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에는 빛이 들지 않는다. 방을 소개했던 집 주인은 그것을 조용하고 가격에 비해 값싼 이 집의 유일한 단점 이라고 했다. 낮에도 어두컴컴한 집 안에는 가구가 들지 않아 음산한 기운이 물씬 풍겼고, 그것은 집을 소개받은 여자에게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느껴졌다. 여자는 있으나 마나 한 창가에 서 맞은 편 건물의 회백색 벽을 바라보더니,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뒷골목의 거리에는 종종 술 취한 노숙자나 창녀들이 희미하게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에 쓰러져 있곤 했으며, 지울 수 없이 퀴퀴한 냄새가 벽지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 거리에서 살기로 결심한 자라면 그 정도는 기본적으로 감안 하고 있으리라. 집주인은 세세한 설명은 생략한 채 낡지만 쓸 만하다는 가구를 제공 하겠다고 남은 조건을 제시했다.
"이 집으로 할게요. 저는 프리랜서라 집에서 일할 때 방해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렇다면 이 집이 딱이죠. 혼자 쓰기엔 좀 넓지만, 뭐 그건 아가씨 마음이고."
오, 혼자가 아니에요. 여자는 싱긋 웃더니 손에 든 장지갑에서 수표책을 꺼내 서명했다. 젊은 나이에 꽤나 돈이 있는 여자인가보군. 수표를 받아든 집주인은 주머니 속에 접혀있던 봉투를 꺼내 계약서를 내밀었다. 여자는 꼼꼼히 훑어보는 듯 하더니 역시 정갈한 필기체로 이름을 서명했다. 유은-. 동양계 혼혈인지, 혹은 이민자 인지. 눈썰미가 없는 남자로서는 검은 머리칼과 녹빛 눈동자가 아시아의 혈통이란 것 이외의 판단은 불가능했다. 누가 집에 살던, 돈만 착실히 낸다면 남자에게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썩히고 있던 방을 내 주게 되어 흡족한 목소리로, 남자는 계약서 한 장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손을 흔들었다.
여자는 혼자 남아 커다란 거실과, 작업실로 쓸 작은 방을 살펴 본 뒤에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아침부터 이삿짐과 함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라고 지칭하지만 겉보기엔 그녀와 다를 바 없는-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받는 목소리가 밝게 울려 퍼졌다. 몇 년간 살고 있었던 집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게 된 이후로 그녀는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아직 흡혈본능을 조절하기 힘든 아이는 더럽다고 몇 번이고 교육했던 길가에 쓰러진 노숙자를 물어오곤 했다. 작은 체구와 달리 왕성한 식욕으로 혼자서는 흡혈 량을 버틸 수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권속에게는 마스터의 피가 가장 절대적이고 효율적인 혈액이었다. 그녀는 목의 상처를 은근히 검은 쵸커로 가리고 있었다. 흉터는 지워질 날이 없었다.
"있잖아, 집구했어. 여기가 어디냐 하면-. 응응. 혼자 올 수 있겠어? 지하철 타고 오면 되는데, 짐은 내가 센터에 전화해서 옮길 테니까 너는 몸만 오면 되구."
"으응. 갈 수 있어요. 기다려 주세요, 마스터."
짐이라고 해 봤자 옷과 책이 든 상자 몇 개와 pc, 기본적인 살림도구가 끝이었다. 긴 세월을 살면 생활은 간소하고 단조로워 지기 마련이었다. 존재를 들키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면 더욱 그랬다. 그녀는 한 집에서 10년 이상을 지내왔건만, 이번 집에서 살게 된 지 4년 만에 집에서 시체가 발견된 덕분에 서둘러 이사를 계획 했다. 더러운 노숙자의 피를 빤 아이는 며칠을 열로 끙끙 앓기까지 했다. 배가 너무 고팠는데, 집엔 아무도 없었다. 저장해놓은 혈액 팩을 모두 해치우고도 갈증이 멈추지 않았다고 울먹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런 것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라고 고열로 끓는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
"마스터, 저 왔어요―. 새 집.."
"일찍 왔네. 스미레. 예전 집 보다 넓고 더 좋아 보여. 그렇지 않아?"
하얀 원피스를 입은 스미레는 파란 머리칼과 대조되는 붉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조심스럽지 못하게, 렌즈 끼는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가라앉은 분위기의 집을 둘러보더니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외출을 잘 하지 않는 그녀에게 있어 집의 구성은 중요한 것이었다. 유은이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작업실에 틀어박히면 집안일을 하고, 사 놓은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거나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가를 구경하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스미레에게 바깥세상은 먹음직스러운 뷔페나 다름없었다. 목구멍을 간질이는 자극적인 갈증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행동구역에 족쇄를 걸었다. 안전한 피의 주인의 곁을 선택한것이다.
"오늘 밥 먹었어? 아직 안 먹은 건 아니지?"
저녁인데 말이야. 유은은 불안한 기색으로 방을 둘러보던 스미레를 불러 세웠다. 어깨가 움찍 하더니 천천히 돌아보는 스미레는 난처한 얼굴이었다. 입을 열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 정도로 숨기기 힘든 것이었다. 갈증은.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그녀가 얼마나 참고 참았을지 자세히 바라본 입술 아래가 잘근히 씹혀 부드러운 입술에 피딱지가 앉아있었다.
"아, 그게...아직.."
"왜 그랬어? 냉장고에 넣어 두고 왔는데. 맙소사...안 들고 왔지?"
"죄송해요..마스터가 돌아오면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는데..."
"세 개 가지고 너랑 나랑 나눠먹겠다고..아냐. 괜찮으니까, 이리와."
유은은 가방 속 남은 철분제의 개수를 머릿속으로 세보았다. 이삿짐센터에서 짐이 도착할 시간과 다른 사람이 집에 들이닥칠 경우의 수를 따지다 붉은 핏빛으로 일렁이는 스미레의 눈을 보자 그런 건 따져봤자 소용없는 일이란 것을 깨달았다.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지만, 달콤한 솜사탕을 앞에 둔 아이처럼 입안에 고이는 침을 삼켰다. 고양이에 할퀸 듯한 자국이 남은 손으로 새하얀 스미레의 볼을 만지며 그녀는 일어나 어깨에 얼굴을 품었다. 그녀에게도 달콤한 꽃향기가 그득히 풍겼다. 이름을 닮은 향기가 스미레에게서는 났다.
"스미레, 있잖아. 힘들다는 건 알겠지만...어느 정도만 하고 떼자. 응?"
"네에. 노력해 볼게요. 기대는 하지 마세요..따악, 한입만.."
앗. 유은은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어깨를 깊게 파고든 송곳니를 타고 피 한줄기가 쇄골에 흘러내렸다. 넘어가는 스미레의 목에서 꿀꺽이는 소리가 욕망스럽게 들렸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자 유은은 살며시 스미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만하자, 아가. 그런 의미였지만, 코를 박고 하루 동안 괴롭히던 열기를 충족하던 스미레에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머리칼에 닿을 힘까지 빠지자 그녀는 축 처지는 양팔로 스미레를 끌어안았다. 못 살겠어, 정말. 이러다 빈혈로 죽는 첫 번째 뱀파이어가 될지도 몰라.
"야아...적당히 하라니까아.."
"으음...마스터.."
"마스터? 어떡해, 죄송해요. 중간에 멈..멈추려고 했는데..아아.."
"아냐, 괜찮아. 근데, 몸에 힘이 안 들어가니까...소파에 좀 데려가줄래..?"
"마스터..마스터?"
흐린 시야로 검은 소파를 떨리는 손으로 가리키더니, 스미레의 어깨에 툭 무너지듯 고개를 떨어뜨리자 달콤한 피가 남은 입술을 핥으며 몸에 안긴 유은을 받아냈다. 매일처럼 사고를 벌이고 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창백하게 차가워진 몸을 꾹 껴안으며 스미레는 혈액의 잔향이 남은 숨을 뱉어냈다.
"죄송해요, 난 정말 못됐어요. 죄송해요.."
"후후..맛있었어?"
"맛은 있지만요, 그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어요."
좋은 일이지. 널 잡아둘 수 있으니까. 남은 말을 입에 머금은 채 그녀는 마지막 남은 의식의 끈을 놓았다. 바닥에 앉은 스미레가 힘없는 팔에 기대 얼굴을 품고 울먹이다 눈물 몇 방울을 옷에 흘리고는 훌쩍였다. 타는 갈증이 멈추자 오후의 나른한 낮잠은 두 사람에게 잠시간의 안식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