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글

겨울바다에 갔다

시노하라 노조무, 무난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 20년간이었다.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라, 평범한 학교를 다니고 평범한 직장을 지나쳐왔다. 그나마 눈에 띌 만한 점이라면 피아노를 공부했다는것 정도였다. 세상은 넓고 빛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넘쳐나는 세계에서 '좋아한다' 는 아무런 힘 없는 약한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 겨우 마련한 작은 방엔 전자 키보드라도 하나 놓으리라 다짐하며 언젠가 부터 조금씩 남은 돈을 모으고는 있었지만 늘 예기치 않던 방식으로 쌓아 놓은 모래성은 삶의 파도에 휩쓸려가고 만다. 잠시, 허탈한 마음으로 사라진 모래성이 있었던 자리를 발로 밟으며 먼 곳에서 울렁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바다였다. 바다이기에 모래를 휩쓸어 갈 뿐이었다. 그래, 제법 먼 곳까지 드라이브를 나왔었지. 상념에 젖어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깨에 제법 무거운 손이 올라왔다. 익숙한 무게였다.

"노조무, 뭐해?"
"아무것도. 그냥 보고 있었어요."
"응."
"바다. 정말 오랫만에 오네요. 덕분에."
"나도-. 오랫만에 오는거구."

당신은 좀 더 여유로울 수 있는데, 어째서 바다도 자주 오지 않는 생활을 했던거에요. 저라면 그만큼 돈이 있었더라면 회사같은건 다니지 않았을거고. 사람들을 만나고. 좀 더 즐겁게 지냈을 거에요. 안타까움이 섞인 말이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것 처럼 보이면서도 어딘가 갇힌듯 먹먹한 표정을 드러낼 때면 가슴이 아려왔다. 순간 스치다 금방 돌아오곤 하는 파도처럼. 잡으려 다가가면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파도의 두께 만으로는 바다 깊이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직접 빠져서, 심해의 아래로- 아래로. 가장 어두운 바닥에 닿을때 까지 침몰하는 돌멩이 하나.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도, 그 마음에 무너지는 것도. 실패라고 할 수 있을만큼 넘어지기만 한 인생이었다. 못났구나. 노조무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망설이는건 서로가 마찬가지 일텐데, 이끌려 가는것 만으로도 너무도, 벅차도록 기뻐서. 

"난 지금도 즐거워. 노조무랑 같이 있으니까."
"뭐어, 그러면 다행이지만. 나 정도로 즐거워 해준다니."
"그런 말이 아니구-."
"응, 알아요. 무슨 말인지."

단조롭게 지나가던 하루하루가 이렇게 빛나고 있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던 아름다움. 손, 잡을까. 먼저 내미는 말에 노조무는 작게 웃었다.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자 차가운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코트 자락에 손을 슬쩍 부비고는 길다란 손가락 사이를 파고 들었다. 맞잡은 손이 차갑게 식어가도 가슴은 두근거린다. 겨울의 바다를 찾는 이는 적었다. 차분한 푸른색으로 가라앉은 눈동자가 바다의 물살에 울렁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다음에 갈 식당에 대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집에서 아침을 먹고 나온지 어느정도 시간이 됐으니, 이제 배가 고플거라고 노조무는 확신했다. 

"우에다씨."
"응?"
"나는 당신과 함께 지내서 정말 즐거워."
"응. 나도."
"너와 만나서 다행이야. 코타로."
"....."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연습한 대화였다. 좀 더 사랑이 담긴 이름으로 불러준다면, 더 다가갈 수 있을까. 어색하게 말을 꺼내면 영영 그렇게만 될것 같아서 혼자 방에서 코타로의 이름을 중얼거려보고, 사진을 보고도 말해보았다. 입술에서 한 번 터져나오기 시작한 사랑의 이름은 밤잠을 설칠 만큼 귓가에 맴돌았다. 낮게 불러주는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음에 겹치는 나도 사랑해, 당신을. 얼굴을 보고 말하는건 처음이었다. 사랑해보다 더 깊은 말은, 그것보다 더 당신이 소중하다는 말은. 답을 찾지 못하는 목소리는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두고도 헤메인다. 어쩌면 처절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겨우 정신이 잦아들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이 차가운 바람에 스치웠다. 정적은 길지 않았다. 

"한번만 다시 말해줘. 녹음하고 싶어."
"..연습 많이 했으니까. 분위기 깨는 말은 하지 마. 부끄럽네..그냥 키스 할까?"
"이것도 녹음하게 해줘."
"코타로, 이제 입 다물어."


언어보다 더 가까운 답은 입술이다. 절박하게, 어두운 바다 속에서 찾고 있었던 답이었다.




선생님 항상 감사합니다. 짧은 글로 때워서 죄송합니다.
100일이나 되어서 말을 놓은 못난 노조무를 용서해주십쇼.
코쨩을 영원히 사랑하는 발닦개가 여행지에서(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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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

마지막 파트까지 수록하여 재록본으로 만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마의 끝에서

 

 

비가 매섭게도 내렸다. 츠바키의 간판에 기다란 비에 부딪혀 톡,,, 하고 춤추듯 균열하는 물방울을 아즈마는 유리컵을 극세사 천으로 닦으며 바라보았다. 비에도 정서가 담겨있다. 사람들의 기운을 타고 흐르는 기운처럼. 어떤 비는 회상을 부르고, 어떤 비는 그치고 난 뒤의 맑은 날을 그리운다. 어떤 비는 우울하기만 하다. 커튼을 치듯 쉴새 없이 쏟아지는 비는 단절된 관계. 가랑비가 오는 날엔 손님이 적당히 많았다. 평소엔 늘 틀어놓는 가사 없는 연주곡을 그런 날엔 꺼두었다. 빗소리가 더 음악 소리 같은걸요. 아즈마는 손님에게 웃으며 말하곤 했다. 오늘은 혼자서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주류 정리나 컵을 닦아야겠다고 아즈마는 생각했다. 운이 좋으면 비를 피해 한두 사람 정도는 와줄지도 모른다. 그런 날의 인연이야말로 기억에 남는다.

 

없는 재료나 사러 다녀올까. 내일도 비가 온다고 했으니, 조금만 사야겠네. 레몬, 월계수 잎. 오렌지 주스.”

 

바의 주방에 들어가 커다란 냉장고를 열어 보던 아즈마는 손가락으로 남은 주스 병의 개수를 세거나 레몬 절임 병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했다. 혼자 운영하는 곳이기에 바빠질 때를 대비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직원을 둘까도 고려한 적이 있었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온전히 내 것이라는 느낌이 좋기도 했다. 츠바키의 공간 전체는 그가 생각한 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직접 고른 진보라색의 벨벳 커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 모은 코스터, 술의 배열까지 아즈마가 계획한 대로 진열되어 있었다. 가게의 열쇠를 챙겨 든 아즈마는 커다란 우산을 들고 바를 나섰다. 골목 가에 있어 츠바키 입구는 작았다.

 

츠바키의 입구 앞에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제법 좋은 재질의 정장차림인데, 비에 젖어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잔뜩 짜증이 섞인 얼굴로 장대비를 받아내고 있었다. 아즈마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남자에게 기울였다. 남자에게서는 차가운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이런 이런, 손님이 있었네. 망설이는 중?”

손님? 난 그런 게 아냐.”

그럼 내 가게 앞에서 뭘 하던 중이야? 그것도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우산도 쓰지 않고...금방 감기 걸려버릴 거야.”

하아. 난 감기 같은 건 걸리지 않아. 누굴 좀 쫓다가 놓쳤을 뿐. 비 소리에 섞여서 녀석의 냄새와 소리가 가려졌어.”

아무튼, 외톨이란 소리지? 들어와요. 수건이라도 내 줄 테니까.”

 

아즈마는 남자의 손을 잡아 가게로 이끌었다. 멋진 차림을 하고서 비에 젖은 남자라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다. 금발의 머리카락과 쓰고 있던 안경알이며 소매 끝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문 앞에 선 남자에게 아즈마는 두꺼운 수건을 내밀었다.

 

고맙군. 안경 정도는 닦고 싶었던 참이었어.”

천만에요, 필요하다면 여벌 옷 정도도 내 줄 수 있어. 나와 체구가 비슷해 보이니, 괜찮을 거야.”

잠시 비만 피하고 갈 거니까. 여긴-. 술을 파는 곳인가.”

, bar 츠바키. 오늘은 개점휴업인가 했는데. 와인이라도 따뜻하게 데워줄 테니까, 천천히 놀다 가요.”

 

아즈마는 입구 앞에 선 남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내는 모습이 단정하다. 고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금발, 제법 날카로운 눈매. 의지가 가득 담긴 입술. 아즈마는 와인을 밀크팟에 데우며 남자가 관심 있어 할 만한 주제를 머릿속으로 골랐다. 바텐더 일은 아즈마에게 딱 맞는 직업이었다. 향긋한 술을 마시는 것도, 손님에게 어울리는 술을 추천해주는 것도, 그런 손님의 만족한 얼굴과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오늘의 손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아즈마는 따뜻하게 데운 잔을 싱긋 웃으며 코르크 코스터 위에 올려놓았다. 손님이 된 남자는 물기를 닦아 말간 얼굴로 아즈마를 맞았다. 날카롭지만 섬세하게 생긴 얼굴이 아즈마의 취향에 딱 맞았다. 남자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아즈마는 싱긋 웃었다.

 

자아, 따뜻한 와인. 남은 오렌지와 꿀을 넣었으니, 감기 예방에도 좋을지도?”

감기는 걸리지 않아.”

후후, 불사신이라도 되는가 봐.”

비슷하지. 친절을 받았으니 답례를 해야겠군. 그래. 너는-.”

남자는 아즈마에게 가까이 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귓속말이라도 하려는 걸까. 아즈마는 남자에게 감도는 신비한 기운과 흥미로움에 눈을 접어 웃으며 다가갔다. 진지한 표정의 남자는 손을 뻗어 아즈마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아주 조금, 가슴 속으로 손이 들어가고 있었다. 평소 어떠한 일에도 동요하지 않기로 정평이 난 아즈마 였지만 눈을 커다랗게 뜨며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는 아즈마를 무시하고서 남자는 천천히 가슴 속에 스며들어간 손으로 그 안에 든 물건을 만지고 있었다. 아즈마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남자는 아즈마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에, 두꺼운 벽과 사슬에 묶어놓은 보물상자에 아무런 제제 없이 다가왔다. 남자의 표정이 흠, 하고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듯 움직였다.

 

. 한 번 죽었다 다시 살아가고 있군. 다른 사람의 목숨을 이어받아서.”

무슨...”

흐음. 관대한 사신을 만났군. 행운이야. 나라면 예외 없이 거두었을 거다.”

사신..?”

모르고 있었나? 기억까지 지우다니. 관대함이 지나치군. 그렇다면 내가 해줄 만한 일은...”

당신, 그게 정말이야?”

당신? 불쾌한 호칭은 사양이다. 후루이치 사쿄. 오래된 이름이지만 그걸로 부르도록.”

나는 언제 죽을 수 있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가족 전부가 죽어버렸어. 나만 살아남았어. 나는..”

아까 불사신이라고 했지. 그건 오히려 네가 더 가까워. 유키시로 아즈마. 너는 사신이 접근할 방법으로는 죽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오래된 인과가 네 심장에 얽혀있어. 한 번에 해결할 만큼 인재가 없거든. 이번 세대는.”

 

아즈마의 가슴에서 손을 빼낸 사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제대로 된 일을 하는 페어가 없었다. 그나마 봐 줄만 한 게 츠무기와 타스쿠였다. 물론 그 둘을 페어로 만드는 걸 가장 반대한 것이 사쿄였다. 생전에 연이 있던 영혼끼리 페어를 해서 파멸하는 과정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합이 맞는 만큼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의심하다 보면 자멸하게 된다. 특히 머리가 좋은 녀석들일수록. 운명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인간의 가장 어리석으며 위험한 속성이다. 사쿄는 혀를 차며 뜨거운 와인이 담긴 잔을 들어 감사의 의미로 흔들었다. 더운 김이 나는 레드와인에서는 달콤한 과일 향이 물씬 풍겼다. 술을 즐기지 않았지만, 이 한잔에 호의가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즈마의 심장은 여러 가지 색과 조각이 얼기설기 엮어있는 엉성한 모양이었다. 절개선이 가득해 처리하기 쉽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신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반푼이다. 사신이 취하는 건 물리적인 형태의 심장이 아니다. 영혼의 구심점이 되는 장소가 심장과 비슷한 곳에 있어 그렇게 부를 뿐이다. 잘못 건드렸다간 육체에 위치한 심장까지 망가뜨릴 위험이 다분했다. 사신의 규칙에 위반되는 일이다. 아무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목숨을 거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불사신이란 불가능하다. 아즈마는 모종의 사정 때문에 비슷한 형태가 된 것이다. 사쿄도 처음 보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다행인 건, 네 자신이 가진 수명은 곧 끝나게 될 거다. 가장 구심점인 심장 조각이 없어지면, 운명이 뒤틀리게 되지. 내가 그걸 바로잡아 주지. 그게 내 보답이다.”

고작 와인 한잔에, 그런 걸 해주겠다는 말이야?”

. 근 백 년 간 먹은 와인 중의 최고였다. 맛을 섬세하게 가리는 능력은 없지만 말이지.”

헤에. 고마워라. 바텐더에게 최고의 칭찬이네. 사쿄씨.”

사쿄...., 그걸로 됐어. 다만, 인과를 정리하려면 나도 꽤 힘을 써야 해서. 아마 당분간은 힘들 거다. 대신 잔챙이들이 나타나면 처리해주지. 이 근방은..그렇지. 츠무기와 타스쿠군. 둘은 똑똑하니 괜찮을 거다.”

츠무기, 타스쿠. 그 사람들도 사신이야?”

그래. 그들은 상성이 좋은 페어야. 걱정했던 만큼은 아니라 안심이지.”

그럼 사쿄씨는 상관? 대장?”

딱히 그런 상하관계는 없어. 필요에 의한 일을 하는 거니까. 오래 일을 하고 있으니, 이런저런 역할을 하는 거다.”

멋있구나. 일하는 남자-. 란 느낌. 후후. 그보다 누굴 쫓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 일은 괜찮은 거야?”

난 추적이나 탐지는 잘 하지 못해. 번거롭지만 다른 사신에게 맡길 생각이다. 흔적을 남겨놓았으니 내가 할 일은 다 한 셈이야.”

 

사쿄는 살짝 내려온 안경을 올렸다. 생리작용은 없는 몸이지만 무생물에게도 풍화작용은 예외가 아니다. 인상을 찌푸리고 초점을 맞춰야 아즈마의 얼굴이 시선에 들어왔다. 선이 가는 남자. 어깨에 얌전히 꼬리처럼 올라간 은빛의 머리카락이 그의 매력 포인트 인 듯 했다. 검은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은 손목은 뼈대가 동그랗게 도드라졌다. 선이 가늘지만, 남성적인 인상은 명확했다. 잔뜩 눈을 구긴 사쿄가 시력이 좋지 않다고 웅얼거렸다. 순간 바뀐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귀엽다고 아즈마는 생각했다.

 

안경을 썼는데도 교정이 되지 않아?”

사람이랑 완벽하게 똑같은 구조는 아니야. 이건 어쩔 수 없는 퇴화다. 이 몸을 너무 오래 쓴 거야.”

사신도 수명이 있어?”

인과를 조정하는 존재에게 수명이란 개념은 의미 없어.”

사신도 사랑을 할 수 있어?”

감성적이군. 나도 감정은 있어. 사랑처럼 깊고 심화한 감정은 잘 모르겠군.”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를 해서 기쁘니까, 한 잔 더 하지 않겠어? 우유가 들어간 것으로 괜찮으려나.”

오늘은 이만 늦었어. 다음에 찾아오지. 내게 용건이 생긴다면, 감각과 의지가 날 부를 거야. 아무래도 비는 오늘 내로는 그치지 않을 모양이군.”

우산, 빌려줄게. 다음엔 그걸 가져다주는 거로.”

 

아즈마가 서랍장에 있던 접이식 우산을 내밀었다. 사양하지 않지. 사쿄는 우산을 받아들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문 앞까지 따라 나간 아즈마가 아쉽다는 눈치를 내보였지만 사쿄는 무심하게도 츠바키의 문을 열었다. 벽에 가려져 있던 비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우산을 펴들고 빗속으로 들어간 사쿄가 마침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다음에 보지. 비가 그치면 우산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아아, 비가 그치길 바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인걸. 츠바키는 언제나 손님을 환영하고 있어. 언제든지.”

난 손님이 아니야.”

 

검은 인영이 빗속으로 점점 사라져갔다. 아즈마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참 츠바키의 문 앞에 기대섰다. 다시금 참기 힘든 외로움이 밀려왔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이어받은 삶이었다. 처음부터 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즈마는 수요일을 싫어했다. 찢지고 잘려나간 기억 중 유일하게 선명한 정보였다. 아즈마의 모든 것을 가져간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아즈마는 몸서리치며 찬장에 넣어두었던 약통에서 두통약 몇 알을 꺼내 얼음물과 먹었다. 그날의 손님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비가 그치지 않았다. 츠바키에는 며칠간 손님이 드물었다. 아무래도 이렇게나 장대비가 오는 날에는 다들 집에 빨리 들어가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즈마는 비슷한 악몽을 오랜 기간 꾸고 있었다. 잊을 만 하면 잊지 말라는 듯 머릿속의 심해에서 떠오른다. 눈이 타버릴 듯한 강렬하고 뜨거운 빛, 열기,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비명. 붉은 빛. 유년기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리저리 손을 잡혀 다니다 보니 그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었다. 가슴 속에 기억의 파편을 담아놓은 상자를 만들고는 커다란 벽으로 닫아놓았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엔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여행을 다니며 마음에 드는 가게에서 일을 해주며 돈을 벌기도 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질 들었다. 바텐더를 해보면 좋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어느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에게 등 너머로 배운 칵테일을 만들어주었더니, 그가 감탄하며 추천했기 때문이다. 아즈마는 다음 행선지를 캐나다에서 빙하나 유빙을 보는 것으로 생각해 두었지만, 웬일인지 일본으로 돌아와 남은 돈을 전부 츠바키를 사는데 써버렸다. 자는 용도 외에 쓰지 않는 살풍경한 오피스텔보다 츠바키가 훨씬 아즈마의 이었다. 아즈마는 빗속에서 사라졌던 사쿄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쓸쓸함을 달랬다.

 

“....”

. 손님이네. 어서 오세요. 어라, 어린 손님이네.”

난 어리지 않아.”

이 분위기... 일단 문은 닫아주실래요? 비가 많이 와서. 앞에 놓인 깔개에 발을 잘 털고 들어와요.”

.”

 

밝아진 빗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 우산을 든 소년이 츠바키의 문 앞에 서있었다. 검은 코트, 검은 바지. 검은 워커. 비에 젖은 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어딘가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을 느낀 아즈마는 소년이 얼마 전 만났던 사쿄와 비슷한 종류가 아닐까 생각했다. 소년의 생기 없는 연두색 눈동자를 마주친 아즈마는 의심을 확신했다. 느린 몸동작으로 발을 러그에 구른 소년은 우산을 세워놓은 우산꽂이에 넣어두고 코트를 벗었다. 어두운 츠바키의 조명에 소년의 모습은 완연히 녹아들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소년을 쳐다보던 아즈마는 퍼뜩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환기했다.

 

오늘 첫 손님이네. 어서 앉아요. 수건 하나 내 드릴게요.”

주문. 핫초코. 마시멜로를 잔뜩 넣어서.”

아하하. 귀여운 주문이네. 아마 예전에 썼던 게 있을 테니, 가능할 거에요.”

 

소년에게 자리를 권한 아즈마는 주방으로 들어가 우유를 데웠다. 비를 피하러 들어온 고양이 같은 손님. 이 또한 즐거운 만남이 될 것이다. 아즈마는 여러 가질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자아. 마시멜로가 너무 많아서 컵이 넘치겠네. 후후. 남은걸 전부 써버려야지-.하고. 신나버렸어.”

고마워. 유키시로 아즈마.”

? 내 이름이 그렇게 알기 쉬운 거였어? 당신도 사쿄씨와 비슷한..”

역시 사쿄를 알고 있어. , 턱에 상처가 난 남자와 만난 적 있어?”

턱에..상처? 흐음. 그게 왜 궁금한 걸까.”

대답해. 사신을 알고 있으니 말이 쉬워지겠지. 심장을 뽑기 전에.”

심장을 뽑으면 나는 죽는 거야? 아쉽게도, 난 죽음이 무섭지 않아.”

겪지 않아보았으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니. 오만방자한 인간.”

 

소년은 입가에 묻은 핫초코를 혀로 낼름 핥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와 아즈마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사쿄가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었다. 두 번 다시 느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머리 전체를 가득 차고 있었다.

 

허억..!”

 

언제든지 죽어도 좋다고 늘 생각했던 아즈마 였지만, 처음으로 이대로 죽는 건 아쉽다고 생각했다. 우산을 돌려받지 못했다. 비가 그치는 날에 만나기로 했는데. 사실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다. 왠지 그럴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혼자서 품었다. 다시 한 번 그에게 따뜻한 와인을 대접하고 싶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라면-.

 

그만둬라. 미카게. 네가 어떻게 해 볼 자가 아니다.”

사쿄.”

 

바 테이블 위에서 검은 연기가 응집하더니 검은 에나멜 구두를 신은 남자의 형상이 나타났다. 아즈마의 심장을 잡은 소년의 팔 위에 양 발을 붙이고 서있었다. 무게나 질량도 사신에겐 해당 없는 법칙이었다. 미카게라 불린 소년은 불쾌한 듯 눈을 치켜뜨더니 아즈마의 가슴에서 손을 빼고 종전의 조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쿄씨..”

. 후시미의 흔적을 쫓으라 했더니, 왜 무고한 사람의 심장에 손을 대는 거지. 소멸하고 싶은 건가? 아리스가와가 없으니 자제하지 못하는군.”

이 자는 후시미와 접촉한 적이 있어. 미세하지만.”

, 후시미군?”

후시미를 아는가. 유키시로?”

 

아즈마는 아직도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시미군은 건실하고, 밝은 청년으로 츠바키에 몇 달 전까지 종종 찾아오던 단골이었다. 사진을 공부한다던 학생이었는데, 사람이 많은 술집보다는 츠바키의 차분한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즈마가 세계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을 함께 감상하며 자신도 언젠가 세계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던,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턱에 난 상처는 그의 밝은 인상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아즈마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쿄와 히소카가 아즈마를 살면서 사신을 최소 세 명 만나고도 살아있는 인간을 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아. 진정하려면 한 잔 마셔야겠어요. 사쿄씨는 따뜻한 와인으로? 그쪽은..”

너는 지금까지 도대체 몇 명의 사신과 접촉한 건지...이 쪽은 미카게 히소카. 내가 후시미의 추적을 부탁했지. 흔적이 여기서 끊겼나 보군. 내 표식을 떼어냈나. 후시미도 똑똑한 녀석이니까. . 똑똑한 녀석이라 더 곤란해졌어.”

후시미군이 뭔가 잘못이라도 한 건가요?”

후시미는 자기가 수거해야할 영혼을 가지고 도피하고 있어. 육체를 벗어난 영혼은 오래 견디지 못한다. 사신 실격이야.”

나는 핫초코. 마시멜로가 잔뜩 든 걸로.”

마시멜로는 아까 다 써버렸어. 미안해요.”

 

아즈마는 아쉬운 대로 찬장에 있던 비스킷을 부수어 단맛을 첨가한 핫초코를 만들었다. 사쿄의 와인에는 자몽 청과 레몬그라스, 카모마일을 넣고 뭉근하게 끓였다. 비가 소리를 잡아먹어 조용한 가게 안에서 사쿄와 히소카의 작은 말소리가 문득문득 들려왔다. 후시미군도 사신이었던 모양이다. 사쿄나 히소카는 제법 사신이라면 그렇다는 티가 느껴졌지만, 후시미군에게선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건장한 체격에 대학생이 입고 다닐법한 후드티셔츠 차림이나 간편한 셔츠차림으로 매고 다니는 백팩에는 사진 작법서와 소중하게 여긴다는 카메라를 넣고 다녔다. 요즘 보이지 않는다 생각했더니, 곤란한 일에 휘말리기도 한 걸까. 나쁜 일을 할 인물로 보이진 않았다.

 

츠바키 특선, 이라고 해봐야 내 마음 가는 대로 레시피. 그래도 맛있을 거야.

매 번 고맙군. 오늘은 급하게 오느라 우산을 가져오지 못했어. 다음번에 들르도록 하지.”

그거 반가운 말이네. 몇 번이고 찾아와도 좋아. 내가 죽은 뒤에도 츠바키는 이어줄 사람을 찾아뒀으니까.”

하아? 누가 네가 죽는다고 했지? 내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건가.”

. 제대로 이해했어. 난 내가 가진 걸로도 충분해. 사쿄씨라면 날 죽여줄 수 있는 거지? 당신이라면 내 마지막을 맡겨보고 싶어.”

사쿄. 유키시로의 심장이..”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당장 버리는게 좋아. 네 진짜 수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삶의 의지가 없으면, 어이. 유키시로.”

 

너무나, 너무나도 외로운 삶이었다. 가족을 잡아먹고 살아난 아이라는 손찌검보다 괴로운 건 혼자 지새야만 하는 밤이었다.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잠들고 싶었다. 죽을 자리를 찾아 세계를 돌아다녔다. 세계는 빛나고, 아름답고, 추악하고, 슬픔이 가득하다. 모두가 빼곡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아즈마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여전히 밤에는 두통과 악몽만이 아즈마와 함께였다. 심장이 무너지고 있다. 얼기설기 억지로 그를 붙잡고 있던 미련은 낡은 밧줄처럼 삭아 끊어진다. 삶의 의지가 붕괴하고 있었다.

 

유키시로!! 젠장, 기껏 준비해뒀더니.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냐!!”

나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거야. 이게 내 연극의 끝이야.”

삶은 연기가 아니야. 나 참. 내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네가 만들어주는 술이 마음에 들었다. 너의 심장을 고치는 건 내 기만일지도 모르지만, 너보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내가 보장하지. 비는 언젠가 그친다. 내가 우산을 돌려주러 올 때까지 살아보란 말이야!!”

 

시간이 부족했다. 조각나는 심장을 하나로 붙일 만큼 힘이 남아있는지 가늠하지 못한 채로 사쿄는 아즈마의 가슴 깊숙한 곳에 손을 가져갔다. 온기가 식어든다. 아즈마의 삶이 손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눈물을 보여줄 사람조차 곁에 없어 웃어버린다. 잡아줄 손 하나를 기다리며 회색 황무지 위에 서있는 아즈마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안녕, 너무 늦었네요. 바람에 실려 오는 목소리가 내리기 시작한 비와 함께 떨어진다. 비를 맞으며 뛰어가는 사쿄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있었다.

 

핫초코도 맛있었어. , 먹고 싶어. 조정하면 되는 거지? 가이드는 사쿄가 해줘.”

살아. 살면 달라져. 사신을 만나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인생이 달라진다. 내가 두 번째 삶을 너에게 주겠다. 더는 외롭지 않은 여행을. 유키시로 아즈마.”

 

아즈마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황무지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풍경이다. 언젠가 땅 아래에 상자를 묻은 곳이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만난건 고작 두 번째였지만, 오래된 그리움이 느껴졌다.

 

우산이 없나 보군. 씌워주지.”

후후. 어쩔 수 없는 남자네.”

 

긴 잠의 끝에 눈을 뜨자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빗소리가 잦아들어 이슬이 떨어지는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에 고개를 묻고 잠들었던 아즈마는 찌뿌듯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눈 앞에는 말라붙은 코코아자국과 빈 머그컵 두 개가 있었다. 높고 동그란 의자 옆에는 검은 우산이 기대어져 있었다. 비가 그치면 따가운 여름 햇살이 기승을 부릴 것이다. 긴 비가 그쳤구나. 아즈마는 혼잣말을 하며 내려두었던 블라인드를 천천히 말아 올렸다. 눈부시게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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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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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생님 생일이랑 똑같이 됐을까...죄송합니다 



눈이 쌓이는 저울



 

눈을 보고 싶어졌다. 구체적인 욕구와 애매한 욕망의 경계선에 쓴 문장이었다. 어떤 장소에서 누구와 눈을 보고 싶은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눈이란 상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체란 걸 알고 있다. 햇빛에 반사된, 무수히 쪼개져 보드라운 눈 조각은 저마다 거울처럼 밝게 눈을 찌른다. 짙은 눈보라가 몰아쳐서 깊은 눈이 잔뜩 쌓인 들판에 실제로 가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실은 뺨이 깨질 정도로 추워서 아름답다거나 하는 감상 따위는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도시에 내리는 눈은 미적지근하게 내리다 말고 땅에 닿을 때쯤이면 척척히 젖어 때로는 더러워 보이기도 하는 차가운 비와 흙에 섞인 얼음이 되다만 눈이었다. 언젠간 삿포로에 여행을 가고 싶었다.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스노우볼처럼 영원한 어떤 풍경을 그린 것이다. 영화에서 나올 법한. 솜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눈이 내리는 새하얀 도시. 담배를 물지 않아도 새하얀 연기가 숨결에서 뻗어 나오는 곳. 노조무는 퇴근 후 나른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꿈인지 망상인지 모를 이미지를 영사하고 있었다. 곁에서 운전하고 있는 우에다를 배려하면 깨어있자고 다짐했지만, 속절없이 고개가 까뜩여졌다. 검은 장막 뒤에서 눈이 흩날리며 조용히 천을 비비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가지고 있는 코트를 여며도 차가운 바람이 구멍에 쏟아지는 날이었다. 잔뜩 몸을 움츠리고 다녔더니 더욱 피곤했다. 언뜻 까딱이던 고개가 푹 꺼지자, 그 결에 퍼뜩 정신이 깨어났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가 옆을 바라보았다. 노조무는 민망한 듯 슬쩍 눈치를 보며 힘이 풀린 웃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깜빡 잠들었네요. 운전하는데, 미안해요."

"더 자도 괜찮구. 집에 가는 길은 기억하고 있어."

"혼자 운전하게 하면 미안하잖아요. 피곤할 텐데."

 

. 그런가. 대답은 마뜩잖았다. 정지신호에 차가 잠시 멈춰 서자 노조무는 눈가를 비비적댔다. 아직 머리는 꿈에서 깨지 못하고, 현실은 멍하니 붉게 점멸하는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핸들에서 손을 놓은 우에다가 며칠 전부터 이어지던 대화 주제를 꺼냈다. 끈질기게. 생일을 특별하게 보낸 기억은 어릴 적에 몇 번 정도. 다른 사람이 들으면 지극히 평범하다며 코웃음 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 먹었다. 음식은 그렇게 맛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메뉴를 고르며 고민하는 시간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명시된 가격만큼의 맛은 오히려 훌륭하지 않아도 만족스러웠다. 우에다 와의 생일이 얼마 차이 나지 않았으므로, 노조무 또한 선물을 고민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노조무. 생일 선물, 뭐가 갖고싶어?"

"아직도 그 얘기에요? 필요한 게 없다니까요. 사양하는 말이 아니라.."

"...알아서 사올게."

"에엑. 불안하네. 절대 비싼 건 안 받을 겁니다. 이때까지 사주신것만 해도 충분해요. 충분."

"내가 뭘 사줬지?"

"기억도 못 할 정도냐고요. 우에다씨한테 비싼 선물 받아도, 전 그렇게 비싼 건 못 사드려요. 공평한 게 좋으니까.."

 

공평한 관계일진. 확신할 수 없지만. 뒷말은 삼킨 채로 혀 속에서 뒹굴었다. 사랑받는 건 괜찮은 기분이다. 아버지가 주었던, 피와 이어졌다는 의리감에서 나오는 의무적인 사랑보다는 훨씬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것으로. 자유롭고, 한계를 모르고. 계속 바라보게 되는 종류이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눈빛과 자신을 대하는 눈빛이 다르다고 깨닫는 순간을 새롭게 느낀다. 애정의 양을 저울질 하는 건 치기 어린 어릴 때나 하는 바보 같은 짓이지만, 늘 그렇듯 유치하게 재보고 거리를 가늠해본다. 처음부터 가진 애정의 양이 다를지도 모른다고 하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호칭도 바로잡지 못한 건 이쪽의 불찰이 크다. 이런 관계로 괜찮은 건지. 어쩌면-. 머릿속의 저울이 기울어지다 어느새 쏟아지고 말았다. 노조무는 짧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공평한게 그런거였나. 언듯 말하는 혼잣말은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비싼 걸 사오면 바로 반품하러 갈 거예요. 그렇게만 알아두시고. 이번엔 우에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적당한 가격의 적당한 선물은 전설의 물건이라고.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노조무는 그의 적당한 가격은 분명 제 생각과 다를 것이라 짐작했다. 이만엔. 그 이상은 안 되는 걸로. 우에다는 진심으로 놀란 얼굴이었다. 노조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에다가 제대로 물건을 고르지 못하고 현금을 가져올거라 예상했다. 어쩌면 눈을 함께 보러 가면 좋겠다고,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만엔. 주문처럼 되뇌던 목소리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



 

 

다음날은 관계를 했다. 우에다의 침대는 두 사람이 누워도 남을 만큼 넓고 매트리스와 이불은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섹스하지 않아도 충분히 멋진 침대이다. 노조무의 집에 놓인 보급형 싱글침대보다 훨씬 깊고 긴 잠을 잘 수 있었다. 허리 위에서 열띤 우에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시 저울이 마구 휘청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창의 정사가 끝나자 피로와 후희로 온몸이 저렸다. 서로의 체취와 온기가 섞여 젤리처럼 하나로 녹아든다. 머릿속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남은 하얀 재만 남아 먼지처럼 천천히 부유한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죽은 듯 누워있던 노조무의 귀에 다시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에다는 가볍고 푹신한 이불을 나체의 몸에 덮어주었다. 사소한 배려가 익숙해지자 왠지 부끄러움만 커져간다. 오늘 수십번 들은 말을 우에다는 다시, 또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말 할 기회가 없는 사람처럼.

 

"사랑해."

". 저도요."

"왜 다시 말해주지 않아?"

"새삼스럽게....키스해줄게요."

 

노조무는 어깨에 겹쳐 누워있던 몸을 힘겹게 움직여 얼굴을 마주보았다. 우에다의 뺨에는 열기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채였다. 조금 귀엽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볼과 눈. 마지막으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작게 움찔거리던 몸은 입술 사이에서 참지 못하고 팔을 뻗어 다시 노조무의 목덜미를 안았다. 익숙하고 비릿한 키스와 끈적하고 적나라한 소리는 노조무의 기분을 다시 들뜨게 했지만 엉망이 된 몸은 그렇지 못했다. 우에다의 몸 위에 쓰러지듯 넘어져 가슴을 포개고 잠깐 이렇게 있자고, 지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씻지 않은 몸이 끈적여 더욱 달라붙었다. 이래로 아침까지 늘어져 잠들고 싶었다.

 

"모든 걸 쏟아붓고 있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

"그냥. 그렇다고요. 으아..내일은 늦게까지 자야겠어요. 손가락 하나도 못 움직이겠어요.."

"안 움직여도 돼. 내가 다 해줄게."

"요리도 못하면서. 맞아. 생일 선물은 고민해 봤어요?"

"우웅. 아직."

"흐음..이만엔이 그렇게 적은 돈이에요? 전 그걸로 한 달 생활비도 써봤는데."

"선물을 고민하고 있는거구.."

 

오직 나만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만으로도 선물이 된다고 말하면 우에다가 이해할 수 있을까. 노조무는 눈을 감고 고민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헤맨다. 어쩌다가 저울을 넘치는 만큼은 사랑을 말하고 몸을 섞는다. 그런 연인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다. 그 날은 키스를 평소보다 많이 했다. 다음 날 아침 몸을 씻으며 바라본 거울에 비친 부끄럽도록 선명한 붉은 색 흔적에 놀라고 말았다. 겨울이라 긴 옷을 입는 게 다행이었다. 노조무는 함께 아침을 먹으며 이 흔적 좀 보세요. 입고 있던 스웨터의 목을 내려 보여주었다. 피부가 하얘서. 티가 더 많이 난다고 했잖아요. 어린 애도 아니고-. 퉁명스럽게 투덜거렸지만 우에다는 굉장히 미소 지었기 때문에, 결국 이길 수 없었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적당히 구워진 토스트를 씹어먹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즐겁게 들려왔다. 넘쳐흐를 만큼, 무언가가 쌓이고 있었다. 소리 없이 쌓이는걸 보면 눈일지도 모른다.



 





 

 

 

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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