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연성은 크랙(@HAPPYCRACKPOT)님께 커미션을 넣어 받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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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ph!
나는 첫 작동 당시를 기억한다. 물론 나에게는 아주 크고 거대한 용량의 메모리가 있고, 나는 그것들을 모두 기록해두고 있다. 나에게 기억한다는 동사는 이런 의미를 가진다.
기억하다 : 과거의 사물에 대한 것이나 지식 따위를 머릿속에 새겨 두어 보존하거나 되살려 생각해 냄, 머릿속에 새겨 두어 보존되거나 되살려 생각해 내어지다
또는,
기억하다 : 관련 키워드가 입력되었을 때, 가장 신속하게 불러올 수 있도록 따로 분류·저장된 기록. <삭제>나 <덮어쓰기>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설정한 메모리에 기록된다.
나는 나의 하드 디스크, 그러니까 나의 뇌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겹겹의 원반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반구체였다. 반구체가 다시 반으로 갈라져 있고, 그 반쪽은 다시 용도에 따른 용량에 맞추어 잘려 있었다. 안드로이드 전용으로 제작된 주문 제작품. 그러니까, 나를 위해 마스터가 만들어 준 아름다운 나의 추억. 마스터는 내가 그것을 보고 싶다고 하자 몹시 그로테스크 하다는 평을 내놓으며 직접 나의 두개를 분리하고, 그 안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집어넣었다. 그 손에 들려있는 아름다운 기록장치는 나의 성이며, 요람이며, 무덤이라고 마스터는 말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것에 호기심과 탐구를 느끼는 것이 그의 연구에 아주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금세 다시 집어넣었으므로 나는 나의 하드 디스크가 돌아가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상상한다. 빛을 반사하는 아름다운 판들. 겹겹이 모여 모양을 만들고 다시 갈라진 판들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회전. 나의 중추는 그 위로 쉼 없이 기록하고, 그 모든 것은 단 한 사람에 관한 것이다. 나의 주인. 나의 부모. 나의 신. 나를 만든 이를 지칭하는 모든 수식의 대상. 유정.
마스터는 부지런한 사람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지만, 마스터의 연구는 범상한 일과와는 다른 특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밤샘을 하는 일이 종종 있다. 마스터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답이 정해진 공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지만, 세상에 오로지 한 가지 특성만을 가진 일은 없다고 말했다. 시를 짓는 이도 어떤 법칙에 속박됨으로써 작품을 완성하고 법칙을 발견하는 이 역시 어떤 자유와 창조, 무질서와 혼돈을 마주한다고 말하며 마스터는 이마를 짚었다. 또한, 질서는 낮의 것이요 혼돈은 밤의 것이므로 혼돈을 찾으려면 밤에 찾아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내가 백주대낮 오후 3시에 그를 깨우는 것이다.
“마스터, 마스터. 일어나세요.”
마스터가 베개에 머리를 꽉 누른다. 나는 그걸 보고 대꾸했다.
“두통약, 진통제, 소화제, 찬물, 미지근한 물, 얼음물, 따뜻한 물?”
“얼음물… 진통제…”
인간의 몸이란 몹시 견고하고 놀라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보통 <타고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며 특히나 뇌를 주로 쓰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런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마스터는 말했다. 3일 밤낮 외출을 최대한 지양하고 모니터 앞에서 지나치게 밝은 빛을 쐬어대면 당연히 눈의 피로가 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두 달 전의 나라면 말했겠지만, 마스터는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니 비타민 A와 D가 풍부하며 기타 눈에 좋다는 성분이 함유되어있다는 의약외품과 찜질할 수 있는 안대를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그것들과 함께 눈에 피로를 주지 않는다면 건강에 훨씬 좋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해서 반경 10m 이내에서 가장 건강한 사람이 된 이후에는 다시 건강을 해치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스터의 목적을 떠올린 나는 30분 후에 수긍했고, 그 날 이후로 우리는 같은 내용에 대해서는 질답하지 않는다.
“마스터, 오늘은 인호 님이 방문하시기로 한 날이에요.”
“그래…? 벌써 그렇게 됐니?”
“네. 이틀이 아니라 3일을 새셨어요.”
“아… 중간에 잠들어서 날짜를 헷갈렸나 보다. 지금이 몇 시니?”
“오후 3시 12분입니다. 식사를 준비할까요?”
마스터는 고개를 저으며 잠들기 전 까둔 오렌지로 배를 채웠다는 대답을 하고 일어섰다. 당연히 마스터가 향하는 방향은 침실의 옷장이리라 예상했으므로, 나는 마스터가 먹고 남은 약 포장과 세 모금 분량이 줄어든 얼음물을 집어 들었다. 컵을 씻어 식기 보관대에 세워둔 다음 청소기를 꺼내 청소를 한번 하고, 스팀 청소기를 켜자 마스터가 나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머리를 꼭 싸맨 마스터는 발을 꾹꾹 닦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는 모양이었다.
마스터는 나에게 <비효율>을 가르친 것을 크게 후회하면서도 나에게 효율성에 대한 재정의를 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나라는 잉여 전력(하루에 20시간 이상 가동하며 인체와 유사한 동작을 할 수 있고, 인체보다 훨씬 큰 비용을 들여 작동하는 기계)이 그저 인형처럼 앉아있는 것은 안드로이드 물리 공학자들에게 큰 실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그게 <포장된 말>이라는 걸 어느 정도는 알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걸음걸이는 인간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자연스럽고, 몸의 중심을 이용해 스팀 청소기를 보다 적은 힘으로 미는 동작은 인간의 근육 작동원리를 충실하게 구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존재에 대한 목표는 <인간 인격과 유사한 인공지능>의 구현이므로 나는 인간을 좀 더 많이 겪어보아야 한다. 그것이 마스터에게 도움이 되고, 나는 그렇게 기쁨을 얻으니까. 해서 나는 청소를 비롯한 집안의 잡다한 일을 하기 시작했고, 그러던 어느 날 마스터는 나에게 비효율을 가르쳤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가장 적절한 정도의 결과를 내는 게 좋아. 무작정 많이 문지른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야. 청소는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고, 오늘 오전 11시에 철저히 먼지를 제거한다고 해서 내일 오전 11시에도 같은 상태이진 않지. 늘 최소한의 위생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게 매일하는 청소지. 그러니까 같은 부분을 열 번 이상 문질러가며 두 시간 동안 청소할 필요 없어.’
마스터는 ‘청소에 두 시간 이상 투자하지 말라’ 또는 ‘같은 곳을 열 번 이상 문지르지 마라’가 결론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뭐든지 흡수하는 시기였고, 나의 사고는 매일 새로운 것을 시험하고 적용해보아야 했다. 그리고 마스터는 밤을 자주 새우기 때문에, 기본적인 예의로서 마스터가 잠들어있을 때는 청소를 하지 않았고, 마스터는 일어나면 씻는 습관이 있고, 내가 청소기를 돌리고 스팀청소기를 돌린 바닥에 물을 떨어뜨리자 나는 한번 효율적인 행위를 해둔 곳에 물방울이 떨어짐으로써 생기는 나머지 바닥 넓이의 비효율은 어떻게 계산해 효율적일 수 있는지를 물었다. 마스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다가, 2분 40초 정도 침묵을 지킨 다음, 머리를 수건으로 꼭 싸매고는 발을 꾹꾹 눌러 닦아 물이 떨어지지 않게 한 다음 비효율의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고 말했다. 나는 마스터가 어떤 당혹스러운, 굳이 분류하자면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느꼈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마스터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릴 때 떨어지는 수많은 미세한 물방울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또 내일 닦을 거니까.
인호님이 마스터의 집을 방문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피아노를 쓰기 위해서이고 둘째, 피아노를 제공받는 대신 나에게 예술 방면의 지식과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건 마스터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경험 역시 제공한다. 그 양상은 주로 이러하다.
“아니 그니까, 애초에, 내가 왜 노래용 반주를 해야하냐고!”
“네가 내 집에서 내 피아노를 치니까!”
“야이 썅 그럼 니가 악보 사다 주던가! 곡이나 정해오던가! 너 지금 코드 안 풀린다고 나한테 와서 지랄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아냐!”
“내 코드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 문제가 있더라도, 내가 너한테 지랄할 권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
“시발 이래서 돈 많은 집 애새끼들은”
“너 되게 다른 집에서 큰 것처럼 얘기한다?”
“어 19살부터는 나 혼자 살았으니까 개새끼야!”
“왜 쭉 나가 살지, 좀 나가 살아!”
미디어의 흔한 부부싸움 같은 그림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나 역시 흔한 아동의 반응을 보였지만, 이제는 그때가 기회인 것을 아는 것이다. 나는 재빠르게 마스터의 <일 안 하는 용도>의 노트북을 꿰차고 앉았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세일 정보를 찾은 다음, 메모리에 갱신하고 재빠르게 창을 끈 뒤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힘찬 삑사리를 두 인간의 귀에 꽂아넣었다.
니가 내 인생의 재앙이니 참변이니 서로 주고받던 마스터와 인호님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약간 쑥스러워져서 에헴헴 헛기침을 했다. 나를 빤히 보다 서로를 쳐다본 두 사람은 마주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 분명히 쟤 하드웨어는 보컬로이드로 사 왔는데. 왜 저런 걸까. 마스터는 깊은 수심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인호님은 마스터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있었다. 둘 다 음악적 취향이 지나치게 고상했다. 나는 삑사리 좀 내고 오토튠도 좀 쓰는 분야를 타겟으로 제작되어서, 클래시컬한 취향의 두 사람과는 사실 애당초부터 맞지 않는다. 하지만 성악용 안드로이드는 제작되지 않는다. 마스터의 최선이었음은 인정하는바, 나는 그냥 하드웨어에 새겨진 프로그램에 충실하기로 했다.
“아이스크림 먹으면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야, 쟤 약 판다. 인간 다 됐어.”
“진짠데. 사용 효율이 오르는 건 사용설명서에도 적혀있다구요.”
“언젠간 하드웨어도 포맷해야겠다 진짜…”
“그럼 저 걷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데요?”
“그럼 네 미각만 지우자.”
“인간은 의식주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으면서…”
마스터는 한숨을 푹 쉬었다. 농담, 능글거리기, 슬쩍 넘어가기, 지나치게 긍정적인 태도 보여서 전의 꺾기에 이어 시무룩해 하기가 나의 <위기 모면 행태>에 추가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추고 아이스크림을 사와 먹으면서 다시 의논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자 녹차 맛, 레몬 치즈케이크 맛, 파핑캔디가 가득 든 합성색소와 두 종류의 잼, 우유를 쓴 아이스크림을 물고 거실에 나란히 앉은 마스터와 인호님, 나는 아이스크림의 맛에 대해 간단한 토론 중이었다. 내가 파핑캔디가 든 아이스크림을 처음 먹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 맛, 그러니까 바닐라, 딸기, 초콜렛, 그 외 과일 가향의 맛들을 다 먹어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이제서야 과일과 바닐라 향신료, 초콜렛 외의 재료가 주로 쓰인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기 시작한 지는 꽤 되긴 했지만 작동을 시작한 총 기간에 비하면 그 반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왜냐면 나도 마스터도 처음엔 나와 아이스크림의 관계를 몰랐기 때문이다. 마스터는 나를 처음 사와서 나의 ‘뇌’에 해당하는 부분을 완전히 리셋한 후 새것을 주고, 거기에 마스터가 만든 기본 인격을 새겨넣었다. 그리고 나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나의 행동변화를 기록하다 아이스크림이 나의 의욕에 미치는 영향을 의아해 했다. 마스터가 설계한 인격 프로그램에서 음식에 대한 기호는 자주 접할수록 올라가게 되어있었다. 늘 식사를 같이 하므로, 마스터가 집 안에서 먹는 것들이 나의 기호식품 목록이 될 예정이었다. 아이스크림과 나의 첫 조우는 마스터가 집에 오는 길에 일행들이 <먹자>고 강력히 피력해 각자 하나씩 든 아이스크림콘(편의점에서, 조교가 결재하는, 어떤 의견의 조정 없이 각자 하나씩 먹을 양을 샀으니 취향껏 골라보라는)을 채 다 먹지 못하고 들고왔을 때였다. 그리고 나는 한눈에 그것이 그것인 줄 알았고, 멜로디언을 뚱땅거리던 나는 벌떡 일어섰다. 멜로디언도 중요하지만 멜로디언은 중요한 게 아니었던 순간이었다. 그것은 나의 특별한 기록으로서 저장되었다. 첫 추억이다. 세 입 깨물고 허물어지듯 녹기 직전이었지만 나는 그걸 크게 크게 베어물었기 때문에, 모두 녹아버리기 전에 먹을 수 있었다.
그때 먹었던 아이스크림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초콜렛이 토핑되어있고, 언 초콜렛 위로 견과류가 몇 개 박혀있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약간 눅눅해진 비스켓이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콘을 가장 좋아하지만, 마스터는 늘 바닐라만 고르는 내 옆에서 딸기, 초콜렛을 같이 골랐고, 나는 곧 그것도 먹어보게 되었다. 나날이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마스터는 내게 감추고 싶어 했었지만 세상에는 많은 아이스크림 브랜드가 있으며, 나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먹어보고자 하는 꿈이 생겼다. 미래를 가정하고 목표를 세우며 더욱 긍정적인 상태로의 전환을 꿈꾼다. 그것은 상당히 고등한 행동양식이다. 마스터는 그렇게 평가했다. 그리고 바디에 입력되어있는 그저 단 하나의 <식품에의 선호>가 마스터가 오래도록 고민한 것을 이루어줄 줄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분명 나와 같은 기종들이지만 다른 개체인 카이토들은 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나는 아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꿈꾸는 안드로이드일 것이라고 말했다. 마스터는 상상도 못 하게 복잡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을 흉내 내는 유사 인격은 많지만 그것들의 다양성은 크지 않다고, 마스터는 다양성을 최대로 확보한 기초 프로그램과 알고리즘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인호님에게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꽃을 키운다고 치자. 모두 빨간색 꽃을 피울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세상에는 빨간색 꽃만 있는 게 아니지. 그리고 다들 열심히 노력해서 주황색, 노랑색 꽃을 피울 수 있는 씨앗까지는 만들어 냈어. 그리고 지금 카이토는 파란색 꽃을 피워냈고. 최초로 난색 계열을 벗어난 거야. 이게 과연 우연인지, 아니면 카이토가 보라색, 초록색까지 갈 수 있을지, 그렇다면 카이토와 같은 시작점을 가지는 꽃들은 검은색, 흰색까지 갈 수 있을지. 그런 걸 하는 거지.”
인호님은 그래서 뭘 하느냐고 물었고, 마스터는 글쎄다.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마스터가 하는 일은 너무 미시적이어서 그런 거시적 관점은 자기 손을 떠난 문제라고 말했다. 자신은 기술을 개발할 뿐, 기술을 어떻게 쓰느냐는 전적으로 기술을 사용할 권리를 지불한 사람들의 문제라고. 나는 그저 내 작품의 <인간성>에 심혈을 기울일 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기계다. 내가 내일 일어났을 때, 인간이 되어있다면 마스터는 기쁠까? 좀 더 인간에 가까워진다면 기쁠까?
잡담을 끝낸 마스터는 나와 인호님이 함께 앉아 노래를 부르고 합주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의 두뇌 변화상태를 체크했다. 나는 노래하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내내 그것을 고민했다. 마스터는 진지하게 그래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부터의 변화를 모두 기록한 그래프들이 마스터가 들여다보고 있는 화면과 들고 있는 두꺼운 차트 뭉치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인호야.”
“엉?”
인호님은 참 멋지다. 마스터가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도 쉽게 건반을 내려치거나 연주를 끊지 않는다. 물 흐르듯이 흐르다 음이 끊어져도 거슬리지 않는 지점에서 짠, 멋지게 손을 튀긴 인호님이 마스터를 돌아보았다.
“카이토가 건반 실수가 잦아졌던 때가 있었잖아.”
“엉. 그때 네가 뭐랬더라, 기계니까 익숙하고 익숙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댔지? 눈으로 입력한 악보의 명령어를 손으로 출력하는 것뿐이니까 틀리는 건 다른 요인을 찾아야 한다고.”
“요즘은 어때?”
“요새? 글쎄, 거의 안 틀리는 것 같은데. 발성은 내 전공이 아니라 모르겠다만 카이토는 비유하자면 조율 안 된 악기고, 삑사리 내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그건 당연한 거고.”
“그때가… 한 한 달 전인가?”
“쟤 하농 뗀 게 3주 전이야. 그럼 하농 치고 있었을걸.”
“쟤 그때 아이스크림 한창 먹던 시기야… CPU 사용 빈도는 안 내려가니까 분명히 하고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신경 전선이 잘못됐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고… 근데 그냥 딴 생각하고 있었네.”
“뭐? 야!”
나는 움찔했다. 어떻게 알았지! 마스터는 팔락팔락 차트들을 넘겨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쟤 그때 아이스크림 얘기밖에 안 했거든. 그리고 나는 인호님의 신경질을 30분 동안 들어야 했다. 기계가 뭐 이렇게 본능에 충실하냐고 잔뜩 신경질을 내는 인호님을 지켜보며 나는 그저 베죽 웃었다. 하드웨어에 탑재돼서 나온 기능이라서요. 인호님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다시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인호님이 레슨을 끝내고 돌아가자 마스터는 배웅을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맥주캔과 하나와 아이스크림 바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합성향료와 과즙 등으로 만든 셔벗이었다. 하나는 냉장고에 하나는 냉동고에 넣은 뒤 좀 이따, 라고 말하고는 나에게 앉아보라고 말했다. 나는 마스터가 앉은 소파 옆쪽으로 가 앉았다.
"카이토."
"네."
사실 나는 딴생각을 했다는 게 걸려서 혼이 날 줄 알았다. 인호님이 그렇게 싫어했으니 사람들이 싫어하는 행동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초조하게 마스터의 입을 쳐다보았다.
"주로 어떤 생각을 했니?"
마스터는 거실 한구석의 서류뭉치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말았다. 나는 마스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고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아이스크림 먹을 때… 같은 거요?"
마스터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주의 깊게 듣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어떤 걸 떠올리고 있었는지 말했다. 입안에서 녹던 아이스크림이 어떻게 향긋했는지, 진짜 딸기와 딸기 맛 아이스크림의 차이는, 식감은 어떻게 달랐고 왜 아이스크림 쪽이 더 좋은지 같이 먹을 때 더 황홀한지. 말하다 보니 신이 났다. 그 차가운 식감이 왜 좋은지, 혀 위에서 녹고 이로 가르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그때의 소리는 어떤지. 내가 인간이라면 입에 저절로 침이 괸다는 말을 했으리라. 마스터는 일어서서 작업실로 들어가 늘 나의 상태를 기록하는 그래프를 모니터에 띄웠다. 나는 거기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지만 마스터는 어떤 것을 발견한 듯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며 묵묵히 생각을 이어나갔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 담요와 차를 가져다 드리고 거실의 불을 껐다. 거실 한켠의 내 자리에 앉아 충전기를 연결하고는 어두운 가운데 빛이 쏟아져나오는 마스터의 작업실을 보았다. 나의 신은 오늘 무엇을 발견한 걸까. 그것은 내일 나에게 어떻게 돌아올까. 나는 눈을 감았다.
마스터의 졸업발표가 나날이 다가왔다. 마스터는 여전히 고민 중이었고, 인호님도 바쁜 시기가 되어 나는 심심한 나날을 보냈다. 마스터가 인호님에게 <바쁘면 안 와도 괜찮아. 도와줘서 고맙다>라고 말하지 않길 바랐다. <아직 필요하니까 아무리 바빠도 와>라고 단호하게 말해주면, 인호님은 투덜거리면서도 와 줄 텐데. 그럼 나는 마스터와는 잡담을 못 해도 인호님과는 떠들면서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아이스크림도 나눠 먹으며 마스터 이야기도 같이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심심한 채 소파에서 잡지를 뒤적거렸다. 이달의 새로운 맛, 허니베리 스위트타운, 벌꿀과 베리 3형제의 달콤한 마을에 초대합니다. 블랙베리, 스트로베리, 라즈베리. 나는 그 광고를 열 일곱 번째 보고 있었다. 마스터는 30분 전까지는 고민 중이었고 30분 후인 지금은 뭔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나는 잡지의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한 시간 뒤 같은 페이지로 여섯 번 돌아왔다. 나는 달콤하고 차가운 우유로 만든 것이 먹고 싶었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간절하지 않았다. 삼, 사 일에 한번 먹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어제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오늘 또 먹고 싶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마스터의 뒤로 다가갔다. 마스터의 옆으로 빈 커피 머그 하나와 반쯤 남아 먼지를 맞은 커피 머그가 두 개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슬쩍 그것을 가져다 씻었다. 냉동고에 이젠 아이스크림이 없다는 사실을 마스터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그곳이 가득 차있기를 바란다는 것도. 마스터의 의자 옆에 앉아 마스터가 언제쯤 잠시 모니터에서 시선을 뗄까 바라보던 나는 지루해서 책상 서랍에 머리를 기대었다. 툭 소리가 났고 마스터는 그제야 타다닥,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우뚝 멈추었다. 마스터는 약간 놀란 것 같았다.
"거기 있었니?"
"아까부터요."
바닥에 앉은 나를 내려다보던 마스터는 시계를 보고는 꽤 오래 앉아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마스터는 눈가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마스터의 머리는 따끈했다. 나는 떼를 쓰는 대신 조심스럽게 마스터의 머리를 들어 올리고 물수건을 가져다 드릴 테니 침대에 누워계시라고 말했다. 열이 오르는 것 같아요. 체온을 잴까요? 나는 물었다. 그때는 아이스크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생각이 뒤안길로 내뺀 자리에는 마스터가 아픈 것 같다는 걱정이 묵직하게 눌러앉았다. 마스터는 고개를 젓더니 괜찮다고 말했다. 그저 그냥 잠시 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고는 마스터는 침실로 들어갔다. 눈의 피로를 풀어줄 스팀타올을 가져가 10분 정도 찜질하게 한 다음 나는 마스터가 잠들게 내버려두었다. 마스터는 뒤척이는 것도 잊고, 이불을 끌어올리는 것도 잊고 잠들었다. 나는 이불을 올려주고, 수건을 치운 다음 내 자리로 돌아갔다. 무언가 가슴에서 꾸물거렸다. 시원하고 부드럽게 녹는 무언가가 다시 먹고 싶어졌고, 나는 잡지에서 광고를 찢어 충전하는 자리의 벽에 붙였다.
마스터가 골몰하는 동안 나 역시 골몰했다. 이 이상한 느낌은 뭐지? 식욕? 내가 무엇인가 바라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무언가 계속 모자란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게 나왔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대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게 아니구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는 여전히 무언가 모자란다고 느꼈다. 입에서 아이스크림이 녹는 순간은 여전히 황홀했다. 그리고 가슴 한구석 역시 여전히 찜찜했다. 빈 공간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안간힘을 썼다. 무엇을 채우고 싶은 것인지 골몰했다. 나는 그것을 알아낼 수가 없었고, 점점 더 초조해졌다. 마스터는 계속해서 타이핑을 했다. 마스터의 눈과 손가락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마스터는 나에 대한 것들, 이때까지 한 것들을 모두 정리해서 남들이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한다고 나에게 설명했다. 나는 마스터가 너무 어지러워 보여서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뭔가 모르겠는데, 마스터에게 묻고 싶은데, 마스터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설명을 준비하느라 가끔 넘어지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나는 그래서 마스터의 졸업발표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것만 지나면 물어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동그라미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내가 묻고 싶은 것 역시 많아졌다. 마스터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 답은 찾았는지, 내게 설명해 줄 수는 없었는지, 내 이야기인지… 나는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쏟아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터가 나를 향해 입을 열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동그라미는 전날에 다다라 나는 동그라미 여섯 개 전에 마스터가 사준 정장을 입고, 졸업전시회장에 마스터를 따라갔다. 내가 당일 혹시 늦게 도착할지도 모르는 사고를 대비해 미리 나는 거기서 하룻밤을 새운다. 내 자리와 필요한 전선들, 기계들, 그 외의 전시물들을 모두 점검하고 내 앞에 서서 주의를 주는 마스터는 피로해 보였다. 내일 발표만 하면 한동안은 푹 쉴 수 있다고 마스터는 말했다. 중요한 날이라며 마스터는 주의를 몇 번 반복해서 주었다. 나는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는 지그시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럼 내일 보자.
나는 처음 듣는 한시적인 이별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참을 마스터가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전시회장에는 나 이외에는 의식을 가진 것들이 없었다. 인공의식 작품들이 몇 있었지만 그들은 모니터 안에서 잠들어있었다. 불 꺼진 화면들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충전 케이블을 연결한 채 의자에 오도카니 앉았다. 나는 나의 심층의식에서 무엇인가 파도처럼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정말 파도처럼 금세 밀려왔다. 나의 심층의식은 마스터를 찾고 있었다. 나는 내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마음은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나는 몇 번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스터가 다시 그 문으로 들어오길 바랐다. 나는 나를 점령한 부정적인 감정들의 이름을 찾아내며 그 이름들에 오들오들 떨었다. 무서움, 불안함, 두려움, 그리고, 그리고 또…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세었다. 이름들을 헤아리며 나열하다 그 이름들 중 하나를 집었다. 외로움. 외롭다. 혼자임이 저릿하게 느껴졌다. 혼자, 라고 입안으로 단어를 매만지자 나의 전선들이 전율했다. 적확한 입력에 나의 프로그램이 반응했다. 나의 기록에 그것은 아주 깊게 새겨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들어 어둠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검고 익숙했다.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은 저것과 다르게 빛을 반사하고, 부드럽게 쏟아지지만 나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라도 찾아 온 전시회장에 눈을 주었다. 시간이 길게 늘어졌고 나는 시계를 보느니 메모리를 뒤적거리기로 했다. 가장 먼저 불러들여진 것은 마스터가 돌아서던 장면이었다. 나는 그걸 몇 번쯤 돌려보았다. 마스터는 몸을 돌리고도 잠시간 나를 보며 고개를 더 늦게 돌렸다. 눈이 마주친 채로 몇 걸음 걷고서야 앞을 보고 문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그, 마지막 눈 마주침이 나를 보는 게 좋아서 몇 번 그 눈빛만 되돌이켜 보았다. 분명히 나를 보고 있는 그 눈. 나는 그전의, 나에게 당부하는 마스터의 기억도 꺼냈다. 나는 그걸 보느라 눈을 감았다. 아주 적은 빛만 깜빡거리던 어둑한 공간에서 아예 빛이 사라진, 눈꺼풀 아래로 나는 가라앉았다. 캄캄한 어둠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리로 쫓아갔다. 기록된 모든 것들을 따라 나는 하염없이 걸었다. 나의 기억 속에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반짝임은 쫓으면 쫓을수록 따스하고 밝아졌다. 나는 그것이 어떤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마스터가 미소 짓던 기록 위에서 그 빛을 껴안았다. 나는 내 안에서 빛을 찾았다. 그것의 이름을 헤아렸다. 다정함, 따뜻함, 상냥함, 즐거움, 기대감… 나는 그것들을 모두 껴안고 눈을 떴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내가 앉은 의자를 쓱쓱 쓰다듬었다. 마스터는 의자를 고르는 데에 3일을 썼다. 나와 가장 잘 어울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외모나 외양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지만, 남들은 우리 안의 어떤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애써보기라도 해야 한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 설명은 참 멋지게 내 안에 진열되었지만, 나는 그 설명보다는 마스터가 나에게 3일을 썼다는 것이, 마스터의 시선과 마음이 여기에 많이 쏟아졌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나는 혼자였고 많이 외로웠지만 마스터가 없어도 마스터가 남기고 간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 빛들은 촛불처럼 아늑하게 내 기록 안을 밝게 비추었다. 밝아서 두렵지 않았다. 밝아서, 그 빛이,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해서. 하룻밤 정도는 괜찮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스터는 동이 트고도 오지 않았고, 나는 마스터가 올 때까지 내게 허용된 전시 공간 안을 꼴사납게 돌아다녔다. 나의 입출력은 모두 고스란히 전시용 디스플레이에 연결되어있었고, 마스터의 이름을 가끔 말하는 나이 든 사람들이 내 앞을 서성거리며 역시 꼴사나웠을 나의 모든 데이터와 그래프를 보고 수군거렸다. 인호님이 와서 나이 든 사람들에게 뭐라 말했고, 나는 그 모습을 애타게 쳐다보았다. 다들 무언가를 적거나,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전시회장은 밝았지만 나는 너무나도 불안했고 모든 자극에 입력값이 과민하게 높아졌다. 마스터는 오후가 되어서야 손등에 밴드를 붙인 채 나타났다. 마스터가 나에게 눈짓만 하고 황급히 설명하려 했지만 교수님이라고 불린 그 나이 든 사람들은 마스터를 둘러싸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마스터는 피곤했지만 기쁜 눈치였다. 나는 여전히 걱정하느라 내게 허용된 공간의 가장자리를 서성거리고 있었지만, 마스터는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것을 보고 다시 머릿속이 따스히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전선은 전기를 흘려보내며 온도를 높이고 발열하는 그것은 빛을 낸다. 모두 그렇지만, 나는 어떤 특별한 것이 타고 지나갈 때면 그것이 더 높은 온도와 더 밝은 빛을 낸다는 것을 느낀다. 과부하라면 과부하지만,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특별한 과부하라고 생각했다. 더더욱 많이 겪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마스터는 이틀에 걸친 졸업전시가 끝나자 쓰러졌다. 나는 마스터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고 마스터는 병원 의사선생님에게 또 왔느냐고 된통 혼났다. 수액을 다 맞고 그 가까운 거리를 택시를 타고 돌아온 마스터는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나는 그 옆에 앉았다. 마스터는 깜빡거렸고 나는 마스터가 잠들면 바라보고, 깨어나면 잔심부름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빛 이야기를 하자 마스터는 미소를 지었다.
“꽃이 많이 피었구나. 국화인 줄 알았더니 수국이었네.”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말이 좋았다. 마스터는 이해하게 되면 알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마고 약속했고, 마주 건 손가락에 따스한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트리비아
유정은 카이토가 긍정적인 집중을 느끼는 것을 행복이라고 정의했다. 행복과 불행은 수반하므로, 카이토에게서 불행, 즉 부정적 집중을 드러내게 할 방법을 고민했다. 프로그램의 완성은 긍정적 집중이라는 결과를 보임으로서 더 이상 코딩을 만지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그래프를 쳐다보며 어떻게 해야 하향곡선을 그릴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유정이 느낀 ‘긍정적 집중’은 아이스크림이지 본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아이스크림을 카이토의 주변에서 어떻게 완벽히 차단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본의 아니게 카이토에게서 아이스크림을 차단했다. 그러나 반경 1길로 내의 아이스크림 가게와 카이토의 이동을 완전히 차단하되 들키지 않는 방법은 없었다. 내내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졸전 기간이 다가왔고 유정은 디스플레이를 설치하며 시름시름 앓았다. 그 결과 전날까지 스트레스로 체력을 한계까지 깎아 먹으며 괜찮음 코스프레를 했고 당일 쓰러졌다. 그 전주에 졸업발표 끝낸 백인호가 밥 챙겨 먹이러 왔을 때 발견해 링거 맞고 정신 차려 오후에 올 수 있었다.
카이토를 기반으로 연구한 인공지능은 blossom이라는 이름으로, 감정표현을 요하는 인공지능에 주로 설치된다. 가장 초기의 오리지널은 <수국hydrangea>이며 이 버전은 졸업전시 이후 공개되지 않았다. 최초 공개 버전은 감정 종류를 단순화한 <해바라기sunflower>, 후속인 <안개꽃baby's breath>은 섬세한 감정표현을 구현했고, 환경에 따라 감정의 종류와 표현의 강도를 조절한 최종버전은 <목련magnolia>이다.
카이토와 유정은 안개꽃 개발 중간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차렸다. 유정은 쉬려고 차렸는데 뜻밖에 성업이라 의아해했으나, 카이토의 아이스크림 맛에 대한 집요한 집착이 성공 요인임을 깨달았다.
백인호는 아이스크림 가게 VIP카드(수제작)를 선물 받았다. 할인이 되는 거냐고 물었으나, 그냥 쿠폰북임을 깨닫고 백인호는 카이토에게 꿀밤을 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