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그녀는 늘 그렇듯 회색의 수수한 브이넥과, 검은 청바지를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타났다. 억지로 밝은 척 거짓으로 입은 요란한 분홍색보다는 그게 더 그녀에게 어울렸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출근을 알린 그녀는 감기 기운이 있다는 핑계로 마스크를 코끝까지 올리고 있던 유정의 눈을 피하며 뭉개지듯 자리에 들어가버렸다. 그녀는 알고 있는지 어떨지 몰라도, 사무실의 모든 눈빛이 그녀와 유정을 따라가고 있었다. 어제의 격정적인 회사연애 드라마가 다음엔 어떻게 될지. 누가 봐도 평범한 여주인공에겐, 극적으로 나타날 멋진 왕자님이 필요해 보였다.
그게 왜 유정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째서 그녀가 도시락을 좀 주었다고 해서, 눈을 좀 많이 마주쳤다고 해서, 더 나은 관계로 발전해야만 하는 건지 가르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데스크탑의 사내메신저를 켜 그녀에게 긴 메시지를 보냈다. [말로 하면 시끄러워 질 테니까, 천천히 읽고 답은 해주지 않아도 돼요.] 로 시작하는 유정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을 담은 글을. 이게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이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사람은 여기에 없어요.] 로 마치는 메시지를 읽은 그녀는 화장실에 뛰어 나갔다. 며칠 새 두 번이나 여자를 울리다니, 올해 남은 운수는 최악이다. 오늘의 이야기를 해주어도 카이토는 자신을 착하다고 말해줄까.
답장은 마음속에 담아 둘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물에 쓸려나간 렌즈를 빼고 안경으로 갈아 쓴 그녀는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투둑. 투둑. 내려치는 타자마다 그녀의 봄빛 꿈이 사그라졌다.
[미안해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그동안 받아줘서 고마웠어요.]
모니터 밖의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선한 사람이다.
순간 마음이 흔들릴 뻔했다. 그녀라면 자신의 비밀을 이해해줄지도, 보듬어 줄지도 모르겠다고. 여느 만남처럼 가볍게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서로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까. 하는 안일한 미래. 그렇지만 내심, 무심코라도 그렇게 되길 바라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메시지의 읽음. 표시만이 마침표로 남겨진다. 회사 사람들에겐 그녀가 여자무리를 가라앉힐 것이다. 조만간에 동기들에게 술이나 사야겠다. 가끔은 일상에 이런 일화도 필요하다. 심심하니까.
입원하면서 아버지 회사의 인턴을 그만두고, 퇴원 후엔 굳이 주겠다는 회사를 뒤로하고 다른 회사를 찾아 서울 인근으로 떨어져 나온 뒤로 필요한 일이 아니면 부모님을 만나질 않았다. 싫었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버린 망가진 자신을 인정할 수도 없었고, 그걸 망가뜨린게 불특정 다수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세상을 원망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유정에겐 원망할 상대가 없었다. 그건 정말 방향성 없는 일이다. 검사결과에서 나오지 않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실인증. 잃어버린 현실감각. 수용하는 언어.
정말로 잃어버린 건 무엇인지조차 잃어버려서, 자신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찾을 수가 없다. 그저 결핍 되었다는 사실만이 세상과의 단절을 요구한다.
닿아버린 생각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복잡했던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그냥 카이토가 보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무릎을 만지고 오솔하게 튀어나온 붉은 치부를 손가락으로 느끼고 싶다. 내가 거짓으로 웃으면 마냥 환하게 웃는 멍청한 얼굴을 놀려도 모든 것이 수용되는 세계가 너무 달콤해서. 그녀가 만들어 내는 담백한 도시락은 혀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남은 일을 하며 줄곧 침대에 기대어 있을 동그란 어깨를 생각했다. 어서 가서 깨워주지 않으면, 평생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는 가련한 기계를.
‘널 데려와서 다행이야.‘
정말, 진짜로.
-
카이토는 무덤덤하게 그녀와의 종결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점심시간 후에 모두에게 커피를 돌린 그녀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조곤조곤 설명했고, 여직원들이 호들갑 떨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했어. 좀 민망하더라. 나도 사과했어. 당황해서 도망가 버린 거 미안하다고.
평소와 같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유정을 바라보며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듯 시큰둥한 눈치로 고개를 느리게 끄덕인다.
“그렇군요….잘 끝내셔서 다행이에요.”
“반응이 아쉽다는 느낌이네.”
“설마요. 깊은 생각 하지 않아요.”
“그래도 여자친구 생기시면, 주말에 저랑 틀어 박혀 있지도 않으시고. 더 좋지 않을까요, 남자한테서 얻을 수 있는 거랑 여자한테서 얻을 수 있는건 달라요.”
“나랑 틀어박혀 있는 거 싫어?”
"아뇨..마스터는 정말 피곤하게 사시네요. 남 탓은 그 정도만 하세요."
나는 남 탓 한 적 없어.
한 번도.
책 뒤의 얼굴이 대충 상상이 갔다. 7살 아이가 혼나고 난 뒤에 제 탓 아니라고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선 속으로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꿍얼대는 미운 나이. 이야기로만 들었지만, 그녀라면 꼬일 대로 꼬여서 이제는 잘라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자신을 정의하는 마스터를 곱게 풀어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잠시 했었다. 고양이가 털실을 굴리듯 아무리 굴려봤자 뭉툭한 손으로는 섬세한 대화의 실마리를 풀 수 없다. 말꼬리를 잡아 다음 대화를 이어가는 게 고작인 수박 겉핥기식 대화는 피곤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 아우라가 되고, 저러다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사라져 버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 미련이 없으니까. 그 조그만 미련의 한 가닥이 될 수 있다면, 그건 너무 큰 바람인 걸까.
"자기 탓을 하는 것도 안 좋은 버릇이에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
너 언제부터 이렇게 건방져 진 거야? 네가 뭔데 남 탓 자기 탓을 운운하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는 하는 소리야?
노기가 없는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웠다. 손을 휘저으며 그게, 그게 아니라. 하는 당황스러운 말을 모두 무시하고 유정은 이번 주에 있었던 모든 불쾌했던 생각의 잔재들을 토해냈다. 전하지 못하고 지워버린 공책의 자국에 카이토의 파란잉크가 물들어 의식으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좋게 대해주니까 친구인 척 모든 걸 이해하려 들지 마. 기계 주제에."
"이해..이해 안 해요. 못해요. 그치만 원한 건 마스터였잖아요."
"난 널 원한 적 없어. 날 원한 건 너였잖아."
그 공장에서, 날 부른 건 너였어. 다리를 부수는데도 한마디 않고 있었던 것도 너였고.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아. 아프면 아프다고, 싫으면 싫다고. 자기표현을 한단 말이야. 넌 의지란 게 있긴 한 거야? 없겠지. 걷고 싶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난 그 프로그램을 사 왔을 거야.
"보행 프로그램은 따로 설치할 수 있어, 나는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렇게 병신처럼 기어 다니기 싫지 않아? 아니면 좋아? 너도 본능에 충실해서 남 밑에 있을 때 행복한 거야? 내 비위 그렇게 맞춰주고 있으면 좋아?
"왜, 어째서. 자기가 표현하지 않는 걸 가지고 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이 다리를 준 건 나야.
너에게 다시 생명을 준 것이.
말할 권리를 준 게 나라고.
쓰이지 않는 발목을 잡았다. 힘을 주는지 다리는 떨리고 있었다. 살이 붙어있지 않은 발목은 이제 주먹을 조금 더 쥐면 부서질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탄력이 느껴진다.
"말을 해. 네가 진짜 생각하는걸. 그렇게 쓸데없이 빙빙 돌리지 말고. 말 안하면 아무것도 몰라."
"그러세요? 그럼 원하시는 대로. 마스터는, 정말, 어리광쟁이에요..그냥 어린애야!!!"
나는, 아니다. 저는. 혼나야 하는 아이를 달래주는 것밖에 못해요. 마스터는 혼이 덜 났어요. 못됐고. 유치하고. 말 못 알아듣는 것도 사실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재활에 성공한 건 마스터가 똑똑하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 여자가 고백을 한것 도 그 여자만의 착각이라고. 그렇게 인간이 단순하게 만들어져 있는 거라면 저희랑 다를 게 하나도 없네요. 제가 사람이었다면, 마스터를 정말 혼냈을 거에요.
"세상에 한쪽만의 탓인 건 아무것도 없어요. 왜 인정하지 않으세요? 제가 의지가 없는 건 마스터가 제 의지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휘두르려 하는 거, 정말 어린애 같은 생각이에요."
눈앞에 있는 카이토에게서 기시감이 그날의 먼지처럼 휘날렸다. 무심코 했었던 말들, 행동, 암시 속에 너와 나의 관계가 수평이 아니라는 전제가 뭉그러졌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져서, 속에서 끓어오르는 깊은 숨을 푹푹 내쉬었다. 쓸려나온 피곤함에 어깨가 뿌듯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또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카이토는, 그 뒤에 미안하다고 한참을 울면서 칭얼거렸다. 아무 대답 없이 무릎 꿇은 카이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안해요, 죄송해요, 하는 낯부끄러운 사죄의 말을 하는 카이토가. 정말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럽다고.
그날은 침대 옆의 콘센트에서 카이토와 함께 잠이 들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미안하다는 말을 그치질 않길래, 달래보려고 침대에 앉혔다가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같이 자는 건 처음이라고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이 마르지도 않은 얼굴로 신나게 이불을 풀럭이며 어서 누으시라고 베개를 팡팡 두드렸다. 시시콜콜한 주제로 대화하고. 사이에 지나가는 말로 미안하다고 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끌려가는 대화를 하면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혀뿌리에 감긴다.
찰그랑대는 족쇄 소리가 하얀색의 꿈에서 통통 메아리쳤다. 어딘가 떨어져 있을 열쇠를 찾아 걸어가다가, 붉은색의 강을 만났다. 그리고 문이 잠긴 상자. 직설적인 꿈이었다. 아무것도 열지 못한 채로 깨어나자 켜놓은 야간 등에 비친 카이토가 쳐다보고 있었다. 푸른 안광이 희미하게 빛난다.
"안 좋은 꿈 꾸셨어요? 손이 너무 차가운데. 숨소리가 불규칙적이어서 일어나봤어요."
"아무것도 아닌 꿈을 꿨어."
"제가 나왔나 보네요."
"넌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더 잘래. 너도 눈감아."
손으로 빛이 투사되는 파란 눈을 덮었다. 그랬듯이 카이토는 그 손을 겹쳐 덮었다. 슬쩍 올라간 입 근육이 느껴진다.
06.
그다지 프로그램이 비싸지 않다는 설득에도, 카이토는 보행 프로그램을 거부했다. 이건 제 의지에요. 하고 무릎에 손을 가져간다. 이제 붉은빛이 거의 사라진 연분홍빛의 자국은 만져도 밋밋해져 아쉬웠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야. 정기 검진할 때 가서 프로그램 받고 같이 걸어오자 손잡고."
"싫어요, 업고 가시던지, 상자에 넣어 가시던지 둘 중 하나에요."
"난 널 업지도 못하고 상자에 넣으면 내 차에 안 들어가….왜 안 걷겠다는 거야?"
“나 때문에 걷지 못하게 된 건데, 고쳐준대도 싫다고. 내가 계속 네 기는 것 보고 맘이 안 좋았으면 좋겠어?"
"네, 마스터가 평생 저한테 그런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으니까. 짐을 얹혀 주지 않으면 제가 좀 불안해서요."
유례없이 다른 모습의 미소를 지었다. 늘어난 건 말 실력만이 아니다. 유정의 교묘한 생존방식을 닮아간다. 등짝을 발로 차주고 싶은 걸 참고, 그냥 잠든 걸 데려다가 프로그램 설치를 할까. 하는 고민사이에서 서서 마구 뛰어다니는 카이토는 상상해보니 이상하다. 센터까지 상자에 넣어갈 자신이 없어서 돈을 좀 더 주고 방문 검진 서비스를 신청했다. 결제를 마치고 의자에 앉은 카이토를 노려보았다. 상전이야 아주. 하고 놀리는 말에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운다.
"알겠어. 평생 걷지 마. 울어도 안 해줄 거야 이제."
"안 걸을 거라고요. 그보다 프로텍트 메모리를 열어볼 생각은 없으세요? 전 그게 더 궁금한데."
"해커 써서 열면 고소당한다며..넌 내가 고소당하는 게 보고 싶은 거야?"
"코드를 직접 푸시면 되잖아요. 제가 최근에 좀 풀어봤어요."
코드는 꼭 음성언어가 아니라. 특정 행동도 되는 건데. 저한테 접촉되는 행동. 제가 스스로 해제 해본 건 여기까지. 더 이상은 진짜로 접근불가. 이거까지 가는데에도 몇 번 쓰러졌는지 모르겠어요.
"손은 잡아봤고. 꼬집거나 주무르기도 해봤잖아."
머리, 손, 목, 팔, 무릎, 다리, 발. 안 잡아 본 곳이 없는데. 등도 차봤고. 손으로 카이토의 가슴이나 배를 툭툭 만졌다. 무안하게도 조용한 반응. 다른 방식으로 추리해보기로 한다. 만약 내가 카이토에게 프로텍트 메모리를 설정한다면, 그걸 어느 접촉하는 행동으로 설정한다면 무엇을 할까. 타인은 할 수 없는 주인만이 할 수 있는 행동. 버려진 상태에서도 당하기 힘든 행동.
“너 혹시 거기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손댄 적 있어?”
“있죠. 성적인 것 말씀이시라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안 풀렸으니까. 아, 뽀뽀나 키스는 한 적 없어요. 입은 시끄러우니까 막는 게 좋고, 약한 건 흥미없는 분들이었거든요.”
아.
카이토는 깨달은 듯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춘 성취감으로 유정은 열쇠를 가져갔다.
“이렇게 너하고 뽀뽀하고 싶진 않았는데, 궁금해서 안 되겠다.”
“제 거부권은 없는 건가요?”
거부 안 할 거면서. 장난기 어린 올라간 입술을 포갠다. 카이토는 목을 안았다. 그 입안에서 오래된 기억의 맛이 났다. 시스템이 움직이는 소리를 무시하고 행복한 이 순간을.
+
Protect memory :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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