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안녕하세요.”
책을 든 카이토는 아주 또박또박하게 문장을 읽었다. 유정은 흘린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말 한마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줄줄이 토를 달았다. 안녕. 하세요. 라고. 안녀엉하세요. 이런 게 아니야. 입술은 왜 제대로 안 움직이는 거야. 어조가 너무 기계 같잖아.
‘기계니까요.’ 라는 투정에도 유정은 다시 읽으란 대답뿐이었다. 웃지도 않으시고 노려보면 한숨조차 쉬기에 민망하다. 유정의 ‘객관적’이란 단어는 상당히 주관적이었다. 표준발음이 꼭 잘 알아들어지는 발음은 아니니까.
시간이 나면 퇴근 후에 커피와 함께 한 시간. 주말엔 한나절을 읽었다. 처음엔 ‘안녕하세요.’에서 넘어가지 못하던 문장은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봬요.’로 넘어가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다가오는 주말은 새로운 문장인 ‘여기는 어디인가요.’를 말할 차례였다. 주말이 오기 전까지 카이토는 유정이 근무하는 아침과 낮 동안, 또 어느 날엔 주위가 깜깜해질 때 까지 침대에 앉아 여기는 어디인가요. 여기는 어디인가요. 하고 연습했다. 결국, 걷는 건 어물쩍 포기하게 되었다. 밤엔 충전을 위해 카펫이 깔린 바닥에 기어 내려가거나 기분이 좋은 날은 백허그로 안겨서도 움직였다. 그때마다 상승하는 유정의 맥박수를 말하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들었지만 카이토는 참았다. 올라가는 심박수를 세고 있다는 것을 알면 다시는 손 안 댈 거라고 질색할 게 뻔했다. 그러면서도 퇴근하자마자 슬쩍 자신을 들여다보며
“성하지 않은 다리로 어딜 기어 다니는 거야.” 하고 잔소리를 인사 대신으로 하는 유정이 카이토는 싫지 않았다. 의자에 앉혀서 무릎을 털어주는 정장 차림의 마스터는 멋있다. 흔들리는 어깨로 슬쩍 풍기는 남성용 향수와 묻혀온 담배 냄새. 열심히 다려준 정장은 가동범위 이외에는 구김이 없다. 다리의 흉터를 만지면서 흠. 하고 물건 감정하는 모양으로 이리저리 휙휙 돌려본다. 동그란 무릎뼈에 맞춰 원형으로 돌리니 미세한 톱니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움직인다. 움직임을 방해하던 흉터는 새 살에 잘 적응해서 많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과거의 석유찌꺼기같이 검고 찐득한 메모리의 조각은 무릎에 박힌 오돌토돌한 붉은 균열로서 그 존재를 잊지 말라고. 꾸준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카이토는 볼멘소리를 했다. 만져봤자 뭐하느냐고.
“그런다고 못 걷는 걸 갑자기 걷게 되지 않아요.”
“다리를 움직일 수가 있는데 못 걷는다는 건 모순이지.”
입을 떼자마자 유정은 쯧, 혀를 찼다. 문장이 쌍방향의 검이 되어 꽂힌다. 들을 수 있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디서부터 생긴 모순일까. 들고 있던 다리를 놔주고 넥타이를 풀었다. 카이토는 손을 뻗다 멈췄다.
“제가 풀어주고 싶었는데….”
“괜찮아. 씻고 올 테니까 책이나 보고 있어.”
앉은 채로는 닿지 않을 책상 위에 놓인 책을 건넸다. 으. 하고 지겹다는 표정을 짓는 이마를 톡 밀었다. 나는 삼 년을 읽었다고. 꼬박 삼 년을 읽고 쓰고 보고 아주 그 책의 여백이나 온점이 삐뚤어져 있다면 알아차릴 정도로. 샤워하는 머릿속에선 조금 전의 울림이 계속된다. 씻겨나가는 피로와 달리 영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의 모순을 부정했다는 사실에 맞서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한 아둔한 사고방식이 더욱 신경이 쓰인다. 문 뒤에서 카펫 끌리는 소리가 났다. 수건이라도 가져다 주기위해 기어가고 있을 카이토를 생각하니 살그머니 웃음이 난다. 가운을 입고 문을 열면 앉은 자세로 수건을 내밀고 있을 것이다. 카이토를 쓰기로 마음먹은 건. 더 이상 회화집의 녹음파일이 유정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대화상대를 만들어 보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 누구에게 이 기괴한 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기엔, 적이 너무 많다. 당장에라도 사실을 퍼뜨려 유정이 서있는 자리를 무너뜨리려 망치를 휘두르는 자들이 가득한 귓속 밖의 세계.
차라리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게 다행인지도. 확실히 이전보단 받는 스트레스도 덜하다.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언제는 현실에 발붙인다고 현실감이 들었던가.
문을 열자 예상대로 정좌로 수건을 내미는 것을 받아들었다. 수건을 치우자 카이토는 웃고 있었다. 언제나 똑같은 각도로 웃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뜨거운 물에 노곤해진 몸에 김이 모락모락 솟았다.
“뭐에요, 저 데리고 가셔야죠, 수건만 들고 가시면 어떡해요.”
“올 때도 기어왔으니까, 갈 때도 기어가면 되잖아.”
물기 조심해. 또 넘어질라.
친절한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 바닥에 발바닥 떨어지는 소리를 짝짝 내며 유정은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어쩔 수 없이 온 그대로 기어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저번처럼 물기에 꼴사납게 넘어지면 마스터는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웃어댈 것이다. 옆에 있던 다른 수건으로 주변에 떨어진 물을 닦고서야 무릎을 끌어 기어가 카펫에 앉았다.
“너 그러다 바지 무릎 부분 다 닳겠다.”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로 카펫 뒤의 쇼파에 유정은 털썩 앉았다. 아. 오늘도 힘들었어. 누구누구 보험료 내려면 아주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들리도록 넋두리를 하며 파란 뒤통수를 쳐다본다. 한 대 쳐주고 싶은 동그랗고 시퍼런 뒤통수. 예전에 누군가에게서 얄미우니 뒤통수 한 대만 때려봐도 되냐는 실없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느낌인가. 인공적인 파란 물이 든 머리는 한 가지 색이 아니라 백열등에 비춰 군청빛이었다가. 하늘빛이었다가. 뒤에 나온 커스텀 모델은 손톱 색까지 파랗게 멍든 것처럼 나왔다고. 카이토의 자라지 않는 손톱은 닳았지만 투명하다.
“옷보단 연골이 닳는 게 더 큰 일이실걸요? 이게 얼마짜리냐 하면.”
“넌 생산적인 일은 못 하는 거야? 소비적인 기계 같으니.”
“제가 일을 하게 되면 인간들은 뭐 하고 삽니까? 남의 밥줄 잘라먹으면서 까지 살고 싶진 않아요.”
“너 말 진짜 많이 늘었다.”
“마스터 덕분에요.”
쳐다보지도 않고 쫑알거리는 얄미운 뒤통수를 축축한 수건으로 내려쳤다. 처음에 올 때 만해도 카이토는 바짝 움츠려서는 종일 침대에 앉아만 있었다. 징그럽게 붉은 뿌리를 줄기까지 뻗은 가지들은 기능이 사라진 화석처럼 줄곧 이불속에 퇴적되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출근하기 전에 덮어준 그대로 퇴근 시간까지. 가구처럼 틀어박혀서는 퇴근한 유정을 보고 그간의 외로움을 가득담은 얼굴로 다녀오셨어요. 하고 고개가 떨어지면 해묵어 퀴퀴한 회한은 침대위로 가득 떨어질 것만 같은 게.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허무하다. 평소의 템포였다면 나의 일이 아닌 것은 세 발짝 뒤에서. 그러나 그림자는 그것을 덮도록 조절하는 것을 인생의 미덕으로 여기는 유정이었지만 기껏 비싼 돈 줘가며 고쳐온 게 저 꼴을 하고 있으니 영 마음이 쓰였다. 텅 빈 얼굴은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는 채로 웃어 보이는 기이한 환상이 겹쳐 보인다. 분명 어떠한 과거가 있는 게 분명했는데, 프로텍트 메모리는 해제키가 없으면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킨다. 굳이 부가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한 프로텍트 메모리를 심어놓고, 발목 크기에 맞춘 족쇄를 채워 버려놓은 이유는? 카이토는 기억에 대한 권한이 ‘전혀’없다고 했다. 억지로 기억을 하려고하면 모든 프로그램이 꽝, 닫혀서 접근 거부를 당한다나. 유정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식의 설명을 했다.
“그럼 그 강아지 뼈는? 그것도 과거의 기억 중 일부잖아.”
“아, 그건 제가 혼자 메모리를 유지했던 1년 정도 그 아이와 같이 있었으니까요. 아마….아...”
아. 음. 하고 과거 얘기를 조금이라도 꺼내보려 하면 카이토는 느려졌다. 그게 저장된 프로텍트의 작용이었다. 기면증에 걸린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헛. 하고 멀뚱거렸다.
“사설 해커를 시키면 해제는 가능할 거에요. 하지만 당연히 불법이고 만약 프로텍트의 주인이 살아..계신다면 마스터가, 고소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카이토는 자신의 예전 주인 된 자를 그렇게 정의했다. 한때 유정과 같이 아주 가까웠지만 그렇게 되어버린.
유정은 더 이상 그것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옛 주인의 향수의 자락이라도 잡아보려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처음의 쓸쓸한 표정으로의 회귀가 그동안 유정과 쌓아왔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서.
카이토와의 생활은, 사람들과의 것에선 느끼지 못했던 정말 이상하고 미묘한 균열을 눈에 보이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유정은 카이토가 얼마나 자신과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가까워지기 힘든 거리감을 훌쩍 뛰어넘은 것인지, 그것을 서로 보고도 잠잠히 덮어두는지는 몰라도 관계는 아주 미적지근하게. 그래, 가물가물 잠이 오려는 주말 오후의 그런 대화처럼.
“성장 이란 건 정확히 어떤 개념인가요?”
성장은 교육이나 학습과는 다른 개념인가요?
의자에 앉은 카이토는 발을 동동거렸다. 지표면에 닿으면 눈 녹듯 사르르 무너지고 마는 발목이 공중에 덜렁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책을 읽으며 이어진 시선으로 카이토와 대화를 이어가던 유정은 무릎에 책을 내려놓았다. 회사에서 어떤 여자가- 라는 주제였던 말꼬리가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순식간에 튀어 버린다. 그런 일이 종종 있다. 술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바다는 어떤 곳인가요.' 하고 묻는다든지.
“성장은 세포가 분열하는 것이나, 인격체가 발전하는 것도 성장이라고 해. 교육과 학습은 성장의 수단인 거고. 갑자기 그건 왜?”
“사람은 성장할 때 아프다고 해서요. 궁금했어요. 진짜 아프셨어요?”
그랬나. 그건 사람마다 달라서 겪는 사람도 있고 안 겪는 사람도 있어. 나는,
겪었던가. 기억이 안 나니까 없었겠지. 학창시절 어느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녀석은 무릎을 붙잡고 엉엉 울어대는 바람에 응급실에 간 적도 있다고 하고. 근데 좀 시끄러운 성격이긴 했어. 정신적인 걸로도 원래 사람은 자기가 힘들어야 그게 진짜란 걸 아는 멍청이들이 많으니까. 그걸 성장했다고 포장하는 거야. 대답이 되었을까.
“즐거운 아픔이네요. 멋지다. 성장할 수 있다는 건.”
“그렇게 말하면 듣는 내가 이상해지는데.”
성장.
즐거운 아픔.
같은 단어를 들어도 카이토의 울림에서는 낡고도 진실한 부러움이 묻어나온다.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일지도. 물건에서 벗어나 주체를 가지고, 발을 디디고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은 걸까. 사람이 된다고 해서 그다지 자유롭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아. 실망스럽겠지만.
“많이 아팠죠? 아프지 않았던 게 아니라 너무 아파서 잊어버렸을 거에요. 마스터라면.”
더 할 말이 없을 땐 카이토는 항상 웃었다. 알고 하는 것인지, 그저 어떤 단어의 모음들인지 모를 말들은 자려고 누우면 머릿속에서 꼭 한 두 번씩은 곱씹어 보게 된다. 조용히 카이토가 충전되는 자그마한 소리에 휩쓸려 과거의 잔 상처들의 기억들이 바닷물에 닿은 것 마냥 쓰라리게 닿았다가 밀려나는 사이로 불편하게 잠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날은 다음도, 그 다음날도 별로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마스크를 회사에서까지 끼고 싶을 만큼. 잠을 설친 것 과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남은 실컷 잠을 들쑤셔놓고는 새벽녘에 무거운 머리를 어설푸레 들어 카펫에 등을 구부리고 누워 눈 감은 카이토를 보고 있으면, 처음 보았던 공장에서의 먼지만큼의 무게가 꼭 가라앉았다.
“널 데려온 게 좋은 일인지, 안 좋은 일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저한텐 더 없이 좋은 일이에요.”
반바지 아래 다리의 찢겨나간 상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책을 읽어 드릴까요? 하는 부탁에 손을 저었다. 네가 말하는 책의 문장들을 듣고 있으면 책 내용보다 다른 것에 더 신경 쓰여. 움직이는 입술이 진짜인지. ‘자신의 의지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문장을 읽는 네가 그 말을 이해하고 읽는 것인지.
“발음 아직도 별로잖아..싫어. 그냥 내가 읽을게.”
“칫, 심심한데.”
“심심하면 내가 하는 얘기나 듣고 고개나 끄덕이란 말이야.”
“그 귀엽게 생긴 여자가 그래서 오늘도 도시락을 줬는데, 마스터는 같잖았지만 웃으면서 받아주었다는 이야기요?”
책등으로 머리를 때렸다. 말을 할수록 느는 건 넉살뿐이다. 거짓말처럼 미소 짓던 얼굴이 어느새 자신보다 더 자연스러워졌다. 주말 동안 다음 주에 할 대화목록을 생각해보고, 연습도 한다. 준비를 하면 불안이 덜해진다.
'긴것 > Prescription for crybaby ' 카테고리의 다른 글
prescription for crybaby 05&06(完) (0) | 2014.09.21 |
---|---|
prescription for crybaby 04 (0) | 2014.09.21 |
prescription for crybaby 02 (0) | 2014.09.21 |
prescription for crybaby 01 (0) | 2014.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