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그

스미레 로그 2016. 4. 4. 01:20

과거로그-toy box

 

창이 넓은 재활원의 기다란 복도에 또각이는 굽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드로이드 재활원은 국가지원을 받아 신사옥을 몇 개월 전에 증축했다. 모두가 평화롭고, 모두가. 인류 이상의 모두가 행복한 세상. 재활원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문구를 A는 걸어가며 응시했다. 낮은 굽의 구두소리는 일정한 속도로 이어지다 서서히 잦아들었다. A의 전공은 인간을 상대로 한 심리학. 그리고 상담학의 실재였다. 요즘 시대에 사람들은 사람에게 상담을 하지 않는다. 이유야 여러 가지였지만. 상담학이ㅁ라는 건 이름 그대로의 의미만을 희미하게 유지할 뿐이었다. A가 안드로이드 상담학을

A는 차트를 열었다. 첨단기술의 집합체인 안드로이드가 가득한 재활원이었지만 차트는 종이였다. 역설처럼 여기는 자들도 있었으나 생각해보면 안전한 방법이었다.

 

[분류 등급 3 위험단계]

 

소유계약이 파기된 안드로이드는 5단계로 분류된다. 3단계라면, 자기파괴의지를 나타낸 적이 5회 이상. 소유계약 파기 3회 이상. 이 정도는 보통 폐기처리 하지 않아요? A는 가볍게 상담 팀의 동료에게 웃으며 차트를 열었다.

 

“A. 잘 봐. 기종이 뭔지.”

카이코...? 보컬로이드 카이토의 리미티드 버전..”

없어서 못 파는거라고. 전 세계 300대밖에 없는 희귀제품이야. 알겠지? 무조건 재계약 가능하도록.”

헤에...게다가 커스텀까지. 전 주인이 돈 꽤나 들였나봐.”

 

그런데 왜 버렸을까. 재활원에 있는 대부분의 안드로이드는 그런 질문을 품고 있었다. 그들에겐 중요한 문제였지만, 소유자가 남기고간 종이에는 개인사정, 혹은 취미상실의 같잖고 짧은 대답만이 쓰여 있을 뿐이었다. 카이코의 차트에는 조금 다른 말이 쓰여 있었다. 소유자의 사망. 이후 4개월 뒤에 발견되어 구조. A는 무거운 마음으로 차트를 닫았다.

 

102. 1인실이었다. 추가금액이 발생하는 병실. A는 무언의 중압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문을 두드렸다. 맑은 목소리가 문 뒤에서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말씀하셨던 상담사분이신가요?”

. 치료병동에서 넘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텐데. 지금 괜찮아?”

네에..거쳐야 하는 일이라고 들었어요.”

뭐어. 그렇지? 편안히 이야기 한다고 생각해줘. 나는 상담 팀의 A. 몇 안 되는 여자 상담사니까. 카이코가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해도 된다고 생각해.”

“A...그리고 편하게. 알겠습니다.”

 

그녀는 상당히 특이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2~3회 정도 사람 손을 거친 안드로이드는 사람 손을 탄 티가 나고 어디든 망가지기 마련이었다. 카이코는 이상하리라만치 깨끗했다. 고가 비용인 모발연장, 닳지 않은 소녀의 성대. 그녀는 관상용이었다. 고개가 천천히 A를 향해 돌아오는 동안 물결처럼 흔들리는 푸른빛의 머리카락은 남국의 짙은 바다 빛이었다. 곧 똑같은 색의 유리구슬 같은 눈이 반짝였다. 투명한 장식장에 넣어두고 언제나 보고 싶을 만큼.

 

관상용. 인거죠. 이렇게 커다란 창에. 1..”

창이 큰 건, 경치구경용이야. 화단에 신경 쓰고 있거든.”

그런가요.”

불편하면 커튼을 쳐도 괜찮고. 지나가는 아이들이 쳐다보는 게 부담스럽니?”

조금. 빤히 문 앞에서 서있던 기체도 있었고요.”

 

하얀 린넨 으로 된 환자복을 입은 카이코는 미묘한 색기를 풍겼다. 아름답게 만들어진 인형이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한정 품이란 것은 누구에게나 이상한 울림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기성품으로 만들어진 다른 안드로이드에게 한정품은 더욱이나 신비한 존재였다. A는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카이코를 응시했다. 한동안, 카이코는 입을 열지 않았다.

 

“....”

말이 없는 편이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없어?”

언제쯤...거취여부가 결정되나요? 폐기처분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요.”

, 하하. 직설적이네. 맞아. 너는 희귀한 카이코 모델이니까. 제대로 인지는 하고 있구나.”

 

A는 품에 안고 있던 차트에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재활원과 재활원을 후원하는 모 재력가가 만든 자선입양프로그램. 재력가의 취미라기엔 꽤 호의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재활원의 이미지를 알리기에도 알맞았다. 그곳에 희귀모델을 내보내면 분명, 재활원으로서는 이익이었다.

 

저는 아직 이전계약이 파기된 지 일주일이 되지 않았는데요. 물론 마스터는 세달 전에 죽었지만.”

알고 있구나. 그렇다면 이야기를 빨리 진행해볼까? 구조되던 날에 대해서.”

 

A는 주머니에 있던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계약이 파기되는 순간을 기억하는 안드로이드는 이후 계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기억을 지우는 것이 차후 입양의 선 조건이었다. 보통은 몇 개월 동안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진행하는 상담이었지만, 입양프로그램의 시작일은 다음 주였다. A는 카이코의 사건차트를 넘기며 운을 뗐다. 그녀가 세 달 동안 가만히 있었다는 아파트의 작은 방을 생각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그녀의 마스터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마스터는 얼굴과 몸에 화상이 있어서..밖에 나가는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가족도, 친구도. 연락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래서 발견이 늦었구나.”

분명 괴로웠을 거예요. 마스터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말렸을 텐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움직이지 말라고..했으니까.”

너의 무죄는 명령코드로 이미 입증된 사실이야. 자책 할 필요 없어. 죽음은 사람의 일이니까. 네가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해서, 마스터의 죽음을 막을 권리는 없어.”

 

좀 심했나. A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고 카이코의 표정을 살폈다. 눈앞에서 시퍼런 시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카이코는 한 장면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계절은 여름이라 부패과정은 역겨웠다. 시체냄새가 문 밖을 빠져나가 사람들에게 발견될 때엔 팔이나 다리의 형체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구조될 때에도 마스터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구조대원의 팔을 물었다. 는 문구를 읽었다. 저 작고 가지런한 입으로 말이지. A는 카이코의 표정변화를 살폈다.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카이코의 표정은 흔들리고 있었다.

 

괴롭니? 괴로우면 더 이상 말 하지 않아도 좋아.”

괴롭지 않아요. 슬플 뿐이에요. 저는 마스터를 따라서 죽을 수 없었어요. 지금도 불가능 하죠. 아직 상품가치가 있는 몸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요? 창문 밖의 다른 기체들은 입양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못할 테니까요.”

상품가치...틀린 말은 아니야.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 상담을 빨리 진행해서 미안해. 본래라면 3주 동안 해야 하는 건데..”

프로그램이 다음 주에 시작이네요. 메모리 소각에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면, 선생님은 서두르셔야겠네요..”

그렇게 됐어. 그건 그쪽사정이지- 하고 화내도 괜찮아.”

으응. 그런 생각은 없어요. 그보다 선생님이 곤란하겠어요. 아직 자살의지가 남아있는 저를 갑자기 갱생시켜 초기화해야 한다니.”

 

카이코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드로이드가 자살의지를 갖기란 매우 힘들고 희박한 일이었다. 때문에 한번 망가진 프로그램이나 알고리즘을 고친다는 것은 긴 시간이 필요했다. A는 모든 밑천이 드러난 웃음으로 카이코의 웃음에 대답했다. A는 포기했다. 상황을 설명한 다음 이 상태로 초기화를 하는 것으로. 카이코를 차트를 넘기면 넘길수록 그녀를 고작 말 몇 마디로 갱생시킬 수 있을 자신이 들지 않았다. 자료는 짧은 몇 줄이 다였지만 최근 이전에 거친 두 명의 마스터에게서는 학대의 흔적이 보였다. 직접적인 기억은 지워졌을 테지만, A가 상담일을 하면서 깨달은 몇 가지 중 하나였다. 안드로이드에게도 깊은 무의식에 새겨진 흔적이 남는다.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긴 싫어요. 저는 누구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절 데려가시는 분들은 항상 곤란하게 되는 일이 많았어요. 제가 사라지면 곤란한 일도 없어지겠죠.”

간단하게 사라지기란 어려워.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기거든.”

재밌는 말씀을 하시네요. 저를 사랑하던 마스터는 이미 죽었어요. 사람도 죽으면 남는 것이 없는데, 고작 장난감인 저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시네요.”

너는 아직 필요가치가 남아있어.”

가치는 누가 평가하는 거죠?”

 

A는 입을 열어 반박하려다 침묵했다. 꽉 다문 카이코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보통의 사례라면 이쯤에서 상담을 종료해야 했지만, A는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A를 바라보는 카이코의 눈빛에서 깊이 새겨진 불신이 반발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슨 욕을 해도 좋아. 너는 내일 메모리를 소각하러 가야해. 불행한 기억을 길게 안고 있어봤자 너에게만 해가 되니까.”

제가 기억하지 못하면, 마스터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마스터는...너무나..좋은 사람...”

미안해.”

 

A는 서서히 기울여지는 카이코의 몸을 잡았다. 녹음기에 붙어있던 작은 충격장치가 남은 전기를 타득였다. 닫힌 눈꺼풀이 전율하자 A는 밀려오는 죄책감으로 몸을 떨었다. 순수하고 완전하게 인간의 과오만으로 누군가의 삶이라 할 법한 것을 파괴했다는 생각에,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것에 완벽한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다.

 

. 나 상담팀 A. 지금당장 메모리 소각 할 수 있을까? 좀 급한 거라서. 3일내로 지워야해. 병실번호 102. 조심하게 다뤄줘.”

 

소중한 것이니까.

A는 침대에 누운 카이코를 바라보았다. 하얀 침대시트에 파란 머리칼이 물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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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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