가득차오르는 머리로 가련하게 손을 떠는 유은을 바라보았다.

 

"아야.."

"세상에. 제발, 마스터. 그만해요. 그만, 저 다 봤어요."

 

비명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나지막한 단발마로 끊어진 칼이 바닥에 맑은 금속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팔꿈치를 타고 흐르던 핏방울이 바닥에 눈 조각이 녹듯 툭툭 떨어지자 눈을 감고 있던 유은이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썩은 피를 흘려내고 나면 아찔한 이마가 오히려 맑아졌다. 명료하게 앞을 바라보고 깊고 깊이 가라앉아있던 비밀스러운 말을 할 수 있었다.

 

"있잖아, 스미레."

"알아요. 나도 사랑해요. 많이, 아주 많이. 사랑하니까.."

 

사랑해.

새하얗고 순수한 고백의 답은 투명한 눈물에 섞여 피와 섞여갔다. 머리보다 가까운 심장처럼 붉고 살 냄새 가득한 사랑으로. 피가 흐르는 얇은 손목에 입을 맞추자 붉은 피가 남은 입술에서 쓰레기통에서 나던 것과 똑같은 향기가 입안에 감돌았다. 소리를 잡아먹고 내리는 눈이 방 안의 소리를 삼켜 죽은 듯 조용한 방에는 작은 입맞춤 소리가 떨어질 새 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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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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