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목소리



가벼운 피아노곡을 상자에서 골라 CD 플레이어에 넣었다. 하루의 기분에 따라 곡은 재즈 피아노가 되기도 하고, 바이올린 협주곡, 혹은 먼 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 

우울한 날에는 오히려 밝은 곡을 들었다. 가라앉은 기분에서도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작게나마 지각하며. 나의 세계는 작고, 주인공이 아니라는 당연한 이치를

 고등학생인 내가 실감하기 위한 장치로 유용하다. 침대에 누워 작고 갈색 털을 가진 고양이가 바이올린에서 이리저리 공을 굴리며 장난치는 상상을 펼쳤다. 

불안을 떨어뜨리기 위해 내가 가진 방법이다. 콩쿠르가 며칠 남지 않았고, 나와 함께 팀을 만든 세 명은 이리저리 알던 사이로, 한 팀이 된 이후로 사이는 더욱 좋아진 참이다. 

목련 음악원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수준급의 음악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실력이란 주관적이다. 언제나 수준급의 연주를 할 수 있다면 그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귀신이 잠시 들른 것이다. 

독주와 합주는 시작점부터 또 다른 갈래이다. 연주하는 기본이 달라진다. 나는 팀을 구성하기 위해 선생님께 신청서를 제출하러 갔을때, 망설이고 있었다. 

3학년은 이미 진로가 결정되어 필요한 외부대회를 준비하거나 해외 대학으로 유학 가는 게 보통이지, 교내 콩쿠르는 학창시절의 활동이자 추억 정도려나. 그렇지만 나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모두가 환호하는 무대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멋진 연주를 하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멋있잖아. 음악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을 때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내가 바이올린을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성당에서 울리는 평화롭고 환상적인 찬송가가 합주되는 장면에 나 또한 멜로디에 감싸여 새로운 세계의 한 페이지를 잠깐 엿보게 되었고, 

그 순간을 잊지 못해 바이올린 활을 잡았다. 1학년때에는 예선 탈락. 2학년때에는 용기부족. 어영부영 지나온 시간 또한 음과 색과 의미는 있다. 내가 신청서를 쓰기 위해 고민한 밤들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교무실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어쩌겠는가. 나는 그저 평범한 실력의 음악원 학생 한 명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때 나에게,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명도, 방송부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선명하고 상냥하게 유혹해왔다. 어서 신청서를 내. 거기에 이 이름을 적는 건 어때? 

이어지는 세 명의 이름은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A와 C. 2학년과 B는 1학년이었다. 눈동자를 떼구루루 굴리다 목소리에 홀린 듯 원하는 지명자에 이름을 적었다. 

신청서를 본 선생님은 웃으며 장하다는 얼굴을 하셨다. 제1 바이올린은 와인 병의 라벨, 제2 바이올린은 와인병의 코르크, 비올라는 와인, 첼로는 와인을 담는 유리병. 

콰르텟을 준비하는 팀에게 늘 해주는 조언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비올라와 첼로를 감싸 안아 하나의 하모니로 나아가는 코르크가 되겠다고 기대감에 호기 어린 대답을 다짐했다. 

네 악기로 만들어진 배가 음표와 꽃잎의 바다를 항해하는 모험을 상상해본다. 바다는 오선지. 헤엄치는 음악 기호, 그 속의 네 사람. 그리고 나.



연습이 이어지고 콩쿠르 일자가 가까워져 올수록 고민은 깊어진다. 친구들에게 나의 비밀을 말해야만 할까? 

돈독한 친구가 콰르텟을 위한 필수조건도 아니었으며, 완전히 비밀 없는 사이가 돈독한 친구의 조건도 아니다. 콰르텟은 즐거웠다. 

우리는 즐거운 연주를 하자고 팀을 결성하는 봄날에 다짐했다. 실수가 있으면 오히려 웃었다. 방과 후 시간을 대부분 할애하여 연습하고 있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 비밀을 가지고 콩쿠르에서 우승한다고 해도 석연찮은 기분으로 졸업할 수밖에 없다. 어딘가 마음 한켠이 무거워지는 것도 이 즐거움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세계의 목소리가 들린다. 소곤거리기도, 가끔은 지시를 내리기도 한다. 신청서를 낼 때처럼. 혹은 오늘은 이런 풍의 곡을 연주해보는 건 어때. 하는 제안. 

잠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왜? 하고. 하지만 그 목소리는 달콤하기도, 매혹적이기도, 그리고 망설일 때는 묘한 압박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늘 성공적이었다. 조종당하는 걸까? 

내 머릿속의 목소리는 호의적이지만. 그건 대체 무엇일까. 학원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 찾아보았다. 환청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지만 나는 그것을 요정이나 세계를 연주하는 신의 목소리라 여기기로 했다. 

천재들이 곡을 쓸 때면 그런다지. 누군가 와서 속삭인다고. 

저, 오늘은 노래하듯이 칸타빌레로 어때. 용기를 낸 나의 제안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면 어디선가 조용히 작은 나무토막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나에게만 들리겠지. 부모님께 말하지 않았느냐면. 난 부모님의 얼굴은 알지 못하고 학교 근처 성당의 수녀님이 거둬서 키워주셨다. 

마리아 수녀님은 음악원에 종교음악 수업을 나가실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으신 데다 연고 없는 어린 나에게 바이올린을 선물해주신, 성자의 화신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분으로 

내가 콩쿠르에 나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일 새벽 기도를 올리고 계시니 더는 걱정 끼칠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이해 바란다. 

그분들은 지나가는 낙엽을 쓸어넘기면서도 찬송가를 부르고, 하느님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분들이시니. 

침대 옆에 다림질해둔 교복을 걸어두고, 자기 전 마지막으로 바이올린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바이올린을 살 때를 기억한다. 

2학년의 봄. 연습용으로 선물 받았던 바이올린에 남겨진 손자국과 내 어깨, 목의 모양과 맞춰진 턱받침이라든지. 감상으로는 버리지 않고 장식해두고 싶었다. 

음악원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방문한 적 있는 S의 악기 가게에 들어서자 진한 나무와 송진향이 물씬 풍겨왔다. 아무런 음악이 들리지 않아도 향기로서 음악이 느껴졌다. 

시간과 사람들의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길거리의 소음마저 무작위로 탭댄스를 추는 것 처럼. 그런 마법적인 순간이 나에게도 가끔은 찾아오는 것이다. 거기서 만났을까. 좋게 말하자면 음악의 요정. 




***




봄의 어느 날, 음악의 요정은 친구들이랑 거리에서 즉흥 공연을 해보는 건 어때. 달콤한 유혹을 속삭였다. 꽃이 만발한 4월에 연습실에서 박혀 있으면 따분하잖아. 

나는 그게 마냥 내 제안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졸업 전 마지막 추억이란 레파토리를 반복하며, 세 사람과 함께 음악원 근처의 거리로 나아갔다. 얼굴을 마주보면 슬며시 미소가 터져 나왔다. 

서로의 악기 케이스를 어깨에 매고 학교 밖으로 나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따스한 바람이 불어 학교 앞 커다란 벚꽃 나무에서 작고 하얀 꽃잎들이 천천히 흔들린다. 

사르락 거리는 그 소리마저 음악으로 들리네. 누군가의 들뜬 목소리에 나는 악기 케이스를 열었다. 이 장면이야. 그거야. 세계의 기쁜 목소리를 들으며. 

제법 연습이 잘 되어 연습곡인 하이든의 콰르텟을 연주했다. 녹음할걸. 아쉬운 생각이 활을 내려놓자 떠오른다. 지나가던 행인 두 사람이 손뼉을 치며 너희 목련 음악원 학생들이니? 하고 말을 걸어왔다. 

교복을 보면 그렇지 않겠어요! A는 자신의 첼로를 잡고 춤을 추듯 한 바퀴 돌리고, 우리는 악기를 잡고 무대의 관객들에게 인사하듯 무릎을 까딱였다. 

그리고는 과일 타르트가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테이블 가득 제철과일로 만든 타르트 여럿과 오렌지 필링이 뿌려진 파운드 케이크, 따뜻한 밀크티, 밀크쉐이크를 마셨다. 

콩쿨에서 상을 타면 그 돈으로 한정판인 블루베리자두 타르트를 하나 전부 사먹자는 제안을 B가 남은 크림을 포크로 긁어먹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포크 네개를 악기활 처럼 잡고 하나로 모았다. 

그것은 우리만의 힘내는 방식이었다.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고, 네 사람이 모인 연습실은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첼로를 연주하는 A와 제 1 바이올린인 C가 악기를 튜닝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악보를 넘기는 소리에 눈을 느리게 깜빡이자 A가 작게 손을 마주쳤다. 

자아, A가 입을 열자 분위기가 잘려나가 작은 숨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이 콩쿨이지요."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일이 콩쿨이라는 기대감때문일까. 그 전에는 모두에게 내 비밀을 말하리라 며칠 밤 다짐했지만. 

어떤것이 옳은 선택일지 알 수 없었다. 이제와서 이상한 애 취급 받기도 곤란하고. 눈에 튀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콰르텟을 만드는게 나에게도 좋은 일이 었을지도 모른다. 

다들 힘내자. C가 특기인 눈을 접은 웃음을 보였다. 이것도 비밀이지만, 난 그 웃음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세계의 목소리가 C의 이름을 말했을때 하늘을 보고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있자면 나와는 다른 세계가 온전히 느껴졌다. 악보를 조금 틀리더라도 주관을 담은 연주였다. 

그 세계에 녹아들고, 네 개의 다른 현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하나의 음악이 되는 순간을 느낄 때면 작게 서로의 눈을 보고 웃었다. 

빛나는 무대는 우리가 있는 이 장소. 영화 속의 장면처럼 밝은 피아노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세계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여 나의 등을 살짝 밀어주었다. 

지금이 생각했던 그 대사를 말할 때라고. 나는 입을 열었다. 

 

“내일 우리는 할 수 있을 거야. 세계가 우릴 응원하고 있어.”


나의 진지한 표정과 짠 듯한 대사를 들은 세 사람은 오히려 긴장이 풀린 듯, 웃으며 키득거린다. 


“그럼요. 연습 그렇게 많이 했잖아요!”

“맞아. 선배가 가장 긴장하고 있어요. 표정 좀 봐.”

“힘내자란 뜻으로 달콤한 케이크라도 먹고 갈까요? 딸기 케이크?”


우리는 다시 손에 든 활을 가운데로 모으고 하나, 둘, 셋. 하는 함성을 외치며 위로 선뜻 올렸다. 같은마음 이겠지. 

함께 멋진 콰르텟을 연주해서, 콩쿠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들자고.  

그게 우리가 만든 콰르텟이고, 내 음악원 생활의 마지막 빛나는 조각이다.



같은 룰로쓴 같은 주제의 연성이라 같이 넣어봄







Posted by michu615
,