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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07.21 05.夏夕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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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5.07.06 03. Great rel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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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5.05.08 01. 水低

good bye!

긴것/연성 릴레이 2015. 7. 25. 18:18

지금 당장 옆사람을 쏘지 않으면 죽는다 


good bye!

 

 

세계가 멸망한다는 사실은 맛없는그러나 풍요로운 영양을 위해 꼭 먹어야하는 음식처럼 억지로 씹어 넘기고 나자바로 그 날은 내일로 다가왔다갑작스럽다 투덜거려도 어쩔 수 없었다지구에 충돌하리라고 운석이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오히려 끌어들인 것은 중력이라 하니 더욱 할 말이 없었다그것은 그동안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게 한 생명의 기원이었지만중력은 그런 자신을 너무도 과신한 걸지도 모른다사람은 중력의 덕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이제 와서 염치없이 중력의 탓을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1.

 

창밖으로 시퍼렇고 커다란 운석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시계는 오전 7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밖은 해가 진 저녁보다 새벽처럼 어슴푸레한 빛이었다. TV에서는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한동안은 궤도를 측정한다며 여론을 선동하더니 이젠 그들도 포기한 모양이었다마지막 아침을 맞은 성준은 허무하도록 상쾌하게 기지개를 피며 거실로 나와 손에 든 물건을 카이토에게 내밀었다.

 

카이토이런 게 머리맡에 있었어.”

안녕히 주무셨어요작은 쪽지네요전 쓴 적이 없는데요총은 갑자기 어디서 나셨어요?”

이건..믿을 수 없겠지만 꿈이었는데..”

 

성준은 한 달 동안 지구를 향해 점점 다가오는 운석을 그렸다날이 지날수록 망원경을 쓰지 않아도 굴곡진 모양이나 우주 어디선가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얄밉게도 운석의 빛은 카이토의 눈의 색과 닮아있었다내일이 마지막이라 완성은 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고작 유감인가세계가 멸망하는 것이.”

당신은 뭐야?”

유감 이상의 감정을 가진 것이지어때선택 하나 해볼래?”

 

꿈의 천정에서 작은 권총과 쪽지가 팔랑이며 떨어졌다권총은 성준의 손에 맞게 적당한 사이즈였다.

 

[쪽지가 사라지기 전에 총으로 살인을 하면세계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살인..?”

자살은 재미없으니 제외하지그럼다시 만날 수 있기를.”

 

머리맡에는 시커먼 권총과 반듯한 글씨체의 쪽지가 놓여있었다꿈이라 하기엔 꺼림칙하게 생생했다천정에서 누군가가 바라보는 듯 한 느낌에 성준은 위를 올려다 보았으나 쏟아지는 것은 불안한 기운과 귓가를 울리는 카이토의 당연한 질문 뿐이었다.

 

살인...꼭 살인이여야 하는 건가요?”

 

쪽지의 끝이 검게 변하더니 카이토의 손 위에서 타들어가기 시작했다처음 들어보는 권총은 묵직했다권총 뒤의 고리를 잡아당기자 실탄 하나가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권총을 들자마자 공격불가 알림과 메시지가 눈에 나타나 가뜩이나 좁은 시야가 붉은 창으로 뒤덮였다.

 

밑져야 본전이지어차피 오늘로 끝이라는데.”

마스터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살인이 가능한 경우는 하나 밖에 없잖아머리를 쏴.”

싫어요마스터 오늘 좀 이상해요.”

쏠 수 있지말 두 번 하게 하지 마.”

 

어느새 쪽지는 작은 귀퉁이 하나만 남겨져 있었다성준은 총구를 이마에 가져갔다한쪽 눈 밖에 없는 카이토가 제대로 쏠 수 있도록 정중앙에 두고서 점점 흩어지는 남은 쪽지조각을 보며 조급하게 외쳤다.

 

카이토어서.”

마스터죄송해요...”

됐으니까 빨리!!”

 

허공에 총성이 울려 퍼지자 성준은 질끈 눈을 감았다운석이 충돌하면 지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불타 사라진다고 했다고통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TV나 라디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권총을 이마에 맞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귓가를 칼로 후벼파듯 날카롭게 찌르는 총성의 메아리가 울리고카이토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졌다커다란 소리에 귀에서는 이명이 왱왱거렸다아직 살아있는 무감각에 눈을 뜨자 바닥의 권총 위에는 기름 냄새가 나는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총의 반동으로 카이토는 미친 듯이 손을 떨고 있었다.

 

“...전 사람은 해칠 수 없게 프로그래밍 되어있어요미리 말 하지 않아서 죄송해요.”

이런 멍청아!! 그러면 말을 했어야지네 팔은 왜 쏘는 거야?! 안 그래도 병신이면서!!”

제가 해를 입힐 수 없는 대상은 물건도 포함돼서요..쏠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아쉬웠던 총성과 함께 쪽지는 공중에서 작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카이토가 입은 새하얀 코트 밖으로 시뻘건 피가 물들고총알이 박힌 팔은 반쯤 떨어져 제멋대로 너덜 너덜거렸다출혈 속도로 보았을 때오늘 까지는 버틸 수 있겠다고 카이토는 웃으며 말했다.한낮인지 알 수 없는 어두운 하늘이 운석의 그림자로 드리워지자 성준은 캔버스에 파란색의 붓을 계속 덧칠했다파란 물감에 검은색을 섞어 아래쪽부터 명암을 만들었다운석이 다가오는 소리가 웅웅대며 커지고땅이 일어나 운석을 맞을 준비를 하는 듯이 울렁거렸다카이토의 피로 가득한 바닥에 앉은 성준은 붓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다오늘 이내로 끝날 수 있어서요슬슬 출혈량이 위험했어요.”

불가능한 선택지를 주고 허세부리긴괜히 기분 더럽게 놀아났잖아.”

그 분이 제가 보컬로이드인걸 모르셨을까요?”

그럴 리가.”

 

그 세계는 연기처럼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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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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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夏夕空

 

일곱 시 이십분. 카이토는 미리 맞춰놓은 오븐의 타이머가 울린 듯 반짝 눈을 떴다. 다시 눈을 감고 시스템 체크. 체온. 시각. 청각. 촉각-. 의식 활성화. 잔여 메모리 정리 완료. 충전코드를 목에서 뽑아 동그랗게 감아 담요 위에 올려두었다. 구색이라도 맞춰 놓고 있으라는 성준의 말에 충전코드가 연결된 거실의 자리 아래에 얇은 담요를 깔았다. 여기저기 보풀이 일어난 낡은 담요는 베란다 끝에 있던 작은 창고에 덜렁 놓여있었다. 다른 빈 상자 몇 개 에서는 버리지 않은 쓰레기나 잡동사니가 들어있었다. 창고의 존재를 최근에 알아챈 성준은 담요의 먼지를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이것만 왜 안 버린 거. 이상한 전주인 .”

이거 제가 쓰면 안 될까?”

더러워서 . 먼지는 안드로이드한테 별로래. 하긴, 넌 침수에 눈에..이제 와서 관리해봐야 무슨 소용이야.”

빨아서 쓸게요. 그러고 보니 정기 점검이 다음 주 부터 한 달 동안이네요. 혼자 다녀올게요.”

웃기시네. 가다가 전봇대에 박아서 영영 누워있고 싶어? 걸어가긴 멀던데, 자전거라도 빌릴까.”

 

6개월에 한번씩, 등록된 안드로이드들은 센터에서 정기점검을 받아야 했다. 센터를 이용하지 않은 등록은 엄밀히 말하면 불법이었기 때문에, 중고기기의 재등록을 하라는 메일과 문자가 여러 차례 날아왔다. 하지만 한자가 가득한 전문용어는 영 이해하기 힘들었다. 번역기 대용으로 카이토를 데려와 메일을 보여주었지만, 법률 용어를 쏟아내는 카이토의 설명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성준은 인터넷을 뒤져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센터를 찾아 전화로 재등록을 하고, 다음 점검 날에 들러 서류를 작성하라는 직원의 말을 메모해두었다. 계좌는 팩스로 보냈으니 임시 등록은 된 셈이었다.

 

마스터! 오늘 센터 간다고 말씀하신 날이에요.”

...지금이 몇 신...나 새벽에 누웠거든.”

아침 일곱 삼십이 분이! 센터는 아홉시에 오픈이고, 준비하고 거리를 계산해보면..”

나가. 열두시까지 들어오지 . 켄타가 자전거 빌려주기로 했으니까 그거나 받아놓고.”

알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켄타는 그 후로도 종종 마주쳤다. 늦은 저녁 장을 보러 나가는 시간이 켄타의 하교시간과 맞물려 있었고, 켄타는 늘 혼자 다녔기 때문에 말을 걸기도 쉬웠다.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켄타였다. 몸보다 커다란 기타를 매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걸어가던 켄타를 부르면 금방 어수룩한 얼굴로 뛰어와 인사를 하고, 카이토에게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자전거를 빌려달라는 부탁에도 싫은 소리 없이 일 보러 가는 김에 들리겠다고 답했다. 방을 나온 카이토는 냉장고를 열어 부족한 식재료를 기억했다. 남은 집안일을 조용히 해치우고 식탁에 앉아 현관문을 진득하게 바라보며 켄타를 기다렸다.

 

실례합니다. 자전거를 가져왔는데요.”

네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성준형의 부탁으로 자전거를 가져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건물에 자전거를 묶어 놓을 곳이 없더라고요. 가지고 올라오려니, 엘리베이터가 없고..”

곤란하네요. 지금 자전거는 어디에 있어요?”

화단의 울타리에 잠시 묶어놨는데, 얼른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거. 어떡하지, 형은요?”

마스터는 열두시까지 깨우면 안돼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같이 내려가요.”

 

카이토는 식탁위에 빠르게 메모를 남긴 후에 켄타와 함께 집을 나섰다. 한참 뒤에야 일어난 성준은 인기척 없는 집안을 둘러보다 테이블 위에 프린트 한 것처럼 반듯한 글씨의 메모를 발견했다.

 

[자전거를 돌보고 있겠습니다. 1층의 화단 옆.]

 

뭔 소리야...자전거가 강아지라도 되는 줄 알겠네.”

 

성준은 부스스한 머리를 만지며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1층의 화단에는 건물에 사는 할머니들이 손을 모아 돌보는 여름 꽃이 마악 피어나고 있었다. 낮은 화단의 울타리 옆에 켄타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카이토는 자전거 옆에 앉아 화단의 꽃을 만지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눈에 띄는 시퍼런 머리카락이 햇빛에 비쳐 반짝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치자 카이토는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어이, 카이토!!!!”

우와. 마스터! 일어나셨나요? 아직 열한시 사십오 분인데요!”

하는 거야 이 멍청아!!!”

 

카이토는 힘차게 다시 소리쳤지만, 성준은 작게 욕을 뱉은 후에 휴대전화를 챙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자전거 자물쇠를 손에 든 카이토가 빌라에 자전거 주차장이 없다고 해맑게 웃었다.

 

자전거 세워놓는 곳도 없다니. 일본은 자전거 많이 타고 다니잖아..?”

이 건물엔 없고, 이 옆에 있는 공통으로 쓰는 주차장은 요금을 내고 써 야해. 켄타군한테 비싼 돈을 내달라고 하긴 죄송해서..”

한 시간에 100엔이잖아!! 75만 엔짜리 초고가 기계주제에 무슨 소리야! 네가 쓸데없이 매일 먹는 아이스크림도 하나에 200엔이라고. 듣고 있어? 잠시만 기다려. 준비하고 다시 나올 테니. 오늘 더우니까 모자 쓰고. 카드랑 신분증..”

마스터. 시리얼 코드 적어가야해요.”

그랬지, . 네가 기억하고 있지 않아?”

그건 중요정보라서 제가 밝히는 건 불가능해요.”

 

성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걸어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에 메모해놓은 종이와 모자 두 개, 신분증을 넣은 지갑을 백팩에 넣고 늘 신던 슬리퍼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휴대전화를 확인해보니 켄타에게서 메시지가 세 개나 와있었다.

 

[자전거 가지고 갈게요.]

[전화 가능할까요?]

[시간이 없어서, 두고 갈게요. 카이토가 제 말은 전혀 안 듣네요. 죄송합니다.]

 

어서 뒤에 타. 나중에 켄타한테 사과해야겠다. 못살아 정말.”

켄타군, 정말 착하니까 걱정이에요.”

헛소리 말고 뒤에 타기나 해.”

 

성준은 기세 좋게 자전거에 앉아 뒤에 붙은 카이토의 손을 허리에 당겼다. 그리고 의외의 저항감에 고개를 돌렸다.

 

뭐해? 잡으라니까. 넘어지고 싶어? 허리 앞 쪽을 꽉 잡아.”

그게..앞으로 앉으면 마스터 등에 가려서 잘 안보여서. 그럼 옆으로..”

 

자전거로 달리니 빌라를 벗어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마트를 갈 때 지나가는 강과 다리를 단번에 넘어 낮은 주택가에 들어섰다. 카이토는 제법 무거웠고, 등에 바싹 붙어 무게가 더욱 느껴졌다. 목에서 땀이 흘렀지만 곧 바람에 식어갔다.

 

카이토, 여기서 어느 쪽?”

왼쪽으로 돌아서 200m 직진하세요. 다음으로 나오는 좁은 길은 무시하세요.”

 

앞을 빼꼼 내다보던 카이토가 다시 등에 달라붙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사이로 느지막이 산책하는 노부부와 나무그늘이 스쳤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등에서 조급하고 커다랗게 심장소리가 울렸다. 높고 거친 숨소리. 평소보다 뜨거운 체온. 지나가는 가게에서 은은하게 울리는 라디오 소리. 카이토는 빠르게 달라지는 것들을 저장했다. 작은 방에서 시작했던 풍경의 반경이 넓어지고 있었다. 마스터와 지나갔던 다리. . 사나흘에 한번 가는 마트. 머릿속의 지도에서 기호에 불과했던 작은 정보들. 악보 속에 갇혀 있던 노래를 부를 때처럼 신기한 일이었다.

 

 

 

***

 

 

이십분 쯤 들려서 도착한 센터는 한적했다. 이 곳은 직원과 수리기사를 포함해 하루에 근무하는 직원은 두세 명이 전부인 작은 곳이었다. 성준은 자전거를 앞에 대놓고 센터로 들어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닿자 땀에 젖은 옷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카이토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펄럭거리며 열을 식히더니 번호표를 뽑는 곳으로 걸어갔다.

 

더워...너 은근히 무겁잖아. 집에 땐 장도 보고 가려고 했는데, 벌써 힘들어.”

번호표 뽑았어요. , 벌써 저희 번호에요!”

 

아무도 없었으니 차례는 금방이었다. 창구의 직원은 전에 전화했던 목소리보다 가늘고 어린데다 귀여운 구석까지 있는 단발의 아가씨였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식 등록이랑, 얘 점검이요.”

알겠습니다. 등록은 제가 도와드리고, 기체는 안쪽의 메인터넌스 룸으로 들어가 주세. 삽십 분 정도 소요됩니다.”

 

상냥한 미소를 띤 직원은 자리에서 서류를 찾아 내밀었다. 카이토는 살짝 고개를 숙인 후에 창구 옆으로 난 안쪽 길로 걸어 들어갔. 받은 몇 개의 서류는 신상정보와 서약서, 계약서. 같은 것이었는데. 중요한 곳에는 영어가 적혀 있어 메일보다는 읽기가 쉬웠다. 성준은 볼펜으로 서류를 작성하며 연신 웃고 있는 직원에게 살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제 기체의 전 주인에 대한 정보나 카이토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안드로이드 기체 정보 법에 어긋나서 불가능합니다. 저희도 열람이 불가능해요. 다만..저 카이토라면 몇 번 봤죠. 눈 색이 달라서 기억하기도 쉽고. 자주 정기점검일 외에도 수리하러 왔어요.”

눈은 언제부터 그랬나요?”

제가 오기 전부터 그랬으니까, 적어도 2년은 넘었겠네요. . 최초 등록일은 6년 전이네.”

“6년 전? 여기서 등록된 건가요?”

정식 등록 완료 되었습니다. 이제 업데이트는 집에서도 다운로드로 가능하세요.”

 

확인 서류를 올려둔 직원은 볼일이 끝났으면 이만. 이라는 얼굴로 미소 지었. 별수 없이 돌아선 성준은 뒤에 있던 소파에 앉아 켄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 자전거 고마웠어. 언제 돌려줄까?]

[형 편할 때 주세요. 이제 방학이라 집에만 있을 거라.]

 

켄타의 어머니는 동네에 하나뿐인 악기사를 한다고 했다. 어머니. 라고 단정 지었으니 아버지는 어떤 이유로 함께 살고 있지 않을 텐. 더 이상 묻진 않았다. 그래서 작곡이나 기타를 배운지는 중학교 때부터라 꽤 되었다고 말했다. 고작 3년일지도 모르지만, 그 나잇대의 소년에겐 긴 시간이다. 성준은 답장을 보내다 잠시 고민한 후 뒷 문장을 붙여 전송했다.

 

[다음에 집에 놀러와. 카이토가 노래하 게 보고 싶어. 넌 할 수 있지?]

 

카이토는 할 일이 없으면 CDP의 노래를 계속 들었다. 성준은 짐을 뒤져 다른 CD를 찾아 주었고, 식사 시간에 마주 앉으면 들었던 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젠간 저도. 언젠가는. 하며 짓는 미소는 쓸쓸해보였다. 설거지를 할 때 가끔씩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분명 그것 보다 더 제대로 된걸 하고 싶을 것이다. 창구의 직원이 손을 들어 성준을 부르자 카이토가 열린 문에서 걸어 나왔.

 

저기. 잠시만. 눈은 수리가 안 되는 건가요?”

아예 망가져서 안돼요. 눈은 단일 파츠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시야는 어쩔 수 없지만, 평형감각이나 조정은 최대한 높여놨습니다.”

 

따라나온 늙은 수리기사는 카이토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 따라 움직이는 파란색 눈동자와 가만히 고정된 회색 눈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침수에 의해 추가적으로 몇 개를 더 손봤으니, 이제 절대 하지 말라며 신신 당부를 한 뒤에 카이토의 등을 툭툭 쳐 가라고 손짓했다.

 

마스터,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가자.”

침수에 의한 수리비는 전액 본인 부담으로 계산됩니다. 총액 42500엔입니다. 카드로 계산하시겠어요?”

“...카드로요.”

..죄송해요. 마스터.”

아오..힘없으니까 걸어가자..”

 

재등록 비에 수리비, 점검 비까지 합친 영수증은 어마어마했다. 얼마 전에 그림을 넘기고 받은 돈을 고스란히 지불했다. 날은 여전히 무더웠다.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던 성준은 센터를 나선 후로 조용히 걸어오던 카이토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영수증의 가격에 놀란 건 카이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비싼 줄 알았으면, 침수 수리는 하지 말걸 그랬다며 침울한 표정으로 당분간 아이스크림은 먹지 않겠다고 했다.

 

도대체 이 많은 돈을 들이고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노래, 채보, 기본적인 악기연주..”

그것 참 멋지네. 들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뭐라도 해야겠어. 노래 해봐.”

에엑. 지금요? 노래 데이터가 없는데요.”

아까 지나올 때 들었던 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 여름의 향기-. 그런 가사가 있었는데.”

아하. 그 노래의 제목은 여름의 저녁하늘이에요. 기본 음설정만 된 상태라서...아니에요. 부를게요.”

 

카이토는 고개를 돌려 더위와 영수증에 지쳐 짜증이 올라오기 일보 직전인 성준을 힐끗 쳐다보더니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시작했다. 어정쩡한 첫 음으로 시작한 노래는 불안하게 이어졌다. 높은 음은 더 불안했고, 기대했던 것 보다는 별로였다. 카이토가 만들어 주었던 스파게티의 맛처럼 기본에 충실하고 단순한 노래. 카이토는 신중하게 음을 골랐다. 걷는 중이라 폐활량은 부족하고 성준은 뚫어져라 노래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첫 노래를 이런 식으로 하고 싶진 않았는데. 가사와 음을 틀리지 않는 것에도 벅찼다. 조용한 노래는 숨소리를, 흔들리지 않도록. 카이토는 부드럽게 음을 이어갔다.

 

もりよあの끝이에요.”

마지막 가사는 무슨 뜻이지? 모르는 단어네.”

스며드는 따스함이여. 그 여름의 기억이여. 입니다.”

괜찮은데, 좀 더 잘 할 수 있을지도. 같은 느낌이야. 마트는 어느 쪽이지?”

 

카이토는 왼쪽을 가리켰다. 자전거를 돌리자 익숙한 마트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트 안에서, 그리고 집에 돌아갈 때 까지 카이토는 노래에 대해 말했다. 그 노래의 원곡. 부른 가수. 가사. 그리고 자신이 신경 쓴 부분과 고쳐야 할 부분에 대해서. 그렇게 말해봤자 해줄건 없다고 성준은 잘라 말했지만 카이토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이 잔뜩 든 봉지를 손에 쥐고 노래의 마지막 가사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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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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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ry night

 

여름의 저녁바람이 시원하게 창을 타고 들어왔다한창 땀에 물까지 젖었던 몸을 씻고나오니,카이토는 집에 들어올 때까지 감고 있었던 눈을 멀뚱히 뜨고 거실 바닥에 앉아있었다성준은 혹시나 망가진 회색 눈까지 수복되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했지만그 눈은 기계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물이 들어간 정도의 가벼운 고장처럼 보이진 않았다강물에 빠져 쫄딱 젖었던 카이토의 몸은 다녀오는 동안 축축하게 말라있었다저대로 놔두면 기분 나쁘게 옷이며 머리며 눅눅한 강물에 떠있던 풀냄새가 스며들 것이다성준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카이토를 불렀다.

 

카이토옷 벗어봐세탁기 돌려야겠다.”

제가 입은 옷이요?”

넌 그 사이에 욕실 가서 몸 좀 닦고 와어서 줘지금 세탁기 쓸 거.”

머플러까지요?”

 

성준은 대답 없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내놓으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카이토가 옷이라는 명사의 뜻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아닐 테카이토는 다시 빤히 쳐다보더니 일어나 바지벨트를 풀어 벗은 후에 내밀고목까지 올려져 있던 코트의 지퍼를 내렸다코트 안은 의외로 평범한 회색 티셔츠와 검은 드로우즈 차림이었다코트의 품이 커다랬던 것에 비해 카이토의 몸은 단단하게 마른 체형이었다기다란 머플러가 감싸고 있던 목덜미는 얄팍했고목과 쇄골을 이어지는 선부터 검은 문신처럼 제조번호가 적혀있었다카이토는 쑥스러운지 목 뒤를 훑더니 하얀 옷가지를 말아 내밀었다.

 

적당히 씻어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지?”

그런데 마스터갈아입을 옷이 없는데..”

내 옷장에서 대충 찾아 입어얼른 들어가이상한 냄새 배기 전.”

 

성준은 카이토의 등을 떠밀어 욕실로 보낸 후에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로 나갔다뜨겁고 습기찬 바람이 덜 마른 머리카락을 헤집었다세제를 넣고 세탁기의 문을 닫은 후에 웅웅거리는 소리와 진동을 내며 돌아가는 등에 기대 느릿하게 지는 진홍색 노을이 내린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하나 태웠다허기가 진지 오래되어 음식을 할 기운이 나질 않았다카이토는 음식을 할 수 있을까보컬로이드에겐 기본적인 안드로이드 기능은 있다고 했으니요리나 청소 같은 가사도움 기능정도는 있을 테지만손상되었을지도 모른다심부름도 못 보내는 안드로이드를 집에 두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작업하는 중엔 누구라도 신경 쓰기 귀찮고집중력을 깨는 것은 치워놓는 것이 편했다담배 하나가 끝나 갈 때 쯤 카이토는 헐렁한 티셔츠와 허벅지 아래가 훤한 드로우즈 차림으로 베란다에 나타났다카이토는 마르고 새하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남은 담배연기를 손으로 휘휘 저어 밀어냈다.

 

마스터여기 계셨네요마스터 옷이 다 저한테 커서..”

..무슨 짓이야..바지는 어쨌어옷장에 반바지 많을 텐데.”

바지는..흘러내려서요청바지는 불편하고..속옷은 커도 입었어요.”

당연한 소리 자랑스럽게 하지 아참음식 할 줄 알아?”

기본적인 기능은 있어요해 본적은 없습니다.”

 

검은 티셔츠를 원피스처럼 입고 카이토는 장을 보았던 리스트에서 할 수 있을 만한 요리를 손꼽기 시작했다요리라고 하기 민망한 샌드위치토스트간단한 파스타손가락은 고작 세 개를 접고 끝나버렸다.

 

“..그게 끝이야?”

오늘 장 보신 게 식빵이랑 우유파스타면토마토소스커피캔 다섯 개아이스크림 두 개.맥주 여섯캔감자칩 한 봉지가 끝이라조합으로 검색되는 요리가 세 가지 밖에 없어요.”

아이스크림은 넣은 적이 없는데?”

제가 넣었습니다먹고 싶어서요.”

가지가지 한다아무거나 만들어봐피곤해서 손도 까닥 하기 싫어.”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토는 가슴께까지 내려온 티셔츠의 목을 올렸다그러자 어깨가 드러나 더욱 이상한 꼴이 되어버렸다긴 바지나 여름엔 두꺼워 보이는 기다란 코트를 입었을 때보다 훨씬 가벼워보이는 몸짓으로 부엌으로 가더니 얼마 되지 않아 성준을 식탁으로 불렀다식탁 위에는 토마토 소스로 만든 파스타가 한 접시 놓여있었다.

 

파스타를 만들었어요.”

네 건 없어?”

음식물은 처리하기 귀찮고제 것 까지 만들어버리면 마스터가 내일 드실게 없어요.”

그럼 아이스크림 먹어나 먹는 거 이렇게 쳐다 볼 거?”

그건 마스터와 함께 먹으려고 했는데요.”

난 아이스크림 안 좋아해애도 아니고둘 다 너 먹어하난 내일 먹든지.”

 

파스타는 생각했던 그대로의 맛이었다시간을 맞춰 면을 삶고 시중에서 파는 소스를 부은 평범하고칭찬 할 점이라고는 따뜻하다는 것 밖에 없었다하지만 아이스크림을 잡고 눈을 빛내며 파스타에 대한 코멘트를 기다리는 카이토를 마주보니 무슨 말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성준은 두 번째 입을 꾸역꾸역 삼킨 후에 입을 닦으며 말했다.

 

괜찮네아이스크림 먹을 값 정도는 했어.”

감사합니다잘 먹겠습니다!”

맥주 하나 마실까...먹고 작업하려고 했는데.”

마스터제가 꺼내드릴게요.”

 

의자 위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있더니카이토는 후다닥 일어나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내왔다건네는 맥주를 받으며 짧게 고맙다는 말을 하자 카이토는 만족한다는 얼굴로 다시 의자 위에 올라와 앉았다열어 놓은 바깥 창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순식간에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비운 후에 베란다에 나가 담배 하나를 더 피웠다그 사이에 카이토는 설거지를 마치고 손을 닦고 있었다마치 다음 일을 기다리는 듯 주춤거리며 다가오며 마스터하고 성준을 부르자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았다.

 

수고했어설거지는 내가 해도 되는데이제 쉬어난 작업할거니까.”

마스터혹시 작업실 책장에 있던 CD를 들어봐도 되나요?”

내 작업실에 CD가 있어?”

 

작업실의 책장은 협회에서 바로 들여놓은 짐이 정리되어 있었다노래를 듣는 취미는 없었고,하물며 CD를 사는 버릇 또한 없었다성준은 카이토가 말하는 CD를 확인하기 위해 함께 작업실로 들어갔다카이토는 미술도구로 엉망인 방 앞에서 손가락으로 벽에 있는 장식장의 두 번째 단을 가리켰다.

 

이거...예전에 선물 받은 거네.”

선물을 잊어버리시다니밀봉 되어 있는 걸로 봐선 들어본 적도 없으시죠?”

상대를 고려하지 않은 선물이지.”

 

선물 받은 것은 몇 년 전의 일이었다아마도 뉴욕에서 지낼 때였다작업실의 옆집에 살던 캐나다인이었는데초대 하지 않아도 시간 빌 때마다 작업실에 놀러와 술을 마시거나 자신이 좋아한다는 재즈 음악의 CD를 틀어놓고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길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하곤 했다마약을 했다던지어떤 배우와 사귀었다가 헤어졌다던지대부분 가십과 거짓이 잔뜩 발린 쓸데없는 잡담이었다귀찮다고 생각했지만그가 없는 저녁은 언젠가부터 쓸쓸하기 시작했다깊고 본연한 외로움이 이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외로움은 자각하기 시작하자 눈덩이처럼 불어나검은 눈을 가리고 감정의 늪구덩이에서 살아나기 위해서 그것이 사랑이라 말하기 시작했다그때는 그것이 삶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

 

 

성준은 바닥에 깔린 미술도구 사이를 휙휙 넘어가 캐리어 안에서 낡은 CD플레이어를 꺼내 카이토의 손에 쥐어주었다버튼 여기저기에 먼지가 끼여 있었지만 사용한 적은 없었다버렸다고 생각했는데용케도 이리저리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이걸로 들어그때 같이 선물 받은 거야.”

그런 소중한 것을 제가 써도 되나요감사합니다.”

됐어너 이어폰을 낄 수 있는 구조인거야 그 헤드셋이 있는 쪽은?”

탈부착 가능해요이건 인이어 헤드셋이라고반주를 잡음 없이 들을 수 있도록 쓰고 있어요.”

 

한 손으로 헤드셋을 살짝 돌리자 딸깍 하는 소리가 나더니 왼쪽과 비슷한 모양의 귀가 나타났다카이토는 귓바퀴를 바로 잡으려는 듯 몇 번 만지더니 CD와 플레이어와 자신의 헤드셋을 품에 안고 생긋 웃었다.

 

그럼 작업 수고하세요저는 거실에서 있을 테니필요하면 언제든지..”

카이토잠시만손 풀게 크로키 몇 장 할 건데 들으면서 잠시만 앉아 있다.”

크로키라면빠른 스케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앉아있어도 되고서있어도 돼말은 하지 말고, CD들어도 되니까.”

 

성준은 바닥에 있던 크로키용 스케치북을 꺼내들고 기다랗게 깎인 연필이 여러개든 통에서 끝이 뭉툭한 것을 하나 골라 종이의 모서리에 대고 휘갈겨 다듬었다카이토가 앉은 창 뒤로 해가 져 완연히 검보랏빛 구름이 느린 바람에 흘러갔다이어폰을 귀에 넣고 CD를 재생한 카이토는 정물처럼 가만히 앉아있었지만열어둔 창에서 부는 바람이 머리와 옷을 흔들었다.

 

"하나 끝났어가만히 잘 있네이제 다른 자세 해봐눕던지뒤로 돌아서 앉는 거..“

헤에봐도 되나요마스터 손이 굉장히 빨리 움직여서신나는 곡의 지휘를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와서 봐비슷한 걸로 두 세 개 더 한건데머리카락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지.”

 

카이토는 이어폰을 내려놓고 다가와 밝은 얼굴로 스케치북을 바라보았다지나간 찰나가 스며든 종이에는 검게 칠해진 명암으로 박제되어 있었다카이토는 자신을 창작이라는 인간의 특권의 부수물이라 여겼다음악 이외의 방식이라 해도창작은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세 장의 스케치는 이어지면 눈을 감는 동작으로 이어졌다.

 

신기해요저와 똑같다고 할 순 없지만비슷한 특징은 보이네요제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나 보네요대칭이..”

그런 식의 평가는 그만 둬노래는 어때?”

마니악한 길거리 재즈 음악이에요바의 라이브를 바로 녹음한 것이라 객석의 소음이 함께 섞여있어서 생생한 분위기이고피아노 반주가 항상 엇박으로 시작하는 것이 재밌네요유명한 재즈곡을 밝게 편곡한 2번 트랙과 우울하게 편곡한 3번 트랙이 대조되네요장난기가 많으신 분이에요.”

그랬지.”

“..아시는 분이신가요?”

 

카이토는 CD의 뒷편에 써져있던 글귀를 보았지만 모른 척 했다데이터베이스에 검색 되지 않는가장 자신 있는 곡을 선택해서 한 사람만을 위해 녹음한 CD. 노래에는 사랑이 흘렀고여유로운 분위기는 노래를 하던 바를 눈앞에 드리웠다어두운 조명나이를 제법 먹은 피아노시간은 아마도 한밤중이 되기는 이른 초저녁익숙한 반주자와 손을 맞추지 않아도 서로의 리듬을 조화롭게 만드는 오랜 세월그리고 목소리에는 가득히 한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FOR J. with love.

 

성준의 표정이 굳어갔다그는 변덕스러웠지만영 변하진 않을 거라 믿었다가장 괴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멀어진 관계는 영원히 멀어지고 말았다사람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생각과 마음은 언제든지 바람에 흔들리고숨이 이어지는 한 모든 순간 사람은 변한다그림처럼 박제된 관계는 없었다괴로움이나 외로움도 사라지고무뎌진다일렁이는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지만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예전 일이야.”

제가 마스터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이 이것보다 보잘 것 없어서 분하네요.”

네가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

제 모든 것이죠저의 음악과 짧은 생활과 기성품인데다 조금 망가진 몸까지.”

 

가진 모든 것을 바쳐도 멋진 시간장소사람음악그의 사랑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다.안드로이드의 무력감은 이어진다기계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언제라도 잊히기 쉽고감동을 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당신에 대한 사랑을 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발자취에라도 닿을 수 있을지 까마득했다성준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카이토에게 손짓을 했다은은한 담뱃불 사이로 비추는 마스터는 괴로워 보였다행복한 시간을 할퀸 흉터는 깊고잠들어 있던 고래가 숨을 펴듯 수면 위로 차고 올라와 마음의 수면을 흔들었다.

 

마스터괜찮으세요?”

옆에 있어.”

작업 하시는데 괜찮으신가요?”

됐으니까그냥 옆에 있어.”

 

다 태운 담배를 바닥에 있던 종이컵에 넣은 성준은 의자에서 일어나 카이토가 앉은 바닥 옆에 앉았다카이토는 망설이더니 손가락 하나를 잡더니 어깨에 기대고 한참동안 가만히 심장에서 퍼지는 불규칙적인 두근거림과 마스터의 숨이 드나드는 공기소리를 들었다어느새 잠든 밤이 지나 새벽이 이어지듯 언제까지고 이어지길 바라며언젠간 노래로 괴로운 밤을 메우고마스터의 빈 어느 공간을 채울 수 있도록이루어지기 힘든 기원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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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03. Great relief 


오랜만에 잡은 붓을 한참이나 멈추고 있던 성준은 캔버스 아래에 놓여있던 크고 작은 붓이 잔뜩 든 양철통에 붓을 던져 넣었다. 한 붓을 그리고 나면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미술의 성질이었다. 그는 앞뒤가 막힌 미로에 갇힌 개미처럼 하잘 것 없이 초라하게 눈앞에 놓인, 삼십분 전 까지 손을 움직이던 새파란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물의 느낌은 사라진다. 눈을 감자 차갑게 닿던 물과 군청에서부터 이어지는 파랑의 오로라가 검은 시야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점점 멀어져갔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감각의 끝에는 카이토의 눈동자가 있었다.

 

“배고픈데..집에 먹을 것 하나도 없지.”

“마스터. 다 끝나셨나요?”

 

거실로 나오자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카이토가 강아지를 부른 듯 폴짝 일어나 뛰어왔다. 성준은 카이토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카이토는 애매하게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는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여 카이토를 쳐다보다가 이내 아무 말 없이 지나쳐 물감 투성이인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파란 물이 퍼지는 세면대에 손을 씻으며 성준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저런 얼빠진 얼굴에서 공감각 이미지가 나타난 거, 우연이겠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거실로 나오자 카이토가 보이지 않았다. 성준은 발 빠르게 문이 열려져 있던 작업실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도 카이토는 캔버스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캔버스에 발린 파란색의 만화경과 새파란 카이토의 뒷모습은 하나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카이토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익숙해져서 일까, 웃는 모습이 점점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건 물속인가요?”

“안드로이드는 물속에 들어갈 수 없으면서 용케 알았네.”

“사진으로 본 적이 있어요.”

 

안드로이드는 생활방수가 기본적이다. 완전 침수는 그들이 사람과 비슷한 모습이기에 종종 벌어지는 사고이기 때문에, 안드로이드를 구매한 사람들에게 가장 주의할 것으로 손꼽는다. 안드로이드 패키지의 오른쪽 옆 부분엔 커다랗게 절대 목욕을 시켜 전신을 침수 시키지 마시오. 라고 인쇄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성준은 한국의 친구가 어머니께 가사도우미 안드로이드를 사드렸다가, 새로 온 식구에게 어머니가 깨끗이 목욕을 시킨 바람에 집에 들이자마자 완전침수로 폐기처분 했다는 눈물어린 일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없어요.”

 

빈 말이라도 할 법 할 텐데, 카이토는 딱딱하게 대답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작업실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누구라도 한 마디씩 건네기 마련이었다. 아무 의미 없는 잘 그렸다며 변변찮게 머리를 긁적이거나 쓸모없는 미사여구로 그럴 듯하게 말을 꾸며내기도 한다. 역시 안드로이드에게 발상이나 감상에 대한 요구는 과분한 것이었다. 허기를 채우기로 마음먹은 성준은 창밖을 내다보며 주변의 건물을 살폈지만, 가게처럼 보이는 것은 없었다.

 

“여기 가까운 슈퍼라든지..어디 있어?”

“슈퍼..제가 알려드릴게요! 내비게이션으로! 제가 같이 따라가도 되나요?”

“어디에 있는 지나 말해 주면 되는데.”

“이 동네는 가게들이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처음 찾아가면 헤맬 수 있어요. 기왕이면 사용하시는 게 좋지 않으세요? 네? 네에?”

“야, 알겠으니까. 그만 가까이 오라고. 짐 정도는 들 수 있지?”

 

성준은 한쪽 눈을 빛내며 다가오던 카이토를 밀어내고 함께 따라 나섰다. 팔 다리는 멀쩡하니 짐꾼으로 써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은 돌부리에도 휘청거리는데다 길가에 커다랗게 세워진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치더니 미안하다며 전봇대 앞에 대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눈뜨고 보기 힘든 가관에 성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카이토는 시야가 좁아 어쩔 수 없다며 저도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더니 저만치로 후다닥 걸어 나갔다. 주변은 한적한 시골의 풍경이 완연했다. 얇은 시냇물이 흐르는 다리를 천천히 걸어가던 강에서 바지를 걷은 채 무언가를 찾고 있던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소년은 불안하게 성준을 올려다 보다 다리 건너편으로 먼저 건너가 있던 카이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스터-. 빨리 오세요.”

“...카이토 형?”

“..누구..?”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강 아래로 시선을 돌린 카이토는 소년을 보고도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형이라고 불린 것 치고는 전혀 모르는 초면이라는 얼굴이었다. 어수룩해 보이는 소년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부끄러운지 흔들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가 착각했나 봐요. 죄송합니다.”

“곤란해 보이는데, 도와줄까?”

 

소년은 자신을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에 올해 겨우 입학한, 미나미 켄타라고 소개했다. 성준은 간단히 이름과 얼마 전에 이사 왔다는 사실 만을 밝힌 뒤 바지를 걷고 강으로 내려갔다. 따라오는 카이토에게 강 옆의 잔디밭에 앉아 있으라고 명령한 후에 다시 고개를 돌려 켄타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한 쪽만 불그스레한 얼굴이나 걷은 다리에 검은 멍이 든 것으로 봐서는, 강에서 잃어버렸다는 USB가 켄타의 부주의에 의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골에서 까지 학교폭력인가. 여러 가지 의심이 들었지만 초면에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닐뿐더러, 남의 일에 깊게 간섭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는 생각에 성준은 입을 다물고 적당히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덮었다.

 

“그런데 켄타, 저 녀석이랑 아는 사이야?”

“아, 죄송해요. 이 동네가 워낙 좁아서 아는 보컬로이드 인 줄 알고 헷갈려서 말을 걸었네요.”

“이곳 사람들은 안드로이드를 많이 가지고 있어?”

“노인이 많은 동네라, 가사도우미용 안드로이드는 많아도 보컬로이드는 많지 않아요. 제가 알기로는 아사노씨를 포함해서 7개체 정도 있었는데..”

“아사노씨?”

 

이거구나. 성준은 아사노라는 사람이 카이토의 전 주인이라 확신했다. 카이토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뒤져서 카이토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자신의 공감각을 일으킨 것인지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카이토는 이전의 기억이 ‘보호’ 되었다며 마스터인 성준에게는 열람권한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쓰러져가는 모래성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되묻자 켄타는 의외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가셨는데, 제가 착각한 카이토의 소유자 분이세요.”

“그렇구나, 그런데 어떻게 아사노씨의 보컬로이드가 아니라고 확신했어?”

 

기껏 이야기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눈치도 없이 카이토는 멀찍한 곳에서 마스터-. 켄타군-. 하고 큰소리로 부르며 팔을 휘휘 저었다. 성준이 귀찮다는 듯 대충 물기 어린 손을 흔들자 카이토는 기쁜 듯이 방긋 웃었다. 켄타는 그런 카이토를 바라보더니 쓸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표정이 좋은 카이토네요."

“아사노씨네 카이토는 언제나 무표정이거든요. 저렇게 웃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

 

 

 

마스터가 내린 두 번째 명령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 거기, 가만히 앉아있어!!”

“알겠습니다!”

 

그러기를 한 시간이었다. 흐름이 느린 강이라 멀리 흘러가지 않았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켄타군과 마스터는 강바닥을 헤집고 있었다. 도움이 되고 싶은데, 적당한 침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마스터는 요지부동으로 거기,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게다가 벌써 둘은 친해진 듯이 편하게 웃으며 카이토에게는 들리지 않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멍하니 집을 지키던 카이토는 가청주파수를 내리고 USB에서 흘러나올만한 흐름을 찾으려 귀를 기울였다. 강 속에서 가는 거미줄이 늘어나듯 느껴지던 전파가 커지더니 노이즈가 섞여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외침처럼 들리기도 했다. 카이토는 눈을 감은 채로 소리의 근원인 강물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스터와 켄타군이 있는 곳과는 더 떨어진 아래쪽이었다. 발목과 다리에 찰박거리던 물이 흔들리자 카이토의 손에는 검은 USB가 잡혔다.

 

“마스터!! 찾았어요!”

 

카이토는 신나게 USB를 든 채로 물을 첨벙거리며 걸어갔다. 카이토의 귀에는 USB가 지저귀는 작은 멜로디가 서투르지만 차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허겁지겁 물 속을 걸어가던 카이토는 이끼가 낀 바닥의 돌을 밟아 뒤로 완전히 넘어졌다.

 

“으악!!! 저 바보가!!”

 

성준은 커다란 물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몇 시간 전 집에서 상자를 밟고 넘어지듯 뒤로 커다랗게 넘어가는 카이토가 보이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허우적대며 뛰어갔지만, 이미 바지가 젖어 걸음이 무거워 마음처럼 뛰어갈 수가 없었다.

 

‘전신 침수가 되면 기동 정지가 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안 그래도 고장 났는데, 방수기능이 아예 안 되는 거면?’

 

등과 목이 오싹했다. 물속에 완전히 잠겨버린 카이토에게 다다를수록 초조하게 숨이 차올랐다. 가라앉은 어깨를 잡아 건져 올리자 손으로 코와 귀를 막고 있던 카이토가 기침을 하며 물을 뱉어냈다. 반쪽짜리 시야가 물에 이지러져 눈앞의 인영이 희미했다. 카이토는 보이지 않아도, 익숙한 체온으로 자신을 안은 것이 마스터임을 인지했다. 꽉 쥔 주먹을 펴자 검은 USB가 나타났다. 그러나 어깨를 잡은 마스터의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난 채였다. 켄타군의 걱정스런 목소리도 뒤에서 들려왔다.

 

“케헥..저는 성인 남성형이라 무거울 텐데..”

“침수로 고장 나면 수리 할 수도 없는데, 그렇게 폐기처분 되고 싶어?!”

“죄..죄송해요. 마스터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몸은 어때? 움직이는 데에 이상은 없어?”

“오른쪽 안구에 물이 들어갔는데, 이 정도면 자체수복으로 처리 할 수 있습니다.”

 

어깨를 잡았던 힘이 스르르 풀리자 카이토는 마스터의 얼굴이 궁금했다. 화가 아직도 난 것인지, 너무 화가 나서 손을 풀어버린 것인지. 그러나 시야는 아직도 뿌옇게 흐트러져 초점이 제대로 잡히질 않았다. 겨우 강가로 나와 숨을 돌린 성준이 USB를 건네자 켄타는 죄송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찾아주셔서 감사하지만, 두 분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으니, 받을 수 없어요.”

“그건 카이토가 내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한 행동으로 일어난 사고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고장 나지도 않았고. 중요한 물건이잖아?”

“노래 만들고 계신 거죠? 짧지만 굉장히 좋은 멜로디가 담겨있네요. 나중에 완성되면 들려주세요.”

“카이토...형..”

 

울먹이던 켄타는 카이토가 건넨 USB를 받아들고 연거푸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켄타가 다리 반대편으로 사라지자 성준은 허벅지까지 젖은 옷으로 휘청거리는 카이토가 손짓하는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몇 발자국 되지 않아서 앞으로 넘어진 카이토는 시야가 확실하지 않으니, 눈의 자가수복을 시행하겠다고 말하며 두 눈을 감아버렸다. 덕분에 성준은 장을 보는 내내 카이토의 손이나 소매를 잡아당겨 위치를 알렸다. 한 손에는 무거운 짐을, 한 손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카이토의 손을 잡고 무거운 몸으로 걸어가던 성준은 이곳이 한적한 동네라 천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성인 남성끼리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건 어떤 의미에서든 눈에 띄는 것이라, 연인이 있을 때에도 하지 않았던 짓이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걸어가던 카이토가 어느새 따뜻해진 손을 꼭 쥐며 입을 열었다.

 

 

“마스터의 물 속 그림은 포근한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물 속이란 건 생각보다 차갑고 무서운 곳이네요.”

“..아까 물어봤을 때는 어물쩍 넘어가더니, 이제 와서 대답하는 거야?”

“그때는 물속에 들어갔던 적이 없었던 걸요. 안 해 본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 드릴 순 없죠.”

“쓸데없이 확실하긴.”

“침수되지 않으려고 가만히 있을 때는 어둡고, 춥고, 조용해서 굉장히 무서웠는데..”

 

카이토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감았던 눈을 살포시 뜨고 성준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는 완전히 사람다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카이토의 머릿속에 있던 새하얀 오선지 위에 조그만 음표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행복의 기억, 물의 기억, 두려움의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마스터를 부르는 임프린팅의 재료로 만들어진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확실히 조각은 쌓여 아직은 모르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마스터의 손이 나타나 밖으로 꺼내주셨을 때, 굉장히 안심했어요.”

“...두 번 다시 그런 짓 하지 마.”

“알겠습니다.”

 

성준은 며칠 뒤 완성된 그림을 찍어 협회담당자에게 보여주었다.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담당자는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저희가 말하기도 전에 사진을 보내 주시다니, 상당히 마음에 드는 작품이신가봐요! 그리고 확실하네요. 멋진 바다 그림이에요. 주변에 바다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이 작품의 제목은 어떻게 되나요?”

“relief. 안도감으로.”

 

성준은 한 줄기 투명한 하얀 빛이 비추는 바다가 그려진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캔버스 아래에 기대 잠든 카이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당자의 폭포처럼 쏟아지는 칭찬세례를 피하려 휴대폰의 수화기를 귀에서 멀찍이 떼놓았다. 손가락 사이로 푸른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바다의 표면이 흔들리는 것처럼 물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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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지와 0와 1


PC가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선 성준은 마음이 급했다발가락으로 버튼을 어물쩍 눌러보다 얼른 손가락을 전원버튼에 가져갔다소생한 감각을 제공한 것이 이 안드로이드라면찰나의 순간에 이 정도라면 제대로 움직일 때는그는 PC설치를 먼저 해준 협회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PC를 키고 카이토의 CD를 넣자 설치 화면이 나타났다.

 

[Install을 원하시는 보컬로이드의 단자와 PC를 연결 해주세요.]

 

단자잠시만.”

 

그는 거실로 뛰어나가 카이토의 다리를 붙잡아 질질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비슷한 크기의 사람보다 묵직한 기계의 몸을 PC옆에 눕혀놓았다그는 파리에 있을 때알고 지내던 친구가 자신의 가사도우미 안드로이드를 충전하던 장면을 기억해냈다그 안드로이드의 단자는 목 뒤나 허리 뒤에 있었다성준은 파란 머리카락이 덮인 목덜미를 넘겨보았다네모난 모양이 난 홈을 눌러 여덟 개짜리 핀의 단자가 나타났다제품명 인 듯 한다섯 글자짜리 코드도 각인되어있었다.

 

[시리얼 코드를 입력해주세요]

 

PC화면에 다음 창이 나타났다시리얼코드정품 안드로이드라면 한 번 등록된 시리얼 코드는 다시 사용할 수 없었다이전의 코드를 안다면 재설치는 가능했지만성준이 발견한 것은 기체 하나와 설치 CD가 고작이었다가만히 반짝이는 화면을 바라보다 그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야속하게도 단자를 연결한 안드로이드는 묵묵부답이었다.

 

젠장...하긴이 비싼 걸 공짜로 얻을 수 있을 리가..”

 

시내에 나가서 정품 CD를 하나 더 사서 시리얼 코드를 하나 더 받아오는 수밖에.그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본체의 CD를 꺼냈다손가락으로 집어내자 그의 눈에 숫자와 알파벳이 섞인 글자들이 들어왔다무언가 들어맞는 느낌이었다마치 필요하신 분은 마음껏 가져가세요.’ 라며 남겨진 것처럼.

 

“KD56-190G-.."

 

[Install을 시작합니다. PC를 종료하지 마세요.]

 

우웅하고 기계의 고동소리가 울렸다인스톨은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설치 바가 조금씩 올라가자 앉혀놓은 모양새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기계가 발가락부터 작게 움찔거렸다그는 신기하게 기계가 깨어나는 모습을 관찰했다작은 부품들로 이루어진 조각들미세하게 조정되는 근육이나 구성 물질은 달라도 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넓적다리와 무릎은 연결부가 부드럽게 움직였다이제까지의 흥미를 제쳐놓아도 신기한 모습이었다곧 안드로이드는 고개를 들고아까 보았던 짧은 얼굴을 드러냈다성준은 침을 삼키고긴장된 가슴으로 그것과 마주쳤다양쪽이 다른 파랗고 잿빛의 눈동자로 카이토는 입을 열었다기계음과 사람의 목소리가 섞인 기묘한 목소리.

 

인스톨 완료시범 가동완료신체기능 78% 작동 가능합니다마스터 인식을 하시겠습니까?”

...그게 뭐야아무튼 해줘.”

동공 인식 및 안면 인식을 시작합니다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김성준성준.”

 

그는 얼떨결에 이름까지 내뱉었다카이토는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오롯이투명한 눈에는 성준의 인영이 비쳐보였다동공에서 파란 줄이 스치더니 카이토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인식 완료감사합니다재부팅이후 시스템이 적용됩니다.”

 

조용히 카이토의 내부에서는 어느 세계가 소리 없이 허물어지고새로운 지평이 나타났다아직은 새하얗기만 한음표 한 자락 없는 오선지와 0와 1의 바닥이 나타났다완벽하게 삭제되지 않은 메모리를 의식 아래로 내려버린 카이토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음의 가장 아래에서 끝까지 소리 냈다음이 가진 본원의 것에 약간씩 비켜나가고 있었다마지막 조정이 오래된 탓이었다.갓 태어난 아이보다는 많은 것을 가진 채로그러나 무지한 상태에서 카이토는 눈을 떴다.

 

“...마스터?”

...? 왜 아무렇지도 않지이름이 뭐더라카이토..”

마스터?”

 

성준은 일부러라도 물이 차오던 감각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어릴 때부터 알고 있다 시피 그것은 기적적인 소나기처럼 내색 없이 시작하고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퍼붓다가 수도꼭지를 잠군 듯 뚝 그쳤다살짝이라도 일렁이지 않을까유심히 째려보는 눈빛에 카이토는 난감하게 미소 지었다처음 보는 생경한 얼굴을 시스템은 친근함이라고 말했다그러면 마스터와 눈을 마주치고그의 동공의 움직임을 따라갔다그는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그것은 노래나 음악’ 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카이토가 깨어난 방은 PC가 놓인 사무용 책상과 몇 개의 커다란 상자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이 방의 냄새는 익숙한 것이었지만그 위에는 깔끔한 소독제의 냄새가 가벼이 깔려있었다카이토는 눈을 깜빡였다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 말이야왜 여기 혼자 있었어?”

마스터가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죠당신이 아닌 마스터가 말이에요.”

아까는 뭘 한 거지저기 거실에서.”

 

짧은 버그라고 카이토는 정의한다긴 시간동안 무자극 상태로 있다가 짧은 자극에 눈을 뜬것일 지도자신의 몸일 텐데도 카이토는 타인의 것처럼 이야기 했다이런 식의 관점이나 화법은 그에게는 어색했다.

 

아직 PC와 연결 되어 있으니 버그 리포트를 볼 수 있어요보시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를 텐일단은 됐어.”

 

성준은 짧게 혀를 차고 방을 나섰다하루에 두 번씩 나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역시 아쉬웠다성준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카이토는 몸을 일으켜 그를 따라나섰다단자가 억지로 당겨지자 카이토는 목 뒤로 손을 더듬거려 뽑아버렸다무심코 돌아보자 카이토는 휘청거리며 발을 내딛고 있었다아무래도 회색빛 눈은 하늘색의 왼쪽과는 달라보였다움직이는 대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부지런한 하늘색 동공과 달리 핀이 박힌 듯이 정면만을 응시했다거실로 걸어 나가는 성준의 뒤를 살금살금 따라 나온 카이토는 어색하게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왜 따라와나중에 그림 그릴 때...아니다너를 어떡해야 하지?”

저의 용도는..기본적인 가사도움대화와 채보연주..”

보컬로이드음악이란 말이지미안해서 어쩌냐난 화가인데.”

화가..”

 

어물쩍 카이토의 말을 잘라내고 현관에 있던 커다란 30인치짜리 캐리어를 가져온 성준은 커다랗게 거실에 두 쪽을 펼쳐놓았다어딜 가나 직접 가지고 다니는 손에 익은 화구들이 복잡하지만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한국에 잠시 들른 것으로 치면 스무 시간을 넘게 비행기 바닥을 굴러다녔으니팔레트와 굵고 얇은 붓의 개수를 센 뒤에 어디 부러진 곳은 없는지물감이 터지진 않았는지 가늘게 눈을 뜨고 관찰 했다카이토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 붓을 바라보는 그의 동작과 시선을 따라했다붓을 내려놓고 흘겨보자 카이토는 해맑게 헤헷하고 웃었다.

 

왜 따라 하는 거야기분 나쁘게..”

마스터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니까요불편하시다면 뒤로 물러날게요.”

알려줬잖아내 이름은 김성준이라니까하는 일은 그림그리기방금 여기에 이사 왔음그랬더니 거실에 네가 누워있었어난 그걸 켠 거고뭐가 더 알고 싶어?”

마스터와 마스터가 원하는 노래에 대해서..”

그런 거 없어대신내가 너에 대한 걸 좀 알아야겠어.”

 

[보컬로이드 안드로이드 개발 이전에는 음성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존재했으나안드로이드 개발 이후 C사와 합작으로 보컬로이드기능을 탑재한 안드로이드 제품으로 등장했다… C사의 기종은 사용자에게 친숙한 이미지와 임프린팅’ 시스템을 탑재한 것으로 유명하다사용자와의 유대와 애정을 요구하는 임프린팅’ 설정은 다양한 찬반론이 있으며초기의 보컬로이드 기종에서는 제거가 불가능 했으나, KD30이후의 기종부터 제거가 가능해졌다… ]

[보컬로이드 카이토. C사의 남성 보이스웨어.]

 

사용가능 음역대추천하는 음역대대표곡사용가능한 PC환경기본 성격자주 일어나는 에러와 대처방법기본 안드로이드 사용법키워드별.”

 

포털 사이트 검색에서 넘어간 C사의 홈페이지에는 기종별 제품 설명서가 올라와 있었다다운 받아서 열어보았더니, 300페이지는 넘어가는 긴 문서였다설치방법부터 제거순서까지 기본적인 것사용자 등록방법과 메인터넌스 이용방법관련 법률요금 부과 방식사람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손이 많이 가는 기계였다.

 

많네...어휴잘 모르겠다.”

설명서는 제 메모리에도 있는데요언제든지 검색 할 수 있어요초보자를 위한 설명을 기능 시작 전에 덧붙이는..”

 

어느새 카이토는 옆에 착 달라붙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의식할수록 카이토의 미소는 미묘한 이음새처럼 감정과 감정 사이를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성준은 카이토의 얼굴에 손을 휘휘 저었다하늘색의 눈동자는 작은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또르르 굴러갔지만 다른 쪽은 제자리였다.

 

너 이쪽 눈은 어떻게 된 거야보여?”

폐쇄시각입니다시야가 조금 좁지만안구 수리비는 꽤 들기 때문에 추천하지 않아요.”

불편하지 않아?”

헤헤가용범위 안에 있으니괜찮아요.”

그래그럼 좀 떨어져..부담스러워나중에 그림 그릴 때 보던지..”

알겠습니다.”

 

카이토는 자신 있게 말한 것과는 반대로 뒤로 물러서다 발밑에 있는 상자에 걸려 방바닥에 커다랗게 넘어졌다커다란 쇳덩이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성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카이토는 바닥에 주저앉아 바보처럼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벙찌게 바라보자 카이토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에헤헤...죄송해요.”

“...괜찮은 거야너 정말 대책 없네..”

마스터가 걱정 해주셔서 기뻐요상자는 제가 치워도 될까요그 외의 짐들도.”

아니뭔 대답이 그래괜찮냐고 물었잖아.”

친절하시네요신체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말씀드릴게요.”

 

대답을 듣는 순간 성준은 불쾌했다마치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마냥 존중하는 어색한 말투가 비행기에서 보았던 잡지의 글과 닮아있었다상대가 누구든지 기계처럼 짜인 단어들을 조잡스럽게 조합해서 쏟아내고는듣는 사람을 거북하게 만든다기쁜 듯 말하지만속을 들여다보면 의미나 감정은 없었다그런 식의 관계는 지겹도록 겪어왔다더군다나 카이토는 비유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기계였다이런 것에 감명을 받을 리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저리가짜증나니까.”

“..제가 마스터께 실수 했나요제 대화설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시..”

누구 병신 취급해꺼지라고.”

알겠습니다필요하시면 불러주세요.”

 

카이토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가다가 열린 문에 살짝 걸린 발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났다거실로 나온 카이토는 자신이 누워있던 벽으로 다가가 앉았다웃는 것이 카이토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대화를 하면서 올바른 알고리즘을 찾아가는 것이 안드로이드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였으면웃을 것방금 전의 대화에서 무엇이 마스터를 화나게 한 것인지 아무리 메모리를 돌려봐도 알 수 없었다마스터라고 인칭을 붙이지 않아서가까이 다가가서넘어져서버그에 대한 설명을 붙이지 않아서순전히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수도 있었다마음 아픈 일이지만그렇다면 임프린팅 설정을 끄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창밖은 익숙한 풍경이었다오렌지 빛이던 하늘이 보라색과 겹쳐가고 있었다과거 메모리 섹터는 [접근 금지]의 권한을 가졌지만초기화를 하지 않는 이상은 삭제는 불가능했다메모리간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동으로 권한이 닫혔지만앞으로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초기화는 필수에요음 조정도 다시 해야 하고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접어 둔 채카이토는 딱딱한 표정으로 방을 나와 상자를 정리하는 성준을 조용히 응시했다커다란 종이로 포장되어 있던 짐을 찢고 빈 캔버스를 벽에 정리하고 있었다카이토는 캔버스와 자신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분명 채워지는 것은 캔버스 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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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低

 

 

비행은 독특한 경험이다각각의 비행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무거운 비행기 속은 고요했고이따금 웅웅대는 거대하고 웅장한 고동소리를 배려하는 사람들은 작게 속삭였다창밖에는 소리 없이 고요한 하늘그는 눈을 굴려 잡지를 읽고 있었다짐을 챙기고 쓸데없는 쓰레기들을 모두 버릴 때하나 정도 손에 남아 있던 것이었다그는 무신경하게 기름 냄새가 나는 얇은 종이를 팔락이다 익숙한 그림에 다다라 손을 멈췄다한 페이지를 모두 채운 그림 옆에는 작은 평론이 달려 있었다.

 

김성준의 그림.

그 앞에 섰을 때나는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본다색으로 전달한 마음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강하게 부딪히고소리 없는 외침의 선은 그 선을 따라가는 시선과 결합하여 무게를 지닌다그런 때에느낀 것을 전달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것이란 얼마나 무의미한 지그림 앞에서 느끼는 울렁임으로 김성준이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수 있다평론가 이수경.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개소리야?!!”

 

그는 읽고 있던 잡지를 집어 던질 수밖에 없었다꼭 그래야만 했다미술 평론가라는 자들은 다들 장님인가보지심미안 말이다아니라면 당장 평론가라는 직업은 그만두고 동네 화구 방에서나 일하는 게 그녀의 인생과그녀에게 평론을 받을 남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잡지를 주워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었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옆자리의 여자에게 지어보였으나그녀는 잠에서 깨 심기 불편한 눈길을 던졌다가 다시 몸을 뒤척이며 눈을 감았다그는 남은 비행시간동안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저따위 평론을 보는 것 보다 유익한 일이란 것을 깨달았다괜히 열만 올렸다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평론에 신경이나 썼다고그들의 잣대란 겉치레며허식에 불과하다입으로 예술을 하는 자들캔버스보다 얄팍한글 쪼가리가 자신이 그린 그림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팔리고 있겠지그는 헛구역질이 나려했다.

 

축복받은 재능이라고 했다남들과 다른 세 번째 눈으로 보는 세상은 찬란하게 빛난다빛과 색채는 일렁이고소리와 음계와 감각은 그를 찾아왔다그는 하루하루가 바쁘게 숨 쉬는 순간을 기록한다재료와 질감은 새하얀 캔버스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그래어린 그는 자신이 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손을 휘두르면 그림이 탄생한다당연하고도 아름다운 이치를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찬사는 중요하지 않았다행복한 시절이었다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손과 눈과 영혼을 움직이던 때영원하리라 믿었다그림을 그리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람에 홀린 듯 나타나는 재능은 꿈처럼 사라졌다세상에 현대 미술 작가 김성준’ 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뒤였다그의 세계는 누구보다 강하게 빛났으며조용히 멸망했다더 이상 그에게 천사의 속삭임은 들리지 않았다탁한 잿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바다 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그는 캔버스 앞을 서성였다손가락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던 붓을 살인도구나 되는 것처럼 노려보다무구히 하얀 머릿속은 영영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삶의 의미숨 쉬는 이유그림 그리는 것 말고 다른 것을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너 말이야좋은 사람처럼 웃고 있지만벽이 있어선을 넘지 말라는 느낌말이야.”

 

-그게 뭐가 어쨌다고.

 

성준씨요즘 슬럼프이신가요최근의 작품들은 뭔가 빠져있는 느낌이네요부족하다고 해야 하뭔가 고민이 있다면 저희 협회와 상의해주세요저희는 전적으로 성준 씨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신들은 이해하지도 못할 뿐 더러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

 

성준아우리 이제 그만 헤어지자남자끼리 이런 관계길게 이어봤자 소용없어.”

-...

 

어차피 떠나려고 했어.

 

로마의 달콤한 휴일도 그에게는 쓰디쓴 절망만 안겨줄 뿐이었다한국에 잠시 들러 협회에 얼굴을 비춘 그는 다시 일본으로 떠나겠다는 말을 남겼다이번이 여섯 번째 로군요.협회의 여직원은 상냥하게 웃어보였다오랜만이라는 인사와 세계여행은 즐겁냐는 그녀의 질문에 성준은 그 동안 스쳤던 장소를 떠올리다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장소를 옮겨도 그는 하루의 절반을 질리도록 새하얀캔버스 앞에서 다른 세계를 동경했다언젠가 그가 있었던 장소를그립고 그리운 나의 세계.

 

이번이 마지막이에요일본.”

저희는 성준 씨를 믿고 있어요생활하시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집과 일체를 준비해뒀습니다좋은 그림이 나오기를.”

 

그는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협회에서 넘겨준 주소를 택시기사에게 보여주었다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친절하다어깨를 스미는 여독으로 선잠을 자는 성준을위해 듣고 있던 라디오를 끄고 창문을 올려주었다창 바깥에서는 소음과 노랫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성준은 암흑색의 꿈을 꾸다 점점 커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택시는 야외 공연장을 지나고 있었다한 낮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무대 위에는 스쳐봐도 이질적인 느낌의 민트색 양 갈래 머리의 소녀가 노래하고 있었다성준은 신기하게 무대 위의 소녀를 바라보았다.무대와 소녀를 이어주는 전선팔에 새겨진 시리얼 넘버와 미묘하게 섞인 기계음은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저건 안드로이드인가요일본은 역시 안드로이드가 활성화 되어 있네요노래를 부르는 종류라니.”

손님보컬로이드를 모르시나요저 아이는 가장 유명한 보컬로이드죠.”

 

택시기사의 자랑스러운 말투에 성준은 고개를 돌렸다보컬로이드 소녀의 무대가 멀어져갔다.

 

처음 봐요보컬로이드라면..”

악기 소프트웨어와 안드로이드의 합작이죠노래를 한다는 것 보다 주어진 악곡을 연주하는 느낌으로여기는 사람의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를 그려주는 드로잉로이드도 이미 실용화 되어 있고요소문으로는 군사용의 안드로이드도 제작되고 있다고 하지만그건 소문일 뿐이랍니다.”

 

택시기사는 좋은 경험을 하셨네요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을 붙였다그가 거주했던 나라에서나한국에서 조차 안드로이드는 기계라는 인식이 강했고인권이나 법령에 부딪혀 기본적인 가정용 안드로이드정도가 실용화 되어있을 뿐이었다인지하고 보니길거리에도 종종 안드로이드가 눈에 띄었다그들의 손이나팔에 위치한 인식코드나 특이한 머리색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에 섞여있었다.

 

“...그야말로 기계와 사람이 공존하는 나라네요.”

하하손님이 가실 곳은 시가지가 아니라서안드로이드는 많이 없을 겁니.”

 

성준은 늘 도심과 떨어진 한적한 곳을 요청했다사람들과 많이 섞여봤자 눈만 탁해질 뿐이었다이번에도 그의 요청에 맞춰 아름다운 풍경이 유명한 노인들이 많은 조용한 마을을 선택했다고 협회의 직원은 설명했다설명은 틀린 곳이 없었다택시기사가 내려준 곳은 한국의 시골이나 다를 것이 없는 교외의 아파트였다먼저 붙여놓은 짐은 집에 도착했겠지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던 성준은 텅 빈 1층의 복도를 둘러보았다우편물을 넣어놓는 철제 우편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아무리 그래도 마지막 해외활동이라고 너무한 것 아닌가.

 

시발...요즘 세상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가 어디 있어..”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허리까지 올라오는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혼자가 지내기엔 썩 좋은 스무 평 남짓한 방이 나타났다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치고는 벽지며 가구도 깨끗했다캐리어를 현관에 던져두고 욕실이며 침실을 둘러보던 그는 중앙의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돌처럼 굳어버렸다.

 

이게 뭐야..?”

 

바닥에는 파란머리의 사람이 널브러져있었다성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하지만 곧 공포는 사그라졌다.머리에 떡하니 붙은 대형폐기물 스티커와일본에는 파란머리가 절대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전에 살던 사람이 버리고 간 안드로이드인 것 같은데,고액으로 거래되는 걸 이렇게 덜컥 버리고 가다니전 집주인은 부자였을 지도 모른다기왕 대형폐기물 스티커 까지 붙였으면 아래에 내려주고 가지엘리베이터가 없으니 커다란 안드로이드를 가지고 내려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하물며 안드로이드를 깨워서 이제 널 버리러 갈 테니 걸어오라고 할 수도 없을 노릇이고안드로이드는 특이한 하얀 코트를 입고 있었다몇 번 보았던 가사노동용 안드로이드라면 앞치마를 입고 있을 터였다다가가자 그것의 손에는 CD가 쥐어져 있었다귀에는 헤드셋을 끼고 곤히 잠든 것처럼 누워있었다.

 

“...보컬로이드인가.”

 

그는 방금 택시기사와 이야기 했던 것을 떠올렸다연주하는 안드로이드라던보컬로이드라는 단어에 반응 하는 듯 안드로이드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전원이 켜져 있는 건가아닌데...? 스스로 켜진다고?”

 

남아있던 배터리가 움직이고 있었다전원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망가진 컴퓨터가 재부팅 되듯 안드로이드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성준은 신기하게 안드로이드의 기동을 바라보았다그것은 기계적으로 일정한 속도로 몸을 일으키더니 감은 눈을 서서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머리색과 비슷한 하늘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적어도 오른쪽은 그랬다.

 

아하이래서 버린 건.”

 

안드로이드의 왼쪽 눈동자는 먹구름이 찬 하늘처럼 회색빛으로 흐렸다동공의 안쪽은 빛나고 있었으나보이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안드로이드는 곧 부팅을 완료했는지 성준을 바라보며 엷게 미소 지었다그리고 입을 열었지만.

 

..”

 

짧은 말을 남기고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꺼져버렸다남아있던 배터리가 다한 것이었다안드로이드가 움직인 것은 순간의 찰나였지만성준은 세상이 느릿하게 지나감을 느꼈다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이윽고 그의 발목에서부터 찰랑이는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선명하게 차가운 감각발목을 건드리며 물의 친근함이 그를 감싸 올랐다.

 

물이라니여긴 4층이라고.’

 

그는 울고 싶었어째서이제야드디어 돌아 온 거장소를 옮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발악을 해도 나타나지 않았으면서감각은 눈과 귀와 온 몸의 촉각을 곤두세운다그동안의 침잠이 무색하게 선명하게 날뛰는자신의 사랑스럽고도 그리운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오랜만의 공감각은 강하고 거세게 밀려왔다은은한 향기처럼 풍기던 예전과는 달랐다성준은 자신의 환각의 물살에 갇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시퍼런 물은 어느새 거실을 가득 채웠다물속에서 시야가 이지러져 보였다스쳐가는 여러 이미지가 하나로 수렴한다파란 안드로이드의 아득한 미소와 반짝이던 두 가지 색의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흔들린다물로 틀어 막힌 호흡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새로운 세계의 도약을 알리듯이.

 

잠시 후 그는 바닥에 놓여있던 CD를 주워들었다.VOCALOID KAITO. 카이토소리 내 읽어 본 뒤, PC가 설치된 안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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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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