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일] Hello. A

린 로그 2019. 8. 14. 20:46

Hello. A


몇 년전,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A가 말했던 충고이자 저주가 떠올랐다. 꽤 오랫동안 근무했을 테지만, 데스크 주변에 붙여둔 포스트잇 색이 노란색이었다는것 말고는 딱히 기억에 남지 않는 회사였다. 회사경영진 중에서도 꽤 알려진 자가 연 파티에 기어이 가지 않겠다고 세번째로 거절 했을 때였다. 가서 멍청한 웨이터처럼 서 있다가 오자는 농담을 섞어 린을 설득하던 팀원들은 슬슬 짜증이 오른 얼굴을 하다가 린의 어깨를 마우스를 집어들듯 꽉 붙잡았다. 손아귀 힘에 따라 시선은 움직였지만, 목줄이라도 매어 가지 않는 이상은 난 가지 않을거야. 


“정말 안갈거야? 우리도 가기 싫어. 그냥 인사만 하고 오라고.”

“그럴거면 왜 가야하지?”

“젠장. 넌 평생 애인은 커녕 친구도 하나 못사귈거다. 괴짜자식.”

“맞아. 상대방한테 실례잖아.”

“말이나 못하면.”


그에게 네가 틀렸어. 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건 얼마전 다 풀지 못한 이삿짐을 정리하며 나온 사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A는 보란듯이 린의 자리에 어제의 즐거운 파티. 라고 낙서를 해둔 폴라로이드 사진을 여기저기 붙여두었다. 루저. 평생 혼자 살아라. 혀를 내미는 이모티콘을 그려둔게 제법 공을 들인 모양이었다. 버리기 아까워 모니터 옆에 붙여두었고, 지나가며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농담거리고 써먹었다. 사실은 가고싶었으면서, 사진도 붙여뒀더라고 펍에서 낄낄거렸다는 이야기를 굳이 전해들었을때, 린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틀린말이라고 지적하면 설명을 해야했고, 이해란 린에게 꼬여버린 코딩코드보다 풀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너는 틀렸어. 나는 지금..]


손가락을 뻗어 써내려가던 문자를 지워버렸다. 헐렁한 게임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웅크린 자세로 얌전히 자고있는 원호를 보여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또한 여기저기 사람을 만나고 다닐테니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며 코웃음 칠지도 모른다. 겨우 찾아낸 메일주소를 한 손으로 밀어냈다. 한 손 밖에 쓰지 못하는 것은 원호가 다른 팔을 배게삼아 꽉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절이 지나 얆은 담요를 덮고 얌전히 누워 자유로운 한 손으로 뉴스를 확인하거나 간단한 터치로 할 만한 출석보상을 받고 있었다. 중요도가 낮은 게임 몇개는 이제 출석만 간간이 챙기는 정도로 순서가 미뤄졌다. 한 사람과 같이 살게 되었을 뿐인데. 많은 것이 변했다고 린은 생각했다. 본래 연애란 그런 상호작용이란걸 여러 매체에서 들어왔지만, 실제가 그렇다니 제법 우스운일이 아닐까. 조용한 오후였다. 열어둔 창문에서는 뜨겁지만 기분나쁘지 않은 바람이 불어왔고, 언젠가 선물받은 사과나무에 걸어둔 그네가 천천히 호선을 그리는 집 밖 정원이 그려졌다. 왜 사과나무를 선물했냐는 말에 클로렌스는 두 사람을 지켜봐 줄 테니까요. 하고 그 다운 대답을 했다. 그네를 설치한건 단순히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지만 두 사람이 근처 바에서 맥주와 깔루아를 한 잔 씩 마시고 와서 타면 부양된 기분을 그네로 표현해내는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원호가 딱 달라붙어 입술을 달싹였다. 팔을 목덜미와 어깨에 붙이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잦아드는 옅은 숨소리와 부드러운 검정색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몇 가닥 달라붙었다. 이대로 침대 아래 속 푹신한 깃털이 가득한 세계로 떨어지면 어떨까. 그 날 하지 못한 말을 떠올렸다.


‘넌 틀렸어. 나는 연인이 생겼거든. 그것도..’



***



“..그래서 그 사람한테 우리 사진을 보내보려고. 너무 유치한가”

“좋아. 완전 짜증나는 사람이네~ 뽀뽀하고 있는걸로 보낼까?”

“아니. 그렇게 까진..”

“자, 지금 찍는거야!”


네번째로 쓴 메일을 지우다 결국 원호는 린이 쓰던 메일이 업무에 관련된 것이 아니란걸 알아차리고 물어왔다. 뭔데 계속 지웠다 썼다 해? 별로 숨길 일도 아니지. 그래. 이건. 잠시 턱을 긁적이다 몇 년전에 있었던 파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왠지, 정말로 가고싶지 않은 파티였다. 파트너와 함께 오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방인의 눈빛을 받고 싶지않았다고 고해하듯 중얼거렸지만 원호는 그런 이유따윈 중요하지 않아보였다. A가 린한테 그렇게 말했다고? 만을 잠이 덜깬 눈으로 두 어번 곱씹더니 으으, 하고 싫은 소리를 냈다. 찍은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을때 내는 소리였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옆 모습만 나오게 고개를 돌려 몇 장을 더 찍었다. 턱선이 나와서 괜찮은것 같아. 하고 손가락으로 사진을 휙휙 넘겨보던 원호가 턱을 바짝 아래로 가져갔다. 또 찍으려고. 린이 무어라고 말을 하기 전에 볼을 가까이 가져갔다.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키며 배어나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가볍게 귓가에 들려왔다.  


“이제 반대로, 린이 뽀뽀해~”

“두개 다..보내는거야?”

“한쪽만 그러면 돈 주고 찍은거라고 생각할수도 있잖아!”

“아하. 그렇네. 그 새끼. 안 읽을지도 모르지만. 읽으면 엄청 짜증나겠다.”



그러면 좋겠다.



의미 없는 글이네요..하지만 200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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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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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월드 : 대기록원의 사서들> 첫번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일시 : 2019.5. 23~24, 2019.6. 20~21

룰 : 던전월드

시나리오 : 대기록원의 사서들

마스터 : 푸믕

플레이어 : 미츠, 디어리스트, 지모


   장기 플레이를 계획중인 팀인지라 기록을 찬찬히 남겨두면 좋을것 같아서

   힘닿는데 까지 후기를 써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1. 처음 해보는 룰의 즐거움

    던전월드는 처음 해보는 룰이고 헤딩이었습니다. 믕님의 제안에 옳다구나 하고 기회를 잡긴 했지만 새로운 룰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꽤 걸리고 플레이가 심하게 유연하지 못한 탓에 걱정도 했지만..대기록원의 사서 라는 제목부터 제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소싯적에 발터 뫼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라던지,  후속편인 꿈꾸는 책들의 미로도 굉장히 즐겁게 읽었고 지금은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책을 좋아하는 주인공이 추리를 하며 해결하는 소설..? 도 좋아했습니다. 룰에 대한 관심보다 시나리오집에 대한 관심이 먼저 생겼다는게 사실이겠네요. 출판사도 믿고가는 초여명이라 룰북을 구매했고, 팟캐스트에서 TRPG를 소개하는 라디오중에서 던전월드편도 들어봤어요. 자유로운 룰이고 이야기를 하며 세션을 이뤄간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어요. 크툴루와 인세인(제가 주력으로 하는 두가지 룰)과는 다른 매력이 있겠거니. 하고 설레임반..그리고 혹시나 제가 감을 못잡아서 세션을 망칠까..하는 걱정 반으로 세션날을 기다렸네요. 


2. 자유도 높은 세션은 상상하는 재미가 가득!

    룰북도 두번 정도 읽어보았는데 전반적인 감상은 주어진 소재와 기본적인 세계관들로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션 이라는 점이었어요. 티알피지를 처음하는 사람보다는 이야기를 만드는것에 좀 익숙하게 된 뒤에 해보면 좋겠다는 지인분의 조언도 들었구요. 던전월드에서 실패란 없다! 다만 얼마나 성공하고, 성공에 따른 패널티가 생길뿐이다. 라는 점도 좋았구요. 티알피져라면 누구나 주사위가 실패할때마다 슬퍼하게되니까요. 던전월드 중에서 시나리오가 있는게 특이한 케이스일정도로 던전월드는 자유도가 높은 룰이라네요. 매력적인 룰이라고 생각해요. 이 세션을 진행하면서도 이런 설정은 어떨까요? 라고 질문해주시는게 참 재밌었어요. 기본적인 설정에 세세한 설정을 상상하는 재미가 정말 좋았네요.


3. 흥미롭고 입체적인 캐릭터

    그리고 만나게된 두 친구! 엘로신과 카르미네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에요. 둘의 관계성도 재밌고. 던전월드에서는 인연을 설정하고 가게 되니까요. 엘로신은 정도(正道)를 걷는 엘프사냥꾼이고 '리' 라는 귀여운 매를 데리고 다닌답니다. 디어님이 리의 묘사까지 같이 해주시는게 참 좋았어요. 공격이나 정찰을 할때도 유용하게 활용하고 말이죠. 카르미네는 기록원에서 15년동안 경력을 쌓은 고참(이지만 농땡이를 좋아해서 엘로신의 잔소리를 듣는것도 너무 재밌어요) 사서인데, 일하기 싫어하고 느긋한 성격인것도 흥미로운데 신을 섬기는 사제라는 점이 입체적이고 좋아요. 제가 데려간 캐릭터는 린 이화라는 다른 세계에서 온 캐릭터인데, 둘의 중간에서 중재자나 갈등을 막는 평화주의자 라는 면을 중점으로 잡았는데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다른 세계에 떨어지면 그러지 않을까요?) 이국의 언어로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에요. 세션이 계속되면서 롤플레잉에 집중하게 되고, 만나게 되는 상황이 다양하니까 만든 캐릭터들이 실제로 생각하고 움직이며 상황을 이어가는 점이 참 흥미롭고 재밌었어요. 세션 이후나 사이에 이어지는 작은 이야기들도요. 이화가 노래를 부르고 둘은 춤을(..) 추고, 건물 위에 올라가 마을의 전경을 살피고, 하루가 끝나면 모여서 내일 일을 상의하고 술을 마시거나 하는 상황들...다른 세션을 하면서도 상상하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지니 즐겁네요. 이것저것 설정하는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친구들의 많은 이야기가 궁금해요. 앞으로 더더 많이 알아갈 수 있겠죠.

가장 좋았던 장면은 이야기의 해피엔딩을 바라며 문에서 다같이 모여서 보는 것과 전투를 끝내고 추모(....)를 하는 장면등입니다. 다 좋아서 꼽기 힘들겠지만 말이죠.


4. 세션의 구성, 음악, 국면

      만들어지는 상황에 따라 그려주시는 맵도 감사했고, 토큰을 움직이며 진행하는건 언제나 재밌죠. 상황에 맞는 음악이 나오는것도 이입하기에 너무 좋았고 정말로 RPG게임을 하는 기분이었어요. 세 캐릭터가 이야기를 하며 장면을 만들어가고, 거기에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와 숨겨진 이야기를 알아가는 구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연스럽게 정보를 주시는게 참 좋았습니다. 전투장면도 턴제가 아니라 협공을 하거나 액션을 써서 함께 만들어가는 장면인게 좋았죠. 비록 저희의 주사위는(특히 저..)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지만 그것 또한 이야기의 일면인게 좋았어요. 이화는 평화주의자라 첫 싸움을 견디지 못했다는..주사위가 만들어준 설정을 가지게 되었네요. 그리고 공격스킬을 찍어야겠다는 다짐도요. 그리고 캐릭터의 설정을 이용한 스토리는 놀라웠어요. 갈등요소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는데 다음 이야기가 정말 궁금해요. 첫 이야기라 평화로웠던걸까요? 물론 저희의 전투는 피터지고 긴박하고 주사위가 도와주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음유시인이라는 특성상 악기를 연주해야 스킬이 나가는게 저로서는 웃기고 좋았어요. 바닥에 앉아서 집중하겠다고 그 개판에서 연주하는게 말이죠(ㅋㅋㅋㅋ) 마스터님이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를 잘 수용하고 설정을 만들어주는게 정말 좋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두분도 세션을 즐기는것 같았고, 마스터님도 즐거웠길 바라요.



쓰고나니 좋았고..좋았고..좋았습니다..밖에 없네요.

정말 즐거웠기 때문에 그런것 같습니다.

다음 세션을 기대하고 있어요!

 

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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