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안녕하세요.”

 

책을 든 카이토는 아주 또박또박하게 문장을 읽었다유정은 흘린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말 한마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줄줄이 토를 달았다안녕하세요라고안녀엉하세요이런 게 아니야입술은 왜 제대로 안 움직이는 거야어조가 너무 기계 같잖아.

기계니까요.’ 라는 투정에도 유정은 다시 읽으란 대답뿐이었다웃지도 않으시고 노려보면 한숨조차 쉬기에 민망하다유정의 객관적이란 단어는 상당히 주관적이었다표준발음이 꼭 잘 알아들어지는 발음은 아니니까.

 

시간이 나면 퇴근 후에 커피와 함께 한 시간주말엔 한나절을 읽었다처음엔 안녕하세요.’에서 넘어가지 못하던 문장은 감사합니다다음에 또 봬요.’로 넘어가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다가오는 주말은 새로운 문장인 여기는 어디인가요.’를 말할 차례였다주말이 오기 전까지 카이토는 유정이 근무하는 아침과 낮 동안또 어느 날엔 주위가 깜깜해질 때 까지 침대에 앉아 여기는 어디인가요여기는 어디인가요하고 연습했다결국걷는 건 어물쩍 포기하게 되었다밤엔 충전을 위해 카펫이 깔린 바닥에 기어 내려가거나 기분이 좋은 날은 백허그로 안겨서도 움직였다그때마다 상승하는 유정의 맥박수를 말하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들었지만 카이토는 참았다올라가는 심박수를 세고 있다는 것을 알면 다시는 손 안 댈 거라고 질색할 게 뻔했다그러면서도 퇴근하자마자 슬쩍 자신을 들여다보며

 

성하지 않은 다리로 어딜 기어 다니는 거야.” 하고 잔소리를 인사 대신으로 하는 유정이 카이토는 싫지 않았다의자에 앉혀서 무릎을 털어주는 정장 차림의 마스터는 멋있다흔들리는 어깨로 슬쩍 풍기는 남성용 향수와 묻혀온 담배 냄새열심히 다려준 정장은 가동범위 이외에는 구김이 없다다리의 흉터를 만지면서 흠하고 물건 감정하는 모양으로 이리저리 휙휙 돌려본다동그란 무릎뼈에 맞춰 원형으로 돌리니 미세한 톱니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움직인다움직임을 방해하던 흉터는 새 살에 잘 적응해서 많이 가라앉았다하지만 과거의 석유찌꺼기같이 검고 찐득한 메모리의 조각은 무릎에 박힌 오돌토돌한 붉은 균열로서 그 존재를 잊지 말라고꾸준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카이토는 볼멘소리를 했다만져봤자 뭐하느냐고.

 

그런다고 못 걷는 걸 갑자기 걷게 되지 않아요.”

다리를 움직일 수가 있는데 못 걷는다는 건 모순이지.”

 

입을 떼자마자 유정은 쯧혀를 찼다문장이 쌍방향의 검이 되어 꽂힌다들을 수 있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디서부터 생긴 모순일까들고 있던 다리를 놔주고 넥타이를 풀었다카이토는 손을 뻗다 멈췄다.

 

제가 풀어주고 싶었는데.”

괜찮아씻고 올 테니까 책이나 보고 있어.”

 

앉은 채로는 닿지 않을 책상 위에 놓인 책을 건넸다하고 지겹다는 표정을 짓는 이마를 톡 밀었다나는 삼 년을 읽었다고꼬박 삼 년을 읽고 쓰고 보고 아주 그 책의 여백이나 온점이 삐뚤어져 있다면 알아차릴 정도로샤워하는 머릿속에선 조금 전의 울림이 계속된다씻겨나가는 피로와 달리 영 기분이 나빠졌다자신의 모순을 부정했다는 사실에 맞서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한 아둔한 사고방식이 더욱 신경이 쓰인다문 뒤에서 카펫 끌리는 소리가 났다수건이라도 가져다 주기위해 기어가고 있을 카이토를 생각하니 살그머니 웃음이 난다가운을 입고 문을 열면 앉은 자세로 수건을 내밀고 있을 것이다카이토를 쓰기로 마음먹은 건더 이상 회화집의 녹음파일이 유정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차라리 대화상대를 만들어 보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지만어느 누구에게 이 기괴한 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기엔적이 너무 많다당장에라도 사실을 퍼뜨려 유정이 서있는 자리를 무너뜨리려 망치를 휘두르는 자들이 가득한 귓속 밖의 세계.

 

차라리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게 다행인지도확실히 이전보단 받는 스트레스도 덜하다현실감은 떨어지지만 언제는 현실에 발붙인다고 현실감이 들었던가.

 

문을 열자 예상대로 정좌로 수건을 내미는 것을 받아들었다수건을 치우자 카이토는 웃고 있었다언제나 똑같은 각도로 웃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뜨거운 물에 노곤해진 몸에 김이 모락모락 솟았다.

 

뭐에요저 데리고 가셔야죠수건만 들고 가시면 어떡해요.”

올 때도 기어왔으니까갈 때도 기어가면 되잖아.”

 

물기 조심해또 넘어질라.

친절한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 바닥에 발바닥 떨어지는 소리를 짝짝 내며 유정은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버린다어쩔 수 없이 온 그대로 기어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저번처럼 물기에 꼴사납게 넘어지면 마스터는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웃어댈 것이다옆에 있던 다른 수건으로 주변에 떨어진 물을 닦고서야 무릎을 끌어 기어가 카펫에 앉았다.

 

너 그러다 바지 무릎 부분 다 닳겠다.”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로 카펫 뒤의 쇼파에 유정은 털썩 앉았다오늘도 힘들었어누구누구 보험료 내려면 아주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들리도록 넋두리를 하며 파란 뒤통수를 쳐다본다한 대 쳐주고 싶은 동그랗고 시퍼런 뒤통수예전에 누군가에게서 얄미우니 뒤통수 한 대만 때려봐도 되냐는 실없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이런 느낌인가인공적인 파란 물이 든 머리는 한 가지 색이 아니라 백열등에 비춰 군청빛이었다가하늘빛이었다가뒤에 나온 커스텀 모델은 손톱 색까지 파랗게 멍든 것처럼 나왔다고카이토의 자라지 않는 손톱은 닳았지만 투명하다.

 

옷보단 연골이 닳는 게 더 큰 일이실걸요이게 얼마짜리냐 하면.”

넌 생산적인 일은 못 하는 거야소비적인 기계 같으니.”

제가 일을 하게 되면 인간들은 뭐 하고 삽니까남의 밥줄 잘라먹으면서 까지 살고 싶진 않아요.”

너 말 진짜 많이 늘었다.”

마스터 덕분에요.”

 

쳐다보지도 않고 쫑알거리는 얄미운 뒤통수를 축축한 수건으로 내려쳤다처음에 올 때 만해도 카이토는 바짝 움츠려서는 종일 침대에 앉아만 있었다징그럽게 붉은 뿌리를 줄기까지 뻗은 가지들은 기능이 사라진 화석처럼 줄곧 이불속에 퇴적되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출근하기 전에 덮어준 그대로 퇴근 시간까지가구처럼 틀어박혀서는 퇴근한 유정을 보고 그간의 외로움을 가득담은 얼굴로 다녀오셨어요하고 고개가 떨어지면 해묵어 퀴퀴한 회한은 침대위로 가득 떨어질 것만 같은 게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허무하다평소의 템포였다면 나의 일이 아닌 것은 세 발짝 뒤에서그러나 그림자는 그것을 덮도록 조절하는 것을 인생의 미덕으로 여기는 유정이었지만 기껏 비싼 돈 줘가며 고쳐온 게 저 꼴을 하고 있으니 영 마음이 쓰였다텅 빈 얼굴은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는 채로 웃어 보이는 기이한 환상이 겹쳐 보인다분명 어떠한 과거가 있는 게 분명했는데프로텍트 메모리는 해제키가 없으면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킨다굳이 부가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한 프로텍트 메모리를 심어놓고발목 크기에 맞춘 족쇄를 채워 버려놓은 이유는카이토는 기억에 대한 권한이 전혀없다고 했다억지로 기억을 하려고하면 모든 프로그램이 꽝닫혀서 접근 거부를 당한다나유정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식의 설명을 했다.

 

그럼 그 강아지 뼈는그것도 과거의 기억 중 일부잖아.”

그건 제가 혼자 메모리를 유지했던 1년 정도 그 아이와 같이 있었으니까요아마....”

 

하고 과거 얘기를 조금이라도 꺼내보려 하면 카이토는 느려졌다그게 저장된 프로텍트의 작용이었다기면증에 걸린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헛하고 멀뚱거렸다.

 

사설 해커를 시키면 해제는 가능할 거에요하지만 당연히 불법이고 만약 프로텍트의 주인이 살아..계신다면 마스터가고소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카이토는 자신의 예전 주인 된 자를 그렇게 정의했다한때 유정과 같이 아주 가까웠지만 그렇게 되어버린.

유정은 더 이상 그것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옛 주인의 향수의 자락이라도 잡아보려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고그럴 때마다 처음의 쓸쓸한 표정으로의 회귀가 그동안 유정과 쌓아왔던 것들이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서.

 

카이토와의 생활은사람들과의 것에선 느끼지 못했던 정말 이상하고 미묘한 균열을 눈에 보이게 한다그것만으로도 유정은 카이토가 얼마나 자신과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가까워지기 힘든 거리감을 훌쩍 뛰어넘은 것인지그것을 서로 보고도 잠잠히 덮어두는지는 몰라도 관계는 아주 미적지근하게그래가물가물 잠이 오려는 주말 오후의 그런 대화처럼.

 

성장 이란 건 정확히 어떤 개념인가요?”

 

성장은 교육이나 학습과는 다른 개념인가요?

의자에 앉은 카이토는 발을 동동거렸다지표면에 닿으면 눈 녹듯 사르르 무너지고 마는 발목이 공중에 덜렁거리는 느낌이 좋았다책을 읽으며 이어진 시선으로 카이토와 대화를 이어가던 유정은 무릎에 책을 내려놓았다회사에서 어떤 여자가라는 주제였던 말꼬리가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순식간에 튀어 버린다그런 일이 종종 있다술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바다는 어떤 곳인가요.' 하고 묻는다든지.

 

성장은 세포가 분열하는 것이나인격체가 발전하는 것도 성장이라고 해교육과 학습은 성장의 수단인 거고갑자기 그건 왜?”

 

사람은 성장할 때 아프다고 해서요궁금했어요진짜 아프셨어요?”

 

그랬나그건 사람마다 달라서 겪는 사람도 있고 안 겪는 사람도 있어나는,

겪었던가기억이 안 나니까 없었겠지학창시절 어느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녀석은 무릎을 붙잡고 엉엉 울어대는 바람에 응급실에 간 적도 있다고 하고근데 좀 시끄러운 성격이긴 했어정신적인 걸로도 원래 사람은 자기가 힘들어야 그게 진짜란 걸 아는 멍청이들이 많으니까그걸 성장했다고 포장하는 거야대답이 되었을까.

 

즐거운 아픔이네요멋지다성장할 수 있다는 건.”

그렇게 말하면 듣는 내가 이상해지는데.”

 

성장.

즐거운 아픔.

 

같은 단어를 들어도 카이토의 울림에서는 낡고도 진실한 부러움이 묻어나온다사람이 되고 싶은 것일지도물건에서 벗어나 주체를 가지고발을 디디고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은 걸까사람이 된다고 해서 그다지 자유롭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아실망스럽겠지만.

 

많이 아팠죠아프지 않았던 게 아니라 너무 아파서 잊어버렸을 거에요마스터라면.”

 

더 할 말이 없을 땐 카이토는 항상 웃었다알고 하는 것인지그저 어떤 단어의 모음들인지 모를 말들은 자려고 누우면 머릿속에서 꼭 한 두 번씩은 곱씹어 보게 된다조용히 카이토가 충전되는 자그마한 소리에 휩쓸려 과거의 잔 상처들의 기억들이 바닷물에 닿은 것 마냥 쓰라리게 닿았다가 밀려나는 사이로 불편하게 잠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그런 날은 다음도그 다음날도 별로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마스크를 회사에서까지 끼고 싶을 만큼잠을 설친 것 과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남은 실컷 잠을 들쑤셔놓고는 새벽녘에 무거운 머리를 어설푸레 들어 카펫에 등을 구부리고 누워 눈 감은 카이토를 보고 있으면처음 보았던 공장에서의 먼지만큼의 무게가 꼭 가라앉았다.

 

널 데려온 게 좋은 일인지안 좋은 일인지아직도 모르겠어.”

저한텐 더 없이 좋은 일이에요.”

 

반바지 아래 다리의 찢겨나간 상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책을 읽어 드릴까요하는 부탁에 손을 저었다네가 말하는 책의 문장들을 듣고 있으면 책 내용보다 다른 것에 더 신경 쓰여움직이는 입술이 진짜인지. ‘자신의 의지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문장을 읽는 네가 그 말을 이해하고 읽는 것인지.

 

발음 아직도 별로잖아..싫어그냥 내가 읽을게.”

심심한데.”

심심하면 내가 하는 얘기나 듣고 고개나 끄덕이란 말이야.”

그 귀엽게 생긴 여자가 그래서 오늘도 도시락을 줬는데마스터는 같잖았지만 웃으면서 받아주었다는 이야기요?”

 

책등으로 머리를 때렸다말을 할수록 느는 건 넉살뿐이다거짓말처럼 미소 짓던 얼굴이 어느새 자신보다 더 자연스러워졌다주말 동안 다음 주에 할 대화목록을 생각해보고연습도 한다준비를 하면 불안이 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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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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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정확히 3일 뒤전신 복구가 끝난 카이토는 낯선 공간으로 옮겨졌음을 감지했다늦은 오전께의 가라앉은 공기 속의 방은 주인의 영혼을 그래도 빼다 박은 듯 동선에 따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누워있던 침대 옆의 작은 선반 위에는 쪽지가 놓여있었다희미한 눈을 깜빡여 환기를 시켜도 글은 아주 느릿하게 읽히었다.

 

[회사 다녀올게아직 복구진행 중이라니까 일어났다고 해도 많이 움직이면 안 됨. 7시쯤 돌아올 예정.]

 

발목에는 이어붙인 새로운 피부가 반들반들한 색상으로 이어져 있다힘을 넣자 간신히 눈에 보일 정도로만 발가락이 까닥거린다아직은 걷진 못하겠구나팔을 뻗어 선반위에 놓인 서류 몇 개를 들어본다안드로이드 사용인증확인서보험안내서사용취급안내서수리비용 청구서합산하면 꽤 목돈이겠지만비용은 모두 정갈한 사인으로 일시금처리가 되어있다벽에는 자그마한 그림 액자와 화이트보드가 걸려있다노트북과 연필꽂이만이 놓인 책상붙어있는 책장엔 두꺼운 양장본의 책들이 빼곡하다이어진 부엌과 보이진 않지만그 뒤에 있을 화장실깔끔한 오피스텔의 넓은 창밖으로는 기다란 강이 흐르고 있다강을 실제로 본건 처음이라 몸을 움직여 내려다보고 싶었는데 복구 프로그램을 돌리느라 남은 메모리가 많지 않아 복잡한 움직임이 좀처럼 실행되지 않은 채로 로딩만 계속된다.

입고 있던 낡은 디폴트 옷 대신 가벼운 티셔츠와 반바지 아래에는 찢고 꿰맨 수리흔적이 무릎 아래를 가로지른다새로운 혈관 가지가 발등에서 간지럽게 끔실거린다목 뒤에 손을 가져가자 생경한 새 피부에는 새로운 시리얼 넘버가 각인되어 있다끝에 남은 흉터 자국에 덧 씌워진 새 각인은 오랜만에 소속감을 느끼게 해준다좋아두 번째 생이번엔 정말 잘 해보리라.

 

머릿속 텅 비었던 메모리에 마스터가 각인된다인간의 기준에서 잘생겼다고 할 수 있을 호감형의 외모새까만 머리와 각 잡힌 몸매중저음의 멋진 목소리는 공장에서부터 머릿속의 빈 공간을 휘감는다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진 않는 단정한 눈매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던-이제 차차 알아가면 될 것이다이렇게 구조도 해주고 치료까지 해주고 심지어 사용자 등록까지 하실 줄은 몰랐다이전에 몇 번 카이토를 깨웠던 사람들은 처음엔 호기심으로 다가왔다가 존재하지 않는 신분이라는 이유하에 더러운 욕망을 주기적으로 풀고 가는 두 무리그리고 비싼 기계를 공짜로 주웠다는 심리에 새 주인이 되어주겠노라 다짐했다가 카이토가 간단하게 설명한 엄청난 치료비와 보험료에 질색하고 그저 코드를 뽑고 도망간 게 몇 번비록 생명이 아니더라도 존재 하나를 가진다는 것엔 아주 큰 책임이 뒤따른다는 기본적인 도덕이 없는 사람들이 그 공장가에는 맴돌았다그들의 때묻어 더러운 손만큼이나 더러운 생활상의 가장 아래에 카이토가 있었다가끔씩 깨어나면 드문드문 기억을 잇기가 어렵다.

 

이제 그런 흑역사는 압축해서 메모리 구석에 박아둬야지기다랗게 펼쳐진 너덜너덜한 시간의 종이 타래를 차곡차곡 말아 넣는다움직일 수도 없으니 마스터가 올 시간까진 대기모드로깊게 숨을 내쉬자 몇 년간의 피로감이 어깨에 스려올라온다책장엔 노래나 작곡에 관한 책은 한 권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괘념치 않다그런 사치스러운 목적은 포기한 지 오래니까.

객관적인 언어체계 공급옆에서 백과사전이나 들고 줄줄 읽어드리면 되는 걸까하는 실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

 

 

도어락이 눌러지는 버튼 음이 들리자 카이토는 눈을 번쩍 떴다시계를 올려다보자 시계는 벌써 돌아오리라 약속한 시간이불 끄트머리를 주먹 쥐었다사용자 등록 후의 첫 만남이라 설레고 두근거린다그러니까 그거조금 과장하면 태어난 아이가 처음 부모를 보는 상황괜히 눈을 뜨고 있으면 민망할까 눈을 감아버린다빠른 버튼 음 뒤엔 터벅거리는 경쾌한 구둣발 소리테이블에 가방을 두는 소리넥타이를 푸는 소리사각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부엌의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그리고 하아하는 한숨을 길게 쉬고는 쇼파에 풀석 앉는다실눈을 뜨고 바라본 마스터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마치 혼자 집에 있는 마냥 무덤덤하다.

 

나는 언제 깨워 주시는 거지.

 

이제 스스로 일어나기도 민망한 타이밍이다능청스럽게 방금 일어난 척을 하기엔 그렇게 자연스럽지 않을 거고마스터는 왠지 눈치를 챌 것 같다머릿속으로 열두 가지 정도 연산을 했다이대로 누워있거나아까부터 일어나 있었다고 사실대로 말하거나뒤척거려서 관심을 보이게 한다거나-

 

일어났으면 나한테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시선은 여전히 두드리고 있던 휴대전화에 고정되어있다카이토는 슬그머니 목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내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너 때문에 저번 달 월급 반이 날아갔어무슨 수리비가 그렇게 비싸.전신 수리까지 해야 했을 줄이야너 생각보다 많이 망가졌었어.”

 

난 발만 붙이면 될 줄 알았지다리에 흉터는 부품세대 차이가 너무 나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발만 최신형이야언어랑 신체조정은 그냥 기본 업그레이드만나머지 서류들은 이미 다 처리했으니까더 할 말 없겠지체크리스트를 지워가는 식으로 문장을 끝맺던 유정의 시선에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카이토가 맺혔다업그레이드해서 그런지 움직이는 표정이 더 자연스럽고 풍부해진 느낌이다아이가 배워나가는 것처럼 하나하나 축적된 파일들이 그것을 대신한다니 흥미로운 존재이다.

 

그럼 여기까지질문?”

네에마스터, 26분 전에 복구 프로그램 진행이 끝났습니다만메모리에 보행법이 들어있지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펄럭이불을 걷자 양다리를 가로지르는 붉은빛의 도드라진 이질적 흉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두 다리의 것을 이으면 하나의 붉고 솟아오른 선을 만든다금방이라도 건드리면 핏물이 터져 나올듯한 위태로운 모양의 흉터를 움직여 침대 밖으로 몸을 돌려 발을 바닥에 대고 일어선다.

 

직립이건 가능하네요.”

 

발을 내딛자 나무 블록의 핵심을 뺀 것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바닥에 주저앉은 카이토는 보시다시피하고 어깨를 으쓱한다기는 것도 가능합니다신체기능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 복구프로그램을 한 번 더 설치하면 되지 않아?”

죄송합니다만그렇게 하시려면 인증등록부터 다시 하셔야 합니다말 그대로 모든 유효 메모리를 삭제하고 다시 설치하는 거여서요.”

 

유정은 대리점에서 치렀던 귀찮고 복잡한 인증등록절차를 떠올렸다국가에 매인 존재가 되는 게 하등 카이토 뿐만이 아닌 것 같은 지문인식몇 번을 반복하는 동공인식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법안문서들하나하나 따져 묻고 싶은 조항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사족을 붙이기 싫어서 주는 대로 순순히 사인을 넘겨주었다그걸 다시 해야 하는 건 정말 귀찮다그리고 이제 그렇게 낼 만한 시간도 없고.

 

당분간은 기어 다녀도 괜찮은데요.”

내가 안 괜찮은데그냥 안 움직이는 건 어때

 

움직일 필요란 게 있나너는 나랑 대화만 하면 되니까저기 안 쓰는 의자 갖다 줄 테니까-

멋진 새 발을 얻었는데 안 쓰기는 아깝습니다.

 

생소하지만 카이토에겐 틀린 것 없는 문장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월급의 한 귀퉁이를 베어 먹어간 비싸고 가벼운 최신 티타늄합금 기반의 발을 장식용으로 썩히긴 아까우니까.

 

그럼 따로 입력할 순 없는 거야?”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프로그램이 보행법만 삭제한 것인지혹은 정품대리점에서 설치한 건데 누락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고그건 기본프로그램에 원래 내장이 되어 있어야 하는 내용이라 따로 설치되는지해당 대리점에 다시 가셔서 의뢰해 보시는 것은 어떠신가요혹은 보행법을 교육하는 방법도 있으나 이 방법은 추천해 드리지 않습니다카이토는 가이드를 타자기 두드리듯 내뱉는다.

 

그만알겠어.”

 

한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쓸데없는 말 하지 마나 그거 싫어하니까.

 

난 네가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말을 듣고 싶어서 널 비싼 돈 줘가며 고쳐온 게 아니니까그런 식의 프로토콜대로의 말은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끄덕인 카이토는 멀뚱히 입을 닫는다더 이상의 명령이 없는 이상은 입을 열지 말라는 소리시겠지인간을 대해본 지가 오랜만이라 그들의 함축적 의미를 따라가기가 힘들다차라리 어떠한 형식의 명령이 더 편한데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즉각 처리되는 정보는 그들에겐 무례하거나무례하게 보이는 언행으로 인식되나 보다머릿속에 마스터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입력한다.

 

[필요 없는 말을 하지 말 것설명서의 내용을 그대로 읊지 말 것.]

[먼저 인사를 할 것.]

 

가만히 있다가 쳐다보는 것 같으면 방긋 웃고또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면 가만히 있다가 다시 쳐다보면 몇 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웃는 카이토를 유정은 몇 번이고 놀려먹었다아마 계속 말하던 내장된 행동양식인듯한데 너무 멍청하게 무방비한 얼굴이라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보통 몇 번쯤 하면 놀리지 말라며 화를 낼 법도 하건만그런 건방지게 움직일 기전은 안드로이드에게선 해당사항 없음인가터지는 유정의 웃음에 카이토는 다시금 따라 웃었다말을 하지 않는 것도 아까 자기가 한 말 때문일 것이다복종도는 여타 생물에 비할 바가 아니라던 센터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숨 쉬지 말라면 숨넘어갈 때 까지 안 쉴 거니까뭐 숨넘어가도 죽질 않아서 그런가.”

 

잘 사용 하세요같이 동봉되어 가는 설명서도 잘 읽어보세요.

 

멀티 탭을 사온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진다제멋대로 쓸 수 있는데다가 보안도 철저하고.

유정은 책장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건넸다. [쉽게 배우는 한국어 회화]라고 쓰인 모서리가 바짝 마른 외국인용 회화집을 넘기자 몇 번이고 다시 그어진 줄과 빼곡한 포스트잇들이 사용흔적을 말해주고 있다각 잡힌 깔끔한 글씨로 상황에 맞는 다른 표현들이 빼곡하게 적혀있다기본적인 인사서부터 생활 전반 상식선의 대화는 정식의 규격이라 어색하다책을 넘기던 카이토는 유정을 올려다보았다.

 

마스터께서는 내국인이 아니십니까?”

아니너보단 한참 내국인이지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시간 날 때마다 나랑 그 책 같이 읽는 거야실제로 대화하는 것처럼그냥 대화하는 것도 포함.”

 

어렵지 않지유정은 끄덕였다너도 끄덕여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냈지만기껏 책을 든 카이토는 이상한 별세계의 물건이라도 손에 놓인 듯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희득 자신을 올려다보며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이해할 만한 설명을.

 

해줄 의무가 있나?”

아뇨문장 읽는 것 정도는 지금도 가능하고대화는 데이터베이스에 축적하면 할수록 자연스러워 질 거에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카이토는 책의 첫 장을 넘겼다. J.Y 멋들어진 필기체에 비해 책의 내용은 초등학교 대화수준가장 맨 첫 장에는 으레 그렇듯이 인사말들이 적혀있다.

 

안녕하세요저는 유정이라고 합니다.”

그건 내가 읽을 부분이야그리고 지금 하잔 얘기 안 했어.”

 

책을 든 팔을 낚아채자 힘없이 책은 바닥에 떨어진다눈살을 조금 찌푸리고유정은 카이토에게 손을 내밀었다계속 그대로 주저앉아있을 거야침대에 가서 앉든지 눕든지다리의 선명한 붉은 선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게다가 기껏 바꿔놨더니 걷지도 못한다니걷는 방법을 잃어버렸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산 김에 회사일 바쁠 때 즉각 못하는 빨래나 청소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피땀 같은 자신의 월급이 선명한 빨간 흉터로 밖에 돌아오지 못했다기계 주제에 효율성이 좋지 못하다유정은 이 정도의 높이차이가 카이토와 자신에게 맞는다고 생각했다손을 잡은 카이토는 그 팔에 힘을 주지 않는다.

 

저 많이 무거울 텐데요가능하시다면 양쪽 팔을 빌려주시겠습니까?”

무슨 소리야그냥 잡아.”

 

입술을 비쭉 내밀더니 잡은 그대로 유정은 바닥에 뿌리를 박은 무게감에 어어어하고 단말의 무력한 소리를 내며 카이토쪽으로 무너졌다안긴 품새가 당황스러웠다카이토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스터는 제 말을 안 믿으시나요단백질로 만들어진 신체보다는 아무리 가벼운 재질이여도..”

쓸데없이 말 길게 하는 건 원래 내장된 거야알겠으니까 일절만 하고 이 팔 치워.”

혈압맥박호흡수호흡음 정상이십니다맥박은 조금 빠르나 방금 크게 움직이신 점을 감안하면 정상체온은 약간 낮으시군요.”

너 그런 것도 체크할 수 있어노래 부르는 안드로이드 아니었나?”

 

마스터가 사용 목적에 의료기구라고 설정을 하셔서 기본프로그램에 딸려 들어갔습니다기본으로 혈압맥박호흡수호흡음체온까지 접촉으로 측정 가능하십니다그 외에-”

 

그럼 정말 떨어져기분 나쁘니까.”

 

유정은 저 혼자만 일어나 다리를 털었다팔을 내미는 카이토를 무시하고 책을 집어 들었다수천 번 읽고 듣고 썼던 문장들분리되는 활자는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 엎으며 인식을 잡아먹고 부서진 조각을 생산했다그 조각을 귓속에 처박고 싶다부서진 활자는 다시 재건할 수 없다.

 

거울을 쳐다보며

 

안녕.

안녕이 도대체 어떤 말이었더라. '안녕.'이라고 내뱉어 본다여전히 안녕’ 은 하나의 소리에 불과하다안녕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자신이 안녕이라고 말하긴 한 것인지. ‘안녕’ 다음엔 어떤 의미가 이어져야 하는지 텅 빈 머릿속에서 다만 메아리가 울린다.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찢었다가 다시 투명 테이프로 이은 흔적이 남은 자신의 모든 언어를 담은 책대화 할 수 없는 나날들.

들리는 것의 뜻을 깡그리 지운 이상한 사전을 의사는 청각실인증이라는 생소한 단어로 정의한다청각의 인식을 잃어버린 거예요사람의 뇌라는 건 참 이상하죠외계어가 들린다진료실에 멀뚱히 앉아 선한 인상의 의사는 의미 없는 소리만 내뱉었다먼 외국의 언어소리의 무게만을 가진 표백된 음성.

 

[사람의 뇌라는 게 참 이상하죠.]

 

유정은 .’ 하고 대답을 했지만 .’ 라고 대답을 했는지 의심했다아직은 이십 년 동안 축적되었던 반사적 대답이 남아 있네요의사는 웃으며 말했지만유정은 이해하지 못했다분명히 귀로 들어오는 음성은 고대의 이집트의 상형문자만큼이나 의미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의사는 웃으며 화이트보드 판을 내밀었다.

 

[써보세요.]

[저는 미친 건가요?]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답답해진 유정은 눈살을 찌푸렸다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하고도 3년의 입원기간은 모자랐지만알아듣는 척을 배우기엔 넉넉했다입술을 읽고무의식적인 동작을 잡아내서상황에 따른 뜻을 유추하고그에 맞는 대답을 책에서 연상한다하나의 문장에서 대답할 수 있는 수 백 가지의 선택지 중에서 가장 분위기에 맞는 하나를 선택하는 것원래는 뇌에서 자동으로 하는 기능을 생각에 맞춰 하기는 꽤 습관이 되질 않았다일 년이면 될 거로 생각했던 입원기간은 삼 개월만 더육 개월만 더하더니 꼬박 삼 년을 채웠다.

유정은 입원을 했던 기간 동안 치료시간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꿈쩍없이 회화책을 필사했다필사한 공책은 침대 난간을 넘어 쌓인다폐쇄병동은 계절과 상관없이 항상 적정온도를 유지한다규격화된 생활양식을 시간의 흐름을 잊을 수 있게 도와준다말 그대로 폐쇄와 격리의 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치료시간을 알리러 온 간호사가 테이블에 놓인 화이트보드를 들면 유정은 고개를 돌렸다아무런 약도 처방받지 않고 주사도 맞지 않는 유정은 자신에게 과분하게 큰 환자복을 사각거리며 언어치료실로 갔다소매에는 항상 검은 잉크가 물들어 있다그 병동의 환자들 중 유정은 가장 자유로운 사람 축에 속했다매일 자신을 보러오는 간호사들이 그렇게 썼다미치지도 않았는데 미친 사람들 사이에 갇힌 게 자유라니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아직 말이 제대로 안 나왔던 때라웃는 얼굴을 좋아하는것 같은 간호사들에게 매일 웃어주었다.

 

치료란 개념보다는 익숙해진다고 생각하고사회로 돌아가야죠젊은데.”

 

분명 호의가 넘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유정은 그 말이 매우 불쾌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치료사는 차트를 정리하며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보기 드문 케이스를 맡은 것은 그들에겐 행운 축에 속했다완벽한 비밀보장을 확인받고 진행하는 특수치료엔 그 병원 언어치료사 모두가 이름한번 넣어보려고 달라붙었다.

 

마지막 퇴원 날 의사는 유정에게 여전한 외계어로 악수를 청했다유정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손을 놓은 유정은 마스크를 코끝까지 올렸다제대로 말했겠지표정이 변하지 않았으니까이어폰을 끼고 회화집의 음성을 들었다.

실어증이란 거짓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은 비슷한 종류이기도 하고시나리오는 늘 그러했다교통사고를 당했는데그 후에 생겼어지금은 많이 치료해서 이 정도드라마에서 몇 번 본적이 있다는 반응과 오히려 신비스럽단 분위기를 자기들끼리 만들어내는 사람들병이 생기기 전에도 유정은 분위기를 읽고 그 흐름을 조절하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회사의 사람에겐 예전에 앓은 적이 있다.’ 는 과거 완료형의 짧은 문장으로나마 양심을 지켰다병을 앓기 전 만큼 지인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그 지인들을 절대로 엮어 만나는 일이 없었기에 가능했다낡은 폐공장에 버려져 있던 구닥다리 안드로이드를 제외하면유정의 거짓말은 아주 손쉬운 안전장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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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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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살픗 눈을 감으면 세상은 혼자인 듯 몇 개의 발자국만 남겨진다.

길을 걷는 유정은 위험하게도 거리의 득실거리는 세균 같은 감각을 차단하기 위해 병원에서나 쓸 법한 커다란 하얀빛의 멸균 마스크를 끼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플레이 리스트를 헤매는 음악을 배경 삼아 넓은 보폭으로 사람들 사이를 물살 가르듯 지나친다.

머릿속으로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의 문장을 나열하자 어느새 하고 싶은 일들은 의식의 저편으로 가라앉는다어느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이십 대 후반자신의 나이에선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다의무와 부담감만이 보란 듯이 길을 비추고사람들은 좋지도 않은 머리를 굳이 굴려 실낱같은 기회라도 잡아보려 애쓴다.

유정은 가끔 자신이 하늘을 날고 있다는 상상을 했다주위의 누군가가 들으면 엉뚱하게 생각할진 몰라도세상 어느 것에도 쓸모없는 말들을 웃어가며 듣고 있는 동안엔 자신에게 던져지는 수많은 화살표 사이를 훌쩍 뛰어넘는 유쾌한 상상들을 하면그것은 현실성 없는 진실한 웃음으로 나타났다.

 

약속까지 남은 네 시간.’

 

주위엔 싸구려 커피를 내려 파는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몇 개 있었지만커피 맛은 둘째 치고라도 추운 겨울 날씨에 사람들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몇 개의 주요 가닥만 붙잡으면 눈에 훤히 보이는 멍청한 상황이 가득한 군중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어질러진 방에 사람을 가둬놓고 치우지도 못하게 하는 건 고문이다속 시끄러운 생각을 접어버린다.

 

입고 있던 코트를 목까지 다시 여미고 귀에서 살짝 빠져나온 이어폰을 다시 밀어 넣는다어제는 잔업이 바빠서 운동을 못 했으니대신으로 오늘은 남은 시간동안 여기저기를 둘러 걸어 다니기로 마음먹었다몇 번 와보지 않은 장소라 익숙하지 않은 건물들이 시야에 펼쳐진다번화가를 벗어나자 풍경은 금방 주택과 공장지대로 모습을 바꾼다흙바닥에 구둣발이 맞붙어 끌리는 소리가 옆의 나대지에 퍼진다가까이에는 높은 철조망 뒤에 높게 쌓인 커다란 고철들이 산을 이룬다겨울의 바람에 노출된 버려진 중장비들이 나열되어있는 맞은편인기척 없는 공장의 한쪽 벽 커다랗게 [임대 매매]라고 써진 낡은 현수막은 한쪽 귀퉁이가 떨어진 채로 바람에 날린다몇백 평은 되어 보이는 버려진 공장은 커다란 문에 몇 년은 삭아 들어간 녹이 퇴적되어 손을 대면 그대로 거친 붉은빛이 묻어난다.

 

유정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마스크를 벗었다.

시원한 겨울바람을 한껏 들이마시자 묵직했던 폐에 물이 찬 듯 살아난다여전히 귀에선 가사 없는 악곡이 재생된다혼자 있는 시간에서까지 남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한꺼번에 넣어둔 언어 없는 음악은 건조한 공장 문을 여는 호기심의 배경음이 된다유정은 보통 자신의 안위 이상의 일엔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지만이렇게 떡하니 열쇠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문 앞에선 어린 시절에 잠시 가졌던 치기라던 지가 되살아난다손목의 시계는 아직 충분하다.

 

커다란 자물쇠를 떨어내자 영화에서나 들을 법한 거대한 철문이 바닥에 끌린다잘 밀리지 않아 발로 걷어차듯 밀어 넘기자 끼긱-하는 육중한 소리가 빈 공장에 메아리친다외국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곳에서 늘 몇 달 방치된 시체가 발견되곤 한다.

오싹한 상상을 하며 맨 크로스 백의 끈을 움켜쥐었다한 손에는 혹시나 모를 비상사태를 위해 휴대전화의 잠금을 풀어 들었다꼭 있을 법한 버려진 낡고 녹슨 중장비들빛바랜 쓰레기들높은 곳에 있는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먼지들이 풀풀 휘날린다차가운 금속의 냄새에 유정은 가라앉은 안정감을 느꼈다.

 

예상했던 풍경에 풀어진 어깨로 여유롭게 공장을 둘러보던 유정은 쌓여있던 드럼통 뒤에서 시체를 발견했다흠칫 놀라 손에 쥔 휴대폰을 눌러 빛을 가까이 대자 마치 잠든 모습으로 바닥에 박힌 표지에 사슬로 연결되어있는 시체.

 

시체.

 

머리칼이 쭈뼛 섰다얼어붙은 걸음에 머리는 급속도로 회전을 시작한다.

 

저게 정말 시체라면?’

시체가 아니라면?’

 

두 가지의 선택지를 시작으로 알고리즘으로 펼쳐진다눈으로는 빠르게 시체를 분석했다. 20대 초반의 남성주위의 바닥은 오래된 핏자국 없이 깨끗하다굵은 사슬로 묶인 발목과 연결된 바닥의 커다란 못직사광선에 사그라지기 시작한 입혀진 옷그리고 인공적인 파란빛의 머리색가장 수상한 것은 주위에 뿌려진 조그만 뼛조각들어깨와 다리에 쌓인 보얀 먼지는 시체가 적어도 몇 달은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았단 것을 말해준다그 정도 시간이면 원래 썩고도 남았을 텐데.

방부제를 많이 먹으면 시체가 썩지 않는다는 괴담이 사실로 밝혀지는 증거로 쓸 수 있을 만큼 시체는 멀쩡했다죽은 것이라는 사실만 빼놓고는.

그리고 알고리즘의 끝에서 유정은 결론을 내렸다.

 

이건 시체가 아니다.’

 

목에 걸려있던 사레를 밀어 넘기고 일단은 사라진 하나의 선택지에 안도를 느낀다복잡한 일은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가까이 다가가 발과 연결된 쇠사슬을 건드렸다묵직한 두께만큼의 무게가 끝에 닿는다유정은 턱에 괴고 있던 마스크를 다시 코끝까지 밀어 올린다직접 손을 대고 싶진 않지만딱히 바닥에 떨어진 나무토막들도 깨끗해 보이지 않아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걷어 올려 대충 목 언저리를 건드렸다하는 작은 충격에 어깨에 쌓여있던 먼지가 우수수 휘날린다마스크에 다시금 고마움을 느낀다.

 

짐작 가는 바가 맞는다면.

 

떨어져 한쪽으로 꺾인 목 뒤로 검은색의 각인된 숫자가 적혀 있다들어맞은 예상에 유정은 싱긋 웃었다그럼 그렇지저것도 여기에 남겨진 공장용 기계들과 다름없는 폐품이군완성된 안드로이드 기술의 유희용 확장판의지를 갖춘 신디사이저.

실제로 본건 처음이지만, TV나 컴퓨터에서 문득 지나가는 선전에서는 이렇게 처참한 몰골이 아니었다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형형색색의 머리와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초보자들도 사용하기 쉬운 인터페이스로 만들어져 홈 레코딩의 신세계를 열었다-주인 없는 공장에 버려진 고가의 보컬로이드이름이 그랬던 거 같다.

 

깨워볼까?’

 

그렇게 동한 이유는 눈치를 채고 보니 이제야 등 뒤로 떨어져 있는 충전 케이블이 보였기 때문이다그리고 바로 옆의 콘센트아주 오래 꺼져있었을 기계는 사람의 손길 한 번이면 깨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생명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심하게도 잔인한 일이다한 치의 관용도인권도 없는 물체.

창조주가 새 생명을 움트는 마음으로 콘센트를 연결한다움찔하는 작은 미동이 시작을 알린다.

기계는 파란 구슬이 박힌 눈으로 유정을 바라본다눈꺼풀에 앉은 먼지가 깜빡임에 우수수 떨어졌다고개를 훌훌 돌리자 시야를 가릴 정도로 먼지가 춤을 추며 휘날린다쿨럭하는 기침을 몇 번 하고 기계는 입을 열었다생각보다 목소리는 깔끔하다.

 

지금은 몇 년도 지요?”

 

대답 대신 유정은 시간이 적힌 휴대전화의 잠금 화면을 내민다. 2-0-1-X.

 

“3년 4개월 19일 6시간 39.40.”

 

침묵이 감돌았다유정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계속 자신이 달고 있던 먼지를 털어내다가 그걸 마시고 기침하는 바보 같은 행동을 빤히 쳐다보며 최소한의 예의로 유실물 센터에 전화를 해주어야 하는 건지혹은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이 기계의 주인을 위해 구경 잘했습니다-하고 코드를 뽑고 갈 길을 가야 하는 지를 저울질한다. 3년 동안 버려놓은 기계를 지금 와서 데려갈 것 같진 않지만복잡한 서류와 처리절차과태료를 감수하면서까지 기계를 폐기처분 시켜주려는 인덕 높은 사람이 아니었나이것의 주인은게다가 혹시나 모를 상황을 위해 묶어두고 가는 철저함인지 잔인함인지 모를 것 까지.

 

계속 재채기와 싸우고 있는 기계는 일말의 긴장감마저 녹아 없애고 있다멍청하게 소매로 얼굴을 닦으려다 아하고 그제서 자신의 결박상태를 눈치 챈 듯 발을 흔들어 소리를 냈다유정은 바탕화면의 가장 가까운 아이콘을 눌러 메모장 앱을 꺼내 툭툭 두드렸다.

 

[신고해줄까]

에취어디를 말씀하십니까?”

[안드로이드 유실 센터]

전 유실된 상태가 아닙니다.”

 

연 갱신기간 동안 서비스 센터 인증을 갱신하지 않은 안드로이드는 모두 유실로 처리될 텐데, 3년 만에 깨어났다는 정보와 모순된다폐기처분이 되었더라면 당연히 센터에서 보호처리유실보호처치그 이외에서 주인과 떨어질 방법이 있었던가기이한 모습만큼이나 그 기계의 존재는 장면에 모순된다고개를 갸웃 이며 다시 자판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경찰서에 신고 할 문제가 있어?]

당신은 말을 할 줄을 모르십니까?”

[나에 대해선 알 것 없어.]

그렇습니까그럼 갈 길 가시길 바랍니다.”

[풀어줄까?]

당신은 풀어줄 마음이 없고저도 풀려날 의무가 없습니다.

다시당신은 말을 할 줄 모르십니까혹은 안드로이드와 대화하는 것을 혐오하십니까?”

 

똑똑한데안드로이드는 말의 무게를 알아차린다유정에겐 남은 약속시각까지 위협적인 커다란 사슬을 풀 방법도 기력도 의무도 없다이제 슬슬 이 가벼운 일탈적 산책을 끝낼 때였다하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평소 매뉴얼대로 하기로 한다.

 

[나는 실어증이야그건 말을 하는 법을 잃어버렸다는 뜻이지.]

그렇지 않습니다당신의 호흡음을 기초로 발성기관에는 아무런 문제가 감지되지 않습니다당신은 저의 말을 올바르게 이해합니다당신은 문자를 통한 언어표현이 가능합니다두 가지가 가능한 실어증은 현대의학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설정된 문자가 재생되는 모양인지 뒤의 단어가 앞의 단어를 잡아먹는 형태는 자연스러운 음성과 다른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가벼운 트릭이지만 거기에 정황 가능한 상황자연스러운 연기가 합쳐진 가면은 아무에게도 벗겨진 적이 없다감히 높은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도 벗길 사람도 없을 것이라 유정은 믿는다대학 다닐 때는 몇몇이 모기처럼 피 한 방울 빨아보겠다고 나서면 끝끝내 밤을 새워서라도 후려쳐야 직성이 풀리던 것을 생각하면 성격이 많이 죽은 편이다힘 뺄 필요 없이 모기장을 설치하면 되는 일이었던 것을.

 

유정은 손에 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목 뒤를 쓰다듬었다어느 정도 크기를 내야 공장 구석구석에 퍼지지 않을 정도로 소리가 나오더라.

 

사람은 객관적인 사실보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더 신뢰하는 편이지.”

음성이 멋지시네요.”

.그래그럼 신고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원하는 것이 없다면 이만 가보도록 할게충전 케이블은 안 빼고 갈 테니 알아서 하고.”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그리고 바이바이눈웃음과 입에선 미소공장에서 찍어 나온 한 세트를 트릭을 알아낸 서비스로 주고선 미련 없이 이어폰의 음량을 키웠다.

멀뚱히 대꾸 없이 뚜벅뚜벅 울려 퍼지는 구두 소리가 빈 콘크리트벽에 울려 퍼진다앞으로 안드로이드는 주의해야겠다. 3년이나 된 구식기계가 간파할 정도로 얕은 수였었나마스크로 입김을 불어내자 더운 김이 푹푹 빠져나갔다열린 채로 있던 문을 발을 밀어냈다.

 

잠시만요!”

 

그래야지하나열까지 마음속으로 센다처음에 잡았으면 바로 대답해줬을지도절그럭절그럭하는 쇠붙이는 급한 소리와 저기요-사용자님-하는 조금 전과는 다른 애타는 목소리기껏 깨워줬는데 감사인사조차 듣지 못하고 가는 건 좀 아쉬웠다흥미롭기도 하고돌아본 뒤에는 자신을 가로막는 구속을 낑낑거리며 손으로 빼려 엉거주춤하게 일어날 태세를 하고 있다쩔뚝이며 두 발자국세 발자국부터는 기어서.

 

돌아오는 유정의 인영은 네 발자국 앞에 섰다무릎을 꿇은 기계는 유정을 올려다본다.

 

갑자기 왜 마음이 변한 거지?”

저기저것.”

내려다보는 팔 움큼에는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뼈들이 있었다그 뼈를 모았던 건가혹시 전 주인의-

어딘가에서 있을 법한 신파소설이 머릿속에 스쳐 간다사용자의 사망으로 인증이 소멸한 안드로이드는 어떻게 됐더라가리킨 저쪽엔 작고 건조하고 기다란 뼛조각사그라지는 살과 대조적으로 보존된 기계.

 

가져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부탁이에요.”

질문에 대답하면 못 해줄 것도 없지.”

어떤 질문이시죠?”

첫 번째이 뼈는 누구의 것이지대답 여하에 따라 나는 네 의사와 상관없이 경찰에 신고 할 수 있어두 번째넌 왜 여기에 있는지 그 원인과 원인 제공자에 대한 설명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힐긋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오래 주진 않을 거란 암묵적 표시를 한다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선이라면 깔끔하게 가설의 논리를 확정할 것이고어려운 수학문제를 해설을 조금 참고하긴 했지만 풀어냈다는 승리감에 약속장소로 향할 것이다이해하지 못할 답은 그것을 안다고 해도 전혀 기쁘지 않으니까.

 

잠시 연산할 시간을 부탁드립니다부디 오래된 모델이라 이해를.”

아아-.”

 

무릎 꿇은 앞에 뼈가지를 우수수 내려뜨리고 기계는 눈을 감는다눈 밑으로 이진법의 숫자들이 지나가고 귀의 위치에 달린 원판의 파츠에서 턴테이블이 돌아간다방금 만난 사람의 뇌 속을 파헤치지 않아도 이해선 상을 해부하는 톱니바퀴의 숨 가쁜 움직임이.

 

첫 번째이 유골의 주인은 저와 3년 4개월 19일 6시간 39분 전 함께 있었던 개의 것입니다인간의 것이 아님을 설명해드릴 증거가 있으니 부디 신고는 삼가주시길 부탁드립니다두 번째당신께 죄송하오나 본 기체는 왜 이 장소에 있는지에 대한 원인이 메모리에서 검색되지 않습니다프로텍트 접근을 원하시면 코드를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프로텍트메모리에 암호가 걸려있어?”

그렇습니다암호해제를 원하신다면 가까운 서비스센터를 방문하셔서-”

 

잠시왜 내가 해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거야기본해제코드는 너의 어느 곳에 기록되어 있지보통 목 뒤?”

 

끄덕인 그대로 기계는 순종적으로 목을 내밀었다유정은 파란 머리칼 사이로 기본 해제코드가 쓰여 있었을 자리의 칼자국을 발견했다시리얼 코드가 있었을 자리까지 길게 날카로운 것으로 움푹 팬 상흔에 손을 가져다 대니 움찔시리얼 코드의 아래쪽에는 K-A-I-T-O. VER. 2.5 모델의 이름인가.

 

기종의 이름은?”

사용자 지정 명칭은 검색결과가 없습니다기본정보를 말씀드립니다.

본 기체 명은 카이토마지막 갱신은 2-0-1-U년 6월 15업데이트 버전 2.5. 당신의 질문에 대답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

 

그럼 이제하고 카이토는 공손하게 손을 그것이 말하는 대로 개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의 뼈로 가져간다발로 스윽 밀어 손에 닿을 정도의 제한선에서 허겁지겁 손을 뻗어 자신의 가슴에 알을 품는 어미 새의 모양을 한다.

 

너무 늦었어미안해.”

조용히 그것은 둥그런 뼈의 구멍으로 속삭인다그 구멍은 귀가 아닐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무생물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기시감만 밀려온다결국이 이상한 장면에서 알게 된 건 아무것도 없다괜히 이쪽 패만 내준 꼴이다오래된 안드로이드는 정말 주의해야겠군표정을 읽지 않는 모델은 요즘 없으니까오히려 이쪽이 더 위험해.

 

당신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그보다 발목안 아픈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아예 안으로 굽혀져서 부셔졌는데발목에 쇳덩이를 깔고 무릎을 꿇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 아냐.”

 

하고 카이토는 오른 다리를 뻗었다발이 안쪽으로 비정상적인 형태로 굽혀있다부러진 발목의 티타늄 접합부 사이로 붉은 윤활제가 떨어졌다족쇄는 발목 크기에 맞춰 제작한 것인지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아 보인다누가 저렇게 악취미에 돈을 들였을까인터넷 뉴스에서 심심찮게 마주치던 안드로이드 학대와 그때마다 여론에서 들끓는 인권에 대한 새로운 정의들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종은 먹이사슬 중간에 끼어들어 피라미드를 무너뜨린다덕분에 그들에겐 여러 제약이 걸어졌다경제활동 금지미등록 기종 폐기처리제도섬뜩한 SF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인류 멸종의 근원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유만이 그들에게 주어졌다한때 세상을 뒤흔든 이종 간 연애금지법은 비록 논란 속에 아무런 결말 없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고 해도 그들이 외쳤던 [LIKE HUMAN, NOT LIKE HUMAN]의 문구는 군중 인식의 바닥에 자리 잡아 비인간 경시 풍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오롯이.

 

오른쪽 발목의 연결부가 비정상적인 각도 계산으로 부러졌군요.”

각도 계산 때문이라.”

 

괜찮습니다별로 걸을 일이 없으니까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바닥에는 뼛조각이 섬뜩하게 피 웅덩이에 가라앉고 있다헛구역질 나는 오일냄새가 마스크를 꿰뚫는다유정은 이 상황이 실제 사람에게서 일어났더라면 과연 자신이 어느 정도의 침착함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양심을 시험한다개의 뼈안드로이드의 윤활제그리고 다음 약속까지 남은 시간 삼십 분이대로 놔두고 가면 과다출혈로 충전 여하와 관계없이 카이토는 멈출 것이다서비스 센터에 데려간다면 보험이 없는 안드로이드는 수리할 수 없으니까보호자 신청을 권유받을 테지그렇게 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n년산 기계를 사용등록과 동시에 폐기등록을 하기위해 여러 절차를 처리해야 하나도대체 이 법체계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인지 아닌지를 모르겠다일반인은 한 번 읽어선 알 수도 없는 서류들을 만들어가야 겨우 폐기등록을 해주는 건 그만큼 폐기율을 줄이려는 의도였겠지만 그것은 불법폐기와 암시장형성만 부추기는 꼴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남성형은 암시장에서 잘 팔리지도 않는다고 들은 데다가유정은 복잡한 폐기서류를 처리할 생각도직접 손을 더럽혀 가며 암시장에 팔아넘길 생각도 없었다사용한다면어느새 구두 밑으로 스며드는 윤활제를 피하려 한 발짝 물러섰다카이토는 손에 든 뼈를 떨어뜨리며 발목을 부여잡는다눈꺼풀이 떨리고 있었다.

 

체내 잔여 윤활제가 70% 미만으로 떨어집니다강제종료를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질문할게정말 아무 도움 필요 없어?”

저는 그 도움에 상응하는 대가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야시간이 없으니 짧게 설명하자면나는 아직 사용자 등록을 한 적 없는 순정사용자이고보험료를 낼 정도의 금전적 능력은 있어너에게 원하는 건 교감이 들어가지 않은 객관적인 언어체계 공급.”

 

쓰레기도 잘 사용 해보면 어딘가 쓸모가 있지 않을까해서좀 이런 것에 오기가 생기거든.

슬쩍 떠본 쓰레기라는 호칭에도 기분 나쁜 눈치는 없다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토는 윤활액이 찐득하게 묻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언어는 업그레이드된 확장판 구매를 하신다면 더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하십니다사용자 등록은 아직 이니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크로스백을 뒤져 물티슈를 꺼낸 유정은 가득 그 손에 건넸다악수하자는 의미인데요손을 닦으며 의아하게 묻는 카이토를 무시한다이 충동적인 결정은 회사와 집의 무한 반복인 요즘의 지루한 생활을 하는 자신에게 주는 조그마한 이벤트이자 자신에게 주는 약간의 유희이기도 하다.

 

등록을 하면 뭐라고 부를 건데?”

당연히 마스터입니다.”

좀 오글거리네내 이름은 유정이야정이 이름그렇다고 해서 정이란 이름으로 부르란 건 아니지만카이토.”

그럴 일 없습니다유정님.”

그건 더 이상해

 

휴대전화를 꺼내 약속 취소 문자를 보낸다다음에 신경 써서 만나줘야 할 것을 기억한 후 머릿속에 다음 약속 날짜를 기록한다시계를 줄곧 흘깃거리던 유정을 감지한 카이토는 약속이 있지 않으냐고 물었지만유정은 그쪽이 취소해버렸어하고 미소 지을 뿐이었다.

 

손 다 닦았으면 이제 일어나볼까?”

경찰이나 119에 신고를 접수하신 다음 4~5cm 두께의 쇠를 부술 만큼의 기계를 들고 와 달라고 요청을 해야.”

너 왠지는 모르지만발목 부러져도 안 아프지아까도 그런 것 보니.”

 

이미 덜렁거리는 발목에서 구속의 효력을 잃은 오른쪽은 손으로 몇 번 살살 돌리자 무거운 소리를 공장 벽에 울리며 발과 함께 떨어졌다즉시 몽땅 난 발목을 휙 잡아 들어올린다더 이상의 추가적인 손실은 위험하겠지.

 

수리 당연히 해줄 테니까이쪽 발도 잘라버리자.”

.저의 선택권이 있는 질문입니까?”

바보 같은 말투랑 다르게 똑똑하네없어.”

 

눈을 감는 것이 낫지 않을까유정은 커다란 손으로 눈을 덮어버린다반항한 번 못하고 출혈량을 감당하지 못한 기계는 강제종료로 쓰러진다오히려 다행이었다한 번에 제대로 두 동강난 두 쪽의 발을 닦아 가방에 불룩하게 튀어나오게 넣고 뒤로 넘어간 카이토를 옆구리에 끼워 공장을 나가 가까운 대리점을 찾아갔다이것저것 무슨 내용인지 읽을 시간도 주지 않고 사인을 받아가는 서류 속에서 유정은 흥미로운 문항을 발견했다.

 

[주요사용 목적 의료보조기구 ]

 

체크를 하는 손에 담당 직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보컬로이드에게 으레 주어지는 목적이란 취미용가사용정도의 시답잖은 고가의 취미용품에 불과하다그저 기본의 안드로이드에 노래를 위한 몇 가지 부가기능을 더 붙인 것에 의료보조라니혹시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 싶어 친절하게 그는 설명을 덧붙이려 했으나한사코 휴대폰의 메모장으로 [이거만 작성하면 되는 건가요?] 하는 문장만 들이대는 커다란 마스크를 낀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의 손님은 비싼 수리비와 등록요금을 모두 일시금으로 긁어버린다또 어딘가의 돈 많고 시간 많은 도련님이겠거니 하고 서류를 넘긴다어차피 법적으로 문제 될 건 없고자그마한 대리점에 전체 수리는 잘 맡겨지지 않으니 오래간만에 찾아온 커다란 일거리두 발이 잘린 안드로이드를 손에 아무런 흔적 없이 들고 매장의 문을 여는 모습에 직원들은 한순간 얼어붙었지만유기된 것을 주웠다는 문자의 설명에 모두 수상한 모습의 손님을 웃으며 맞았다좋은 일 하셨네요하는 호의적인 웃음에도 젊은 그는 아무 대답 없이 휴대폰 액정을 내밀었다.

 

맡겨놓고 가시겠어요적혀진 주소로 수리 끝나면 배송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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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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