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받은것'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04.09 [유은스미200일]
  2. 2016.02.16 [카유카] Graph!
  3. 2015.08.02 [카유카] 정원의 뮤즈

 

※ 본 연성은 크랙(@HAPPYCRACKPOT)님께 커미션을 넣어 받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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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기념하기를 좋아한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화이트데이라고 온 거리가 사탕을 팔기 바빴다. 글을 파는 유은은 사탕같은 글을 써서 넘겼다. 솔직히 이런 저런 기념에 휘둘리는 건 바보같다는 것이 유은의 생각이었지만 최근에는 휘둘린다기보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는 것으로도 느껴졌다. 아무 이유 없이 꽃이나 사탕이나 초콜렛 같은 걸 내밀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로맨틱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는 없다. 다들 핑계가 필요하다. 사랑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기에는 다들 평범하다. 보잘것 없이 보일까 겁을 내기도 하고, 이유를 물으면 사랑 때문이라 솔직히 답하기엔 부끄럽기도 하다. 멋진 석양과 언덕 그리고 음악과 돋보이는 옷차림 등이 있다면 모든 게 그 사랑을 꾸며줄테니 상관없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고 사랑을 보잘것없어 보이게 내놓기에는 다들 그 사랑이 소중하다.

 

 스미레는 꽃이 근사하게 어울린다. 이름부터가 그렇지 않나. 섬세하고 둥근 그 생김에는 뾰족한 잎사귀도 둥근 꽃잎도 잘 어울린다. 피부가 희어서 빨간 꽃도 잘 어울리고 머리카락이 진해서 흰 꽃도 청순하다. 유은은 화이트데이 즈음을 지나 늘 지나다니는 거리에 팔고 남은 꽃을 서둘러 팔기위해 나온 판매대에서 꽃다발을 샀다. 집에 가져가자 스미레가 나비처럼 좋아했다. 꽃이 참 예쁘다고. 싸게 샀다고 말하니 스미레가 햇살처럼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이 사 오셨어요? 유은은 굳이 그게 개중 제일 비싸고 예쁘고 싱싱한 다발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싸게 많이 샀으니 현명한 거라고 지나가듯 대답했을 뿐이다. 스미레는 동의하며 꽃을 분류했다. 몇 개는 꽃병에 싱싱하게 꽂아두고 몇 개는 말릴 거라며. 유은은 그 일이 기억나 일을 하다 말고 꽃을 검색했다. 요즘은 플라워리스트가 인터넷 홍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데다 배달까지 안전하게 처리해준다. 유은은 마우스 클릭을 몇 번 하다가 화환 비슷한 장식품을 발견했다. 걸어둘 수도 있고 화환처럼 쓸 수도 있는 말린 생화 장식품이었다. 유은은 그걸 잠시 보고 생각에 빠졌다가 고개를 저었다. 머리에 얹기엔 너무 둥지처럼 생겼고 예쁘기는 해도 금방 망가질 것 같았다. 유은이야 상관없지만 스미레는 망가지면 금방 울상이 될 것이다. 원래 그런 건데도 일일이 슬퍼해주고는 했다. 어쨌든 끝이 빤히 보이는데도 굳이 사주고싶지는 않았다. 유은은 잡념을 떨치고 인터넷 창을 껐다. 저녁 즈음이 되어 하던 일을 접고 방 밖으로 나오자 스미레가 맞이했다.

 

  유은은 낮의 잡념이 떠올라 스미레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럼 화환 말고는 뭐가 좋을지. 꽃은 늘 들고있을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치면 화환도 그렇다. 식사를 준비해 가져오는 스미레를 보던 유은은 다음 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저녁놀이 뉘엿하게 질 때 즈음 집으로 돌아와 스미레에게 머리끈을 하나 건네주었다. 화려한 조화 코르사주가 돋보이는 머리끈이었다. 스미레가 그걸 하는 법을 몰라서 유은은 코르사주 아래에 묶을 머리끈을 사러 스미레와 함께 편의점에 나갔다가 왔다. 머리를 묶은 다음 코르사주가 잘 보이게 묶어주자 스미레는 하얀 목덜미가 드러나 제법 시원해보였다. 옅은 하늘색 코르사주는 스미레의 머리 꼭대기에 높이 앉아 귀여운 포인트가 되었다. 보기 좋았다. 하지만 유은은 뭔가가 허전했다. 스미레는 새로운 머리스타일에 잔뜩 들떠 있었지만. 어쨌든 환히 드러난 목덜미는 보기 좋았고 안그래도 날씨가 점점 따뜻해져 가고 있었으니 유은은 스미레를 데리고 옷을 사러 나왔다. 세일러 원피스를 하나 사서 입히고 아이스크림을 물려두고 잠시 벤치에 앉을 즈음 유은은 여전히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스미레는 원피스를 하나 사기까지 여덟벌의 모험을 거쳤으므로 아이스크림으로 피팅모델의 대가를 즐기는 중이었다. 세일러 원피스도 머리끈도 예쁜데 뭐가 문제지? 유은은 스미레의 옆에 앉지 않고 서서 스미레를 요모조모 뜯어보며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유은의 눈에 스미레가 앉은 뒤쪽에 있는 악세사리샵이 들어왔다. 저건가? 유은은 스미레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자 악세사리샵으로 직진했다. 스미레는 유은이 오늘따라 쇼핑에 저돌적이라고 생각했다. 유은이야 뭔지 모를 불만족때문에 갑갑했지만 스미레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의욕 넘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유은은, 식물에 비유하자면 난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바람이 불어도 부드럽게 넘겨버리고, 위태롭게 휘청거리지 않는다. 스미레가 얇고 넓은 존재를 팔락거리며 비틀거리고 휘청거린다면 유은은 휘어서 흘려버린다. 간결한 선과 그렇다고 또, 딱딱하거나 모나지 않은 부드러운 잎. 스미레는 유은이 가진 어떤 점도 싫어하지 않았지만 그 말은 유은이 보여주는 어떤 모습이든 좋아한다는 말도 된다. 뭐든 좋다면, 이것도 저것도 다. 스미레는 없던 욕심이 생겼다고 느꼈다.

 

 원래 없었기보다는, 오랫동안 비어있던 자리에 씨앗과 흙이 소복하게 쌓여 그 위에 비가 오고, 햇볕이 닿고, 사랑이 내려서. 유은은 악세사리샵에 들어가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있었고 스미레는 그 옆에 서서 고개를 산들거리며 들뜬 마음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유은은 실버 악세사리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미레는 유은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골드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안드로이드도 뭔가 합법적으로 수입을 만들 수 있다면 좋을텐데. 스미레는 자신도 유은에게 어울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그게 결국 유은을 통해야한다는 건 살짝 김이 빠졌다. 하지만 마스터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는 않지. 스미레는 그렇게 생각했다. 유은도 스미레도 약간은 위태로웠고 스미레는 그래서 최대한 유은을 불안하거나 염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스미레에게 유은은 중요하다. 아주, 아주,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중요하니까 뭔가 해 주고 싶은데. 유은은 스미레에게 이런저런 반지와 팔찌와, 목걸이를 해보게 하다가 목걸이를 하나 사주었다. 수수하고 심플하게 반짝이는 꽃잎 모양이었는데, 시원하게 머리를 올려묶은 스미레의 하얀 목에 잘 어울렸다. 유은은 그제야 좀 해소된 표정을 지었다. 허전함이 여전히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채워지긴 했기 떄문이다. 스미레가 유은에게 어울리는 초승달 모양 목걸이를 추천하자 유은은 그것도 계산해달라고 말했다. 유은이 늘 하고다니는 초커를 빼고 스미레가 목걸이를 유은이 스미레에게 해주었던것처럼 걸어주고 나자 스미레는 이런 경험을 좀 더 해보고 싶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선물하는 경험. 스미레의 고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스미레는 아직은, 유은과 겨우 반 년 지낸 것이 다이기 때문에 이렇다 할 큰 무엇인가가 없었다. 유은이 무엇을 하면 기쁘고 행복해질지 스미레는 아직 추상적으로만 알 뿐이다. 스미레는 유은의 삶에 갑작스럽고 또 놀라운 행복을 주고 싶었다. 얼마 전 유은이 꽃다발을 사왔듯이.

 

 스미레는 작은 꽃 몇 개를 정성스레 펴서 압화하고 봉오리가 큰 장미를 주르륵 매달아 드라이 플라워를 만들었다. 장미꽃 한 송이와 안개꽃들과 스미레가 근처에서 따온 노란 들꽃은 드라이 플라워들이 매달린 아래, 유리컵 안에서 사이좋게 졸고 있었다. 거기 앉아있으면 스미레는 행복했다. 드라이 플라워를 커튼이나 침대에 장식할 생각을 하고, 압화를 유은의 메모가 가득한 메모판에 붙여두고, 매일 컵에 물을 갈아주며 꽃다발을 내밀던 유은을 떠올리고. 유은이 준 유은에 대한 행복. 스미레는 그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주는 즐거움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고민을 거듭할수록 스미레는 영문모를 우울에 빠질 뿐이었다. 사람은, 그 중에서 특히 유은은 무엇을 좋아하지? 돈을 쓰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들키지 않고 유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지? 스미레는 절망에 빠졌다. 유은에 대해서 생각보다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스미레는 유은이 아침에 일어나서 어떤 얼굴인지, 일할 때는 어떻게 살짝 마른 대답을 내놓는지, 머리가 아플 때의 미간과 느릿하게 퍼지는 미소 같은 것들을 잘 알았지만 그게 유은의 희노애락에 대해서 말해주지는 않았다. 슬퍼하는 방법이나 화나게 만드는 방법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스미레는 유은이 기뻤으면 했다. 그렇게 중요한 걸 알 수 없다니. 스미레는 자신을 구성하는 수십 수천의 전선과 회로가 부질없이 느껴졌다. 분명히 아주 대단하고 아주 뛰어난 기술들이,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만든 존재인데 겨우 한 가지를 알 수 없다니. 모든 걸 계산할 수 있으면서, 스미레에게는 그것을 알아낼 수 없게 만들다니. 너무 사치스러웠다. 스미레는 세상에게 약간 토라져 새침한 눈을 떴다가 한숨을 쉬었다.

 

  고민하는 사이 드라이 플라워가 잘 말라서 스미레는 커튼봉에 걸어둔 끈들을 풀었다. 커튼에 장식해둘까 했지만 침실의 커튼은 생각보다 자주 열고 닫았다. 유은이 가끔 밤을 새기 때문에, 낮까지 자기 위해서는 커튼을 쳐야 했다. 스미레는 코 아래에 봉긋한 모양 그대로 잘 마른 꽃을 가져갔다. 꽃향기는 가시고 마른 풀냄새가 났다. 스미레는 또 다시 고민을 하기에는 지겨워서 그냥 처음 하려고 했던 대로 커튼의 끈에 장미를 달았다. 말린 꽃잎이 바스라질까 조심조심 튼튼한 줄기를 실로 묶어 그 실을 끈에 꿰맸다. 커튼에 말린 꽃다발이 생길 걸 생각하자 스미레는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이런 것을 자신은 유은에게서 받았는데 돌려줄 수 없어서 다시 기분이 갑갑해졌다. 애매한 표정으로 그렇게 실을 꿰매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유은은 방에 들어오다 의아하게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스미레는 유은을 보자 손에 들고있던 것을 들어보이며 꽃을 달고 있었다며 웃었지만 유은은 눈썹 한쪽을 들었다. 유은은 스미레를 더 추궁하지는 않고 스미레가 조잘조잘 압화와 드라이 플라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무엇이 스미레를 처지게 만들었는지 생각했다. 꽃이 예쁘다고, 꽃을 볼때마다 기분이 좋다고 말하면서 스미레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아보였다. 물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테지만, 그렇다고 뭐가 기분이 안좋으냐 말하면 술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유은은 알아서 알아내보기로 했다. 스미레는 유은이 골똘히 얼굴을 쳐다봐오자 뭔가가 잘못되었느냐고 물었다. 유은은 깜빡이는 스미레의 눈을 들여다보며 꽃을 달 걸 알았으면 암막커튼이 아니라 좀 더 밝은 색으로 살 걸 그랬다고 대답했다. 스미레는 그러지 않아도 예쁘다고 말했다. 마른 꽃은 색이 아주 짙어져서, 밝은 것보다 이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고. 그리고 깊이 자는 건 중요하니까. 스미레는 장난스럽게 그래야 자신이 잠든 유은을 쳐다볼 수 있다고 말했다. 유은은 웃어버렸다.

 

 두 사람이 각자 고민해서 도달한 결론은 각각 달랐다. 스미레는 유은처럼은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수긍했다. 그리고 유은은 두 사람의 관계가 의미를 가진 날로부터 200일이 곧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은은 스미레가 침울했던 것이 아마도 그것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그게 맞지 않더라도 날짜를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가기에는 서운했다. 유은은 턱을 괴고 고민했다. 그리고 스미레는 나름의 고민을 거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둘이 장을 보러 가서 스미레는 꽃 씨앗을 몇 봉투 샀다. 많이도 들어있는데 그다지 비싸지 않아서 유은은 별 생각 없이 흔쾌히 사주었다. 스미레는 원래도 베란다에 꽃을 많이 키워왔으니까. 스미레는 씨앗을 성실하게 키웠다. 이 꽃들이 다 피면, 스미레도 유은에게 꽃다발을 선물해줄 수 있을 것이다. 씨앗은 많으니 아주 오래오래 꽃들이 필 때마다 스미레는 유은에게 받았던 것을 줄 수 있을것이다. 자기만족일지도 모르고 스미레가 기뻤던 만큼 유은이 기뻐하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스미레는 어쨌든 유은에게 자신도 무엇인가 해주고 싶었다. 당장 해주고싶지만 그건 무리니까 조금 실망스럽더라도 참기로 했다. 고개를 든 새싹들을 스미레는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유은은 스미레를 집에 두고 외출했다가 돌아왔다. 편집부와 미팅이 있다는 핑계로 나갔다 왔지만, 유은은 적당히 시간을 떼우고, 편의점으로 배달시킨 물건을 찾고, 아이스크림 전문점에 가서 작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고 제과점에서 무알콜 샴페인을 샀다. 200일에 너무 유난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남들 다 챙기는 날도 아니고, 어차피 한번뿐인 기념인데 유은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부부로 치면 신혼도 이런 한창 신혼도 없으니까. 비가 좀 오긴 했지만 유은은 기분이 썩 괜찮았다. 우산을 접고 현관으로 들어선 유은은 스미레가 기분이 매우 우울해보여서 당황했다.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일을 나가서 속상했나? 유은은 황급히 스미레의 옆에 가 앉았다. “무슨 일이야.” 스미레는 별 대답을 하지 않고 울 것같은 눈을 하고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유은은 스미레를 한참 달랬다. 스미레 겨우 입을 열었는데, 내용인즉슨 키우던 새싹들이 비를 맞아서 전부 뿌리가 드러나고 너덜너덜해졌다는 이야기였다. 키우던 싹이 죽는 일은 흔한 일인데 스미레가 울상인 것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이야기라 유은은 스미레의 이마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스미레는 유은이 들고온 케이크와 와인을 보고 더더욱 울상이 되었다. 받는 게 싫은 건 아니다. 당연히 싫을 리가 없다. 하지만, 스미레는 욕심이 났다. 욕심을 잘 내려놓지도 못하고 혼자서 휩쓸리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작지만 그래도 뿌듯이 자라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리고 이 꽃들이 자라서 당신의 화환이, 꽃다발이, 나의 고백이 될 거라고. 울먹거리는 스미레를 보던 유은은 가방에서 초커를 하나 꺼냈다. 유은이 평소 하고 다니던 것과 비슷하지만, 장식이 달랐다. 곱게 빛나는 꽃모양 장식이 달려있었다. 유은은 스미레가 내내 하고있던 자신이 사준 목걸이를 풀어내고 쵸커를 채워주었다. 웃는 얼굴에 해주고 싶었지만 우는 얼굴이라도 상관없었다. 스미레니까 해 주려고 했던 거니까.

 “200일 커플 아이템이야.” 목걸이보다는 내가 늘 하고 다니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어. 스미레는 쵸커를 꺼낼 때부터 그렁그렁하던 눈물을 결국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너무 좋아요. 스미레는 울상을 하고 유은의 팔을 꼭 잡았다. 스미레는 유은이 200일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서, 어제도 그제도 보여줄 수 있었지만 오늘까지 기다렸는데, 새싹들이 다 시들어 버렸다고 내가 해주려던 게 이제 보여줄 수가 없다고 한참을 울었다. 유은은 스미레를 달래고,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녹는다는 핑계로 울상인 스미레에게 포크를 쥐여주었다. 스미레는 울고 케이크를 먹으며 한참동안 왜 그랬고 왜 속상했는지 털어놓았다. 유은은 수다스럽기보다는 조용하고 주로 대답을 하는 스미레가 한참동안 유은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에 대해서 종알거리는 것을 달콤하게 지켜보았다. 나 때문에 그랬던 거야? 유은이 묻자 스미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큰 걸 받았네.” 안드로이드의 사랑이 유은의 얼굴에 가득 꽃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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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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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성은 크랙(@HAPPYCRACKPOT)님께 커미션을 넣어 받은 작품입니다.

작품의 소유권은 크랙님에게 있으며, 영리/비영리적 사용은 삼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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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ph!


나는 첫 작동 당시를 기억한다. 물론 나에게는 아주 크고 거대한 용량의 메모리가 있고, 나는 그것들을 모두 기록해두고 있다. 나에게 기억한다는 동사는 이런 의미를 가진다.

기억하다 : 과거의 사물에 대한 것이나 지식 따위를 머릿속에 새겨 두어 보존하거나 되살려 생각해 냄, 머릿속에 새겨 두어 보존되거나 되살려 생각해 내어지다

또는,

기억하다 : 관련 키워드가 입력되었을 때, 가장 신속하게 불러올 수 있도록 따로 분류·저장된 기록. <삭제>나 <덮어쓰기>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설정한 메모리에 기록된다.

나는 나의 하드 디스크, 그러니까 나의 뇌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겹겹의 원반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반구체였다. 반구체가 다시 반으로 갈라져 있고, 그 반쪽은 다시 용도에 따른 용량에 맞추어 잘려 있었다. 안드로이드 전용으로 제작된 주문 제작품. 그러니까, 나를 위해 마스터가 만들어 준 아름다운 나의 추억. 마스터는 내가 그것을 보고 싶다고 하자 몹시 그로테스크 하다는 평을 내놓으며 직접 나의 두개를 분리하고, 그 안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집어넣었다. 그 손에 들려있는 아름다운 기록장치는 나의 성이며, 요람이며, 무덤이라고 마스터는 말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것에 호기심과 탐구를 느끼는 것이 그의 연구에 아주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금세 다시 집어넣었으므로 나는 나의 하드 디스크가 돌아가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상상한다. 빛을 반사하는 아름다운 판들. 겹겹이 모여 모양을 만들고 다시 갈라진 판들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회전. 나의 중추는 그 위로 쉼 없이 기록하고, 그 모든 것은 단 한 사람에 관한 것이다. 나의 주인. 나의 부모. 나의 신. 나를 만든 이를 지칭하는 모든 수식의 대상. 유정.


마스터는 부지런한 사람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지만, 마스터의 연구는 범상한 일과와는 다른 특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밤샘을 하는 일이 종종 있다. 마스터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답이 정해진 공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지만, 세상에 오로지 한 가지 특성만을 가진 일은 없다고 말했다. 시를 짓는 이도 어떤 법칙에 속박됨으로써 작품을 완성하고 법칙을 발견하는 이 역시 어떤 자유와 창조, 무질서와 혼돈을 마주한다고 말하며 마스터는 이마를 짚었다. 또한, 질서는 낮의 것이요 혼돈은 밤의 것이므로 혼돈을 찾으려면 밤에 찾아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내가 백주대낮 오후 3시에 그를 깨우는 것이다.


“마스터, 마스터. 일어나세요.”

마스터가 베개에 머리를 꽉 누른다. 나는 그걸 보고 대꾸했다.

“두통약, 진통제, 소화제, 찬물, 미지근한 물, 얼음물, 따뜻한 물?”

“얼음물… 진통제…”


인간의 몸이란 몹시 견고하고 놀라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보통 <타고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며 특히나 뇌를 주로 쓰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런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마스터는 말했다. 3일 밤낮 외출을 최대한 지양하고 모니터 앞에서 지나치게 밝은 빛을 쐬어대면 당연히 눈의 피로가 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두 달 전의 나라면 말했겠지만, 마스터는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니 비타민 A와 D가 풍부하며 기타 눈에 좋다는 성분이 함유되어있다는 의약외품과 찜질할 수 있는 안대를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그것들과 함께 눈에 피로를 주지 않는다면 건강에 훨씬 좋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해서 반경 10m 이내에서 가장 건강한 사람이 된 이후에는 다시 건강을 해치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스터의 목적을 떠올린 나는 30분 후에 수긍했고, 그 날 이후로 우리는 같은 내용에 대해서는 질답하지 않는다.


“마스터, 오늘은 인호 님이 방문하시기로 한 날이에요.”

“그래…? 벌써 그렇게 됐니?”

“네. 이틀이 아니라 3일을 새셨어요.”

“아… 중간에 잠들어서 날짜를 헷갈렸나 보다. 지금이 몇 시니?”

“오후 3시 12분입니다. 식사를 준비할까요?”


마스터는 고개를 저으며 잠들기 전 까둔 오렌지로 배를 채웠다는 대답을 하고 일어섰다. 당연히 마스터가 향하는 방향은 침실의 옷장이리라 예상했으므로, 나는 마스터가 먹고 남은 약 포장과 세 모금 분량이 줄어든 얼음물을 집어 들었다. 컵을 씻어 식기 보관대에 세워둔 다음 청소기를 꺼내 청소를 한번 하고, 스팀 청소기를 켜자 마스터가 나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머리를 꼭 싸맨 마스터는 발을 꾹꾹 닦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는 모양이었다.


마스터는 나에게 <비효율>을 가르친 것을 크게 후회하면서도 나에게 효율성에 대한 재정의를 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나라는 잉여 전력(하루에 20시간 이상 가동하며 인체와 유사한 동작을 할 수 있고, 인체보다 훨씬 큰 비용을 들여 작동하는 기계)이 그저 인형처럼 앉아있는 것은 안드로이드 물리 공학자들에게 큰 실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그게 <포장된 말>이라는 걸 어느 정도는 알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걸음걸이는 인간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자연스럽고, 몸의 중심을 이용해 스팀 청소기를 보다 적은 힘으로 미는 동작은 인간의 근육 작동원리를 충실하게 구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존재에 대한 목표는 <인간 인격과 유사한 인공지능>의 구현이므로 나는 인간을 좀 더 많이 겪어보아야 한다. 그것이 마스터에게 도움이 되고, 나는 그렇게 기쁨을 얻으니까. 해서 나는 청소를 비롯한 집안의 잡다한 일을 하기 시작했고, 그러던 어느 날 마스터는 나에게 비효율을 가르쳤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가장 적절한 정도의 결과를 내는 게 좋아. 무작정 많이 문지른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야. 청소는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고, 오늘 오전 11시에 철저히 먼지를 제거한다고 해서 내일 오전 11시에도 같은 상태이진 않지. 늘 최소한의 위생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게 매일하는 청소지. 그러니까 같은 부분을 열 번 이상 문질러가며 두 시간 동안 청소할 필요 없어.’


마스터는 ‘청소에 두 시간 이상 투자하지 말라’ 또는 ‘같은 곳을 열 번 이상 문지르지 마라’가 결론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뭐든지 흡수하는 시기였고, 나의 사고는 매일 새로운 것을 시험하고 적용해보아야 했다. 그리고 마스터는 밤을 자주 새우기 때문에, 기본적인 예의로서 마스터가 잠들어있을 때는 청소를 하지 않았고, 마스터는 일어나면 씻는 습관이 있고, 내가 청소기를 돌리고 스팀청소기를 돌린 바닥에 물을 떨어뜨리자 나는 한번 효율적인 행위를 해둔 곳에 물방울이 떨어짐으로써 생기는 나머지 바닥 넓이의 비효율은 어떻게 계산해 효율적일 수 있는지를 물었다. 마스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다가, 2분 40초 정도 침묵을 지킨 다음, 머리를 수건으로 꼭 싸매고는 발을 꾹꾹 눌러 닦아 물이 떨어지지 않게 한 다음 비효율의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고 말했다. 나는 마스터가 어떤 당혹스러운, 굳이 분류하자면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느꼈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마스터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릴 때 떨어지는 수많은 미세한 물방울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또 내일 닦을 거니까.


인호님이 마스터의 집을 방문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피아노를 쓰기 위해서이고 둘째, 피아노를 제공받는 대신 나에게 예술 방면의 지식과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건 마스터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경험 역시 제공한다. 그 양상은 주로 이러하다.


“아니 그니까, 애초에, 내가 왜 노래용 반주를 해야하냐고!”

“네가 내 집에서 내 피아노를 치니까!”

“야이 썅 그럼 니가 악보 사다 주던가! 곡이나 정해오던가! 너 지금 코드 안 풀린다고 나한테 와서 지랄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아냐!”

“내 코드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 문제가 있더라도, 내가 너한테 지랄할 권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

“시발 이래서 돈 많은 집 애새끼들은”

“너 되게 다른 집에서 큰 것처럼 얘기한다?”

“어 19살부터는 나 혼자 살았으니까 개새끼야!”

“왜 쭉 나가 살지, 좀 나가 살아!”


미디어의 흔한 부부싸움 같은 그림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나 역시 흔한 아동의 반응을 보였지만, 이제는 그때가 기회인 것을 아는 것이다. 나는 재빠르게 마스터의 <일 안 하는 용도>의 노트북을 꿰차고 앉았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세일 정보를 찾은 다음, 메모리에 갱신하고 재빠르게 창을 끈 뒤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힘찬 삑사리를 두 인간의 귀에 꽂아넣었다.


니가 내 인생의 재앙이니 참변이니 서로 주고받던 마스터와 인호님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약간 쑥스러워져서 에헴헴 헛기침을 했다. 나를 빤히 보다 서로를 쳐다본 두 사람은 마주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 분명히 쟤 하드웨어는 보컬로이드로 사 왔는데. 왜 저런 걸까. 마스터는 깊은 수심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인호님은 마스터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있었다. 둘 다 음악적 취향이 지나치게 고상했다. 나는 삑사리 좀 내고 오토튠도 좀 쓰는 분야를 타겟으로 제작되어서, 클래시컬한 취향의 두 사람과는 사실 애당초부터 맞지 않는다. 하지만 성악용 안드로이드는 제작되지 않는다. 마스터의 최선이었음은 인정하는바, 나는 그냥 하드웨어에 새겨진 프로그램에 충실하기로 했다.


“아이스크림 먹으면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야, 쟤 약 판다. 인간 다 됐어.”

“진짠데. 사용 효율이 오르는 건 사용설명서에도 적혀있다구요.”

“언젠간 하드웨어도 포맷해야겠다 진짜…”

“그럼 저 걷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데요?”

“그럼 네 미각만 지우자.”

“인간은 의식주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으면서…”


마스터는 한숨을 푹 쉬었다. 농담, 능글거리기, 슬쩍 넘어가기, 지나치게 긍정적인 태도 보여서 전의 꺾기에 이어 시무룩해 하기가 나의 <위기 모면 행태>에 추가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추고 아이스크림을 사와 먹으면서 다시 의논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자 녹차 맛, 레몬 치즈케이크 맛, 파핑캔디가 가득 든 합성색소와 두 종류의 잼, 우유를 쓴 아이스크림을 물고 거실에 나란히 앉은 마스터와 인호님, 나는 아이스크림의 맛에 대해 간단한 토론 중이었다. 내가 파핑캔디가 든 아이스크림을 처음 먹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 맛, 그러니까 바닐라, 딸기, 초콜렛, 그 외 과일 가향의 맛들을 다 먹어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이제서야 과일과 바닐라 향신료, 초콜렛 외의 재료가 주로 쓰인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기 시작한 지는 꽤 되긴 했지만 작동을 시작한 총 기간에 비하면 그 반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왜냐면 나도 마스터도 처음엔 나와 아이스크림의 관계를 몰랐기 때문이다. 마스터는 나를 처음 사와서 나의 ‘뇌’에 해당하는 부분을 완전히 리셋한 후 새것을 주고, 거기에 마스터가 만든 기본 인격을 새겨넣었다. 그리고 나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나의 행동변화를 기록하다 아이스크림이 나의 의욕에 미치는 영향을 의아해 했다. 마스터가 설계한 인격 프로그램에서 음식에 대한 기호는 자주 접할수록 올라가게 되어있었다. 늘 식사를 같이 하므로, 마스터가 집 안에서 먹는 것들이 나의 기호식품 목록이 될 예정이었다. 아이스크림과 나의 첫 조우는 마스터가 집에 오는 길에 일행들이 <먹자>고 강력히 피력해 각자 하나씩 든 아이스크림콘(편의점에서, 조교가 결재하는, 어떤 의견의 조정 없이 각자 하나씩 먹을 양을 샀으니 취향껏 골라보라는)을 채 다 먹지 못하고 들고왔을 때였다. 그리고 나는 한눈에 그것이 그것인 줄 알았고, 멜로디언을 뚱땅거리던 나는 벌떡 일어섰다. 멜로디언도 중요하지만 멜로디언은 중요한 게 아니었던 순간이었다. 그것은 나의 특별한 기록으로서 저장되었다. 첫 추억이다. 세 입 깨물고 허물어지듯 녹기 직전이었지만 나는 그걸 크게 크게 베어물었기 때문에, 모두 녹아버리기 전에 먹을 수 있었다.


그때 먹었던 아이스크림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초콜렛이 토핑되어있고, 언 초콜렛 위로 견과류가 몇 개 박혀있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약간 눅눅해진 비스켓이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콘을 가장 좋아하지만, 마스터는 늘 바닐라만 고르는 내 옆에서 딸기, 초콜렛을 같이 골랐고, 나는 곧 그것도 먹어보게 되었다. 나날이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마스터는 내게 감추고 싶어 했었지만 세상에는 많은 아이스크림 브랜드가 있으며, 나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먹어보고자 하는 꿈이 생겼다. 미래를 가정하고 목표를 세우며 더욱 긍정적인 상태로의 전환을 꿈꾼다. 그것은 상당히 고등한 행동양식이다. 마스터는 그렇게 평가했다. 그리고 바디에 입력되어있는 그저 단 하나의 <식품에의 선호>가 마스터가 오래도록 고민한 것을 이루어줄 줄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분명 나와 같은 기종들이지만 다른 개체인 카이토들은 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나는 아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꿈꾸는 안드로이드일 것이라고 말했다. 마스터는 상상도 못 하게 복잡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을 흉내 내는 유사 인격은 많지만 그것들의 다양성은 크지 않다고, 마스터는 다양성을 최대로 확보한 기초 프로그램과 알고리즘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인호님에게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꽃을 키운다고 치자. 모두 빨간색 꽃을 피울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세상에는 빨간색 꽃만 있는 게 아니지. 그리고 다들 열심히 노력해서 주황색, 노랑색 꽃을 피울 수 있는 씨앗까지는 만들어 냈어. 그리고 지금 카이토는 파란색 꽃을 피워냈고. 최초로 난색 계열을 벗어난 거야. 이게 과연 우연인지, 아니면 카이토가 보라색, 초록색까지 갈 수 있을지, 그렇다면 카이토와 같은 시작점을 가지는 꽃들은 검은색, 흰색까지 갈 수 있을지. 그런 걸 하는 거지.”


인호님은 그래서 뭘 하느냐고 물었고, 마스터는 글쎄다.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마스터가 하는 일은 너무 미시적이어서 그런 거시적 관점은 자기 손을 떠난 문제라고 말했다. 자신은 기술을 개발할 뿐, 기술을 어떻게 쓰느냐는 전적으로 기술을 사용할 권리를 지불한 사람들의 문제라고. 나는 그저 내 작품의 <인간성>에 심혈을 기울일 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기계다. 내가 내일 일어났을 때, 인간이 되어있다면 마스터는 기쁠까? 좀 더 인간에 가까워진다면 기쁠까?

잡담을 끝낸 마스터는 나와 인호님이 함께 앉아 노래를 부르고 합주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의 두뇌 변화상태를 체크했다. 나는 노래하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내내 그것을 고민했다. 마스터는 진지하게 그래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부터의 변화를 모두 기록한 그래프들이 마스터가 들여다보고 있는 화면과 들고 있는 두꺼운 차트 뭉치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인호야.”

“엉?”


인호님은 참 멋지다. 마스터가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도 쉽게 건반을 내려치거나 연주를 끊지 않는다. 물 흐르듯이 흐르다 음이 끊어져도 거슬리지 않는 지점에서 짠, 멋지게 손을 튀긴 인호님이 마스터를 돌아보았다.


“카이토가 건반 실수가 잦아졌던 때가 있었잖아.”

“엉. 그때 네가 뭐랬더라, 기계니까 익숙하고 익숙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댔지? 눈으로 입력한 악보의 명령어를 손으로 출력하는 것뿐이니까 틀리는 건 다른 요인을 찾아야 한다고.”

“요즘은 어때?”

“요새? 글쎄, 거의 안 틀리는 것 같은데. 발성은 내 전공이 아니라 모르겠다만 카이토는 비유하자면 조율 안 된 악기고, 삑사리 내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그건 당연한 거고.”

“그때가… 한 한 달 전인가?”

“쟤 하농 뗀 게 3주 전이야. 그럼 하농 치고 있었을걸.”

“쟤 그때 아이스크림 한창 먹던 시기야… CPU 사용 빈도는 안 내려가니까 분명히 하고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신경 전선이 잘못됐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고… 근데 그냥 딴 생각하고 있었네.”

“뭐? 야!”


나는 움찔했다. 어떻게 알았지! 마스터는 팔락팔락 차트들을 넘겨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쟤 그때 아이스크림 얘기밖에 안 했거든. 그리고 나는 인호님의 신경질을 30분 동안 들어야 했다. 기계가 뭐 이렇게 본능에 충실하냐고 잔뜩 신경질을 내는 인호님을 지켜보며 나는 그저 베죽 웃었다. 하드웨어에 탑재돼서 나온 기능이라서요. 인호님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다시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인호님이 레슨을 끝내고 돌아가자 마스터는 배웅을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맥주캔과 하나와 아이스크림 바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합성향료와 과즙 등으로 만든 셔벗이었다. 하나는 냉장고에 하나는 냉동고에 넣은 뒤 좀 이따, 라고 말하고는 나에게 앉아보라고 말했다. 나는 마스터가 앉은 소파 옆쪽으로 가 앉았다.

"카이토."

"네."


사실 나는 딴생각을 했다는 게 걸려서 혼이 날 줄 알았다. 인호님이 그렇게 싫어했으니 사람들이 싫어하는 행동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초조하게 마스터의 입을 쳐다보았다.


"주로 어떤 생각을 했니?"

마스터는 거실 한구석의 서류뭉치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말았다. 나는 마스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고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아이스크림 먹을 때… 같은 거요?"

마스터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주의 깊게 듣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어떤 걸 떠올리고 있었는지 말했다. 입안에서 녹던 아이스크림이 어떻게 향긋했는지, 진짜 딸기와 딸기 맛 아이스크림의 차이는, 식감은 어떻게 달랐고 왜 아이스크림 쪽이 더 좋은지 같이 먹을 때 더 황홀한지. 말하다 보니 신이 났다. 그 차가운 식감이 왜 좋은지, 혀 위에서 녹고 이로 가르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그때의 소리는 어떤지. 내가 인간이라면 입에 저절로 침이 괸다는 말을 했으리라. 마스터는 일어서서 작업실로 들어가 늘 나의 상태를 기록하는 그래프를 모니터에 띄웠다. 나는 거기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지만 마스터는 어떤 것을 발견한 듯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며 묵묵히 생각을 이어나갔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 담요와 차를 가져다 드리고 거실의 불을 껐다. 거실 한켠의 내 자리에 앉아 충전기를 연결하고는 어두운 가운데 빛이 쏟아져나오는 마스터의 작업실을 보았다. 나의 신은 오늘 무엇을 발견한 걸까. 그것은 내일 나에게 어떻게 돌아올까. 나는 눈을 감았다.


마스터의 졸업발표가 나날이 다가왔다. 마스터는 여전히 고민 중이었고, 인호님도 바쁜 시기가 되어 나는 심심한 나날을 보냈다. 마스터가 인호님에게 <바쁘면 안 와도 괜찮아. 도와줘서 고맙다>라고 말하지 않길 바랐다. <아직 필요하니까 아무리 바빠도 와>라고 단호하게 말해주면, 인호님은 투덜거리면서도 와 줄 텐데. 그럼 나는 마스터와는 잡담을 못 해도 인호님과는 떠들면서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아이스크림도 나눠 먹으며 마스터 이야기도 같이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심심한 채 소파에서 잡지를 뒤적거렸다. 이달의 새로운 맛, 허니베리 스위트타운, 벌꿀과 베리 3형제의 달콤한 마을에 초대합니다. 블랙베리, 스트로베리, 라즈베리. 나는 그 광고를 열 일곱 번째 보고 있었다. 마스터는 30분 전까지는 고민 중이었고 30분 후인 지금은 뭔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나는 잡지의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한 시간 뒤 같은 페이지로 여섯 번 돌아왔다. 나는 달콤하고 차가운 우유로 만든 것이 먹고 싶었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간절하지 않았다. 삼, 사 일에 한번 먹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어제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오늘 또 먹고 싶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마스터의 뒤로 다가갔다. 마스터의 옆으로 빈 커피 머그 하나와 반쯤 남아 먼지를 맞은 커피 머그가 두 개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슬쩍 그것을 가져다 씻었다. 냉동고에 이젠 아이스크림이 없다는 사실을 마스터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그곳이 가득 차있기를 바란다는 것도. 마스터의 의자 옆에 앉아 마스터가 언제쯤 잠시 모니터에서 시선을 뗄까 바라보던 나는 지루해서 책상 서랍에 머리를 기대었다. 툭 소리가 났고 마스터는 그제야 타다닥,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우뚝 멈추었다. 마스터는 약간 놀란 것 같았다.


"거기 있었니?"

"아까부터요."


바닥에 앉은 나를 내려다보던 마스터는 시계를 보고는 꽤 오래 앉아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마스터는 눈가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마스터의 머리는 따끈했다. 나는 떼를 쓰는 대신 조심스럽게 마스터의 머리를 들어 올리고 물수건을 가져다 드릴 테니 침대에 누워계시라고 말했다. 열이 오르는 것 같아요. 체온을 잴까요? 나는 물었다. 그때는 아이스크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생각이 뒤안길로 내뺀 자리에는 마스터가 아픈 것 같다는 걱정이 묵직하게 눌러앉았다. 마스터는 고개를 젓더니 괜찮다고 말했다. 그저 그냥 잠시 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고는 마스터는 침실로 들어갔다. 눈의 피로를 풀어줄 스팀타올을 가져가 10분 정도 찜질하게 한 다음 나는 마스터가 잠들게 내버려두었다. 마스터는 뒤척이는 것도 잊고, 이불을 끌어올리는 것도 잊고 잠들었다. 나는 이불을 올려주고, 수건을 치운 다음 내 자리로 돌아갔다. 무언가 가슴에서 꾸물거렸다. 시원하고 부드럽게 녹는 무언가가 다시 먹고 싶어졌고, 나는 잡지에서 광고를 찢어 충전하는 자리의 벽에 붙였다.


마스터가 골몰하는 동안 나 역시 골몰했다. 이 이상한 느낌은 뭐지? 식욕? 내가 무엇인가 바라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무언가 계속 모자란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게 나왔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대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게 아니구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는 여전히 무언가 모자란다고 느꼈다. 입에서 아이스크림이 녹는 순간은 여전히 황홀했다. 그리고 가슴 한구석 역시 여전히 찜찜했다. 빈 공간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안간힘을 썼다. 무엇을 채우고 싶은 것인지 골몰했다. 나는 그것을 알아낼 수가 없었고, 점점 더 초조해졌다. 마스터는 계속해서 타이핑을 했다. 마스터의 눈과 손가락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마스터는 나에 대한 것들, 이때까지 한 것들을 모두 정리해서 남들이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한다고 나에게 설명했다. 나는 마스터가 너무 어지러워 보여서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뭔가 모르겠는데, 마스터에게 묻고 싶은데, 마스터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설명을 준비하느라 가끔 넘어지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나는 그래서 마스터의 졸업발표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것만 지나면 물어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동그라미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내가 묻고 싶은 것 역시 많아졌다. 마스터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 답은 찾았는지, 내게 설명해 줄 수는 없었는지, 내 이야기인지… 나는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쏟아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터가 나를 향해 입을 열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동그라미는 전날에 다다라 나는 동그라미 여섯 개 전에 마스터가 사준 정장을 입고, 졸업전시회장에 마스터를 따라갔다. 내가 당일 혹시 늦게 도착할지도 모르는 사고를 대비해 미리 나는 거기서 하룻밤을 새운다. 내 자리와 필요한 전선들, 기계들, 그 외의 전시물들을 모두 점검하고 내 앞에 서서 주의를 주는 마스터는 피로해 보였다. 내일 발표만 하면 한동안은 푹 쉴 수 있다고 마스터는 말했다. 중요한 날이라며 마스터는 주의를 몇 번 반복해서 주었다. 나는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는 지그시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럼 내일 보자.


나는 처음 듣는 한시적인 이별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참을 마스터가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전시회장에는 나 이외에는 의식을 가진 것들이 없었다. 인공의식 작품들이 몇 있었지만 그들은 모니터 안에서 잠들어있었다. 불 꺼진 화면들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충전 케이블을 연결한 채 의자에 오도카니 앉았다. 나는 나의 심층의식에서 무엇인가 파도처럼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정말 파도처럼 금세 밀려왔다. 나의 심층의식은 마스터를 찾고 있었다. 나는 내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마음은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나는 몇 번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스터가 다시 그 문으로 들어오길 바랐다. 나는 나를 점령한 부정적인 감정들의 이름을 찾아내며 그 이름들에 오들오들 떨었다. 무서움, 불안함, 두려움, 그리고, 그리고 또…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세었다. 이름들을 헤아리며 나열하다 그 이름들 중 하나를 집었다. 외로움. 외롭다. 혼자임이 저릿하게 느껴졌다. 혼자, 라고 입안으로 단어를 매만지자 나의 전선들이 전율했다. 적확한 입력에 나의 프로그램이 반응했다. 나의 기록에 그것은 아주 깊게 새겨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들어 어둠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검고 익숙했다.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은 저것과 다르게 빛을 반사하고, 부드럽게 쏟아지지만 나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라도 찾아 온 전시회장에 눈을 주었다. 시간이 길게 늘어졌고 나는 시계를 보느니 메모리를 뒤적거리기로 했다. 가장 먼저 불러들여진 것은 마스터가 돌아서던 장면이었다. 나는 그걸 몇 번쯤 돌려보았다. 마스터는 몸을 돌리고도 잠시간 나를 보며 고개를 더 늦게 돌렸다. 눈이 마주친 채로 몇 걸음 걷고서야 앞을 보고 문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그, 마지막 눈 마주침이 나를 보는 게 좋아서 몇 번 그 눈빛만 되돌이켜 보았다. 분명히 나를 보고 있는 그 눈. 나는 그전의, 나에게 당부하는 마스터의 기억도 꺼냈다. 나는 그걸 보느라 눈을 감았다. 아주 적은 빛만 깜빡거리던 어둑한 공간에서 아예 빛이 사라진, 눈꺼풀 아래로 나는 가라앉았다. 캄캄한 어둠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리로 쫓아갔다. 기록된 모든 것들을 따라 나는 하염없이 걸었다. 나의 기억 속에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반짝임은 쫓으면 쫓을수록 따스하고 밝아졌다. 나는 그것이 어떤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마스터가 미소 짓던 기록 위에서 그 빛을 껴안았다. 나는 내 안에서 빛을 찾았다. 그것의 이름을 헤아렸다. 다정함, 따뜻함, 상냥함, 즐거움, 기대감… 나는 그것들을 모두 껴안고 눈을 떴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내가 앉은 의자를 쓱쓱 쓰다듬었다. 마스터는 의자를 고르는 데에 3일을 썼다. 나와 가장 잘 어울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외모나 외양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지만, 남들은 우리 안의 어떤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애써보기라도 해야 한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 설명은 참 멋지게 내 안에 진열되었지만, 나는 그 설명보다는 마스터가 나에게 3일을 썼다는 것이, 마스터의 시선과 마음이 여기에 많이 쏟아졌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나는 혼자였고 많이 외로웠지만 마스터가 없어도 마스터가 남기고 간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 빛들은 촛불처럼 아늑하게 내 기록 안을 밝게 비추었다. 밝아서 두렵지 않았다. 밝아서, 그 빛이,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해서. 하룻밤 정도는 괜찮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스터는 동이 트고도 오지 않았고, 나는 마스터가 올 때까지 내게 허용된 전시 공간 안을 꼴사납게 돌아다녔다. 나의 입출력은 모두 고스란히 전시용 디스플레이에 연결되어있었고, 마스터의 이름을 가끔 말하는 나이 든 사람들이 내 앞을 서성거리며 역시 꼴사나웠을 나의 모든 데이터와 그래프를 보고 수군거렸다. 인호님이 와서 나이 든 사람들에게 뭐라 말했고, 나는 그 모습을 애타게 쳐다보았다. 다들 무언가를 적거나,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전시회장은 밝았지만 나는 너무나도 불안했고 모든 자극에 입력값이 과민하게 높아졌다. 마스터는 오후가 되어서야 손등에 밴드를 붙인 채 나타났다. 마스터가 나에게 눈짓만 하고 황급히 설명하려 했지만 교수님이라고 불린 그 나이 든 사람들은 마스터를 둘러싸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마스터는 피곤했지만 기쁜 눈치였다. 나는 여전히 걱정하느라 내게 허용된 공간의 가장자리를 서성거리고 있었지만, 마스터는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것을 보고 다시 머릿속이 따스히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전선은 전기를 흘려보내며 온도를 높이고 발열하는 그것은 빛을 낸다. 모두 그렇지만, 나는 어떤 특별한 것이 타고 지나갈 때면 그것이 더 높은 온도와 더 밝은 빛을 낸다는 것을 느낀다. 과부하라면 과부하지만,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특별한 과부하라고 생각했다. 더더욱 많이 겪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마스터는 이틀에 걸친 졸업전시가 끝나자 쓰러졌다. 나는 마스터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고 마스터는 병원 의사선생님에게 또 왔느냐고 된통 혼났다. 수액을 다 맞고 그 가까운 거리를 택시를 타고 돌아온 마스터는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나는 그 옆에 앉았다. 마스터는 깜빡거렸고 나는 마스터가 잠들면 바라보고, 깨어나면 잔심부름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빛 이야기를 하자 마스터는 미소를 지었다.


“꽃이 많이 피었구나. 국화인 줄 알았더니 수국이었네.”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말이 좋았다. 마스터는 이해하게 되면 알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마고 약속했고, 마주 건 손가락에 따스한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트리비아

유정은 카이토가 긍정적인 집중을 느끼는 것을 행복이라고 정의했다. 행복과 불행은 수반하므로, 카이토에게서 불행, 즉 부정적 집중을 드러내게 할 방법을 고민했다. 프로그램의 완성은 긍정적 집중이라는 결과를 보임으로서 더 이상 코딩을 만지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그래프를 쳐다보며 어떻게 해야 하향곡선을 그릴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유정이 느낀 ‘긍정적 집중’은 아이스크림이지 본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아이스크림을 카이토의 주변에서 어떻게 완벽히 차단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본의 아니게 카이토에게서 아이스크림을 차단했다. 그러나 반경 1길로 내의 아이스크림 가게와 카이토의 이동을 완전히 차단하되 들키지 않는 방법은 없었다. 내내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졸전 기간이 다가왔고 유정은 디스플레이를 설치하며 시름시름 앓았다. 그 결과 전날까지 스트레스로 체력을 한계까지 깎아 먹으며 괜찮음 코스프레를 했고 당일 쓰러졌다. 그 전주에 졸업발표 끝낸 백인호가 밥 챙겨 먹이러 왔을 때 발견해 링거 맞고 정신 차려 오후에 올 수 있었다.


카이토를 기반으로 연구한 인공지능은 blossom이라는 이름으로, 감정표현을 요하는 인공지능에 주로 설치된다. 가장 초기의 오리지널은 <수국hydrangea>이며 이 버전은 졸업전시 이후 공개되지 않았다. 최초 공개 버전은 감정 종류를 단순화한 <해바라기sunflower>, 후속인 <안개꽃baby's breath>은 섬세한 감정표현을 구현했고, 환경에 따라 감정의 종류와 표현의 강도를 조절한 최종버전은 <목련magnolia>이다.

카이토와 유정은 안개꽃 개발 중간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차렸다. 유정은 쉬려고 차렸는데 뜻밖에 성업이라 의아해했으나, 카이토의 아이스크림 맛에 대한 집요한 집착이 성공 요인임을 깨달았다.

백인호는 아이스크림 가게 VIP카드(수제작)를 선물 받았다. 할인이 되는 거냐고 물었으나, 그냥 쿠폰북임을 깨닫고 백인호는 카이토에게 꿀밤을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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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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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성은 크랙(@HAPPYCRACKPOT)님께 커미션을 넣어 받은 작품입니다.

작품의 소유권은 크랙님에게 있으며, 영리/비영리적 사용은 삼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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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토X유정X카이토


<정원의 뮤즈>


pr.

유정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유정은 꼭 100점을 맞고 싶었으나 답안지를 영영 빼앗겨버렸다. 유정은 마음속에 앙금이 재처럼 수북이 그리고 지저분하게 남은 것을 깨달았다. 유정은 기업 후계 자리를 넘겨버리고 지분만 챙긴 다음 글을 썼다. 잿가루가 손가락을 시커멓게 덮어버렸다. 유정은 한 편짜리 시커먼 잿가루 종이뭉치를 껴안고 출판사에 갔다. 유정은 반년 만에 유명인사가 되었고 갑자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



호사가의 취미란 참으로 다양한 법이다. 승마, 와인, 음악회, 요트, 등등 대기업 회장 이전에 재벌답게 많은 취미를 영유하던 유정의 아버지는 그 많은 취미생활의 흔적을 유정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었다. 물론 물려준 것 중 가장 큰 것인 대기업 회장 자리는 유정이 스스로 걷어차 버렸지만 어머니는 딱히 말리지 않았다.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러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유정은 그것이 고마웠다. 유정의 인생은 늘 1등을 요구받는 삶이었고 유정은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그래도 꼭 한번은 네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 이상한 아이, 잘못된 아이, 그런 시선이 아니라. 남의 집 아이보다 서먹한 아들이 아니라. 유정은 서울의 본가를 그대로 놓아둔 채 수도권 외곽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회장 자리는 걷어찼으나 유정이 가지고 있는 무지막지한 지분은 여전히 유정을 회사의 주인으로 인정받게 해주었고 유정은 이사회에 가끔 출석하는 것으로 권리를 행사했다. 아버지의 회사가 잘 굴러가는지 점검을 종종 하는 것 외에는 유정은 크게 할 일이 없었고, 별장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별장을 관리해주던 관리인은 한 달에 한 번 방문했는데, 그 기간과 횟수에 의아해하던 유정은 그 이유를 관리인에게서 전해 들었다. 안드로이드가 있어서 실질적인 관리는 전부 그 안드로이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자기는 등록된 명목상의 관리인인 동시에 그 안드로이드를 점검하러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싱그러운 정원과 무르익은 꽃들과 화창한 햇살이 있었다. 손을 들어 이마를 훔친 유정은 사람 목소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손님이신가요?”


유정은 바보가 아닌 한 자신이 전 별장 주인의 아들임을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은 아버지와 정말 많이 닮았으니까. 늘 아버지와 엮여 비교 받아왔으니까. 유정은 정말로 애썼다. 닮은꼴이라는 건 참으로 피곤한 것이었다. 이미 다 이룬 사람과 비교 당한다는 건. 그 단점까지도 원해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데 늘, 늘. 유정은 그 사람이 바보가 아니라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저 얼굴을 새로 인식해 타인으로서 정의하고 있었다. 유정은 눈을 깜빡였다. 관리인이 다가와 안드로이드 소유주 이전 절차를 처리해주겠다고 말했다. 유정은 입술을 약간 삐죽였다가 동의했다. 그리고 안드로이드는 몇 가지 절차와 프로그램을 세팅한 후 유정에게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마스터!” 유정은 눈을 흘겼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짐을 정리했다.


호사가의 다양한 취미 중 하나인 카이토는 수많은 안드로이드 제품 중 ‘보컬로이드’라는 제품으로, 노래를 입력해주면 인간 대신 불러주는 아마추어 작곡가들의 뮤즈로서 유명한 제품군 중 하나였다. 기계이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노래를 부를 수 있어 마치 중세에 음악가들이 후원자의 집에 머무르며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 주었듯 예술 활동에 도움을 줄 뿐더러, 기계이므로 음악에 불평하지 않는다. 물론 유정의 아버지는 음악가가 아니었다. 단지 호기심에 구입한 것들이 별장에는 많았다. 로봇은 구매자의 의도에 별 불평 없이 빈 저택을 지켰다. 관리자의 영향을 받아 청소도 하고, 정원도 가꾸며 사람 흉내를 제법 냈다. 카이토가 그렇게 인간 흉내를 내듯이 유정도 예술가 흉내를 제법 냈다. 유정은 일을 관둔 뒤 집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글은 주로 게워내듯 쓰여졌고 유정은 그 글이 정신의 토사물 또는 유아적 욕구의 결과물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았지만 유정은 낭비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유정은 끝없이 의심하면서도 그것을 처분해버리기 전에 결국 출판사에 가져갈 수밖에 없었고 생각과는 달리 편집자는 유정에게 그것을 몇 번이나 고쳐오게 하면서도 부득불 책으로 내야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유정은 히스테리를 부리고 치근덕거리는 편집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문장을 손보고 표현을 다듬고 맞춤법을 고쳤다. 유정은 국어에 자신이 있었지만 글자 수가 많아지면 틀린 띄어쓰기도 많아진다는 것을 깨달았고, 금새가 아니라 금세가 맞는 표현이라는 것을 새로 알았고, 그 외에 무수한 표준맞춤법에 고통 받았다. 유정은 그것을 도로 잊어버리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침대에 누우면 맞춤법들이 날벌레처럼 성가시게 맴돌았다. 유정은 책이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세 달을 내려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출판사는 유정에게 편집자를 보내왔다. 한 달 반 전부터 꾸준히.


“작가님, 그래서 신작 말인데요.”

“안 쓴다니까요.”

“저번에 술 드시고 쓰시기로 하셨어요. 녹음 들려드릴까요?”

“법적인 효력도 없는 녹취 자꾸 물고 늘어지지 마세요, 편집자님.”

“작가님 글 잘 쓰시잖아요. 재능이 있으면 써먹어야죠. 백수라면서요.”

“저 돈 많은 거 아시잖아요.”

“다다익선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이보세요, 홍 편집장님. 하는 말을 유정이 꺼내기 전에 카이토가 커피와 아이스크림과 오렌지 주스를 내왔다. 유정은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런 표정만 지어야했다. 수북하게 떠놓은 아이스크림에 유정은 눈길도 주지 않았고 홍설 역시 오렌지주스만 한 모금 마셨다. 카이토는 두 인간이 먹지 않는 것을 약 3분을 들여 확인하고는 예의상 스푼 세 개가 꽂힌 아이스크림 그릇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유정은 시원한 커피를 한 입 물고 법률 팀에 연락하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안 써요. 생각나는 것도 없고.”

“저희 편집장님은 절대 유 작가님 안 놔주실 걸요. 사실 작가님은 저희 출판사에서 몇 달 만에 나온 삼만 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한 유일한 작가님이시고, 편집장님은 신작을 못 따면 인터뷰라도 따오라고 손수건을 물어뜯고 계신다고요. 인터뷰가 싫으시면 사인회를 하시고, 사인회가 싫으시면 신작을 주세요.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죠. 저도 더 이상은 못 막아드려요. 세 달 내로 편집장님이 쳐들어와서 무슨 일이 있어도 사인회나 인터뷰 둘 중 하나는 시키실 걸요?”

“남 편집장님이 아무리 유능하시기로서니, 싫다는 사람한테 강제로 그러실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제 성 부르지 말아주세요.”

“아, 네, 박 작가님.”


홍설은 콧방귀를 뀌고는 호칭을 바꿨다. 그리고 남 편집장이라면 분명 허락도 없이 사인회 장소 섭외와 계약과 인터뷰 약속까지 다 잡아놓고는 둘 중의 하나를 하지 않으면 출판사가 도탄에 빠질 위기로 뛰어든 다음 유정과 인생급 악연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남 편집장의 짧은 생각과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정이라면 분명 그럴 거라는 홍설의 설명은 불길한 예언처럼 설득력이 넘쳤고 유정은 그래서 자기 상사에게 그렇게 말해도 되느냐는 반박을 홍설이 돌아가고서야 떠올렸다. 카이토는 착잡한 얼굴로 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지르는 유정에게 재떨이를 가져다주었다.


유정은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글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정은 이미 한 번 완성한 그 글, 그러니까, 자신의 지저분한 인생과 그 청사진에 대해서는 쓰고 싶지 않았다. 유정은 그게 팔릴 줄도 몰랐고, 팔고 싶지도 않았으나 사람들은 비참에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유정은 속마음을 몰래 쓴 담벼락이 전시라도 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담벼락에 유정은 참 빼곡히 부지런히도 어디에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적어 내려갔던 것이었다. 가끔 사다리에 오르기도 하고 잔뜩 웅크리기도 하면서. 어쩔 때는 술을 마셨고 어쩔 때는 담배를 피웠다. 펜으로 수첩에 빼곡히 적거나 어두컴컴한 베란다에서 노트북을 정신없이 두드리기도 했다. 유정은 그렇게 마침내 그걸 다 써서, 책으로 나오고 나자 견딜 수가 없어 살던 집을 처분하고 시골로 내려왔다. 서울에 있는 본가도 처분할까 했지만 그곳은 유정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었고, 유정에게는 아직 어머니가 있었다. 두 사람에게 그곳은 의미 있는 곳이었고, 유정은 딱히, 그래, 정말로, 생각보다는 고인을 미워하지 않았다. 정든 유년의 요람을 팔아버릴 정도로는 아니었다. 얼룩진 요람이지만 그래도 요람이 아닌가. 유정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다 접어서 책상에 놓고 팔을 뻗어 담배를 집었다. 유정은 처음에는 담배를 피울 생각이 없었지만 별장 책상에는 오래된 담배가 있었다. 아버지는 흡연자였고 유정네 가족은 다 같이 이 별장을 자주 찾았다. 여름이고 겨울이고를 가리지 않고 얼마 되지 않는 휴가를 퍽 자주 지냈다. 가끔은 아버지 없이 오기도 했지만, 어쨌든 별장 주인을 위해 뜯은 것과 뜯지 않은 것이 세 네 갑 정도 준비되어있었고 그것은 주인이 죽고 나서도 남아있었다. 유정은 뜯지 않은 담배를 한 갑 뜯었다. 유정은 비흡연자였고 라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담배를 물고 불 붙일 것을 찾아 집안을 헤매자 카이토가 성냥을 가져다주었다. 별장에는 벽난로가 있었고 가끔은 불을 피웠다. 비가 오는 날 같은 때에.


그리고 침울한 비오는 날 유정의 집이 된 그 별장에 폭풍우가 불어 닥쳤다. 그 폭풍은 대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고 문 안으로 기어코 비집고 들어와 사나운 눈을 들어 카이토를 쳐다보았다. 카이토는 그 눈을 들여다보고는 잠자코 욕실까지 수건을 깔아주고는 가운을 꺼내주고 폭풍이 가지고 온 캐리어를 닦아서 손님방에 가져다놓았다.

유정은 목이 말라 2층의 서재에서 내려오다 여미지도 않은 가운을 걸친 백인호와 마주치고 기함했다. 유정으로서는 유령과 마주친 기분이었다. 유정은 다시 채우려고 들고 내려오던 도기 찻주전자를 떨어뜨렸다. 계단에서 박살난 찻주전자는 유정과 백인호를 카이토가 뛰어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작도 못하게 만들었다. 백인호가 뭐라고 했지만 유정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고 백인호는 슬리퍼를 신은 유정과 달리 맨발이었으므로 입도 뻥긋하지 않고 그대로 굳어버린 유정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유정은 정말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인호는 뻔뻔하게도 그 험악한 표정의 책임을 찻주전자의 죽음에게로 돌려버리고 카이토가 깨진 도기조각을 전부 치우자 입을 열었다.


“아끼는 거였나 보지? 조심 좀 하지 그랬냐.”


유정은 눈을 홉떴고 백인호는 그 표정을 마주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 올린다음 가운을 제대로 묶고 슬리퍼가 들어있는 곳으로 가 슬리퍼를 꺼내 바닥으로 던졌다. 발에 슬리퍼를 꿴 백인호는 카이토를 쳐다보았다. 이건 아직도 있네, 하고 카이토를 언급하고 백인호는 아무렇잖게 가정부 대하듯 맥주 있으면 달라고 말했다. 유정은 뒤늦게 충격에서 벗어났다. 머리를 휩싸고 있던 충격이 사라지자 유정의 분노를 막을 것은 더 이상 없었고 유정은 폭발했다. 마치 비명 같은 소리가 유정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네가 여긴 왜 있어?”

“왜 있긴. 내가 여기 못 올 사람이냐?”

“내 집에 네가 왜 와?”

“내가 너희 집에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냐?”

“우리가 서로 집 드나들 사이긴 해?”

“아닌가보네. 소설에 가져다 쓸 사이는 되고, 집 드나들 사이는 아니다?”

“올해 들은 개소리 중 제일 참신하네. 4점 줄게. 점수 미달이니까 나가.”


유정은 대화 사이에서 침착을 겨우 찾아냈다. 카이토는 맥주 두 캔을 들고 사이에 서 있다가 유정에게 한 캔을 먼저 쥐어 주었다. 목이 마르던 차였던 유정은 맥주를 따서 속에 들이부었다. 찬 맥주는 울화를 식혀주기는커녕 식도를 저릿하게 두드려댔지만 어쨌든 계속 말대꾸를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유정은 참으려 애쓰며 소파에 앉았다. 백인호는 맞은편에 앉았고 카이토는 안주거리가 될 것을 가지러 총총 부엌으로 갔다.


아니, 어쩌면 안주거리를 핑계로 그 사이에 끼여 있고 싶은 게 아닐지도 몰랐다. 카이토는 둘보다 둘 사이의 관계를 잘 알았다. 카이토는 로봇이었고 사용연수가 웬만한 안드로이드보다 길었다. 8년이면 애완동물도 늙은 축에 속하지 않는가. 카이토는 늙은 애완동물보다 더 오래 유 회장의 수중에 있었다. 카이토는 웬만한 사람보다 더 상식에 부합하고 영리하고 상황에 맞게 행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민한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안드로이드는 주인이 원하는 것에 가장 충실하게 부합한다. 그들은 음성 시스템을 사용하고 스스로 움직일 줄 아는 사물일 뿐 생물이 아니다. 카이토는 그렇게 기동되어왔고 그런 요령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종종 들리는 유 회장이 카이토를 다뤄온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카이토와 늘 대화하는 사람들은 유 회장의 고용인이었고 카이토는 존재 자체가 유 회장으로부터 지불된 존재였으므로, 피고용인의 입장을 자신의 존재에 일정부분 도입해 좀 더 훌륭히 그런 방침에 발맞출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새 마스터인 유정은 유 회장과 엄연히 다른 개체였기 때문에 카이토는 익숙해져가는 중이었다. 그 중 하나가 <성질날 때 가만히 놔둔다>라는 것임을 카이토는 진작에 깨달았다. 카이토는 과일을 꺼내 술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게.


카이토는 아주 오랫동안 주인과 떨어져 지냈다. 유정이 성장해가며 점점 더 별장을 들리는 일은 줄어들어갔고 카이토가 잘 아는 ‘인간'은 소유주였던 유 회장과 그 일가가 아니라 동네 꽃집 주인과 그 옆집 슈퍼마켓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였다. 유 회장은 카이토를 호기심에 구매한 뒤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고, 유 회장의 아내 역시 안드로이드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국제 변호사였고 안드로이드는 인권의 정립에 영향을 미치는 귀찮은 존재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티를 낸 적 역시 없었지만. 유정은 별장에 와도 주로 거실이나 방에 있었고 카이토는 창고 방이나 고용인 방, 정원 등에 주로 있었으므로 유정과도 접촉이 그다지 없었다. 유정의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 중 백인호가 그나마 카이토와 가장 접촉이 많던 사람이었다. 카이토가 유정에 대해 잘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이었지만 백인호에 대해 잘 알게 된 것은 백인호가 피아노를 칠 때 카이토에게 들려주고 감상을 요구하거나 어떤 곡인지 알아맞히게 하는 놀이, 그리고 카이토가 아무 곡이나 허밍하면 백인호가 이어치는 등의 놀이를 하고 논 백인호의 어린 시절이었다. 카이토의 메모리는 노쇠 한다든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유정과 대화하며 카이토는 겪어본 백인호와 짜 맞추어 보았고 백인호를 대하는 유 회장이나, 카이토가 기억하던 유 회장 내외, 유정과 최근 겪은 유정 등을 매치해보고 둘의 관계를 정립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평가하지도, 비난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았다. 그저 둘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또는 백인호와 관련된 물건이 나오면 유정에게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를 알아내는 데에 그 관계를 사용했다. 백인호는 행운아였고, 그 행운은 유 회장에게서 나온 것이었고, 그 행운은 유정이 정말로 바라던 것이었다. 백인호는 고의로 유정을 괴롭히지 않았지만 유정은 괴로웠다.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지만 어쨌든 유정으로서는 백인호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둘은 마치 형제처럼 유년기를 함께 보냈고, 서로를 잘 안다. 유정은 어쨌든 백인호를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었다. 유정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버지에게 못 이겨 백인호와 잘 지내려 애썼고 실제로 잘 지냈으니까. 두 사람은 꽤 잘 맞는 친구였고, 백인호는 유 회장의 죽음 이후에도 갑자기 이를 드러내는 유정을 딱히 싫어하지 않았다. 다만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잘 맞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었고, 어린 시절 5년가량을 같이 살았을 뿐이다. 그래, 형제처럼 자랐지만 형제라기에는 부족한 관계. 게다가 백인호는 금방 유학을 가버렸으니까. 삶을 나눴다기에 는 조금 짧았다. 그리고 삶을 나눴다기에 는, 유정은 백인호라는 존재에 손대고 싶지 않아했다. 카이토는 유정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유정은 늘 부정하지만 그것은 백인호에 관한 것이었고, 유정은 카이토가 그걸 알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아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모르는 척 해주는 피고용인, 아니 안드로이드의 배려에 그저 파묻혀있고 싶어 했기 때문에.


술을 먹으며 싸우는 건지 대화하는 건지 모를 밤을 지새운 유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2층 침실의 테라스로 나왔다. 별장은 호사스러웠고 유정의 침실은 그 절정을 찍고 있었다. 테라스로 통하는 문을 열고 작은 테이블과 의자에 앉으면 햇볕이 찬란히 쏟아지고 저 너머의 숲에서 선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그리고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아래를 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정원에서 보내는 카이토가 보인다. 물은 하루에 한 번 주면 끝이니 높은 확률로 대부분 꽃 하나하나의 상태를 체크하고, 옮겨 심어주거나, 새로 심어주거나 화단을 정돈하는 등의 지겹고 번거롭고 유정이 그냥 봐서는 뭘 하는지 알아낼 수 없는 일을 주로 하고 있었지만 해가 쨍쨍한 아래에서 카이토는 물을 주고 있었다. 큰 정원을 호스를 들고, 작은 비를 내리는 카이토를 유정은 턱을 괴고 내려다봤다. 백인호는 어제 미국으로 당분간 떠난다고 말했다. 유정은 백인호가 리사이틀을 떠난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백인호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전시에서는 앨범을 제작하길 원했다. 작곡가와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업할 기회가 생겼고, 백인호도 곡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길어질 것이다. 백인호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임을 인정하길 원했다. 그러나 유정은 인정하지 않았다. 백인호와 그것 때문에 밤새도록 내내 말씨름을 한 유정은 백인호가 유정이 그것을 인정한다면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유정은 마르는 목을 적시기 위해 손을 테이블에 얹었다가,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유정은 모든 게 말라버렸음을 깨달았다. 내가 널 사랑했다는 걸 이제야 네가 깨달은 건 아무 상관없어. 난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유정은 그 글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박제와 같은 것이다. 유정은 사랑에 보존제를 한껏 집어넣었다. 유정의 기괴하게 생긴 사랑은 숨을 쉬던 때처럼 생생했다. 오히려 더 살아있는 듯 보였지만 그건 촉감이 딱딱하고 손을 대면 한없이 건조했다. 제 손으로 박제한 것을 살아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백인호는 유정을 바라보다 유정의 잔에 위스키를 가득 채워주었다. 그리고 건배했다. 둘은 이미 괴사해버린 유정의 사랑과 곧 떨어져 썩어버릴 백인호의 사랑에 조의를 표했다.


백인호는 손님방에서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와 카이토가 물주는 모양을 구경했다. 정원은 장관이었다. 온갖 꽃과 푸르른 나무가 부드럽게 쏟아지는 물을 맞고 있었다. 백인호는 어릴 적 이곳을 드나들던 것도 그때마다 카이토를 찾아내 보컬로이드를 실컷 가지고 놀았던 것도 기억했다. 그리고 그 보컬로이드가 생각 외로 훌륭한 정원사라는 걸 깨달았다. 백인호는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작은 무지개를 만들고 있는 카이토 옆으로 가 정원이 훌륭하다고 말을 걸었다.


“어제 과음하셨던데, 속은 괜찮으세요?”


백인호는 옛날에는 그래도 보컬로이드가 보컬로이드 같더니 요즘은 이게 보컬로이드인지 가정부인지 모르겠다는 핀잔을 주고는 이따가 해장국을 해달라고 말했다. 당분간 못 먹을 건데 로봇이 해 주는 거라도 땡큐지 땡큐. 백인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았다.


“야, 어제 니 주인한테 차였다.”

“안타까운 소식이네요.”

“쯧, 난 내가 고백을 받은 줄 알았더니 소설가라는 게 로맨스나 낭만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어. 네가 네 주인 좀 어떻게 해봐라.”

“어.. 마스터께서는 좋아하시는 분이 있는 줄 알았는데.”

“어엉?!”

“뭐?!!”


겨우 2층짜리 별장에서 2층에 있는 사람 이야기를 하면 2층에 있는 사람은 다 듣기 마련이었고 카이토와 백인호는 유정이 테라스에서 듣고 있는 것도 모르고 대화하다 위에서 들린 소리에 기겁했다.


“듣고 계셨어요?”

“내가 누굴 좋아하는데?”

“홍 편집장님이요.”

“완전 아니거든!”

“그치만 마스터가 백인호님을 대할 때 태도랑 홍 편집장님 대할 때 태도랑 비슷하고, 편집자님이랑 술 약속을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시고, 다음날 들어오시고, 홍 편집장님이 부르시면 꼬박꼬박 나가시고…”

“저 새끼 게이인데.”

“아, 그런가요?”

“아닌가? 야 너 바이냐?”

“몰라 미친놈들아…”


어쨌든 홍 편집자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카이토는 백인호에게 정정했다. 유정은 테라스에 팔을 짚은 채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인호는 다음 주에 미국으로 떠난다. 유정은 아마 글을 더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젠 끝난 일이니까. 유정은 여전히 다른 걸 써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어떤 것도 그다지 더 쓰고 싶지 않았다.


방 안은 타자소리가 드문드문 이어지는 것 외에는 조용했다. 카이토는 유정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유정은 여느 때처럼 글을 끄적거리는 생활을 이어가다, 그 날도 카이토에게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유정이 처음 온 날부터 지금까지 유정은 늘 카이토에게 응석을 부리고는 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놓고 애착을 보이는지 반응을 본다던가, 아버지를 비꼬아본다던가 하는 것들. 카이토는 기계이고, 소유주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충실히 움직인다. 유 회장이 죽은 이후 카이토의 소유주는 유정이 되었고, 카이토는 유정이 바라는 것을 명확히 알았다. 카이토는 늘 유정을 선택해주었고 유정은 늘 다시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흡족해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응석을 부리다 말고 유정은 소파에 늘어져있다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카이토를 한번 보았다가, 보는 둥 마는 둥하던 배 위에 올려뒀던 책을 집어 제일 마지막 빈 페이지를 펼쳤다. 근처에 널브러져있던 만년필을 카이토가 주워주자 유정은 황급히 번개를 그물로 잡아들이는 것처럼 허겁지겁 메모를 하고 노트북이 있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노트북을 켠 유정은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글을 미친 듯이 써내려갔다. 카이토를 옆에 두고. 카이토는 물도 가져다주고 불도 켜 줬지만 유정은 그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은지 카이토를 계속 떠나지 못하게 했다. 카이토는 영문도 모르고 계속 붙어 앉아 안경 쓰는 것도 잊고 타자를 두드려대는 유정을 올려다보았다. 문장들로 밤이 깊어갔다.



ep.

‘그 안드로이드는 문득 발아래를 보았다. 참 부드러운 흙이었다. 주인 비운 별장이 겨울을 맞기 위해 죄 삐삐마른 나무들만 옷을 한 벌씩 얻어 입은 앙상한 정원이었다. 안드로이드는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안드로이드는 주인 비운 별장에서 할 일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홍설은 한참동안 그 초고를 읽느라고 조용했다. 카이토는 어제 글을 쓰는 내내 유정에게 붙들려있어서 배터리가 얼마 없어 골골거리고 있었고 유정은 밤을 꼬박 새고 아침이 되자마자 홍설을 호출해서 역시 그로기 상태였다. 홍설은 세 번째 읽은 초고를 덮었다. 작가님 글 안 쓰신다면서요.


“쓰지 말까요?”

“이건 쓰지 말라고 해도 써 오실 것 같은데요?”

“근데 왜 시비에요?”

“약 올라서요. 무슨 바람이 부셨는지는 몰라도 진짜 괜찮네요. 아직 플롯 단계 초고고 프롤로그정도 분량인 걸 감안해도 잘 될 것 같아요. 이렇게 되시면서 왜 안하셨어요?”

“전 안될 줄 알았거든요.”

“하면 되잖아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 건 번개 덕분이지, 하면 된다 덕분은 아닐걸요.”

“그럼 다음에는 제가 유 작가님.. 아니 박 작가님 댁에 피뢰침을 좀 많이 설치해드릴게요.”

“사양하겠습니다.”

“어쨌든 전 이건 일단 넣어두고, 미쳐가려는 편집장님에게 신간 뉘앙스만 살짝 띄워볼게요. 그동안 최대한 분량 뽑아주세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유정은 홍설을 배웅하고 소파에 쓰러졌다. 카이토는 끄으응 소리를 내며 충전기를 꽂으러 갔다. 소설가의 집에 햇볕이 슬쩍 들어와 함께 누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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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ichu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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