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미줄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한 곳은 시내의 번듯한 카페였다. 주말 오후의 넓은 카페에는 두 세테이블 정도가 저들끼리의 대화가 무르익을 때였다. 스미레는 어색하게 커피를 주문하러 간 며칠 전 할 이야기가 있다는 그녀의 말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스미레는 그녀를 보아 온 몇 달 동안 자신의 중심을 향하고 있던 한유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최대한의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숨길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침저녁으로 가볍게 얼기 시작한 거리는 걸음 마다 하얀 입김 자욱을 남겼다. 이제 춥다. 유은이 짧게 말하자 새하얀 김이 그녀의 뜨거운 말에 흔들렸다. 마주 잡은 손이 떨어지지 않도록 스미레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자아. 너는 오렌지 주스면 되겠지?"

"안 마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나만 마시면 좀 그렇잖아. 오렌지 주스와 커피 잔이 놓인 쟁반을 스미레에게 건네 준 유은은 외출용 갈색 코트를 벗어 의자 뒤에 걸었다. 하얀 스웨터의 소매를 얇게 접자 그녀의 손목이 드러났다. 그녀는 손목의 상처를 숨길 마음은 없다는 듯, 오히려 보기 좋게 새하얀 스웨터와 대비되는 모양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침전된 상처에 며칠 전 새로이 남겨진 붉은 상처가 돋보였다. 스미레는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침묵 하는 방관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유은의 방에 있던 쓰레기통에서 시뻘건 피가 잔뜩 굳은 휴지와 거즈더미를 발견 하고서도 쓰레기통을 비우기만 했을 뿐이었다. 쇳향기가 나는 쓰레기통을 비우며 스미레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생각했다. 불행한 인간만이 자신을 해친다. 과거에 지나간 누군가가 말했다. 아픈 교훈이란 아플 뿐이었다. 스미레는 다시 굴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저어, 하실 말이란 건."

"궁금하지 않아? 묻질 않아서."

 

유은은 자신의 손목을 펴 내밀었다. 낙서처럼 그인 연붉은 칼자국들을. 도톰히 튀어나온 새살과 이미 흔적으로 남은 하얀 흉터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아아. 스미레는 작은 감탄사와 같은 소리를 내고서 빨대로 주스를 마셨다. 빈 공백으로 남겨두고 있던 책의 장을 펼칠 시간이었다. 유은은 종종 불안해했다. 이유 없는 불안이 그녀를 잠식하고 넓고 검은 심해로 가라앉는 발목을 휘어잡았다. 어제처럼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마치 처음 만난것 처럼 놀란 표정으로 스미레를 바라보기도 했다. 천천히 걸어와 스미레에게 안기는 그녀의 몸은 너무나 투명해서 곧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말씀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스미레는 그래서 좋아. 그래서.."

 

유은이 고개를 기울였다. 상처는 삶의 흔적. 그녀는 살고 싶을 때 손목을 그었다. 손목을 그어도 얇은 혈관이 잘릴 뿐이라 죽지 않는 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손목을 그었던 것은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넓은 집 안에서 방문을 잠그면 작은 신음소리 같은 것은 벽을 새어 나가지 못했다. 붉게 부어오른 손목을 만지며 피어나는 따끈한 고통은 견딜 만 했고, 머릿속에는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기본적인 감정만이 느껴졌다.

 

"화 낼 거라고 생각했어."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마스터한테."

"그러네, 스미레가 화 내는것..보고 싶지 않아."

"그러면 그만 둬 주세요. 자신을 해치는 일은 옳지 않아요."

 

흔들림 없는 얼굴로 조곤조곤히 말하는 스미레의 얼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유은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 무언가 말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부터, 어디서 부터, 무엇 부터.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상처를 숨기는 것은 쉬웠다. 상처는 처음부터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의 실체를 만든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화 낼 거야?"

"그렇게 해서 마스터가 멈춘다고 하신다면."

"이미 소용없잖아."

 

그녀는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싱긋 웃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출구를 막고서 돌파구를 찾아내길 바라는 미로의 주인은 즐거이,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늘어뜨렸다. 눈을 감은 미아가 다시 눈을 뜰 때면 이미 덫에 걸려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 거죠?"

"내 상처를 제대로 봐. 돌아가면, 나는 손목을 그을 생각이야. 네 앞에서."

"어째서? 마스터, 어째서.."

"너를 사랑하니까."

 

네 아름다운 두 눈으로 제대로 바라보고, 그래도 사랑해줘. 이 삶의 남은 행복을 바닥까지 드러낼 수 있도록. 더럽고 이기적인 모습까지 사랑해줘. 제대로 사랑해줘.

 

"날 사랑해줘."

"..그게 이유인가요?"

"아마도, 아마. 그럴 거야."

 

카페를 나서자 거리의 공기가 카페를 들어올 때 보다 얼어붙어 있었다. 스미레는 차가운 공기에 금새 식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머리카락 위에 차가운 눈 결정이 떨어져 녹아내렸다. 싸락눈이 먼지처럼 바람에 휘날리자 차가운 바람이 머플러 사이를 파고들어와 목 뒤를 스쳐갔다. 눈가에 떨어진 눈 조각이 눈물처럼 대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토록 이상한 논리로. 이유를 들으면 눈물이라도 흐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간사한 마음은 이유를 사랑이라고 둘러대자 입을 다물고 복종한다. 눈조각이 굵어지자 턱 끝에 맺힌 물방울을 손으로 닦아냈다. 먼지와 섞인 회색빛 눈이 땅을 물들였다.

 

*

 

"조금 떨려. 스미레가 보고 있으니까."

"저는 여기 있어요."

 

서랍을 열자 무척이나 손에 익은 듯 한 짧은 주머니칼이 들어있었다. 유은은 이상하게 들떠있었다. 손가락 길이 정도의 칼날에는 지난 핏자국이 남은 채로 얼룩져 있었다. 칼을 일부러 높이 세워 들었다. 무표정한 스미레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치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익숙하게 칼을 움직였다. 며칠 전 파고들었던 상처가 무딘 칼날에도 금방 벌어져 새빨간 피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심장의 두근거림과 함께 욱신거리자 얇게 박혀있던 칼을 깊게 그었다. 안타까울 정도로 물렁한 사람의 살은 손쉽게 두동강이 날 지도 모른다고. 스미레는 끔찍한 상상으로 가득차오르는 머리로 가련하게 손을 떠는 유은을 바라보았다.

 

"아야.."

"세상에. 제발, 마스터. 그만해요. 그만, 저 다 봤어요."

 

비명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나지막한 단발마로 끊어진 칼이 바닥에 맑은 금속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팔꿈치를 타고 흐르던 핏방울이 바닥에 눈 조각이 녹듯 툭툭 떨어지자 눈을 감고 있던 유은이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썩은 피를 흘려내고 나면 아찔한 이마가 오히려 맑아졌다. 명료하게 앞을 바라보고 깊고 깊이 가라앉아있던 비밀스러운 말을 할 수 있었다.

 

"있잖아, 스미레."

"알아요. 나도 사랑해요. 많이, 아주 많이. 사랑하니까.."

 

사랑해.

새하얗고 순수한 고백의 답은 투명한 눈물에 섞여 피와 섞여갔다. 머리보다 가까운 심장처럼 붉고 살 냄새 가득한 사랑으로. 피가 흐르는 얇은 손목에 입을 맞추자 붉은 피가 남은 입술에서 쓰레기통에서 나던 것과 똑같은 향기가 입안에 감돌았다. 소리를 잡아먹고 내리는 눈이 방 안의 소리를 삼켜 죽은 듯 조용한 방에는 작은 입맞춤 소리가 떨어질 새 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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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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